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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세이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2.02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7- (6)
  2. 2007.11.24 살생관백(殺生関白)-5-

七.

 오히로이(お拾い=히데요리)는 세 살이 되었다.

 이 해는 1595년이다. 그 7월 15일에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모반을 꾀했다는 석연찮은 혐의로 자살을 강요 받았고 그의 처첩이나 자식들은 카모() 강변에서 끌려 나와 천민들의 손에 살해당하여 이를 듣고 본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창백해졌다.
 - 믿을 수가 없다.
 고 히데요시(
秀吉)의 과거를 아는 노인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다. 과거 히데요시는 그렇게나 많이 전쟁터에 나갔으면서도 아군을 쓸데없이 사지로 몰아넣는 일 없이, 적을 쓸데없이 죽이는 일 없이 될 수 있는 한 적을 항복시키고 항복시킨 후에는 그에 걸맞은 봉록과 지위, 체면을 유지시켜주었다. 이런 불살주의(不殺主義)는 책략이라기 보다는 성격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난세를 진정시키는 데는 크게 힘을 발휘하여 적들도 또한 안심하고 히데요시에게 몸을 맡기는 자들이 많았다. 히데요시의 그런 성격이 - 오히로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식으로 완전히 변했다. 양자 히데츠구와 그 가족들을 마치 풀이라도 뽑아 없애듯이 멸절시키는 인물을 도저히 이전의 히데요시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육체도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히데츠구 사건보다 조금 전인 이 해의 4월 15일 밤에 히데요시는 실금(失禁)하여 이불에 엄청난 양의 오줌을 싸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고 일어나서야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쇠약해진 것에 충격을 먹었다. 이쯤부터 히데요시는 피부가 검어지고 거칠어졌으며 활력을 잃고 식욕이 없어져 자주 설사를 하였다.
 - 배에 병이 있으시다.
 라는 소문과 이 실금은 곧바로 성안에 퍼졌다. 후시미(伏見) 성 아래에 저택을 가진 제후들도 그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야스(
家康)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
- 히데요시는 얼마 남지 않았군.
이에야스는 남몰래 자신의 앞길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야스와는 다른 반응을 가진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 오우미(近江) 파벌의 관리들 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들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사실만큼이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이며 겸해서 히데요시의 비서관으로 더해서 동시에 요도도노(淀殿)와 히데요리(秀頼)를 위해서는 장래의 보좌관이 될 만한 위치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으면 그들 측근 권력집단은 정치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신하여 칸파쿠 히데츠구와 그 측근들 – 키무라 히타치노스케(木村 常陸介) 들 –이 정권의 주도권을 쥘 것이다.

 "그 때문에 칸파쿠(히데츠구)님은 살해당한 것이다"

 라고 이에야스조차 칸파쿠 히데츠구 사건은 오우미 파벌의 중추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책모, 참언에 의한 것이라 믿었다.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
政所)도 믿었다. 세간도 믿었다. 특히 히데츠구 사건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히데츠구와 친했던 다이묘우(大名)들인데 그런 다이묘우 중 대표격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도 그리 믿었다. 타다오키는 히데츠구 모반이라는 의혹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같은 벌을 받을 뻔하였다. 이때의 미츠나리에 대한 원한 – 실제로는 히데요시와 그 정권에 대한 원한이 히데요시 사후 타다오키를 이에야스 쪽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츠나리에게 있어 억울한 누명일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히데츠구님은 히데요리님의 장래를 위해서 살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히데요시에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전에 히데요시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것만을 온 종일 생각하였다. 자신의 노쇠를 깨닫고 겸해서 히데요리의 나이가 어리다는 생각이 겹쳐졌을 때, 이 천성적으로 인정미 넘치는 인물이 – 더구나 이성(理性)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져버린 심신미약자가 – 빠지게 되는 함정은 하나밖에 없었다. 히데츠구를 죽여 후환을 끊는 일일 것이다.

 이것과는 다른 일이지만 비슷한 사건이 후에 일어났다. 히데요시가 죽는 해인 1598년. 히데요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잠잤다가는 깨고 또 자는 노쇠인(老衰人)의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이 즈음 히데요리는 자신의 늙은 아비와 같이 있지 않았고 어쩌다 쿄우(京)에서 히데요시가 옷 갈아 있을 때 이용하는 저택에 있었다. 히데요리는 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불과 여섯 살이면서도 그의 늙은 아비의 희망과 주청에 의해 곤츄우나곤(
権中納言)으로 승진해 있었다. 여섯 살의 곤츄우나곤은 긴 조정의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상이 수많은 시녀들에 둘러싸여서는 그 시녀들을 놀이상대로 매일 저택을 떠들썩하게 하며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보통 아이들의 일상과 다를 바 없었다. 발육은 보통 이상이었다.
아이에게도 당연히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어 시녀 중 네 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키츠(おきつ), 오카메(おかめ), 오야스(おやす), 오이시(おいし)의 네 명으로 히데요리는 그녀들을 어려워하였고 시녀들도 히데요리의 난폭함에 애를 먹었다. 이것이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곧바로 붓을 들어 히데요리에게 편지(아직 글자를 읽지는 못하지만)를 썼다.

츄우나곤 님께.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네.
돼먹지 못한 것들이니 그 네 명을 새끼줄로 한꺼번에 묶어 이 아빠가 쿄우(京)에 갈 때까지 어딘 가에 던져놓고 있으렴. 내가 가서는 전부 때려 죽여주마.
용서할 수 없도다.

 결국 죽이지 않았다. 추방시켰다. 유모인 우쿄우노다유우(右京太夫)에게도 엄중히 주의를 주며 [츄우나곤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안 죽을 정도로만 때려놓으면 좋아질 것이다]고 써서 보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시기 일본에 있는 무사들 중 반이 바다를 건너 조선의 각지에서 명나라의 구원군과 조우하여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는 그런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고, 쿄우(京)-오오사카(大坂)의 사람들은 쌀값이 폭등하여 엄청난 생활난에 빠져있었지만 히데요시의 관심은 이미 히데요리밖에 없었다.

 "저 아이의 존재가 천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고 당시 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 등은 그늘에서 소근거리며 히데요시와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다이묘우(大名)에게는 가령 초빙을 받더라도 가지 않았다. 참고로 세이카는 후시미 성(伏見) 성 아래에 살고 있던 전시포로인 조선인 학자('강항(姜沆)'을 말한다. – 역자 주)와 필담하며, "지금 천하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이 토요토미 정권을 저주하고 있소이다. 만약 명나라의 군사와 조선의 군사가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가는 곳마다 관용에 넘치는 선정을 펼치며 진군해 간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뻐하며 당신네 군사들을 맞이하고 다이묘우(大名)들도 당신들에게 달려가 북쪽 오우슈우() 시라카와노세키(白河[각주:1])에 갈 때까지 파죽지세처럼 곧바로 평정되어 버릴 것이오"[각주:2]라고까지 말하였다. 명나라빠인 세이카다운 과장이 있다고는 하여도 이 정치학자가 보기에 토요토미 가문에는 더 이상 이 시세와 국정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오로지 어린 후계자와 그것을 낳은 요도도노(淀殿)의 이익 지키기에만 정치가 쏠려 있는 상태이기에 모든 정치악(政治惡)은 거기서부터 나오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 정치악을 조장하고 정책화하고 있는 것은 세이카가 보기에 히데요시의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 오우미(近江) 계열의 문벌관료들이며 그들이 히데요시에게 받치는 헌책은 전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라는 것으로만 집중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히데요리의 장래를 위해서라며 일부 다이묘우의 봉지(封地)를 바꾸거나 혹은 바꾸려고 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춘추필법을 따르자면 히데요리는 이제 여섯 살의 나이로 이 포악한 정치의 책임자인 것이다"

 라고 까지 세이카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이카에겐 요도도노의 출현과 그녀가 낳은 적자의 출산에 따른 토요토미 가문의 변모야말로 이 정권과 천하의 재앙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 혼자만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6월 16일은 한 여름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카죠우(嘉祥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부터 시작된 명절.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음력 6월 16일에 16개의 떡이나 과자를 신에게 바친 다음에 먹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화폐로 통용되던 가정통보(嘉定通寶)의 약칭인 가통(嘉通)의 일본식 발음(かつう)이 '이긴다'는 뜻의 동사 'つ(かつ)'와 비슷했기에 무가에서는 특히 중히 여겼다. – 역자 주)의 날이었다. 이 1598년의 이날, 히데요시는 병상에 있었지만 등성(登城)한 다이묘우(大名)들을 인견()기 위해서 주치의의 도움을 받으며 일어나 인견의 자리에 나갔다. 일부러 쿄우()에서 불러들인 히데요리를 자신 옆에 앉혀두고 오늘은 좋은 날이라며 직접 과자가 담긴 그릇을 들고 다이묘우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며,

 "아아~ 이렇게 슬플 수가…. 적어도 이 히데요리가 15살이 내가 살아 오늘처럼 여러 다이묘우들을 알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는데 내 생명은 꺼져가는구나. 그것을 어찌 할 수도 없어"

 하고 도중에 울먹였고 결국에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자리를 가득 메운 다이묘우들은 목을 숙이고 숨을 삼키며 고개를 쳐들 생각도 안 했다. 그들의 가슴 속은 제각기 복잡했을 것이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의 토요토미 가문은 물론 그 사후에 일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정변 속에서 자기 가문을 어떻게 지켜가야 할 지가 훨씬 절실했다.

이 해의 8월 18일.
히데요시는 죽었다.

  1. 링크 된 구글맵을 보면 어째서 이런 어중간 한 곳을 거론하였는지 하고 이상히 여기겠지만, 7세기 일본 율령제가 실시된 당시 일본령 최북단인 오우슈우(후대의 오우슈우의 남반부만 있었고 작았다)의 세 관문(奥州三関) 중 하나이다. 그 의미가 이어져 그냥 일본 최북단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원문은 日本生民之憔悴. 未有甚於此時. 朝鮮若能共唐兵弔民伐罪. 先令降倭及舌人. 以倭諺揭榜知委. 以示救民水火之意. 師行所過.秋毫不犯. 則雖至白河關可也. - 강항의 간양록(看羊錄) 중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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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2.02 08: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편도 잘 보고 갑니다. 필시 음력일테지만 저 8월 18일이 양력 제 생일인지라-_-; 어릴적에 이 사실을 알게 됐을때(뭐 지금이라고 늙진 않았습니다만;) 제법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저 히데요시의 인물상은 일본인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는지 -저 추악한 말년을 제외하면- 실제로 모 게임에서의 주인공 모티프로 쓰이고 있덥니다. (Generation of Chaos 1이라는 게임의 히로인입니다만; 역시나 한국정발은 되지 않았기에 아주 마이너할겝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3 2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 제 생일도 8월입니다...
      (...뭐 상관은 없지만 공통점 만들어서 친한 척하고 싶어서요 ^^; )

      허~ 그런 게임이?
      주군의 신발을...이건 너무 대놓고..군요.
      낮은 신분에서 출세하여 천하를 손에 넣는 듯한 식인가 보군요. 위키 검색 좀 해봐야 겠군요.

  2.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2.04 2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확실히 히데요시는 말년에 혼이 빠진 느낌이랄까...그렇군요;;

    딴 얘기로 블로그에 대해서인데 머리가 아파지실것 같지만...카테고리 클릭이나 검색을 하면 오른쪽 사이드바가 밑으로 밀려가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5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포기했던 꿈이 이루어지자 제 정신이 아니었던 듯 싶습니다.

      블로그..
      그거 먼저 번 스킨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러더군요...그래서 아예 포기 상태..시간나면 만져 보아야 겠다~ 라고만 생각 중입죠.

  3. 본다충승 2009.02.05 0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명나라빠 세이카 라는 유머러스한 글까지.. ㅎ 공명의 갈림길에서 주인공 카즈토요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말년의 건강함을 비교한 말이 떠오르네요. 이 나이때의 히데요시가 골골했던 방면, 이에야스는 쌩쌩하다는 식...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5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좀 언어구사력이 부족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큰 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제 몸을 신경써야 하나 봅니다. 그다지 의학적인 에피소드가 없는 히데요시보다 자기 먹을 약은 자기가 만들어 먹었다는 이에야스는 저 말에 부합되는 것 같군요.

五.

 이 시대에 학문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은 센고쿠(戦国)를 헤쳐 나온 거친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없었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말년이 되어서야 논어(論語)의 강석(講釋)을 듣고 나선, 세상엔 재미있는 것이 있구나 라고 하며, 카즈에노카미(主計頭)도 한 번 들어보게나, 라고 아주 신기한 듯이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권할 정도였다. 히데요시도 전혀 관심이 없어, 언젠가 비서가 ‘다이고(醍醐)사(寺)’의 다이(醍)라는 글자가 안 떠올라 곤혹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까짓것 ‘다이(大)’라고 쓰면 될 것 아니냐~”

 라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학문적 교양의 전통을 간신히 지키고 있던 곳은, 오산(五山 -
* 하단 역자 주)의 중들과 귀족(公家)정도로, 히데요시 이하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술에는 관심이 있어도 학문에는 무관심하여 그것이 토요토미 정권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런 상화에서 히타치노스케는 칸파쿠 히데츠구를 학문의 보호자로 꾸밈으로써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조류의 원천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리려 했다.

 히타치노스케는 이 계획을 히데츠구의 문서담당관인 승려 사이도우(西堂)에게 추진시켰다.
 겐류우 사이도우(玄隆 西堂).
 토우후쿠(東福)사(寺)에
승적(僧籍)을 두고 젊으면서도 오산에서는 제법 유명한 학승(学僧)이다. 사이도우가 히데츠구의 학문에 대한 것을 모두 처리했다.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오산의 승들을 모아, 시회(詩會)가 열리는 것이 정례화(定例化) 되었다.
희서(稀書)나 진서(珍書) 종류도 히데츠구의 명령으로 모아졌다. 시모츠케(下野) 아시카가 학교(足利学校[각주:1])나 카네자와 문고(金沢 文庫[각주:2])에서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제출시켜 쿄우(京)에 모아서는 쇼우코쿠(相国)사(寺)에 보관하며 일반에게 관람을 허용하였다.

 또한 온갖 수단을 다하여 모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각주:3]), 속일본기(続日本紀[각주:4]), 일본후기(日本後紀[각주:5]), 속일본후기(続日本後紀[각주:6]), 문덕실록(文徳実録[각주:7]), 삼대실록(三代実録[각주:8]), 실사기(実事記), 백련초(百練抄[각주:9]), 여인호(女院号), 류취삼대격(類聚三代格[각주:10]), 령 35권(令三十五巻) 등을 조정에 헌상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야마토(大和)의 여러 큰 절의 중 17명을 소집하여,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필사(筆寫)시켰다.
 -무식한 풋내기
 라고 처음 상급 귀족(公卿)들 사이에서 은근히 기피당하고 있던 이 남자를 이런 행동으로 인해 새삼 달리 보는 사람도 나타났다. 하기는 반대로 오바이트 쏠릴 정도라며 히데츠구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 등은 몇 번이나 초대를 받아도 히데츠구를 피하여 결국 끝까지 만나지 않았다. 학문이 더러워진다고 세이카는 은밀히 지우(知友)에게 소근거린 것을 보면 이 남자만은 히데츠구가 인기를 얻고자 하려는 의도를 확실히 간파하고 있었던 듯하다.
 세이카는 또한 그 지우에게,

 “저 인간 죽을지도 모른다”

 고 예언했다.

 “타이코우(太閤)의 자식이 생겼는데도 뻔뻔스럽게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앉아서는 도무지 관직에서 사퇴하여 물려날 생각을 하지 않는군. 필시 죽음을 당할 것이다”

 라고 세이카는 내다보았다. 세이카뿐만 아니라 쿄우(京)의 상급 귀족들는 숨을 죽이고 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가로인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만은,

 “타이코우 전하께서 칸파쿠 직(職)에서 물러나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 물러나실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부터 칸파쿠 자리는 다이묘우(大名)하고는 다르게 조정의 직(職)이며 천자(天子)에게 임명받는 것입니다. 만약 자진해서 물러나신다면 타이코우 전하가 내리신 훈계 제 3항의 조정을 공경하고 존중하라는 말씀을 어기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결코 그러한 일은 하지마시길”

 이라고 논리적으로 못을 박았다. 히데츠구도 그것이 도리(道理)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히타치노스케는 지금 여기서 히데츠구가 칸파쿠에서 물러나면 자신의 지위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실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히타치노스케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남자는 요컨대 히데츠구가 어떤 일에건 자신감을 갖게 하여 독립적인 인격을 주장할 때까지 교육해 가고 싶다고 바라고 있었다.
 사실 이 즈음부터 히데츠구는, 그 소심하고 두려움에 떨던 마고시치로우와는 다른 인격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인(武人)이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말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과시하기 시작했다.
 궁정에서 사교를 행함에 있어 지식이 부족했던 이 남자는 상급 귀족(公卿)이 아닌 무인이라는 그 하나만을 크게 내세우는 것 외에는 열등감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진정한 무인 – 자신의 부하나 토요토미 가문의 여러 다이묘우들 – 에게는 자신이 무시받고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민감히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의 무(武)를 세상에 알려주마’
 라고 생각했다.
 이 기세는 처음엔 지극히 온당하고 얌전한 형태를 취했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병법(兵法[각주:11])이라는 개인 격투기의 시합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산죠우(三条) 오오하시(大橋)에 방을 내걸고 방랑 병법자를 모아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서로 싸우게 하였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병법이라는 기술에 신뢰를 갖지 않았으며 병법자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검술(剣術)이 가능하다고 해서 고용한 적도 없었으며 더구나 검술지남역(剣術指南役[각주:12]) 등은 두지 않았고 그런 시합을 구경하고자 하는 관심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히데츠구는 그 반대를 취하여 쥬라쿠테이(聚楽第)를 병법 유행의 중심지로 만들려 하였다. 라기보다는 그는 이 격투기 시합이 이외로 재미있음을 알았다. 피가 흐르고 사람이 죽는 것이었다.
 피가 낭자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고 하여 결국 시합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진검과 진짜 창이어야만 한다고 포고했다. 그 서로 죽어나가는 경기를 많은 처첩들과 함께 구경했다. 여자들이 그 처참함에 비명을 질러 기절이라도 하면 히데츠구는 크게 자존심을 만족시켜,

 “역시 여자군~. 이 정도를 가지고”

 라고 앙상한 배를 부여잡고 통렬히 웃어대며 더욱 좋아하였다.
 자기야말로 용사(勇士)라고 생각했다.
 한층 더 떠 다른 사람의 시합을 보는 것만이 아닌 자신도 이 살육에 참가하고자 했다.
 밤중에
미복(微服)한 채 길 끄트머리에 숨어서 약할 것 같은 사람이 오면 달려 나가 베었다.

 “이번엔 오른쪽 어깨부터 비스듬히 베어주마”

 “다음엔 정면에서 내려 쳐 주마”

 “간만에 여자의 목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싶다”

 등을 지껄이며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 사람을 쓰러뜨렸다. 쓰러질 때, 사람은 생각 외로 세찬 땅울림을 내며 쓰러졌다. 이 죽이는 손맛에,

 “매사냥은 좆도 아니구만~”

 라고 히데츠구는 말했다.

 “내 무(武)를 보아라!!!”

 라고 어쩌다 단칼에 사람을 죽이기라도 하면 포효하듯이 목소리를 높여서는 호종(扈從)하는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사냥감인 시체의 옆에 모이게 해서는 심장에 귀를 대게 하여 확실이 멈추었는지 어땠는지를 확인시켰다. 나중에는 아직 해가 남아 있는데도 칼질하러 나왔다.

 키타노 텐만(北野 天神)의 토리이(鳥居) 옆을 미행(微行)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눈먼 장님이 지팡이로 발 밑을 살피며 다가왔다. 장님은 - 이 살인취미를 맛들인 사람에게 있어서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반응할까, 어떤 손맛이 날까? 히데츠구는 침을 삼키며 다가가서는,

 “이보게~”

 하고 불렀다.


오산(五山)

  1. 칸토우(関東) 아시카가 지역에 있던 당시 칸토우 지방 최고의 학교 겸 서고였으나, 이 즈음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후원자였던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北条)가(家)가 멸망 당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극심한 고난에 처해있었다. 때문에 이 때 히데츠구의 강압으로 많은 책을 빼앗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무사시(武蔵) 카네자와에 있던 서고(書庫). 카마쿠라(鎌倉) 시대 중기에 설립. [본문으로]
  3. 신대(神代)~697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4. 697년~791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5. 792년~833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6. 833년~850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7. 日本文徳天皇実録의 약자. 850년~858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8. 日本三代実録의 약자 – 858~887년까지 기록, 이상의 6개를 율령시대의 역사라 하여 ‘육국사(六国史 - 릿코쿠시)’라 한다 . [본문으로]
  9. 카마쿠라 시대의 역사서. 바쿠후(鎌倉 幕府), 무가(武家)의 역사 기록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와 대조되는 조정 쿠게(公家)쪽의 역사서. [본문으로]
  10. 헤이안(平安)시대의 법령집으로, 율령제 시대의 관직으로는 일 처리에 무리가 있었기에, 각 관직의 계급이나 배치를 사례별로 나누어서 일 처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 [본문으로]
  11. 이 당시 일본에선 '검법(劍法)'을 병벙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12. 검술 사범을 말한다. 다이묘우(大名) 등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고용되어 검술을 가르치는 직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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