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년 4월 27일 병사(病死) 73세.
1553년 ~ 1625년.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의 장남. 할아버지인 모토나리[元就]가 죽은 뒤 가독 상속. 츄우고쿠[中国] 지방에 120여 만석을 영유(領有)하며 토요토미[豊臣] 정권의 오대로(五大老) 1중 한 명이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이 되지만 패하여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 국[国]으로 감봉(滅封). 쵸우슈우 번[長州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은거와 오오사카[大坂]의 전투
테루모토는 1553년 1월 20일에 아키[安芸]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모우리 타카모토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타카모토의 급사(急死)로 인하여 할아버지인 모토나리의 후견(後見)을 받아 11살에 성인식을 치렀다.
젊어서부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등을 상대하며 성장했다.
히데요시의 말년에는 오대로(五大老)라는 중직에 임명되어 츄우고쿠[中国] 지방 9개국(国) 1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군림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의 총사령관이면서도 중요한 때 움직이지 않았다.
테루모토는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지자마자 머리를 깎고 '겐안소우즈이[幻庵宗瑞]'라는 호를 칭하였다.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国)으로 감봉 되어, 번(藩)의 수도를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북쪽 해변의 땅 하기[萩]로 하는 이봉(移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테루모토의 말년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쉬기에는 일렀다.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는 토쿠가와 씨[徳川氏]에 대한 충성과 히데요시가 죽을 때 말한 '히데요리를 부탁한다'라는 유언 사이에서 고심한 끝에 토요토미 가문[徳川家]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의미로 극비리에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 秀頼]에게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을 파겼하였다.
사실 사노 도우카라는 것은 위명(僞名)으로 정체는 필두(筆頭) 노신(老臣)인 시시도 모토츠구[宍戸 元続]의 동생인 나이토우 모토모리[内藤 元盛]였다.
테루모토는 도우카에게 병량(兵糧) 1만석(石) 2을 대신한 황금(黃金) 500매를 주고서는 그의 가족과 자손은 확실히 뒤를 돌보아 줄 테니 걱정 말라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입성시켰다.
단, '만약 토요토미 쪽이 이겼을 때는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10개국(国)을 줄 것'이란 약속을 히데요리와 맺었다.
그러나 토요토미 측이 패배하여 오오사카 성이 낙성(落城)되고,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에도 도우카가 살아 남았기에 문제였다. 이에야스는 도우카가 모우리의 가신(家臣)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테루모토는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쿄우토[京都]에 숨어있던 도우카를 잡아서는 할복(割腹)시키고, 목을 이에야스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또한 테루모토가 ‘뒤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던 도우카의 장남인 모토요시[元珍]와 둘째인 아와야 모토토요[粟屋 元豊]도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에야스는 두 아들까지 죄를 주고 싶지 않다며 귀국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테루모토는 둘 다 아비 도우카와 마찬가지로 배를 가르게 하여 막부(幕府)에게 자신은 무죄라는 것을 주장했다.
충신을 죽여서 가문을 지킨다.
모우리의 그런 전통으로 이후에도 바쿠후에게 카이에키[改易]당하는 일 없이 메이지 3 시대[明治時代]를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자 테루모토도 그다지 위기감 느끼는 일 없이 - 은거생활은 주로 모우리 종가(宗家)의 안태(安泰)를 위해 힘썼다.
우선은 1616년.
테루모토의 딸과 킷카와 히로마사[吉川 広正] 4와의 결혼이었다. 킷카와 가문[吉川家]에 시집 보내기에 앞서 테루모토는 제멋대로이고 성질이 급한 딸에게,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가문과의 강한 유대를 위해서이니 불만이 있더라도 뭐든 참아야 하느니라”
라고 아비답게 간절히 타이르고 거기에 결혼 지참금[化粧料]으로 5천석을 주어서 시집 보냈다.
결혼으로 인해 이와쿠니 령[岩国領] 킷카와 가문과의 결속이 두터워지자, 1617년에는 둘째 아들인 나리타카[就隆]에게 스오우[周防] 토쿠야마[徳山]에 3만석을 나누어 주어 '토쿠야마 번[徳山藩]'을 만들었다.
1600년에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의 '쵸우후 번[長府藩]' 3만 6천석을 창설.
나중의 일이지만 1653년에 히데모토의 둘째 아들 모토토모[元知]의 '키요스에 번[清末藩]' 1만석이 세워져, 종가(宗家) 보좌를 맡는 모우리 삼가(三家)가 만드는 등 영국(領國) 경영을 강화해 갔다.
1617년에는 쵸우후의 모우리 히데모토의 딸 쇼우키쿠코[松菊子]를 토쿠야마의 나리타카와 결혼시켜 쵸우후 번[長府藩]과 토쿠야마 번[徳山藩]의 결속도 강화시켰다.
1619년.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상락(上洛)이 있었다 5.
테루모토는 히데타다와 만나기 위해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락.
간신히 히데타다의 숙소인 니죠우 성[二条城]에 입성했다. 테루모토의 몸을 걱정한 히데타다의 배려로 가마를 타고 현관까지 왔고,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 카미오 모리요[神尾 守世], 전의(典醫)인 마나세 마사츠구 6[曲直瀨 正紹] 등의 도움으로 입장하여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손에 이끌려 겨우 히데타다와 대면할 수 있었다.
“전 병이 들어 약해졌습니다. 앞으로 모우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뜻을 전한 후 영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테루모토의 큰 아들로 초대 하기 번주(藩主)인 모우리 히데나리[秀就]에게 가문의 번영과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서 타이르고 20개조에 이르는 유훈(遺訓)을 남겨 히데나리에게 반성과 자숙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쇠약한 몸을 쉬는 일 없이 1625년 4월 27일.
향년 73세로 하기 성[萩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옛 텐쥬 원[天樹院]에 있는 테루모토 부부의 묘 - 하기 시[萩市]
-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 1석은 어른 한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 약 150Kg. 즉 1만석이면 쌀 1500톤. [본문으로]
-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 세키가하라 때 서군이던 모우리 가문을 혼란에 빠뜨려 전후 감봉으로 몰아 넣었던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의 아들. [본문으로]
-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 궁중 의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