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부 씨[南部氏]는 카이 겐지[甲斐源氏]의 핏줄을 잇는 무츠[]의 명문가이다.
 에도 시대[
江戸時代], 항간에는 '초생달이 둥글게 될 때까지 난부의 영지[각주:1]'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그 영지[領地]가 광대했다. 북으로는 현재의 아오모리 현[青森県]의 시모키타 반도[下北半島]부터 시작해서 남으로는 이와테 현[岩手県]의 키타카미가와[北上川] 강의 중앙부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 광대한 영지를 구축한 것이 26대 당주인 노부나오[信直]였다.

 노부나오의 난부 가문 상속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동족간의 극심한 대립항쟁이 있었다.
 난부 24대 하루마사[
晴政]에게는 처음에 아들이 없어, 장녀의 남편 '탓코쿠로우 노부나오[田子[각주:2]九郎 信直]'를 후계자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마사에게 아들이 탄생한 것이다. '츠루치요[鶴千代]'였다. 하루마사는 양자이자 후계자로 삼았던 노부나오를 살해하려 해서 가문 내분이 일어나지만, 결국 어린 츠루치요가 '하루츠구[晴継]'라는 이름으로 25대 당주가 되었다.

 그런데 1587년 1월. 하루마사가 죽은 20일 후에 하루츠구도 부친의 뒤를 쫓기라도 하듯 급사한 것이다. 나이 불과 13세였다.[각주:3]

 그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탓코쿠로우 노부나오와 하루마사 둘째 딸의 남편 '쿠노헤 사네치카[
実親][각주:4]와의 다툼이 시작되었지만, 일문[一門]의 실력자 키타 노부치카[ 信愛]가 무사 100명, 철포 100정으로 상속회의장을 포위하는 식의 실력행사로 회의를 리드하여 결국 노부나오를 26대 당주로 앉힌 것이었다.

 전() 성주의 장례식을 끝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저격 당하는 등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은 노부나오였지만, 그는 여기서 일생일대의 도박에 나선다. 곧바로 가신 모두를 등성 시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반역자로서 처벌한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리하여 쿠노헤 사네치카를 옹립하고자 계속 반항하던 쿠노헤 마사자네[ 政実]이하 십여 명의 무장들도 숨죽인다.

 내란은 진정된 듯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이때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이 일어난다.
 난부 가문을 섬기며 츠가루[
津軽]를 다스리던 오오우라 타메노부[大浦 為信 – 나중에 '츠가루'로 성을 바꾼다]가 돌연 츠가루에서 독립을 외친 것이다[각주:5].

 이렇게 노부나오가 영내[
領內]의 내란에 정신 팔려있는 동안, 중앙에서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천하제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정보를 노부나오에게 전해준 것이 '키요시게[清茂]'라는 쿄우토[京都]의 매[] 상인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키요시게가 말하길 오다와라 호우죠우 씨[条氏]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멸문 당할 것이며, 그 후 히데요시는 곧바로 오우슈우[奥州]로 진격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노부나오는 앙천했다. 서둘러 히데요시에게로 가 부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으면 난부 가문의 앞날이 위험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에 이곳을 떠나면 노부나오와 반목하는 쿠노헤 일족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래서 우선 사자[使者]를 파견하기로 하였지만, 그러나 이를 어쩌랴 난부 가문에 있던 자들은 사투리가 너무 심했고 행동거지도 촌놈 같아 도저히 히데요시에게 보내어 예를 표할 수 있을만한 인물이 없다고 노부나오는 말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키요시게 자신이 난부 가문의 사자가 되어 오다와라의 히데요시에게 가 대신 충성을 표했다.

 히데요시는, "이렇게 빨리 사자를 보낸 것이 기특하다. 난부 가문 대대로 이어 내려오던 영토는 보장할 테니 걱정할 것 없네. 일족이 반란을 일으키다니 기괴한 일이로다. 이 오다와라를 정리하는 대로 이 히데요시가 오우슈우에 내려갈 테니 그때까지 성을 확실히 지키시게"라는 약속은 받았지만, 츠가루 토벌 신청에 대해서만은 츠가루 타메노부가 한발 앞서 히데요시를 만나 츠가루 영유권을 확인하는 증서를 받았기에 토벌에 관한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 일년 후. 난부 영내는 쿠노헤 마사자네의 반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다. 히데요시가 파견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시작으로 히데요시의 조카 히데츠구[秀次]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거기에 오우슈우[奥州]의 여러 장수들을 더한 15만이라는 대군을 상대로 쿠노헤 마사자네는 2개월간 농성을 하였지만, 결국 모략에 빠져 패했다.

이것을 끝으로 난부는 평정되었다.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
1546년생. 처음엔 탓코우쿠로우[
田子九]라 불렸다. 1586년 히데요시에게서 영지를 보장받았다. 무츠[] 산노헤[] 성주. 쿠노헤 마사자네 토멸 후 10만석으로 가증. 이후 모리오카 성[盛岡城]의 축성을 시작하였다. 1599년 10월 죽다. 54세.

  1. '三日月の丸くなるまで南部領'. 이 말은 그의 양아버지 하루마사[晴政] 때부터 생긴 말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탓코[田子]는 노부나오의 거성이 있던 지명 [본문으로]
  3. 괴한들의 습격당해 죽었다고 한다. 범인은 쿠노헤 마사자네[九戸 政実]라는 설도 있으며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가 죽였다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4. 쿠노헤 마사자네[九戸 政実]의 동생 [본문으로]
  5. 그 전(1571년)에 노부나오의 친부[親父]이자 츠가루 군[津軽郡]의 책임자(郡代)인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를 죽이며 반란시작. 이 때는 타메노부가 츠가루 군[津軽郡] 전체를 손에 넣은 시기 [본문으로]

구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
1591년 9월 20일 처형 56세.

이곳에 가면 쿠노헤 마사자네가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링크)

1536~1591.
무츠
[陸奧] 쿠노헤[九戶]성주. 쿠노헤씨는 난부[南部]씨의 분가. 종가(宗家)의 난부 노부나오((南部 信直)에 대항하여 거병, 농성하지만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아사노 나가마사[淺野 長政] 등이 이끄는 토요토미 씨[豊臣氏]의 오우슈우 평정군[奧州仕置軍]에 진압되어 일족 전원이 처형 당했다.

봉기결단의 배경

 1591년. 쿠노헤 성주 마사자네는 종가(宗家)의 난부 씨 26대 당주인 노부나오에게 모반을 일으킨다. 당시 마사자네는 56세의 노장이었다. 따라서 봉기는 최후의 도전이었으며, 모든 것을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던 것이다.
'나야말로 난부의 정통후계자이다'라고 공언하며, '노부나오는 듣보잡'[각주:1]이라 말하며 마사자네는 오랫 동안 쌓아 온 주변의 여러 호족들과의 우호, 동맹관계에 더하여 일족의 두령으로서의 신망을 바탕으로 그 동안 종가에게 쌓인 반목과 불화를 총결산하는 결단이었다.

 암군(暗君)이라고 평가받던 난부 가문 24대 하루마사[晴政]가 1582년 1월에 죽자, 하루마사 첩의 아들인 하루츠구[晴継]가 13세의 나이로 가독을 잇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츠구는 당주의 자리를 이은 지 20여일만에 급사한다. 부친의 장례 종료 후 눈바람이 심한 밤에 산노헤[三戶]성으로 귀성 중에 자객에게 습격받았기 때문이다. 한 편으론 독살의 소문도 돌았다.

 이 사건을 꾸민 것은 평소의 거동으로 보았을 때 쿠노헤 일족임에 틀림이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가문은 둘로 나뉘어지기에 이르렀다. 후계자로서 마사자네의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정작 마사자네는 동생인 쿠노헤 사네치카[実親]를 추천한다. 사네치카가 하루마사의 둘째 딸과 결혼한 것과 쿠노헤 일족이 난부가 19지족(支族)중에 필두임을 이유로 들었다.

 한편 키타 노부치카[北 信愛]등은 23대 야스노부[安信]의 동생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 - 츠가루 지방 당담관(津軽 郡代)]의 아들인 노부나오[信直]를 추천하였다. 노부나오의 부인은 하루마사의 첫째 딸이었다. 한 때 하루마사의 양자가 되어 후계자 자리에 있었지만, 첩에게서 하루츠구가 태어났기 때문에 차츰 하루마사와 사이가 벌어졌고, 거기에 처도 죽는 바람에 후계자의 지위를 반납하고 있었다.

 초대 미츠유키[光行]부터 시작되는 난부 분가 중 명문가의 리더[각주:2]이고 또한 쿠노헤, 니노헤[二戶]의 양 군(郡)을 소유하면서 주변 여러 호족을 휘하로 두고 있던 마사자네조차 "노부나오는 예전 하루마사 공에게 미움 받기는 했지만 일시나마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또한 장녀는 죽었다고는 해도 그녀의 남편이기도 했던 사람"이라 말하며 물러났지만 맘속으로는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봉기군 각지에서 우세.

 모반을 일으킨 마사자네가 처음부터 농성전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노부나오가 자신의 적자 토시나오[利直]를 히데요시[秀吉]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히데요시는 마사자네가 사투금지령(私闘禁止令)을 위반했다고 판단. 휘하 장병과 오우우(奥羽) 다이묘우의 세력을 규합하여 10만의 오우 평정군([奥羽仕置軍]을 파견했기 때문에 농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사건을 천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과시하기 위한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후세에 [쿠노헤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이 반란은 오우우 평정군이 도착하기 전 1월에서 8월말까지 난부령 각지에서 종가 군과 쿠노헤 군과의 사이에서 격전이 펼쳐졌다. 전체적으로 봐서 종가군은 패색이 짙었고, 형세에 따라서는 - 하면서 방관하고 있던 여러 호족들도 전부 쿠노헤군에 가담하여 총세 약 5천으로 증가했다. 그에 비해 종가군은 3천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예전에 멸망시킨 시와[志波]의 시바 씨[斯波氏]의 잔당들까지도 봉기를 해서 노부나오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9월 1일 오우우 평정군이 도착하였다.

모략에 당하다.

 아무리 무용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쿠노헤 일족이라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가 이끄는 대군과 야전에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천연의 요해인 쿠노헤성에서 농성하며 무문(武門)의 의지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평정군 진영에는 츠가루 타메노부[津軽 為信]의 군 3천이 있었다. 타메노부는 마사자네의 지원을 받으며 츠가루의 영주가 될 수 있었다. 마사자네는 자신도 권모술수을 잘 부려왔던 사람이기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은 평정군 진영에 있던 노부나오는 어처구니 없었다. 노부나오의 부친 타카노부는 바로 타메노부의 기습을 받아 자결했기 때문이다. 불구대천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잡고 마사자네를 물리쳐야 했다.

 쿠노헤 일족은 용감히 싸웠고, 시골의 작은 성이라며 무시한 평정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낼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공성군은 하나의 계책을 세우게 된다. 모략은 전투에 항상 있는 것이다. 쿠노헤 가문의 묘소가 있는 쵸우코우 사[長興寺]의 사츠텐[薩天] 화상이 모략인 줄도 모르고 권항사(勸降使)가 되었다.

 무장들 중에는 사네치카[각주:3] 한 명만이 끝까지 투항에 반대했다. 후세에 [쿠노헤의 학살(=九戸のなで斬り)]이라 칭해지는 살육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사네치카는 성밖으로 달려 나가 싸우다 죽었다. 그리하여 평정군의 공성전은 9월 1일에 시작해서 4일에 끝났다.

 속임수에 빠진 항장(降將) 마사자네 등 8명은 9월 20일 다테[伊達] 영내에 있는 히데츠구의 본영 이와가사키[岩ヶ崎]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다테의 영지에서 처형한 것은 마사자네와 사이가 좋으며 야심가인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에 대한 본보기 이기도 했다.

 동장군(冬將軍)이 가까이 왔는데도 화해를 선택한 마사자네의 생각이 어리석었다고 힐난하는 역사가도 있다. 마사자네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오천의 장병을 구하기 위해서 천하인의 도량을 재어 본 것이다. 무참한 결과만을 보고 정치적인 동찰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단지 아쉬운 것은 마사자네가 전국의 무대로 올라가는 것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1. 노부나오는 난부 가문의 분가인 이시카와 타카노부[石川 高信]의 서장자이다. [본문으로]
  2. 쿠노헤 씨는 미츠유키의 여섯째 아들 유키츠라[行連]부터 시작된다. [본문으로]
  3. 난부가의 후계로 추대되었던 마사자네의 동생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