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 >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난세를 위해서 태어난 듯한 인간이다. 출신이 수수께끼이며 더불어 악역무도(惡逆無道)의 전형적인 인물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1570 4.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니죠우(二条) 어소(御所)에서 성대한 사루가쿠(猿楽)의 공연이 행해졌을 때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한 사람의 노장(老將)을 소개했다. 그것이 마츠나가 히사히데였다.

 이 분은 보통의 인간으로써는 절대 할 수 없는 짓을 세 번이나 하였지. 우선 주가(主家)인 미요시(三好) 가문을 멸망시킨 것, 다음으로는 쇼우군()을 살해하였고 거기에 나라(奈良)의 대불전(大佛殿)을 불태워 버렸다

 노부나가의 거리낌 없는 막말에 주변은 일순 긴장했다고 하는데 이 말에는 히사히데가 걸어온 길이 축약돼 있다.

 그러나 [분별(分別), 재각(才覺)은 남들보다 뛰어났으며 무용(武勇)은 무쌍(無雙)하며 또한 굉장히 욕심이 많았다]는 동시대 사람의 평도 있다.

 

 근세 성곽 건축의 선구자로써도 이름이 높다.

 1567년에 쌓은 나라(奈良)타몬야마(多聞山)성(城)은 외국인 선교사도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근세 성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흰 벽에 주택 형식의 타몬야구라(多聞櫓[각주:1])는 히사히데의 타몬야마 성에서 처음 만들어졌기에 그런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성 안에는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벽화가 있는 호화로운 쇼인(書院[각주:2])도 있었다고 한다.

 

 히사히데의 주인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도 또한 난세의 인물로, 주가인 호소카와(細川) 가문을 하극상에 의해 제치고 올라서서는 쇼우군까지도 압도하는 실력자였는데 그 과정에서 음지에서 활약한 히사히데의 힘도 컸다. 이 시기에 쿄우토(京都) 행정관(奉行)으로써 힘을 기른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되었다. 이 즈음 쵸우케이의 장남 요시오키(義興)가 병사하였는데 이는 히사히데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 쵸우케이가 죽자 히사히데의 마음 속에 쇼우군() 타도의 음모가 싹을 틔었다.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이라 불리는 미요시 가문의 중신들에게 쇼우군 요시테루(義輝)가 미요시 가문 토벌을 꾀하고 있다고 하여 불안을 조장시켰다. 쵸우케이의 양자(養子) 요시츠구([각주:3])를 지키자는 것이, 히사히데가 미요시 삼인중에게 불어 넣은 대의명분이었다.

 이리하여 미요시-마츠나가의 군세는 1565 5 19일 쇼우군 어소를 습격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히사히데는 이 쇼우군 암살을 함께 했던 미요시 삼인중과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쫓겨나 사카이() 도망친다. 히사히데는 예전에 이곳의 대관(代官) 적이 있었으며, 이곳의 대표자들인 나야(納屋)()과도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사히데는 사카이 나야중에 도움을 받아 재기할 있었고 곧이어 야마토(大和)에서 미요시의 군세를 쳐부수었다. 토우다이(東大)() 대불전을 불태운 것은 시기의 일이다.

 

 이로써 14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 후견인으로써 위세를 떨치게 되지만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오다 노부나가로 인해 종지부가 찍힌다.

 다음 해인 1568.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입경한 것이다. 히사히데는 싸워보았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노부나가에게 항복한다. 그러나 히사히데는 속으로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부나가가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격에 애를 먹게 되자 히사히데는 갑자기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간지 측이 츄우고쿠() 모우리(毛利)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에치고(越後) 우에스기(上杉)와도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대놓고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것이다.

 히사히데는 거성(居城) 시기산(信貴山)()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성도 일본 텐슈(天守) 시조라 일컬어지는 근세형의 성곽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패자(覇者) 노부나가의 기세에는 대항하지 못하였고 노부나가 휘하의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의 군세에 패배를 당한다.

 

 그 낙성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에 빠져있던 노부나가가 탐내던 천하의 명기 [히라구모의 차 솥(平蜘蛛茶釜[각주:4]]을 손수 깨 부수고 성에 불을 질러 자인했다는 것과 또한 막 낙성이 되기 직전에 평소 앓고 있던 중풍때문에 머리에 뜸을 떴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되었는데도 또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냐는 부하에게 자인을 하게 되었을 때 행여라도 중풍이 발작되어 몸을 못 움직이는 것을 남들이 배 가르는 것이 두려워서 꾀병을 부린다고 할 것 같아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히사히데다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일화이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미요시 쵸우케이의 유우히츠(右筆[각주:5])에서 입신 출세하였다. 쵸우케이의 대리인으로써 쿄우토(京都)에 머물며 여러가지 일을 처리했다. 기독교의 교회를 파괴하였으며 토우다이(東大)()의 대불전을 불태웠다. 1577 9 10일 야마토 시기산 성()에서 자해.

  1. 링크는 후쿠오카(福岡)성(城)의 것. [본문으로]
  2. 무가(武家)에서는 손님 접대나 여러 행사를 치르는 건물을 지칭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부친은 쵸우케이의 동생으로, 무용이 뛰어나 ‘오니소고우(鬼十河)’라는 이명을 가졌던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이다. [본문으로]
  4. 구모(蜘蛛)는 일본어로 거미를 말한다. 거미가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平) 모습이라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문서, 기록 담당관. [본문으로]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

1564 74일 병사 43

1522~1564.

칸레이[각주:1](管領)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의 집사(執事) 이즈미(和泉), 카와치(河内), 셋츠(摂津)를 지배. 이어서 쿄우토(京都)에 들어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를 추방. 또한 주군 하루모토(晴元)도 추방하여 킨키(近畿[각주:2]) 8개국을 영유하며 전성기를 누리지만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절정기의 나가요시


 전성기의 미요시 나가요시는 야마시로(山城), 야마토(大和), 카와치(河内), 이즈미(和泉), 셋츠(摂津) 등 킨키 지역에 더해 탄바(丹波)의 대부분과 하리마(播磨)의 일부 그리고 시고쿠(四石) 지역의 아와(阿波), 사누키(讃岐), 아와지(淡路), 이요(伊予)의 일부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조정(朝廷)에게서 종사위하(従四位下) 슈리노다이부(修理大夫)에 임명받았고, 바쿠후의 직책으로는 쇼우반슈우(相伴衆[각주:3]) 중 하나로 임명된 나가요시는, 1561 3 30 자신의 저택으로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방문을 실현시켰으며 또한 옻칠한 가마(輿[각주:4])오동나무의 문장(桐紋[각주:5]) 사용도 텐노우(天皇)에게 허가 받는 등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적자(嫡子) 요시오키(義興)나 동생인 요시카타(義賢)도 쇼우반슈우(相伴衆)에 이름을 올렸다. 그야말로 이 1561년 즈음은 미요시씨()의 절정기였다.


 나가요시의 절정에 달한 모습은 오동나무의 문장을 새긴 히타타레(直垂[각주:6])모습의 그림(다이토쿠(大徳)() 쥬코(聚光)()에 있다)에서도 알 수 있다.


운이 쇠퇴한 말년


 그러나 킨키와 시고쿠(四石) 지역에 위세를 떨치던 나가요시의 말년은 불행했다.

 영화(榮華)에서 곧바로 나락의 길로 떨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선 [오니소고우(鬼十河[각주:7]]라는 이명(異名)으로 아와(阿波)의 배후인 사누키(讃岐)를 휘어잡고 있던 막내 동생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 1561 4월 즈음에 병사했다. 사이가 좋지 않던 마츠나가 히사히데에 의한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다음으로 나가요시의 한 팔이기도 하며 본국 아와를 확실히 지배하고 있던 미요시 요시카타(호는 짓큐우())가 다음 해인 1562 3 5 [쿄우토(京都) 주변에서는 비할 바 없는 큰 싸움(近国無双大合戦)][속응인후기(続応仁後記)]이라 일컬어진 이즈미 쿠메다(久米田)의 싸움에서 하타케야마 타카마사(畠山 高政)에게 패하여 한창 일할 나이인 37살에 전사해 버렸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어가는 시기에 미요시 내부에도 커다란 불씨가 존재하였다.

 그 불씨란 나가요시의 비서관(右筆)으로 시작하여 출세한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말한다. 히사히데가 얼마나 권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1561년 즈음에 루이스 프로이스[각주:8]가, [히사히데는 미요시의 부하이지만 나가요시에게서 재판권과 통치권을 빼앗아 천하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다(日本史)]'등에서 평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정(朝廷)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아첨하는 히사히데는 미요시 내부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터질 폭탄이 되어있었다.


 한편 주변도 하타케야마 씨()나 네고로 사(根来)의 중도(衆徒)를 시작으로 한 반() 미요시 세력이 물밑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다. 쇼우군 요시테루도 겉으로는 미요시 씨()의 보호 아래 있는 척을 하면서도 반 미요시세력을 응원하고 있었다. 조정 내부에서도 미요시마츠나가를 불쾌히 여기는 귀족(公家)도 많았다.


불행이 이어진 마지막


 이렇게 힘든 시기에 나가요시에게 있어 인생 최대의 불행이 찾아왔다.

 적남 요시오키의 죽음이었다. 1563 8월 병에 걸려 같은 달 25일에 아쿠다가와 성(芥川)에서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소문으로는 히사히데가 [조부나 부친에 버금가는 기량(父祖らず器量勝)][続応仁後記]이라 일컬어지는 요시오키의 뛰어난 재능을 두려워 하여 먼저 손을 써 독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1564 5 9일.
 요시나가는 자기 손으로 수군을 이끌고 있던 아와지(淡路)의 동생 아타기 후유야스(安宅 冬康)를 이이모리(飯盛)()에서 죽여버린 것이다. 가인(歌人)임과 동시에(茶道)에도 뛰어난 문화인(文化人). 거기에 의리와 인정이 두터운 자비심 깊은 인물이기도 하였으며 나가요시의 오만함이나 남을 경시하는 것을 보고, 방울벌레를 보내 '여름 벌레라도 자애로운 마음으로 기르면 겨울까지 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더욱 그러합니다'라고 충고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후유야스의 인망(人望)은 카즈나가(一存), 요시카타(義賢), 요시오키(義興)의 계속된 죽음으로 인해 더욱 높아만 갔다. 모반(謀叛)의 야망이 있다던가, 반역의 기운이 있다는 풍설을 전하는 히사히데의 참언(讒言)을 믿고 나가요시는 후유야스를 죽였다.


 확실히 미요시 가문에서 유일하게 남은 실력자를 히사히데가 없애려 한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후계자로 선택하여 맞아들인 요시츠구(義継 =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의 아들)가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의 앞길을 생각하여 나가요시가 꾸민 일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불과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적남 요시오키 그리고 소고우 카즈나가, 미요시 요시카타, 아타기 후유야스라는 자신을 지탱해 온 유능한 동생들을 전부 잃어버린 불행이 이어진 것이다.


 후유야스가 불운한 죽음을 당한 불과 40여일 후인 1564 6 22일.
 요시츠구는 가문 상속에 관한 허가를 내려준데에 대한 답례를 하기 위하여 4000여의 무리를 이끌고 쿄우토(京都)에 갔다. 요시츠구는 이이모리 성()으로 곧바로 돌아왔는데 10일 후인 7 4 나가요시는 성 아래의 저택에서 병사했다. 43세였다.

 나가요시는 1561년 즈음부터 자주 병에 걸렸다고도 하는데 적남 요시오키의 죽음에 많이 낙담한 나가요시는 후유야스의 죽음 이후 병이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또한 말년은 렌가(連歌)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확실히 어지럽게 변하는 정치세계에서의 생활이 나가요시의 마음을 황폐화 시켰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역직으로 굳이 따지자면 '정승'이라고 할 수 있음. [본문으로]
  2. 쿄우토(京都) 주변. 즉 수도권. [본문으로]
  3. 쇼우군이 궁궐에 입궐하거나 여러 곳을 방문할 때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을 지칭. 칸레이(管領) 다음 가는 권위를 가졌다. [본문으로]
  4. '누리고시'라 읽는다. 상자에 옻칠을 한 가마로 쇼우군이나 몬제키(門跡 – 황족이나 높은 쿠게(公家)가 출가한 특별한 절)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5. 원래는 황가의 문장으로, 텐노우(天皇)에게서 공이 있는 사람에게 하사되었다. [본문으로]
  6. 무가(武家)의 예복. [본문으로]
  7. 악마와 같은 소고우. 즉 악마라 불릴 정도로 맹장임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8. 포루투갈의 선교사로 당시 일본에 대하여 쓴 日本史가 당시의 여러 사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