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이에[秀家]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제일의 악모가(惡謀家)로 악명 높았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581년 나오이에가 죽기직전에 당시 오다 가문[織田家]의 쵸우고쿠[中国] 모우리 공략[毛利攻め]을 담당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 히데이에(당시는 하치로우[八郎])의 후사를 부탁하여, 이에 응한 히데요시는 나중에 히데이에를 유자(猶子)[각주:1]로 삼게 된다.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름글자도 히데요시의 ‘히데[秀]’를 하사 받아 하치로우[八郎]에서 히데이에[秀家]로 바뀌었으며, 히데요시 덕분에 관위도 계속해서 승진하였다. 1594년 조선침략 중 공적을 세워 24살의 젊은 나이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임명 받아, ’

비젠

츄우나곤[備前中納言]’으로 칭해질 정도였다.
 결혼 또한 히데요시의 애정이 듬뿍 담긴 것이었다. 부인은 히데요시가 친자식처럼 기른 양녀 고우히메[豪姫 –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딸]였다.
 히데요시의 이러한 히데이에에 대한 애정은 친자식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도 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양자들 중 관백(関白)

히데츠구

[秀次]는 자살을 언도 받았고, 히데아키[秀秋]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내졌지만, 이 히데이에만은 유자의 신분을 계속 보장받았던 것이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병상에 누워서 후사를 부탁한 오대로(五大老)[각주:2]의 면면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도,
 “히데이에는 어렸을 적부터 내 손수 키웠던 사람이기에, 히데요리를 지켜는 것에 있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며 깊은 신뢰를 보냈다.
 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히데이에의 운명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첫 번째 신호는 집안싸움[御家騒動]이었다.
 히데이에는 무장으로서의 자질은 꽤 있었지만, 영지(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

[備中] 절반)를 다스리는 정치능력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히데요시의 과보호 상태에서 성인이 되었기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히데이에의 가신단 중 본거지에 있는 ‘본거지파[国許派]’와 수도권에 올라와 있던 ‘수도권파[上方派]’의 가로(家老)들 사이에 험악한 파벌대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히데이에가 부인인 고우히메 휘하 가신으로

카가

[加賀]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 파견된 나카무라 지로우베에[中村 治郎兵衛][각주:3]를 중용한 것이 본거지파를 자극했다. 그래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공공연히 다툼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히데요시가 죽자 결국 본거지파 가로들의 분노가 폭발, 나카무라를 주살해야 한다면 공공연히 병사를 일으켜 수도권으로 올라온 것이다. 필두가로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坂崎 出羽守]][각주:4], 토가와 히고노카미[戸川 肥後守][각주:5],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각주:6] 등이었다. 하지만 나카무라를 아낀 히데이에가 나카무라를 카가로 도망치게 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쿄우노스케 들은 이번엔 주군이 적이라며,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문 저택 앞에 바리케이트[逆茂木]를 치고 화톳불을 피워 전투준비를 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시가전으로 발전할 듯 하였으나,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의 중재로 전투는 회피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커 우키타 가문의 본거지파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활약하게 된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히데이에는 서군의 부사령관 격으로 1만7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결전의 이틀 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는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군 제장들의 동요하는 모습에 한탄하면서도, ‘그 와중에 우키타 히데이에는 목숨을 던질 각오로 있는 것이 든든하다’고 적었는데, 태합(太閤)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히데이에의 성실함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초반의 활약은 훌륭했다. 아카시 타케노리[明石 全登][각주:7]가 이끈 우키타 군[宇喜多軍]은 용맹으로 이름을 떨치는 동군(東軍)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서군은 패했다. 히데이에는 전쟁터에서 후퇴, 해로(海路)를 타고 사츠마[薩摩]까지 잠행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끝까지 숨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당한다.
 이후 이 섬에서 살길 50년, 1655년 84세에 죽었다고 한다. 그 사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는 멸망하였고, 토쿠가와 쇼우군[徳川将軍]도 4대 이에츠구[家継]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1572년생. 히데요시[秀吉] 휘하로 시코쿠 정벌[四国征伐]
[각주:8],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조선의 역[朝鮮の役][각주:11]에 종군하였다. 전성기 때는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절반, 하리마[播磨] 일부를 합쳐 총 57만4천석을 영유했다.

 

  1. 양자와 같은 개념이나 양아비의 성(姓)과 재산을 상속받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3.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4와 5편에 등장하는 인물. [본문으로]
  4. 우키타 아키이에[宇喜多 詮家]. 히데이에와는 사촌지간(각각 아비가 형제) [본문으로]
  5. 토가와 타츠야스[戸川 達安]. [본문으로]
  6. 하나부사 마사나리[花房 正成] [본문으로]
  7.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豊臣家の人々]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5와 6편에 등장하는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을 말함. [본문으로]
  8. 1585년 행해진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羽柴秀長]의 시코쿠[四国] 침공.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합쳐 일본에선 이렇게도 부른다. [본문으로]

 모략으로 점철된 센고쿠 시대라 하여도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정도의 음모가는 드물다.

 그가 어렸을 적의 에피소드로 이런 것이 있다.
 나오이에는 백치와 같았다 한다. 동생 타다이에[忠家]는 똑똑했기에, 모두 형인 나오이에를 바보취급하고 동생을 칭찬하였다. 단 한 명 우라가미 가문[浦上家][각주:1]의 가로인 잇칸 노인[一閑老人]만이 "그렇지 않다. 나오이에는 마음 속 깊이 큰 뜻을 품고 있기에 보통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나오이에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일부러 바보 흉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동생 타다이에는 나오이에가 죽자, "형만큼이나 무서운 인물은 없었다. 날 귀여워해주었지만 형과 만날 때는 반드시 옷 안에 사슬갑옷[鎖帷子]을 입고 조심하였다"하고 술회하였다.

 
 대충 나오이에 모략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주군인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 宗景]를 국외 추방한 후 그의 영지(領地)를 빼앗았다. 거기에 미마사카[美作], 빗츄우[備中]의 실력자 미무라 이에치카[三村 家親]를 철포로 암살, 그와 친하다는 이유로 장인 나카야마 노부마사[中山 信正]를 독살하였다. 이때 장인의 유언을 위작하여 그의 땅을 손에 넣었다. 고토우 미마사카노카미[後藤 美作守]에게는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낸 후 독살하였고, 이 직후 매형인 타니카와 히사타카[谷川 久隆]도 같은 수단으로 죽였다. 이렇게 악랄한 수단으로 결국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와 빗츄우[備中] 일부를 수중에 넣은 것이다.

 1577년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츄우고쿠[国] 공략이 시작되어 모우리 가문[毛利家]와의 사이에서 치열한 항쟁이 전개되자 나오이에의 정절 없는 기회주의자적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항상 이기는 편에 붙는다. 그러기 위해서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도록 손을 쓴다"
 
이것이 그의 모토였다.

 1577년 12월 나오이에의 가신 코우즈키 쥬로우[上月 十郎]가 지키던 코우즈키 성[上月城]이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함락당하자 곧바로 오다 노부타다[織田 信忠 – 노부나가의 적자]에게 "앞으로 오다 측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예전과 마찬가지로 모우리 가문과도 끈을 놓지 않아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를 설득하여 코우즈키 성 탈환을 꾀했다. 거기에 교활하게도 이 전투에는 병을 칭하며 출진하지 않고 승리 소식을 듣자 그제서야 기어나와 킷카와-코바야카와 양 진영에 인사를 한 것이다.

 나오이에의 계략은 이로 끝나지 않았다. 모우리의 두 장수에게 "쿄우토[京都]로 진격하신다면 제가 선봉이 되겠습니다. 또한 귀국하신다면 제 영내(領內)에 잔치를 열겠으니 꼭 참석해 주시길"고 하였다.

 이 뒤편에는 나오이에의 무서운 간계가 숨어있었다.

 쿄우토로 진격한다면 그대로 따라가겠지만,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성안에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두 장수를 죽이고 그 목을 들고 오다 측으로 배신하겠다는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략은 모우리 측에게 그 내막이 알려져 버렸다. 킷카와 모토하루는 더 이상 나오이에를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 이후 그는 오다 측으로 넘어갈 결심을 굳히고 인질로 세자 하치로우(후의 히데이에[秀家])를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1581년 11월 나오이에는 병상에 누웠고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자, 히데요시를 한번 보고 싶다고 부탁을 하였다. 나오이에 최후의 연기였다. 머리맡에 있는 히데요시에게 임종이 가깝다는 것을 고한 후,

 "인질로 받친 하치로우를 생각하면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부디 하치로우의 뒤를 잘 돌보아 주셨으면 해서…"

 하고 애원했다. 인정에 약한 히데요시는 다 죽어가는 나오이에의 탄원에 넘어가 그의 유언을 지켜 히데이에(하치로우)를 유자(猶子)[각주:2]로 키워 후에 오대로(五大老)까지 만들어 주었다.

 여담으로 일설에 따르면 나오이에의 병은 매독으로 남 앞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추하게 부었다고 한다.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비젠[備前]의 슈고[守護] 아카마츠 씨[赤松氏]의 슈고다이[守護代]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 宗景]의 가신이었지만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지원으로 주군을 멸하고, 이어서 미마사카[美作]를 공략하여 모우리 씨의 휘하가 되었지만,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히데요시[秀吉]가 츄우고쿠[国]에 진출하자 오다[織田] 측에 붙었다. 1582년 2월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53세였다고 한다.

  1. 당시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주가. [본문으로]
  2. 양자와 비슷하나, 성까지 따를 필요는 없는 부자관계. [본문으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 秀家]

1655 11 20일 병사 84.

1572~1655.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적자(嫡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섬기며 천하통일에 공헌. 분로쿠의 역[文禄の役][각주:1] 케이쵸우의 역[慶長の役][각주:2] 공을 세워 오대로(五大老)[각주:3] 사람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의 주력이었다. 그러나 패하여 사츠마[薩摩] 도망 가지만 후에 잡혀서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 유배당했다.









영광에서 좌절로


 우키타 나오이에는 센고쿠[戦国] 효웅(梟雄)으로 공포의 대상이었 우키타 나오이에의 세자(世子), 1572년에 비젠[備前]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태어났다.
 시대는
신흥세력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선봉으로 하리마[播磨]로 진출해 온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세력과 츄우고쿠[中国]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패권을 놓고 싸우던 시기였기에, 그 사이에 낀 우키타 씨()는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 하던 때였다. 결과적으론 히데요시 쪽에 붙게 되어 히데이에는 불과 10살의 나이로 히데요시를 후견인 삼아 가독(家督)을 상속하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이름 중 한 글자를 얻어서 지은 '히데이에[秀家]'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그의 일생은 토요토미 씨()의 번영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연표(年表)처럼 그의 영달 과정을 적어보면,

  1. 1585(13). 시코쿠[国]의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와의 전쟁에서 데뷔 전을 장식했다.

  2. 1587(15).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 씨[島津氏]와의 전쟁에 종군하였고 그 싸움이 끝난 후에는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에 서임(敍任).

  3. 1589년(17세). 카가[加賀] 카나자와 성[金沢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넷째 딸로 어려서부터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어 있던 고우히메[豪姫]와 결혼.

  4. 1594(22). 분로쿠의 침공[각주:4] 때. 6군의 주장(主將)으로 바다를 건너 벽제관의 싸움에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등과 함께 명나라의 장수 이 여송군을 대파하였다. 이 때의 공적으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서임.

 식으로 항상 토요토미 정권을 지탱하는 중신으로 활약하여, 히데요시에게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을 때는 아직 26세의 청년 다이묘우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히데이에의 영광은 지속되지 않았다.


 1600 9월.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히데이에는 당연히 서군(西軍)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1 6천 여라는 최대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방관을 하던 장수들이 많은 서군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서군이 패배함에 따라 히데이에는 명예나 지위를 모두 잃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히데이에는 미노[美濃] 카스카와[粕川] 골짜기에서 이틀간 떠돈 끝에 패잔병을 노리는 노부시[野武士][각주:5] 무리에게 포위 당하지만, 두목인 야노 고로우자에몬[矢野 左衛門]은 히데이에의 인품에 반하여 반대로 히데이에 일행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우키타 가의 가보(家寶)이며 히데이에가 차고 다니던 쿠니츠구[次]의 긴 칼[太刀]을 고로우자에몬이 토쿠가와 쪽에 바쳐서 히데이에가 죽었다고 위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엄중한 탐색을 피하면서 시간을 번 일행은 고난의 도피행 끝에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저택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처()인 고우히메와의 재회를 기뻐할 틈도 없이 히데이에 일행은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의지하여 도망쳤다.


종언의 땅,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


 히데이에 주종(主從) 오오스미[大隈] 키모츠키 군[肝属郡] 타루미[垂水]의 호족인 히라노 씨[平野氏]의 집에 숨겨졌다.


 그 후 1603 9월.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각주:6]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각주:7]의 조명탄원(助命嘆願) 덕분에 사형을 면한 히데이에는 스루가[駿河] 쿠노우 산[久能山]에 유폐(幽閉)되었, 그 후 3년 뒤인 1606 4 적자(嫡子)인 히데타카[秀高], 가신(家臣) 12명과 함께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당시 히데이에 34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큐우후쿠[休福]'란 호()를 칭하고 있었는데 이 때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한때 50만석 넘게 영유[각주:8]하고 있던 비젠[備前] 태수(太守)였기에 섬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섬의 대관[代官][각주:9]인 키쿠치 사콘[菊池 左近]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처() 고우히메의 친정 마에다 가문에서는 1614 이후 1년 터울로 생활물자가 보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여 섬사람들에게 보리 빌리지 못하면 생활할 없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패군의 장수가 되었을 죽음을 선택했다면 이러한 고생도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이에가 유배생활을 50년이나 계속할 있었던 것은, 산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고 담담히 살고자 하는 인생철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655
11 24일. 84세로 사거(死去)했다.

하치죠우지마 섬[八丈島]에 있는 히데이에의 묘.

  1. 임진왜란. [본문으로]
  2. 정유재란.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5. 무장 농민집단. [본문으로]
  6.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로 사츠마번[薩摩藩]의 초대 번주(藩主). [본문으로]
  7. 토시이에[利家]의 첫째 아들로 히데이에의 부인 고우히메[豪姫]의 오빠. 카가 번[加賀藩] 초대 번주. [본문으로]
  8. 약 54만 7천석. [본문으로]
  9. 섬의 지방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