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최종화에서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斎]가 어렸을 적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말하길,
 “난세에서 살기 싫다면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정점에 서서 난세를 끝내거라” 

 이는 아사쿠라[朝倉] 5대 100년의 번영을 쌓은 중흥조(中興祖)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의 [아사쿠라 소우테키 말씀집[朝倉宗滴話記]]에 나오는 말이 출처이다. 소우테키는 1477년생이며 셋사이는 1496년생. 기이하게도 아사쿠라 소우테키와 타이겐 셋사이는 같은 1555년에 죽는다. 그야말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인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소우테키는,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이기는 것이 최고다

 라고 하였다. 아사쿠라 가문[朝倉家]의 군사 책임자[軍奉行]로 생애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무장의 말이다. 그것은 소빙하기로 인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중세인(中世人)의 말이기에 무게감이 있다.

 소우테키는 간단하게 무자(武者)의 마음가짐을 말한 거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무자란 기본적으로 소규모이긴 하여도 재지영주(在地領主)이다. 자립한 센고쿠의 마을=총촌(惣村)의 영주는 그 마을 내의 재판권과 징세권[徵稅權]을 가진다. 그 영주들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살아 남는다”를 규범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거기에는 조정(朝廷)도 막부(幕府)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다. 그 행간에서 “나에 대한 것은 내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냉철한 사상이다. 철포나 칼로 무장하는 것도 자력(自力). 어떤 영주에게 붙는가도 자력.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자력. 물길 싸움으로 물을 확보하는 것도 자력. 중세인은 모름지기 자력(自力)이었던 것이다. 이를 역사용어로 “자력구제(自力救濟)”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자력’으로 ‘구제’한다는 사상이다.

 이 자력구제가 인정되는 아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중세에는 전쟁이 필요했으며 전쟁이 분쟁해결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4권에서 언급했듯이 “약탈[乱取り]’이라는 ‘전쟁작법(戦争作法)”에 따라 전투 그 자체가 국가 운영의 한 수단으로 변해간다.

 이 자력구제를 확실히 명문화(明文化)하여 법제도로 확립시킨 것이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지 않을까? [이마가와 법률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내 영국[国]에 법도를 반포
(自らの力量を以って、国の法度を申しつけ)

함으로써,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자력’으로 재판권, 징세권을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즉 ‘자력구제’를 ‘영국[国]’ 단위로 확대시킨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확대하여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가 되어, 마침내 오와리[尾張]에 침공하지만 도중에 쓰러진다. 그러나 ‘영국을 자력구제’한다는 사상은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之次第]] 등 각 가문의 분국법(分国法)[각주:1]에 영향을 끼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오다 정권[織田政権]이 어떠한 천하통일을 구상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정권을 이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토쿠가와 정권[徳川政権]을 보면 ‘자력구제’를 어떻게 하면 배제하느냐가 정치과제가 되어 간다.
 토요토미 정권은 ‘태합검지[太閤検地]’로 석고(石高)를 명확히 하고, ‘칼사냥[刀狩り]’으로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다툼 정지령'[喧嘩停止例]’으로 총촌(惣村)의 전투를 금지하였고, ‘총무사령(惣無事令)’으로 다이묘우[大名]’간의 다툼을 중재하였다. 이는 전부 ‘자력구제’의 부정이었다. 자력구제를 뼛속까지 이해하며 하극상(下剋上) 최대의 구현자인
히데요시[秀吉]가 이런 것들을 전부 규제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그리고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서게 되자 전일본의 재판권, 경찰권을 막부가 장악하게 되어 중세의 종말, 근세의 시작을 보게 된다. 유일하게 신고제에 따른 ‘복수[仇討]’만이 허용되게 되지만, 이는 더 이상 ‘자력구제’라고 볼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렸을 적 셋사이와 요시모토에게 교육받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살아가며 그야말로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리고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영국[国]에 법령을 반포’,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어 난세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자신의 영지에 반포한 법.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행해진 전투[合戦]에 대해서는 굉장히 복합적인 연구가 다수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런 다채로운 세계가 우리들을 매료하고 있다. 이번에는 작중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전시약탈[乱取り=乱妨라고도 한다]이라는 단어를 축으로 당시의 전투 풍경에 대해 추구하고자 한다.

 [갑양군감[甲陽軍鑑]]에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한 말로 유명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전투에서 이기려는 목적은 남의 영지를 점령하여 자국의 영지를 확대하는 것에 있다. 영지를 확대해야만  자국의 사람들은 은상을 얻어 기뻐한다. 때문에 소령(所領)을 얻고 거기에 또 가증을 받아 입신출세하는 것이 사무라이[侍]의 본망인 것이다.
  즉 “창 한 자루로 무공을 세워 언젠가는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전쟁터로 향한다”는 사상이며 지금까지의 센고쿠 시대 전투 이미지는 이 말에 다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당시의 전투를 묘사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각서[日本覚書]]의 기사를 살펴보자. 일시를 보면 ‘1585년 6월 14일’이라고 한다. 전 661항목 중 3개 항목을 소개한다.

一. 우리들(유럽인)에게는 하사관, 소대장, 십인조장(十人組長), 백인대장(百人隊長) 등 (계급이) 있다. 일본인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一. 우리들의 국왕이나 대장은 병사에게 보수를 준다. 일본에서는 병사들 각각이 종군하면서 먹거나 마시거나 입는 것들을 전부 자비로 해야만 한다. 
一. 우리들은 토지나 도시, 촌락 및 그곳의 부(富)를 빼앗기 위해 다툼이 일어난다. 일본의 전투는 언제나 대부분이 밀, 보리, 쌀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일본 군대는 지휘계통을 가진 계급제도가 없고, 병사들은 종군 중에 식사나 의복도 전부 자비로 준비하며, 토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쌀이나 보리 등의 식량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한다.
 프로이스는 일본 무사의 군대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핀 [갑양군감]의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과연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다시 [갑양군감]을 보면 이런 기사가 눈에 띈다. 텐분11년[각주:1]에 행해진 [다이몬 고개 전투[大門峠合戦]]의 한 구절이다.
10월 7일에 코우후[甲府]를 출진했다. <중략> 25일에는 우미지리[海尻=현 미나미사쿠 군[南佐久郡]]로 출진하시는 것이 결정되자 주민의 가옥을 부시고[小屋落し][각주:2], 약탈[乱取り], 전답에 남아 있던 농작물 약탈[刈田働き]를 행하는 잡병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중략> 약탈이 3일간 밤낮에 걸쳐서 행해졌다. 내일부터는 조금 멀리 약탈하러 나가고자 하여 아침에 출발 저녁에 본진에 돌아왔다.
 여기서 나오는 약탈[乱取り]이라는 것은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납치, 물건의 약탈 등을 말하는 단어다. 전쟁하러 간 곳에서 먹을 수 있는 것, 사용할 수 있는 것,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등 모든 것을 빼앗았다는 묘사다. 
 결국 4일 후 신겐은 스와 대명신[諏訪大明神]에게서 신탁을 받았다는 형식으로 약탈을 정지시킨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내용은 프로이스가 기록한 것을 방불케 하여 군단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잡병의 약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이 당시 전쟁터 약탈[乱取り]의 실태가 아닐까? 앞서 본 ‘입신출세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약탈[乱取り]을 위한 전투'인 것이다. 유추해 보자면 신겐이 주창한 ‘사무라이의 본망’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부대를 이끄는 무장(武將)의 마음가짐이지 적장의 목을 베어 은상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잡병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 4권 19화에 등장하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1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도 ‘약탈[乱取り] 당하였다. 1550년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카오 성[中尾城]에서 농성하던 요시테루는 미요시 군의 공세에 결국 철퇴. 성을 넘겨 주고 도망쳤다. ‘토키츠구 경기[言継卿記]’를 살펴보자. 

오늘 밤(11월 21일), 히가시야마[각주:3] 무가[東山武家=요시테루[義輝]]의 성이 함락되었다.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중략> 그저께 불타고 남은 건물에 다시 불을 질러 약탈했다고 한다. 히가시야마 무가의 성 오늘 미요시 군세 약탈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미요시 군은 공성전에서 승리한 후 철저하게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 쇼우군의 권위도 잡병들의 약탈[乱取り]를 막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잡병들의 약탈[乱取り]을 묵인했다. 약탈이 전투에 참가시키는 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가 보다 합리화된 텐쇼우 연간[天正年間] 즈음이 되자 ‘약탈[乱取り]’은 주로 인간을 납치하는데 의미가 좁혀진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전투의 상태를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은 전투의 작법을 볼 수 있다. 
 ①. 출진한 군단은 야전이나 공성 등의 전투를 행한다. 
 . 승패가 결정된 뒤 또는 전투가 행해지던 중에도 잡병들은 약탈[乱取り]을 한다. 쌀이나 일용품 등(또는 인간)을 약탈한다. 사무라이 타이쇼우[侍大将]나 다이묘우는 그런 약탈[乱取り]을 묵인한다. 
 . 전투에 승리하여 약탈[乱取り]이 행해지는 기간(3~4일간) 후에 푯말을 세워 [약탈 금지] 등의 명령을 내린다. 
 . 다이묘우는 점령한 영지(領地)의 지배권, 잡병은 빼앗은 쌀이나 일용품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온다. 

 그야말로 기근에서 탈출하기 위한 전투 – 라는 측면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노부나가[信長]가 특별히 귀여워하던 하얀 매(鷹)에게 ‘란토리[乱取り] – 즉 약탈 –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란토리가 나오는 매사냥을 보기 위해서 군중이 모일 정도로 인기를 떨쳤다고 한다. 우뢰와 같은 갈채를 받으면서 사냥감을 잡는 ‘란토리’. 센고쿠 시대의 세상을 잘 표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1542년. [본문으로]
  2. 진영에 세우는 가건물을 세울 때, 나무를 베어 가공을 하면 시간이 걸리기에 주변 가옥을 부셔서 세웠고 이것을 小屋落し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아시카가 쇼우군의 정무소가 있던 지역 이름.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정신구조인 ‘하극상(下剋上)’이 “아래(下)가 위(上)를 이긴다(剋)”는 주종역전이라는 것을 본 작품에서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무가사회(武家社会)의 주종관계(主従関係)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가? - 정신적인 면에 주안을 두며 살펴보자.

 중세의 주종관계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맘에 안 들면 주인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 요시나가[可児 才蔵 吉長 - 1554년~1613년]’는 그 대표적인 무사라 할 수 있다. 그의 과거을 살펴보면 엄청나다. 사이토우 타츠오키[斉藤 龍興][각주: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2],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로 주군을 바꾸었다. 센고쿠의 시대를 질주한 사나이로서 떳떳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에게 “아래가 위를 먹어 치운다”는 것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위를 존중하지 않는 정신구조는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종관계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막부(幕府)를 연 ‘쇼우군[将軍]’은 휘하에 가신(家臣)을 두었다. 이를
고케닌[御家人]이라 한다. 이 고케닌은 쇼우군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에 ‘지두(地頭-じとう)에 임명 받았다. 이는 어느 일정한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 지배권을 침해 당할 때에는 쇼우군이 나서서 권리를 부활시켜 주었다. 이것이 ‘본령안도(本領安堵)’. 쇼우군에게서 받은 ‘어은(御恩)’이다.

 대신 고케닌은 쇼우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것이 ‘봉공(奉公)’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출진하였다. 목숨을 바쳐 자기 영지[本領]를 안도 받으려 노력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주종관계 즉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어디까지나 상호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쇼우군이 ‘어은’을 해주지 않는다면 ‘봉공’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적인 ‘절대복종’이 아니라 ‘give and take’에 가까웠던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라면 ‘어은’을 받지 못했기에 당신에게는 ‘봉공’할 수 없습니다 – 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정신을 가졌던 고케닌은 발생 당시 숫자가 얼마큰 있었을까?
 1185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요시츠네[義経]를 토벌하기 위해 모은 15개 쿠니[国]의 고케닌은 2096명이었다고 한다. 즉 ‘무사(武士)’는 1 쿠니[国] 당 130여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외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즈음의 전투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경제력(병력동원력)을 과시하며, 실제의 전투는 일기토[一騎打ち]에 의한 것이었기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는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더 말하자면 병기가 되는 철(鉄)이 귀중품이었기에 일반병사들에게까지 병기가 충분히 전해지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무사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동국(東国)에서 이 숫자인 것이다. 이외로 무사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소빙하기가 무가사회(武家社会)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30년, 여름에 이상기온이 찾아왔다. 6월9일에
무사시[武蔵] 카네코 장[金子荘]과 미노[美濃] 마키타 장[蒔田荘]에 눈이 내렸다. 이 보고를 받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동요했다. 이상기온은 곧바로 벼농사의 괴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7월에 들어서자 여러 지역에 서리가 내렸다.
 ‘이본탑사장첩(異本塔寺長帳)[각주:3]’에 따르면 “일본 전국이 겨울과 같아 매우 추웠다”는 상태였던 것이다. 쿄우토[京都]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확실히 비상사태였다. 이때 막부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장치를 만들었다. 이즈[伊豆]와 스루가[駿河] 지역의 예를 살펴보자. 막부가 보증하니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도록 도소우[土倉]에 명령하였다. 만약 백성이 쌀을 변상하지 못하더라도 막부가 대신해서 변상한다는 것이었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따르면 이 연도에 덕정령(徳政令)을 취한 다음에도 약 9000여 석의 비축미를 방출했다고 한다.

 이렇게 몇 백 년 정도 이어진 것이다. 비축미도 바닥을 보였다. 막부는 점점 체력을 잃었고 그에 따라 군사력도 저하되었다. 이젠 ‘본령안도(本領安堵)’같은 것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막부의 승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막부가 아무리 ‘본령안도’를 하더라도 기근으로 인해 마을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막부의 권위는 점점 떨어졌다. 그렇게 점차 일본인의 정신구조에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구제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의 마음에서, “또 쌀을 달라고”라는 억지스런 요구로, 나중에는 “어째서 막부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냐!?”라는 원망으로 생각이 바뀌어 간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총촌(惣村)=센고쿠(戦国)의 마을’이 출현하게 된다. 이 마을은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이라는 주종관계를 몰랐다. 원래 고케닌[御家人]과는 혈연관계도 아니었다. 새로운 ‘자칭’ 무사(武士)’가 태어났다. 그들이 바로 ‘코쿠진[国人]’이며 ‘재지령주(在地領主)’로 그야말로 쿄우토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미천한 자들이었다. 최대로도 하나의 쿠니[国]당 130명밖에 없었던 과거의 무사계급이 센고쿠 시대에 볼 수 있는 대군단을 편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에 쐐기를 박듯이 1450년대의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인하여 막부의 통치능력 결여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제 더 이상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없었다. 즉 ‘위(上)’는 없었다. 새로운 무사단이 ‘아래(下)’라고 한다면 통치능력이 없는 막부, 슈고[守護] 등 ‘위’를 물리치려는 사상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하극상의 행동규범이 없었다면 센고쿠 시대를 살아서 헤쳐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3권속에서 ‘오다 야마토노카미 노부토모[織田 大和守 信友]’[각주:4]가 “신하를 지키지 않는 주인은 주군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오와리 슈고[尾張守護]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를 쓰러뜨린 것은 센고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에 넣은 ‘서바이벌 방식’이 아니었을까?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사이토우 도우산[斎藤 道三]의 손자. 미노[美濃]의 영유하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3. 주로 아이즈[会津] 지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마타다이[守護又代 - 슈고다이[守護代]의 대리].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織田 信長]의 가문인 '단죠우노죠우 가문[弾正忠家]'의 주가(主家)였다. 1554년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의 아들 시바 요시카네[斯波 義銀]가 가신들을 이끌고 낚시하러 간 사이에 슈고[守護]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 [본문으로]

 중세사회는 소빙하기에 따른 한랭화가 진행된 기근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과연 ‘금융’이라는 것이 발행할 수 있었을까? 우선 농민의 벼농사 경제 실태를 살펴 보자.
 농민들은 벼농사를 하기 위해 봄에 볍씨를 빌려 수확을 거둔 가을에 쌀로 반환하는 행위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을
출거(出擧)라고 한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쌀’이라는 농작물은 마법과 같은 작물이다. 우선 쌀의 생산력은 모든 농작물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쌀알 하나가 수확기에는 100~300알 정도의 낟알을 가진 이삭으로 자란다. 단순계산으로 생산효율은 100배에서 300배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몇 년간은 보관도 할 수 있다. 창고에 넣어두면 비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볍씨의 이자율은 몇 퍼센트였을까?
 1459년 11월 2일에 제정된 '무로마치 막부법 추가법[室町幕府法追加法]' 260조에는 이자율이 정해져 있다.

전당물의 이자율에 대해. 옷…(중략)등은 5부이자로 한다. 쟁반, 향합, 차제구(茶諸具)…(중략) 미곡(米穀) 등은 6부이자로 할 것
 5부이자이기에 월리 5%에 연리 60%, 6부이자는 월리6%에 연리 72%이다. 더구나 중세의 관례로 이자는 원본의 2배까지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어느 농민이 1알의 볍씨를 빌려 100알의 수확을 거두었다고 하자. 쌀은 6부이자이기에 이자율은 72%. 따라서 2알로 갚는다. 5% 정도의 세(
조용조)로 5알. 수확량 중 경작한 농민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93알.
 간단히 변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 농민의 감각이다. 이런 감각으로 말하면 연리 50%나 100%라고 하여도 꼭 폭리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금융업자를 ‘도소우[土倉]’라고 부른 것은 원래 쌀을 빌려주었던 것이 발단이기 때문이다. 그 쌀을 바탕으로 ‘쌀 금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발달한 것이다. 그러다가 보다 보존이 용이한 화폐와 병용되어 갔다.
 물론 ‘도소우’에는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도 있었다. 여기에 작은 도소우에 빌려주는 큰 도소우와 같은 존재가 생기는 것도 필연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쌀을 비축할 수 있는 신사(神社), 사원(寺院)도 금융활동을 행하였다. 여기에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로 이어지는 금융의 원천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세의 농촌사회에 타격을 주는 소빙하기가 찾아온다. 끊이지 않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내일의 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궁핍한 농민들은 볍씨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쌀알을 먹어버리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무리 생산효율이 높은 농작물이라도 심지 않으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제로는 아무리 큰 수를 곱해도 제로인 것이다.

 더욱이 기근의 만성화로 화폐보다 식량 쪽이 귀중해졌다. 『잡병 이야기[雑兵物語]』’에 “갑옷을 팔아서도 주먹밥 하나와 교환할 것”이라는 서민의 감각은 당시의 농민이 가진 숨길 수 없는 심경이 아닐까?
 아무리 돈을 가지고 있어도 먹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기근 때는 아무리 돈을 주어도 쌀을 팔지 않았다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도소우’에는 쌀이 아니라 ‘화폐’가 쌓여 갔다. 그래서 도소우도 자기방위라고 할 수 있는 ‘폭주’를 시작한다. 앞서 본 무로마치 막부법 추가법에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여러 도소우 이자율에 대해서. 근년 마구 방치된 채인 것에 안타까운 일이다. 고리에 대해서는 도소우 조합끼리 이자율을 정하여 엄밀히 지킬 것
 중세의 임차계약은 개별계약이었다. 즉 도소우들은 막부의 이자제한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근, 가뭄이 들 때마다 이자는 크게 오르고 내렸다. 하지만 이자의 근본이 되는 농작물(실물경제)의 생산효율이 오르지 않았는데도 이자가 오르거나 하면 갚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도소우 들은 ‘차용증 매매’라는 파생상품을 개발하였다. ‘오케하자마 전기’의 작품 속에서도 나오는데 ‘차용증’ 그 자체를 매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용증은 매매될 때마다 가격이 올라갔다. 매매될 때마다 논밭이나 장원(荘園), 조합의 전매권이 더해졌다. 그렇게 토지나 전매권을 손에 넣어 부(富)를 축적해 간 것이다. 물론 그러다보니 궁핍한 농민들이 세상에 넘치게 되었다.

 그래서 행해진 것이 당시의 개인회생제도라 할 수 있는 ‘덕정령(徳政令)’이다.
 ‘채무면제=덕정력’은 선정(善政)인 듯이 쓰이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확실히 채무로 인하여 가난해진 농민이 이 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은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빚이 늘기만 하는 불량채무자, 지급불능자를 많이 짊어지고 있었던 ‘도소우’는 아무런 부(富)도 창출하지 못했다. 빚을 갚다 극도로 가난해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는 것은 경작하는 인간이 없어진 논밭뿐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 일단 채무자에게서 채무를 떼어주고 다시 일할 상태로 만들어 일하게 만드는 편이 경제효율로 따지면 더 좋은 것이다. 덕정령이라는 것을 그러한 의미로 다시 살펴보면, 오히려 채권자 즉 도소우[土倉]나 유력무사, 신사(神社), 사원(寺院)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센고쿠 시대[戦国時代]가 끝나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서도 1622년의 법령에는, “이자는 서로 합의하에 정할 것”이라고 하여 당사자들간에 맘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1692년에 100문(文)당 월리 3부이자, 연리 3할7분5리까지 이자의 상한을 두었다(質屋作法御定書之事). 센고쿠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자는 제한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雄一郎]

 이 시대의 사회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장원(荘園)'의 잔재인 '총촌(惣村=そうそん)' 즉 센고쿠[戦国]의 마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 道長]로 대표되는 쿠게 정치[公家政治]가 일본 전국에 '장원'이라는 작은 독립영토를 만들었다. 바로 연공(年貢)인 세(稅)를 면제받는 '사령(私領)'이다. 무사(武士)는 이 '장원=사령'을 경호하는 무장민(武装民)에서부터 출발한다.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를 거쳐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들어서자 '슈고 직[守護職]'이 고정화되어 일부 씨족이 그 지역에서 강대해져 갔다. 그러자 '슈고 직'의 권력이 강대해져가는 것을 위험시하여 그것을 제한하기 위한 시스템이 생겨났다. 이것이 '슈고 불입권"[守護不入権]'이다.

 슈고 불입권의 주된 내용으로는 슈고에 대한 징세거부권(徵稅拒否權)과 경찰권의 획득이다. 총촌(惣村)은 막부(幕府)에 직접 납세한다는 명목으로 슈고에게 조세(이를 “단젠[段銭]”이라 하였다)를 거부하였고, 도둑과 같은 범죄자를 잡으려고 하더라도 슈고의 가신은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마을사람들이 범인 포박하는 것을 기다린 후 인도받았다.

 막부에게서 이 권리를 얻은 마을은 '장원'에서 보다 자립성이 강한 '총촌=센고쿠의 마을'이 되어 갔다. 와카야마 현[和歌山県]의 어느 마을에서 발견된 1491년의 마을 규정에는 센고쿠 시대의 마을 자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마을에 도둑이 생기면 현행범으로 처형할 것. 영주(領主)에게서 문책이 있을 시에는 마을이 책임지고 설명할 것

 현대인이 '센고쿠의 마을'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여기저기 산재한 '외국대사관'을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주일미군기지'도 좋은 예이다.
 전국 각지에 있는 주일미군기지는 '일본'이 아니다. 일본의 통치시스템인 '도도부현(都道府県)'에서 격리되어 있는 어엿한 '미국'이다. 거기서 근무하는 군인 및 그 가족들을 미국인들이며, 세금을 미국에 납세하고, 죄를 지으면 기본적으로 미국 법률에 따라 심판 받는다. 일본의 행정단위인 도도부현에는 지방세의 '징수권'도 없으며 각 도도부현 경찰에 위한 '사법경찰권'도 없다. 이것이 '슈고 불입권'이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 경우 '슈고'는 '도도부현 지사'이며, 막부가 '일본정부', 총촌이 '주일미군기지'가 된다. 즉 당시의 일본에는 '막부'라는 중앙정부하고만 연결된 총촌지배자 즉 호족들의 '주일호족기지'가 무수히 많았던 것이다. 그 안에서 농민들은 밭을 갈고 농작물을 자신들의 주인인 호족에게 납세하였다. '센고쿠의 마을'은 '슈고'에게 납세하지 않았다.

 이때 주의해야만 할 것이 '슈고 불입권'으로 인해 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이 권리는 '슈고'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막부가 인정한 제도이다. 이 '슈고 불입권'을 원했기에 '센고쿠의 마을'은 막부의 권위를 계속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슈고'에게,

우리들은 막부에게서 슈고 불입권을 받은 곳이다. 그러니 연공을 바칠 수 없다
고 말하고 싶어서 막부의 권위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막부에서 파견된 ‘슈고’는 ‘센고쿠의 마을’을 통치하는 호족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일본에 미증유의 기후변동 즉 ‘소빙하기(小氷河期)’가 찾아와 대기근이 민중을 습격하였다. 극단적 경제 정체 속에서 의지하던 막부는 경제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먼 존재가 되었으며, 심각한 식량난 속에서는 믿을 만한 권력이 아니게 되었다. 무엇보다 막부를 이용하면서 득이 되는 것은 대의명분일 뿐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모두 자신들이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자 ‘총촌=센고쿠의 마을’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기 시작했다. 기근으로 흉작이 들었을 경우에는 옆 마을에 약탈하러 갔다. 그 옆 마을이 머릿수가 많고 강하면 즉 '다이묘우[大名]'라면 그 밑으로 들어갔다. 센고쿠의 마을 스스로가 어느 다이묘우에 붙을까를 판단하였다. 힘이 있는 호족은 많은 총촌을 집어삼키며 거대화하였고, 힘이 없으면 흡수되어 갔다. 슈고 직에 있던 가문이 강력하면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되었고, 가문빨이 없더라도 마을을 많이 흡수할 수 있었던 사람은 ‘힘 있는 자’가 되어 하극상(下克上)을 실현해 갔다. 이렇게 전국의 ‘총촌=주일호족기지’의 재편성이 행해진 것이다.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의 작품 속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가 ‘이마가와 가나 목록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거론한,

현재는 모든 것에 있어 막부의 권위에 의하지 않으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법률을 만들고 치안을 유지해 이 지역을 다스리고 있기에 슈고 불입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고 선언한 것은 막부에게 임명 받은 슈고가 막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아이러니함이었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