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
1599년10월 5일 병사(病死) 54세.
1546년 ~ 1599년
무츠[陸奧] 탓코[田子]성주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아들. 종가(宗家) 난부 하루츠구(南部 晴継)의 뒤를 이어 26대 당주(當主)가 되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협력을 얻어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을 진압하였고, 새로이 모리오카(盛岡)성을 쌓아 후에 난부 번[藩] 24만석의 기초를 쌓았다.
오산으로 알게 된 시대의 종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 호응하여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는 일천의 병사를 이끌고 참진하였다. 츠가루 타메노부[津軽 為信]에게 난부 가문[南部家의 영지였던 츠가루[津軽] 일대을 빼앗긴 원한이 뼈에 사무칠 정도인 노부나오에게 있어서 참진은 영토를 탈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터였다. 그러나 원수 타메노부는 불과 18기의 기마 무사만을 대동한채 노부나오가 오기 3일전에 히데요시를 만나서 영지 소유권을 받아 낸 상태였다.
억울함에 흥분하는 노부나오에게 "분노를 참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며 다독거린 것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였다. 노부나오는 이렇게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종언을 깨닫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발령한 [칸토우, 오우우 총무사령(関東,奥羽惣無事令)]- 즉 사투금지령[私鬪禁止令]을 어기면 난부가의 존립이 위험할 터였다.
힘에 의존한 타메노부 토벌에서는 몇 번이나 밀렸기에 뛰어난 무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부나오지만, 대세판단의 정확함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뛰어난 면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죽은 뒤 천하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유력해진 히데요시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신임이 두터운 토시이에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그 방법은 그때까지 말이나 매의 헌상을 매개로 하는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의 방법에 더하여 1 기청문(起請文-서약서(誓約書))까지 토시이에에게 받아냄으로써 정치적 의도를 명확히 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타메노부의 반란 후 노부나오는 일문의 효웅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에게 배반당한다. 타메노부의 경우에는 사투금지령이 노부나오의 발목을 죄는 덫이 되었지만 마사자네의 경우는 노부나오를 구하는 마법의 지팡이가 되었다.
쿠노헤의 난과 오우우 처리(奥羽再仕置)
노부나오는 난부가 24대 하루마사[晴政]의 사촌동생이었다. 처는 하루마사의 장녀였다. 하루마사의 양자로 들어가 후계자 자리를 약속 받았지만, 하루마사의 애첩에게서 하루츠구[晴継]가 태어나자 입장이 미묘하게 되었고 더구나 처가 먼저 죽었기에 후계자 후보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582년 1월.
하루마사가 죽자 하루츠구가 당주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그 20여일 후 부친의 장례식을 끝내고 산노헤 성[三戶城]으로 돌아오던 도중 자객에게 습격 당했다고도, 독살 당해 죽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가독(家督) 상속 문제가 대두되어 가문이 둘로 나뉘는 바람에 무력에 위한 싸움은 없었으나 가문 내부에 석연치 않은 앙금을 남기게 되었다. 노부나오는 키타 노부치카[北 信愛], 하치노헤 마사요시[八戶 政栄]들의 지지를 얻어 26대 당주가 되었다. 나이 37세였다.
한편 '노부나오는 두려워 할 가치도 없다'며 적의를 보이는 마사자네는 초대 미츠유키[光行] 때 부터 갈라져 나온 난부 가문의 명문으로 쿠노헤[九戶], 니노헤[二戶]의 양 군(郡)을 영유하고 있던 가문 내에서도 높은 신분이었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내부에 품고 있으면서도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난부 일족에게 결정적인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오우우 처리(奥羽仕置) 2때문이었다. 처리(仕置)는 오다와라성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던 여러 제후들에 대한 본보기였는데, 가지고 있던 영토를 빼앗긴 무장의 원한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떠나자
이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마사자네는 후계문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장들에게 격문을 날려 호응을 얻자 5천의 병사를 이끌고 난부 종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거성(居城) 쿠노헤 성에서 농성했다. 1591년의 가을이었다.
노부나오의 구원 요청에 응해 히데요시는 마사자네의 봉기를 사투(私鬪)로 판단하여, 재처리(再仕置)를 통해서 천하 통일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히데츠구[秀次]를 총대장으로 하는 원군을 파견. 여기에 오우우의 여러 무장의 병사들을 더한 10만의 대군으로 쿠노헤성을 포위. 4일간의 공성전 후 모략에 의해 마사자네 일당을 섬멸했다.
난부가 중흥의 시조
노부나오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종군.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있던 중 하치노헤 마사요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노부나오가 난부 가문 중흥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천하인 히데요시를 따르며 난부 7군(郡)을 안도 받아 성 밑 마을(城下町) 모리오카로 전국의 상인이나 직인(職人)을 불러 모아 우대하여 번영시킨 것도 있지만, 거기에 더해서 카즈노[鹿角]의 산 등에서 금을 캐내어 재정을 풍부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1599년, 노부나오는 모리오카성에서 발병. 쿠노헤 성을 수리, 복구하여 이름 바꾼 모리오카 성으로 옮긴 후에 죽었다. 나이는 54세. 가독은 토시나오[利直]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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