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
1633년 1월 25일 병사(病死) 64세
1570년 ~ 1633년.
히타치[常陸] 오오타[太田]성주. 아키타 번[秋田藩]의 번조(藩祖).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 무사시[武蔵]로 출진. 부친인 요시시게[義重]의 활약에 힘입어 히타치[常陸]를 통일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는 움직이지 않고 중립을 선택했기 때문에 데와[出羽] 아키타[秋田]로 전봉(転封)되었다.
아키타 전봉(転封)의 이유
이에야스[家康]에게서 온 명령서에는 데와[出羽]의 아키타[秋田]와 센키타[仙北]로 가라는 말만 있을 뿐 석고(石高)가 명시되지 않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요시노부[義宣]를 시작으로 가신들은 깊은 실망에 빠졌다. 이에야스[家康]가 내린 징벌 좌천 인사였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요시노부는 서군 총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의 깊은 친분으로 마음이 흔들렸기에 요시노부를 의심한 이에야스에게 칸토우[関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미츠나리와의 깊은 관계라 함은, 요시노부의 맹우였던 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 国綱]의 카이에키[改易 1]에 휩쓸려 사타케 가문이 처분받을 뻔한 때에 미츠나리 덕분에 위험에서 피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요시노부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豊臣]의 여러 다이묘우[大名] 간의 내분으로 인해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등 7명의 무장이 미츠나리를 습격했을 때에는 요시노부가 구출했던 때도 있었다.
역전의 발상
히타치 54만석은 히데요시의 주인장(朱印狀)에 의한 것이지만 그 중에 요시노부의 영지는 20만석. 거기에 은거한 부친 요시시게[義重]에게 5만석, 사타케 3가의 하나인 히가시 요시히사[東 義久]에게 6만석, 그 외는 요리키 다이묘우[与力 大名] 2들의 영지 등으로 인해 '나라 안에 나라'가 있는 상태였다.
요시노부는 아키타 전봉을 이러 변칙 체제의 타파와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영지는 전부 무시하고 아키타에서 새로 영지를 분배하였고 그것을 봉급으로 했다. 요시히사의 아들 요시카타[義賢]에게는 10분의 1인 6000석만을 지급했다. 가신중에서도 200석 이상은 불과 25명 이었다. 이것이 여태까지의 가격(家格 3), 관례에 구속 당하지 않는 새로운 정략의 실시를 가능케 하여 새로운 인재 등용도 가능하게 했다.
신천지에서 우선 영내(領內)의 안정에 힘써 쿠보타 성[久保田城] 축성과 안도우 씨[安東氏], 아키타 씨[秋田氏]에게서 이어 받은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에 힘을 쏟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농지를 개척하고 광산 개발에 힘썼다.
한편 막부가 일으킨 오오사카 겨울 전투와 여름 전투[大坂の陣]의 군역(軍役)은 물론 계속되는 막부의 요청에 의한 토목공사에도 나서서 응했다.
요시노부의 아키타 번에 30년 간 부과되어진 주요한 토목 공사에는 에도 성[江戶城] 수리를 시작으로 우치사쿠라다[內桜田]의 칸다바시 문[神田橋門]의 수리, 소토사쿠라다[外桜田] 코우지마치[麹町]의 토라 문[虎門]과 이어지는 담 공사 등 도합 5회.
군역(軍役)은 오오사카의 진[大坂の陣]외에 유리[由利] 령(領)의 인수, 에치젠[越前] 마츠다이라 타다나오[松平 忠直]의 카이에키[改易] 4에 동원 등 합계 4회, 쇼우군[将軍]이 쿄우토[京都]에 갈 때 같이 간 것이 4번, 그 외에 19번의 참근(参勤 5)이 있었다. 한 시도 맘을 놓을 수 없는 봉공(奉公)의 연속이었다.
거기에 막부에게 쓸데없는 의심 받을까 하여 성에는 천수각도 담도 쌓지 않는 철저함을 보였다. 적이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부친 요시시게[義重]의 물음에, "나가서 공격할 뿐입니다. 이런 작은 성에서 농성해서는 운도 트일 리 없습니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중앙집권화에 따른 정치 체제의 변화와 전술의 진보에 따라 축성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하에서 이에야스[家康]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로쿠다이쇼우(六大将 6)]로 평가되어 온 요시노부가 이렇게까지 막부에 대해 신경을 썼기에, 의심이 많은 이에야스도 요시노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어 "이 세상에 사타케 요시노부 만큼 정직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칭찬하면서도, "그래도 너무 정직해서도 곤란해"하며 충고할 정도였다.
병법가, 다도가(茶道家)로서의 일면
요시노부는 화약의 조제법을 연구해서 책을 쓸 정도의 병법가였다. 한 편 취미인 차를 즐기는 것도 달인의 영역에 달했었다.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따라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재진 중일 때 영지로 보낸 편지에 자기 스스로 칸토우[関東] 제일의 다도가라고 할 정도였다. 요시노부는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에게 직접 전수받은 다도를 말년에 즐겼다.
요시노부는 1633년 1월 25일. 에도의 칸다[神田]의 저택에서 죽었다. 향년은 64세.
[정월 7일부터 산기(疝氣)를 앓으셨다.]고 [羽陰史略]에 적혀 있다. 산기라는 것은 대장 또는 소장 혹은 허리부분이 아파지는 병이라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유언으로 순사(殉死 7)를 금했다. 막부가 순사 금지령을 발포하기 30년 전이므로 영단이라 할 수 있다.
17살에 가독을 이은 요시노부는 24살 때 일찍 죽은 정실과 나중에 맞아 들인 부인에게서도 아들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동생인 이와키 사다타카[岩城 貞隆]의 첫째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여 요시타카[義隆]로 이름 지어 세자로 삼았다. 아키타 6군(郡)에 20만석의 영지가 확정된 것은 요시노부가 죽은 다음해 였다.
-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 배하(配下)의 다이묘우[大名]. 즉 요시노부가 명령권을 가진 다이묘우. [본문으로]
- 가문의 등급. [본문으로]
- 이에야스[家康]의 2남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의 장남.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쳤으나 은상이 적은 것(차항아리[茶壷] 한 개)에 불만을 표하고 참근교대도 안 하였기에 카이에키. [본문으로]
-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내를 오고 가는 것. [본문으로]
- 여섯 개의 큰 가문. 토쿠가와, 마에다[前田],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우에스기[上杉]와 더불어. [본문으로]
- 주인이 죽으면 자살하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일본서적 번역 > 전국무장의말년(了)'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오에 카네츠구 - 주가 안태(主家安泰)를 건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후 처리 (6) | 2004.11.19 |
---|---|
우에스기 카게카츠 - 도리를 지킨 의리의 사나이 (4) | 2004.11.18 |
모가미 요시아키 - 자식들에게 들이닥치는 비극에 후회의 나날을 보내다. (0) | 2004.11.16 |
아시나 모리우지 (3) | 2004.11.16 |
다테 마사무네 - 천하쟁패에 지각한 오우슈우 패왕[奥州覇王]의 100만석 꿈 (20) | 2004.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