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재판火起請

일본사 이것저것 2024. 2. 29. 15:16 Posted by 발해지랑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郷의 고향으로 유명한 일본 가모우군蒲生郡 히노日野에서 1619년 하나의 재판이 행해짐.

 

히노 산日野山의 이용을 두고 동측 9개 마을과 서측 9개 마을이 오랫동안 다툼. 오랫동안 다투다 보니 권리관계가 꼬이고 꼬였는지 에도 막부江戸幕府도 어떻게 확정을 짓지 못한 듯 다툼의 시간만 흐름.

 

이때 서쪽 마을 측의 카쿠베에角兵衛라는 사람이 한 제안을 함.

 

그것은 불재판火起請.

불에 달군 철편을 들어 화상이 적은 쪽이 승자, 심한 쪽이 패자가 되는 것.

신이 굽어 살피어 죄가 있는 쪽에 화상을 더 많이 입게 한다는 논리.

 

'카쿠베에'라는 인물은 서쪽 마을 사람들이 먹여 살리고 있던 낭인이었다 함. 나름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던 이 사람은 불재판 제안뿐만아니라 서쪽 마을에 은혜를 입었다며 스스로 서쪽 마을의 대표로 철편 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함.

 

이 제안이 동쪽 마을에 전해지자 동쪽은 패닉.

거절하면 지들이 권리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신이 보기에 켕기니까 피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으니. 그러나 졸라 겁나서 우짜나~ 하던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한다며 손을 듬.

 

그러나 서쪽과 동쪽이 불재판에 관해 이러저러한 교섭하던 중에 서쪽이 동쪽의 촌장庄屋 중 하나인 키스케喜助에게 겁쟁이라는 소리를 했나 봄. 키스케는 분노하여 자신이 한다고 하여 동쪽 대표로 촌장 키스케가 대표로 나섬.

 

재판당일.

에도 막부에서 심판으로 파견된 무사들의 입회하에 불재판이 행해짐.

 

도가니에서 도끼 모양을 한 철편을 빨갛게 될 때까지 달구고 그걸 도가니에서 약 9미터 앞에 있는 선반에 올려 놓는 것.

 

, 부정을 막기 위해 서쪽이 가져온 철편은 동쪽이, 동쪽이 가져온 철편은 서쪽이 들기로 함.

 

서쪽의 카쿠베에, 동쪽의 키스케 둘 다 새하얀 옷을 입고 준비.

특히 동쪽 키스케의 모친은 아들이 병신짓을 하면 그자리에서 죽이겠다며 언월도를 들고 옆에서 지켜봄.

 

시작 소리가 울림.

 

동쪽 키스케는 들고서는 달려나갔으나 역시 너무나 뜨거웠는지 약 5.5미터 정도 갔을 때 선반을 향해 도끼를 내던짐. 너무 달궈졌던지 나무로 된 선반이 타서 구멍이 뚫릴 정도 였다 함.

 

제안자이기도 했던 서쪽 카쿠베에는 너무나 뜨거웠는지 들자마자 떨굼. 한발자욱도 떼지 못한 채.

 

도끼를 떨군채 눈치만 보던 카쿠베에는 곧바로 도망치려했으나 막부의 무사들이 붙잡음. 다음 날 카쿠베에는 조리돌림 당한 뒤 십자가형에 쳐해짐.

 

후에 조사한 바로는,

카쿠베에는 불에 달구면 빨갛게 되긴 하는데 그다지 뜨거워지지 않는 철편을 준비했으나, 당일 공정을 위해 바꾸게 된 것이 패착.

 

그리하여 히노산은 동쪽 9개 마을의 소유가 되었고, 키스케는 넓은 땅을 얻을 수 있었으며 키스케 보다 먼저 입후보 했던 사람에게도 작지만 역시 땅을 얻었다고 함.

 

일본 신의 재판의 역사日本神判史, 시미즈 카츠유키清水克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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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리尾張의 한 마을에 진베에甚兵衛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옆 마을에 사스케左介라는 사람이 삼. 둘은 친구였음.

 

근데 진베에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 날 밤에 사스케가 진베에의 집에 물건 훔치러 감. 그러다 진베에의 부인이 잠에서 깨서 싸움을 벌임. 진베에의 부인이 더 쎘는지 사스케 도망. 도망치다 사스케는 칼집을 진베에의 부인에게 빼앗김.

 

진베에 측은 칼집이란 증거를 가지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관청에 신고를 했지만, 하필 사스케는 노부나가의 젖형제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의 부하였음.

(노부나가는 애기 때 이빨질이 심해서 유모의 유두를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츠네오키 모친에게만은 얌전히 젖을 빨았다 함)

 

어찌보면 친형제보다 더 대우받는 젖형제이다 보니 노부나가의 부하들도 츠네오키에게 일해라절해라 하질 못함.

 

결국 불재판하기로 함.

노부나가의 부하들의 입회하에 양측의 인원들이 모여서 불재판을 행하여 사스케가 짐. 그러나 이케다 츠네오키 무리가 사스케를 감싸며 소란을 부림.

 

이렇게 소란이 나자 매사냥 나갔다 돌아오던 노부나가가 이들을 보고 시끌시끌하니 들림.

 

뭔 일인데 서로 활과 창에 갑옷까지 입고 소란인고?

하며, 양측의 주장을 들음.

 

노부나가 안색 변함.

 

불재판을 어떻게 했냐? 철편은 어느 정도 달구었나? 똑같이 달구어라.

 

내가 이 달구어진 철편을 들고 똑같이 할 것이고 그렇게 내가 성공하면 저 사스케는 내 맘대로 할 것이다.

 

라고 하고서는 빨갛게 달구어진 철편을 들고 3보 걸어 선반에 올려놓고는,

 

보았느냐!

 

라 외치고는 사스케를 죽임.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卷首 불재판 행하신 것에 대해火起請御取候事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姫=토미코[富子]]와 결혼하였다. 둘 다 재혼이었다. 테루마사의 첫 번째 부인은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전사한 셋츠[摂津] 이바라키 성[茨城城] 성주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딸이었다.

 토쿠히메의 전 남편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였으나,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후 몰락하여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돌아와 있었다. 결혼은 히데요시[秀吉]가 선 중매였지만, 이에야스의 사위라는 조건이 테루마사의 출세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전쟁터에서 공명을 다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이렇게 빈정댄 적이 있었다.
 “산사에몬[산사에몬[三左衛門=테루마사]이 지금은 거대한 영지의 영주로 출세했지만 그건 오로지 그의 ‘거시기’ 덕분이다. 창 한 자루로 이렇게 출세한 나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지”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테루마사는,
 “확실히 나는 ‘거시기’로 이렇게 출세했지. 만약 창까지 사용했다면 천하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창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야”
 하고 웃으며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인이 이에야스의 딸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신경 썼었던 듯 하다.
 토쿠히메를 따라서 이케다 가문[池田家]에 온 늙은 시녀[老女]가 어느 날 테루마사 부부 앞에서,
 “우리 가문이 이렇게 번영한 것도 토쿠히메 님 덕분이옵죠”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얼굴색을 확 바꾸며,
 “내가 공적을 세웠기에 부인도 우리 가문에 시집온 것이며 영지도 더 하사 받은 것이다.”
 고 말하며 평소와는 달리 엄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이는 테루마사가 연극한 것이다. 그 후 은밀히 그 늙은 시녀를 불러서는,
 “사실 말하자면 우리 가문의 영달은 자네 말마따나 토쿠히메 덕분이지. 그러나 그걸 대놓고 말하면 부인이 기어오를지도 몰라. 앞으로도 부인 앞에서는 그러한 말은 자제해 주기 바라네”
 하고 부탁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키가 작았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날 제후가 열석한 주연(酒宴)에서 테루마사는 왜소한 키에 대해서 비웃음 당한 적이 있다. 그러자 테루마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내 왜무(矮舞)라고 새로 만든 춤과 노래가 있으니 한번 들어보시오”
 라고 말하며 일어서 박수를 치며,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아와지[淡路][각주:1]라는 세 지역[国]의 주인이기에 키 따위 바라지도 않으니…”
 하고 부채를 펼치고, 몸과 손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테루마사는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둘째 아들로 키요스 성[清洲城]에 있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저택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 츠네오키의 전력(戰歷)은 혁혁한 것이었다.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세운 공적으로 한 부대의 부대장[侍大将]가 되었고, 계속해서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정벌[朝倉征伐], 오우미[近江]의 오다니 성[小谷城] 공략,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등에 출진하였다.

 테루마사의 데뷔전은 1580년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공략이었다. 16세인 테루마사는 부친이나 형과 함께 셋츠 하나쿠마 성[花隈城]을 공성하였는데 이케다 부자(父子)의 활약은 눈부셔, 공략이 끝난 후 노부나가는 츠네오키에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영지를[각주:2], 장남 모토스케[元助]에게 이타미 성[伊丹城], 테루마사에게는 아마가사키 성[尼崎城][각주:3]을 하사하였다. 노부나가가 츠네오키에게 내린 표창장에서 테루마사에 대해 언급하길,

나이 16살에 불과하면서도 적진에 돌격하여 큰 무용을 자랑하니, 이는 정말 이케다 키이노카미[池田 紀伊守=츠네오키] 자네의 아들 답네. 내가 눈 여겨본 것이 틀리지 않아 기쁘며, 세운 공적 또한 비할 대 없도다
 고까지 말하며 격찬하였다.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이케다 부자는 히데요시 편에 서지만, 부친과 형은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와 싸운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전사하였다. 히데요시는 특별히 테루마사의 조모 요우토쿠인[養徳院][각주:4]에게 편지를 보내어, 츠네오키와 모토스케의 죽음을 위로하며 남겨진 테루마사를 포함한 아들들을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사위로 토쿠가와 진영에 접근하였고 곧바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테루마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격렬한 공적 다툼을 벌인다. 이해의 7월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5]에 나섰던 이에야스는 시모츠케[下野] 오야마[小山]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거병소식을 듣고 급거 철군하여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때 선봉에 선택된 것이 테루마사와 마사노리였다.

 우선 목표로 한 것은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노부나가의 손자]가 지키는 기후 성[岐阜城]이었다. 주공의 대장은 마사노리, 조공은 테루마사로 정해졌다.
 8월24일. 전투가 시작되어 기소가와 강[木曽川]을 도하한 테루마사 휘하 7천의 병사는 성 밖 엔마 당[閻魔堂]에 포진한 오다의 군세를 습격하여 수급 700을 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주공인 후쿠시마의 군세는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 테루마사의 공적이 한발 앞서나가자 마사노리는 화가 났다. 왜냐면 공격은 동시에 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마사노리의 분노를 느낀 다른 장수들이 테루마사를 설득하여 다음 날 공성전에서는 마사노리가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테루마사는 그 약속을 어기고 앞서나가려 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내며 결국 테루마사가 나아가려는 길에 불을 질러 진로를 막았다. 이 양자의 공적 다툼은 낙성된 뒤에도 이어져 어느 쪽이 먼저 성에 진입하였는가에 대해서 서로 자기네가 먼저라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아, 마사노리는 테루마사를 죽인다고 까지 말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당신은 이에야스의 사위잖소’라며 독전관[軍監]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말에 테루마사는 깨끗이 공을 마사노리에게 양보했다고도 하며, 양자가 동시에 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했다는 말도 있다.[각주:6]

 테루마사는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에서는 그다지 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이 기후 성 공성에서 세운 공적으로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에서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 52만석이라는 대봉(大封)을 하사 받아, 이곳에 후세까지 명성이 자자한 히메지 성[姫路城] 축성을 개시하였다.
히메지 성은 모우리[毛利], 시마즈[島津] 등 서국(西国]의 토자마다이묘우[外様大名] 감시와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위압하기 위해 무엇보다 웅대하게 만들어졌다.

재능있는 낭인(浪人)을 고용하여 자가(自家)의 강군(强軍)을 꾀했지만 그로 인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각주:7]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를 고용하여 그의 옛 주가인 쿠로다 가문[黒田家]은 물론 막부(幕府)에서도 클레임이 왔지만 테루마사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565년 생. 1584년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 성주[각주:8]. 1590년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만2천석으로 옮겼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메지[姫路]를 하사받았다. 1613년 1월 27일 죽었다. 49세.

  1. 이상 테루마사의 영지. [본문으로]
  2. 거성은 아리오카 성[有岡城]. [본문으로]
  3. 그냥 표창장[感状]만 받았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노부나가의 유모(乳母). 고귀한 집안은 젖물리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아기 때의 노부나가는 다른 유모의 젖꼭지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지만 테루마사의 조모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의 젖꼭지는 물어 뜯는 일 없이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요우토쿠인은 후에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의 측실이 된다. [본문으로]
  5.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6. 테루마사는 5년간 기후 성[岐阜城]의 성주였다. 때문에 마사노리 보다는 성 공격이 수월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7. 대신 그만큼 절약하여 부인 토쿠히메[督姫]가 놀이개를 갖는 것도 금지했으며, 아이들에게도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1585년엔 기후 성[岐阜城] 성주. [본문으로]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613 1 25일 병사 50

1564 ~ 1613.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형제(乳兄弟)[각주:1]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아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부친이 죽는 바람에 오오가키[大垣]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하리마[播磨] 하사받아, 히메지 성[姫路城]를 쌓았다. 후에 '서국 쇼우군[西 ][각주:2] 이라는 이명(異名)을 얻었다.









히메지 백만석


 이케다 테루마사의 할머니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이 오다 노부나가의 유모(乳母)였던 연()도 있어 테루마사는 어려서부터 노부나가를 가까이서 섬겼다. 노부나가가 죽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중용(重用)받아 히데요시는 테루마사를 양자(養子)로 삼는다는 약속도 하였다[각주:3]. 그러나 나가쿠테의 전투에서 부친 츠네오키와 형인 요시스케[之助]가 전사한 후에는 이케다 가[池田]를 상속하여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 2천 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94 8월.
 테루마사는 히데요시의 중매로 토쿠가와 이에야[
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姬][각주:4]를 후처로 맞이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이에야스 편에 섰고, 공을 세워 하리마 52 1천 석이라는 큰 영토를 하사받아 히메지성에 입성했다. 입국한 다음 해인 1601년부터 성을 개축(改築)하기 시작하여, 1609년에 한 층 더 호화장대(豪華壯大)한 성곽이 완성되었다.


 가정면에서도 토쿠히메와의 사이에 5명의 남자아이가 탄생. 전처(前妻)의 아들인 장남 토시타카[利隆]는 둘째 치더라도 2남 타다츠구[継]는 다섯 살 때 외할아버지인 이에야스에게서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 28 6천 석을 하사 받았을 뿐만 아니라, 3남 이하에게도 아와지[淡路], 하리마 안에 각각 영토를 하사받았기에 그런 영지들을 합쳐서 '히메지 백만석', '서국 쇼우군' 등으로 불렸다. 너무 과한 대우에 이에야스의 적남(嫡男) 히데타다[秀忠]가 질투하여,
 “
아예 테루마사에게 천하를 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라고 삐쳤을 정도였다.


 사위와 장인이 되어서부터 급속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관계가 깊어진 테루마사이지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은혜를 잊는 일 없이 어린 히데요리에 대한 배려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누나가 칸파쿠[白] 히데츠구[秀次]의 정부인이라는 것도 있어 토요토미 가문과는 깊은 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히데요리가 니죠우 성[
二条城]에서 이에야스와 만났을 때도 옛 토요토미 가의 무장들과 함께 히데요리를 경호(警護)했으며, 1602년 정월 궁궐에 신년인사를 할 때도 테루마사는 히데요리를 대리해서 입궐하였다.


성내에 이변(異變)이 일어나다.


 1609 5월.

 천수각(天守閣)을 완성했을 때부터 히메지 성 안에서 이변이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
천수각의 한 방에서 17~8살 정도의 시녀가 12히토에[単][각주:5]를 입고 홀로 촛불을 들고는 혼자서 앉아있었다. 젊은 사무라이가 이상히 여겨 가까이 다가가자 빗을 건내 주었다. 그 빗은 천수각의 갑옷 상자 안[각주:6]에 있던 것이었다.'


 '심야(深夜). 맹인(盲人)이 나타나서 들고 있던 비파의 통을 열어보라고 하였다. 젊은 사무라이가 열어보려고 하자 맹인은 키가 3미터나 되는 귀신으로 변신해서나는 이 성의 주인이다라고 위협했다'


 같은 해 12 13일. 한 통의 이상한 편지가 성에서 발견되었다.
 보낸이는 '하리마의 주인인 대천신(大天神) 토우센보우()' '수도(首都) 니죠우[二条]의 센마츠'이며, 받은이는 테루마사와 토쿠히메 부부로 되어 있는 것으로 50~60장에 이르는 협박문이었다. 내용은,

토오토우미[遠江]의 요린보우라는 대천신(大天神)이 큐우린보우라는 천신(天神)을 꼬셔서 테루마사 부부를 저주하여 죽이려고 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 안에 8층탑을 세우고 호마(護摩)의 비법을 익혀 기도하라.
 
또한 팔층탑안에 넣을 두루마기와 그림은 천축에서 이 나라에 전해진 두통 중 하나를 넣을 것. 한 통은 하리마 동쪽에 사는 유명한 목수인 히하라[
日原]가 몰래 가지고 있다. 호마는 온타케산[御嶽山] 산에 있는 시미즈 사[清水寺], 후나코시산[船越山] 산에 있는 루리 사[瑠璃寺] 등의 고명한 중을 스승으로 삶아 수련할 것.

등의 지시가 쓰여져 있었다. 테루마사는 몸집이 작은 사내였지만 용맹과감하고 침착한 사나이였기에 협박장을 무시했다.


 그러나 1611 12월.
 그는 갑자기 중풍에 걸렸다. 발병 당일. 테루마사는 가신의 집에 방문했다가 갑자기 쓰러져 가마로 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 많은 까마귀들이 날아와 가마에 부딪혔다. 성에서 이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테루마사라도 어쩔 수 없었다.


 타카 군[多可郡] 엔만 사[円満寺]의 묘우카쿠() 아사리에게 악마 퇴치, 국가 수호의 기도를 부탁했다. 37일간 성안에서 술법을 행한 묘우카쿠의 진언(進言)에 따라, 천수의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북동쪽에 팔층탑을 세우는 동시에 오사카베 신사[刑部神社]를 건립하였다. 오사카베 신사는 원래 히메야마[姫山] 산에서 지방신(地方神)을 모시던 신사의 건물을 히데요시가 히메야마 산에 성을 세울 때 산 아래로 옮겼기 때문에 신의 분노를 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테루마사의 중풍은 일시 회복했다. 성 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다음 해 1월에 재발하여 테루마사는 피를 토했다. 이 때도 수 많은 까마귀가 날아와서 창호지에 부딪혔다. 마당에 죽은 솔개가 두 마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아타고[愛宕][각주:7] 신자인 테루마사는 이 일울 흉한 일이 있을 징조라 생각하여 더욱 병이 깊어졌다. 이에야스가 중풍의 묘약을 보내왔지만 테루마사는 25일 오후. 숨을 거두었다.


 이에야스는,

 "그런가…… 죽었는가. 뭐든지 아타고에게 의존한다고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천하를 노리고 있던 테루마사의 마음 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같은 여인의 젖을 먹고 자란 사이. 높은 집안의 아이는 모친의 젖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젖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유두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다고 하지만 츠네오키의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칸토우[関東]의 토쿠가와 쇼우군[德川 将軍]만큼 권세와 힘이 있다는 뜻에서. [본문으로]
  3. 실제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것은 테루마사의 동생 이케다 나가요시[池田 長吉]. [본문으로]
  4.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 부인이었으나 우지나오의 죽음으로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본문으로]
  5. 귀족 여성의 정복. [본문으로]
  6. 평시에는 열지 못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본문으로]
  7. 일본의 종교인 신도(神道)에서는 불을 막는 신이지만, 신불습합 사상에 따라 불교의 승군지장[勝軍地蔵 – 지장보살의 군신(軍神)일 때의 이름]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1586 5 4일 병사(病死) 52.

생년불명[각주:1] ~ 1586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겨 셋츠() 아리오카(有岡)()의 성주(城主)가 되었다. 후에 모우리(毛利)(),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고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여 도망쳤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시대가 되자, 센노 소우에키(千 宗易)에게 다도(茶道)를 배워, [利休七哲[각주:2]]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의 다인(茶人)이 되었다. (그림은 KOEI의 태합입지전V)






풍류의 자리에 있던 이외의 인물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난 지 1 3개월 정도 지난 1583 9 16.

 아라키 무라시게는 죽은 오다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쿄우토(京都)와 킨키(近畿)의 새로운 패자(覇者)가 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처음으로 개최한 [차 도구 전시회 = 御道具揃]에 참가하였다.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道薰(도우쿤)]이라는 호를 칭하고 있었다. 참가한 면면(面面)을 보면,

구우나이쿄우(宮内卿) 호우인(法印[각주:3])[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

소우에키(센노 리큐우 = 千 利休)

모즈야 소우안(万代屋 宗安)

텐노우지야(天王寺屋[츠다(津田)]소우규우(宗及)

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전부 노부나가의 풍류 취미와 관련된 스키샤(数奇者[각주:4])이며 사도우(茶頭[각주:5])였다.


더구나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케다 쇼우뉴우(勝入)[츠네오키(恒興)],

의사인 토쿠운켄(德雲軒)[야쿠인 젠소우(院 全宗)]

가 있었다. 츠네오키는 노부나가의 유형제(乳兄弟[각주:6])였으며, 토쿠운켄은 산몬(山門[각주:7])이나 조정에 연줄이 있는 승의(僧醫)였기에 둘 다 히데요시의 권력장악에 불가결한 사람들이었다.


 소우규우나 소우에키라는 당대 풍류의 세계를 둘로 나뉘고 있던 다도(茶道)의 거장들과 섞여 무라시게가 내 놓은 것은 [모모지리(桃尻)의 하나이레(花入[각주:8])], 못케이(牧溪)가 그린 걸개 그림인 [범귀회(帰絵)], [효우고(兵庫)의 오오츠보(大壷)] 어느 것이나 이름있는 명물이었다.


 주군(主君)의 복수전이 된 야마사키(山崎)의 싸움에서 이기고, 자기 입으로 일본 통치는 이제부터라고 한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싸움 및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싸움을 이겨 정청(政廳)으로 오오사카(大坂)()과 쿄우토(京都)에 저택을 짓기 시작한 히데요시의 면목을 살리기에 충분한 전시회가 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이상한 것은 이러한 장소에 어째서 무라시게가 있을 수 있었냐는 점이었다.


 무라시게라고 하면 1578 10월.

 혼간지(本願寺)에 딸을 인질로 보내어 법주(法主)인 켄뇨 코우사( 光佐)와 맹약을 맺고서는 주군인 노부나가에게 반역을 한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던가? 그 때문에 거성(居城)에서 쫓겨나 영지(領地)도 잃고 방랑의 몸이 되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런 무라시게가 하필이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히데요시 밑에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확실히 무라시게는 셋츠의 이케다(池田)()의 부하에서 올라 온 토자마(外様[각주:9])의 신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셋츠의 국주(国主)로 발탁시켜 준 노부나가를 가장 중대한 국면에 배반하여 숙적인 혼간지(本願寺)와 모우리(毛利)()의 연합세력으로 달려간 반역자였기에 오다(織田)쪽에게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었을 터였다.


다인(茶人)으로 여생을 보내다.


 당초 여러 방법으로 무라시게의 뜻을 돌릴 방법을 시도했던 노부나가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공격에 전념하였다.

 우선 무라시게에게 가담하고 있던 셋츠 타카츠키(高槻)()의 성주인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과 이바라키(茨木)()의 성주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등을 귀순시킨 후에 무라시게의 거성(居城) 아리오카(有岡)를 포위하였다. 1578 11월부터 10개월간에 걸친 장기 포위전을 전개 하여 다음 해 1579 9 2 무라시게가 처자식을버려둔 채 아리오카성()을 탈출하여 아마가사키(尼崎)()으로 도망치자, 노부나가 군세는 아리오카성을 함락시켜 무라시게의 처자식과 친척 36명을 쿄우토(京都)의 로쿠죠(六条) 강변(河原)에서 처형하였고, 가신(家臣)의 처자식 120여명을 성 아래서 십자가 같은 곳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510여명을 역시 성 아래 4개의 집에 쳐 넣고 불을 질러 죽였다.[立入左京亮入道隆佐記].

 그 비참함엔 구경하던 사람도 눈물을 흘렸고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여서 부처가 이 세상을 창조한 이래로 이러한 일은 없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한다.


 이런 학살이 일어날 즈음. 무라시게는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하나구마(華熊)()으로 피난하였지만 여기도 1580 7월 초 즈음에 오다 세력에게 공격받아 낙성(落城)되자 모우리(毛利)()의 영토로 도망쳤다.자신의 처자식뿐만 아니라 친척, 가신의 처자식마저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와중에 거성(居城)이나 일족(一族), 가신을 계속해서 버려가며 도망친 무라시게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라시게가 주가(主家)인 이케다(池田)()를 쓰러뜨리는 하극상(下剋上)으로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노부나가에게 반역을 일으킨 것은 참언(讒言)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시야마(石山)()[本願寺]을 포위하고 있던 아라키 무라시게의 부대에서 매일 밤마다 작은 배를 이용하여 성()안으로 쌀을 팔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노부나가에게 변명을 하려 했던 무라시게를 측근인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만류하여 어쩔 수 없이 반역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을 안 노부나가의 적남(嫡男) 노부타다(信忠)나 히데요시들이 무라시게를 굉장히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寬政重修諸家譜]


 이 때문인지 혼노우(本能)()의 변 후 머물던 빙고(備後) 오노미치(尾道)에서 다인(茶人)인 츠다 소우규우(津田 宗及)에게 사람을 보내는 등 해서 히데요시에 대한 알선을 의뢰한 듯하다. 히데요시에게서 셋츠인지 이즈미(和泉)에 조그만 영지(領地)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주로 다도(茶道)를 통해 섬겼던 듯하다. 모우리(毛利)()와 관계 개선을 꾀하려 하던 히데요시에게 무라시게라는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1586년에 사카이()에서 죽었다.

 후반생은 하극상으로 몸을 일으켰던 효웅(梟雄)의 이미지와는 먼 일개의 스키샤(数奇者)와 같은 최후였다.

  1. 위키피디아와 KOEI 태합입지전 평전에는 1535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리큐우(=宗易)에게 배운 제자들 중 뛰어난 일곱 제자.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를 지칭함. 아라키 무라시게의 경우 오다 우라쿠사이(織田 有楽斎), 리큐우의 아들인 센노 도우안(千 道安)과 함께 십철(十哲)로 꼽힌다. [본문으로]
  3. 승정의 최고위. [본문으로]
  4. 풍류인(風流人)을 말하나 주로 다인(茶人)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5. 다도(茶道)의 자리에서 리드하던 사람. [본문으로]
  6. 같은 여성의 젖을 먹고 자란 사이. 높은 집안의 아이는 모친의 젖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젖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유모의 유두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지만 츠네오키의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보통은 '절'을 뜻하나 여기서는 히에이산(比叡山) 엔략쿠(延暦)사(寺)를 말함. [본문으로]
  8. 다도할 때 꽃을 꽃아 놓는 도자기. [본문으로]
  9. 대대로 섬긴 가문 아닌 새로 부하가 된 가문. [본문으로]

모리 나가요시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4. 29. 19:10 Posted by 발해지랑

모리 나가요시( 長可)

1584 4 9 전사 27

1558 ~ 1584.

미노(美濃) 카네야마(金山) 성주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차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타케다(武田)() 공략 등에서 전공을 세워 [오니무사시(鬼武蔵)[각주:1]]라 불리었으나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 전사. 혼노우(本能)()의 변에서 전사한 노부나가의 코쇼우(小姓[각주:2])모리 란마루(蘭丸), 보우마루(坊丸), 리키마루(力丸)는 동생.









오니무사시(鬼武蔵)의 패사(敗死)


 모리 나가요시는 1570년에 오우미(近江) 우사야마(宇佐山)성에서 전사한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차남이다. 형 요시타카(可隆)도 같은 해에 전사하는 바람에  불과 13세의 나이로 미노(美濃) 카네야마(金)성주가 되었다.

 1582년의 타케다(武田) 공략에서는 선봉대로 출진하여 활약. 북부 시나노(信濃)4군과 카이즈(海津)성을 하사 받았지만 혼노우(本能)()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우에스기(上杉) 공략을 위한 에치고(越後)의 진중에서 퇴각하여 카네야마성으로 돌아왔다.


 1584년 3월 6일.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각주:3])이세(伊勢) 나가시마(長島)성에서 히데요시(秀吉)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 츠타 요시후유(津田 義冬) 3인을 자해시켜 히데요시와 대립할 뜻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부하인 여러 장수들을 성에 모이게 한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 미노 오오가키(大垣)성주)), 모리 나가요시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야스는 재빨리 구원에 응해 13일에는 키요스(淸須)성에 도착. 노부카츠와 회견하였다.


 한편 이케다 츠네오키, 모리 나가요시에 대해서는 히데요시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설득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츠네오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젖형제[각주:4]이기도 하기에 오다 가문을 선택해야 하나, 한창 커가는 히데요시 측에 서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가로놓였다.


 전쟁의 시작은 북부 이세에서 시작되었는데 히데요시는 미노 지방에 대해여 설득 공작을 계속함과 동시에 3 11일에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각주:5])를 대장으로 한 1 7천의 군세를 오우미(近江) 나가하라(永原)에 배치하여 미노 방면에 압박을 가했다.


 13일.

 결단에 몰린 츠네오키는 예전 자신의 성이기도 했던 노부카츠 쪽의 이누야마(犬山)성을 탈취하는 형태로 히데요시의 편임을 알렸다. 츠네오키의 사위이기도 한 모리 나가요시도 이것에 응하는 형태로 최전선인 하구로(羽黑) 하치만(八幡)산으로 진출했다. 한편 이에야스는 코마키(小牧)산에 올라, 17일에는 나가요시를 기습하여 이누야마로 패주시켰다.


 히데요시가 이누야마에 도착한 것은 27일이었다.

 히데요시는 더욱 전진하여 라쿠덴(樂田)에 본진을 두었으며 코마키산의 이에야스-노부카츠군과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츠네오키가 제안한 것이 별동대를 이끌고 이에야스의 본거지 미카와(三河)의 빈집을 터는 작전이었다. 이누야마성 탈취로 이미 전공을 세운 츠네오키가 새로이 도박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 하치만 산에서 일패도지한 나가요시의 강한 희망에 위한 것이라도 한다.


 작전은 4 6일 밤중에 행해졌다.

 선봉은 이케다 츠네오키, 2번대는 모리 나가요시, 3번대는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 4번대가 총대장인 미요시 히데츠구였다. 덧붙여 히데츠구도 츠네오키의 사위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재빨리 탐지한 이에야스는 8 은밀히 주력을 이끌고 추격하여 9일 오전부터 각 부대를하나씩 각개 격파했다. 후속부대가 모두 무너져 이케다의 부대와 모리의 부대는 이에야스의 본대까지 달려든 총공격을 당하여 괴멸되었다. 나가요시는 철포에 미간을 뚫려 즉사.

 [오니무사시]의 허무한 최후였다. 향년은 27.


출진 전에 남긴 유언장.


 그러한 일이 있기 전인 3 26일. 나가요시는 유언장을 남겼다.


 1조와 2조는 차도구인 사와히메(沢姫)의 단지, 다이텐모쿠(台天目)를 히데요시에게 진상한다는 내용이다.

3조는 어머니가 히데요시에게 영지(領地)를 얻어 쿄우토(京都)에 살 것, (나가요시의 동생 센마루(千丸))는 계속해서 히데요시에게 머물 것을 권하고 있다.

  4조와 6조도 센과 관련한 것으로 자신의 뒤를 잇지 말 것을 명하며 카네야마(金山)성에는 능력과 충성심이 확실한 무사를 성주로 삼아 달라는 것을 히데요시에게 부탁하며 앞서 말한 것 이외의 목욕 도구나 도(), 와키자시(脇差[각주:6])는 센에게 준다고 하고 있다.

  5조에서는 여성들에게 정실의 친정이기도 한 오오가키(大垣 = 츠네오키의 성)로 피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유언장 말미에는 쿄우토의 혼아미(本阿弥)에게 맡겨놓은 와키자시를 센이 받을 것, 오코우(여동생인지 딸인지는 불명)는 쿄우토의 의사와 같은 쵸우닌(町人)에게 시집갈 것을 희망. 거듭 센이 모리 가문을 상속 받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만에 하나라도 히데요시까지 죽는 패배를 했을 경우 모두 불을 붙여 자살을 강요하는 점에서 전국 시대의 비장감이 흐른다.


 초반의 1조와 2조는 이 편지가 히데요시에게 보여졌을 것을 강하게 의식한 것이겠지만 가족과 관계된 부분은 거짓 없는 마음일 것이다. 나가요시가 자신의 부친이나 형제들처럼 피 냄새 끊기지 않는 센고쿠의 생활에서 가족이 벗어나길 바라는 부분에는 현대인들에도 공감할 것이다.


 나가요시가 죽은 뒤.

 사와히메의 단지는 히데요시의 것이 되어 같은 해(1584) 10 10일 다회(茶會)에서 피로되었다. 한편 아버지와 형 5(혼노우(本能)()의 변에서 전사한 란,보우,리키의 3형재는 센의 형)을 전쟁에서 잃은 센고쿠 시대의 [라이언 일병]인 센은 타다마사(忠政)라 이름 지어져 형의 바램과는 반대로 카네야마 성주가 되었지만, 그 후는 전란을 잘 헤쳐나가 미마사카(美作) 츠야마(津山) 번주(藩主 = 18 6천석)가 되어 1613년에 죽기까지 천수를 누렸다.

  1. 나가요시의 관도명이 무사시노카미(武蔵守)였으며, 가열찬 전장에서의 모습이 귀신과 같다 하여 이러한 별명이 붙었음. [본문으로]
  2. 비서관 역할을 하는 20살 이전의 무사를 말함. [본문으로]
  3.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4. 노부나가는 핏덩이일 때 다른 여인들의 젖꼭지를 물을 뜯는 버릇이 있었으나 츠네오키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빨았다 한다. [본문으로]
  5.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기 전의 이름 [본문으로]
  6. 일본 무사가 차는 두 자루의 칼 중 작은 쪽을 말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