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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네히토친왕'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9.12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5- (4)
  2. 2008.09.05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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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는 히데요시의 유자(猶子)가 되었다.

 유자라는 것은 [또한() 아들()과 같다()]는 말에서 유래하고 있다. 양자(養子)와의 차이는 거의 없으며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구별되기도 한다. 양자인 경우는 그 양갓집에 살며 양갓집의 성()을 쓰는 것이 원칙인 듯싶지만, 유자의 경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양자인 미야[宮]는 여전히 카쥬우지 가문[修寺家]에서 살며, 텐노우[天皇]의 일족으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그 환경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달이 저물었다. 2월에 들어서자 따스한 날들이 많아져, 그 달의 중순 즈음에는 궁궐(御所)에 심어져 있는 꽃의 꽃망울이 부풀어 올랐다.

 - 올해는 꽃구경 연회(宴會)가 일찍 열릴 것이다.

 하고 궁정에서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25일이 지나 따스한 비가 내렸고, 다음 날 궁궐의 이누이고몬[乾御門] 부근에 있는 벚꽃이 별안간 60%정도 꽃피었다. 텐노우[天皇]는 놀라 예정되었던 연회를 서둘러 28일로 정하였다.

 

 당일 미야도 이 연회에 참가하였다. 연회라고는 하여도 텐노우의 말하자면 사적인 놀이이기에, 출석자도 친왕(親王)과 그 일족이나 미야몬제키[宮門跡][각주:1], 측근인 상급귀족[公卿] , 말하자면 궁궐 내의 사람들로 한해져 있었다.

 자연히 히데요시는 초대받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초대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현재 토우카이[東海]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자신의 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여러 외교적 절충에 바빴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오오사카[大坂]에 있을 터인 히데요시가 갑자기 가벼운 차림을 한 병사들을 이끌고 쿄우토[京都]궁궐에 입궐한 것이다. 다른 용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쿄우토에 온 김에 텐노우에게 문후(問候)드린다 는 것만이었다.

 어쩌다 이날 궁궐의 정원에서 벚꽃구경의 연회가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 즐거운 기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고 하여 텐노우에게 알리지 않고, 궁궐 정원의 구석에 몸을 숨기고 선 채로 꽃을 구경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퇴출하였다. 그것을 나중에 텐노우가 알게 되었고, 굉장히 흥겨워하였다. 이런 종류의 정취만큼 궁정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호우 칸파쿠[ 白]에게

 

 하고 직접 쓴 시 한 편을 무가담당(武家)의 귀족에게 맡겼다.

나무 숲에 색향이 남은 활짝 핀 꽃

떨어지면 궁궐의 봄도 지날 지어다.

木立より色香もる花ざかり

散らで雲井の春やいぬらむ

 히데요시는 그것을 받자마자 곧바로 답례의 시를 만들어 받쳤다.
안개 속에 숨어서 바라보건만

있는 것을 들킨 꽃나무 아래

忍びつつ霞みとともに眺めしも

けりなのもと

 라는 것이었다. 이 주종간에 시를 주고받은 아름다운 광경은 순식간에 궁정의 좋은 화제(話題)가 되었고, 미야도 당연히 그것을 들었다. 시를 보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황송한 일이지만 텐노우의 시보다도 히데요시의 즉흥 쪽이 몇 배나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우 칸파쿠[白]는 시에 관한 소질도 있으시군요

 

 하고 미야는 메노토[傅人]인 카쥬우지 하루토요[修寺 晴豊]에게 말했다. 하루토요는 이 즈음 곤다이나곤[大納言]으로 승진하여 무가담당(武家)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텐노우의 시를 히데요시에게 전한 것은 그였으며, 답례의 시를 가지고 온 것도 그였다.

 

 그러하옵니다

 

 하고 하루토요는 무탈하게 답했다. 하루토요도 히데요시에게 시의 소질이 있는 듯 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 멋진 답례시는 히데요시의 작품이 아니라 아무래도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첨삭(添削)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미야에게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미야는 평생 이 시를 히데요시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믿을 만큼의 근거가 후년의 미야 마음속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해, 1598 3 15일에 다이고[醍醐] 꽃구경이 개최되었을 때, 히데요시는 미야의 앞에서 미야와 노는 재미를 즉흥적으로 시로 만들었다. 시는 극히 자연스러운 가락으로, 미리 만들어 두었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미야는 자신의 생애에서 히데요시의 시를 많이 보았고, 그 중 몇 수는 수작(秀作)으로 기억하였다. 미야에게 있어서 히데요시라면, 그가 가진 재능 중에 가장 서툴렀을 터인 시가(詩歌)조차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미야가 히데요시의 유자가 된 1586년에 미야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7 24, 친부 사네히토(誠仁)친왕이 갑자기 와병(臥病)하여, 그 날 중으로 죽은 것이다. 사네히토 친왕은 텐노우인 오오기마치[正親町]의 세자였기에, 이 급사(急死)는 궁정에 있어서도 정말 큰일이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 있어,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쿄우토[京都]에 올라왔지만 임종의 시간에는 맞추지 못했다. 나중에 황위계승이라는 문제가 남았다. 당연 미야의 형인 카네히토 친왕[周仁親王]이 계승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다.

 

 이 해의 9.

 새로운 황태자인 카네히토 친왕이 성인식(元服)을 치렀다. 에보시오야[烏帽子親]의 역할은 궁정에서 가장 높은 신하인 히데요시가 맡았다. 이어서 오오기마치 텐노우가 예전부터 희망하던 대로 상황(上皇)가 되었고, 11 25일 카네히토 친왕이 황위를 물려받아 시신덴[紫宸殿]에서 즉위하였다. 이 새로운 텐노우가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이다.

 

 미야의 친형인 새 텐노우[天皇]는 아직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였다. 아직 황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미야가 황족으로서는 필두의 위치에 앉게 되었다. 이 텐노우[天皇]에게 만약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미야가 텐노우[天皇]로 즉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야는 토요토미 가문의 유자였다.

 - 그래서는 곤란하다.

 라는 감정이 상급귀족[公卿]들에게 있었다. 히데요시에게 청하여 토요토미 가문의 족보에서 지워둘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한층 더 강하게 가졌다. 자신이 외척으로 있는 그 황자가 토요토미 가문을 이어받는 것보다 텐노우[天皇]가 되어 주는 편이 훨씬 고마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토요도 말을 꺼내기 어려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새로운 텐노우[天皇]의 죽음을 바라는 듯 하여 온당치 않았다.

 

 정작 미야는 그러한 사태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카쥬우지 가문에 살며 일본문학에 정진하고 있었다. 특히 요즈음은 쿠죠우 타네미치[ 稙道]에게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강석(講釋)을 듣기 시작하고 있었다.

 양아비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다음해의 봄, 히데요시가 큐우슈우[九州] 정벌을 위해서 오오사카 성을 출발하였을 때, 미야는 수많은 상급귀족[公卿], 상급승려[門跡] 등과 함께 히데요시의 출진을 배웅하기 위하여 오오사카로 내려갔다. 히데요시가 말을 탄 채 성문을 나설 때,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칙사가 도착하였다. 사람이 달려 그것을 말 위의 히데요시에게 알렸다.

 

 그때부터가 상식을 벗어났다. 히데요시는 일순 공황(恐惶)하여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땅에 앉아 서둘러 투구를 벗고 배례(拜禮)하였다.

 도열해 있던 다이묘우[大名], 쇼우묘우[小名]들은 히데요시의 정중함에 놀라 그들도 또한 땅에 굴러 떨어져서는 엎드려 절을 하였다.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도 이 생각지 못했던 광경에 눈을 크게 떴고, 또한 넋을 빼앗겼다. 히데요시야말로 이 지상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지배자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히데요시가 낭패하여 엎드려 절을 할 수 밖에 없는 텐노우[天皇]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란 말인가?

 미야는 그 눈으로 이 광경을 보고, 미야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頼朝]카마쿠라[鎌倉]에 막부(幕府)를 연 이래, 정권(政權)은 무가(武家)로 옮겨졌다. 지금까지 무가의 우두머리(棟梁) 중에 이 히데요시만큼이나 텐노우[天皇]를 존숭(尊崇)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때의 광경을 미야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 해. 히데요시는 여름 중순까지 큐우슈우[九州]에 있었다. 미야는 이해 나카노인 미치카츠[中院 通勝]에게 신고금(新古今)[각주:2]에 대해서 강석을 받았다. 양부인 히데요시는 매우 바빴지만, 미야는 그렇게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1. 황족이 불문에 들어간 것 또는 주지로 있는 절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시집 여덟 편의 모음 하치다이슈우[八代集]의 마지막 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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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12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확실히 유우사이가 첨삭해줬다면야..(-_-;) 당대 최고의 강사가 첨삭해준 본고사 문제지 제출하는 느낌이겠군요(-_-;)

    생각해보면 히데요시또한 당대의 관습을 많이 깨어버린 사람이 아닐가 싶습니다. 저렇게 존숭하는 면도 있긴 하지만.. 우다이진까지 오른 노부나가야 그렇다 쳐도 고셋케의 전유물인 칸파쿠에 오른건 참..

    그런데 그런것 치고는 반발이 적군요. (역시 천하인의 포스라는건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16 0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화도 잘봤습니다. (NOA입니다^^;)
    히데요시가 데리고 가지는 않았군요. 어쨌든 가족이 되긴했지만 뭐랄까...
    시기가 시기인만큼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지금의 입양은 가슴으로 낳는다라는 말로 당시를 생각해보면 왠지 오묘한 느낌이네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1 2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늦어져 죄송합니다.

    다메엣찌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칸파쿠에 오른 것은 당시로써는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었을지...

    그쵸~ 천하인의 포스!!
    (뭐 자기만 칸파쿠 되었다가 다시 되돌려 준다고 해 놓고서는 토요토미 가문을 창설하여 자기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행동을 하였기에, 코노에 가문은 다른 가문들에게 속아서 빼앗겼다고 욕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말이죠)

    zardizm님//아이디가 티스토리의 주소와 같군요. ^^
    일본사에도 유사한 예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유자의 경우.... 관위승진을 빨리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고들 하더군요.
    (사족으로... 저는 입양이라고 하면, 과거 여배우 최진실씨의 초창기 작품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라는 작품이 먼저 생각이나서 왠지 슬픈 느낌이 듭니다)

  4.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9 09: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가 천황께 답장한 저 시 참 좋네요 언젠가 써먹고자 메모해둡니다

.

 

 이 날을 계기로 미야[]의 신상에 변화가 일어나려 하였다.

 그날 저녁. 미야가 있는 카쥬우지 가문[修寺家]에 우다이진[右大臣] 이마데가와(키쿠테이) 하루스에[今出川(菊亭) 晴季]가 부산을 떨며 방문해 온 것이다. 하루스에는 후지와라[藤原] 상급귀족[公卿]의 가문 중에서는 최상급의 명사(名士)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일찍부터 히데요시[秀吉]와 친교가 있었기에, 지금은 히데요시의 궁정정치를 위한 개인 고문과 같은 역할을 하며 큰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카쥬우지 가문에서는 당주인 하루토요[晴豊]가 응접했다. 미야의 외숙부이다.

 

 로쿠노미야()에 관해서요

 

 하고 하루스에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로쿠노미야라는 것은 미야의 통칭이었다[각주:1].

 

 칸파쿠[=히데요시] 전하가 바라시길, 미야를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양자로 들이고 싶어 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미야는 황족이 아닌가? 신하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혈통도 수상한 히데요시 같은 놈에게……’

 그리 생각하여 침묵을 지켰다 참고로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미야의 생모 신죠우토우몬인 하루코[新上東門院 晴子]의 친동생이며, 또한 미야의 메노토[傅人]를 겸하고 있었다. 메노토는 신하이면서 부친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 이 양자에 대한 건은 이미 텐노우[天皇]의 내락을 얻은 상태다. 단지 카쥬우지 가문의 의향을 듣게 - 라는 말씀이외다, 라고 하였다.

 

 “……”

 

 하루토요는 생각했다. 세간이 모두 아는 것처럼 히데요시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그 때문에 조카인 히데츠구[秀次]를 양자로 들인다는 소문도 하루토요는 들었었지만 그러나 히데츠구의 성격이 경솔한 것 때문에 히데요시는 주저하고 있다고도 들었다. 그것은 그걸로 좋다.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가문 내의 사정이며, 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일로 치부하고 있었다.

 

 우선 들어보시길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히데요시 공()은 이번에 칙명에 따라 토요토미 씨[豊臣]를 창설하였다. 그렇다면 토요토미 씨는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각주:2]라는 사성(四姓)과 더불어 일본 가문의 명문가가 되어 앞으로도 번영할 것이다. 그 명성을 이을만한 자는 히데요시 공에게 자식이 없는 이상 역시 존귀한 피를 가진 인물이 바람직하다. 그렇기에 로쿠노미야야말로 최적이오. 장래 천하의 권세는 이 로쿠노미야가 물려받게 되실 것이외다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하는 것이었다.

 

 어떠하시오?”

 

 잠시만!”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당황했다. 잠시…… 이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생각해 보자. 로쿠노미야는 아직 성인식을 치르기 전이며, 친왕(親王)에 임명 받은 상태는 아니지만 버젓한 황족이다. 더구나 미야는 부친인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 , 형인 이치노미야[(카네히토(周仁)][각주:3]에 이은 세번째 황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어, 상기의 두 분에게 만약의 일이라도 있을 시에는 텐노우[天皇]가 되실 분이다. 그런 분께서 씨()도 없고 혈통도 수상한 오와리[尾張] 나카무라[中村]에서 밭 메던 백성의 자식을 부친으로 받드시고, 그의 양자가 되어도 괜찮을 것일까? 그러한 예가 일본이 만들어진 이후 있었던 적이 없다. 귀족이란 피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생명인 것이다.

 

 전례(典例), 고사(故事)가 없습니다

 

 고 하루토요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하였고, 거기에 그것을 말하려고 하자,

 

 알고 있소이다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앞질러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시대이다. 전례 같은 것을 지금과 같은 시기에 말하여도 소용이 없다. 실제로 현재 토요토미 씨()라는 성()이 창립되었다. 칙명에 따라 성씨가 창립된 것은 겐페이토우키츠[源平藤橘]가 시작된 이래 천 년간 없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전부 신례(新例)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을 미래의 옛 것으로 만든다. 전례 같은 것보다 그것을 잘 생각하시길 하고 하루스에는 말했다.

 

 어떠하신지? 저는 그리 생각하오만

 

 하고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반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안 하시는 것인지?”

 

 이 남자에게는 못 당하겠군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생각했다. 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히데요시가 쿄우토(京都)를 제압한 이래, 그를 위해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관위승진은 모두 이 하루스에가 알선해 왔다는 것을 하루토요도 알고 있었다. 막대기와 같이 가는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굉장한 책사(策士)였다.

 

 그 시기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히데요시는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를 필요로 했다. 히데요시에게는 약점이 있어 그 약점이란 당연하게도 출신의 비천함이었다. 히데요시는 처음에 막부(幕府)를 열고자 하였다. 바쿠후를 열기 위해서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代軍]이 아니면 안 되었다. 하지만 겐지[源氏]가 아니면 세이이타이쇼우군에 임명 받지 못하였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朝]는 겐지의 종손이며,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도 그러했다. 이것이 궁정의 고사(故事)이며, 고사는 궁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법률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겐지가 아니었다.[각주:4]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겐지의 성()을 얻고자 하여, 아키[安芸]유우(流寓)하고 있던 전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게 청하여 그 양자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겐지의 종손인 요시아키는 혈통이 비천한 피로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아 받아들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당혹했다. 그 히데요시를 구하여 준 것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였다.

 - 쇼우군[軍]이 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칸파쿠[白]가 되시길.

 하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칸파쿠는 신하 중 최고의 직책이며, 그 자격으로 천하의 권세를 쥐면 세이이타이쇼우군이 되어 바쿠후를 열 필요가 없었다. 칸파쿠로 충분하다, 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단지 칸파쿠는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아니면 안 되었다. 그것이 천 년의 고사(故事)이며, 다른 성() – 미나모토[源]도 타이라[平]도 타치바나[橘]도 칸파쿠가 되지 못하였고, 된 예도 없었다.

 더구나 씨()도 성()도 가지지 못한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는 옛 주인 노부나가[信長]를 흉내 내어 지금까지 헤이시[氏]라고 사칭한 적은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그것에 임명 받을 자격이 없었다.

 - 아니오이다. 간단한 일이외다. 코노에 가문[近衛家]의 양자가 되시길. 그걸로 이제 자네는 후지와라 씨[藤原氏]일세.

 하고 하루스에는 말하였다. 하루스에는 후지와라 씨의 장손인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승낙을 처음부터 얻고 있었다. 그것을 말하자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여 바로 그날로 코노에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그날 중으로 하루스에를 통하여,

 -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 秀吉]

 라는 이름으로 칸파쿠에 임명 받을 수 있도록 주청하였다. 현 텐노우[天皇]인 오오기마치[正親町]는 역시 난색을 표했다.

 히데요시가 후지와라 씨가 아님이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속이 뻔히 보이는 속임수는 바람직하지 않다 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가진 현재의 실력이 조정의 뜻을 눌러 결국 주청대로 칸파쿠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 후에 후지와라 씨의 적()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성()인 토요토미 씨를 공칭했다. 상기는 작년 1585 9 13일이다. 히데요시가 귀족이 되는 단계도, 궁정이었기에 쉽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상급귀족[公卿]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내막을 물론 들어 알고 있었다. 모두 남일이라 생각하여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과 관련이 되었다. 이로운 일은 무엇이고 해로운 일은 무엇일까?

 로쿠노미야를 양자로 하고 싶다는 일건. 필시 히데요시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이 이마데가와 하루스에가 불어넣은 생각일 것이다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하루스에를 노려보았다. 이 하루스에는 히데요시를 칸파쿠로 만든 공으로 작년 종일위(從一位) 우다이진[右大臣]까지 승진해있었다.

 

 자네도 출세에 신경을 쓰시게

 

 라는 의미의 말을 이마데가와 하루스에는 말했다. 로쿠노미야가 토요토미 가문에 들어가 장래 천하의 지배자가 된다면 조정에서 당신의 출세는 뜻대로이며, 카쥬우지 가문의 명예를 크게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책모가는 말하는 것이었다.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일단 방을 벗어나, 미야[宮]의 모친인 하루코[晴子]와도 상담했다. 하루코는,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카쥬우지 가문에게 있어 바라 마지않던 일이 아니옵니까?”

 

 하고 즉좌에서 말했다. 하루토요는 그로 인해 결심을 굳히고, 의관을 정갈히 한 후 다시 객관(書院)에 입실했다.

  

 이미

 

 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주상께서 그런 의향이 있다고 하시는 이상, 메노토[傅人]로서 올릴 말씀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야[]에게 있어서도 행복한 일로 축하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고 하루토요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칸파쿠 전하는 로쿠노미야를 아시고는 계십니까?

 

 이런~ 그것은 걱정하실 필요 없소

 

 하고 하루스에는 손을 흔들었다.

 

 이미 오늘 대면이 있었소이다

 

 하고 약간 득의만만하게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이도 이 책사가 차려놓은 밥상 같았다. 오늘 히데요시는 코고쇼(小御所)황금다실을 가져왔었다. 그때 텐노우[天皇]가 코고쇼로 발길을 옮겼는데 수행한 사람 중에 하나로, 아이의 헤어스타일(童形)인 채로 로쿠노미야가 함께 했었다.

 

 칸파쿠 전하는 미야를 보시고 후에 굉장히 기쁘신 것 같았소

 

 이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일이군요

 

 하고 카쥬우지 하루토요는 끄덕였다. 히데요시의 만족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로쿠노미야의 수려한 용모는 궁정에서도 비할 데 없었다. 거기에 자질에 보통이 아니어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 등은 주제넘은 말입니다만 신동(神童)이십니다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미야는 한학(漢學)보다 일본학(和學)을 좋아하여, 이미 열살 때 옛 시집(古今集) 전부를 읽었으며, 또한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를 해석하고 비평할 정도의 영역에 달해있었다. 하루토요가 생각하기에, 히데요시가 어디서 무엇을 해서 찾더라도 이 정도로 존귀하고 이 정도로 풍부한 자질을 가진 양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1. 하치죠우노미야가 황자 중 여섯(六)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일본역사 속에서 번영했던 네 개의 씨(氏). 각각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후지와라[藤原], 타치바나[橘]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3. 다음 대의 텐노우[天皇]인 고요우제이(後陽成]. [본문으로]
  4. 겐지[源氏]만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헤이시[平氏]를 칭하던 노부나가의 경우 조정에서 칸파쿠[関白],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중 아무 거나 하나 되라는 말을 들었다.(三職推任問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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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9.05 06: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인물의 인생은 또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5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일찍일찍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울러 너무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07 1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유우사이가 빈말할 사람은 아니니... (뭐 직전신장전에서는 시류에 영합하는 인물 비슷하게 그려놨습니다마는-_-;) 상당히 실력이 있는 사람이겠군요.

    마침 후지와라씨가 나와서 생각난 말인데, 고셋케 밑의 세이가케(淸華家)의 하나인 사이온지가의 긴모치씨의 증손에 대해 어제 가쿠슈인 담당자와 얘기하다가 알게 됐다죠. 자신이 가쿠슈인 다닐때 1년 선배였다면서 이래저래 알게 된걸 얘기하던데 왠지 역사의 흔적과 간접적이나마 맞닿는 느낌이었던지라 느낌이 참..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12 0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우사이는 당시 그 계통의 짱이라고들 하니... 여담이지만 만능의 무장 우지사토도 유우사이에게 핀잔을 먹고 오히려 나중에 그 핀잔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유우사이를 한 층 더 존경하여 풍류의 세계를 배웠다고 하더군요.

    과연... 근데 학습원에 유학가시는 것입니까!? 나중에 잘 되시면 저 알죠? 데헤~ ^^

    제가 만난 역사적 인물 자손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은... 다테 마사무네의 후손...이 가장 높군요. 18대 당주를 자칭하였는데...이게 또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정식으로 인정을 못 받는 것이라 뭐라고 말할 수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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