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라고 하면 부인의 내조를 받은 에피소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즈토요가 아직 이에몬[猪右衛門]이라는 이름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던 하급무사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즈치[安土]의 성 아래에 동국(東國)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馬)을 팔러 온 사람이 있었다. 오다 가문의 무사들은 누구나가 그 말을 보고 경탄하였지만 그런 만큼 비쌌기에 아무도 사질 못하였다. 카즈토요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기는커녕 자신과 부인 둘의 생활조차 근근한 처지였다.
 카즈토요는 한숨을 쉬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가난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저렇게 멋진 말이 있다면 노부나가님의 열병식 때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을텐데…”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이를 곁에서 부인 치요[千代]가 듣고
있었다. 치요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그 말의 가격이 황금 10냥[각주:1]라는 것을 카즈토요에게 듣고서는,
 “그렇다면 이 돈으로 그 말을 사십시오”
 라고 말하며 화장대 밑에서 황금 10냥를 꺼내 카즈토요에게 주었다.
 카즈토요는 놀랐다. 지금껏 빈곤했는데 이런 큰 돈이 어디서 생긴 것이냐고 묻자 치요는,
 “이 돈은 제가 시집올 때 아버님에게 ‘평소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너의 남편에게 아주 큰일이 생겼을 때만 사용하거라’하면서 주신 돈입니다. 열병식이라면 주군 노부나가님을 시작으로 많은 분들의 눈에 띌 좋은 기회겠지요. 어서 그 명마를 사시옵소서”
 라고 말하였다. 카즈토요는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그 말을 사러 갔다.
 
얼마 후 쿄우토[京都]에서 열병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그리고 카즈토요의 말은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노부나가도 경탄을 하여[각주:2], 이를 계기로 카즈토요는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각주:3]

 이 에피소드는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에 기술된 몇몇 사료에 실려 있기에 시대성에서 본다면 ‘좋은 부인의 모범’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여성을 이러한 유교론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치요는 센고쿠의 여성이 보여주는 억척스러움과 강인한 정신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덧붙여 치요의 내조에 대해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카즈토요가 결혼하였을 때 카즈토요는
오우미[近江] 카라쿠니[唐国]에 400석[각주:4]영지를 얻었지만 빈곤하여 집에 도마조차 없어 치요는 되를 뒤집어 대신 사용하였다.[각주:5]
 또한 당시 카즈토요가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되어 히데요시에게 축성의 감독을 명령 받았지만, 가난하여 인부들의 야식도 대접하지 못하자 치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쌀을 사 와서 카즈토요의 면목을 세웠다고 한다.

 카즈토요는 히데요시의 휘하로 각지를 전전하였지만 특별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용맹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1573년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토벌전 때 패주하는 아사쿠라의 군세를 추격하여 오다 군[織田軍]이 에치젠과 오우미[近江]의 국경에 있는 토네자카[刀根坂]에 이르렀다. 이때 아사쿠라 군의 후군[殿]에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이라는 활을 잘 쏘는 무장이 있어, 오다 군은 그 활 때문에 쉽사리 진격을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카즈토요가 창을 꼬나쥐고 단숨에 돌격하였다.
 진에몬은 자랑하는 활을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카즈토요의 볼을 꿰뚫어 어금니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그대로 진에몬에게 달려들어 뒤엉켰고 아군의 도움으로 진에몬을 죽였다.

 어쨌든 카즈토요는 히데요시 아래서 순조롭게 출세하여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의 공으로 카케가와 성[掛川城] 5만석의 성주로 봉해졌다. 카즈토요가 카케가와에 봉해진 것은 칸토우[関東]에 봉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감시하며 만일의 경우가 있을 때는 이에야스를 방비하려는 히데요시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자신이 배속되어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난행을 이유로 할복을 명령 받은 다음부터는, 오히려 이에야스의 수완에 장래를 맡기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카즈토요는 히데츠구 사건의 전말을 보고 히데요시 정권의 종말을 느끼게 된 것이다.

 1600년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을 위한 이에야스의 군세 속에 카즈토요의 모습이 있었다.
 7월 24일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 이르렀을 때, 카즈토요에게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치요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거기에는 오오사카 측의 봉행[奉行]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의 이름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거병과 자기들 편에 참가를 요청하는 편지 한 통, 거기에 카즈토요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는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다해 주십시오, 제 몸은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카즈토요는 이 두 통의 들어간 상자의 봉인을 뜯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다.
 사실 카즈토요는 이것과는 따로 또 한 통의 밀서를 치요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전령인 타나카 마고로쿠[田中 孫六]의 삿갓에 숨겨져 있던 것으로 치요의 의견이 담겨 있었다. 카즈토요는 다 읽은 뒤 곧바로 불살랐지만, 추측하건대 편지가 담긴 상자의 봉인을 풀지 말고 그대로 이에야스에게 제출을 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곧바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려, 이미 넘어가버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한 마디[각주:6]로 ‘미츠나리 타도’가 결정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카즈토요는 중대한 발언을 하였다.
 “상경하는 군세를 위해서 도중에 있는 제 카케가와 성을 군량과 함께 전부 바치겠습니다. 거기에 인질도 바쳐 저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각주:7]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 성을 가지고 있던 무장들도 전부 이에 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카즈토요의 공은 단번에 여러 무장들 중 눈에 띄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결전 때 카즈토요는 그다지 전공이 없었음[각주:8] 에도 이에야스는,
 “카즈토요가 오야마에서 한 말이 세키가하라 승리의 초석이 되었다”
 며, 영지배분 때 일약 토사[土佐] 전부인 24만석[각주:9][각주:10]을 주었던 것이다.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1545년 오와리[尾張] 출생. 1560년 미노[美濃] 마키무라 성[牧村城]의 성주 마키무라 마사토모[牧村 政倫], 이어서 오우미[近江] 세타 성[勢多城]의 성주인 야마오카 카게타카[山岡 景隆]를 섬겼다고 한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히데요시[秀吉]에게 배속.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종군하여 오우미 나가하마[長浜] 5000석에 봉해지고 1년 후 2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카케가와[掛川] 5만석에서 토사[土佐] 24만석이 주어졌다. 1605년 61세로 죽었다.

  1. 당시 보통 말은 1냥, 좋은 말은 5냥 정도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노부나가가 경탄한 것은 말 때문이 아니다. 노부나가는 카즈토요가 치요가 건네 준 돈으로 말을 산 것을 듣고 말하길 “동국 제일(東国第一)이라는 말을 상인이, 천하에 오다 가문만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리도 먼 내 영지까지 끌고 와서 팔려 했는데도 아무도 사지 않았다면 안타까운 일이며 이는 노부나가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그러던 때 오랫동안 낭인이었다는 카즈토요가 가난했음에도 말을 샀다. 무사의 마음가짐은 이래야 함이다.”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당시 열병식이 열린 시기는 서력 1581년. 당시 카즈토요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나 츄우고쿠[中国] 등에서의 활약으로 최대 2700석의 신분이었다. 당시 황금 10냥으로 대략 쌀을 140석 정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치요하고 카즈토요가 과소비하지 않는 한 살 수 있었단 이야기. 무엇보다 1581년 열병식 때 히데요시와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 즉 카즈토요는 츄우고쿠[中国] 공략에 바빠 참가를 아예 못하였고, 노부나가 역시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4. 1573년 아사쿠라 침공전[朝倉攻め] 때 에치젠[越前]의 호걸 미타자키 칸에몬[三段崎 勘右衛門]을 부상 당하면서도 쓰러뜨린 공적으로. [본문으로]
  5. 링크는 당시의 것이 아니다. 링크의 것은 1806년 후지나미 신사[藤並神社]에 봉납된 모조품.실물은 2차대전 때의 공습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크기는 종횡17cm * 17cm에 높이 8cm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대충 '나이 어린 히데요리가 이에야스 토벌을 명령 할리 없다. 이는 미츠나리가 사사로이 거병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7.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여담으로 도용 당한 타다우지는 카즈토요에게 “평소 성실한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라면서 웃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당시 카즈토요의 부대는 난구우 산[南宮山]에 진을 친 모리 가문[毛利家]에 대한 대비책으로 전선 후방에 놓여 있었다. 결국 모우리 가문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랬기에 카즈토요의 부대도 피 흘리지 않았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9만 8000석. 나중엔 1605년 카즈토요가 제출한 영지 목록에 20만 2600석으로 이후 이것이 막부 공인이 됨. [본문으로]
  10. 24만석이 나온 숫자는, ‘쵸우소카베 영지조사장부[長宗我部地検帳]’에 토사[土佐]의 농작면적이 2만 4000정(町)으로 나와있는데 단순히 1반(反=1/10정(町))을 1석(石)으로 하여 24만석이 속설로 된 것으로, 1705년 번(藩)이나 다이묘우[大名], 하타모토[旗本] 등을 다룬 백과사전격인 '무감(武鑑)'부터 이렇게 나왔다고 한다. [본문으로]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1585 4 16 병사 51

1535 ~ 1585.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고 각지에 종군하며 공을 세워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이어서 와카사[若狹]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나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합류하여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쳤으며 키요스 회의[淸州会議]도 출석. 시즈가타케 전투[岳の戦い]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싸웠다.









노부나가의 사위가 된 부자(父子)


 니와 나가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의 사위라는 것은 이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나가히데는 노부나가보다 1년 늦은 1535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만치요[万千代]였다. 15세에 노부나가를 가까이서 모시며, 1552년 키요스[淸州] 성주인 오다 히코고로우[織田 彦五郞]의 가재(家宰[각주:1])인 사카이 다이젠[坂井 大膳]을 물리친 카야츠 전투[
萱津の戦い] 그의 첫 데뷔전이라 한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桶狹間の戦い]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1563년.

 노부나가의 양녀(부친은 노부나가의 배다른 형인 노부히로[信広])를 처로 맞이하는데 이것은 나가히데의 능력을 노부나가가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주군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가신에게 있어 파격의 대우임과 동시에 일문(一門)에 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후 노부나가의 전선 확대와 더불어 각지에 종군했으며, 1571년에는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공략의 중요 거점이었던 오우미의 사와야마 성주가 되어 오우미 지배에 관여했다.


 1581 2월.

 황거의 동쪽 마장에서 행해진 열병식[각주:2]에서는 오다 가신단 중 최초로 등장. 셋츠[摂津], 와카사[若狹]의 무사들을 이끌고 행진하는 명예가 주어졌다. 이것은 바로 전 해인 1580노부나가의 딸과 나가히데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결혼이 성립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이며, 나가히데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의 추방 후 오다 정권에서 가장 유력한 무장 중에 한 명인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일 것이다. 부자 2대에 걸쳐 노부나가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예는 니와 씨[丹羽氏]말고는 없다.


 혼노우지의 변 직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들과 역신(逆臣)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였고, 오다 가문의 당주 결정을 둘러싼 소위 키요스 회의에서는 히데요시를 도와 산포우시[三法師-노부나가의 큰아들인 노부타다[信忠]의 아들]를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정했다. 그리고 히데요시, 나가히데, 시바타 카츠이에,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숙노(宿老) 4명이 앞으로의 일처리를 행하기로 했다.


 1583 시바타 카츠이에의 멸망 후에는 그의 거성이었던 키타노쇼[北ノ庄]성이 주어져 에치젠[越前], 와카사[若狹], 카가[加賀]의 남부(南部)를 손에 넣어 백 만여석을 소유했다.


망령 퇴치의 기도 의뢰


 1585 4월.

 나가히데는 키타노쇼 성[北ノ庄城]에서 병상에 누었다. 같은 달 4 쿄우토[京都] 요시다 신사[吉田神社]의 신관[神主] 요시다 카네미[吉田 兼見]에게 나가히데의 가신 사타케 데와노카미[佐竹 出羽守]가 편지를 보내왔다. 용건은 나가히데가 병을 앓고 있으며 특히 요 근래는 더욱 심해졌으니 나을 수 있도록 신에게 빌어달라는 의뢰였다.

 편지에는 발병의 원인으로 시바타 카츠이에의 망령이 내린 저주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적혀있었다. 카츠이에는 나가히데와는 동급의 무장이었지만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나가히데는 카츠이에의 권유를 거부하고서 히데요시의 편을 들었기에 당시 이러한 소문이 그럴듯하게 퍼져 쑤군들 대었던 것 같다.


 4 9일.

 키이[紀伊] 사이카[雑賀]를 공격하는 도중에 나가히데가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곧바로 당대의 명의(名醫)인 타케다 죠우카[竹田 定可]에게 키타노쇼성으로 가서 나가히데를 치료하도록 의뢰했다. 그러나 죠우카는 곧바로 가지 않은 듯 히데요시는 12일에 다시 가도록 요청할 정도였다.

 13일에 히데요시는 나가히데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를 함과 동시에 쿄우토[京都]로 와서 많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도록 권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14일.

 나가히데는 병이 더 심해진 것을 깨닫자 세자인 나가시게(14)를 시작으로 친척들과 중신을 머리맡에 불러 어린 나이의 나가시게를 잘 보좌하여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같은 날. 가신인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에게 명하여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유서를 쓰게 하였다. 유서에는 평소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받은 것을 감사히 여기며, 3개국이나 되는 영지(領地)를 받았으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죄송하다고 말한 후 후계에 대한 것은 히데요시의 뜻에 맡기겠다고 했다. 이 서장에 [히데요시님(秀吉)]이라 쓰인 것이 인상적이다. 죽음을 앞둔 나가히데로써는 천하인이 되고 있는 히데요시에게 니와 가[丹羽家]의 앞 날을 맡긴 것이다.


죽음을 둘러싼 기괴한 소문


 4 16일.

 나가히데는 51세의 나이로 생의 막을 내리는데 나라[奈良]의 승려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의 일기에 따르면 나가히데는 병사하는 것이 분하다고 한탄하면서 14일에 할복하여 결국 16일에 죽었다고 쓰고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나가히데는 평소부터 담석을 앓고 있어서 고통을 참지 못하고 할복했다고도 전해지는등 기괴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나가히데가 죽은 뒤 나가히데의 세력을 세자인 나가시게가 이어받았지만 영지는 천하인 히데요시에게 차츰 깎여,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직전에는 단지 카가[加賀]에 12만 여석을 지배하는 하는 정도로 몰락했다. 또한 나츠카 마사이에, 미조구치 히데카츠[溝口 秀勝] 등 유능한 가신들도 곧바로 히데요시 자신의 가신단에 편입시키는 등 니와 씨의 명운은 나가히데의 생각과는 반대로 히데요시에게 유린된 감이 있다.

  1. 그 가문의 재상 [본문으로]
  2. 京都御馬揃え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