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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14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6-

六.

 즈질적이고 너저분한 서술을 조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면 바로 그 점이 - 요도도노(淀殿)와의 이불 속에서의 일이 – 그 후의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豊臣白) 정권의 질을 바꾸어가기 때문이다. 히데요시(秀吉)는 운(運)의 신자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강렬한 합리주의와 왕성한 계산력을 동시에 가진 인물로, 운의 신자이면서 반대로 운을 믿지 않았고 만사를 마지막까지 계산하였다. 하지만 계산의 마지막 바로 전 즈음에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천운(天運)을 믿었다.
- 나는 운 좋은 사람이다.
 라는 자기신앙(自己信仰)을 히데요시는 가졌으며, 사실 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시기인 전반생은 호운(好運)에서 호운으로 이어졌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영향 받은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만큼 명쾌한 무신론자이지는 않았지만 신과 부처를 인간생활의 장식물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신앙했다. 자기자신 중에서도 자신에게 붙어있는 천운을 믿었다.

 그 밝고 긍정정인 성격과 관련이 있는지 그의 여성취향은 살집이 두껍고 생명력이 뚜렷하며 투명한 수액(水滴)을 끊임없이 흘리는 듯한 여성을 좋아했다.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네네(寧)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이만큼이나 쌕을 좋아하는 남자가 마지막까지 네네를 계속 사랑하였던 것은 네네의 외모가 히데요시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취향이라기 보다 더욱 심오한 히데요시가 가진 자기신앙에 걸맞았기 때문에 틀림이 없었다.
- 네네는 내 행운의 여신이다.
 라고 그렇게 믿고 있지 않았을까? 네네를 얻으면서부터 히데요시는 운이 트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운이 트여, 운이 히데요시의 뒤를 헐레벌떡하며 뒤쫓아 오던 시기가 이어졌다. 만약 소심한 사람이었다면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는 행운의 근원은 – 바로 네네가 아닐까?
하고 히데요시는 생각했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가진 조강지처에 대한 경애의 방식, 깊음은 동시대인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부자리에서 네네와의 관계가 끊긴 다음에도 그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단순한 애정이라기 보다 히데요시에게는 네네의 존재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네네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 하고 계속 혼자서 생각했다. 소중히 함으로써 하늘의 은혜가 이어지며 막 대하면 그 은혜가 도망간다고 까지 - 히데요시는 남몰래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었다.

 오다와라 공략전(小田原の陣) 때, 오오사카(大坂)의 네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요도에 있는 아이(淀の者)를 이곳으로 부르고 싶다"

 고 정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 편지라는 것이,

 "요도에 있는 아이를 부르려고 한다. 자네도 부디 (요도도노에게) 명령하여 떠날 준비 같은 것을 시켜주길 바라네. 자네 다음으로 요도에 있는 아이가 내 맘에 든다"

 고 써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네네가 제일이며 요도도노가 2번째라고 말을 돌려 네네에 대한 미묘한 마음씀씀이를 보여주었다. 더해서 요도도노만을 원정 중인 곳으로 부르는 것에 다소 신경이 쓰였는지 네네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이렇게 가필했다.

 "나는 이미 나이를 먹어버렸다. 올해 안에 자네에게 가 쌓인 이야기도 하고 싶다. 오오만도코로(모친)나 도련님(츠루마츠(鶴松))의 얼굴도 보고 싶다"

 - 히데요시는 천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권세를 가진 사람이 여전히 미천한 신분일 즈음부터의 처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씀씀이를 보이는 것은 애정 말고도 네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남몰래 일종의 신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요도도노를 얻으면서부터는,
 '이 여자도 그렇지 않을까?'
 라는 재수 좋음을, 아니 요도도노 그 자체가 재수를 불러들이는 듯한, 더 말하면 그녀는 운(運)의 신이 보낸 천사라고 식의, 그러한 실감 – 신앙이라고 말해도 좋다 – 을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전혀 별개의 것이 되는데 여성의 성기를 행운의 대상으로 하는 미신이 히데요시와 동시대인 센고쿠 무사들 사이에 습관화되어 있었다. 여음(女陰)의 그림이나 남녀가 교접하고 있는 그림을 화가에게 그리게 하여 그것을 대나무 통에 넣어서 어깨에 짊어지고는 그런 모습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그 공력에 의해 화살이나 총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어졌으며 생각하지 못했던 무운과 만나 – 예를 들면 이름 있는 적의 목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서양 기사의 경우에서 말하는 mascot 신앙일 것이다.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그렇게 보았다.
 요도도노를 이후에도 즉 조전침략 때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도 데려갔는데 이때 키타노만도코로를 시작으로 한 다른 측실들에 대하 변명으로,

 "그 아이(요도도노)는 오다와라에도 데려가 바라던 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전쟁터의 길례(吉例)이다. 이번에도 데려간다."

 라고 말하였다. 주위에 대한 변명이라곤 하지만 그녀를 길례로 보는 것은 히데요시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실 엄청 큰 운을 가져다 주었다. 히젠 나고야 성에서 그녀는 두 번째 임신을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뻐했다.

"이 나이가 되어 또다시!"

 하고 히데요시는 주치의인 마나세 도우산(曲直 道三)의 손을 잡고 잡은 손을 몇 번이나 흔들었다. 아비가 된 히데요시는 56살이었다.
 곧바로 요도도노를 그녀의 성으로 돌려보냈다. 1593년 8월 3일 요도도노는 요도 성(淀城)에서 히데요리(秀
)를 낳았다. 히데요시도 서둘러 치쿠젠(筑前) 본영에서 돌아왔다. 이제는 조선 침공이란 안중에 없었다.

 요도 성으로 가 오히로이(히데요리의 아명)와 만나,

 "너는 주어왔다. 주운 것이다. 내 자식이 아니다"

 고 흐물흐물하게 웃으며 얼굴을 아기의 코 앞으로 내밀었다. 주워 온 자식은 튼튼하게 자란다고 한다. 친자식이더라도 일단 버린 뒤 남에게 주워오게 하는 형식을 취한다. 주워 오는 역할에 임명된 것은 요도도노를 시종하며 요도 성에 올라와 있던 마츠우라 사누키노카미 시게마사(松浦 岐守 重政)였다.

 요도도노는 이미 산후의 쇠약에서 회복해 있었다. 이런 점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말랐나?"

 히데요시는 그날 밤 요도도노를 옆에 누이고 침상 안에서 그 몸을 쓰다듬었다. 예전 츠루마츠가 살아있을 적에 히데요시는 진중에서 자신이 키워 온 마음의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20일 즈음에는 반드시 돌아가마.
도련님(츠루마츠)를 안고 싶구나
그날 밤 너도 옆에서 재우고 싶구나. 모처럼이니 기다릴 것.

 이번에도 요도 성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저런 종류의 편지를 보내어 요도도노의 마음을 계속 자신에게 쏠리게 했다. 때문에 요도도노는 자신이 항상 히데요시와 함께 이부자리에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도 이젠 새삼 부끄러워 할 필요 없이 히데요시가 이끄는 대로 하나가 되었고 그 환락 속에 몸을 열었다.
 '이거야'
 하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요시의 감동은 무엇보다 요도도노의 여성으로서의 그 부분이었다.

 "너를 얻으면서 토요토미 가문도 변하였다"

 예전엔 네네의 거기를 신앙했다. 앞으로는 그 이상으로 거대한 행운을 이 요도도노가 가져다 줄 것이다.

 "바로 이거지"

 하고 히데요시는 그 젖은 부분의 명칭을 오와리(尾張) 사투리로 몇 번이나 외쳤다.

 "오히로이(お拾い)에게도 선물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겠군"

 히데요시는 자신이 가진 것 중 제일 비싼 것을 이 갓난아기에게 주려고 생각하였다.
 오오사카 성(
大坂城)였다.

 "그 성을 오히로이에게 주마. 내 성으로써 따로 성을 만들겠다"

 라고 말하였다. 토요토미 가문의 적자(嫡子)인 이상, 이제 막 태어났다고 하여도 천하제일인 성의 주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후들에 대한 존엄과 무위를 가지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군.
 이것이 실행에 옮겨졌을 때,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는 그 측근에게 중얼거렸다. 오오사카 성을 오히로이에게 물려주고 히데요시는 새로이 자신의 거성(居城)으로써 후시미 성(伏見)를 만든다는 뜻 – 을 행정관(奉行)을 통해서 제후들에게 발표한 것이었다. 그 후시미 성 조영에 관해서는 오오사카 성을 기점으로 동 일본의 제후들에게 명해졌다.

 "이 또한 돈과 쌀의 낭비지"

 라는 목소리가 그런 제후들 사이에서 소곤거려졌다. 참고로 그 동 일본의 제후들은 바다를 건너가지 않았다. 조선으로 출정을 명령 받은 것은 서 일본의 제후들이었기에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평등하게 돈을 쓰게 하기 위해서 동일본 제후들에게 공사의 분담을 명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피폐함을 알고 있던 제후들에게 있어서는 민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 쓸데없이……
 라고 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생각을 이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천성이 자그마한 땅 주인과 같이 검소한 이에야스는 자신의 새로운 영지(領地)인 칸토우(
) 경영을 위해 에도(江戸)에 새로이 수도를 세웠지만, 성곽은 극히 소박하여 성은 이시가키(石垣)도 세우지 않았고 해자를 팔 때 푼 흙으로 담을 쌓았으며, 성과 건물의 현관 같은 것도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 때부터의 초가지붕을 사용하였으며, 마루도 배의 밑바닥 나무를 이용한 조악한 것이었다. 자신은 그렇게까지 아끼고 있는데 히데요시의 없어도 괜찮은 별장 같은 성곽을 위해서 막대한 돈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갓 태어난 핏덩이에게 성 같은 게 필요하냔 말이다.
 이에야스에게는 히데요시의 광기의 징조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미친 사람 아닌가? 이에야스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자신의 측근에게,

 "오오사카 성은 오히로이의 장난감이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오사카 성은 서양 신부들이 말하길 콘스탄티노플보다 동쪽으로는 최고로 큰 성이라고 한다. 갓난아기의 장난감으로 그런 것을 주고 자신은 후시미에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이 피폐한 것을 모른다. 미쳤나? 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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