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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호우죠우씨'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04.11.27 호우죠우 우지야스 1
  2. 2004.11.26 호우죠우 소우운 2
  3. 2004.11.16 아시나 모리우지 3

호조 우지야스(北条 氏康)

1571 10 3 병사(病死) 57

1515 ~ 1571.

후 호우죠우(後北条) 3대 당주(当主). 우지츠나(氏綱)에게 가독(家督)을 상속 받은 후 오다와라(小田原)성을 본거지로 삼아 사토미 씨(里見氏)나 이마가와 씨(今川氏)와 다투며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카와고에(河越)전투에서 쓰러뜨렸다. 또한 타케다 씨(武田氏), 이마가와 씨와 삼국동맹을 맺고, 네가와(利根川) 강 이남의 칸토우(関東)를 영국화(領国化)했다.











소우에츠(相越[각주:1])동맹에 숨겨진 계산


 1568 11월 말.

 카이(甲斐)국의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갑자기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영국(領国)스루가(駿河)로 침공을 개시했다. 은밀히 미카와(三河)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동맹을 맺었던 신겐의 움직임이었다. 코우소우순(甲相駿[각주:2]) 삼국동맹을 맺고 있던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우지마사(氏政) 부자는 이런 갑작스런 동맹파기에 놀랐고 신겐의 배신에 분노하여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지원할 것을 표명하곤 곧바로 스루가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신겐의 행동에는 우지마사의 부인 오우바이인(黃梅院) 1566 6월에 죽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오우바이인은 신겐의 딸로 코우소우순(甲相駿) 삼국동맹 체결의 결과로 오다와라(小田原)성으로 시집왔었다.

코우소우순 삼국동맹이 붕괴되자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동맹을 맺고 신겐의 스루가 침공을 저지하는 방침을 세웠다. 소우운(早雲) 이래 칸토우(関東) 평정을 진행시켜 온 호우죠우 씨(北条氏)와 이에 대항하는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씨(上杉氏)의 종가 격인 켄신(謙信)과는 그야말로 앙숙이었다. 이런 앙숙과의 동맹에 대해서 우지야스는 어떠한 정치적 계산을 가지고 임했을까?


 우에스기 켄신은 이미 1561 4월 오다와라성을 공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카마쿠라(鎌倉)의 츠루오카 하치만 궁(鶴岡 八幡宮)의 신사에서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의 직책을 물려 받았으며 무로마치(室町)바쿠후(幕府)도 이를 공인 하고 있었다.

 한 쪽인 호우죠우 우지야스도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각주:3])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와 인척관계로 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우지(足利 義氏)는 완전히 우지야스의 지배 아래 있었다.


 켄신도 장년에 걸친 신겐과의 항쟁에 결착을 지을 기회가 왔다며 이 소우에츠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부(祖父)때 부터의 숙적인 호우죠우씨와의 정치적 관계를 어떻게 유리하게 전개시켜 갈 것인가를 충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호우죠우 씨에게 공격받고 있던 북 칸토우(北関東)의 호족들은 1561년 가을에 칸토우(関東)에서 에치고로 귀국해 버린 켄신에게 실망하여 대부분의 호족들은 켄신의 칸토우 통치가 좌절되었다고 보고 있었다. 우지야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력 호족들을 지배하에 거두어 칸토우 북진 정책을 추진했다. 하극상(下剋上)이 활발한 칸토우 지방이긴 하였지만 아직까지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나 코가쿠보우(古河公方)의 권위는 인정받고 있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지야스는 생각했다. 켄신은 독신이기에 친아들이 없다. 그 켄신에게 양자를 보내면 언젠가 켄신이 죽은 뒤에 그 양자가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를 이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아들인 우지마사(氏政)의 대()가 되었을 때는 코가쿠보우(古河公方)와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의 두개의 커다란 전통적 권위가 호우죠우씨의 수중에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지야스의 최후


 예상대로 소우에츠(相越)동맹을 쌍방의 계산이 얽혀 체결이 늦춰지고 있었다.

 켄신에게 보낼 양자의 인선에서도 우지야스와 아들인 우지마사 사이에서 엇갈리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우지야스의 숙부 호우죠우 소우테츠(宗哲 = 겐안(幻庵))의 셋째아들인 사부로우(三郞) 후에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 景虎)가 되었다.


 소우에츠 동맹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한 후 우지야스가 병중(病中)에 있던 1569년 가을 체결되었다. 우지야스는 이 때 이미 많이 병들어 있어 다음해인 1570년 여름에는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 해의 8월에 켄신의 사자로서 오다와라성에 와 있던 오오이시 요시츠나(大石 芳綱)는 본국의 야마요시 모리요시(山吉 盛吉)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지야스는 자식들의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가 되어 타케다 신겐이 오다와라로 공격해 오는 것도 모를 정도이다](上杉文書)고 전하고 있다.

 확실히 우지야스의 싸인이 들어간 편지는 같은 해인 1570년 6월 29 호우죠우 우지쿠니(北条 氏邦)에게 보낸 것 이후에는 확인할 수 없게 되어 병 상태가 상당히 진행되었다고 생각되어 진다. 중병(重病)으로 자신의 싸인을 쓸 힘도 없었을 것이다.


 1571년 4월 15 켄신에게 보낸 우지야스의 편지(上杉文書)에는 싸인 대신 그 위치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도장이 찍혀 있어 병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고 생각된다.


 1571년 10월 3.

 우지야스는 오다와라성에서 죽었다. 향년은 57세였다.

[大聖寺殿東陽宗岱公大居士]라고 법명을 받고 하코네(箱根) 소우운(早雲)()에 안장되었다다고 하지만 이바라키(茨城)() 코가(古河)시의 절이라는 설도 있어 묘소(墓所)는 확실하지 않다. 바로 그날로 난죠우 시로우사에몬(南条 四郞左衛門)이 코우야(高野)산의 코우시츠인(高室院)에게 우지야스 죽음의 보고가 전해져 극락왕생을 비는 법회를 빌어 달라는 의뢰가 왔다. 유언장은 발견 되지 않았으나 소우에츠(相越)동맹을 관두고 역시 신겐과의 소우코우(相甲)동맹을 부활시키도록 우지마사에게 유언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 사가미(相模)와 에치고(越後)의 머릿 글자를 따서. [본문으로]
  2. 카이(甲斐), 사가미(相模), 스루가(駿河)의 머릿글자를 따서. 각각 타케다 가문, 호우죠우 가문, 이마가와 가문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칸토우 쿠보우(코가 쿠보우)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칸토우를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곳의 책임자를 높이는 말. 코가(古河)는 당시 쿠보우가 있던 지역(처음엔 카마쿠라에 있었으나 혼란을 거듭하는 시기에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칸토우칸레이는 이 쿠보우를 보좌하는수상 격. [본문으로]

호우죠우 소우운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26. 04:14 Posted by 발해지랑

호조 소운[北条 早雲]

1519 8 15 병사(病死) 64.

1456 ~ 1519.

처음은 이세 신쿠로우[伊勢 新九郞]라는 이름을 칭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외척(外戚)이 되어, 스루가[駿河] 코우코쿠지 성[興国寺城]의 성주가 되었다. 이즈[伊豆]를 장악한 후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 藤頼]에게서 사가미[相模]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탈취하여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 발전의 기초를 쌓았다.








[祿寿応穏]의 도장


 1518년 10월 8자로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에서 이즈 국[伊豆国] 키쇼우[木負]에 있는 오오카와 가문[大川家]에 한 통의 문서를 가진 사자(使者)가 도착했다. 편지를 본 오오카와 가문의 당주(当主)는 처음 보는 모양을 신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편지의 날짜가 써 있는 행에는 가로, 세로 7센티 정도의 크기의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빨간 인주로 찍혀 있는 글자는 [祿寿応穏 녹수응은]이라 쓰여 있었는데, '인민이여, 모두 함께 평온히 살자'라는 뜻이라 여겨진다. 이 글자의 상부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 조각되어 있어 '호랑이 주인장(朱印狀)'이라 불리고 있다. 현재 '호랑이 주인장'은 약 천 통 이상 발견되어 역사연구자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호랑이 주인장]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것이 바로 이 오오카와 씨에게 보낸 것이다.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 즉 이세 모리토키[伊勢 盛氏] 후에 입도(入道[각주:1])하여 소우운안소우즈이[早雲庵宗瑞] 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들인 우지츠나[氏綱]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주면서 함께 물려 준 것이 '호랑이 주인(朱印)'이었다. 이후 호우죠우 씨[北条氏] 4대에 걸친 가인(家印 가문의 도장)으로 1590 7월까지 사용되었던 것이다.


 호우죠우 소우운은 빗츄우[備中] 타카코시 성[高越城]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때 쿄우[京]에 가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서 일하였고,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 義澄]의 명령으로 이즈[伊豆]를 침공하였다. 이즈 평정에는 5년간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5년째인 1498년 8월 25 토우카이오키[東海沖]를 진원지로 하는 토우카이오키 대지진이 발생하여 이 때의 대해일로 인해 이즈 반도 서해안의 어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계속되는 전란과 거대 지진, 대해일의 습격으로 이즈의 사람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즈의 주민들은 지배자의 통치력이 부족하기에 이러한 재해를 불러왔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지배자를 강력히 원했을 것이다.


연공(年貢)을 내린 영주(新領主)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소우운은 1498 9월에 아시카가 챠챠마루[足利 茶丸]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이즈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소우운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우선 해일로 인한 어촌의 병자들의 치료를 지원하고, 옛 지배자가 부과했던 연공을 낮추어 사공육민(四公六民[각주:2])으로 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신영주에게 감사하고 기뻐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앞에서 언급한 1518 10 8일자의 [호랑이 주인장]에는 향촌에 부과했던 대나무나 목재, 어패류의 납입에는 반드시 이 [호랑이 주인]을 찍은 문서로 명령하며, 호우죠우 씨 이외에는 멋대로 물품을 부과시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만약 이 규칙을 어겨 불법을 행하는 무장이 있으면, 주민의 대표자가 그 무장의 이름을 적은 문서를 가지고 오다와라 성[小田原]의 관청에 직소(直訴)해도 좋다고 하였다. 소우운은 주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서 직소를 인정한 것이다.


 소우운은 쿄우토[京都]에 있을 때 다이토쿠 사[大德寺]에 들어가 수행할 정도로 불교를 신앙했으며 신불(神仏)을 숭배하였다. 거성(居城)인 니라야마 성[韮山城]에노시마벤텐[江ノ島弁財天][각주:3]을 모시고 신앙하였다. 소우운이 자손에게 남긴 문서의 첫번째가 신불을 경애하라고 할 정도로 소우운의 깊은 신앙심은 오늘날에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소우운의 사망연령


 소우운은 64세가 되자 이제는 죽음이 가까워 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1519년 4월 28에는
사남인 키쿠슈우마루[菊寿丸][각주:4]에게 자기의 소령분(所領分) 4465관이라는 광대한 향촌(鄕村)을 물려주고 하코네곤겐 사[箱根權現社]의 사령(社領)도 확정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미우라[三浦] 반도의 끄트머리인 미사키[三崎]를 유람하던 중 소우운은 감기에 걸려(塔寺八幡宮長帳), 8 15일 니라야마성에서 죽었다. 향년은 88세라고 유포되고 있다.


 유포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만들어진 군기물(軍記物)에 쓰여져 있는 것으로 그것이 통설이 되어 유포되었다는 의미이다. 최근의 연구성과로는 이 88세 사망설은 소우운의 부친이라 전해지고 있던 이세 사다후지[伊勢 貞藤] 실은 소우운의 외할아버지인 이세 사다쿠니[伊勢 貞囯]의 차남. 즉 외삼촌- 가 태어난 1432년을 소우운이 태어난 년도와 헷갈린 것으로 실제로 소우운이 태어난 해는 1456년으로 64세에 죽은 것으로 수정되고 있다.(小田原市史)


 소우운의 유체는 슈우센 사[修禅寺]에서 화장되어 하코네[箱根]의 소우운 사[早雲寺]에 안장되었다.
 
법명(法名) [早雲寺殿天岳宗瑞]가 되었다.


 1519 9 15일.

 소우운이 죽은 후 1개월째에 이세(후에 호우죠우[北条]) 우지츠나[氏綱] 자택에 많은 손님을 초대하여 제사를 지냈다. 여기에 출석한 호우린칸도우[芳琳乾幢]는 제문을 통해서,
 '
소우운은 천하의 영웅으로 좋은 부인을 만나 자손도 많으며 조부의 유업(遺業)을 이었고 덕은 만고(萬古)에 빛나평화속에 칸토우를 정복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 불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전체 수확량의 40%를 세금으로, 60%를 농민이 소유함. 당시 대부분 육공사민이었으며, 좋아야 오공오민이었다고 함. [본문으로]
  3. 칠복신 중 하나, 음악과 지혜, 변설, 복덕의 신. [본문으로]
  4. 후에 호우죠우 겐안(北条 幻庵) [본문으로]

아시나 모리우지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16. 09:33 Posted by 발해지랑

아시나 모리우지(盧名 盛氏)

1580 6 17 병사(病死) 60.

(그림은 KOEI의 천하창세)


1521 ~ 1580년.

므츠(陸奧)() 아이즈(会津) 쿠로카와(黒川)성주. 아시나(盧名) 16대 당주(当主).

다테(伊達), 유우키(結城)씨와 혼인관계를 맺고 주변의 호족과 무장을 복속시켜 아시나씨 전성기를 이끌었다. 한 번 은퇴하였지만 후계자인 적자 모리오키(盛興)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복귀. 18대의 모리타카(盛隆)를 후견했다.


카마쿠라(鎌倉)시대 부터의 명가



 아시나(盧名)씨는 카마쿠라 막부에게 아이즈(会津) 슈고(守護)에 임명 받은 칸토우(関東) 미우라 씨(三浦氏)의 후손이다. 그 사이에 남북조 동란 이후 하극상(下剋上)의 시대를 거쳐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온 일찍부터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이기도 하다. 특히 칸토우(関東), 토우호쿠(東北)는 카마쿠라 막부 붕괴의 영향을 받아 센고쿠(戦囯)의 모습을 띠는 것이 빨랐다. 그러한 곳에서 200여 년을 살아 남은 것이다.


 선조 이래 쿠로카와(黒川)를 거점으로 하여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는데 모리타카(盛高), 모리시게(盛滋)의 부자간의 싸움이 일어나 한 때 내란상태에 빠졌으나 모리시게의 동새 모리키요(盛舜) 1521년 가독을 이은 후부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짧은 시간의 평화가 모리키요의 아들 모리우지(盛氏)의 커다란 비약을 가능하게 했을 지도 모르겠다.


모리우지 역사의 무대에 등장


 모리우지 자신이 영토 확장의 욕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알 수가 없지만 아이즈(会津)슈고(守護)라는 직책에 앉아 있는 이상 주변 영토 다툼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다. 슈고로써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권익이라는 것이 있다. 1543(천문 11) 원래는 가신의 위치에 있던 야마노우치 키요미치(山內 舜通)에치고(越後)의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와 손잡고 아시나의 군세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이 당시 충분히 힘을 기르고 있던 모리우지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이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에치고가 배후에 있다는 것이 아이즈의 아시나씨에 있어서는 바다로 통하는 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모리우지는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의 행동을 취해 역대 아시나씨의 지배 영역을 훨씬 넘어서 영토를 넓히고, 외척인 시라카와(白川) 유우키(結城), 스카가와(須賀川)의 니카이도우(二階堂), 니혼마츠(二本松)의 하타케야마(畠山), 타무라군(田村郡)의 타무라(田村)씨까지도 신종 시켰다고 한다. 이 시기의 지배영역은 아시나씨의 긴 역사 속에서도 최대의 규모에 달했다고 한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죽은 후, 에치고의 [오타테(御館)의 난[각주:1]]의 틈을 타서, 오가와(小川)의 오다기리(小田切)씨 영토 주변을 탈취, 영토를 확대하였다. 이렇게 지배영역의 확대에 성공한 모리우지는 북쪽으로는 다테(伊達)씨와, 남쪽으로는 사타케(佐竹)씨와의 접촉이 늘어만 갔다. 특히 사타케씨와의 관계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간다.


생각처럼 되어가지 않는 말년.


 1568년 즈음 모리우지는 [止止斎=시시사이]라는 호를 칭한다. 쿠로카와성을 세자인 모리오키(盛興)에게 물려주고 새로이 은거할 성으로 만든 오오누마 군(大沼)에 있는 이와사키(岩﨑)성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리오키는 병에 자주 걸리는 몸인 듯, 그 후에도 모리우지는 이와사키성에 있으면서 모리오키의 정무(政務)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1574년. 결국 모리오키는 부친보다 먼저 병에 쓰러진다. 향년 26세라 추정된다.


 모리우지는 서둘러 모리오키의 부인(다테 하루무네(伊達 晴宗)의 딸)을 양녀로 삼아, 니카이도우(二階堂)씨의 모리타카(盛隆)를 사위로써 받아 들이기로 한다. 모리타카는 니카이도우씨의 인질로써 모리우지가 어렸을 때부터 교육시켜 온 인물로써 우선 안심할 수 있기는 했지만 모리우지는 이와사키 성을 나와 쿠로카와 성으로 돌아와 어린 모리타카의 정무(政務)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과 동시에 정무의 방침도 그 때까지와는 약간 바뀌었다. 그 때까지는 니카이도우씨와 시라카와(白川)의 유우키(結城)씨와 협력해서 북상하는 사타케씨와 대결하는 자세를 견지해 왔지만 1577년 즈음부터는 양 씨를 설득해서 사타케씨와의 협조노선을 펴게 된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사후에 최대의 적이 없어진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関東) 통일을 목표로 활발한 군사 행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

 또 하나는 같은 해 겐푸쿠(元服[각주:2])를 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차츰 오슈우(奧州) 남반부 제패의 야망을 나타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테-타무라(田村) 연합군의 위협에 대해서는 아시나, 사타케를 중심으로 한 니카이도우, 유우키, 이시카와(石川), 이와키(岩城)의 결속을 급속히 모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배치를 끝낸 1580년 6월 17일. 아시나 모리우지는 쿠로카와 성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향년은 60세라 전해진다.


 물론 모리우지의 뒤를 이은 모리타카는 모리우지의 정책을 계승했다고 한다. 모리우지의 치세기(治世期)에 아시나씨의 지배영역이 최대가 되었고 지배체제도 또한 굳건해 진 것은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止止斎]라는 인감을 사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우에스기 켄신 후계자 싸움. 두 양자인 친족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와 호우죠우(北条)씨에서 온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 景虎) 사이의 내란. [본문으로]
  2. 무장이 성인식을 치루는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