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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다정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6.05.12 오다 나가마스
  2. 2004.12.24 아나야마 바이세츠

오다 나가마스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5. 12. 18:03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나가마스(織田 長益)

1621 12 13 병사 75

1547 ~ 162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동생. 출가하여 우라쿠사이(有樂).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이어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겼으며,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전투의 화평 교섭 등에서 활약. 후에 다인(茶人)으로 살아가며, 토우쿄우(東京) 유우라쿠쵸우(有樂町)에 그 이름을 남겼다.









다인(茶人) [우라쿠(有樂)]의 탄생


 토우쿄우(東京)유우라쿠쵸우(有樂町)라는 번화가가 있다.

 이 지명은 오다(織田) 우라쿠(有樂)가 에도(江戶) 초기에 이 곳에 저택을 지어 살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오다 우라쿠'라는 인물은 노부나가의 동생인 나가마스(長益)를 지칭하는 것이다. 노부나가의 동생들 중에 에도 시대까지 살아 남은 것은 노부카네(信包)와 나가마스, 두 사람이었지만 바쿠마츠(幕末)[각주:1]까지 다이묘우로 존속한 것은 나가마스의 가계(家系)뿐이다.


 나가마스는 1547년생으로 노부나가와는 13살 차이가 난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의 행적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전장에 나간 기록도 1582 카이(甲斐) 타케다(武田)씨를 정벌 할 때 노부나가의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의 부하로 키소(木曽) 방면에서 침공한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혼노우(本能)()의 변 후, 나가마스는 오와리(尾張)나 북() 이세(伊勢)를 영유(領有)하는 조카인 노부카츠(信雄)를 섬기며, 1 3천관을 식록(祿)으로 받는 유력한 가신이 되어 검지봉행(奉行[각주:2]) 등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寛政重修諸家譜[각주:3]]에 의거하여 [혼노우(本能)()의 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셋츠() 시마시타(島下)() 마이타(昧舌)에서 2천석을 치교우(知行)로 받았다]라는 설(國史大辭典 등)은 잘못된 것이다.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는 것은 1590 9월로 그 직전에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오와리를 빼앗기는 등 카이에키(改易[각주:4])당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고 [우라쿠(有樂)]라는 호를 칭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우라쿠 44살 때였다. 필시 셋츠 치교우를 지급 받은 것도 이 즈음이라고 추측된다.


 우라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뛰어난 제자 일곱명(利休七哲[각주:5])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데, 차를 즐기게 된 것은 리큐우가 노부나가의 사도우(茶頭[각주:6])를 맡을 즈음인 것 같다. 하지만 다도(茶道)의 세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우라쿠라는 호를 칭하는 시기부터라고 한다.


 1591 2월 리큐우가 죽자 [차의 장인(宗匠)]라 불리며 히데요시가 다도회를 열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일이 많아졌고, 다음 해인 1592년에 조선 출병이 시작되자 히데요시를 따라서 큐우슈우(九州)로 내려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에서 자주 다회를 열었다.


 또한 전년 9월에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御伽衆)'에 들어갔다. 오토기(御伽)라는 것은 주군이 심심할 때 말상대를 해주는 것을 말하며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오토기슈우'라 칭했다. 필시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에 더해짐으로써 다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한 것이라 추측된다. [리큐우 류()]를 기반으로 하면서 독자적인 다풍(茶風)을 가미한 [우라쿠 류()]의 다도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는 우에스기(上杉)를 정벌하기 위하여 칸토우()로 내려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이어서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도 무공을 세웠다. 싸움이 끝난 뒤 은상으로 셋츠에 가지고 있던 2천관에 더하여 야마토(大和) 3만석이 주어졌다. 다인(茶人) 다이묘우 오다 우라쿠의 탄생이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노부나가의 적류(嫡流)인 기후(岐阜) 성주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노부나가의 맏손자)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성주 오다 히데카츠(織田 秀雄 노부카츠의 장남)가 서군에 속하여 카이에키 당하였기에 에도(江戶) 바쿠후(幕府) 초창기에 오다 일족 중에서 다이묘우로써 남아 있던 것은 우라쿠의 가계(家系)뿐이었다.


()로 보내는 나날


 토쿠가와 쇼우군()의 지배를 받는 다이묘우가 된 우라쿠는 에도나 순푸(駿府)에 자주 출사(出仕)하였고, 그러는 한편 오오사카(大坂) 성에도 빈번히 출입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의 생모 요도도노(淀殿)의 외숙부라는 인척 관계로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1611 3월.

 히데요리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니죠우(二条)성에서 회견했을 때 우라쿠가 히데요리를 따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흥미 깊다.그 후 토쿠가와-토요토미 양 가문의 사이가 악화되자 우라쿠의 정치적 입장도 미묘하게 되어 일설에 의하면 우라쿠는 이에야스의 첩자가 되어 토요토미 측의 비밀을 보고 했다고도 하며, 오오사카 겨울의 전투가 시작되자 오오사카 성 안에서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 이에야스를 복종하도록 계속해서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의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오오사카 성을 빠져나와 쿄우토에 가서 살며 아들 나가마사(長政)와 히사나가(尚長)에게 각각 1만석씩 나누고 자신은 남은 1만석을 가지고 살았다.


 우라쿠는 항상 쿄우토에 칩거하며 다도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내었고 1621년 12월 13 중풍으로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에서 죽었다. 고죠우(五条) 강변(河原)에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히가시야마의 겐인(建仁)() 세이덴(正伝)()에 묻혔다. 향년 75.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말기를 말함.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하는 행정관 [본문으로]
  3. 칸세이(寛政=1789‐1801)년간에 에도 바쿠후(幕府)가 토쿠가와 일족을 제외한 다이묘우, 하타모토 등에게 족보를 제출하게 하여 각 가문의 유례를 기록한 것. 자유 제출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조상을 띄우기 위해 날조나 왜곡이 많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영지를 삭감 혹은 전부 몰수 당하고 심하면 평민으로 강등 [본문으로]
  5. 제자들 중 뛰어난 일곱 제자.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를 지칭함. 오다 우라쿠사이의 경우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리큐우의 아들인 센노 도우안(千 道安)과 함께 십철(十哲)로 꼽힌다. [본문으로]
  6. 다이묘우를 섬기며 다도에 관한 것을 관장함 [본문으로]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1581 6 2 객사(客死) 42

1541 ~ 1582.

이름은 노부키미(信君). 친류중(親類衆[각주:1])필두로써, 타케다 가문(武田家)내에서도 발언권이 강했다. 타케다씨가 멸망할 때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항복하여 타케다씨 친족중에선 유일하게 살아 남지만,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나 귀국하던 도중 야마시로(山城)에서 토민에게 살해당했다.










배신의 배경


 어느새 이 인물의 마음에는 암암리에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결별할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이 주가(主家)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는 것 이외에 카이 겐지(甲斐 源氏)의 명문 타케다 가()의 이름을 남길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배신], [배반]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망상을 품은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라는 인물이 원래부터 주가(主家) 타케다 씨에 대한 충성심이 적었냐 하면 반대였다.


 바이세츠는 타케다 일문(一門)의 필두격으로 카이(甲斐) 남부의 후지가와(富士川) 천 유역에 펼쳐진 카와치(河內)령을 지배했던 아나야마 노부토모(穴山 信友)의 장남이었다.

 부친 노부토모의 부인이자, 바이세츠의 어머니인 난쇼우인(松院)은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 신겐의 부친)의 둘째 딸로, 노부토모는 자신을 [타케다 이즈노카미 노부토모(武田 伊豆守 信友)]라고 자칭할 정도로 타케다 일문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 노부토모의 적남(嫡男)인 바이세츠는 아명을 카츠치요(勝千代), 성인식(元服)을 치른 후에는 노부키미(信君)라 했으며 후에 신겐(信玄)의 딸인 켄쇼우인(見性院)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기에 신겐은 외숙부이면서 장인이므로 혈통상으로도 아주 가까웠다. 당연히 부친 노부토모처럼 타케다 일문 필두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1562년.

 약관 21세로 망부(亡父)의 뒤를 이은 바이세츠는 이후 신겐의 측근으로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를 시작으로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투[각주:2]에 출진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신겐이 병으로 죽고서 카이슈고쇼쿠(甲斐守護職)를 시로우 카츠요리(四郞勝頼)가 상속한 후에도 젊은 카츠요리의 후견인격이 되어 타케다가()에 대한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1575 5미카와(三河)의 나가시노(長篠)합전에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대패했을 때 역전(歷戰)의 중신과 여러 무장들이 계속해서 죽는 것에 흥분한 카츠요리가 여기서 죽겠다며 뛰쳐나가려는 것을 칼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강제로 말의 엉덩이를 때려 철퇴시킨 것도 후견인이라는 것을 자부했기 때문이다.


배반의 대가


 패전 후.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스루가(駿河)의 에지리(江尻)성을 지키며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침공에 대비했다. 최전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에지리(江尻)의 성장(城將)이 된 것이 바이세츠의 운명을 크게 변화시킬 줄은 카츠요리도 그리고 바이세츠 본인도 예상못했다.


 1579 9월.

 토쿠가와군()이 스루가 침공을 개시. 이미 타카텐진(高天神)성을 타케다군()에게서 탈취한 상태였으므로 그 다음이 카이(甲斐)가 될 것임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노부키미가 중이 되어 [바이세츠사이후하쿠(梅雪斎不白)]라 칭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탄생으로 40세가 된 그가 타케다가()의 장래를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증거이기도 했다.


 1581년.

 오다(織田)()의 침공에 대비하여 카츠요리(勝頼)가 신푸(新府)성을 축성했을 때에도 바이세츠는 일문(一門) 필두로써 거액의 건설자금을 기부하였기에 아직 이 시점까지는 여전히 후견인으로서 강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다음해 1582년 다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이 카이 공략을 개시하자,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의 운명에 내일이 없다고 판단하여 카츠요리와 결별을 결의. 곧바로 행동을 개시한다. 그는 카츠요리보다도 타케다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다 자부하는 자신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 - 카츠요리를 대신할 명문 타케다가()의 총수로 삼아 명문 타케다의 이름을 존속시키려 한 것이다.

 바이세츠는 우선 코우후(甲府)에 인질로 가 있던 처와 자식을 시노비노모노(忍の者 = 닌쟈)를 이용하여 탈출시킨 후 이에야스에게 에지리 성을 넘겼다. 이 부분을 [신장공기(信長公記)]에는 [아나야마 겐바(穴山 玄蕃) 카이(甲斐)()부츄우(府中)에 인질로 두고 있던 처자식을 2 25일 비오는 밤을 틈타 빼내어]로 기록하고 있다.

 카츠요리는 [바이세츠 배반]을 알게 되자 오다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나노(信濃)에서 신푸(新府)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지만 믿고 있던 중신(重臣)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도 배반당하여 텐모쿠(天目)산에서 자살한다.


 한편 토쿠가와군()을 길안내하며 후지가와 천을 거슬러 올라 코우후(甲府)로 침공한 바이세츠는 노부나가(信長)에게 자신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를 타케다 가의 후계자로 허락 받는 등,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에야스와 함께 아즈치(安土)성을 방문하여 노부나가에게 환대 받고 돌아가던 중에 구경하러 들린 사카이()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혼노우지(本能寺)의 변(]이 일어난다. 귀국하던 도중 야마시로(山城)국 우치다하라(宇治田原)부근에서 야도(野盜)에게 습격 받아 죽임을 당했다. 향년 42.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배반자의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1. 일족 친척들을 지칭함.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공포로 몰아넣어 똥을 지리게 했다는 전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