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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관백'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07.12.22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2- (3)
  2. 2007.12.14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1- (12)
  3. 2007.12.09 살생관백(殺生関白)-7- (10)
  4. 2007.11.30 살생관백(殺生関白)-6- (5)
  5. 2007.11.24 살생관백(殺生関白)-5-

二.

 조선 출병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16살의 곤츄우나곤[権中納言]은 이미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로 내려간 히데요시를 뒤따르기 위해서, 새로 하사 받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亀山城]에서 준비 중이었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이 행군에 특히 총애하던 요도도노[淀殿] 한 명만을 데려갔다. 많은 측실 중에서 특히 요도도노가 선택된 것은,

 “저번 오다와라 공략전[小田原の陣[각주:1]] 때 요도[淀] 녀석과 함께 하여 바라던 대로 승리를 얻었다. 요도 녀석은 이젠 전장(戰場)의 길례(吉例)이다”

 며 다른 측실의 질투를 막고자 하는 의미도 있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요도도노에게서는 자기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가 접한 수 많은 여성들 중 요도도노만이 히데요시의 아이를 낳았다. 츠루마츠[鶴松]였다. 이 츠루마츠는 안타깝게도 일찍 죽어지만 다시 한번 임신할 수도 있는 법. 이 희망이 히데요시에게 요도도노를 함께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음 해인 1593년 3월에 히젠 나고야로 향하였는데 오오사카[大坂]를 출발함에 앞서 양어머니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 성으로 갔다. 17살 때였다.

 “수고하는구나”

 키타노만도코로는 그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누구를 만나건 계속 미소를 띄우는 이 여성이, 킨고츄우나곤 히데아키에 대해서만은 미소를 보이는 것 자체가 드물었고 이때도 역시 입술을 조금만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히데아키가 가진, 살아있는 생물의 추잡함이 배어 나오는 끈적끈적한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런 주제에 히데아키에게는 뻔뻔함이 없었다. 두꺼운 얼굴로 양어머니에게 비위를 맞추면 좋을텐데, 그녀가 안 좋은 기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자 갑자기 겁먹은 강아지마냥 꼬리를 말고 불쌍한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이 표정이 반대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비위를 더욱 더 상하게 만들었다.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힘이 들어가 더욱 더 찡그리는 얼굴을 만들어 버렸다.

 옆에 있던 히데아키의 수하는 조마조마했다.
 이 즈음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가신(家臣) 중 한명인 야마구치 겐바노카미 마사히로[山口 玄蕃頭 正弘]가 스승을 겸한 부속 가로(家老)가 되어 있었다. 야마구치 마사히로는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히데요시가 오우미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를 하던 때부터 섬겼으며 전쟁터에서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데도 밝아 히데요시의 가장 중요한 토지 정책이었던 소위 태합 검지(太閤 検地[각주:2])의 실무 담당자로서 이름을 높였다. 백성을 잘 다스렸던 만큼 세상 물정에 밝았고 처세에 능했다.
 앞으로 나가서는,

 “키타노만도코로님. 실례입니다만 킨고님에게 여행 떠나는 석별(惜別)의 말씀이라도 받고자 합니다”

 라고 히데아키를 대신하여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이다. 토요토미 가문의 자식이 전쟁터로 떠난다고 하는데 양어머니가 이래서만은 안 되었다.

 “그런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히젠[肥前]에서는 마시는 물에 신경을 쓰시길”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당연히 이런 경우라면 통례인 여행길에 쓰라고 주는 선물도 없었다. 히데아키는 면목을 잃은 채 성을 나섰다.

 히젠 나고야에 도착한 것은 3월 22일이었다.
 히데아키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나고야 성에 입성하여 양아버지인 히데요시를
알현(謁見)했다.
 히데요시는 히데아키가 몸에 건친 갑옷의 화려함에 대단히 만족하였다.

 “출발에 앞서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받았나 보구나”

 라고 기분 좋은 듯 물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라 하였다. 히데요시는 어느 정도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기분은 어떠시던가?”

 하고 야마구치 마사히로에게 물었다. 마사히로는 정직히 그 모습을 전했다.

 “허허~ 길 떠나는 자식에게 두 마디뿐인가”

 히데요시는 웃으면서 끄덕거렸지만 내심 당혹스러웠다. 히데츠구[秀次]에게 만일의 일이라도 있을 시에는 히데아키를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로 세워야 하는데도 양어미라는 처의 태도가 좋지 않았다.
 -당신은 잘못했네
 하고 질책하는 뜻을 담은 편지를 곧바로 오오사카(大坂)의 처에게 보냈다.

킨고는 22일에 나고야에 도착하였소.
수하들도 많이 동원해 왔으며, 거기에 행장(行裝)도 화려해서 나는 칭찬을 해 주었네.
히데아키가 오오사카에 고별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당신은 기분이 나쁜 듯한 표정을 지었고 필요한 도구들도 준비해서 주지도 않았다고 하더군. 왜 그러하였는가?
당신에게는 자식이 없네. 저 아이를 귀여워하지 않고 어느 자식을 귀여워하려고 하는가?
킨고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에 따라 나는 저 아이에게 나의 은거료(隱居料[각주:3])를 주려고 생각하고 있네.[각주:4]
그 정도로 이 히데요시가 생각하고 있을 정도이니까, 당신도 너무 구두쇠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오.
라 써서 보냈다.

 하지만 그날부터 2개월도 지나지 않았을 때 토요토미 가문의 사정이 변했다. 요도도노가 임신을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뻐했다.
 이 기쁨을 곧바로 오오사카의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써 보냈지만 내용이 미묘했다.

요즘 감기에 조금 걸려서 붓을 들지 않았네.
지금은 나아져, 이 편지는 나아서 처음 붓을 들어서 쓰는 것이네
 즉, 붓으로 뭘 쓸 때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일 먼저 쓴다는 것을 말하며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리고……
라고 덧붙여서 쓰는 듯이 히데요시는 썼다.
니노마루도노[二の丸殿=요도도노]가 임신했다고 들었네.
고 남 이야기하는 듯 말했다.
경사스러운 일이긴 한데 이 히데요시는 아이가 필요하지 않네. 정말 필요하지 않아. 당신도 그런 생각으로 이 타이코우[太閤]를 이해해주시게.
하긴 이 하데요시에게 아이는 있었지. 츠루마츠[鶴松]라는. 그건 다른 집에 주었지.[각주:5]
그러니 이번 아이는 히데요시의 아이가 아니네. ‘니노마루도노’만의 아이이네
히데요시는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런 말돌리기를 하였지만 물론 본심이 아니었다. 다만 이 이상한 논리의 뒤에는 당시의 미신과 관계가 있다.
- 내 아이가 아니다. 주워온 아이다
 이러면 아이가 건강히 자란다고 한다. 죽은 츠루마츠가 태어났을 때의 이름을 버린 아이라는 뜻으로 ‘스테[捨]’라고 하였다. 이번에 태어난 아이는 머지않아 ‘히데요리[秀頼]’가 되지만, 태어났을 때는 주워 온 아이라는 뜻으로 ‘히로이[拾]’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미신을, 즉 요도도노 한 사람만의 아이라는 것을 신불(神仏)에게 강조하기 위해서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나고야 성[名護屋城]에서 내보네 야마시로[山城]의 요도 성[淀城]으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두번 째 성곽[二の丸=니노마루]로 거처를 옮겨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해의 8월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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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는 기뻐서 사람들이 ‘이제는 미치신 건가’하고 걱정할 정도로 날뛰었다.
 이 천재도 이 즈음부터는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노망기(老妄氣)가 들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원정군의 지휘를 내던져둔 채 나고야 성을 나와 오오사카로 돌아왔다. 그 사이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편지를 보내어,

쌓인 이야기라도 함께 하세
라고 써서 보냈으며 요도도노에게도,
거듭거듭 말하지만 히로이에게는 젖을 잘 먹이거라. 젖이 많이 나오도록 너도 밥을 많이 먹어라. 또한 여러가지 신경을 쓰면 젖이 잘 안 나오니 신경 쓰지 않도록 해라
라 써 보냈다. 거기에 한 번 더,
건강을 위해서 을 받거라. 단, 히로이에게 뜸은 필요 없다. 엄마(요도도노)가 해 주어도 안 된다.
라는 편지도 보냈다.

 히데요시가 기뻐 날뛰면 날뛴 만큼 킨고츄우나곤의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이래서는 토요토미 가문에 언젠가 큰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라고 내다본 것은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였다.

 죠스이.
 통칭 칸베에[官兵衛]. 관(官)은 카게유노사칸[勘解由次官].
 히데요시가 천하를 쥘 즈음부터의 꾀주머니였다. 계략, 책략을 굉장히 좋아했다. 단지 기묘할 정도로 사리사욕이 없었다. 그에게 책모(策謀)란 사욕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주객(酒客)이 술을 사랑하는 것처럼 책모를 좋아했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일종의
선풍도골(仙風道骨)까지 느끼곤 하였다. 오오사카[大坂], 후시미[伏見] 등지에는 죠스이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많았고, '타이코우님이 세우신 공(功)의 절반은 저 절름발이님(죠스이)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토요토미의 천하가 되어서 죠스이가 얻은 것이라고는 불과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0여 만석으로 보잘 것 없었다.

 여담이 되겠지만 어느 사람이 히데요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히데요시는,

 “농담하지 마라”

 라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 절름발이에게 100만석이라도 쥐어주면 나중엔 천하를 손에 넣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장소에서도 말했다.

 어느 날 밤 측근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였다. 화제가 제후(諸侯)의 품평이 되었다. 히데요시가 갑자기,

 “내가 죽으면 누가 천하를 손에 넣을까?”

 라고 물어보았다. 물론 좌흥(座興)을 돋우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했지만 히데요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건 절름발이다”

 라고 말했다. 모두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면 쿠로다 죠스이는 기껏해야 10여 만석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런 조그만 영지(領地)로는 많은 병사를 모으기도 힘들다. 그렇게 이의(異議)를 말하자 히데요시는, '아니지~ 아니지~' 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 절름발이의 굉장함을 너희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옛날에 그와 거친 전쟁터에서에서 함께 생활한 적이 있다. 나만이 그의 굉장함을 알고 있지”

 라고 말했다.
 

 죠스이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이외라 할 수 있는 야박한 처우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하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뛰어난 공적을 많이 세워 자신의 주군을 떨게 하는 사람은 해를 입는다고 한다. 죠스이의 지식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옛 공을 내세워 은상을 많이 바라면 죠스이의 몸은 파멸할 것이다.
 히데요시는 천하를 손에 넣자 죠스이를 중요한 자리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죠스이라면 나의 두려움도, 진심도 알아줄 것이다’
 라는 죠스이의 총명함에 기대는 부분도 있었다. 대신하여 문관(文官)들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들이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었다. 때때로 그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공로자들을 거북하게 여겼기에, 히데요시와 그들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다. 죠스이는 그것에 불만을 표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 사람의 인간은 하나의 시대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이 남자는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후 죠스이는
보신(保身)을 위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은거를 결심. 가문도 성도 영지(領地)도 아들인 나가마사[長政]에게 물려주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때는 놀라,

 “영지(領地)로 돌아갈 생각은 마시게. 쿄우[京]에서 내 상담상대가 되어 주게”

 라 말하며 쿄우에서 생활할 수 있게 500석을 주었고 이어서 2000석으로 가증해 주었다.
 그 죠스이가,
 ‘토요토미 가문의 평온을 위해서’
 라며 계책을 세웠다.
 취미나 오락 같은 것이다.
 선조 대대로 두터운 은혜를 받아 왔던 가신(家臣)이 아니기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죠스이는 히로이 – 히데요리[秀頼]의 출생으로 인해 관백 히데츠구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히데츠구의 행패는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명목으로 살해당할 것이다. 죠스이는 항상 히데츠구의 바둑 상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넌지시 몸조심할 것을
간언(諫言)하였으며 또한,

 “자진해서라도 원정군의 총지휘를 맡고 싶다고 하십시오. 타이코우[太閤] 전하는 그런 모습을 가련(可憐)히 여기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었지만 히데츠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죠스이는 히데츠구에겐 가망이 없다고 단념하여 그의 저택으로의 발길을 끊었다. 다음은 킨고 히데아키였다.
 ‘히로이님이 태어난 이상, 킨고는
폐물(廢物)이 될 뿐이다. 킨고를 어떻게든 해 드려야지..'
 라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이었다.
 죠스이는 더이상 히데요시의 꾀주머니도 아니었으며, 또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것을 신경써야 하는 역할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거기에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이 죠스이를 특별히 의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디까지나 이 남자만의 취미였다고 할 수 있다.
 죠스이는 그 재능을 표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 매일매일이 심심했다. 너무 심심했던 나머지 쓸데없는 참견에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씨[北条氏]를 정벌한 전쟁. [본문으로]
  2. 히데요시[太閤]가 통일된 규격으로 논밭(영지안의 산과 숲은 제외)의 생산량을 계산하여 세금, 부역 등을 산출 혹은 할당하게 한 것. [본문으로]
  3.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4. 다른 부분은 관백(関白) 히데츠구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본문으로]
  5. ‘죽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해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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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통칭 네네(寧々). 히데요시의 정실이기에 당연히 토요토미 가문[豊臣家門] 가정(家庭)의
주재자(主宰者)이다. 소탈하고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종일위(從一位)라는 신분이 되어서도 잘난 척하지 않았고 삶이 끝나는 날까지 태어난 고향인 오와리[尾張] 사투리를 사용하였으며 히데요시와의 대화도 누가 보건 말건 꺼리낌이 없었다.

 어느 날, 부부가 함께 란부[舞]를 보고 있었다. 보던 중 뭔 일인지 말싸움이 시작되어 서로 언성을 높였지만 둘 다 오와리 사투리로 빨리 내뱉었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가 깔깔거리며 웃었고 히데요시도 등이 휘도록 웃어 제꼈다.
 ‘싸움이 아니었나 보군’
 이라 생각하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안심하였는데, 히데요시는 그런
예인(藝人)들에게,

 “지금 싸움을 어떻게 보았나?”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어떤 때이건 밝은 분위기로 만들고 싶어하는 버릇이 있어, 쿄우카[狂歌]나 임기웅변(臨機應變)적인 재치를 굉장히 좋아했다. 예인들도 그런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우선 큰 북을 치던 이가,

 “부부싸움에 모두 놀랐습니다요”

 라며 갑자기 북을 쳐 좌중을 놀라게 하며 대답했다. 피리를 불던 이가 곧바로,

 “어느 쪽이건 삐리리비리리♪”

 어느 쪽이건 잘못 하였고() 또한 말이 맞다()……라고 피리의 음에 맞추어 말하였다. 이 재치 있는 대답에 부부는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런 귀부인(貴婦人)이었다.

 이 귀부인이 아이를 낳았다면 토요토미 가문의 운명도 크게 변했을 것이다. 토요토미 가문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토요토미 정권이 성립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이 입에는 담지 않았지만 맘속으로는,
 ‘이 정권은 오래가지 못한다. 전하가 살아계신 동안만이다.’
 라 생각하여 다음에 이 천하를 계승할 사람이 누굴까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당연 누구의 눈에건 실력을 말해도, 혈통을 말해도, 인물을 말해도, 관위를 말해도
제후(諸侯) 필두(筆頭)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을 존중하고는 있었지만, 뒤로는 이에야스와 끈을 잇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히데요시가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은 이에야스와 다이묘우[大名]라는 점에서는 동격이면서도 은밀히 이에야스에게,

 “절 부하로 여기시옵소서.”

 라고 까지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토요토미 가문은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것이 그런 의미에서는 이 정권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불행은 혈연(血緣)이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조카인 히데츠구[秀次]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히데츠구 이외에 더 이상 적당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혈연이 아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까지도 양자로 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일족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히데요시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킨고 츄우나곤[金吾 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까지 히데요시의 양자 중 한 명이 된 데에는 그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히데아키는 키타노만도코로의 혈연이었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친정집은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두 곳이 있다.
 그녀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미관(微官)이었던 스기하라[杉原 = 후에 키노시타[木下]로 성을 바꾸었다] 스케자에몬 사다토시[助左衛門 定利]의 딸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이모가 있던 아사노 가문[浅野家]에서 키워졌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 것과 동시에 이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도 아사노 가문도 제후가 되었고, 기묘하게도(이유는 있지만) 키타노만도코로의 이 두 친정만은 토쿠가와 다이묘우[徳川大名]로 남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살아 남는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취할 즈음, 키타노만도코로의 생가 스기하라 가문 당주는 그녀와 연년생 동생 이에사다[家定]였다. 그 이에사다에게는 자식들이 많아 키타노만도코로는 일찍부터,

 “니가 가진 많은 아이들 중에서 한 명 갖고 싶구나”

 고 말했었다. 그 키노시타 가문에 다섯 번째 남자아이가 1582년 태어났다. 히데아키였다.
 이 당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츄우고쿠[中国] 방면 사령관이었으며, 키타노만도코로는 거성(居城)인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 있었다. 스기하라 가문은 이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있었기에 당연히 그 집은 나가하마 성 밑에 있었다. 그녀는 성주 부인이면서도 자신의 친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동생이자 부하인 이에사다의 집에 방문하였다.

 “얘는 참 귀엽구나”

 아기를 들여다보다 키타노만도코로는 손벽을 치며 기뻐했다. 아예 이 아이를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부터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에사다에게 말하자,

 “그 정도로 맘에 드신다면”

 하면서 누이의 뜻에 따라주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하리마[播磨]의 전쟁터에서 돌아 온 히데요시에게 그 뜻을 말하자,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 양자로 삼자구”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 히데요시는 간단히 처의 요청을 승낙하였고, 이로 인해 히데아키는 나가하마 성에서 돌보게 되었다. 물론 유모가 있었지만 키타노만도코로 자신도 아이를 좋아하였기에 아기보기도 –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 치고는 능숙했다.

 히데아키는 무사히 성장했다. 통칭을 타츠노스케[辰之助]라고 하였다.
 동그란 얼굴에 흰 피부로 눈동자 움직임이 빨랐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해서도 굉장히 똑똑해 보였다.

 “저 아이가 자라면 한 몫을 할만한 인물이 될 거에요”

 라고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그거 기대되는군”

 히데요시도 고양이와 아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거기에 히데요시는 자기 처의 장점 중 하나가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있다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따라서 히데요시도 히데아키에게 기대를 하였다. 집안 내에서 히데아키의 위치는 양자 서열 1위인 히데츠구의 동생이라는 순위였지만 그러나 히데츠구에게 만약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가문의 상속권을 주어도 좋다고까지 히데요시는 생각하여,

 “네네, 이 가문을 저 아이에게 물려주어도 좋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시게”

 라고 까지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말하였다.

 1585년 히데요시는 관백(関白)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조정에 요청하여 12살인 히데아키를 종사위하(從四位下)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에 임명 받게 하였다. 이 관을 당명(唐名)으로는 킨고쇼우군[金吾将軍]이라고 한다. 궁문(宮門)의 경비대장이며, 금혁(金革)을 차고 문을 지킨다고 하여 [금오(金吾=킨고)]라는 호칭이 생겼을 것이다. 이 때문에 제후들은 이 토요토미 가문의 소년을,
  "킨고님"
 이라 부르며 각별한 경의를 표했다. 물론 뒤에서는 ‘킨고놈’ 이라고 소곤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즈음부터 히데아키는 아이였을 때의 귀여움이 사라지고 영특함이 사라져, 간단히 말하면 우매해지고 얼빠지기 시작했다. 장래
상급 귀족(公卿) 사회에서 창피를 당하지 말라고 글과 시의 선생을 붙여주었지만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것 같네’
 키타노만도코로는 그것을 깨닫기에 이르러 차츰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조정에서도 행동거지가 나빠 코를 흘리고 엄숙해야 할 곳에서 갑자기 웃거나 했다. 아주 조심히 걸어야만 하는 조정의 복도에서 동동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저 아이만큼은 창피하네요”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 푸념했다.
 원래 그녀의 생가인 스기하라(키노시타) 가문의 핏줄은 모두 무사(武士)로서의 용기나 과감함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와 닮아서 총명한 인물도 많아, 히데아키의 큰 형 
카츠토시[勝俊 = 지쥬우[侍従], 후에 쵸우쇼우지[長嘯子]] 등은 시에 대한 재능에 있어서만은 어느 제후의 자식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시게”

 히데요시는 그 점에 있어서 낙관적이었다. 어렸을 때의 얼간이 짓이라면 자기 또한 그러했으며, 그의 옛 주군이며 생애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악동(惡童)스러움은 당시 오다 가문의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그에 비추어보아 어릴 때의 난폭함과 우둔함을 가지고 나중의 그 인물이 현명하게 될지 어리석게 될지를 잴 수 없다.

 “뭐 그런 것일세”

 히데요시는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키타노만도코로를 달랬다.
 그러나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은 좋아지질 않았다. 왜냐하면 히데아키는 12살의 꼬꼬마인 주제에 성(性)에 대한 관심만은 이상할 정도로 강하여,
여관(女官)들이 방에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있을 때면 어느 순간에 들어왔는지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타이르면 미친 사람마냥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히데요시는,

 “색을 좋아하는 것은 각자의 개성이나 경향과 같은 것으로 착하고 나쁘고 현명하고 우둔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가~ 킨고도 벌써 훔쳐보기인가.. 나이에 비하면 빠르군”

 이라 말하며 웃을 것이 뻔했다. 호색(好色)과 조숙(早熟)이라는 점에서는 히데요시 자신도 그러했기에 이런 남편에게 호소해 보았자 였다.
 히데요시는 오히려 자신의 친족인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 쪽을 중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1588년.
 히데요시는 쿄우[京]에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조영(造營)하여 4월 14일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방문을 요청하였다. 텐노우[天皇]가 신하의 사저(私邸)에 방문하는 것은 요 백 년 동안 없었기에,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화려하게 알릴 수 있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온 힘을 다하여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날 쿄우토[京都]의 근방은 물론 먼 지방 사람들까지 구경을 하려 몰려들어, 길가와 거리를 경비하는 경비병 만으로 6000명이 동원되었다. 행렬은 화려함의 극을 달했다.
 -텐노우님이라는 것은 이렇게까지 존귀하신 것인가?
 라고 다이묘우[大名] 이하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히데요시가 기대했던 이 의식의 정치적 효과였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천하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텐노우 다음가는 이는 관백(関白)이다. 텐노우의 존귀함을 알게 됨에 따라 자연히 관백의 신성함도 알 수 있게 됨에 틀림이 없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천하가 갑자기 성립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후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가신으로 있었을 때의 옛 동료들이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오다 가문과 동맹했던 나라의 국주(国主)로 히데요시보다 오히려 지위가 높았다. 거기에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는 옛 주군 노부나가의 아들이었다. 히데요시가 무력과 운(運)으로 그들을 휘하에 두고는 있었지만 출신이 출신인만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는 복종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에게 존비(尊卑)의 가치관만큼이나 완고한 것은 없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부수고자 했다. 천자의 존귀함을 빌려 그것을 선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존비관(尊卑觀)과 질서를 알려주고자 하였다.

 텐노우는 쥬라쿠테이에서 4일간 머물렀다.
 머물던 중 마당을 구경하려는 텐노우[天皇]의 짚신을 천하의 지배자인 히데요시가 마당으로 내려가 자기 손으로 직접 가지런히 정리하였다. 또한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방 하나에 토요토미 가문에서 가장 힘 있는 여섯 명의 제후를 모아 놓고 텐노우를 모시고 와 이들과 대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여섯 명은 다음과 같다.

나이다이진[内大臣]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다이나곤[大納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곤다이나곤[権大納言]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 히데요시의 동생]
츄우나곤[権中納言]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산기사코노에노츄우죠우[参議左近衛中将]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우코노에노곤쇼우쇼우[
右近衛権少将]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들에게,

 “너희들은 들으라. 이제 천자(天子)의 고마움과 고귀함에 감루(感淚)를 흘렸을 것이다.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서에 써서 제출하도록”

 하고 명령하였다. 앉은 자리 앞으로 서약서가 놓였다. 이미 문장은 쓰여있었기에 일동은 여기에 혈판(血判) 서명을 하기만 한 것이다. 서약서에 쓰인 문장의 말미에,

칸파쿠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것이든 따르며 조금이라도 거부하지 않겠다.

 고 적혀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텐노우[天皇] 앞에서 제후에게 복종을 맹세시키는 이 일이야말로 이번 텐노우의 쥬라쿠테이[聚楽第] 방문 최대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서약서를 받는 인물은 히데요시 본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대리인(代理人)이었다. 히데요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대리인에 히데아키를 선택하였다.
 [킨고님]
 이라고 서약서에는 미리 쓰여져 있었다. 맹세하는 상대는 15살의 킨고 히데아키에 대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는,
 ‘이외로 킨고님이?
 라는 것이 되었다. 당연한
추찰(推察)이었다. 이 서약서로 인해 토요토미 가문에 있어서의 히데아키 지위는 명확해졌다. 비약(飛躍)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보다도 히데아키에게 천하를 물려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킨고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되지’
 라 다이묘우[大名]들은 생각하며 이제 막 ‘이방 수염’이 나기 시작한 소년에게 알랑거리기 위해서 다투듯이 선물을 보내게 되었다.

 “저래서는 거만해지지 않을까?”

 하고 키타노만도코로는 걱정했지만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히데아키에 대해서도 제후들이 떠받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 했다.

 “선물 같은 것 받게 내비 두시게. 히데아키가 얼마나 존귀한가를 천하에 알리는 편이 좋은 것일세”

 “그러나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킨고님에게는 독이 될 것입니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말했지만 그러나 가정(家庭)에서의 히데요시는 팔불출(八不出)에 가까웠다.

 “쓸데없는 걱정일세”

 그 총명함에 있어서는 고금무쌍(古今無雙)이라 일컬어지는 히데요시에게도 단점이 있었다. 자식 교육이라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하지만, 교육은 원래 쓸데없는 걱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히데요시는 교육을 받지 않고 어른이 되었다. 그렇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결함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문은 갑자기 성립된 귀족(貴族)인 만큼 다른 다이묘우[大名]나 하다못해 촌구석의 조그만 호족 가문에도 반드시 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오는 자녀교육이라는 것을
가풍(家風)으로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히데요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관위를 승진시켜주는 것 정도였다.
 히데아키가 15살이 되는 해인 1591년에는 산기[参議]에 임명되었는데,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는 그대로 겸하게 하였다.
 16살인 1592년에는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되어 정삼위(正三位)로 승진하였다. 이리하여 세간에서는,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이라 불렀다. 단 히데아키 승진의 속도는 이 곤츄우나곤에서 우선 멈추게 된다. 왜냐면 이 해에 형 뻘인 히데츠구가 갑자기
약진(躍進). 관백에 임명되어서는 명실공히 천하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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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

 이 즈음, 쥬라쿠테이(聚楽第)를 방문하는 다이묘우(大名)는 한 명도 없게 되었다.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같은 자는 예전 가장 친한 척하며 한때는 10일에 한번 정도 방문했던 인물이었지만 발길을 끊었으며, 히데츠구에게 황금 100매를 빌렸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는 그로 인해 서로 사이가 좋다는 의심을 사는 것이 두려워 그 돈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결국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돈을 빌려 히데츠구에게 갚았다. 이에야스는 그 후 에도(江戸)로 돌아갈 일이 있었는데,쿄우(京)를 떠나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쿄우(京)에 있던 세자(世子) 히데타다(秀忠)에게,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와 칸파쿠(関白=히데츠구)가 싸우게 되면 무조건 타이코우에게 붙어라. 타이코우가 만에 하나라도 죽는 일이 생긴다면, 곧바로 오오사카(大坂)에 가서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각주:1])를 호위해라”

 는 말을 남겼다.
 이미 세상이 그렇게까지 과열되기 시작한 이상 히데츠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쿠마가이(熊谷)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정에 3000매의 백은(白銀)을
진납(進納)하였다. 장래 일의 경과에 따라 히데요시를 쓰러트렸을 경우 신정권을 곧바로 승인 받고자 위함이었다. 1595년 7월 3일이었다. 바로 그날로 이 비밀이 후시미(伏見)로 새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결심하여 다섯 명의 힐문사(詰問使)를 파견하였다.
 미야베 젠쇼우보우(宮部 善祥坊),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마에다 겡이(前田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토미타 토모노부(富田 知信)였다.
 히데츠구는
인견(引見)하여, [모반이라니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모반할 생각은 없다]라는 뜻의 서약서를 써 건넸다. 백은을 진납한지 이틀째였다.

 다섯 명은 후시미(伏見)로 돌아와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그로부터 3일째 되던 날 다른 사자들이 쥬라쿠테이(聚楽第)로 파견되었다. 예전에 히데츠구의 숙로(宿老)였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 거기에 먼젓번의 미야베, 마에다 겡이를 포함한 다섯명이었다.

 “그런 뜬소문이 떠돌아 서로 의심이 생긴 것은 요컨대 서로 직접 이야기를 나누실 기회가 없어서일 것입니다. 후시미(伏見)까지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를 죽음의 사자라고 생각한 히데츠구는 끝까지 거부하며 승낙하지 않았다. 그들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시미(伏見)에서 다른 이가 와서 별실에서
내알(內謁)을 청했다.
 비구니인 코우조우스(孝蔵主)라는 노녀(老女)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여관(女官)으로 히데츠구는 어릴 때부터 이 비구니와는 친했다.

 “이 비구니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세요”

 라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타이코우님은 기분 좋으십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하를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계시지는 않사옵니다. 아무 염려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고 하였다. 히데츠구는 숙로인 다이묘우(大名)들은 경계하였지만 이 비구니에게는 낚였다. 히데요시의 계략은 성공했다. 뒷문으로 들어온 이 비구니 쪽이 실은 죽음의 사자였다.

 “그런가? 그럼 가보세”

 라고 하며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측근인 쿠마가이들이 막을 틈도 없이 히데츠구는 비구니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히데요시에겐 손자뻘인 세 명의 아기들을 앞세우고 호위는 백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오후 조금 지나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출발하여 타케다(竹田) 가도를 이용하였고 오후 3시 즈음에는 후시미에 도착했다. 후시미의 거리에서는 소란이 일어나 가재도구를 들고서 도망치는 이들도 많았다. 떠도는 소문에 히데츠구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온다고 한다. 히데츠구는 생각치도 못했던 이런 반응에 놀랐다.
 ‘내가…… 내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인가?”

 “우선 오시는 길에서 맞은 먼지를 떨구시길”

 이라며 휴식소로 지정되었다는 키노시타 요시타카(木下 吉隆)의 저택으로 안내 받았다. 그러나 문에 들어서자 마자 은밀하고 재빨리 모든 문이 닫혔다. 이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곧이어 사자가 성(城)에서 와, 만날 필요 없다며 그대로 코우야(高野)산(山)에 가라고 하였다. 히데츠구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밤 승복(僧服)으로 갈아입고 후시미를 출발하여 이틀 후 코우야산(山)에 올라가 세이쥬쿠 사(青宿寺)에 도착하였다. 다섯 날째에 산기슭에서 타이코우 히데요시의 사자들이 각각 부하들을 이끌고 올라왔다. 정사(正使)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라 한다.

 “틀림없이 마사노리인가?”

 히데츠구는 확인을 위해서 물어보았다.

 “틀림없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운명이 다한 것을 깨달았다. 마사노리와는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안 좋은 채로 살아왔다. 그 마사노리가 이런 때 사자로 선정된 것을 보면 말로 듣지 않아도 명료했다. 죽음이다.

 역시 죽음을 언도 받았다.
 이 순간부터 히데츠구는 지금까지의 이 남자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죽음의 명령을 받았을 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문서담당관인 승려 사이도우(西堂)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의 이겨갈 때 즈음 마사노리의 명령을 받은 히데츠구의 측근 사사키베 아와지노카미(雀部 淡路守)가 와서는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히데츠구에게 보고했다. 히데츠구는 바둑판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겼다”

 고 뜬금없는 말을 하였다. 바둑이었다.

 “모두들 나중에 증거로 봐 두라고. 내가 이겼다”

 과연 주위가 그것을 보자 히데츠구가 이긴 바둑이었다. 이것 자체가 기묘했다. 여태까지 히데츠구가 사이도우에게 바둑으로 이겨본 적이 없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날 이때가 되어서야 이긴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기뻤는지 짝사랑을 앞에 둔 소년과 같이 볼을 붉히며,

 “지금부터 나는 배를 가르러 가지만 이 바둑판은 흩뜨려놓지 말게. 조심히 방으로 옮겨라. 모두 나중에 돌을 놓은 것을 잘들 살펴보게”

 라고 말하곤 사사키베 아와지노카미를 향해,

 “유서를 쓰고 싶군. 허락되는지를 알아봐 주게”

 라 말하였다. 그것이 허용되었다.

 히데츠구는 자신의 친아비와 정실, 시첩(侍妾) 일동들에게 간결한 유서 한 통씩 세 통을 썼다. 붓놀림이 경쾌했다. 다 쓰고 난 후 붓을 던졌다. 던지고 난 후 승려 사이도우를 향해서,

 “내 일생은 타이코우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죽음도 또한 그렇다.”

 고 말했다. 자신의 생애가 하나하나 타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기묘함을, 이 남자는 마음속 깊이 되돌아 본 것일 것이다.

 “이제 나는 죽는다. 이것도 타이코우의 뜻이다. 그렇지만 내가 내 배를 가르는 칼은 내 손안에 있다.”

 요컨대 배만은 자신이 가른다, 그것만은 자기자신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사이도우에게,

 “자네는 중일세. 죽을 필요는 없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이도우는,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는 제 맘대로 함께하겠습니다”

 라며 자신도 배를 가를 준비를 하였다. 사이도우는 참고로 코우조우스(孝蔵主)의 조카이다. 숙모의 거짓말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내심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히데츠구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 후, 곧이어 할복의 자리에 앉았다.
 착각을 했는지 이 남자는 동쪽을 향했다. 불법에 이르기를 부처는
서방십만억토(西方十萬億土)에 계시다고 한다. 서쪽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작법(作法)에 어긋납니다. 서쪽을 향하십시오”

 라고 사이도우가 충고를 하자 히데츠구는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다시 한번 충고를 하니,

 “부처님은 시방(十方)에 계시다고도 한다. 방위에 연연하진 않겠네”

 라고 말하였다. 적어도 생애의 마지막 정도는 자기 맘대로 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카이샤쿠(介錯)의 칼이 번쩍이며 시체는 작법이 틀린 채로 동쪽을 향해서 쓰러졌다.
 사이도우는 그것을 보고,

 “전하는…… 방향을…… 잘못 아시고 계시다. 이것이 묘하다. 전하의 생애도 이랬던 것은 아닐까?”

 라고 말하였다.
 사이도우는 서쪽을 향했고 서쪽을 향해서 목이 떨어졌다. 자연히 시체는 히데츠구와는 반대 방향이 되었다. 사이도우가 마지막에 중얼거린 위에 말이 히데츠구의 생애를 상징한 말인 듯이 항간에 전해졌다.
 사실, 히데츠구는 태어난 연(縁)이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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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츠구가 죽은 뒤 그 처첩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는 성별의 구분 없이 전부 사형당했다.
 
형장(刑場)은 쿄우(京)의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이었다.
 60 평방미터 사방에
(濠)를 파고 거기에 울타리를 둘러쳤고 형을 집행하는 천인(賤人)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활과 화살을 들려주었다.

 집행된 것은 8월 2일.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남문(南門)부터 백색의
수의(壽衣)를 입은 그녀들을 몰아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천인들이 물건이라도 던지듯이 그들을 수레에 집어넣었고 한 대에 2~3명씩 태워서는 산죠우 강변으로 옮겼다.
 형장의 남쪽 구석에
토단(土壇)이 세워져 머리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히데츠구의 머리이었다.

 “저걸 봐라~! 저걸 보라구~!”

 라고 천인들은 소리 질렀고 지르면서 그녀들을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었다.
 울타리가 닫히고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녀들을 천인들이 쫓아가서 찌르고 잡아서는 베었다. 천인이 2~3살 먹은 어린 귀족을 잡아서는 모친의 눈 앞에서 강아지라도 죽이듯이 죽였고 그것을 보고 기절한 모친을 다른 천인이 안아 세워서는 목을 쳤다.

 이치노다이(一ノ台)도 그 딸인 미야노카타(宮ノ方)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녀는 사세구(辭世句)를 준비해 놓았다. 딸의 사세구는 이렇다.

 모녀의 헤어짐을 듣고 우울했지만, 같은 길을 가니 기쁘구나
 憂きはただ親子の別れと聞きしかど同じ道にし行くぞうれしき
 형은 공개로 행해졌다.
 수만의 구경꾼들이 형장을 에워쌌고 특히 장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죠우 다리에는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이 사형이 무엇 때문에 행해졌고,천하에 대해서 어떤 효과를 기대하며 공개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곧이어 처형은 종료되었고 원래부터 강변 한 켠에 파여져 있던 구덩이 속에 그들의 시체와 히데츠구의 머리가 함께 던져졌다. 흙이 덮이고, 그 무덤 위에 석탑이 세워졌다.
 악역을 저지른 히데츠구의 무덤[秀次悪逆塚]
 이라고 그 비석에는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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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의 친아비인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三好 武蔵守 一路)는 영지(領地)와 위관(位官)을 몰수당해 원래의 신분인 평민으로 떨어져 사누키(讃岐)로 유배당했다.

 “뭔 일이래……”

 이 야스케는 사누키(讃岐)의 유배지에서 자신이 먹을 땅을 괭이질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뭔 일인지... 이 친아비도 또한 자기 일생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殺生関白,了====================

  1. 히데요시의 정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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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

 “이리 오시게. 술을 드리겠네”

 상냥한 목소리로 손을 잡았다. 불쌍한 장님이 고개를 들어,

 “어이쿠~ 이렇게 친절할 수가! 어디에 뉘신감?”

 라고 희희거리며 따라왔지만 얼마 안가 히데츠구는 허리를 돌리며 장님의 어깻죽지부터 오른팔을 베어 떨어뜨렸다. 지금까지 히데츠구의 경험상 보통 이런 충격을 받은 사람이라면 기절하였다. 하지만 이 장님의 심리 세계는 어딘가 틀린지 이 순간 삼 척이나 껑충 뛰며 소리 높여,

 “어디 사람 없소~! 나쁜 놈이 사람을 죽이려 하오~ 사람들아 저 놈을 쫓으소~ 나를 구해주소~”

 하고 느릿느릿 그러나 침착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 놈은 특이한 맛을 하고 있군”

 히데츠구가 말하자 이런 종류의 살생에는 항상 따라붙으며 히데츠구의 비위를 맞추는 쿠마가이 다이젠노스케 나오유키(熊谷 大善亮 直之)라는 젊은 다이묘우(大名)가 히데츠구의 흥을 더 돋구기 위해서 장님에게 다가가,

 “네 놈에게는 이제 팔이 없지. 피도 둑이 터진 것 같이 흐르고 있지”

 라고 현실을 가르쳐주어 알면 괴로워하며 기절할 거라 생각하여 그 반응을 기대했다. 그러나 장님은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을 하였다.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목소리도 이외로 낮추어,

 “그래 알겠다. 그랬었군”

 하고 중얼거렸다.

 “이 나쁜 놈은 평소 이 부근에 나타난다는 살생 칸파쿠(殺生 関白)[각주:1]인가? 반드시 그럴 거다.”

 히데츠구를 호종하고 있는 쿠마가이는 - 쿠마가이 지로우 나오자네(熊谷次郎 直実 – 하단 역자주)의 후손이라는 인물이다. 가문은 한 때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에서는 후다이(譜代[각주:2])의 명문가로 대대로 쿄우(京)에 살며, 지금은 와카사(若狭) 이사키(井崎)의 성주(城主)이기도 했다. 잔머리가 잘 돌아갔던 만큼 히데츠구가 어떤 점에 흥미를 갖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병 상태라도 알려주는 듯이,

 “네 놈은 눈이 보이지 않지. 더구나 이제는 팔도 없지. 이렇게 장애가 둘로 늘었지. 그래도 네 놈은 살고 싶은지?”

 어떤 심경이냐? 라는 것이었다. 히데츠구도 쿠마가이의 어깨너머로 목을 쭉 내밀고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장님이 뭐라 하는지를 기다렸다.

 “살고 싶지 않아!”

 라고 소리치는 것이 장님의 회답이었다.

 “이 이상 이런 몸으로 살고 싶지 않아. 그냥 죽여라! 이 목을 베란 말이다! 봐라!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낌새는 동네사람들이 문 틈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여 내 목을 베라! 네 놈의 사악한 이름을 후세에 남겨라! 인과응보를 기다려라!”

 라고 외쳤다. 이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에 히데츠구는 자아(自我)를 잃고 흥분하여 칼을 휘둘렀지만 장님의 팔을 자를 때 칼날에 사람 기름기가 들러붙었는지 베어지질 않아 어깨뼈가 부서지는 소리만 들렸다. 이 때문에 장님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굴렀다. 그러자 더욱 더 히데츠구의 손이 폭주하였다.
 칼로 얼굴을 치고 다리를 베고 배를 찌르자, 이빨이 날라가고 손이 잘리고 손가락이 떨어져 더 이상 사람의 형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잘리고 나서야, 겨우 이 장님의 숨을 끊을 수 있었다.
 길거리로 나와 사람 죽이는 것에 재미가 들린 이래, 이렇게 손이 간 작업은 없었다.

 “..이런...놈일...수록.. 재..재미...가 없군”

 히데츠구는 헉헉대며 말했지만 피로로 다리가 풀려 호종하던 사람이 뒤에서 지탱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날 밤. 술자리에서,

 “귀족들에게~~”

 술을 들이키며,

 “이 정도로 용기가 있을 턱이 없지”

 라고 옆에서 술을 따르던 부인에게 말했다.
 이 부인은 키쿠테이 다이나곤 하루스에(菊亭 大納言 晴季)의 딸로 '이치노다이(一ノ台)'라 불리고 있었다. 정실(正室)이었던 이케다(池田)씨(氏)가 죽었기 때문에 히데츠구는 하루스에에게 강탈하다시피 이 부인을 뺏어와 근래에 이를 정실로 삼았다.
 이치노다이의 나이는 히데츠구보다 열살 정도 많았지만 그 미모는 쿄우토(京都)에서 으뜸이었다. 한번 다른 곳에 시집을 갔었고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아직 11살의 꼬꼬마에 지나지 않았지만,히데츠구는 이 딸까지 데리고 와서는 ‘오미야노카타(お宮ノ方)’라 부르며 첩으로 삼아 모녀와 함께 3P를 하였다.
 사람들은,

“모녀병간(母女倂姦)이라니 인륜(人倫)이 아니다. 축생도(畜生道)다.”

 라 소근거렸으며, 아비인 하루스에도 이 모녀병간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의 어긋남에 울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히데츠구가 자신의 무용을 이 이치노다이에게 자랑한 것은 그녀가 귀족(公家)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귀족 놈들은 문(文)을 비틀고 옛 일을 흥얼거리며 예식(禮式)에는 밝을 지 몰라도, 이 정도의 무(武)를 가지고 있을 턱이 없지. 모두 칼이나 피를 보면 벌벌 떨 놈들뿐이다”

 라 말했다. 이치노다이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뭐라고 말을 해봐라!”

 하고 히데츠구는 항상 이 입을 열지 않는 모녀에게 말을 하게하고자 했지만, 그녀들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와서 산지 일년이 지나가는 지금도 여태까지 히데츠구 앞에서는 목소리라는 것을 낸 적이 없었다.

 참고로 히데츠구 처첩의 수는 양아버지 히데요시가 제한했던 수를 훨씬 상회하였고 이 즈음에는 30명이 넘어 히데츠구라고 해도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혀가며 세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나사가 빠졌나 보군’
 하고 히데츠구에게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게 권고했던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도 이 벼락치기 칸파쿠가 불과 1~2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변한 것을 보고 후회보다는 오히려 공포를 느꼈다. 히타치노스케보다 히데요시 쪽이 훨씬 마고시치로우를 알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그렇게 쪼잔히 나사를 쉴 세 없이 조여야만 그제서야 이 인물은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었다. 이 나사가 풀릴 대로 풀려 자기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된 남자는, 예를 들면 이런 일도 하였다.
 마루모 후신사이(丸毛 不心斎)라는 늙은 신하의 부인을 보고서는, 노파는 어떤 몸을 하고 있을까라는 흥미를 가져 억지로 데리고 와서는 첩으로 삼았다. ‘아즈마(東)’라고 부르며, 나이는 61살이었다.
 50대는 없었지만 43세의 여자는 있었다. 또한 오카모토 히코사부로우(岡本 彦三郎)라는 가신(家臣)에게 모친이 있어, 히데츠구는 어느 날 모친이라는 것 즉 그런 종류의 여자가 필요하다며 이도 첩으로 삼았다. ‘카우(かう)’라 불렀으며 38살이다.
 여성들을 나이별로 나누면 10대가 11명, 30대가 4명, 40대가 1명, 60대가 1명으로 나머지는 20대였다.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딸 ‘오이마(お伊万)’와 같은 다이묘우(大名)의 딸도 있었으며, 거지 출신의 오타케(お竹)라는 이도 있었다. 이런 여성들이 불과 1~2년 사이에 모아져 쥬라쿠테이(聚楽第)라는 새장 속에서 사육되었다.[각주:3]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에서 펼쳐지는 히데츠구의 망나니짓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가신들은 나중을 생각하여 몸 사리며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몰랐다. 단지 걱정하는 것이라고은 자기 피를 이은 히데요리의 미래뿐이었다. 히데요시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국 생각을 정하여 히데츠구를 후시미(伏見)로 불렀다.

 “그 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일본을 다섯 개로 나누고자 한다”

 라고 히데요시는 제안했다.

 “이렇게 하자. 그 쪽에게 그 중 네 개까지는 주마. 나머지 하나를 히데요리에게 주면 어떻겠나?

 고 말했다. 말하면서 히데츠구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이미 후계 상속을 한 뒤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말하기도 뭐한 것도 있어, 그것을 이래저래 염려하며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제안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츠구의 표정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히데츠구는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그 둔하고 무신경한, 어느 쪽인가 하면 뻔뻔하다고 할 수 있는 상판때기를 보고 있자니
자기 혼자만 기를 쓰고 있는 듯한 모습에 오히려 우스웠고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라기보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동정에 기대고자 하는 자신을 보았다. 히데요시의 심정은 이젠 애원에 가까웠다.
 늙어서 아이를 얻은 이 노인이 불쌍하지도 않냐? 나는 이렇게까지 고뇌하고 있다. 그 기분을 읽어다오~ 읽었다면 칸파쿠를
사직(辭職)하고, 양자(養子)와 후계자를 관두겠다는 말을 해다오~ 라고 히데요시는 은근슬쩍 기대했다.
 하지만 히데츠구의 감수성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대답은 했다.

 “아버님이 편하신대로”

 라고 말하였지만 그 상판때기에는 표정이 없었고 입술 끝엔 토라진 기색까지 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보았다. 아니 오히려 억지로라도 그렇게 보고 싶은 심경에 히데요시는 몰리고 있었다.
 ‘천하는 누구의 천하더냐!’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기분을 억지로 참았다. 그 분노를, 히데요시는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훈계로 바꾸었다. 하지만 훈계를 듣는 표정과 태도조차 히데츠구는 어딘가 이전의 마고시치로우같지는 않았다. 마고시치로우였을 때에는 아직 작은 새와 같이 두려움에 떠는 부분이라도 있어 그런 면에서 간신히 귀여운 맛이 있었던 듯했다.
 ‘이 녀석 변했군’
 히데요시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참고 또 참았다. 자신이 죽은 뒤 히데요리를 보호해 줄 인물은 이 히데츠구밖에 없었고 그런 점에서 말한다면 이제는 히데요시 쪽이야말로 애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후, 히데요시는 이 일에 대해서 또 생각하여 하나의 꾀를 생각해내었다.
 히데츠구에게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여자아이를 장래에 히데요리의 부인으로 하는 것이었다.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기의 배후자를 지금 정한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히데요시는 거기에 매달렸다. 그런 끈이라도 이어 놓으면 히데츠구는 장래 히데요리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급사(急使)를 보내려 하였다.

 “음…… 그게 좀…… 서두르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측근은 말했다. 무엇보다 먼 장래의 일이다. 측근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러나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빨리 그리해두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하필이면 이 즈음 히데츠구는 이즈(伊豆)의 아타미(熱海)에 온천 치료를 하러 동쪽으로 가 있어 쿄우토(京都)에는 없었다. 히데츠구에게는 두통이 있었다. 온천에서 그걸 치료하고자 하는 여행이었다.
 아타미에서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급사를 맞이하였다. 무슨 일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편지를 펼치자 기껏해야 그 정도의 일이었다.

 “알겠다고 말씀 드려라”

 히데츠구는 사자(使者)에게 그렇게 답했다. 사자가 후시미(伏見)로 돌아와 히데요시에게 보고했다.

 “칸파쿠는 그렇게만 말했을 뿐인가?”

 히데요시는 자신의 불안과 의욕에 비해 상대가 너무도 냉정한 것에 불만과 불쾌감까지 느꼈다. 사직한다 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예를 들면 히데요리가 성인이 된 후에는 천하를 물려주겠다 라고 말만이라도 이 노인을 안심시키고 기쁘게 해 줄듯한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저건 인간이 아니다’
 인정도 없고 달래려는 마음 조차도 없다.
 ‘
축생이다’
 고 생각했다. 그 때 키쿠테이 다이나곤이 후시미(伏見)에 와서는 히데츠구의 모녀병간의 사실을 눈물 섞어 호소하였다.
 ‘설마 그 마고시치로우 녀석이?’
 그렇게까지 막되먹은 일을 할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히데츠구의 사생활을 조사시켰다. 조사를 담당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였다.

 역시 마고시치로우는 사람이 변해 있었다.
 칸파쿠 전하의 놀랄만한 행태가 이때 하나도 빠짐없이 한꺼번에 히데요시의 귓속으로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 히데요시나 되는 인물이 얼마 동안 감정의 정리가 되지 않아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겨우 한 말이,

 “저건 사람이 아니다”

 였다.

 “축생이다”

 고 말했다. 이 때부터 저 단어를 사용하여 히데츠구를 그렇게 정의(定義)했다. 그렇게 정의하는 것 말고는 토요토미 정권을 구할 길이 없었다. 이미 히데츠구의 악행으로 인해 쿄우토(京都)의 지도층이나 서민들이 가진 토요토미 정권의 인기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사람들은 히데츠구를 미워하기보다 그 배후에 있는 토요토미 가문을 원망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기에 토요토미 가문과는 별개의 존재이다는 것 말고는 그 원망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축생이다. 그 증거는 모녀병간이다고 - 히데요시는 그 이론을 명쾌히 이시다와 나츠카에게 고했다.

 이윽고 온천 치료의 여행에서 돌아온 히데츠구는 그 사태를 알게 되었다. 쿄우토(京都)에 머물러 있던 측근들이 그에게 알려주었다.

 “알 수 없군”

 그가 알고 있던 것은 자신의 딸을 먼 장래에 히데요리와 결혼시킨다는 기껏해야 그 하나뿐이었다. 그것이 어째서 이렇게 발전한 것인가? 측근들은 아무래도 모녀병간 하나만은 말하기 그래서,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부노쇼우(冶部少=미츠나리(三成))들이, 참언(讒言)한 것이겠지요”

 라고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는 그렇게 말했다. 히타치노스케는 미츠나리 참언설을 믿고 있었다. 만약 타이코우(太閤)가 죽어 히데츠구의 시대가 되면, 타이코우 소속의 미츠나리들은 권세를 잃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그들의 정적(政敵)이었던 자신이 권세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여 빨리 히데츠구를 실각시켜 갓난아기인 히데요리의 후계권을 확립시켜 놓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리 된 것은 미츠나리 등 타이코우 측근들의 음모다라고 히타치노스케는 말했다.

 히데츠구가 후시미(伏見) 방면의 소문을 살피게 하고 보니 사태는 예상외로 심각했다. 죽음을 언도 받을 지도 모른다고 한다.

 “살해당하는 것인가”

 이른 밤,

 “그리 되겠지요”

 라는 예측을 힘주어 말한 것이 쿠마가이 다이젠노스케(나오유키 – 直之)였다. 그는 히데요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사태를 예견하여 넌지시 그리고 자주 경계해야 한다고 히데츠구에게 말했던 것이다.

 “오히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보다 반대로 후시미를 습격하여 타이코우를 죽이고 일거에 정권을 안정시켜야만 하지요. 그에 대한 방법은 이렇습지요”

 라고 말하며 쿠마가이는 그 방법을 설명했다.

 “우선 후시미성(城)은 전쟁 준비가 덜 되어 있습지요. 습격하면 타이코우는 오오사카(大坂)로 도망치겠지요. 그것을 가정하여 요도(淀)와 히라카타(枚方)에 철포대(鉄砲隊) 천 명을 숨겨 놓는 것이지요. 나머지는 오오츠(大津) 등의 주변 도시와 다이부츠(大仏) 가도(街道), 타케다(竹田) 가도 등 후시미(伏見)와 연결된 도로에 병사들을 숨겨 놓으면,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습지요.”

 라는 것이었다. 히데츠구는 놀라 귀를 막으며,

 “...다이젠, 더 이상 말하지마! 모반은 무섭다구...”

 라고 핏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이 날부터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습격을 대비하여 외출할 때는 반드시 따르는 자들에게 갑주를 입게 하였다. 이것이 후시미로 곧바로 알려졌다.
 당연히 칸파쿠는 항상 후시미를 노리고 있다고 해석되었다.
 히데츠구는 자신이 조심한다는 것이 그렇게 해석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 일본어로 살생(殺生)와 섭정(摂政)은 발음이 셋쇼우(せっしょう)로 같다. 예전엔 섭정에 이어 관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섭정관백(摂政関白)라고도 하였다. 저 말은 섭정과 살생의 발음을 같은 것으로 한 언어유희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대대로 섬겨온 가문. [본문으로]
  3. 이해를 돕기 위한 사족을 두자면 히데츠구 죽을 때의 나이 2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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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

 이 시대에 학문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은 센고쿠(戦国)를 헤쳐 나온 거친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없었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말년이 되어서야 논어(論語)의 강석(講釋)을 듣고 나선, 세상엔 재미있는 것이 있구나 라고 하며, 카즈에노카미(主計頭)도 한 번 들어보게나, 라고 아주 신기한 듯이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권할 정도였다. 히데요시도 전혀 관심이 없어, 언젠가 비서가 ‘다이고(醍醐)사(寺)’의 다이(醍)라는 글자가 안 떠올라 곤혹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까짓것 ‘다이(大)’라고 쓰면 될 것 아니냐~”

 라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학문적 교양의 전통을 간신히 지키고 있던 곳은, 오산(五山 -
* 하단 역자 주)의 중들과 귀족(公家)정도로, 히데요시 이하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술에는 관심이 있어도 학문에는 무관심하여 그것이 토요토미 정권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런 상화에서 히타치노스케는 칸파쿠 히데츠구를 학문의 보호자로 꾸밈으로써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조류의 원천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리려 했다.

 히타치노스케는 이 계획을 히데츠구의 문서담당관인 승려 사이도우(西堂)에게 추진시켰다.
 겐류우 사이도우(玄隆 西堂).
 토우후쿠(東福)사(寺)에
승적(僧籍)을 두고 젊으면서도 오산에서는 제법 유명한 학승(学僧)이다. 사이도우가 히데츠구의 학문에 대한 것을 모두 처리했다.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오산의 승들을 모아, 시회(詩會)가 열리는 것이 정례화(定例化) 되었다.
희서(稀書)나 진서(珍書) 종류도 히데츠구의 명령으로 모아졌다. 시모츠케(下野) 아시카가 학교(足利学校[각주:1])나 카네자와 문고(金沢 文庫[각주:2])에서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제출시켜 쿄우(京)에 모아서는 쇼우코쿠(相国)사(寺)에 보관하며 일반에게 관람을 허용하였다.

 또한 온갖 수단을 다하여 모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각주:3]), 속일본기(続日本紀[각주:4]), 일본후기(日本後紀[각주:5]), 속일본후기(続日本後紀[각주:6]), 문덕실록(文徳実録[각주:7]), 삼대실록(三代実録[각주:8]), 실사기(実事記), 백련초(百練抄[각주:9]), 여인호(女院号), 류취삼대격(類聚三代格[각주:10]), 령 35권(令三十五巻) 등을 조정에 헌상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야마토(大和)의 여러 큰 절의 중 17명을 소집하여,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필사(筆寫)시켰다.
 -무식한 풋내기
 라고 처음 상급 귀족(公卿)들 사이에서 은근히 기피당하고 있던 이 남자를 이런 행동으로 인해 새삼 달리 보는 사람도 나타났다. 하기는 반대로 오바이트 쏠릴 정도라며 히데츠구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 등은 몇 번이나 초대를 받아도 히데츠구를 피하여 결국 끝까지 만나지 않았다. 학문이 더러워진다고 세이카는 은밀히 지우(知友)에게 소근거린 것을 보면 이 남자만은 히데츠구가 인기를 얻고자 하려는 의도를 확실히 간파하고 있었던 듯하다.
 세이카는 또한 그 지우에게,

 “저 인간 죽을지도 모른다”

 고 예언했다.

 “타이코우(太閤)의 자식이 생겼는데도 뻔뻔스럽게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앉아서는 도무지 관직에서 사퇴하여 물려날 생각을 하지 않는군. 필시 죽음을 당할 것이다”

 라고 세이카는 내다보았다. 세이카뿐만 아니라 쿄우(京)의 상급 귀족들는 숨을 죽이고 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가로인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만은,

 “타이코우 전하께서 칸파쿠 직(職)에서 물러나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 물러나실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부터 칸파쿠 자리는 다이묘우(大名)하고는 다르게 조정의 직(職)이며 천자(天子)에게 임명받는 것입니다. 만약 자진해서 물러나신다면 타이코우 전하가 내리신 훈계 제 3항의 조정을 공경하고 존중하라는 말씀을 어기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결코 그러한 일은 하지마시길”

 이라고 논리적으로 못을 박았다. 히데츠구도 그것이 도리(道理)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히타치노스케는 지금 여기서 히데츠구가 칸파쿠에서 물러나면 자신의 지위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실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히타치노스케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남자는 요컨대 히데츠구가 어떤 일에건 자신감을 갖게 하여 독립적인 인격을 주장할 때까지 교육해 가고 싶다고 바라고 있었다.
 사실 이 즈음부터 히데츠구는, 그 소심하고 두려움에 떨던 마고시치로우와는 다른 인격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인(武人)이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말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과시하기 시작했다.
 궁정에서 사교를 행함에 있어 지식이 부족했던 이 남자는 상급 귀족(公卿)이 아닌 무인이라는 그 하나만을 크게 내세우는 것 외에는 열등감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진정한 무인 – 자신의 부하나 토요토미 가문의 여러 다이묘우들 – 에게는 자신이 무시받고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민감히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의 무(武)를 세상에 알려주마’
 라고 생각했다.
 이 기세는 처음엔 지극히 온당하고 얌전한 형태를 취했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병법(兵法[각주:11])이라는 개인 격투기의 시합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산죠우(三条) 오오하시(大橋)에 방을 내걸고 방랑 병법자를 모아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서로 싸우게 하였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병법이라는 기술에 신뢰를 갖지 않았으며 병법자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검술(剣術)이 가능하다고 해서 고용한 적도 없었으며 더구나 검술지남역(剣術指南役[각주:12]) 등은 두지 않았고 그런 시합을 구경하고자 하는 관심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히데츠구는 그 반대를 취하여 쥬라쿠테이(聚楽第)를 병법 유행의 중심지로 만들려 하였다. 라기보다는 그는 이 격투기 시합이 이외로 재미있음을 알았다. 피가 흐르고 사람이 죽는 것이었다.
 피가 낭자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고 하여 결국 시합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진검과 진짜 창이어야만 한다고 포고했다. 그 서로 죽어나가는 경기를 많은 처첩들과 함께 구경했다. 여자들이 그 처참함에 비명을 질러 기절이라도 하면 히데츠구는 크게 자존심을 만족시켜,

 “역시 여자군~. 이 정도를 가지고”

 라고 앙상한 배를 부여잡고 통렬히 웃어대며 더욱 좋아하였다.
 자기야말로 용사(勇士)라고 생각했다.
 한층 더 떠 다른 사람의 시합을 보는 것만이 아닌 자신도 이 살육에 참가하고자 했다.
 밤중에
미복(微服)한 채 길 끄트머리에 숨어서 약할 것 같은 사람이 오면 달려 나가 베었다.

 “이번엔 오른쪽 어깨부터 비스듬히 베어주마”

 “다음엔 정면에서 내려 쳐 주마”

 “간만에 여자의 목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싶다”

 등을 지껄이며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 사람을 쓰러뜨렸다. 쓰러질 때, 사람은 생각 외로 세찬 땅울림을 내며 쓰러졌다. 이 죽이는 손맛에,

 “매사냥은 좆도 아니구만~”

 라고 히데츠구는 말했다.

 “내 무(武)를 보아라!!!”

 라고 어쩌다 단칼에 사람을 죽이기라도 하면 포효하듯이 목소리를 높여서는 호종(扈從)하는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사냥감인 시체의 옆에 모이게 해서는 심장에 귀를 대게 하여 확실이 멈추었는지 어땠는지를 확인시켰다. 나중에는 아직 해가 남아 있는데도 칼질하러 나왔다.

 키타노 텐만(北野 天神)의 토리이(鳥居) 옆을 미행(微行)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눈먼 장님이 지팡이로 발 밑을 살피며 다가왔다. 장님은 - 이 살인취미를 맛들인 사람에게 있어서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반응할까, 어떤 손맛이 날까? 히데츠구는 침을 삼키며 다가가서는,

 “이보게~”

 하고 불렀다.


  1. 칸토우(関東) 아시카가 지역에 있던 당시 칸토우 지방 최고의 학교 겸 서고였으나, 이 즈음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후원자였던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北条)가(家)가 멸망 당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극심한 고난에 처해있었다. 때문에 이 때 히데츠구의 강압으로 많은 책을 빼앗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무사시(武蔵) 카네자와에 있던 서고(書庫). 카마쿠라(鎌倉) 시대 중기에 설립. [본문으로]
  3. 신대(神代)~697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4. 697년~791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5. 792년~833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6. 833년~850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7. 日本文徳天皇実録의 약자. 850년~858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8. 日本三代実録의 약자 – 858~887년까지 기록, 이상의 6개를 율령시대의 역사라 하여 ‘육국사(六国史 - 릿코쿠시)’라 한다 . [본문으로]
  9. 카마쿠라 시대의 역사서. 바쿠후(鎌倉 幕府), 무가(武家)의 역사 기록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와 대조되는 조정 쿠게(公家)쪽의 역사서. [본문으로]
  10. 헤이안(平安)시대의 법령집으로, 율령제 시대의 관직으로는 일 처리에 무리가 있었기에, 각 관직의 계급이나 배치를 사례별로 나누어서 일 처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 [본문으로]
  11. 이 당시 일본에선 '검법(劍法)'을 병벙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12. 검술 사범을 말한다. 다이묘우(大名) 등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고용되어 검술을 가르치는 직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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