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시 쵸우케이는 당시의 쇼우군(将軍) 부자를 쿄우(京)에서 추방하는 등 킨키(近畿) No.1의 실력자로 올라섰지만 음모가(陰謀家)라기 보다는 오히려 섬세한 문화인(文化人)이었다.
고전(古典)을 즐기고 와카(和歌)나 렌가(連歌)를 읊으며, 다인(茶人)들과 함께하는 풍아(風雅)한 면이 있었다. 선(禪)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다이린소우토우(大林宗套) 화상(和尙)에게 지도를 받았다. 특히 사카이(堺)의 호상(豪商)들과는 다도(茶道)와 선(禪)을 매개로 하여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에도 깊은 이해를 가졌다고 한다.
렌가의 자리에서는 마치 신이 들린 듯이 굉장히 신비로운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쥘부채(扇子)를 이용하거나 할 때도 예법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왼손으로 거들어 오른손으로 조용히 펼치고 접어서 놓을 때는 원래 있던 곳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놓았다고 한다. 범상치 않을 정도로 세세한 신경의 소유자였다.
당시 가톨릭 포교자의 눈에는 일본의 지배층이 다음과 같이 비쳐졌다고 한다.
수도의 통치는 삼 인이 행한다.
제1의 사람은 ‘쿤보우사마(=쿠보우(公方),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라고 일컬어지는 일본 전국의 왕.
제2의 사람은 ‘미요신도노(=미요시 쵸우케이)’라고 하는 ‘쿤보우사마’의 신하.
제3의 사람은 ‘마스만가(=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라고 하는 ‘미요신도노’의 신하이다….
이런 정도의 실력자이면서 쵸우케이는 관위(官位)를 바라지 않고 종사위(從四位) 슈리노다이부(修理大夫)에 머물렀으며 바쿠후(幕府)에서의 역직(役職)도 쇼우반슈우(相伴衆 – 바쿠후의 중신)에 만족했다고 한다.
미요시 가문의 가계(家系)는 원래 아와(阿波) 슈고(守護) 호소카와 씨(細川氏)의 지배하에 있는 일개 토호(土豪)에 지나지 않았다. 증조부 유키나가(之長)의 대(代)부터 일약 쿄우토(京都)의 중앙 정계에 등장하는데, 이후 피로 점철된 3대의 역사였다. 이 3대는 전부 이불 위에서 죽지 못했다.
부친 모토나가(元長)의 마지막은 무시무시하다.
모토나가는 12대 쇼우군 요시하루(義晴 1)를 받들고 있던 호소카와 타카쿠니(細川 高国)에 대항하여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와 함께 요시하루의 배다른 형제인 요시츠나(義維 2)를 내세워 싸움을 계속하였지만 후에 하루모토에게 버림받아 사카이의 켄폰(顕本)사(寺)에서 자살을 강요 당했다. 이 때 모토나가는 너무도 분한 나머지 자기 손으로 장(腸)을 끄집어 내어 천장에 던져 죽었다고 한다.
이 때 쵸우케이 불과 10살. 은밀히 복수의 칼날을 가며 성인이 되었다.
1542년.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온다. 시코쿠(四国)에 내려가 아와지(淡路), 아와(阿波)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다시 되돌아 와서는 키자와 나가마사(木沢 長政)를 카와치(河内)에서 죽이고 이어서 하루모토의 부하이며 같은 일족인 미요시 마사나가(三好 政長)와 셋츠(摂津)에서 전사시켰다.
(이에 대해서는 초코벌레님의 이 곳을 함 가보시길……
호소카와 – 미요시의 싸움(http://blog.naver.com/chocoworm/30006940287))
쵸우케이의 무위(武威)는 이제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각지의 토호가 앞다투어 쵸우케이 밑으로 모여들었다. 쵸우케이의 킨키(近畿) 제압에 맞추어 시코쿠(四国)에서는 동생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미요시 유키야스(之康 3), 소고우 카즈나가(十河 一存 4), 아다카(아타기) 후유야스(安宅 冬康)의 세 명이다.
이 일족은 아와(阿波), 사누키(讃岐)나 세토 내해(瀬戸内海)에 세력을 확대했다.
이리하여 미요시 가문의 하인이나 하인이라 할지라도 팔꿈치를 펴고 어깨를 흔들거리며 쿄우(京)의 대로를거들먹거리며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쵸우케이에게는 권력자로써의 비정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호소카와 하루모토를 용서하는 등 문화인적인 허술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허술함에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파고든다.
1562년. 적자 요시오키(義興)가 급사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독살이라고들 한다. 이 적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쵸우케이는 갑자기 소극적이 되어 히사히데의 참언(讒言)을 믿고 동생 후유야스까지 죽여버리고 만다. 그리고 얼마 후 쵸우케이도 죽었다.
그 장례식 광경을 쿄우토(京都) 쇼우코쿠(相国)사(寺)의 중 사이쇼우 쇼우(죠우)타이(西笑 承兌)가 그의 일기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목메어 울었고 한탄하며 슬퍼했다. 쵸우케이가 생전에 베푼 은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1522년생.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센쿠마마루(千熊丸-'치쿠마마루'라고도 읽는다), 후에 노리나가(範長). 칸레이(管領)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집사(執事)가 되어, 이즈미(和泉), 카와치(河内)를 대관(代官)이라는 형식으로 지배. 쿄우토(京都)의 병권을 잡자 그 세력은 킨키(近畿), 시코쿠(四国) 8개국에 이르렀다. 1564년 죽었다. 43세.
Ps; 長慶는 ‘나가요시’로 읽으나, 이 책은 존중해서 이름을 읽어주는 ‘유우소쿠요미(有職読み)’인 ‘쵸우케이’로 쓰여있기에 계속 ‘쵸우케이’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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