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2년 3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 家光]의 아들 타케치요[竹千代][각주:1]오우미[近江] 히에이잔[比叡山]에 있는 산노우 신사[山王神社][각주:2]에 처음으로 기도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자[각주:3]가 처음 성 밖을 나가는 것인 만큼 이에미츠는 그런 세자의 첫 나들이를 화려하게 장식해 줄 요량으로 어삼가[御三家][각주:4]까지 함께 가라며 그 일에 대한 처리를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에게 맡깁니다[각주:5]. 노부츠나는 우선 어삼가의 필두 오와리[尾張]의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에게 연락합니다.

노부츠나 : 어삼가의 당주들께서도 타체치요님의 히에이잔 기도에 함께 가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요시나오 : 다이나곤[大納言]인 내가 무위무관(無位無官)인 타케치요를 뒤따라 가야 한단 말인가?

노부츠나 : 무위무관이긴 하셔도 타케치요의 아버님은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십니다.

요시나오 : 아버지를 말하자면 우리 아버지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시네.

…하고 거부하여 오와리의 요시나오는 물론 키이[紀伊]의 토쿠가와 요리노부[徳川 頼宣], 미토[水戸]의 토쿠가와 요리후사[徳川 頼房]까지 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1. 후에 4대 쇼우군 이에츠나[家綱]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신호(神号) '토우쇼우다이곤겐[東照大権現]'이라는 이름이 나온 사상적 바탕이 된 곳...이라고 썼지만 사실 제가 철학적인 것을 알리가 없습죠. 단지 천태종(天台宗)을 믿는 텐카이[天海]가 신불습합에 따라 '산노우이치지츠 신도[山王一実神道]에 따라 이에야스를 '곤겐[権現]'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 조금 알고 있을 뿐입죠 [본문으로]
  3. 1634년 세자가 없던 이에미츠가 조금 아퍼 누워있자. 어삼가 중 하나인 오와리[尾張]의 요시나오[義直]가 군사를 이끌고 에도로 진격하였는데, 세자 없는 이에츠나가 죽으면 요시나오 자신이 쇼우군이 되고자 하여 에도 막부를 공포에 떨게 한 적도 있었기에, 이에미츠로서도, 에도 막부의 각료들에게 있어서도 세자는 절실히 필요했다. [본문으로]
  4. 사실 어삼가[御三家]라는 것이 정식으로 생긴 것은 5대 츠나요시[綱吉] 때나 가서야 생긴 것.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와리 가문, 키이 가문, 미토 가문. [본문으로]
  5. 별명이 '지혜로운 이즈[知恵伊豆 - 노부츠나의 관직이 이즈노카미[伊豆守]였기에]'일 정도로 현명했기에, 이에미츠는 힘든 일처리를 노부츠나에게 자주 맡겼다. [본문으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642 11 25일 병사(病死) 76.

 

1569 ~ 1642.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중신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 타치바타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야나가와[柳川] 13만석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카이에키[改易][각주:1] 당했지만 후에 옛 영지(領地)를 회복. 이후는 막부(幕府)에 충성을 다했다.

 

 

 





야나가와-시마바라[島原]의 난

 

 1620 8 7일.

 치쿠고[筑後]의 영주 타나카 타다마사[田中 忠政][각주:2]가 에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36세. 세자가 없었고, 형인 야스마사[康正][각주:3]오우미[近江]로 이동, 배치되었기 때문에[각주:4], 치쿠고[筑後] 야나가와가 주인 없는 빈 땅이 되었고, 8 20일에는 나이토우 마사나가[ 政長] 등의 막부(幕府)의 사자(使者)들이 야나가와 성[柳川]을 접수하러 왔었다.

 그 후 후임 다이묘우[大名]가 임명되기까지 치쿠고[筑後]의 행정은  미노[美濃] 부교우[奉行][각주:5] 오카다 젠도우[岡田 善同] 붕고[豊後] 후나이[府内]의 영주인 타케나카 시게요시[竹中 重義]히젠[肥前]시마바라[島原]의 영주인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가 위임 받았다.

 

 6개월간의 대관(代官)[각주:6] 지배 시기인 1620년 가을에 연공() 징수가 있었다.

 1655년에 쓰여진 시모츠마 군[下妻郡] 나카지마 촌[中島村]의 쇼우야[庄屋][각주:7] 이치로우베에[兵衛]의 기록에 의하면, 

붕고[豊後]마츠쿠라 붕고노카미 시게마사[松倉 豊後守 重政]은 자신이 담당한 곳 백성들이 (세금 내기가) 힘들다고 하여도, 집에 강제로 들어가서는 가마니에 담긴 것은 뭐든 싹 쓸어갔으며,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노오도리[蓑踊り] – (미노[蓑]란 비를 피하기 위한 짚 같은 것으로 엮은 도롱이이다. '미노오도리'란 사람에게 그 도롱이를 입히고 풀지 못하도록 줄로 묶은 상태에서 불을 붙여 고통으로 날뛰는 것을 춤이라 표현한 것으로 고문의 일종이다. – 역자 주)를 하게 만들었다. 우네메[采女]- 타케나카 우메노카미 시게요시[竹中 采女正 重義] 과 쇼우겐[監]- 오카다 쇼우겐 젠도우[岡田 監 善同]의 담당지역은 별로 심하지 않았고 느슨한 편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젠[肥前] 시마바라 성주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지배하고 있던 대관 지역의 연공 징수는 가혹했으며, 미납한 백성에게는 도롱이를 씌우고 거기에 불을 붙여 '미노오도리'를 시켰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주는 1616년부터 1630년까지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재임. 그 후 1638 4 12일까지 아들인 시게츠구[重次]가 이었다.

 그 사이 1637년 가을부터 1638 2 28일까지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天草島原の乱]의 난이 일어났다.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번주(藩主)가 기독교 농민에게 '미노오도리' '모쿠바세메[木馬責め][각주:8]', '꼬챙이 꿰기[さし][각주:9]', '지옥맛보기[地獄責め][각주:10]' 등의 고문이 행해지는 식의 학정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난이 발생되기 16년 전에 이미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미노오도리'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가혹한 연공 징수를 거두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미노오도리'는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행위로 여겨졌지만, 원래는 연공 미납 농민에 대한 처벌 행위였다. 위정자()를 선택할 수 없는 농민들의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마츠쿠라 시게마사, 시게츠구 부자(父子)에 의한 대관 지배가 길어졌다면, 한 때 기독교 농민이 많았던 야나가와 영내(領內)에서 '야나가와-시마바라의 난'이 있어났을 지도 모른다.

 

야나가와 재 부임과 시마바라 출진(出陣)

 

 1620 11 27.

 쇼우군[軍] 히데타다[秀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예전에 그의 영지(領地)였던 야나가와의 영주가 될 것을 명했다.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에 섰기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던 무네시게는 여러 지역을 방랑한 끝에 이에야스[家康]를 섬기었고 그 후 무츠[奥] 타나쿠라[棚倉] 3만석을 하사받았다. 야나가와에는 20년 만에 가보는 것이었다. 나이는 이제 54세가 되어 있었다.

 

 부인이나 가신 106명을 이끌고 타나쿠라를 출발. 에도에 들린 후, 쿄우토[京都]를 거쳐 오오사카에서 배로 세토 내해[瀬戸 内海]를 배로 타고 서행(西行). 코쿠라[小倉]에서 오래만에 치쿠고 로[筑後路]를 남하. 1621 2 28일에 야나가와 성[梁川城]에 입성하였다. 과거 야나가와 성에서 물러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던 영민(領民),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대관 지배에 고통을 받았던 농민들은 무네시게의 야나가와 부임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번의 재정은 시작부터 적자였고, 1636년 시점에서 번의 채무금은 5100 칸메(貫目)에 달하였기에, 같은 해 막부에게 5만 냥(3150 칸메)을 빌렸다. 거기에 다음 해인 1637년에는 시마바라로 출진해야 함에 따라 500 칸메가 더 들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영민에게 '미노오도리'를 시키는 일 없이, 번사(藩士)[각주:11]의 땅을 거두어 들이고 봉급으로 대신하거나, 아리아케[有明] 해안의 간척을 추진하여 재원의 증가를 꾀했다.

 

 같은 해인 1637년 가을.

 아마쿠사, 시마바라에서 대규모 기독교-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막부에게 출진을 명령받은 아들 타다시게[忠茂][각주:12] 11 16일에 에도를 출발. 12 6일에 야나가와에 도착.

 다음 7일에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배로 시마바라로 출진했다.

 다음 해인 1638 1 1일에 3회째의 하라 성[城] 총공격에서 막부 군()의 총 사령관인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 重昌]가 전사. 막부는 총 사령관으로 노중(老中)[각주:13]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를 파견. 무네시게도 1 13일에 에도를 출발, 2 7일에 시마바라에 도착하였다. 72살이라는 늙은 나이에 참전이었다.

 

 2 28.

 바쿠후 군의 총공격으로 하라 성은 낙성.

 무네시게는 일단 야나가와로 돌아온 뒤 다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해인 1639 4 3.

 가독(家督)을 적자(嫡子)에게 타다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여 '류우사이[斎]'라는 호를 칭했다. ()를 좋아하여, 다인(茶人)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류우사이 공의 말씀 기록[公御咄之]'이라는 29개조의 유훈을 남기고, 1642 11 25일. 시모가야[下谷]의 야나가와 번 저택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76세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삭감. [본문으로]
  2.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후 숨어있던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잡은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3. 요시마사의 둘째 아들. 야나가와 번[柳川藩藩)의 지번(支藩) 후쿠시마(福島) 3만석의 번주(藩主). [본문으로]
  4. 이곳 저곳 분산된 곳을 합쳐 2만석. [본문으로]
  5. http://valhae.tistory.com/script/powerEditor/pages/%EC%97%90%EB%8F%84%20%EC%8B%9C%EB%8C%80%EC%97%90%20%EB%AF%B8%EB%85%B8[%E7%BE%8E%E6%BF%83]%EB%8A%94%20%EC%A0%84%EB%9E%B5%EC%A0%81%20%EC%9A%94%EC%B6%A9%EC%A7%80%EB%A1%9C%20%EC%9D%B8%EC%8B%9D%EB%90%98%EC%96%B4%20%EB%A7%89%EB%B6%80%EC%9D%98%20%EC%A7%81%ED%95%A0%EC%A7%80%EC%9D%B8%20%EC%B2%9C%EB%A0%B9(%E5%A4%A9%E9%A0%98)%EC%9D%B4%20%EB%A7%8E%EC%95%98%EA%B3%A0,%20%EA%B7%B8%EB%9F%B0%20%EC%A7%80%EC%97%AD%EC%9D%98%20%ED%96%89%EC%A0%95%EC%9D%84%20%EB%A7%A1%EC%95%98%EB%8B%A4. [본문으로]
  6. 영주를 대신하여 그 지역의 행정을 맡아 봄. [본문으로]
  7. 마을의 대표자 겸 세금 징수나 행정을 맡는 한편 마을 주민의 요청을 대변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8. 몸통이 삼각형으로 된 다리를 붙인 말 형태의 고문틀에, 양 다리에 돌을 매단 사람을 앉혀서 그 무게가 가랑이 사이에 집중되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법, 현재는 SM플레이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가 오스만투르크의 전쟁 포로들에게 행했다고 하는 그 고문. [본문으로]
  10. 유황이 들어간 뜨거운 물을 몸에 뿌리는 고문. [본문으로]
  11. 번에 소속된 무사.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공무원. [본문으로]
  12. 무네시게의 동생 타치바나 나오츠구[立花直次]의 넷째아들. 즉 양자. [본문으로]
  13. '로우쥬우'라고 읽는다. 에도 막부의 수상 격으로 4~5명이 1개월 당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정무를 맡았으며, 중요한 일은 전원의 합의에 따라 결과를 도출했다. [본문으로]
가토 요시아키[加藤 嘉明]
1631년 9월 12일 병사(病死) 69세.

1563년 ~ 1631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에서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각주:1]]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활약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平定], 조선침략[朝鮮の役[각주:2]]에서는 수군을 이끌고 참가.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이요[伊予] 마츠야마[松山], 이어서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를 영유(領有)했다.



영광의 시즈가타케 칠본창

 카토우 요시아키는 어렸을 적부터 기마술(騎馬術)이 뛰어났기에,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자 그 재능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측근인 카토우 카게야스[加藤 景泰]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583년 4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분전하여 칠본창(七本槍)의 한 명이 되어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秀吉子飼いの武将[각주:3]]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천하 평정이나 조선 침략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요 마츠야마 시대

 수많은 전공을 세워 1595년 아와지[淡路]의 시치 성[志知城] 1만5천석에서, 이요[伊予] 마사키[正木=마츠마에[松前]] 6만석에 봉해져 7월에 마사키에 입성했다. 그 후 조선에서의 공적을 평가받아 가증(加增)되어 10만석을 영유(領有)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의 세키가하라[関ヶ原の戦い]에서는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로서 동군에 참전하여 활약하였고, 전투가 끝난 후인 11월에 이요 마츠마에 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1603년 마츠야마 평야의 카츠야마 산[勝山]에 성을 쌓아 이전(移轉)하였다. 카츠야마를 마츠야마로 개명하고 번도(藩都[각주:4])에 어울리는 성 밑 마을[城下町] 경영에 힘썼다.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冬の陣],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의 승리로 인해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세상이 되었다. 1622년 9월에는 토쿠가와 가문의 세자 이에미츠[家光[각주:5]]가 처음 갑옷을 걸치는 의식[具足始め]을 집행하였고, 1626년에는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가 상경하였을 때 함께 따라가 지쥬우[侍従]에 임명받았다. 요시아키는 노련한 무장이었기에 쇼우군 가문[将軍家]도 그를 우대하였다.

말년에 아이즈[津] 영전(榮轉)

 요시아키는 성 밑 마을 마츠야마의 기초를 쌓았지만, 마츠야마로 이전한지 25년 후인 1627년 2월 10일(3월이라고도 한다), 므츠[陸奥] 아이즈[会津] 43만 5천석으로 영전하게 된다. 아이즈는 오우슈우[奥州[각주:6]]의 요충지였기에 지용겸비의 무장을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쇼우군[将軍]이 중의(衆議)를 모으자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
변경의 중요지인 아이즈를 맡길만한 인물은 요시아키 이외에는 없습니다”
 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모우 타다사토[蒲生 忠郷][각주:7]가 죽은 뒤 아이즈의 영주(領主)를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노신(老臣)들이 모인 회의 석상에서 요시아키를 추천한 것인데, 타카토라와 요시아키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유명했기에 그 이유를 묻자 타카토라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사적인 일, 아이즈에 관한 것은 공적인 일이다.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 요시아키 이외의 적임자는 없다”
 고 말했다고 한다. 요시아키도 타카토라의 이 추천에 감격하여 그 후론 수어지교(水魚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이때 요시아키는 아이즈가 오우우[奥羽] 2주[각주:8]의 요충지이며, 자신은 늙었고 또한 가신들도 노련했던 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도저히 그런 중책(重責)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완고히 사퇴(辭退)했지만, 쇼우군은 요시아키와 같이 군법(軍法)과 민정(民政)에 밝은 노련한 용장이야말로 적임이라고 말하자 요시아키도 그 명령에 따랐다고 한다.

 한편 이런 이야기도 있다. 막부의 온미츠[隠密[각주:9]]의 보고에 따른 전봉(転封)이라는 설도 있다.
 온미츠를 이요[伊予]에 파견하여 마츠야마 성을 조사하였고, 또한 마츠야마 번(藩)의 동향 및 농민의
피폐(疲弊)한 모습 등을 보고받은 막부에 다른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마츠야마 번(藩)의 확립에 계획적인 정책을 실시해 왔던 요시아키에게 있어서는 지금껏 노력이 공염불이 되었다.

 1627년 5월 4일.
 아이즈 와카마츠 성에 입성하여 시라카와[白川] 가도를 고치는 등 도로, 교통망을 정비 하였고, 산업을 육성하여
아이즈누리[会津塗]라고 하는 칠기(漆器)나 아이즈혼고우야키[会津本郷焼[각주:10]] 등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시모리[石盛]의 금산(金山)이나 카루이자와[軽井沢]의 은산(銀山) 정비를 시작으로 광산(鑛山) 개발 등을 양성하여 번정(藩政)의 기초를 쌓기 위해 힘썼다.

 요시아키는 몸소 아이즈 외곽으로 나가 농지를 돌아보았고 또한 농민들에게 정보를 모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렇게 번정 확립에 힘 쏟은 요시아키는 1631년 9월 12일에 에도 사쿠라다[桜田]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1.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3. 그 무장이 어렸을 적부터 키운 무장. 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이를 때는 반드시 붙는 대명사와 같은 존재. [본문으로]
  4. 번의 수도. [본문으로]
  5. 에도 막부 3대 쇼우군[将軍] [본문으로]
  6. 므츠(陸奥)의 별칭. [본문으로]
  7.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손자. [본문으로]
  8. 즉 므츠(陸奥)와 데와(出羽). [본문으로]
  9. 첩보활동을 하던 하급 무사. [본문으로]
  10. 아이즈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 [본문으로]

도도 다카토라[藤堂 ]

1630 10 5 병사 75

1556 ~ 1630.

가난한 무사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처음으로 전쟁터에 발을 디딘 것이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오다[織田], 토요토미[豊臣], 토쿠가와[德川] 씨를 섬기며 활약. 또한 축성의 명인으로 각지에 성을 쌓았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와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의 결혼을 성공시켜 공무일화(公武一和[각주:1])를 실현하였다.










센고쿠[戦国] 시대에서 수완 좋게 살아남기


 토우도우 타카토라는 말년의 대부분을 에도[江戶]에서 생활하였다.

 에도 성[江戸城] 개수(改修)와 마을 정비에 분주한 한편 우에노[上野]나 칸다[神田]등에 번저(藩邸[각주:2]), 별저(別邸)를 두고 쇼우쥬[松寿]부인(2대 번주 다카츠구[高次]의 모친)을 살게 하여 인질, 참근 교대의 선례를 만들었다.

 에도성에 자주 등성하여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 3대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미츠[德川 家光]를 보좌하여 '천하태평(天下泰平)' '공무일화(公武一和)'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우미(近江)에서 태어난 그는 건장한 몸과 드센 힘을 타고났으며, 15살에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아시가루[軽]가 되어 아네가와 전투에 참전. 이후 아츠지 요시히데[阿閉 義秀],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오다 노부스미[織田 信澄[각주:3]] 등 여러 가문을 전전하다 하시바 히데나가[羽柴 秀長 히데요시[秀吉]의 동생]을 섬겼으며 여러 고난을 겪은 후에 히데요시의 가신이 된 후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다.

 토자마 다이묘우[ 大名[각주:4]]이면서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 이세[伊勢], 이가[伊賀] 3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 인물에게 말년이라던가 "정년"에 평온은 없었다.


 1608년.

 53살 때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서 이세 츠[]로의 이봉(移封)은 영전(榮轉)이었으나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있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공략하기 위한 포석과 이가 닌쟈[忍者]의 공급원이가[伊賀]의 지배라는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런 막부(幕府)의 부탁과도 같은 임무에 응하여 이가 우에노[上野], 아노우즈[安濃津]에 성을 쌓았다.


 7년 후인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에서는 60세의 나이로 6천의 군세를 이끌고 토쿠가와 측의 선봉을 맡았다. 다음해 여름의 전투에서도 4천의 군세를 이끌고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의 부대와 사투하였다.


 1619년.

 64살 때 오오사카 성 재건의 명령을 받아 완수하였고 또 그 즈음에 여러 축성 공사에 착출되어 불만이 쌓인 토요토미 은고[豊臣 恩顧[각주:5]] 다이묘우[大名]의 반란에 대비한 셋츠[津] 타카츠키[高槻], 탄바[丹波] 사사야마[篠山]의 축성을 지휘하였다.


 다음해인 65. 노령에 굴하지 않고 90여일 간 머물면서 거대한 바위를 키츠가와 강[木津川[각주:6]] 야마시로[山城] 카모[加茂]의 죠우넨 사[常念寺] 운반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


 이 즈음부터 눈병을 앓아 에도로 돌아오자 실명 직전. 그러나 공무일화(公武一和)를 위해서 상경하여 쇼우군 히데타다[秀忠]의 딸 토우후쿠몬인 마사코[東福門院 和子]를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의 부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막부(幕府)의 출장소라고 할 수 있는 니죠우 성[二条城]의 정비에 조력했다.


 텐노우에게는 이미 '오세츠노 츠보네[於世津局]'와의 사이에 황자인 카모미야[加茂宮]와 황녀 우메미야[梅宮]를 둔 상태였기에 텐노우와 쿠교우[公卿[각주:7]]들이 반발. 그에 따라 쇼우군의 면목도 손상되어 막부 각료들도 격한 반대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타카토라는 히데타다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복. 물심양면의 노력을 하여 결국목적을 달성했다.


 1627년.

 72살 때. '생애 최대의 스승이며 은인'이라는 이에야스를 위해서 이에야스의 묘를 만들었다.

 다음해에는 코우즈케[上野]에 있는 칸에이 사[寬永寺]에 칸쇼우 원[寒松院]을 건립하였고, 쿄우토[京都]의 난젠 사[南禪寺]에는 일본 최대의 산문(山門[각주:8])을 만들어 헌납하여 오오사카 공성전에서 전사한 가신의 넋을 기렸다.


 1630 10 5.

 에도 야나하라[柳原]의 별저(邸)에서 잠이 드는 듯 편안히 죽었다.

 마지막 말은 "천하를...[津] 부탁한다"고 했다고도 하며, 몽롱한 듯한 모습으로 타카토라를 위해서 토우도우 가문[藤堂家]을 위해서 전쟁터에서 죽은 수많은 가신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웠다고도 한다.

 향년 75. 경애하던 이에야스의 죽음보다 14년 더 살았으면서도 이에야스와 같은 75세의 죽음이었다.


 토우도우가의 기록에 의하면,

 "몸에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상처가 있었다. 총에 의한 상처, 창에 의한 상처 등 모두 전투에서 얻은 것으로 왼손의 약지는 뭉개져 손톱이 없었고 오른손 중지도 1촌 정도 짧았으며 오른발의 발톱은 전부 빠지고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는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텐카이[天海] 그 빛나는 생애(生涯) "세찬 바람에 맞서 서있는 거목"이라 찬양했다.

  1. 조정과 바쿠후(幕府)를 인척관계로 맺어지게 하여 사이 좋게 함 [본문으로]
  2. 에도나 쿄우토[京都]등에 세운 각 번(藩)의 대사관 같은 것. 에도의 경우 참근 교대(参勤 交代)로 올라온 다이묘우[大名]가 머물렀다 [본문으로]
  3. 보통 '츠다 노부스미[津田 信澄]'라 불린다.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 - '노부유키'로 많이 알려져 있다]의 아들로 노부나가에게는 친조카. '츠다[津田]'는 오다 가문[織田家] 가문의 별성으로 방계의 친족들은 이 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를 치른 후에 이에야스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다이묘우. [본문으로]
  5.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은 다이묘우를 지칭 [본문으로]
  6. 오오사카 부근에 있다 [본문으로]
  7. 상급 귀족들. 보통 종삼위(従三位) 이상을 말한다. [본문으로]
  8. 사원의 정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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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5월.
토쿠가와 막부 3대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는,
이슬비가 흩날리는 날씨에 센다이 번[仙台藩] 에도 저택[각주:1]으로 발길을 옮겼다.
목적은 병문안이었다.

침실로 안내받은 이에미츠를
잠옷을 걸친 노인이 맞이하였다.
창백한 피부가 이제 노인의 생명이 그리 길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노인은 간신히 등을 등걸이에 기대며, 괴로운 듯이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미츠에게 있어서, 
노인의 오른쪽 눈을 감싸고 있는 안대가 이렇게까지 안스러운 적은 없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와 주셨지만 이러한 몰골이라 창피하옵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완전히 갈라져 그르렁 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편안히.. 편안히.."
이에미츠의 짧은 말에는 깊은 염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목이... 망가졌습니다. 식사조차 목을 넘가가지 않고 목소리도 이런 꼴..."
자조적인 미소를 띠우며 목을 쓰다듬는 노인의 말에 걱정스러운 듯 이에미츠는 노인의 말을 막고 말했다.
"신군 이에야스공은 나의 부친 히데타다의 후사를 부장군에게 맡겼소. 그리고 나의 아버지도 또한 나의 후사를 당신에게 맡겼을 터."
이에미츠는 포동포동한 볼에 보조개를 띄우며 말했다.
"그러니 부장군. 당신의 역활은 나의 은거까지 끝나지 않았을 것이오"
하며, 부드럽게 노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부장군[副将軍]'
이에미츠의 부친이 쇼우군[将軍]일 때부터 노인은 그렇게 불려 왔다.
"자... 눕는 것이 좋겠군"
노인의 귀로 들어오는 이에미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눈이 감기고 곧 기분좋게 잠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1590년 봄.
세 번에 걸친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고 있던 호우죠우[北条]를 멸하기 위해,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20만의 대군과 함께 칸토오(関東)로 왔다.
전년 아시나(蘆名)를 물리쳐 명실공히 오우슈우의 패자가 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히데요시의 이 오다와라 공략전에 지각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늦게 온 마사무네가 청원하는 알현의 청을 무시하고 하코네에 있는 창고에 근신을 명했다.
'원숭이녀석, 나와 만날 생각은 없는 것인가? 그렇다는 것은.... 아버지 때보다 더욱 넓혀진 나의 영토를 전부 쳐먹을 흑심인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마사무네는 겨우 비공식 알현을 허용받았다.
눈아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의자에 앉은 히데요시가 손에 쥔 지팡이로 지면을 가리켰다.
엄숙히 예를 표한 마사무네는 지팡이가 가리킨 곳으로 가 앉았다.
앉아 있는 마사무네의 복장에 열석해 있던 장수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가지런히 늘어뜨렸고, 하얀 마(麻)로 된 겉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죽고 나서 관에 들어갈 때 입는 복장이었다.
'이녀석....'
마사무네는 사자(死者)의 복장으로 히데요시에의 복종을 나타내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강렬히 어필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 호담함에 히데요시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웃어 버렸다면 이 순간, 이 곳에서는 히데요시의 패배인 것이다.
'이겼다.....!'
확신하던 마사무네의 목에 히데요시의 지팡이가 와 닿았다.
"조금 더 늦었더라면 이곳이 위험했단다"
그 시선에는 친근한 원숭이의 얼굴은 사라지고 오히려 쥐와 같은 날카로운 집착심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틀 후...
마사무네는 카타쿠라 코쥬우로우[片倉 小十郎]와 함께 정식으로 알현식을 갖게 되었다.
거실과 같은 곳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 천하의 명장들이 얼굴이 나란히 하고 있었다.

"먼저 번에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너의 오른쪽 눈은 누구에게 주었느냐?"
히데요시는 당당한 마사무네가 왠지 맘에 들지 않았다.
"옛! 추하게 튀어 나왔었기에 뒤에 앉아있는 이 코쥬우로우에게 단도로 찔러 터트리게 했사옵니다."
"찔러 터트리게 했다!?"
제후들은 깜짝 놀랐고 곳곳에서 경탄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히데요시가 할 수 있는 것 이라곤 간신히 코웃음 치는 것 뿐이었다.

"내 듣기에 네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너의 모친은 독을 탄 식사로 널 죽이려 했다고 하더구나. 너는 동생을 베어 죽였다고도 들었다. 이렇게 슬픈 일이 있을 수가.."
이번에는 굉장히 슬픈듯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사무네에게 창피를 주고 싶었다.

"그것은 칸파쿠 전하가 잘못 들으신 것. 어머니는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시험해 본 것입니다. 독이 탄 식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는 다테 가문을 짊어 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동생은 어리석게도 그릇에 손을 대었기에 베어 죽였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이렇게 어머니께 단련받았기에, 지금 이렇게 전하의 앞에서도 겁을 내지 않음이옵니다."
막힘이 없는 차분한 말투였다. 아연해 있던 히데요시는 더 이상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 대결에서 마사무네는 당당히 한판승을 따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슬비가 그치고 태양이 저물기 시작했다.
"부장군, 웃고 있군"
말을 건 이에미츠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부드러웠다.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2]와 만났던 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 과는 다르게 마사무네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타이코우 전하라...... 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도 이제는 없군."
"그러하옵니다. 토요토미 가문 다음은 저의 차례라고 생각했건만 뚜껑이 열어보니 이에야스공. 그렇다면 그 다음이야 말로~ 하고 노렸지만 천하는 쇼우군 부친[각주:3]의 손에. 그리고 지금은 쇼우군 전하. 결국 내 차례를 오지 않는가... 하고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지요.....!! "
"포기.....하고 있었지만....이라고!?"
순간,
이에미츠는 자신의 뒤쪽으로 싸늘한 무언가를 느끼고 마사무네의 침상에서 튀어 물러났다. 어느새 노인이 이에미츠 앞에 위풍당당히 서 있었다.
야규우[柳生][각주:4]에게 교육받은 이에미츠였기에, 단번에 노인의 전신에서 굉장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사무네의 외눈은 생기를 되찾았고 그 모습은 천하를 삼키려 하는 용처럼 당당했다.
.
.
한 순간의 침묵이 오고 간 뒤..
"히데타다님으로부터 부장군이라는 분에 넘치는 직함을 받았습니다만 이제는 그 역할도 더 이상 맡을 수가 없군요"
카카~하고 웃으며, 칼걸이에서 꺼리낌없이 단도를 집어, 이에미츠의 발 앞에 정중히 놓았다.
그리곤 절을 했다.
"이 노인에게 간단히 당할 정도라면 천하는 또 다시 시끄러워진다고 생각했지만 이런이런~ 전하는 역시 야규우의 검호(剣豪)이옵니다. 이제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의 안태는 영원한 것! 이 노친네도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가 있겠군요."

어디까지가 마사무네의 진심이었을까?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이에미츠는 헤아려 보았지만 마사무네의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에 빨려 들어 화 내는 것 조차 잊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부장군도 오래 살아 주시구려"
황급히 침실에서 떠난 것은 역시 공포심에서 일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노인은 큰 소리로 가신들에게 명했다.
"이제는 되었다. 물러가도 좋다 "
마루 사이와 벽 뒤 등 어둠에 숨어 있던 완전 무장한 자객들이 아쉽다는 듯이 자리를 떠 사라졌다.
"목숨을 뺐을 수 있었지만 뺐지 않았다. 늙어서가 아니다! 그 때 천하는 내 손안에 굴러 들어 왔었다. ...그것으로...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중얼거리있는 노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아쉽다는 빛이 있었다.

3일 후.
노인은 만족한 웃음을 띤 채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났다.

생몰년; 1567~1636
관위; 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 지쥬우[侍従], 에치젠노카미[越前守], 우코노에쇼우쇼우[右近衛少将],
        므츠노카미[陸奥守], 산기[参議], 곤츄우나곤[権中納言]

  1. 각 번은 참근교대 때의 번주[藩主]나 무사들, 혹은 번주 가족들의 숙소로 에도[江戸]에 저택을 두었다. [본문으로]
  2.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지칭. [본문으로]
  3. 2대 쇼우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본문으로]
  4. 아마도 에도 야규우[江戸柳生]의 창시자 야규우 무네노리[柳生宗矩]를 말하는 듯.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