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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29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7- (7)

七.

 하치죠우노미야토모히토 친왕[八宮智仁親王]이 가진 히데요시에 대한 추억은 그 정도밖에 없다. 미야[宮]는 너무 어렸다. 히데요시가 지혜를 뽐내며 기운이 넘칠 때의 미야는 꼬꼬마나 소년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력이 풍부해지기 시작할 즈음의 그 히데요시는 노쇠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하지만 미야의 정신은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크게 성장했다. 동시에 미야의 마음 속에 있는 히데요시도 그의 사후 쑥쑥 성장하기 시작한 듯 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이 시작된 것은 미야가 24살 때이다.
 -
이에야스[家康]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라는 것은 궁정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미 세키가하라[ヶ原] 이전부터 명확한 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 휘하의 일개 다이묘우[大名] 주제에 단독으로 궁정에 접근하여 금은(金銀) 등을 헌상하였다. 그 꿍꿍이는 장래에 무언가 일으켰을 경우를 상정하여 미리 궁정의 호의를 얻어두기 위함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 사이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율법을 어기며 자주 오오사카 정부[大坂公儀]의 감정을 건드렸다. 그 감정을 대표해서 일어선 것이 오봉행(五奉行)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로, 이에야스의 죄를 꾸짖고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이에야스가 바라던 바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천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동서(東西) 어느 쪽에건 속하게 되었다.

 미야의 시학(歌) 스승인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탄고[丹後] 타나베 성[城]에 머문 채 이에야스에 속했다. 유우사이는 자기 가문의 생존을 이에야스 측에 걸었다. 도박은 결과로써 성공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궁지로 몰렸다. 왜냐면 서군의 대군단이 이 타나베 성을 포위하였기 때문이다.
 
서군의 병사수는 1만 5천이었고, 농성하는 유우사이 측은 불과 5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유우사이의 아들인 타다오키[忠興]가 호소카와 가문의 주력을 이끌고 칸토우[東]에 있었기 때문에 유우사이 아래에 남아있던 병사는 그것 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만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잘 싸웠다.

 “도저히 유우사이는 이길 수 없겠지. 유우사이는 죽을 것이다”

 하고 세간의 누구나가 생각했다.
 
하지만 유우사이에게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를 경탄케 할 정도의 무용(武勇)이 있었다. 그 이상으로 이 인물에게는 지모(智謀)가 있었다. 이 사지(死地)에서 자신의 목숨을 탈출시키는 한편 세상의 비웃음 받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머리를 이 노인은 가지고 있었다.

 하치죠우노미야[八宮]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유우사이는 재작년이래 고요우제이[後陽成]와 이 미야를 위해서 옛 시집 전체[古今集全巻]에 걸쳐서 주석을 강의하여 작년에 완료하였다. 제1회는 70여 일을 필요로 했으며, 제2회는 40여 일을 필요로 했다. 그걸로 전부강의한 것이 되었는데, 남은 것은 거기에 ‘비전(秘傳)’이라 부름직한 것이었다.
 [
고금전수(古今)]
 
라고 세상에서는 일컫는 것으로, 옛 시집(古今集) 해석의 비전이며 게임에서 말하는 필살기이다. 이것은 문외불출(門外不出)로 만약 유우사이가 전사라도 한다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 소멸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유우사이의 지모가 노리는 바였다.

 “나의 죽음은 가볍다. 그러나 고금전수(古今)는 중하다. 내가 죽기 전에 그것을 하치죠우노미야에게 물려드려서 후세에 전하고 싶다”

 며 쿄우토[京都]에 있는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요청한 것이다. 그 밀사(密使)로서 유우사이의 가신(家臣)이 포위을 돌파하여 하치죠우노미야의 저택에 도착하였다.

 미야는 경악했다.
 
곧바로 입궐하여 형인 텐노우[天皇]를 배알하고서는 탄고의 전황을 알리면서 고금전수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유우사이는 황상께 전수해 드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사옵니다”

 하며 다소 왜곡하였다. 미야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전수받는다 하더라도 천하는 신경도 쓰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텐노우[天皇]가 전수를 받는다고 한다면 칙명으로 정전(停戰)을 시킬 수 있고, 칙명이라면 유우사이의 목숨도 떳떳하게 구할 수있게 된다. 유우사이는 미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야라면 그렇게 말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텐노우[天皇]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칙사를 오오사카의 히데요리[秀頼]에게 보내어 탄고 방면의 서군(西軍)에게 정전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이 칙사로서 시에 밝은 산죠우니시 다이나곤 사네에다[三西 大納言 実条], 나카노인 츄우나곤 미치카츠[中院 中納言 通勝], 카라스마루 토우노벤 미츠히로[烏丸 頭弁 光広] 등 3명이 내려갔다. 히데요리는 승낙했다. 칙명을 황송해하며 받드는 것이 토요토미 가문의 가법이었다.

 현지에 칙사로서 카라스마루 토우노벤 미츠히로가 임명되어 떠났으며,히데요리에게서는 마에다 슈젠노카미 요시카츠[前田 主膳正 義勝 – 토요토미 가문의 쿄우토 행정관[京都奉行] 마에다 겡이[前田玄以]] 아들)] 사자로 임명되었다. 이들보다 한발 앞서 미야의 개인적인 사자로서 가신 오오이시 진스케[大石 甚助]라는 자가 탄고 타나베로 급행하여 양측에,
 -
칙사가 내려오신다.
 
는 뜻을 알리고 또한 유우사이와 만나서는, 미야가 유우사이의 말과는 달리 ‘고금전수’를 자신이 아닌 텐노우[天皇]가 받는 것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렸다.

 유우사이는 복잡한 연기를 하였다.
 
칙사가 성안으로 들어서자 처음엔 그 정전권고의 칙명을 사양했다. 목숨을 아쉬워하는 것 같이 보여 무도(武道)의 길을 가는 자로서 수치스럽사옵니다 – 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는 한편 칸토우[東]의 이에야스에게도 사자를 보냈다. 이에야스에게도 이에 대한 사정을 납득시켜놓지 않으면 나중을 위해서 좋지 않았다.
 
설왕설래 끝에 겨우 개성해서는, 그 성을 마에다 슈젠노카미 요시카츠에게 맡긴다는 명목으로 성을 나왔다. 동시에 포위군도 진을 풀고 떠났다.
 
유우사이는 전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城]으로 몸을 피했고, 곧이어 싸움이 동군(東軍) 측의 승리로 끝나자 우선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이에야스를 배알했다.

 이어서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미야에게 ‘고금전수’를 전수하기 위해 하치죠우노미야 저택에 들렸다. 미야는 이 날의 의식을 위해서 일부러 저택 내에 방 하나를 따로 만들어 전수를 받는 곳으로 하였다. 전수의 내용은 특별한 것도 없었다. 옛 시집(古今集) 중 난해한 몇 개소나 구절 등에 대해 하나하나 메모지를 끼워 넣으며 구전(口傳)하는 것으로, 내용보다도 오히려 권위를 신비화시키기 위한 종교의례였다. 미야는 전해 내려오는 작법대로 유우사이에게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서약서에는 [천지신명에게 맹세컨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음. 만약 어기는일이라도 있을 때는 어떠한 신벌불벌(神罰佛罰)이건 달게 받겠음]이라고 쓰여있었다.

 이에야스의 천하가 되었다.
 
히데요시에 대한 빠심이 있었던 고요우제이[後陽成]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불과 3년 만에 찾아온 이 변화에 실망하여 텐노우[天皇]인 것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퇴위하여 뒤를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와 그의 관료들이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앞 시대의 히데요시나 토요토미 가문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궁정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퇴위는 토쿠가와 가문[川家]에 대한 비꼼과 같은 것이며 그러한 제멋대로인 행동은 용서할 수 없사옵니다. 더군다나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양위하신다는 것은 특히 적절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미야는 한때 히데요시의 유자였던 분으로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황위에 오르시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시대와는 달랐다. 히데요시가 있을때 설치되었던 ‘쿄우토 행정관[京都奉行]’은 어디까지나 궁정본위인 - 궁정의 아래에서 용무를 원활하게 하는 기관이었지만, 이에야스의 치세가 되어 설치된 ‘쿄우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는 궁정의 감시역[目付]으로, 때로는 검단관(檢斷官)과 같은 위압적인 태도로 임했다. 이 때문에 텐노우[天皇] 이하 여관(女官)에 이르기까지 일상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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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문 것입니다.
 
하고 미야는 형인 텐노우[天皇]를 위로하였다. 태양은 히데요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궁정에게 있어서 히데요시의 출현은 태양이 솟아오른 것과 같았으며, 그가 살아있을 때 궁정에는 하루 종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그늘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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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는 원래부터 토요토미 씨와는 다르옵니다.
 
라고도 미야는 말했다. 미야가 이에야스의 얼굴을 본 것은 몇 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이나 모습은 결코 시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시인이었다. 시인이 아니기에 궁정의 고상함과 아름다움, 예술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면 궁정에 대한 애정도 생길 턱이 없었다.

 그 후 십 년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는 황위를 유지하였으며 이어서 황위를 세자인 코토히토 친왕[政仁 親王]에게 물려주었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이다. 1615년 이에야스는 소위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陣]’ 을 일으켜, 히데요리를 포위해서는 불 속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어서 이에야스는 쿄우토[京都]에 사람들을 보내어 아미다가미네[阿弥陀峰] 봉우리에 있는 히데요시의 묘소(墓所)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그에게 내려진 호칭인 [호우코쿠다이묘우진[大明神]]을 박탈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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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미야는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 이에야스는 궁정도 그 활동을 궁궐 안으로 제약하기 위한 법을 만들어 속박했다. [공가법도(公家法度)]가 그것이다.

 미야는 모든 것에 실망했다. 결국 쿄우토를 멀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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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름.
 미야는 카츠라가와 강[桂川] 근처에 오이구경(瓜見)을 하러 간다. 그러다 거기에 살 장소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 별장을 만들어 거기에 살고 그러면서 일본 시의 아름다움 속에서 몰두하다 죽고자 하였다.
 
이 미야는 후세에 말하는 ‘카츠라 별궁(桂離宮)을 만들었다. 현재 있는 별궁의 모든 것을 만들지는 않았고 그는 원형만을 만들어 나머지는 늦은 결혼으로 태어난 적자(嫡子) 토모타다친왕[智忠 親王]에 의해 완성되었다.
 
미야가 만든 별장은, 미야의 표현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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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 밭의 아담한 찻집[瓜畑のかろき茶屋]
 
이었다. 아담하기는 하였어도 궁정에서 그 아름다움은 평판이 자자하였다. 미야는 이 별장의 설계에 있어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 ‘일본 시집(古今和歌集)거기에 미야가 좋아한 ‘백씨문집(白氏文集)등에서 발상(發想)하여, 그런 시들의 마음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여름 달이 오이 밭 위로 떠오르는 밤에는 이 별장에 히데요시를 되살려서 초대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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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는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치세인 1629년에 50살의 나이로 죽었다. 미야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모츠케[下野] 닛코우[日光]에 이에야스의 묘소인 토우쇼우 궁[東照宮]을 조영(造營)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후년 사람들은 토우쇼우 궁(宮)에서 볼 수 있는 토쿠가와 가문의 미의식과 쿄우토(京都) 교외에 있는 이 카츠라 별궁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 극과 극이라며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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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9.30 0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성을 내어준 것은 모양새가 어찌되었든 무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해서 그 아들은 아버지와 대면하는것도 수년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이래서야 연기를 한 것도 허사가 되었달지(웃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9.30 0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에 대해 "와카 한 수 제대로 지을 줄 모르는 놈은 죽어버려"
    라고 '문학소년 미야'는 생각했을지도...^^;
    어느덧 마지막까지 달려오셨네요
    늦어도 좋으니 마지막 편도 부탁드립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9.30 02: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후지타다.ㅋㅋㅋㅋ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30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화도 잘 보았습니다.
    미야는 히데요리도 좋아했으려나요... 특별히 교류 같은게 없어 보이는듯 하기도 하고...
    음..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부담 가지시마시고 작업하세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9.30 14: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박선생님 너무 웃겨요. 문학소년 미야 ㅋ 풍신가의 사람들 마지막은 요도도노와 히데요리 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30 15: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천하로 따지면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쿄-는 미야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갔다랄까..하는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군요.
    하긴 정치의 중심이 에도로 넘어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려나..;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30 2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리바르님//왠지 타다오키라면 능히 그랬을 것 같군요 ^^

    박선생님//'죽어버려~!!'라는 장면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허공님//섬긴 주군들이 다 멸망하는데도 끝까지 살아 남았으니 [역시]의 칭호를 붙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zardizm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땠을까요.... 히데요리에 대해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히데요시'만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상의 미야는 '시(歌)'를 우선시하다 보니, 히데요리의 시를 보아야 그에게 호불호를 느끼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본다충승님//예.... 꽤 두껍고 빽빽하게 글자가 들어서있습죠.

    다메엣찌님//좀 이야기가 새지만....'風光る'라는 신선조가 중심인 만화에서 히지카타 토시조우가 말하는 것인데...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게 한 다음에 떨어뜨려야 제대로 된 절망을 맛보지'(뭐 대충 이런 뉘앙스)...
    라는 대사가 있습죠...
    히데요시라는 인물을 만나 몇 백년 동안 잊고 있었던 양지를 맛보다, 히데요시가 죽고 이에야스라는 놈을 곧바로 만나 버로우 할 수 밖에 없었던 쿠게(公家) 측 사람들의 실망은 정말 컷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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