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 다카토라[藤堂 ]

1630 10 5 병사 75

1556 ~ 1630.

가난한 무사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처음으로 전쟁터에 발을 디딘 것이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오다[織田], 토요토미[豊臣], 토쿠가와[德川] 씨를 섬기며 활약. 또한 축성의 명인으로 각지에 성을 쌓았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와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의 결혼을 성공시켜 공무일화(公武一和[각주:1])를 실현하였다.










센고쿠[戦国] 시대에서 수완 좋게 살아남기


 토우도우 타카토라는 말년의 대부분을 에도[江戶]에서 생활하였다.

 에도 성[江戸城] 개수(改修)와 마을 정비에 분주한 한편 우에노[上野]나 칸다[神田]등에 번저(藩邸[각주:2]), 별저(別邸)를 두고 쇼우쥬[松寿]부인(2대 번주 다카츠구[高次]의 모친)을 살게 하여 인질, 참근 교대의 선례를 만들었다.

 에도성에 자주 등성하여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 3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미츠[德川 家光]를 보좌하여 '천하태평(天下泰平)' '공무일화(公武一和)'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우미(近江)에서 태어난 그는 건장한 몸과 드센 힘을 타고났으며, 15살에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아시가루[軽]가 되어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 이후 아츠지 요시히데[阿閉 義秀],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오다 노부스미[織田 信澄[각주:3]] 등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 히데요시[秀吉]의 동생]을 섬겼으며 여러 고난을 겪은 후에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후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다.

 토자마 다이묘우[ 大名[각주:4]]이면서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 이세[伊勢], 이가[伊賀] 3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 인물에게 말년이라던가 "정년"에 평온은 없었다.


 1608년.

 53살 때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서 이세 츠[]로의 이봉(移封)은 영전(榮轉)이었으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있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공략하기 위한 포석과 이가 닌쟈[忍者]의 공급원이가[伊賀]의 지배라는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막부(幕府)의 부탁과도 같은 임무에 응하여 이가 우에노[上野], 아노우즈[安濃津]에 성을 쌓았다.


 7년 후인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에서는 60세의 나이로 6천의 군세를 이끌고 토쿠가와 측의 선봉을 맡았다. 다음해 여름의 전투에서도 4천의 군세를 이끌고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의 부대와 사투하였다.


 1619년.

 64살 때 오오사카 성 재건의 명령을 받아 완수하였고 또 그 즈음에 여러 축성 공사에 착출되어 불만이 쌓인 토요토미 은고[豊臣 恩顧[각주:5]] 다이묘우[大名]의 반란에 대비한 셋츠[津] 타카츠키[高槻], 탄바[丹波] 사사야마[篠山]의 축성을 지휘하였다.


 다음해인 65. 노령에 굴하지 않고 90여일 간 머물면서 거대한 바위를 키츠가와 강[木津川[각주:6]] 야마시로[山城] 카모[加茂]의 죠우넨 사[常念寺] 운반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


 이 즈음부터 눈병을 앓아 에도로 돌아오자 실명 직전. 그러나 공무일화(公武一和)를 위해서 상경하여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딸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를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의 부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막부(幕府)의 출장소라고 할 수 있는 니죠우 성[二条城]의 정비에 조력했다.


 텐노우에게는 이미 '오세츠노 츠보네[於世津局]'와의 사이에 황자인 카모미야[加茂宮]와 황녀 우메미야[梅宮]를 둔 상태였기에 텐노우와 쿠교우[公卿[각주:7]]들이 반발. 그에 따라 쇼우군의 면목도 손상되어 막부 각료들도 격한 반대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타카토라는 히데타다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복. 물심양면의 노력을 하여 결국목적을 달성했다.


 1627년.

 72살 때. '생애 최대의 스승이며 은인'이라는 이에야스를 위해서 이에야스의 묘를 만들었다.

 다음해에는 코우즈케[上野]에 있는 칸에이 사[寬永寺]에 칸쇼우 원[寒松院]을 건립하였고, 쿄우토[京都]의 난젠 사[南禪寺]에는 일본 최대의 산문(山門[각주:8])을 만들어 헌납하여 오오사카 공성전에서 전사한 가신의 넋을 기렸다.


 1630 10 5.

 에도 야나하라[柳原]의 별저(邸)에서 잠이 드는 듯 편안히 죽었다.

 마지막 말은 "천하를...[津] 부탁한다"고 했다고도 하며, 몽롱한 듯한 모습으로 타카토라를 위해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위해서 전쟁터에서 죽은 수많은 가신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웠다고도 한다.

 향년 75. 경애하던 이에야스의 죽음보다 14년 더 살았으면서도 이에야스와 같은 75세의 죽음이었다.


 토우도우가의 기록에 의하면,

 "몸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가 있었다. 총에 의한 상처, 창에 의한 상처 등 모두 전투에서 얻은 것으로 왼손의 약지는 뭉개져 손톱이 없었고 오른손 중지도 1촌 정도 짧았으며 오른발의 발톱은 전부 빠지고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는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텐카이[天海] 그 빛나는 생애(生涯)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이라 찬양했다.

  1. 조정과 바쿠후(幕府)를 인척관계로 맺어지게 하여 사이 좋게 함 [본문으로]
  2. 에도나 쿄우토[京都]등에 세운 각 번(藩)의 대사관 같은 것. 에도의 경우 참근 교대(参勤 交代)로 올라온 다이묘우[大名]가 머물렀다 [본문으로]
  3. 보통 '츠다 노부스미[津田 信澄]'라 불린다.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 - '노부유키'로 많이 알려져 있다]의 아들로 노부나가에게는 친조카. '츠다[津田]'는 오다 가문[織田家] 가문의 별성으로 방계의 친족들은 이 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를 치른 후에 이에야스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다이묘우. [본문으로]
  5.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은 다이묘우를 지칭 [본문으로]
  6. 오오사카 부근에 있다 [본문으로]
  7. 상급 귀족들. 보통 종삼위(従三位) 이상을 말한다. [본문으로]
  8. 사원의 정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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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1607 4 8 병사 34

1574 ~ 1607.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차남으로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형. 아명은 오기마루[於義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어, 큐우슈우[九州] 정벌에서 처음 전장에 출진했다. 후에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의 양자가 되어 시모우사[下総] 유우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에치젠[越前]을 하사 받았다.









쇼우군[将軍]이상의 성망(聲望)


 유우키 히데야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이지만 출생할 때부터 기묘한 소문이 따라다니고 있어서[각주:1] 어릴 적에는 부친에게도 푸대접을 받았다.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내졌고, 그  히데요시도 또한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 양자로 보냈다.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쪽으로 복귀하여 세키가하라에서는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진을 치고서 북방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방비한 것이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쇼우군의 자리는 이모제(異母弟)인 히데타다가 물려받았지만 에치젠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영주(領主)로서 68만석을 받은 것 외에도 와카사[若狹]시나노[信濃]월경지까지 합치면 카몬(家門[각주:2]), 후다이(譜代[각주:3])중에서는 대인 75만석의 신분으로 출세했다. 카가[加賀] 100만 석인 마에다 가문[前田]에 대한 방벽이라는 중대한 역할이 맡겨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부친 이에야스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 쇼우군 히데타다가 확실히 그를 제어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을 가질 수 없었던 듯하다. 히데타다도 형인 히데야스에게는 조심 또 조심을 하여 후시미[伏見]에 있던 히데야스가 처음으로 에도[江戶]에 왔을 때는 매사냥을 핑계로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을 나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에도성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짧은 장년(壯年)시대


 이렇듯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의 히데야스였지만 불행하게도 34세라는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다.

 에치젠의 국주(国主)가 된 1600 12 그는 아직 29세였다. 그 때부터 죽을 때까지는 6년여.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때가 이미 말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실제로 에치젠에 입국했던 것은 1601 5월인데 최초로 한 일은 영지를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중신들에게 기분 좋게 나누어 줌으로 인해 자신의 직할령이 부족하여 부족한 분은 사도[佐渡]에서 에도로 보내지는 금이나 물자에 통행료를 메겨 징수해서 메웠다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전투는 잘해도 경제관념은 부족했던 모양이다.[각주:4]


 양부(養父)인 유우키 하루토모와 그의 식솔들을 시모우사의 유우키에서 키타노쇼우로 불러들였으며, 유우키 가문[結城)]의 사원(寺院) 등을 이전하거나 키타노쇼우 성의 개축, 정비, 새로운 혼마루[本丸[각주:5]]의 건축도 당초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한 공사들에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은 여러 제후들이 협력했다고는 해도 히데야스의 고생도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에 무사들이 모여 사는 곳[각주:6]이나, 상인들의 마을[각주:7]을 조성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126개의 마을, 인구 2 5천여의 성 밑 마을(城下町)이다. 새로운 농업, 산업 정책의 책정이나 친번(親藩[각주:8])으로서 막부를 도우는 것 등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악질적인 병에 목숨을 빼앗기다


 1606년.

 히데야스는 마츠다이라 성[松平]을 하사 받아 토쿠가와 일문으로 복귀(이설이 있다)하였으며, 유우키 가문 5남 나오모토[直基]가 잇게 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궁궐의 증축, 은퇴한 텐노우[天皇]를 위한 센토우어소[仙洞御所] 조영 공사의 총 책임자를 맡아 조정에도 그의 존재를 인식시켰다. 그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궁중에서 쾌유를 빌며 신에게 받치는 춤(神楽=かぐら)이 행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히데야스의 육체는 이미 병마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미 궁궐 조영 중에도 일상생활은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공사 종료 후 막부가 히데야스를 후시미의 죠우다이[城代[각주:9]]에 임명하지만 히데야스는 곧바로 사임. 1607 3월에는 영국(領国)인 에치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윤 4 8일에 병사한 것이다.


 그의 병은 당창이라고 하는데 알기 쉽게 말하면 매독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명했던 [이즈모의 오쿠니(出雲のお)] 등 여자 카부키 배우들과 문란한 교재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을 보면 그 방면에서 감염되었다고 여겨진다.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코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보면 이 병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장남 타다나오[忠直]가 광란 끝에 카이에키[改易[각주:10]]당한 것도 부친에게서의 유전으로 여겨진다.


 오쿠니를 초대한 잔치에서 그녀에게 [너는 천하 제일의 무녀(舞女)가 되었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무장이 되지 못하였구나]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불행한 탄생으로 만들어진 히데야스의 마음에 있던 그림자는 끝까지 지워지지 않고 증식하여 그것이 병마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1. 모친이 헤픈 여성이기에 실제로는 이에야스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 [본문으로]
  2. 어삼가(御三家)와 어삼경(御三卿)를 제외한 쇼우군 가문(将軍家)인 토쿠가와(徳川)의 일문친척인 문벌. [본문으로]
  3. 주로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이에야스를 섬기던 문벌. [본문으로]
  4. 실제로 히데야스가 전투를 행한 적은 기껏해야 한 번이다. [본문으로]
  5. 성의 심장부인 천수(天守)를 둘러싼 성곽. [본문으로]
  6. 武家町 [본문으로]
  7. 町人町 [본문으로]
  8. 토쿠가와 가문의 일족친척들이 번주로 있는 번. 여기에는 어삼가(御三家)나 어삼경(御三卿)도 포함된다. [본문으로]
  9. 죠우다이[城代]는 성주의 대리를 뜻하며, 특히 후시미성의 죠우다이는 당시 토요토미 가문과 쿄우토[京都]의 감시, 서국으로 간 토요토미 가신들의 감시 등 막중한 임무와 권한이 주어졌다. [본문으로]
  10. 지위와 땅을 뺏어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611 6 4일 병사(病死) 65

1547 ~ 1611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 성주. 처음엔 타케다 씨[武田氏]를 섬겼지만 타케다 씨 멸망 후 자립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西軍)에 속해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여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괴롭히지만, 서군의 패배로 인하여 항복 개성(開城)하였다. 코우야 산[高野] 자락의 쿠도야마[九度山]에 유폐되었다.










하산(下山)하고 싶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 대한 의리를 갚기 위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우에다 성[上田城]에서 농성하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농락하였지만, 서군의 패배 후 아들 노부유키[信之]의 구명 운동으로 목숨을 건진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 노부시게[信繁]] 부자가 시나노 우에다에서 16인의 동반자들과 함께 유배지인 키이[紀伊] 코우야 산으로 향한 것은 1600년 10월 13이었다. 당시 마사유키는 54, 유키무라는 34세였다.


 코우야산에 도착한 마사유키 일행은 사나다지방의 숙방(宿坊[각주:1])인 렌게죠우 원[華定院]에 일년 넘게 체제하였으며 곧이어 쿠도야마에 완성된 사나다 저택으로 옮겼다. 죄인이라고는 해도 유배 생활은 완전 자유로 등산이나 사냥, 수영, 뱃놀이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러한 유배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마사유키의 마음 속에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꿈만을 키워갔다.


 1603년 3월 15신코우 사[信綱寺]로 보낸 편지에, 3년 후의 여름에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이에야스[家康]에게 잘 말하여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또한 몇 년도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편지의 전후로 생각되어지는 가신 쇼우츠 신고로[称津 神五郞]에게 보낸 정월 3일의 편지에도 '새해도 되어 우리들에게 곧 하산의 명령이 내려질 것 같다' 근거 없는 기쁨을 전하며 하산의 명령을 계속 기다렸다.


고향에 돈을 요구.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산의 명령이 내리지 않은 채 세월만이 흘러갔다.

 이에야스조차도 두려워 한[각주:2] 무장의 의지도 차츰 꺾여 갔다. 더욱이 동반자나 하인들을 포함한 유배생활은 대가족이었기에 돈이 많이 들었다. 생활비는 노부유키[信之]가 보내주는 돈과 렌게죠우 원[連華定院]에서 바치는 적은 세금, 거기에 감시역인 와카야마 성[和歌山城]의 성주(城主)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 長晟]에게서 매해 보내지는 50석뿐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대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에게 돈을 요구했다.


 연도는 불명이지만 정월 5일의 편지에 셋째 아들 마사치카[昌親]에게서 40냥 중 20냥을 확실히 받았지만, 빚이 많아 살림을 꾸려나갈 수 없어 힘드니 남은 20냥도 하루속히 보내주길 바라며 빨리 보낼 수만 있다면 5~6냥도 좋다고 할 정도로 마사유키는 빚에 찌들린 힘든 나날들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있었다.

 마사유키의 계속된 돈 요구나 재촉에 노부유키는 그때마다 보내주었고 또한 정월이 되면 돈과 물품을 보냈으며 편지도 왕성히 오고 갔다. 편지의 왕복이야말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약해져 버린 과거의 지장(智將)


 노부유키쪽에서의 편지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면서 마사유키는 차츰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한탄을 내뱉게 되었다.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말년이라고 여겨지는데 첫째 아들 노부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가오는 세월의 파도로 인해 무엇을 해도 끈기가 없어 지쳐만 간다고, 왕년의 지장(智將)이 이제는 완전히 체념한 듯한 약한 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최후의 말년에는 자주 병이 걸려, 1609년 혹은 1610년 즈음으로 추정되는 4 28일자 우에다[上田]의 유우안 호우인[夕庵法印]과 가로(家老) 오오쿠마 호우키노카미[大熊 伯耆守]에게 보낸 편지에, 노부유키의 병이 쾌유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병이 재발했다고 하며 다음에는 발이 빠른 말을 한 마리 보내주길 바란다고 적혀 있다. 말은 병중의 위로로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것도 병으로 인하여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약해진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 또는 과거 말을 탄 자신의 용맹했던 모습을 생각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11년.

 1611 6 4일.많은 무공(武功)과 무명(武名)을 남겨둔 채,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真田 安房守 昌幸]는 저승으로 여행을 떠났다. 향년 65.

  1. 불공을 드리러 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절의 숙박소. [본문으로]
  2. 여담으로 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기 위해 일으킨 오오사카 공방전에서 마사유키의 아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이에야스는 손을 걸치고 있던 창문이 소리가 날 정도로 떨며 '아비냐 아들이냐?'라고 두번이나 물을 정도로 당황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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