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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무라히타치노스케'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7.11.30 살생관백(殺生関白)-6- (5)
  2. 2007.11.24 살생관백(殺生関白)-5-
  3. 2007.11.17 살생관백(殺生関白)-4- (3)
  4. 2007.06.26 살생관백(殺生関白)-2- (2)

六.

 “이리 오시게. 술을 드리겠네”

 상냥한 목소리로 손을 잡았다. 불쌍한 장님이 고개를 들어,

 “어이쿠~ 이렇게 친절할 수가! 어디에 뉘신감?”

 라고 희희거리며 따라왔지만 얼마 안가 히데츠구는 허리를 돌리며 장님의 어깻죽지부터 오른팔을 베어 떨어뜨렸다. 지금까지 히데츠구의 경험상 보통 이런 충격을 받은 사람이라면 기절하였다. 하지만 이 장님의 심리 세계는 어딘가 틀린지 이 순간 삼 척이나 껑충 뛰며 소리 높여,

 “어디 사람 없소~! 나쁜 놈이 사람을 죽이려 하오~ 사람들아 저 놈을 쫓으소~ 나를 구해주소~”

 하고 느릿느릿 그러나 침착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 놈은 특이한 맛을 하고 있군”

 히데츠구가 말하자 이런 종류의 살생에는 항상 따라붙으며 히데츠구의 비위를 맞추는 쿠마가이 다이젠노스케 나오유키(熊谷 大善亮 直之)라는 젊은 다이묘우(大名)가 히데츠구의 흥을 더 돋구기 위해서 장님에게 다가가,

 “네 놈에게는 이제 팔이 없지. 피도 둑이 터진 것 같이 흐르고 있지”

 라고 현실을 가르쳐주어 알면 괴로워하며 기절할 거라 생각하여 그 반응을 기대했다. 그러나 장님은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을 하였다.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목소리도 이외로 낮추어,

 “그래 알겠다. 그랬었군”

 하고 중얼거렸다.

 “이 나쁜 놈은 평소 이 부근에 나타난다는 살생 칸파쿠(殺生 関白)[각주:1]인가? 반드시 그럴 거다.”

 히데츠구를 호종하고 있는 쿠마가이는 - 쿠마가이 지로우 나오자네(熊谷次郎 直実 – 하단 역자주)의 후손이라는 인물이다. 가문은 한 때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에서는 후다이(譜代[각주:2])의 명문가로 대대로 쿄우(京)에 살며, 지금은 와카사(若狭) 이사키(井崎)의 성주(城主)이기도 했다. 잔머리가 잘 돌아갔던 만큼 히데츠구가 어떤 점에 흥미를 갖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병 상태라도 알려주는 듯이,

 “네 놈은 눈이 보이지 않지. 더구나 이제는 팔도 없지. 이렇게 장애가 둘로 늘었지. 그래도 네 놈은 살고 싶은지?”

 어떤 심경이냐? 라는 것이었다. 히데츠구도 쿠마가이의 어깨너머로 목을 쭉 내밀고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장님이 뭐라 하는지를 기다렸다.

 “살고 싶지 않아!”

 라고 소리치는 것이 장님의 회답이었다.

 “이 이상 이런 몸으로 살고 싶지 않아. 그냥 죽여라! 이 목을 베란 말이다! 봐라!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낌새는 동네사람들이 문 틈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여 내 목을 베라! 네 놈의 사악한 이름을 후세에 남겨라! 인과응보를 기다려라!”

 라고 외쳤다. 이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에 히데츠구는 자아(自我)를 잃고 흥분하여 칼을 휘둘렀지만 장님의 팔을 자를 때 칼날에 사람 기름기가 들러붙었는지 베어지질 않아 어깨뼈가 부서지는 소리만 들렸다. 이 때문에 장님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굴렀다. 그러자 더욱 더 히데츠구의 손이 폭주하였다.
 칼로 얼굴을 치고 다리를 베고 배를 찌르자, 이빨이 날라가고 손이 잘리고 손가락이 떨어져 더 이상 사람의 형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잘리고 나서야, 겨우 이 장님의 숨을 끊을 수 있었다.
 길거리로 나와 사람 죽이는 것에 재미가 들린 이래, 이렇게 손이 간 작업은 없었다.

 “..이런...놈일...수록.. 재..재미...가 없군”

 히데츠구는 헉헉대며 말했지만 피로로 다리가 풀려 호종하던 사람이 뒤에서 지탱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날 밤. 술자리에서,

 “귀족들에게~~”

 술을 들이키며,

 “이 정도로 용기가 있을 턱이 없지”

 라고 옆에서 술을 따르던 부인에게 말했다.
 이 부인은 키쿠테이 다이나곤 하루스에(菊亭 大納言 晴季)의 딸로 '이치노다이(一ノ台)'라 불리고 있었다. 정실(正室)이었던 이케다(池田)씨(氏)가 죽었기 때문에 히데츠구는 하루스에에게 강탈하다시피 이 부인을 뺏어와 근래에 이를 정실로 삼았다.
 이치노다이의 나이는 히데츠구보다 열살 정도 많았지만 그 미모는 쿄우토(京都)에서 으뜸이었다. 한번 다른 곳에 시집을 갔었고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아직 11살의 꼬꼬마에 지나지 않았지만,히데츠구는 이 딸까지 데리고 와서는 ‘오미야노카타(お宮ノ方)’라 부르며 첩으로 삼아 모녀와 함께 3P를 하였다.
 사람들은,

“모녀병간(母女倂姦)이라니 인륜(人倫)이 아니다. 축생도(畜生道)다.”

 라 소근거렸으며, 아비인 하루스에도 이 모녀병간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의 어긋남에 울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히데츠구가 자신의 무용을 이 이치노다이에게 자랑한 것은 그녀가 귀족(公家)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귀족 놈들은 문(文)을 비틀고 옛 일을 흥얼거리며 예식(禮式)에는 밝을 지 몰라도, 이 정도의 무(武)를 가지고 있을 턱이 없지. 모두 칼이나 피를 보면 벌벌 떨 놈들뿐이다”

 라 말했다. 이치노다이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뭐라고 말을 해봐라!”

 하고 히데츠구는 항상 이 입을 열지 않는 모녀에게 말을 하게하고자 했지만, 그녀들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와서 산지 일년이 지나가는 지금도 여태까지 히데츠구 앞에서는 목소리라는 것을 낸 적이 없었다.

 참고로 히데츠구 처첩의 수는 양아버지 히데요시가 제한했던 수를 훨씬 상회하였고 이 즈음에는 30명이 넘어 히데츠구라고 해도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혀가며 세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나사가 빠졌나 보군’
 하고 히데츠구에게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게 권고했던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도 이 벼락치기 칸파쿠가 불과 1~2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변한 것을 보고 후회보다는 오히려 공포를 느꼈다. 히타치노스케보다 히데요시 쪽이 훨씬 마고시치로우를 알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그렇게 쪼잔히 나사를 쉴 세 없이 조여야만 그제서야 이 인물은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었다. 이 나사가 풀릴 대로 풀려 자기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된 남자는, 예를 들면 이런 일도 하였다.
 마루모 후신사이(丸毛 不心斎)라는 늙은 신하의 부인을 보고서는, 노파는 어떤 몸을 하고 있을까라는 흥미를 가져 억지로 데리고 와서는 첩으로 삼았다. ‘아즈마(東)’라고 부르며, 나이는 61살이었다.
 50대는 없었지만 43세의 여자는 있었다. 또한 오카모토 히코사부로우(岡本 彦三郎)라는 가신(家臣)에게 모친이 있어, 히데츠구는 어느 날 모친이라는 것 즉 그런 종류의 여자가 필요하다며 이도 첩으로 삼았다. ‘카우(かう)’라 불렀으며 38살이다.
 여성들을 나이별로 나누면 10대가 11명, 30대가 4명, 40대가 1명, 60대가 1명으로 나머지는 20대였다.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딸 ‘오이마(お伊万)’와 같은 다이묘우(大名)의 딸도 있었으며, 거지 출신의 오타케(お竹)라는 이도 있었다. 이런 여성들이 불과 1~2년 사이에 모아져 쥬라쿠테이(聚楽第)라는 새장 속에서 사육되었다.[각주:3]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에서 펼쳐지는 히데츠구의 망나니짓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가신들은 나중을 생각하여 몸 사리며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몰랐다. 단지 걱정하는 것이라고은 자기 피를 이은 히데요리의 미래뿐이었다. 히데요시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국 생각을 정하여 히데츠구를 후시미(伏見)로 불렀다.

 “그 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일본을 다섯 개로 나누고자 한다”

 라고 히데요시는 제안했다.

 “이렇게 하자. 그 쪽에게 그 중 네 개까지는 주마. 나머지 하나를 히데요리에게 주면 어떻겠나?

 고 말했다. 말하면서 히데츠구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이미 후계 상속을 한 뒤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말하기도 뭐한 것도 있어, 그것을 이래저래 염려하며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제안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츠구의 표정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히데츠구는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그 둔하고 무신경한, 어느 쪽인가 하면 뻔뻔하다고 할 수 있는 상판때기를 보고 있자니
자기 혼자만 기를 쓰고 있는 듯한 모습에 오히려 우스웠고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라기보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동정에 기대고자 하는 자신을 보았다. 히데요시의 심정은 이젠 애원에 가까웠다.
 늙어서 아이를 얻은 이 노인이 불쌍하지도 않냐? 나는 이렇게까지 고뇌하고 있다. 그 기분을 읽어다오~ 읽었다면 칸파쿠를
사직(辭職)하고, 양자(養子)와 후계자를 관두겠다는 말을 해다오~ 라고 히데요시는 은근슬쩍 기대했다.
 하지만 히데츠구의 감수성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대답은 했다.

 “아버님이 편하신대로”

 라고 말하였지만 그 상판때기에는 표정이 없었고 입술 끝엔 토라진 기색까지 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보았다. 아니 오히려 억지로라도 그렇게 보고 싶은 심경에 히데요시는 몰리고 있었다.
 ‘천하는 누구의 천하더냐!’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기분을 억지로 참았다. 그 분노를, 히데요시는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훈계로 바꾸었다. 하지만 훈계를 듣는 표정과 태도조차 히데츠구는 어딘가 이전의 마고시치로우같지는 않았다. 마고시치로우였을 때에는 아직 작은 새와 같이 두려움에 떠는 부분이라도 있어 그런 면에서 간신히 귀여운 맛이 있었던 듯했다.
 ‘이 녀석 변했군’
 히데요시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참고 또 참았다. 자신이 죽은 뒤 히데요리를 보호해 줄 인물은 이 히데츠구밖에 없었고 그런 점에서 말한다면 이제는 히데요시 쪽이야말로 애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후, 히데요시는 이 일에 대해서 또 생각하여 하나의 꾀를 생각해내었다.
 히데츠구에게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여자아이를 장래에 히데요리의 부인으로 하는 것이었다.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기의 배후자를 지금 정한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히데요시는 거기에 매달렸다. 그런 끈이라도 이어 놓으면 히데츠구는 장래 히데요리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급사(急使)를 보내려 하였다.

 “음…… 그게 좀…… 서두르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측근은 말했다. 무엇보다 먼 장래의 일이다. 측근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러나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빨리 그리해두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하필이면 이 즈음 히데츠구는 이즈(伊豆)의 아타미(熱海)에 온천 치료를 하러 동쪽으로 가 있어 쿄우토(京都)에는 없었다. 히데츠구에게는 두통이 있었다. 온천에서 그걸 치료하고자 하는 여행이었다.
 아타미에서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급사를 맞이하였다. 무슨 일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편지를 펼치자 기껏해야 그 정도의 일이었다.

 “알겠다고 말씀 드려라”

 히데츠구는 사자(使者)에게 그렇게 답했다. 사자가 후시미(伏見)로 돌아와 히데요시에게 보고했다.

 “칸파쿠는 그렇게만 말했을 뿐인가?”

 히데요시는 자신의 불안과 의욕에 비해 상대가 너무도 냉정한 것에 불만과 불쾌감까지 느꼈다. 사직한다 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예를 들면 히데요리가 성인이 된 후에는 천하를 물려주겠다 라고 말만이라도 이 노인을 안심시키고 기쁘게 해 줄듯한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저건 인간이 아니다’
 인정도 없고 달래려는 마음 조차도 없다.
 ‘
축생이다’
 고 생각했다. 그 때 키쿠테이 다이나곤이 후시미(伏見)에 와서는 히데츠구의 모녀병간의 사실을 눈물 섞어 호소하였다.
 ‘설마 그 마고시치로우 녀석이?’
 그렇게까지 막되먹은 일을 할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히데츠구의 사생활을 조사시켰다. 조사를 담당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였다.

 역시 마고시치로우는 사람이 변해 있었다.
 칸파쿠 전하의 놀랄만한 행태가 이때 하나도 빠짐없이 한꺼번에 히데요시의 귓속으로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 히데요시나 되는 인물이 얼마 동안 감정의 정리가 되지 않아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겨우 한 말이,

 “저건 사람이 아니다”

 였다.

 “축생이다”

 고 말했다. 이 때부터 저 단어를 사용하여 히데츠구를 그렇게 정의(定義)했다. 그렇게 정의하는 것 말고는 토요토미 정권을 구할 길이 없었다. 이미 히데츠구의 악행으로 인해 쿄우토(京都)의 지도층이나 서민들이 가진 토요토미 정권의 인기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사람들은 히데츠구를 미워하기보다 그 배후에 있는 토요토미 가문을 원망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기에 토요토미 가문과는 별개의 존재이다는 것 말고는 그 원망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축생이다. 그 증거는 모녀병간이다고 - 히데요시는 그 이론을 명쾌히 이시다와 나츠카에게 고했다.

 이윽고 온천 치료의 여행에서 돌아온 히데츠구는 그 사태를 알게 되었다. 쿄우토(京都)에 머물러 있던 측근들이 그에게 알려주었다.

 “알 수 없군”

 그가 알고 있던 것은 자신의 딸을 먼 장래에 히데요리와 결혼시킨다는 기껏해야 그 하나뿐이었다. 그것이 어째서 이렇게 발전한 것인가? 측근들은 아무래도 모녀병간 하나만은 말하기 그래서,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부노쇼우(冶部少=미츠나리(三成))들이, 참언(讒言)한 것이겠지요”

 라고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는 그렇게 말했다. 히타치노스케는 미츠나리 참언설을 믿고 있었다. 만약 타이코우(太閤)가 죽어 히데츠구의 시대가 되면, 타이코우 소속의 미츠나리들은 권세를 잃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그들의 정적(政敵)이었던 자신이 권세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여 빨리 히데츠구를 실각시켜 갓난아기인 히데요리의 후계권을 확립시켜 놓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리 된 것은 미츠나리 등 타이코우 측근들의 음모다라고 히타치노스케는 말했다.

 히데츠구가 후시미(伏見) 방면의 소문을 살피게 하고 보니 사태는 예상외로 심각했다. 죽음을 언도 받을 지도 모른다고 한다.

 “살해당하는 것인가”

 이른 밤,

 “그리 되겠지요”

 라는 예측을 힘주어 말한 것이 쿠마가이 다이젠노스케(나오유키 – 直之)였다. 그는 히데요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사태를 예견하여 넌지시 그리고 자주 경계해야 한다고 히데츠구에게 말했던 것이다.

 “오히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보다 반대로 후시미를 습격하여 타이코우를 죽이고 일거에 정권을 안정시켜야만 하지요. 그에 대한 방법은 이렇습지요”

 라고 말하며 쿠마가이는 그 방법을 설명했다.

 “우선 후시미성(城)은 전쟁 준비가 덜 되어 있습지요. 습격하면 타이코우는 오오사카(大坂)로 도망치겠지요. 그것을 가정하여 요도(淀)와 히라카타(枚方)에 철포대(鉄砲隊) 천 명을 숨겨 놓는 것이지요. 나머지는 오오츠(大津) 등의 주변 도시와 다이부츠(大仏) 가도(街道), 타케다(竹田) 가도 등 후시미(伏見)와 연결된 도로에 병사들을 숨겨 놓으면,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습지요.”

 라는 것이었다. 히데츠구는 놀라 귀를 막으며,

 “...다이젠, 더 이상 말하지마! 모반은 무섭다구...”

 라고 핏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이 날부터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습격을 대비하여 외출할 때는 반드시 따르는 자들에게 갑주를 입게 하였다. 이것이 후시미로 곧바로 알려졌다.
 당연히 칸파쿠는 항상 후시미를 노리고 있다고 해석되었다.
 히데츠구는 자신이 조심한다는 것이 그렇게 해석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쿠마가이 나오자네(熊谷 直実)


  1. 일본어로 살생(殺生)와 섭정(摂政)은 발음이 셋쇼우(せっしょう)로 같다. 예전엔 섭정에 이어 관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섭정관백(摂政関白)라고도 하였다. 저 말은 섭정과 살생의 발음을 같은 것으로 한 언어유희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대대로 섬겨온 가문. [본문으로]
  3. 이해를 돕기 위한 사족을 두자면 히데츠구 죽을 때의 나이 2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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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6: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헤이케 이야기 번역본 읽어보니,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잡병들이 몰려오기에 하는 수 없이 자기 손으로 죽였다고..'

    ...나, 나름대로 애정인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6: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쿠마가이 나오자네는 징기스칸4에도 나오더군요.. 관동 제일의 무법자..라는 별명이 있었다던데..(헤이케 이야기에도 그런 말이 있었던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9 1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이런 고귀한 무장을 잡병 따위에게 목숨을 잃게 할 수가 없다는 식의??

    헤에~ 징기스칸4라는 게임은 그런 게임입니까? 예전에 잠깐 해 보았지만, 그 놈의 도시 공략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아서... 무엇보다 맵이 너무 큽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9: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징기스칸 4 도시 공략이야.. 화포병만 끌면 뭐..;;

    맵은.. 가도 안 깔면 기병 안 쓰는 이상 답답해서 못하죠..; 두번쯤 엔딩보다 접은 기억이;;

  5.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생관백이라더니 어느 정돈지 잘 몰랐는데 미쳐도 단단히 미쳤었군요 죽어도 싸네요

五.

 이 시대에 학문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은 센고쿠(戦国)를 헤쳐 나온 거친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없었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는 말년이 되어서야 논어(論語)의 강석(講釋)을 듣고 나선, 세상엔 재미있는 것이 있구나 라고 하며, 카즈에노카미(主計頭)도 한 번 들어보게나, 라고 아주 신기한 듯이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권할 정도였다. 히데요시도 전혀 관심이 없어, 언젠가 비서가 ‘다이고(醍醐)사(寺)’의 다이(醍)라는 글자가 안 떠올라 곤혹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까짓것 ‘다이(大)’라고 쓰면 될 것 아니냐~”

 라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학문적 교양의 전통을 간신히 지키고 있던 곳은, 오산(五山 -
* 하단 역자 주)의 중들과 귀족(公家)정도로, 히데요시 이하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술에는 관심이 있어도 학문에는 무관심하여 그것이 토요토미 정권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런 상화에서 히타치노스케는 칸파쿠 히데츠구를 학문의 보호자로 꾸밈으로써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조류의 원천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리려 했다.

 히타치노스케는 이 계획을 히데츠구의 문서담당관인 승려 사이도우(西堂)에게 추진시켰다.
 겐류우 사이도우(玄隆 西堂).
 토우후쿠(東福)사(寺)에
승적(僧籍)을 두고 젊으면서도 오산에서는 제법 유명한 학승(学僧)이다. 사이도우가 히데츠구의 학문에 대한 것을 모두 처리했다.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오산의 승들을 모아, 시회(詩會)가 열리는 것이 정례화(定例化) 되었다.
희서(稀書)나 진서(珍書) 종류도 히데츠구의 명령으로 모아졌다. 시모츠케(下野) 아시카가 학교(足利学校[각주:1])나 카네자와 문고(金沢 文庫[각주:2])에서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제출시켜 쿄우(京)에 모아서는 쇼우코쿠(相国)사(寺)에 보관하며 일반에게 관람을 허용하였다.

 또한 온갖 수단을 다하여 모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각주:3]), 속일본기(続日本紀[각주:4]), 일본후기(日本後紀[각주:5]), 속일본후기(続日本後紀[각주:6]), 문덕실록(文徳実録[각주:7]), 삼대실록(三代実録[각주:8]), 실사기(実事記), 백련초(百練抄[각주:9]), 여인호(女院号), 류취삼대격(類聚三代格[각주:10]), 령 35권(令三十五巻) 등을 조정에 헌상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야마토(大和)의 여러 큰 절의 중 17명을 소집하여,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필사(筆寫)시켰다.
 -무식한 풋내기
 라고 처음 상급 귀족(公卿)들 사이에서 은근히 기피당하고 있던 이 남자를 이런 행동으로 인해 새삼 달리 보는 사람도 나타났다. 하기는 반대로 오바이트 쏠릴 정도라며 히데츠구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 등은 몇 번이나 초대를 받아도 히데츠구를 피하여 결국 끝까지 만나지 않았다. 학문이 더러워진다고 세이카는 은밀히 지우(知友)에게 소근거린 것을 보면 이 남자만은 히데츠구가 인기를 얻고자 하려는 의도를 확실히 간파하고 있었던 듯하다.
 세이카는 또한 그 지우에게,

 “저 인간 죽을지도 모른다”

 고 예언했다.

 “타이코우(太閤)의 자식이 생겼는데도 뻔뻔스럽게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앉아서는 도무지 관직에서 사퇴하여 물려날 생각을 하지 않는군. 필시 죽음을 당할 것이다”

 라고 세이카는 내다보았다. 세이카뿐만 아니라 쿄우(京)의 상급 귀족들는 숨을 죽이고 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가로인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만은,

 “타이코우 전하께서 칸파쿠 직(職)에서 물러나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 물러나실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부터 칸파쿠 자리는 다이묘우(大名)하고는 다르게 조정의 직(職)이며 천자(天子)에게 임명받는 것입니다. 만약 자진해서 물러나신다면 타이코우 전하가 내리신 훈계 제 3항의 조정을 공경하고 존중하라는 말씀을 어기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결코 그러한 일은 하지마시길”

 이라고 논리적으로 못을 박았다. 히데츠구도 그것이 도리(道理)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히타치노스케는 지금 여기서 히데츠구가 칸파쿠에서 물러나면 자신의 지위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실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히타치노스케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남자는 요컨대 히데츠구가 어떤 일에건 자신감을 갖게 하여 독립적인 인격을 주장할 때까지 교육해 가고 싶다고 바라고 있었다.
 사실 이 즈음부터 히데츠구는, 그 소심하고 두려움에 떨던 마고시치로우와는 다른 인격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인(武人)이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말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과시하기 시작했다.
 궁정에서 사교를 행함에 있어 지식이 부족했던 이 남자는 상급 귀족(公卿)이 아닌 무인이라는 그 하나만을 크게 내세우는 것 외에는 열등감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진정한 무인 – 자신의 부하나 토요토미 가문의 여러 다이묘우들 – 에게는 자신이 무시받고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민감히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의 무(武)를 세상에 알려주마’
 라고 생각했다.
 이 기세는 처음엔 지극히 온당하고 얌전한 형태를 취했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병법(兵法[각주:11])이라는 개인 격투기의 시합을 개최하는 것이었다.
 산죠우(三条) 오오하시(大橋)에 방을 내걸고 방랑 병법자를 모아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서로 싸우게 하였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병법이라는 기술에 신뢰를 갖지 않았으며 병법자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검술(剣術)이 가능하다고 해서 고용한 적도 없었으며 더구나 검술지남역(剣術指南役[각주:12]) 등은 두지 않았고 그런 시합을 구경하고자 하는 관심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히데츠구는 그 반대를 취하여 쥬라쿠테이(聚楽第)를 병법 유행의 중심지로 만들려 하였다. 라기보다는 그는 이 격투기 시합이 이외로 재미있음을 알았다. 피가 흐르고 사람이 죽는 것이었다.
 피가 낭자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고 하여 결국 시합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진검과 진짜 창이어야만 한다고 포고했다. 그 서로 죽어나가는 경기를 많은 처첩들과 함께 구경했다. 여자들이 그 처참함에 비명을 질러 기절이라도 하면 히데츠구는 크게 자존심을 만족시켜,

 “역시 여자군~. 이 정도를 가지고”

 라고 앙상한 배를 부여잡고 통렬히 웃어대며 더욱 좋아하였다.
 자기야말로 용사(勇士)라고 생각했다.
 한층 더 떠 다른 사람의 시합을 보는 것만이 아닌 자신도 이 살육에 참가하고자 했다.
 밤중에
미복(微服)한 채 길 끄트머리에 숨어서 약할 것 같은 사람이 오면 달려 나가 베었다.

 “이번엔 오른쪽 어깨부터 비스듬히 베어주마”

 “다음엔 정면에서 내려 쳐 주마”

 “간만에 여자의 목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싶다”

 등을 지껄이며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 사람을 쓰러뜨렸다. 쓰러질 때, 사람은 생각 외로 세찬 땅울림을 내며 쓰러졌다. 이 죽이는 손맛에,

 “매사냥은 좆도 아니구만~”

 라고 히데츠구는 말했다.

 “내 무(武)를 보아라!!!”

 라고 어쩌다 단칼에 사람을 죽이기라도 하면 포효하듯이 목소리를 높여서는 호종(扈從)하는 사람들을 불러 그들에게 사냥감인 시체의 옆에 모이게 해서는 심장에 귀를 대게 하여 확실이 멈추었는지 어땠는지를 확인시켰다. 나중에는 아직 해가 남아 있는데도 칼질하러 나왔다.

 키타노 텐만(北野 天神)의 토리이(鳥居) 옆을 미행(微行)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눈먼 장님이 지팡이로 발 밑을 살피며 다가왔다. 장님은 - 이 살인취미를 맛들인 사람에게 있어서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반응할까, 어떤 손맛이 날까? 히데츠구는 침을 삼키며 다가가서는,

 “이보게~”

 하고 불렀다.


오산(五山)

  1. 칸토우(関東) 아시카가 지역에 있던 당시 칸토우 지방 최고의 학교 겸 서고였으나, 이 즈음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후원자였던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北条)가(家)가 멸망 당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극심한 고난에 처해있었다. 때문에 이 때 히데츠구의 강압으로 많은 책을 빼앗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무사시(武蔵) 카네자와에 있던 서고(書庫). 카마쿠라(鎌倉) 시대 중기에 설립. [본문으로]
  3. 신대(神代)~697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4. 697년~791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5. 792년~833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6. 833년~850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7. 日本文徳天皇実録의 약자. 850년~858년까지 기록. [본문으로]
  8. 日本三代実録의 약자 – 858~887년까지 기록, 이상의 6개를 율령시대의 역사라 하여 ‘육국사(六国史 - 릿코쿠시)’라 한다 . [본문으로]
  9. 카마쿠라 시대의 역사서. 바쿠후(鎌倉 幕府), 무가(武家)의 역사 기록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와 대조되는 조정 쿠게(公家)쪽의 역사서. [본문으로]
  10. 헤이안(平安)시대의 법령집으로, 율령제 시대의 관직으로는 일 처리에 무리가 있었기에, 각 관직의 계급이나 배치를 사례별로 나누어서 일 처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 [본문으로]
  11. 이 당시 일본에선 '검법(劍法)'을 병벙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12. 검술 사범을 말한다. 다이묘우(大名) 등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고용되어 검술을 가르치는 직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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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마고시치로우의 운명을 또다시 역전시켰다.

 토요토미 가문에서 이 젊은이의 운명은 전부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츠루마츠가 죽은 지 석 달째가 지날 즈음.

 이 젊은이에게 히데요시의 사자(使者)가 와서 정식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후계자 겸 히데요시의 양자(養子)로 삼는다고 전했다. 츠루마츠의 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표면적인 축하연(祝賀宴)은 삼갔지만 그래도 마고시치로우의 저택에는 은밀히 축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방문하는 다이묘우(大名)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 방문객들은 3개월 전에 뇨신(如心)()의 츠루마츠 장례식 때 그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히데요시의 눈 앞에서 뒤질세라 너도나도 앞다투어 상투를 자르던 사람들이었다.

 

 이 해의 12.

 토요토미 가문은 조정(朝廷)에 요청하여 마고시치로우는 나이다이진(大臣)에 임명되었다.

 그 날부터 불과 24일이 지난 뒤에 마고시치로우는 천하에 있어서의 위치가 확 바뀌었다.

 칸파쿠()가 된 것이다.

 히데요시가 그 직()을 물려준 것이다.

 물려주고 히데요시는 조정의 직책에서 물러나 오오사카(大坂)()에서 살며 이후에는 타이코우(太閤)’라 불리게 되었다.

 칸파쿠 히데츠구 공()이 된 마고시치로우는 새로이 쿄우()의 쥬라쿠테이() 건물과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주어졌고 쿄우()에 살면서 전하(殿下)’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하인가……’

 마고시치로우는 자신의 존귀함을 어떻게 놀라야 하는지 처음엔 놀랄 만큼의 지식도 가지지 못했지만 차츰 사람들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 칸파쿠라는 것은 조정 넘버 원의 직책이며 신하로서 이 이상의 직책은 없다.

 그러했다. 천하의 지배권은 여전히 타이코우가 쥐고 있다고는 하여도 조정에 있어서는 마고시치로우가 상급귀족(公卿)의 필두였다.

 

 더구나 그의 거처인 쥬라쿠테이()가 그에게 자신의 존귀함을 충분히 실감시켜주었다.

  3000평이라는 광대한 땅 주위를 해자(垓字)가 둘러 치고 있었으며 담과 전망대(矢倉)가 놓여져 있었다. 그 안에는 숲과 큰 연못, 수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며 그 바깥에는 100이 넘는 다이묘우들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

 마고시치로우는 하나의 거대한 성과 같은 저택의 주인이 되어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았다.

 나는 이 정도의 몸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마고시치로우의 능력, 성격을 꿰뚫고 있던 히데요시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꿈에서라도 방심하지 않을까 하여 여전히 바보를 취급하듯이 마고시치로우의 생활을 법으로 얽매었다.

 법은 5개조로 편지 형식을 취했고 마고시치로우는 그것을 존수(尊守)한다는 뜻의 서약서를 쓰게 하였다.

  1조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을 잊지 말아라

  2조는 상벌을 공평히 해라

  3조는 조정을 공경해라

  4조는 부하를 소중히 해라…… 라는 것으로, 그 내용은 전부 추상적인 표현을 피하여 어린 아이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치는 듯이 구체적이며 세밀했다.

 예를 들면 제 5조의 내용은 히데요시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는데, 히데요시는 자기 정권의 후계자가 단순한 바보였으면 오히려 편했을 것이다. 성가시게도 성욕(性欲)이 강하였고 그것도 장난이 아닐 정도였다. 단지 그 점만이 히데요시와 닮았는지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히데요시는 이 조문에서 [나를 따라 하지 말 것]이라고 하였다. [다도(茶道), 매사냥, 여성과의 잠자리 등을 너무 심하게 하지 말 것. 이 히데요시를 절대로 따라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단지 다도는 휴식도 겸할 수 있으니 때때로 이런 자리를 마련하여 사람들을 초대해도 괜찮다. 근데 첩은 5~10명 정도 저택 안에 두어도 상관없다. 그 정도로 해라. 절대 저택 밖에서 음란한 짓은 하지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마고시치로우는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사천왕(四天王) 이하 일본에 있는 모든 신들에게 이를 어기지 않는다고 쿠마노 서약서(熊野 誓紙[각주:1])로 맹세하여 만약 어기는 일이 있으면, [이번 생에 있어서는 천하의 모든 고난을 받을 것이며 다음 생에 있어서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빠질 것]이라고, 서약서의 방식대로 글을 적었다.


 “이 서약서 맡겨두마

 

 하고 히데요시는 쿄우()에서 보내져 온 칸파쿠 히데츠구의 서약서를 비서인 키노시타 한스케(木下 半助)에게 보관시켰다.

 

 그 후 불과 1 9개월이 지나자 히데요시는 저 마고시치로우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물려준 것을 몹시 후회했다.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요도도노(淀殿)라 불리는 측실 아자이()()가 또다시 남자아이를 낳은 것이다. 히로이([각주:2])라고 이름 붙였다.

 이 아이가 태어난 소식을 마고시치로우가 처음 접했을 때, 어째서인지 아무런 불안도 느끼질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인 것도 양자인 것도 반환해야만 했을 것이다. 단순히 자신이라는 존재가 후계권을 가진 장식 인형이었던 만큼 더 이상 그 존재의 이유는 없어졌다고 생각했어야만 했다.

 칸파쿠가 되기 전이라면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마고시치로우는 변했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이 젊은이는 이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인형에서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지도 모른다.

 18살 때부터 관직, 지위가 눈깜짝할 새에 급상승했지만 현실은 종이 인형처럼 옷을 바꿔 입혀졌을 뿐으로 자신이 무엇을 했다는 기억이 없었다.

 단지 이 빼빼 마른 육체를 호흡시키며 먹고 마시고 싸고 있으면 싸움도 그걸로 끝났고 관위도 히데요시가 올려 주었다.

 마고시치로우는 하루에 두 번 똥을 싸는 버릇이 있었는데 오우슈우() 정벌에서도 머무는 곳마다 두 번씩 똥을 싸대며 츠가루()까지 갔고, 단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것 만으로도 오우슈우()는 평정되었다. 고래(古來) 이렇게 편한 원정()을 한 장군도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이외에는 모든지 금지라고 히데요시에게 구속당하고 있었다.

 나가쿠테(長久手) 패배 때의 5개조 편지가 - 그 이후 칸파쿠가 되기까지의 만 5년이라는 기간 동안 마고시치로우를 강하게 구속해 왔다. 마고시치로우의 자율에 의해서가 아닌 숙노(宿老)인 호리오(堀尾), 나카무라(中村), 미야베(宮部), 야마우치()라는 네 명의 다이묘우(大名)가 그렇게 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파쿠가 되자 그 숙노들은 오오사카로 떠나고, 그들을 대신하여 오오사카에서 키무라 히타치노스케(木村 常陸介)라는 사람이 칸파쿠 소속의 가로(家老)로 쿄우()에 왔다.

 이 측근 인사를 새로이 한 것이 마고시치로우를 해방시켰다.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는 야전(野戰), 공성(功城)의 지휘관이라기 보다는 행정관에 가까웠다.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동향(同鄕)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함께 하시바 가문이 토요토미 가문으로 변신하는 동안 계속해서 행정을 담당해 왔지만 도중 히데요시의 미움을 받아 옛 동료인 미츠나리나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만큼 출세하지 못하고 자신의 불운함을 한탄하고 있었다.

 마고시치로우가 칸파쿠가 됨과 동시에 히타치노스케는 이를 좋은 기회라 여겨 히데요시에게 간청()하여 칸파쿠 가문 소속의 가로가 되었다.

 그는 당대에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다음 대()에서 가능성을 찾았다. 히데요시가 죽고 히데츠구가 다음 대의 지배자가 되면, 히타치노스케는 당연히 권세(權勢)를 누릴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자연히 히타치노스케는 마고시치로우의 개성()에 대해서 관대했다.

 취임했을 때,

 

 전하. 이제는 칸파쿠이옵니다. 원하는 대로 행하시옵소서

 

 라고 까지 말했다.

 마고시치로우는 여태까지 이렇게 매력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은가?”

 

 이 말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도 마고시치로우는 오랜 습성으로 인하여 여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히타치노스케는 믿음직스럽게,

 

 오오사카(大坂)에는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행하시옵소서

 

 라 말해 주었다.

 히타치노스케는 그렇게 마고시치로우를 기쁘게 함으로써 신뢰를 얻으려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이 재능 넘치는 인물은 마고시치로우라는 남자를, 이 시대의 인기인(人氣人)으로 만들 궁리를 하였다. 히타치노스케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마고시치로우가 학문(學問)을 좋아한다고 선전하여 학문의 보호(保護)와 격려자(激勵者)로 만든 것이다.
  1. 쿠마노는 일본의 거대한 신사(神社)가 있던 곳으로, 여기서 발행되는 부적과 같은 서약서 뒤에 서로 약속한 것을 쓰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를 어기면 하늘의 벌을 받아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 후에 히데요시가 죽기 직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오대로(五大老)와도 서로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주워온 아이’라는 뜻으로, 주워온 자식은 오래 산다는 미신 때문이다. 후에 히데요리(秀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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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7 1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 이 친구도 슬슬 막장으로 갈 느낌이 풍기는군요..

    히데아키는 적어도 배변장애는 없지 않았나요..(쿨러럭;)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7 2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 료우타로우 선생의 글은 사실 7: 거짓 3...이라는 말들이 있더군요. 일본 역사 학자중에 어떤 이는 강의할 때마다 듣는 말이 "시바 선생의 글과는 틀리네요"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들어 스트레스 받는 다는 사람도 있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8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ㄷㄷ.. 이거야 이문열 삼국지도 아니고..(~~;)

.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는 성인식을 치른 후 카와치(
) 2만석의 영토를 하사 받고 이때부터 외삼촌인 히데요시를 따라다니며 10대 중반 즈음부터 전투에 참가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한 군단의 대장이었다. 16살 때는 이세(伊勢)타키가와 가즈마스(川 一益) 정벌에 참가했다.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다”

 
 라고 외삼촌 히데요시는 매번 말했다. 좋은 일이라는 것은 히데요시의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긴 했다. 이 세상에서 히데요시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것이 바로 이 마고시치로우였다.
 둘째인 고키치(小吉 = 히데카츠(秀勝))도 그렇기는 했지만 이 둘째는 지능이 좀 떨어졌고 더구나 태어날 때부터 외눈이었다.
 셋째인 아이는 후에 히데토시(秀俊)라는 인물이 되지만 이 아이는 일찍부터 히데요시의 이부제(異父弟)히데나가(秀長)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탈락했다고 보아도 좋았다. 즉 히데요시의 혈통 중에 젊은 사람은 누나 오토모가 낳은 이 세 명밖에 없었다.

 
 ‘이 분이 후계자가 되신다.’
 라고 여러 장수들도 그리 생각하였다. 자연히 나이 먹은 장수들은 마고시치로우를 히데요시의 분신처럼 떠받들었다.
 이런 와중에 웃기지도 않다는 듯이 마고시치로우를 비웃는 사람이 있었으니, 히데요시의 몇 없는 친척 중에 하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였다. 오와리 키요스(淸州)의 오케야(桶屋[각주:1])의 아들로 태어나 아명(
兒名

)
이치마츠(市松)인 마사노리(正則)는 히데요시의 죽은 아비의 혈연이었던 관계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하시바 가문(羽柴)의 부엌 밥을 먹고 자라며 코쇼우(小姓)가 되었고, 이어 시즈가타케(賤ヶ岳[각주:2])에서는 공을 세워 지금은 모노가시라(物頭[각주:3])가 되어 세 개의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원래 마사노리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였으며 광인(狂人)이라 생각되어 지는 곳도 있었고 또한 히데요시의 일족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 남자였기 때문에 마고시치로우를 질투의 감정을 통해서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괭이질 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남자다”

 

 누군가가 마고시치로우를 '귀족'이라 말했을 때 마사노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저 놈이 귀족인가? 옷이야 귀족하고 같겠지만 안에 있는 몸뚱이는 보급대의 짐꾼조차 버거운 놈이다”

 
 고 말했다.
 그런 험담이 마고시치로우의 귀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런 종류의 말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자연히 허세를 부리게 되었고 보좌하는 노장들에게까지 거만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16살 때 말이다.
 그러나 전투에 있어서는 보좌역들이 모든 것을 관리하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기에 큰 공도 없었다. 이 젊은이가 전투를 - 라기보다는 역사를 좌우할 정도의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다음 해인 17살이었을 때였다.

 
 그 전투는 후에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싸움이라고 일컬어 진다.
 때는 히데요시가 일본의 중앙 24개국을 휘하에 두었을 즈음으로 그 위세를 몰아 토우카이(東海)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를 제압하고자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로 진출했다. 이에야스도 본국인 미카와(三河)를 비워둔 체 오와리에 포진하여 거의 3배에 달하는 병력을 가진 히데요시군과 대치했다.
 서로 상대의 허실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대치한 채 움직이지 않았고 서로 견고한 야전진지를 구축하여 전선은 고착상태가 되었다. 이럴 경우 가벼이 군을 움직이는 쪽이 질 것이다. 적이 움직임에 따라 곧바로 대응하는 태세를 쌍방이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자중에 자중을 거듭하였지만 이럴 때 그에게 있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작전을 제안해 왔다.

 과거 오다 가문(織田家)의 동료였던 이케다 쇼우뉴우(池田 勝入[각주:4])와 테루마사(輝政) 부자(父子), 천하를 손에 넣고자 하는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기분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이케다 쇼우뉴우는 공을 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가 제안한 작전이라는 것은 -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가 비어있다. 지금 은밀히 별동대를 편성하여 이에야스 모르게 우회 행군하여 곧바로 미카와를 공격하면 이에야스는 놀라 이곳을 버리고 지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이 별동대의 선봉을 자신에게 맡겨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찬동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가 알아채고 행여라도 패배라도 당한다면 이것을 계기로 전군의 사기가 떨어져 버릴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쇼우뉴우는 다음날 다시 한번 간청했다. 히데요시는 쇼우뉴우의 마음이 멀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 결국 허용했다. 단 하나하나 세세히 주의시켰다.

 

 곧바로 별동대가 편성되었다.
 선봉은 이케다 쇼우뉴우, 중군은 모리 나가요시(森 長可),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라는 식으로 오다(織田) 시대부터 맹장으로 유명한 장수가 선발되었고, 후군은 미요시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가 담당함과 동시에 별동대 전체의 대장도 겸했다.
 유격군 총 1 5천이 오와리 가쿠덴(樂田)의 진지를 출발한 것은 1584 4 6일 심야였다. 모노쿠루이(物狂) 언덕을 살며시 넘어 이에야스의 진지 전방을 통과, 첫째 날은 무사히 그 행동이 탐지되는 일 없이 넘어갔다.
 이에야스가 알게 된 것은 다음날인 7, 그것도 노을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에야스가 히데요시군에 밀정으로 파견했던 이가(伊賀) 닌쟈(忍者) 핫토리 헤이로쿠(服部平六)라는 자가 돌아와서 이것을 보고했다.
 히데요시의 한 부대가 움직였다는 보고에 이에야스는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해가 짐과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취한 방법은 은밀히 움직이는 적군을, 이 또한 은밀히 추격하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코마키의 본영에서 9천의 병사를 히데요시군이 알아채지 못하게 빼내는 데 성공, 그 뒤 재빨른 행군으로 뒤를 쫓았고 곧이어 심야에 적 후미를 발견했다.

 

 “적 후군의 장수는 누구더냐?

 

 “미요시 마고시치로우님이십니다.

 
 고 부하 중에 하나가 답했다.
 이에야스가 히데츠구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인식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어떤 인물인가?

 
 고 적 정세를 자세히 아는 자에게 물었다. 히데요시의 양자라고 한다. 나이는 17. 다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했던 것은 이 어린 대장이 몸에 걸치고 있는 무구(武具)였다.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는 그의 인생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수집했었는데 이 시기에는 열심히 유명한 무장의 무구를 모으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 남자의 대장으로써의 특징인 부대표식에치젠(越前) 키타노쇼(北ノ庄)에서 패사(敗死)한 오다 가문 제일의 용장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금색 마토이([각주:5])이다.
 쓰고 있는 투구는 미노(美濃)출신의 무예가 뛰어난 무사로 지금은 히데요시를 섬기고 있는 히네노 빗츄우노카미 히로나리(
日根野 備中守 弘就)의 중국 관모(官帽)모양의 투구를 억지로 청해서 손에 넣은 것이었고, 몸에 걸치고 있는 새털로 된 진바오리(陣羽織[각주:6])오우미(近江)출신의 호걸(豪傑)로 지금은 히데요시의 군중에 있는 키무라 히타치노스케(木村 常陸介)가 항상 걸치던 것을 졸라서 손에 넣은 것이다. 말하자면 당대 영웅호걸의 전장도구들을 끌어 모아서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었다.

 

 “특이한 분이시군

 
 이에야스는 머리를 조금 갸웃거리더니 비웃었. 이에야스가 알고 싶었던 것은 적장의 강하고 약함이었다. 선봉인 이케다 쇼우뉴우의 용맹함은 천하에 떨치고 있었으며, 중군인 호리 히데마사는 역전(歷戰)의 용사였고, 모리 나가요시는 미노 사이토우(
)()의 옛 신하출신으로 무사시노카미()를 칭하며 노부나가를 섬겨 여러 전장을 경험하면서 오니무사시(鬼武蔵[각주:7])라는 이명(異名)을 얻고 있었다. 또한 이 일족은 그의 동생 란마루(蘭丸), 리키마루(力丸)가 혼노우(本能)()에서 노부나가를 지키며 분전하다 그와 함께 죽은 것으로 유명하다.
 다들 너무 강했다. 기습의 효과는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에 있다. 이에야스는 마고시치로우의 겉모습의 기묘함을 듣고,

 

 “그 분은 분명 약할 것이다

 
 고 말했다.
 이에야스가 보건데 그 히데요시의 친척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용렬함과 무능함을 그러한 허세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돌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인간 관찰을 끝낸 후 이에야스는 마고시치로우로를 공격의 중점으로  두기로 하고
포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하쿠산(白山)
 이라는 곳에 마고시치로우군() 야영했다.
 동쪽은 고지(高地) 서쪽으로 경사졌으며, 계곡 사이에 남북으로 길이 하나 나있을 뿐으로 주변은 울창한 숲이었다. 이런 지형으로 보건대 마고시치로우는 마치 습격 당하기 위해서 야영하고 있다고 밖에 없었다.
 더구나 공격하는 이에야스 본인조차 놀랄 정도로 척후는 커녕 보초도 게을리 하고 있는 상태였다.

 

 “편한 싸움이 되겠군. 명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고 이에야스는 명령하며 야심함을 틈타 9천명을 속에 잠입시켜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다렸다.

 
 아침이 되어 마고시치로우군은 일어났고 일어났지만 주변에 이에야스군이 잠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눈치채지 못한 채 왁자지껄대며 아침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야스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은 때였다.


 이미
전투가 아니었다.
 학살이었다.
 대부분의 사졸들은 식기를 버리고 말을 버리며 맨몸으로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고시치로우는 이미 대장이 아니었다. 사냥터의 동물과 같은 신경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도망가기 위해서 옆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숲에서 돌격해 오는 토쿠가와의 병사들을 보고 몸을 반대로 돌렸고 막상 갈 곳도 없어 주변을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다. 이러는 동안 그가 내린 명령은 하나밖에 없었다.

 

 “큐우베에(久兵衛) 불러라! 큐우베에를 불러라~!


 고 외쳤다.
 큐우베에는
그의 선봉대의 대장인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를 말한다.
 요시마사는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아시가루(足軽[각주:8])부터 시작하여 출세, 여러 직책을 역임하는 동안 히데요시의 눈에 띄어 지금은 마고시치로우에게 파견된 전술 지휘관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남자였다. 남자의 부대만이 이런 혼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간신히 버티며 적을 막아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요시마사는 이상히 여겨 방어선을 철수시키고 왔다.

 

 “쇼우뉴우나 무사시에게 사태를 알려라~ 도우러 오라고 말해!

 
 하고 소리쳐댔다.
 요시마사는 어처구니 없었다.
 전령 역할이라면 츠카이반(使番[각주:9]) 대장 옆에 있다.
 제1선의 지휘관을... 그것도 방어하기에바쁜 와중에 불러서는 전령으로 삼으려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거기에명령이라는 것도 좋지 않았다.
 지금 혼란은 후군이 혼자서 막아야만 하지 리나 앞서 있는 전방의 부대를 불러, 설사 그들이 구원하러 오더라도 개미지옥과도 같은 적의 함정에 빠져 속에서 각개격파 당해 버릴 것이다. 그런 가지 이유로 요시마사는 거절했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는 미친 듯이 외쳤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냐? 죽인다!!”

 
 고 소리쳐댔기 때문에 어쩔 없이 부하도 없이 혼자서 말을 몰고 전방 부대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열심히 달려 호리 히데마사의 부대를 따라 잡아 후군이 무너졌다고 알리자,

 

 “큐우베에. 자네는 츠카이반이 아니다, 미요시 가문에서 지휘를 하는 신분이 아닌가? 그렇다는 것은 겁을 먹고 도망쳐 것이군

 
 하고 모두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요시마사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물러나 전장에서 이탈하면서
 ‘
장래 가능성이 있는 대장은 아니다
 며 마고시치로우에게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전투 후에 사표를 내고 낭인이 되었다.
 그 여담이지만 남자는 고향이 같았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주선으로 히데요시의 직속 신하가 되어, 기량에 걸맞게 10만석이 주어졌고 후에 세키가하라(ヶ原)에서는 이에야스측에 선 덕분에 치쿠고 야나기카와(筑後 柳川) 30여만석을 영유하게 된다.

 
 요시마사가 전령으로 떠나면서부터 마고시치로우의 군은 이상 군대가 아니었다. 모두 말을 버리고 맨발로 도망쳤다. 마고시치로우도 도망치면서 잔머리를 굴렸다. 중국 관모 모양의 투구, 금색 마토이의 우마지루시, 새털로 진바오리라는 호걸의 상징은 모두 버리고 역시 맨발로 도망쳤다. 이렇게 하면 적은 자기를 말단 무사로 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그 앞을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 언제나 자랑하던 말에 채찍질하며 조릿대로 개인표식을 비스듬히 등에 단 채 유유히 도망치고 있었다.
 카니는
미노 출신으로, 창을 쥐면 남자를 당해낼 사람이 없다고 하는 남자이다. 히데요시는 마고시치로우에게 도움 된다고 생각하여 이런 종류의 능숙한 전쟁꾼들을 많이 배속시켜 주었다.

 카니는 역시 전장에 익숙한지 도망치는 방법도 어딘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사이조우~ 사이조우~”

 
 하고 마고시치로우는 애원하는 듯이 불렀다. 물론 마고시치로우는 카니에게 아무런 용무가 없었다. 필요한 것은 그가 타고 있는 말이었다.

 

 “말을 나에게 다오

 

 마고시치로우가 말하자 카니는 눈동자를 굴리며 뒤돌아서는,

 

 “비올 때의 우산이외다

 
 라고 말하고선 도망쳤다. 비가 때는 우산이 필요하다. 퇴각할 때는 말이 필요하다. 그리 쉽게 말을 줄까하는 말이었다. 카니와 같은 미노 사이토우 가문에서 오와리 오다 가문으로 말을 갈아타며 수 많은 전쟁터를 경험해 전쟁전문가들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패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의 앞길에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남자는 후에 사표를 내던지고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기게 된다.

 
 그러는 동안 마고시치로우에게 배속된 부대장 중에 명인 키노시타 토시나오(木下 利直) 도망치면서 마고시치로우를 발견하곤 자신의 말에 태워 도망치게 하였고 자신은 맨땅에 서서 개인표식을 등에서 뽑아 땅에 꽂고서는 달려드는 적병을 막았지만 전사했다. 역시 그의 동생인 스오우노카미 토시마사(周防守 利匡) 형을 도와 말 없이 맨땅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마고시치로우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둘의 마지막조차도 알지 못했다.

 
 이 붕괴는 곧바로 전방의 아군들에게도 파급되어 선봉대장인 이케다 쇼우뉴우는 아들인 모토스케(之助) 함께 전사하였고 명장이라 일컬어졌던 모리 나가요시도 적의 두터운 포위망 속에서 이마에 철포 탄환을 맞고 죽었다. 어쨌든 별동대는 전멸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 나가쿠테(長久手) 패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외교로 고립시킨 화해하여 결국은 신종(臣從)시켜 토요토미 가문 휘하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이것이 오히려 그의 무위(武威) 나타내는 최대의 이력이 되었으며 히데요시는 죽을 때까지 이에야스에게 큰소리를 못쳤다. 또한 덕분에 히데요시가 죽은 천하를 손에 넣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만약 마고시치로우의 실패가 없었다면 히데요시가 이겼고 이에야스는 패망(敗亡)하여 히데요시 정권 불안의 불씨는 꺼졌을 것이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히데요시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는 몰랐다. 도망친 히데요시에게 전령을 보내어,

 

 “대신할 장수를 주세요

 
 라고 하였다. 마고시치로우의 입장에서는 키노시타 형제가 죽었으니 그들을 대신할 인물이 필요하다, 히데요시 옆에 있는 인물 중에 하나를 보내주세요 - 라는 것이었다.
 이름까지 집어서 말했다. 무용(武勇) 뛰어난 이케다 켄모츠(池田 監物) 원합니다 하였다. 말투가 마치 물건이라도 바꾸자는 듯하였다.

 

 “ 놈이 인간이냐?”

 

 라고 히데요시는 뻔뻔스럽게 마고시치로우의 말을 가지고 사자 히토츠야나기 이치스케(一柳 市助 = 후에 이즈노카미(伊豆守)[각주:10])를 향해서 우선 격노하였다.

 

 “네 놈을 우선 죽이고 나중에 마고시치로우에게 배를 가르게 하겠다"


 까지 말하였다. 키노시타 형제를 개죽음 시키고 자신만 전쟁터에서 도망쳐 왔으며 거기에 그 때문에 모리 나가요시, 이케다 쇼우뉴우 부자까지 전사했다. 그것에 아무런 창피를 느끼지 못하고 도망쳐 오자마자 대신할 사람을 보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정신상태를 가진 것인가?
 '저건 그냥 바보인가
?’

 히데요시는 이 패전보다도 그 생각으로 인해 더욱 마음이 어두워졌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장래를 맡길 자신의 혈연이 어째서 하나같이 이렇게 졸렬한 놈들뿐인지 예전부터 생각했다.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
동생인 히데나가(
秀長)를 제외하곤 모두 지능에 결함이 있던지 성격이 좇같았다. 처의 친척들을 둘러보아도 스무 살 전후의 젊은이 중에서는 제대로 된 놈이 없었다. 적어도 마고시치로우 정도는 하고 생각하여 조금은 기대를 걸었다. 그 재능은 포기한다손 치더라도 저 가벼운 성격을 보면 자신의 뒤를 물려준다고 하여도 세상 사람들은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면 권력의 자리라는 것은 하루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히데요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젊은이를 어떻게든 제 앞가림은 하는 머리와 마음의 소유자로 만들어 그런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후계자로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히데요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일을 꾹 참고 있었지만, 일단락한 어느 날 조용히 자신의 비서를 불러, 붓과 종이를 준비케 한 후, 눈 앞에 땀구멍이 커다란 밉상 맞은 얼굴을 한 마고시치로우가 바로 앞에 두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받아 적게 하였다.

 
 [너는]이라는 말투로, 편지는 곧바로 본제로 들어갔다.

 평소 히데요시의 조카라는 것을 내세우며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행동이 많다.
 
꾸짖어야 할 때가 왔다. 마음가짐도 올바르지 못하다. 반대로 역시 히데요시의 조카라고 존경 받을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앞으로는 더 이상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한 때는 죽이려고 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가엾다는 마음이 생겨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 마음을 고쳐 남들에게도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어쨌든 이번 전투에 대해서다.
 키노시타 형제를 붙여주었더니 너는 그 둘을 개죽음 시켜 버렸다. 그것을 너는 미안하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도 없이 히토츠야나기 이치스케를 보내와 이케다 켄모츠를 달라고 말해 왔다. 창피함을 느끼고 분발해야 할 때에, 그 대신할 사람을 요구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냐? 그 말을 전하러 온 놈도 얼간이여서 한 때는 내 직접 죽이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앞으로는 심사 숙고하여, 히데요시의 조카는 굉장한 인물이라고 남들에게 들을 수 있게 되어 준다면 나는 무엇보다도 그것에 만족하겠다.
 지금의 마음 가짐만 고친다면 어느 나라건 너에게 주겠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얼간이라면 아무리 목숨을 구해주어도 내 체면에 걸린 문제이기에 내 손으로 직접 베겠다. 히데요시는 사람 베는 것을 싫어하지만 너를 이 상태로 놓아두는 것은 더욱 창피해지기에 다른 사람 손을 쓰지 않고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겠다.
  누가 봐도 훈계(訓戒)의 편지임을 알 수 있듯이 똑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항목에,
 [너는 요령 좋고 잔재주가 많다
.]

 라는 말로 마고시치로우의 능력을 평하였. 요령 좋고 잔재주가 많다는 말을 제대로 인간이 들으면 내겠지만,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정도의 표현만이 간신히 마고시치로우를 칭찬할 있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두고 언젠가는 나의 묘우다이(名代[각주:11]) 시켜주려고 까지 생각했었지만 지금과 같은 마음가짐으로는 끝이 보였다. 이것은 하늘이 히데요시의 이름을 남기지마라, 가문이 끊어져라라고 말씀하시는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라고 계속해서 훈계를 주제로 강조했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는 편지의 의미를 이해할 없었다. 읽고 나서는,

 

 “나는 무예도 부족하 겁쟁이다라는 뜻인가?”

 
 라고 말했다. 말한 상대는 편지를 전하러 미야베 젠쇼우보우(宮部 善祥坊), 하치스카 히코에몬(蜂須賀 彦右衛門) 사람에게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