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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노서약서'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3.22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11- (9)
  2. 2008.02.09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4- (6)
  3. 2007.11.17 살생관백(殺生関白)-4- (3)

十一.

 세간에게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
)란 육체가 없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자질과 성격을 가진 젊은이인지를 동시대의 어느 누구도 – 그 모친과 시녀들 등 극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 알 방도가 없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 분께서는 어떻게 자라셨나?"

 라는 질문을 오오사카(大坂)에서 사람이 오면 꼭 물어보았지만 천편일률적인 것밖에 듣지 못하였다.
 - 똑똑한가? 바보인가?
 라는 것 하나만은 이에야스가 꼭 듣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노골적으로 그렇게 물을 수 없기에 더더욱 없는 재료에서 억측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똑똑하다면 일찌감치 난을 일으켜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바보라면 – 역시 죽일 수 밖에 없지만, 단지 죽인다는 것을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마지막으로 히데요리를 본 것은 히데요리가 만 10살 때인 1603년 2월 4일이었다. 이미 세키가하라(ヶ原) 전쟁이 3년 전 과거였으며 이에야스는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이기는 했지만 아직 쇼우군(軍)이 되어 있지는 않았던 상태로, 이때 이에야스는 직접 오오사카로 내려가 가신의 신분으로 새해 인사를 올렸다. 그때도,
 '극히 평범한, 뭐 하나 볼 것 없는 아이군'
 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안심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둔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피부가 희멀건 하며 아래쪽이 큰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였고, 정신상태가 축 처졌는지 10살이나 되었으면서도 알현의 자리에서 위엄을 지키지 못하여 걸핏하면 유모의 무릎에 파고들려고 하여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 알현을 마지막으로, 바로 이 해의 바로 같은 달[각주:1]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軍)이 되어 명실공히 지배자의 자리에 앉았다. 거기에 이 해의 7월, 이에야스는 6살 난 손녀딸 오센(於千)을 오오사카로 내려 보내 히데요리와 결혼시켰다[각주:2]. 센히메(千)의 결혼은 굳이 이에야스가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고(故) 히데요시(秀吉)가 임종의 자리에서 남긴 유언으로, 이 유언을 지키지 않으면 히데요시의 휘하에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고 히데요시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어쩌면 동요할지도 몰라,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막 태어났을 뿐인 토쿠가와 정권의 안정과 그들 토자마다이묘우(外大名)의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 소년과 꼬마숙녀의 결혼을 진행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해의 3월.
 이에야스는 후시미(伏見)에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제 자신이 세이이타이쇼우군인 이상 오오사카로 가서 신년인사를 하는 통례대신,

 "그쪽에서 신년인사를 하러 오게"

 라는 뜻을 토요토미 가문에 넌지시 비쳤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과거가 어찌되었건 현재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자신의 주인인 히데요리에게 알려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연히 오오사카는 놀랐다. 아무리 세키가하라 이후 이쪽 토요토미 가문의 영지가 불과 70여만석이라는 일개 다이묘우정도로 봉토가 깎였을지언정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의 신하인 것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가 고 히데요시에게 '히데요리님을 보살펴 키우겠습니다'라고 맹세한 쿠마노 서약서(熊野誓紙[각주:3]
)의 서약은 아직 살아있다. 거기에 관위(官位)라는 점에서도 히데요리, 이에야스에게는 상하가 없었다. 그러한데 어째서 히데요리가 이에야스를 알현하기 위해서 후시미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주인이 가신에게 알현한 예가 일본 밖의 나라들은 몰라도 일본에는 있을 턱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요도도노(淀殿)는 가로(家老)인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향해서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그렇게는 안 된다. 토쿠가와님이야말로 이쪽으로 오시라고 하게, 그렇게 전하게, 라고 말했다.

 "말씀대로 하게"

 하고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도 달린 입마다 요도도노와 같은 뜻의 말을 했다. 카츠모토는,
 '이렇게 몰라서야'
 하고 거의 절망했다. 여성에게 가장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 정치일 것이다.

 "물론 도리로 따지면 진정 하시는 말씀대로 일 것이옵니다만"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이치는 물론 그러하옵니다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옵니다, 하고 현실을 턱이 빠질 정도로 설득하였건만 끝내 여성들은 납득하지 못하여 결국 카타기리 카츠모토가 히데요리의 대리인이라는 형식으로 사자(使者)가 되어 후시미(伏見)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신년인사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자네가 대리인으로 가는 것이라면 좋네"

 하고 요도도노(히데요시가 죽은 뒤 다이구인(大虞院)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지만)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했다. 이런 면에서도 도리 운운하며 떠벌리는 것치고는 논리의 개념이 요도도노에게 부족한 점이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체면론을 강행하려고 하는 이상 아무리 대리인이라도 히데요리의 굴욕인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의 안전을 너무도 걱정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오오사카성에서 후시미로 보내고 싶지 않은 것뿐 단지 그뿐이었다. 요도도노는 다른 수많은 모친과 마찬가지로 자기 몸의 연장으로서의 히데요리만을, 오직 그 안전 하나뿐으로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질 않는 듯했다.

 카츠모토는 후시미로 올라가 이에야스를 배알하고 신년인사를 올렸다.

 "히데요리님은 어떻게 되셨는가?"

 하고 이에야스는 배경이 알 것 같으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카츠모토도 모나지 않도록,

 "죄송합니다만 감기이옵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야스는 아무 생각 없다는 듯 끄덕이며,

 "그거 걱정되는먼. 그러나 그 감기도 내년에는 낫겠지? 내년은 쿄우(京)에서 만나고 싶구나"

 하고 말했다. 즉 내년에는 꼭 오게, 라는 뜻일 것이다. 카츠모토도,

 "내년에는 꼭"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다짐이라도 받았다는 듯이 크게 끄덕였다.

 그 내년(1605년)이 왔다. 이 해 4월, 이에야스는 자신의 적자 히데타다(秀忠)에게 세이이타이쇼우군을 계승시켜 정권을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천하는 토쿠가와 가문이 세습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히데타다는 쿄우(京)에 올라가 취임 인사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입궐하였고, 만천하의 다이묘우들은 모두 쿄우로 몰려들어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우다이진(右大臣) 토요토미노 히데요리만은 쿄우(京)에 가지 않았고, 이에야스 부자에게도 축하를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조바심이 났다. 히데요리를 자신 쪽으로 오게 함으로써 토요토미 가문도 이젠 토쿠가와 가문에 굴복했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고, 토요토미 가문에게도 이 새로운 관계를 인정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쿄우(京)에 살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식 명칭은 코게츠니고우(湖月尼公))를 움직여 그녀에게서 오오사카(大坂)로 사자(使者)를 보내게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명목상 히데요리의 공식 모친이기에 그런 점에서 가장 권위가 있을 터였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는 주둥이를 앙 다문 조개와 같이 그 권고를 묵살했다.

 다음 해인 1606년도 쌍방은 만나는 일 없었고, 그 다다음 해 2월에 히데요리는 천연두를 앓아 한때는 사망설조차 퍼졌다. 이에야스는 이 시기 에도(江)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히데요리는 죽은 건가? 히데요리는 죽지 않은 것일까?"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죽는 것이 천하를 위해서일 것이다. 살아있으면 이에야스는 곧바로 이를 죽이기 위한 싸움을 걸어 멸하여 자기 후손들에 대한 후환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의 죽음을 기도하고 싶을 정도지 않습니까?"

 하고 이에야스의 늙은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말했다. 일찍부터 마사노부는 토요토미 가문을 조기에 멸해야 한다는 주장론자로, 지난 1604년 히데요리가 감기를 이유로 상경 거부를 했을 때도 그것을 이유로 싸움을 일으키면 좋지 않습니까? 하고 이에야스를 꼬셨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세간의 반응이 두려웠다. 고 히데요시의 무덤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도 히데요리를 죽여버리면 세간의 평판은 어찌될까? 지금은 좀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 서쪽으로 보낸 다이묘우들이 토쿠가와 가문에 굴복했다고는 해도 본심은 몰랐다. 특히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에 이르러서는 히데요리에게 은밀히 안부를 묻는 사자를 보낸다고 하며, 그 중에서도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은,
 -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고 히데요리나 요도도노에게 속삭이고 있다고도 한다. '때'라는 것은 이에야스가 늙어 죽을 때를 기다리라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히데요시의 옛 은혜를 기억하는 다이묘우들을 규합하여 정권을 에도에서 오오사카로 옮기겠다 – 고 말한다는 것이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다른 다이묘우들도 이에야스를 겁내 필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나 키요마사도 이에야스에게는 은혜를 입고 있어 그를 상대로 싸움을 걸 마음도 생기지 않지만, 그러나 히데타다의 대가 된다면 더 이상 지킬 의리도 용서도 없다. 그런 것이었다......
 마사노리는 그런 것을 말하며 요도도노와 그녀의 측근들이 경거망동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정보가 이에야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 정보의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저 경솔한 후쿠시마 마사노리라면 할 듯한 말이며 다른 토자마다이묘우(
外様大名)들도 크건 작건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문제는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나이였다. 이에야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늙고 약해지는 반면 히데요리는 시간이 갈수록 성인이 되어간다.

 "이외로 히데요리님이 천연두로 돌아가시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은 오히려 카토우, 후쿠시마 패거리들이지 않겠습니까?"

 하고 마사노부는 말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자들이지만 세키가하라에서는 이에야스 측에 서(이유는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 대한 증오와 그 이상으로 자기 가문에 대한 보신 때문이었지만), 후쿠시마는 전쟁터에서 선봉이 되었으며 카토우는 큐우슈우(九州)에서 서군의 코니시(小西), 시마즈(島津)를 틀어막아 각각 토쿠가와의 천하 수립에 다대한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남들보다 배는 더 애증이 깊은 성격인 만큼 토요토미 가문의 쇠퇴에 마음을 아파하여 히데요리에게 자기 가문에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존재나마 지키고자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여기서 히데요리가 자연사라도 하면 그들의 감정은 해방되어 위험한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사노부는 그 낌새를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에게는 불행하게도 히데요리는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졌다. 이에야스는 실망했지만, 그러나 그러는 사이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정보가 귀에 들어왔다. 히데요리가 생사를 왔다갔다하는 동안 그 어느 다이묘우도 그에게 병문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를 두려워하는 다이묘우의 마음이 그렇게 강하였고, 토쿠가와 정권의 견고함과 지속성을 그렇게 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것은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외였다.

 참고로 이런 정보들은 오오사카성 안에서 보내지고 있었다. 정보제공자는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히데요리의 친위군[각주:4] 부대장 7명 중 2명(아오키 카즈시게(青木 一重), 이토우 탄고(伊藤 丹後))은 이에야스의 프락치였으며, 거기에 고 히데요시의 오토키슈우(御伽衆[각주:5])였던 오다 죠우신 뉴우도우(織田 常真 入道=노부나가(信長)의 둘째아들[각주:6])는 나이차이가 나긴 하여도 요도도노의 외사촌이었기에 오오사카성 안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히데요시 사후엔 뭐든 칸토우()를 위해서 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이에야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히데요리의 회복은 이에야스와 그의 측근에게 속으로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이제 이 젊은이를 이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는 확고한 정략과 군사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상 오오사카성의 실권자는 요도도노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라는 것을 이에야스도 혼다 마사노부도 알고 있었다. 마사노부는 여러 사람을 거치는 방식으로 칸토우의 사주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능숙히 이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에게 하나의 공포심을 심었다. 지금 당장 신사불각(神社佛閣)을 세우지 않으면 히데요리님이 죽는다 - 는 것이었다. 히데요리가 이번에 천연두를 앓은 것도 원령(怨靈)의 저주 때문이다 – 고 하였다. 고 히데요시공은 그 생애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터에 나가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원령들의 저주가 앞으로도 히데요리님을 괴롭힐 것이다. 천하에 쓰러져가는 신사불각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재건하면 악령들은 물러갈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남들에게 들은 그대로 요도도노에게 전했다. 요도도노는 전율했다.

  1. 정확히는 1603년 2월 12일. [본문으로]
  2. 센히메의 모친 오고우(小督)는 요도도노의 막내동생. 따라서 히데요리와는 외사촌지간이다. [본문으로]
  3. 쿠마노는 일본의 거대한 신사(神社)가 있던 곳으로, 여기서 발행되는 부적과 같은 서약서 뒤에 서로 약속한 것을 쓰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를 어기면 하늘의 벌을 받아 반드시 죽는다고 믿었다. [본문으로]
  4. 명칭은 나나테구미(七手組). 7개의 부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말상대. 히데요시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지식을 늘려갔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즉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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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2 1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카츠가 나중에 불문에 귀의했었군요.

    시바 료타로의 <세키가하라 전투> 정말 재밌네요. 이거 다 읽으면 9권까지 읽다 중단한 <료마가 간다>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3 17: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당시엔 굉장히 유행한 듯 합니다.
      중이 되는 것은...

      신겐이나 켄신...같이 쪼큼 특이하게 읽는 사람들은 거의 중이 되면서 바꾼 호..더군요.

      료마가 간다...는 꽤 긴가 보군요. 전 절대 못 읽을 듯...
      만화로 된 '어이~ 료마'도 꽤 길었던 것 같은데 이것도 읽으면서 굉장히 힘들었거든요...그래도 이건 정말 재미있게 본 듯.

      ps;여담으로...료우마...라는 이름이 나오면 항상 그의 부인(오료우(お龍)의 나중 일이 떠올라서 개인적으로 쪼큼 울적(??)한 기분이 듭니다.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4 0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절 이름, 호나 출가 후의 법명은 다 음독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료가 어떻게 됐나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5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료우마가 죽은 뒤, 이러저러하다 궁핍하게 되어 예전 료우마의 부하나 동료로 당시는 메이지 정부의 고관들을 찾아 가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 하나 도움 주지 않았고(이는 오료우가 료우마 생존 시 성질이 개같았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도움 줌 사람은 사이고우 타카모리(西郷 隆盛)로 20엔(...억지로 현재 한국 화폐가치로 치면 약 200~300만원 정도)을 주었다고 하네요.

      나중에 재혼하였는데 알콜의존증에 걸려서는 매일 술 마시며 취해서는 "나는 사카모토 료우마의 부인이다"라고 외쳤다고 하네요. 평소 입고 다니는 옷도 사카모토 가문의 문양이 박힌 옷을 입고 다녔고요.

      그런 것을 지켜봤어야 했을 오료우의 남편과 그런 식으로나마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오료우... 둘 다 불쌍해서요.

      여담으로...
      여러 매체에서 타카스기 신사쿠가 피를 토하면 키스하며 그 피를 닦아주던 알흠다운 사랑을 보여주던 우노'라는 여성은 섹스중독자였던 듯... 신사쿠가 죽자 그의 이름을 지키려 하는 신사쿠의 꼬봉 이토우 히로부미, 이노우에 몬타 등이 비구니로 만들어 신사쿠의 보제사에 갇아 놓고 주변에 감시인을 배치하였다고 하네요(뜬금없이 이 이야기는 왜 하냐고요? 잘난체 하고 싶었습니다. 우하하하)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7 1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덕분에 좋은거 많이 알게 됐네요.
      뭐, 잘난체 하시면 덩달아 더 많이 배우게 되니 참 좋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해주시길 바랄게요 ㅋ

      우노 라는 여자 참 불행했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3.23 1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야흐로 君臣豊樂이 나올때가 도래했군요. 뭐 저도 이 남은일가들의 생명연장은 말 그대로 '단지 생명연장일 따름'이라고 생각했고, 사실 이사람들이 어지간히 똑똑했다면 세키가하라 이후 납작 엎드렸어야 됐을텐데 결국 그것도 아니었던지라 죽음을 자초한 것이라고 밖에(..ㅡㅡ;)

    한편으로 생각하면 히데요시에대한 원령에 요도도노가 히데요리의 목숨에 불안을 느꼈다는걸 보면 씨도둑질(;;;...)은 아니라는 설에 시바선생은 무게를 두는 것도 같군요..(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3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설 상의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말하는 것 처럼 이에야스가 죽기까지 납죽 업드리고 있었다면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반반입니다.
      예전에는 히데요시 이외의 씨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임신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러다 보니 요즘은 히데요시의 씨다...라는 생각이 강해진 상태입니다.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3.29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요도도노는 뭐...조삼모사로군요;;;

.

 

 9월에 들어와서,

 "타이코우(太閤), 타계(他界)하시다"

 라는 경천동지할 소식이 성에서 새어 나와 그걸 들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퍼트려 제후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소문에 성 밑에 있던 저택마다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뛰어다니며 소식을 전하는 사자(使者)들로 온 거리가 소란스러웠지만, 정작 히데요시는 아직 혼마루[本丸]의 깊숙한 곳에 살아있었다. 진상을 말하자면 극도의 쇠약에 때마침 발작이 더해져 침상에서 두 시간 정도 기절하여 인사불성이 된 것이 죽음의 오보(誤報)가 되었다. 그 뒤 다소 기력은 회복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제 자신의 생명에 끝이 왔음을 각오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토요토미[豊臣] 정권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운영 체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기까지 히데요시 정권에는 운영 상의 조직 같은 것 없이, 히데요시 자신이 독재(獨裁)하며 그 수족으로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등의 비서관(秘書官)이 그때그때마다 명령을 행정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바꾸어 그 비서관 다섯 명을 토요토미 가[豊臣家]의 행정관(行政官)으로 삼아 '오봉행(五奉行)'[각주:1]이라 칭했다.

 그 상부조직(上部組織)으로 다섯 명의 의정(議定官)을 두었다. '오대로(五大老=고다이로우(고타이로우))라 일컬어졌다. 대로 필두(筆頭)나이다이진[大臣]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이며, 히데요리[頼] 보좌의 수상(首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수상(副首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차석(次席) 대로인 다이나곤[大納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이다. 이어서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이다. 이 다섯 명에게 히데요리를 보좌함에 있어서 최고의 발언권을 가지게 하였다. 물론 석고(石高), 관위(官位)를 보아도 그들은 여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도 특출났다. 그러나 그 능력, 성격, 신망(信望)이라는 점에서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세간 일반의 평가로 말하자면, 카게카츠는 우직(愚直)했으며, 테루모토는 너무 범용(凡庸)했고 또한 우키타 히데이에는 단순한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그 새로운 조직을 병상에서 구술(口述)하였다.

 히데요시의 말을 받고 있던 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시다 미츠나리 이하 다섯 명의 행정관들이었다. 그 중에는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도 포함되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구술을 끝마치자 감상을 말하였다. 오대로에 대한 인물평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한숨이 섞인 감상을 아사노 나가마사는 붓으로 적어 자식에게 전했고 또한 후세에 남겼다.

 

 에도님[殿=이에야스]은 의로운 분이시다. 그 의로움을 나는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의 손녀를 히데요리와 맺어주고 싶다. 의로우신 에도님께선 히데요리를 잘 보필해 줄 것이다.”

 

 이것은 관찰이라기 보다는 히데요시의 희망이 너무 깃들어 있었다. 또한 이 말이 이에야스에게 전해졌을 경우의 효과도 기대하였을 것이다.

 

 카가[加賀] 다이나곤(마에다 토시이에)[각주:2]…… 나와는 죽마지우(竹馬之友).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임명한다. 필시 히데요리를 위해서 잘 해줄 것이다.”

 

 카게카츠, 테루모토는 이 또한 의로운 사람들이다

 

 히데이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그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내가 손수 키워 온 아이다. 히데요리를 지키며 키우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일이건 만에 한 가지 경우가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대로(大老)이기는 하나 봉행(奉行)들 틈에 껴 착실히 직무에 힘써 너희들과 대로들간의 사이에서 공평히 주선(周旋)해 줄 것이다.”

 

 히데요시는 또한 오대로, 오봉행을 시작으로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도 토요토미 가문의 법도와 체제를 지켜 히데요리에 대한 봉공(奉公)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의 서약서를 쓰게 하여 거기에 혈판(血判)을 찍게 하였다. 한 번뿐만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쓰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에야스의 서약서는 히데요시가 공손히 받으며,

 

 이것만은 관에 가지고 들어가 명토(冥土)로 가져 가겠다

 

 라고 까지 말하였다. 하지만 허무했다. 그의 사후(死後), 아미다가미네[阿弥陀峰] 산봉우리에 있던 히데요시의 묘소는 이에야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물론 직후가 아니라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가 끝난 다음의 일이긴 하지만.

 

 히데요시는 죽기 한 달 전 즈음 제후들에게 자신이 쓰던 옷이나 무구(武具) 등을 나누어 주었고, 자신이 죽은 후 법률이 될 수 있게 치밀한 유언을 써 남겼으나 아직 숨은 있었다. 죽은 15988 18일 전전날, 오대로를 병실로 불러 들였다. 한번 더 히데요리에 대한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명 중 우에스기 카게카츠만은 자신의 영지(領地)로 돌아가 있어 부재중이었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이하 네 명이 얼굴을 나란히 하였다. 베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가 주어졌다.

 

 어느 얼굴이건 심각하고 비통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지만 히데이에만은 아랫입술을 악물고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히데이에 만은 병상에 있는 히데요시를 보고 그러한 정치적 얼굴 표정을 만들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이제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해져 눈을 감을 때마다 배 곪아 죽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살아있었다.

 이 모습이…… 타이코우이신가?’

 라 생각하자 히데이에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때로는 너무 격하여 중요한 히데요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눈동자만 히데이에를 향해 움직인 후 희미하게 말했다.

 

 하치로우~”

 

 라고. 모두 귀를 세웠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단다. 좀 조용히 해주지 않을래?”

 

 쇠약으로 인하여 의식이 희미해진 탓인지, 마치 어린 아이에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히데요시는 말하였다. 그 말투와 목소리가 히데이에를 한층 더 슬프게 하였다. 어렸을 때 히데요시 곁에서 다른 꼬마 시동들과 장난 등을 쳤을 때의 꾸짖었던 그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어서 말했다.

 내용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히데요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오, 부탁 드립니다, 의로우신, 의로우신 등으로 애처롭게 호소할 뿐으로, 살아 남은 측의 잘난척하는 입장에서 보면 우스운 망탄(妄誕)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과 같은 정경(情景)을 이미 8살 때, 죽은 아비의 머리맡에서 체험했던 히데이에에게 있어서는 다른 세 명과는 전혀 다른 정념(情念) 속에 있었다. 당시 자신이 지금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이며, 죽은 나오이에[直家]가 히데요시였다. 당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였던 히데요시는 온 몸에서 광망(光芒)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안심하시길…… 하치로우님에 대한 것. 반드시 뜻하시는 바대로 받들겠습니다.”

 

 라고 나오이에의 귓가에서 말하였다. 그 말대로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손아래서 성인이 되었고 이제 20대 중반을 넘었으며 영지(領地)도 나오이에 때보다 커졌다. 임종(臨終)의 약속이 지켜진 증거가 지금 여기에 있는 히데이에의 존재 그 자체인 것이었다. 히데이에는 만약 히데요시가 자기 혼자 여기에 있게 해주었다면 목소리 높여 이불 자락에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게 안심하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작법(作法)에 따라 이 자리에서는 상석자(上席者)가 응답해야만 하였다. 상석자인 이에야스가 곧바로 무릎걸음하며 응답을 하였다.

 

 부디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목소리는 차분함 함께 목 끝에서 울리며 나와, 누가 들어도 신뢰감이 있을 듯한, 거의 장중(莊重)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들은 히데요시는 혼신의 힘을 담아서 미소 짓고 턱을 당겨 희미하게 끄덕였다.

 

 다다음 날 심야. 히데요시는 죽었다.

 

***************************************************************************************************

 

 히데요시의 죽음은 그 다음날부터 후시미[伏見]의 정계(政界)를 바꾸었다.

 이에야스는 딴 사람이 되었다. 이미 세키가하라[ヶ原]를 상정(想定)하여, 그 목표에 따라 행동하였다.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만든 법의 금지사항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며 제후들의 마음을 취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으로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법을 무시하여 자기 멋대로 제후들과 인척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것이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를 자극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 혹은 마에다 토시이에를 화나게 만들게 만들어 그들이 거병(擧兵)하게 한 후 그것을 토벌함으로써 정권 교체의 매듭을 짓고자 하였다. 이 목표를 향해서 이에야스는 치밀하고 더구나 대담하게 움직였다. 그런 이에야스의 동향을 보고 나름대로 추측한 토요토미 가의 제후들 대부분은 자기들이 나서서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였다.


 이 즈음. 우키타 가[宇喜多家]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이 소동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지적했듯이 히데이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정치 능력이었을 것이다. 특히 히데이에는 가문을 다스리는데 어두웠고, 자신의 본거지에서 영지를 다스리던 중신(重臣)들과 친분이 얕았다. 이 때문에 중신들과의 정치에 관한 연락에는 나카무라 교우부[中村 刑部]라는 측근을 중용하였고 이를 총애하고 있었다.

 

 교우부는 원래 우키타 가문의 가신이 아니었다. 카가[加賀] 사람이었다.

 고우히메[姫]에 딸린 부하로써, 카가 마에다 가[前田家]에서 우키타 가문에 편입되었다. 원래 마에다 가에서 오오사카 성[大坂城]과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던 인물로 사교(社交)에 뛰어났다.

 

 지로우베에[兵衛 교우부의 통칭]는 꽤 쓸만하군

 

 하고 히데이에는 무심코 이를 어떤 일이건 시켰고 그러던 중에 정치 관련의 연락도 담당하게 하였다. 연락이라는 것은 오오사카[大坂] 비젠지마[備前島]주재(駐在)하는 필두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에 대한 심부름이었다. 그러던 중 교우부는 오사후네에게 아첨을 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츰 이 카가 사람은 히데이에와 오사후네 쌍방을 농락하게 되어 얼마 안가 히데이에, 오사후네 둘 다 이 남자가 끼지 않으면 서로의 뜻이 통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기에 나카무라의 눈치를 살피는 강대한 세력이 만들어졌다. 토요토미 가문의 이시다 미츠나리와 닮은 존재일 것이다. 히데이에는 이 교우부에게 2천석을 하사하여 가로의 말석에 앉게 하였다.

 

 벼락 출세한 놈이 우리들에게 지시를 내린다고?”

 

 라는 불만이 가문에 팽배해졌다.

 특히 이 악감정은 히데이에의 본거지에서 더 심했다. 오오사카 저택에서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라는 명령이 본거지로 온다. 본거지에 사는 가신들은 궁핍했지만 명령 받은 만큼 금과 쌀을 오오사카로 보내야만 하는 수동적인 입장이었기에 평소부터 감정이 편치 않았다.

 거기에 필두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원래부터 인망이 없어 모든 것에 강압적이었고, 정치에 있어서도 한 쪽만 편드는 일이 많았다. 오사후네에 대한 원한은 장년(長年)에 걸쳐 쌓였던 만큼 교우부가 가로에 임명되기 이전부터 본거지에서는 오사후네를 죽인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점 히데이에도 모르지는 않았다.

 

 예전 조선에 있을 때 망부(亡父) 때부터의 노신(老臣)인 오카 부젠노카미[岡 豊前守]라는 사람이 진중(陣中)에서 병이 들어 부산에서 죽었다. 그 임종 전에 히데이에는 병 문안을 가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해 준 공로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서 해 줄 말은 없는가?”

 

 하고 물었다. 부젠노카미는,

 

 보람도 없을 것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고선 입을 다물었다.

 말해도 효과가 없다는 의미였다. 히데이에가 거듭 청하자,

 

 아닙니다. 말씀 드렸다고 하여도 들어주실 턱이 없지 말입니다

 

 라고 부젠노카미는 말했다. 또 히데이에는 바랬다. 그러자 부젠노카미는 알았다며,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대악인(大惡人)이지 말입니다. 저 인간을 계속 사용하신다면 가문에 난이 일어나지 말입니다. 불길한 말입니다만 결국에는 멸문하게 될 것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오카 부젠노카미는 죽었지만 그 예언대로 히데이에는 그 말을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망부 때부터 노신이며, 히데요시에게서 하시바[羽柴][각주:3]라는 성()을 하사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를 존중하고 있던 히데이에의 성격으로는 히데요시를 무시하는 듯이 이 노인을 정무(政務)에서 추방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또한 본거지의 반() 오사후네 파()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하시바 성[羽柴姓]인 오사후네에 대해서 공공연히 적대하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죽음이 그들을 활성화시켰다.

 

 '타이코우가 죽었다. 그렇다면 이제 오사후네의 운명도 끝이다! 각각 수하들을 이끌고 카미가타[上方]로 밀고 올라가 오사후네와 일전(一戰)을 치루고 벼락 출세한 나카무라 교우부라는 놈과 함께 목을 따버리자!'

 

 라며 떠들썩하던 중에 당사자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가 갑자기 병이 나 오오사카 저택에서 죽었다. 한번 해보자며 들고 일어난 기세가 있었던 만큼 본거지의 반대파들은 실망했지만,

 

 '어떻게 하긴~ 아직 나카무라 교우부 놈이 살아있다!'

 

  며 일부는 교우부를 죽이기 위해서 이미 철포()를 준비해서는 본거지를 출발했다고 한다. 그것을 오오사카에서 전해 들은 교우부는 곧바로 야밤에 배를 타고는 후시미[伏見]로 와 히데이에의 저택으로 도망쳐 왔다. 히데이에는 저택에 있지 않았고 후시미 성에 있었다. 교우부는 저택에서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성에 입성하여 히데이에를 배알(拜謁)하고자 하였다.
  1.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마사이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2. 토시이에의 거성이 카가[加賀]에 있었기에, 토시이에의 관직과 합쳐 카가 다이나곤[加賀大納言]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3.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씨[豊臣氏] 이전에 쓰던 성(姓).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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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2.09 15: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 때마다 차라리 히데쓰구에게 확실히 승계시키는것만 못했다는 생각밖에는 안듭니다. 결과론적인 말이긴 하지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0 0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랬을 경우 나중에 히데츠구가 과연 정말로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물려주겠느냐~ 라는 것이 당시 히데요시의 생각이었을테니까요...(그리고 그럴 수 있을 만큼 인심 장악이 가능할 정도의 재능을 히데츠구가 보여주었던 것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뭐 히데요시도 마에다 토시이에가 그렇게 자기가 죽은 뒤 따라서 같이 죽을 줄은 생각도 못했을테니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2.10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가 죽지 않고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를 따라서 죽었더라면... 도요토미 정권은 평안을 지킬 수 있었을려나? 흠...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16: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혼란의 시기가 길어졌을 수는 있지만(戰쟁이 아닌 政쟁으로..) 토요토미 정권이 오래가긴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마에다 토시이에는 이에야스가 기어 들어가기 전 칸토우의 주인인 호우죠우(北&amp;#26465;)씨의 피가 흐르는 사람을 데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만약 마에다 가문이 토쿠가와 가문과 싸울 일이 있었으면 칸토우에선 선정을 펼쳐 인기가 높았다고 하는 호우죠우 가문의 후계자는 꽤나 요긴하게 쓰였을 것 같습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11 1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튼 결과론적이라지만 마에다 토시이에의 이른 죽음 덕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말년의 포석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으니.. 서약서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의 대로가 어디 토시이에 말고 있었겠나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11 2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감입니다. 토시이에가 한 번 큰소리치자 이에야스도 잠시동안 꼬리를 말았었으니까요.

.

 

 그것이 마고시치로우의 운명을 또다시 역전시켰다.

 토요토미 가문에서 이 젊은이의 운명은 전부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츠루마츠가 죽은 지 석 달째가 지날 즈음.

 이 젊은이에게 히데요시의 사자(使者)가 와서 정식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후계자 겸 히데요시의 양자(養子)로 삼는다고 전했다. 츠루마츠의 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표면적인 축하연(祝賀宴)은 삼갔지만 그래도 마고시치로우의 저택에는 은밀히 축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방문하는 다이묘우(大名)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 방문객들은 3개월 전에 뇨신(如心)()의 츠루마츠 장례식 때 그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히데요시의 눈 앞에서 뒤질세라 너도나도 앞다투어 상투를 자르던 사람들이었다.

 

 이 해의 12.

 토요토미 가문은 조정(朝廷)에 요청하여 마고시치로우는 나이다이진(大臣)에 임명되었다.

 그 날부터 불과 24일이 지난 뒤에 마고시치로우는 천하에 있어서의 위치가 확 바뀌었다.

 칸파쿠()가 된 것이다.

 히데요시가 그 직()을 물려준 것이다.

 물려주고 히데요시는 조정의 직책에서 물러나 오오사카(大坂)()에서 살며 이후에는 타이코우(太閤)’라 불리게 되었다.

 칸파쿠 히데츠구 공()이 된 마고시치로우는 새로이 쿄우()의 쥬라쿠테이() 건물과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주어졌고 쿄우()에 살면서 전하(殿下)’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하인가……’

 마고시치로우는 자신의 존귀함을 어떻게 놀라야 하는지 처음엔 놀랄 만큼의 지식도 가지지 못했지만 차츰 사람들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 칸파쿠라는 것은 조정 넘버 원의 직책이며 신하로서 이 이상의 직책은 없다.

 그러했다. 천하의 지배권은 여전히 타이코우가 쥐고 있다고는 하여도 조정에 있어서는 마고시치로우가 상급귀족(公卿)의 필두였다.

 

 더구나 그의 거처인 쥬라쿠테이()가 그에게 자신의 존귀함을 충분히 실감시켜주었다.

  3000평이라는 광대한 땅 주위를 해자(垓字)가 둘러 치고 있었으며 담과 전망대(矢倉)가 놓여져 있었다. 그 안에는 숲과 큰 연못, 수 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며 그 바깥에는 100이 넘는 다이묘우들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다.

 마고시치로우는 하나의 거대한 성과 같은 저택의 주인이 되어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았다.

 나는 이 정도의 몸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마고시치로우의 능력, 성격을 꿰뚫고 있던 히데요시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꿈에서라도 방심하지 않을까 하여 여전히 바보를 취급하듯이 마고시치로우의 생활을 법으로 얽매었다.

 법은 5개조로 편지 형식을 취했고 마고시치로우는 그것을 존수(尊守)한다는 뜻의 서약서를 쓰게 하였다.

  1조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을 잊지 말아라

  2조는 상벌을 공평히 해라

  3조는 조정을 공경해라

  4조는 부하를 소중히 해라…… 라는 것으로, 그 내용은 전부 추상적인 표현을 피하여 어린 아이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치는 듯이 구체적이며 세밀했다.

 예를 들면 제 5조의 내용은 히데요시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는데, 히데요시는 자기 정권의 후계자가 단순한 바보였으면 오히려 편했을 것이다. 성가시게도 성욕(性欲)이 강하였고 그것도 장난이 아닐 정도였다. 단지 그 점만이 히데요시와 닮았는지 한도 끝도 없는 것 같았다.

 히데요시는 이 조문에서 [나를 따라 하지 말 것]이라고 하였다. [다도(茶道), 매사냥, 여성과의 잠자리 등을 너무 심하게 하지 말 것. 이 히데요시를 절대로 따라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단지 다도는 휴식도 겸할 수 있으니 때때로 이런 자리를 마련하여 사람들을 초대해도 괜찮다. 근데 첩은 5~10명 정도 저택 안에 두어도 상관없다. 그 정도로 해라. 절대 저택 밖에서 음란한 짓은 하지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마고시치로우는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사천왕(四天王) 이하 일본에 있는 모든 신들에게 이를 어기지 않는다고 쿠마노 서약서(熊野 誓紙[각주:1])로 맹세하여 만약 어기는 일이 있으면, [이번 생에 있어서는 천하의 모든 고난을 받을 것이며 다음 생에 있어서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빠질 것]이라고, 서약서의 방식대로 글을 적었다.


 “이 서약서 맡겨두마

 

 하고 히데요시는 쿄우()에서 보내져 온 칸파쿠 히데츠구의 서약서를 비서인 키노시타 한스케(木下 半助)에게 보관시켰다.

 

 그 후 불과 1 9개월이 지나자 히데요시는 저 마고시치로우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물려준 것을 몹시 후회했다.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요도도노(淀殿)라 불리는 측실 아자이()()가 또다시 남자아이를 낳은 것이다. 히로이([각주:2])라고 이름 붙였다.

 이 아이가 태어난 소식을 마고시치로우가 처음 접했을 때, 어째서인지 아무런 불안도 느끼질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인 것도 양자인 것도 반환해야만 했을 것이다. 단순히 자신이라는 존재가 후계권을 가진 장식 인형이었던 만큼 더 이상 그 존재의 이유는 없어졌다고 생각했어야만 했다.

 칸파쿠가 되기 전이라면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마고시치로우는 변했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이 젊은이는 이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인형에서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지도 모른다.

 18살 때부터 관직, 지위가 눈깜짝할 새에 급상승했지만 현실은 종이 인형처럼 옷을 바꿔 입혀졌을 뿐으로 자신이 무엇을 했다는 기억이 없었다.

 단지 이 빼빼 마른 육체를 호흡시키며 먹고 마시고 싸고 있으면 싸움도 그걸로 끝났고 관위도 히데요시가 올려 주었다.

 마고시치로우는 하루에 두 번 똥을 싸는 버릇이 있었는데 오우슈우() 정벌에서도 머무는 곳마다 두 번씩 똥을 싸대며 츠가루()까지 갔고, 단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것 만으로도 오우슈우()는 평정되었다. 고래(古來) 이렇게 편한 원정()을 한 장군도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이외에는 모든지 금지라고 히데요시에게 구속당하고 있었다.

 나가쿠테(長久手) 패배 때의 5개조 편지가 - 그 이후 칸파쿠가 되기까지의 만 5년이라는 기간 동안 마고시치로우를 강하게 구속해 왔다. 마고시치로우의 자율에 의해서가 아닌 숙노(宿老)인 호리오(堀尾), 나카무라(中村), 미야베(宮部), 야마우치()라는 네 명의 다이묘우(大名)가 그렇게 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파쿠가 되자 그 숙노들은 오오사카로 떠나고, 그들을 대신하여 오오사카에서 키무라 히타치노스케(木村 常陸介)라는 사람이 칸파쿠 소속의 가로(家老)로 쿄우()에 왔다.

 이 측근 인사를 새로이 한 것이 마고시치로우를 해방시켰다.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는 야전(野戰), 공성(功城)의 지휘관이라기 보다는 행정관에 가까웠다.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동향(同鄕)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함께 하시바 가문이 토요토미 가문으로 변신하는 동안 계속해서 행정을 담당해 왔지만 도중 히데요시의 미움을 받아 옛 동료인 미츠나리나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만큼 출세하지 못하고 자신의 불운함을 한탄하고 있었다.

 마고시치로우가 칸파쿠가 됨과 동시에 히타치노스케는 이를 좋은 기회라 여겨 히데요시에게 간청()하여 칸파쿠 가문 소속의 가로가 되었다.

 그는 당대에서의 출세를 포기하고 다음 대()에서 가능성을 찾았다. 히데요시가 죽고 히데츠구가 다음 대의 지배자가 되면, 히타치노스케는 당연히 권세(權勢)를 누릴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자연히 히타치노스케는 마고시치로우의 개성()에 대해서 관대했다.

 취임했을 때,

 

 전하. 이제는 칸파쿠이옵니다. 원하는 대로 행하시옵소서

 

 라고 까지 말했다.

 마고시치로우는 여태까지 이렇게 매력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은가?”

 

 이 말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도 마고시치로우는 오랜 습성으로 인하여 여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히타치노스케는 믿음직스럽게,

 

 오오사카(大坂)에는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행하시옵소서

 

 라 말해 주었다.

 히타치노스케는 그렇게 마고시치로우를 기쁘게 함으로써 신뢰를 얻으려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이 재능 넘치는 인물은 마고시치로우라는 남자를, 이 시대의 인기인(人氣人)으로 만들 궁리를 하였다. 히타치노스케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마고시치로우가 학문(學問)을 좋아한다고 선전하여 학문의 보호(保護)와 격려자(激勵者)로 만든 것이다.
  1. 쿠마노는 일본의 거대한 신사(神社)가 있던 곳으로, 여기서 발행되는 부적과 같은 서약서 뒤에 서로 약속한 것을 쓰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를 어기면 하늘의 벌을 받아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 후에 히데요시가 죽기 직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오대로(五大老)와도 서로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주워온 아이’라는 뜻으로, 주워온 자식은 오래 산다는 미신 때문이다. 후에 히데요리(秀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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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7 1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야 이 친구도 슬슬 막장으로 갈 느낌이 풍기는군요..

    히데아키는 적어도 배변장애는 없지 않았나요..(쿨러럭;)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7 2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바 료우타로우 선생의 글은 사실 7: 거짓 3...이라는 말들이 있더군요. 일본 역사 학자중에 어떤 이는 강의할 때마다 듣는 말이 &quot;시바 선생의 글과는 틀리네요&quot;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들어 스트레스 받는 다는 사람도 있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8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ㄷㄷ.. 이거야 이문열 삼국지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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