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와라 평정(小田原の役[각주:1]) 때 히데요시(秀吉)는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무공(武功)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시하루는 내가 토우키치로우(藤吉
)라고 불리던 아주 옛날부터의 부하로 나와 함께 수 많은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 무용은 일기당천으로 미나모토노 요리미츠(源 光)[각주:2]의 사천왕(四天王)에 필적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아자이(井) 공략에서는 적의 척후를 잡아 죽였으며, 나가시노 전투(長篠のい)에서는 2개의 수급을 취했다. 츄우고쿠(中) 모우리(毛利) 공략에서는 몸에 13군데의 상처를 입을 정도로 분전하였다. 아케치 토벌전(明智討伐戰)인 야마자키 전투(山崎合),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친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 등 요시하루의 무명(武名)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높아져 갔다.

 평소의 요시하루는 온화하였고 용모도 얼핏 보기에는 아녀자와 같이 부드러워 [부처님 모스케(茂助)]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랬던 사람이 막상 전쟁터에 나가면 180도 바뀌어 악마와 같이 활약을 하는 것이다.
 1576년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 光秀)의 영지(領地) 탄바(丹波)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등 총 3만여가 지원군으로 참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요시하루의 부대는 실로 수급 36급을 거두었으며 더구나 그 중 3급은 요시하루가 직접 벤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건 정말 '부처님 모스케'에 어울리지 않는 활약이구나. 앞으로는 '악마 모스케(鬼茂助)'라고 불러야겠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평소의 요시하루는 정말 얌전하였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싸울 때는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다와라 평정 때의 일이다.
 야마나카 성(山中城[각주:3]) 공성에 참가한 요시하루는 성을 공격하기에 최적의 위치를 발견하고는 진을 쳤다. 그러자 동료인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가 그것을 보고 칸파쿠(
白) 히데츠구(秀次)에게 부탁하여 요시하루의 장소를 이동시키고 카즈우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아니나다를까 나카무라 카즈우지가 야마나카 성에 제일 먼저 진입(一番り)하는 공적을 세운 것이다[각주:4].
 화를 억누를 수 없는 요시하루는 히데츠구 앞에 나아가 장소 교체에 따른 분노를 말을 가리지 않고 표출하였다.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가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고 눈을 치켜 뜨며 나중에는 칼자루에 손을 댈 정도였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접근하였다. 1599년 사대로(四大老), 다섯 행정관(五奉行)의 대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와 이에야스의 사이가 험악해지자 그 중간에 서서 양측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여 일단 큰일로 번지게 하지 않게 하였다. 그 공적에 보답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은거료(隱居料)로 하라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청하여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 5만석을 주도록 만들었다. 이때 본거지인 하마마츠(浜松) 12만석을 아들인 타다우지(忠氏)에게 물려주었다.

 1600년 7월. 세키가하라 전투(ヶ原合)가 막 일어나려고 할 즈음 요시하루는 하마마츠를 출발하여 새로 얻은 영지인 에치젠으로 향하였는데 그 도중 자객의 습격을 받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미카와(三河) 치리우(池鯉鮒=현재는 치류우(
知立))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부터 알고 지내던 카가노이 시게모치(加々野井 重望[각주:5]그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친했다) 만나 함께 요시하루의 친구인 미카와(三河) 카리야(刈屋) 성주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에게 들렸고 타다시게는 그들을 위해 주연을 열었다. 주연이 깊어져 요시하루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카가노이가 칼을 뽑아 타다시게를 베어 죽이며 여세를 몰아 요시하루를 습격한 것이다. 카가노이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자객이었다. 벌떡 일어선 요시하루는 곧바로 응전하여 반대로 카가노이를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소란스런 소리에 급히 달려온 미즈노의 가신들이 피 묻은 칼을 들고 홀로 서 있는 요시하루를 보고, 그가 자신들의 주인과 카가노이 두 사람을 죽였다고 오해하였다[각주:6].
 요시하루는 열심히 설명하였지만 이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요시하루에게 불리했다. 천천히 조여오는 미즈노 가신들의 포위에 요시하루는 촛대를 발로 차 어둡게 하여 그 틈에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각주:7]. 사건은 후에 요시하루의 무죄가 판명되어 이에야스에게서 병문안 편지를 받았다.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1543년생. 통칭 모스케(
茂助)로 이름(諱)은 요시사다(吉定), 요시나오(吉直)라고도 하였다. 와카사(若) 타카하마(高浜)[각주:8],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각주:9] 등의 성주를 거쳐 하마마츠(浜松) 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후에는 아들 타다우지(忠氏)와 함께 이즈모(出雲)의 땅[각주:10]이 주어져 1611년 마츠에(松江)에 성을 축조. 이 해의 6월에 죽었다.

  1. 1590년에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를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 헤이안 시대에 왠지 헤라클레스 급..까지는 아니고 하여튼 전설적인 활약을 펼치는 무사. 그의 이야기는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내 시체를 넘고 가라(俺の屍を超えてゆけ)"에 잘 나타나 있다(...믿으시면 곤란합니다) [본문으로]
  3.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 축성의 진수가 담긴 성이었지만 단 하루 만에 낙성되었다. [본문으로]
  4. 덤으로 요시하루의 경우 옮겨진 구역에서 성을 공격하다 적자 킨스케(金助)가 전사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보통 '加賀井 重望'로 알려져 있다(발음은 동일). 에도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인 [토쿠가와 짓키(徳川実紀)]에 따르면 그는 미츠나리가 아니라 서군(西軍) 호쿠리쿠(北陸) 당담인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 한다...뭐 미츠나리가 서군의 총수격이었으니 그게 그거지만.. [본문으로]
  6. 사족으로 당시의 나이 요시하루 57세. 시게모치의 나이 39. [본문으로]
  7. 칼에 베인 상처가 17군데에 이르러 이후 거동이 불편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코구다카(石高)는 1만 7천석. [본문으로]
  9. 코쿠다카는 4만석. [본문으로]
  10. 23만 5천석으로 보통 24만석으로 칭해진다. 이 호리오 마츠에 번(堀尾松江藩)은 야스하루의 손자 타다하루(忠晴) 때 자식이 없어 끊긴다. [본문으로]

1636년 5월.
토쿠가와 막부 3대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는,
이슬비가 흩날리는 날씨에 센다이 번[仙台藩] 에도 저택[각주:1]으로 발길을 옮겼다.
목적은 병문안이었다.

침실로 안내받은 이에미츠를
잠옷을 걸친 노인이 맞이하였다.
창백한 피부가 이제 노인의 생명이 그리 길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노인은 간신히 등을 등걸이에 기대며, 괴로운 듯이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미츠에게 있어서, 
노인의 오른쪽 눈을 감싸고 있는 안대가 이렇게까지 안스러운 적은 없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와 주셨지만 이러한 몰골이라 창피하옵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완전히 갈라져 그르렁 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편안히.. 편안히.."
이에미츠의 짧은 말에는 깊은 염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목이... 망가졌습니다. 식사조차 목을 넘가가지 않고 목소리도 이런 꼴..."
자조적인 미소를 띠우며 목을 쓰다듬는 노인의 말에 걱정스러운 듯 이에미츠는 노인의 말을 막고 말했다.
"신군 이에야스공은 나의 부친 히데타다의 후사를 부장군에게 맡겼소. 그리고 나의 아버지도 또한 나의 후사를 당신에게 맡겼을 터."
이에미츠는 포동포동한 볼에 보조개를 띄우며 말했다.
"그러니 부장군. 당신의 역활은 나의 은거까지 끝나지 않았을 것이오"
하며, 부드럽게 노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부장군[副将軍]'
이에미츠의 부친이 쇼우군[将軍]일 때부터 노인은 그렇게 불려 왔다.
"자... 눕는 것이 좋겠군"
노인의 귀로 들어오는 이에미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눈이 감기고 곧 기분좋게 잠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1590년 봄.
세 번에 걸친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고 있던 호우죠우[北条]를 멸하기 위해,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20만의 대군과 함께 칸토오(関東)로 왔다.
전년 아시나(蘆名)를 물리쳐 명실공히 오우슈우의 패자가 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히데요시의 이 오다와라 공략전에 지각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늦게 온 마사무네가 청원하는 알현의 청을 무시하고 하코네에 있는 창고에 근신을 명했다.
'원숭이녀석, 나와 만날 생각은 없는 것인가? 그렇다는 것은.... 아버지 때보다 더욱 넓혀진 나의 영토를 전부 쳐먹을 흑심인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마사무네는 겨우 비공식 알현을 허용받았다.
눈아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의자에 앉은 히데요시가 손에 쥔 지팡이로 지면을 가리켰다.
엄숙히 예를 표한 마사무네는 지팡이가 가리킨 곳으로 가 앉았다.
앉아 있는 마사무네의 복장에 열석해 있던 장수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가지런히 늘어뜨렸고, 하얀 마(麻)로 된 겉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죽고 나서 관에 들어갈 때 입는 복장이었다.
'이녀석....'
마사무네는 사자(死者)의 복장으로 히데요시에의 복종을 나타내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강렬히 어필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 호담함에 히데요시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웃어 버렸다면 이 순간, 이 곳에서는 히데요시의 패배인 것이다.
'이겼다.....!'
확신하던 마사무네의 목에 히데요시의 지팡이가 와 닿았다.
"조금 더 늦었더라면 이곳이 위험했단다"
그 시선에는 친근한 원숭이의 얼굴은 사라지고 오히려 쥐와 같은 날카로운 집착심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틀 후...
마사무네는 카타쿠라 코쥬우로우[片倉 小十郎]와 함께 정식으로 알현식을 갖게 되었다.
거실과 같은 곳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 천하의 명장들이 얼굴이 나란히 하고 있었다.

"먼저 번에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너의 오른쪽 눈은 누구에게 주었느냐?"
히데요시는 당당한 마사무네가 왠지 맘에 들지 않았다.
"옛! 추하게 튀어 나왔었기에 뒤에 앉아있는 이 코쥬우로우에게 단도로 찔러 터트리게 했사옵니다."
"찔러 터트리게 했다!?"
제후들은 깜짝 놀랐고 곳곳에서 경탄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히데요시가 할 수 있는 것 이라곤 간신히 코웃음 치는 것 뿐이었다.

"내 듣기에 네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너의 모친은 독을 탄 식사로 널 죽이려 했다고 하더구나. 너는 동생을 베어 죽였다고도 들었다. 이렇게 슬픈 일이 있을 수가.."
이번에는 굉장히 슬픈듯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사무네에게 창피를 주고 싶었다.

"그것은 칸파쿠 전하가 잘못 들으신 것. 어머니는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시험해 본 것입니다. 독이 탄 식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는 다테 가문을 짊어 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동생은 어리석게도 그릇에 손을 대었기에 베어 죽였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이렇게 어머니께 단련받았기에, 지금 이렇게 전하의 앞에서도 겁을 내지 않음이옵니다."
막힘이 없는 차분한 말투였다. 아연해 있던 히데요시는 더 이상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 대결에서 마사무네는 당당히 한판승을 따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슬비가 그치고 태양이 저물기 시작했다.
"부장군, 웃고 있군"
말을 건 이에미츠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부드러웠다.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2]와 만났던 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 과는 다르게 마사무네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타이코우 전하라...... 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도 이제는 없군."
"그러하옵니다. 토요토미 가문 다음은 저의 차례라고 생각했건만 뚜껑이 열어보니 이에야스공. 그렇다면 그 다음이야 말로~ 하고 노렸지만 천하는 쇼우군 부친[각주:3]의 손에. 그리고 지금은 쇼우군 전하. 결국 내 차례를 오지 않는가... 하고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지요.....!! "
"포기.....하고 있었지만....이라고!?"
순간,
이에미츠는 자신의 뒤쪽으로 싸늘한 무언가를 느끼고 마사무네의 침상에서 튀어 물러났다. 어느새 노인이 이에미츠 앞에 위풍당당히 서 있었다.
야규우[柳生][각주:4]에게 교육받은 이에미츠였기에, 단번에 노인의 전신에서 굉장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사무네의 외눈은 생기를 되찾았고 그 모습은 천하를 삼키려 하는 용처럼 당당했다.
.
.
한 순간의 침묵이 오고 간 뒤..
"히데타다님으로부터 부장군이라는 분에 넘치는 직함을 받았습니다만 이제는 그 역할도 더 이상 맡을 수가 없군요"
카카~하고 웃으며, 칼걸이에서 꺼리낌없이 단도를 집어, 이에미츠의 발 앞에 정중히 놓았다.
그리곤 절을 했다.
"이 노인에게 간단히 당할 정도라면 천하는 또 다시 시끄러워진다고 생각했지만 이런이런~ 전하는 역시 야규우의 검호(剣豪)이옵니다. 이제 토쿠가와 쇼우군 가문의 안태는 영원한 것! 이 노친네도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가 있겠군요."

어디까지가 마사무네의 진심이었을까?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이에미츠는 헤아려 보았지만 마사무네의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에 빨려 들어 화 내는 것 조차 잊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부장군도 오래 살아 주시구려"
황급히 침실에서 떠난 것은 역시 공포심에서 일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노인은 큰 소리로 가신들에게 명했다.
"이제는 되었다. 물러가도 좋다 "
마루 사이와 벽 뒤 등 어둠에 숨어 있던 완전 무장한 자객들이 아쉽다는 듯이 자리를 떠 사라졌다.
"목숨을 뺐을 수 있었지만 뺐지 않았다. 늙어서가 아니다! 그 때 천하는 내 손안에 굴러 들어 왔었다. ...그것으로...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침실에서 중얼거리있는 노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아쉽다는 빛이 있었다.

3일 후.
노인은 만족한 웃음을 띤 채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났다.

생몰년; 1567~1636
관위; 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 지쥬우[侍従], 에치젠노카미[越前守], 우코노에쇼우쇼우[右近衛少将],
        므츠노카미[陸奥守], 산기[参議], 곤츄우나곤[権中納言]

  1. 각 번은 참근교대 때의 번주[藩主]나 무사들, 혹은 번주 가족들의 숙소로 에도[江戸]에 저택을 두었다. [본문으로]
  2.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지칭. [본문으로]
  3. 2대 쇼우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본문으로]
  4. 아마도 에도 야규우[江戸柳生]의 창시자 야규우 무네노리[柳生宗矩]를 말하는 듯. [본문으로]

나오에 가네쓰구[直江 兼続]

1619 12 19 병사(病死) 60


1560 ~ 1519.

에치고[越後] 요이타[与板] 성주 히구치 가문[樋口家] 출신.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중신 나오에 씨[直江氏]를 이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섬겨, 죠우다이카로우[城代家老][각주:1]로써 정무을 도맡아 보았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손을 잡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타도를 계획. 그 때에 이에야스에게 보낸 '나오에장[直江状]'은 유명.










굳은 결속으로 맺어진 주종(主從)


 카네츠구[兼続]의 성은 나오에 가문[直江家]에 사위로 들어간 다음부터 성(姓)을 '나오에'라 칭한 것으로, 생가(生家)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태어난 가문인 우에다 나가오 가문[上田 長尾家]의 구신(舊臣)이다.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각주:2]의 사천왕 중의 한 명인 '히구치 지로우 카네미츠[樋口 次郞 兼光]'의 후예로 일컬어지는 나오미네[直峰] 성주 '히구치 이요노카미 카네토요[樋口 伊予守 兼豊]'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요로쿠[与六]라 했다.
 1560
년생으로 어렸을 적부터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의 양자가 된
카게카츠
를 근시(近侍)하였다. 우에스기 켄신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급사했기 때문에 두 명의 양자인 카게카츠[景勝], 카게토라[景虎] 사이에서 후계다툼이 일어났고, 그때 19세의 요로쿠[与六] 5살 연상의 주군 카게카츠를 위해 분투하였다.


 카게카츠의 시대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1582 10월. 후다이[譜代[각주:3]]의 중신으로 요이타[与板] 성주인 '나오에 요헤에 노부츠나[直江 与兵衛 信綱]'가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 있을 때, '모우리 나사에몬 히데히로[毛利 名左衛門 秀広]'의 칼에 죽는 바람에 명문가의 단절을 아쉬워한 카게카츠의 명령에 따라 3살 연상인 노부츠나의 부인[각주:4]에게 장가를 가서 이때부터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가네츠구[直江 山城守 兼続]'라는 이름을 칭하게 된다.


 이후 마지막까지 카게카츠에게 반항하던 아가키타[揚北]의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 重家] 4년의 시간을 들여 멸망시키거나 사도[佐渡]를 평정. 히데요시[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참전하여 호우죠우[北条]의 하치오우지 성[八王子城]을 함락시키는 등 대활약을 펼친다.


 인재 욕심이 많은 히데요시는 그러한 카네츠구에게 반하여, 카게카츠를 에치고[越後]에서 아이즈[会津] 120만석으로 이봉(移封)할 때 그 중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을 배신(陪臣[각주:6])인 카네츠구에게 하사하여 명목상 직신(直臣)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카네츠구는 어디까지나 카게카츠의 신하라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에야스[家康]에게 도전장


 히데요시가 죽은 뒤 잠시 동안은 평화로웠지만 반년이 지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병으로 죽자 오대로(五大老)의 필두 이에야스의 전횡이 눈에 띠게 늘어났다. 카게카츠 - 카네츠구 주종은 신영토 관리라는 이유로 영지 아이즈[会津]로 돌아 와서는 만일을 대비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아이즈 츄우나곤[中納言 - 카게카츠의 관위]에게 모반의 징조'

 라는 고소를 받은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변명과 굴종을 위한 상경을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기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힐문했는데, 카네츠구의 달변에 아무 것도 못하고 돌아 왔다. 이때 사자는 카네츠구의 오랜 친구인 승() 죠우타이[承兌] 카네츠구에게 보낸 서장(書狀)을 지참하고 갔었다. 그 내용은 사자의 힐문 내용을 각 조에 걸쳐서 글로 쓴 것으로 옛 친구를 걱정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에야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쓴 것이라 간파한 카네츠구는 죠우타이[承兌]에게 답서를 썼다. 이것이 후에 [나오에장(直江状)]라 불리는 도전장이다. 하나하나씩 구체적으로 대응한 후에,

참소(讒訴)를 믿고 있는 나이후님[內府様 이에야스의 관위] 옳은지, 상락[上洛 상경(上京)을 뜻함]을 거부하고 있는 카게카츠가 옳은지는 세상의 평판을 기다려 보자

 고 세간의 여론을 들어보자는 태도를 표명한 후에,

, 나이후 사마가 허튼 소리를 받아들여 계속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다. 맹세도 서약도 거기서 끝이다.

 고 대놓고 큰소리를 쳤다. 그야말로 선전포고였다.


우에스기(上杉)()의 존속을 위하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대승(大勝)한 이에야스는 패권을 쥐자 전후 처리에 착수하였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항복을 신청한 후 카게카츠와 함께 다음해 7월 상락한 카네츠구는 이에야스를 만나서,

 "나이후 사마에게 거역한 것은 이 야마시로[山城 = 카네츠구] 혼자서 한 일이오니 마음대로 처분해주시길 바랍니다."

 고 사죄도 하지 않고 당당했다.

 카게츠구의 소령(所領)인 요네자와[米沢] 30만석은 몰수되어 대신 대감봉(大滅封)된 주군 카게카츠가 이봉해 와서막번체제(幕藩體制)에서 요네자와 번조(藩祖)가 되었다.


 카네츠구는 카게카츠 6만석 지급하려는 것을 거절하고 5천석만 받아 세키가하라[関ヶ原] 때의 책임을 졌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으로 '헤이하치 카게아키[平八 景明]'가 있으면서도 동생인 '오오쿠니 타지마노카미 사네요리[大国 但馬守 実頼]'의 딸을 양녀로 삼아 1604 8월 전후처리의 교섭으로 친밀해진 이에야스의 총신(寵臣)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本多 佐渡守 正信]에게 부탁하여 그의 둘째 아들 사헤이지[左平次][각주:7]를 데릴사위 겸 양자로 맞아들여[각주:8] 이름을 '나오에 야마토노카미 카츠요시[直江 大和守 勝吉]'로 칭하게 했다.
 우에스기 가문의 가명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 카츠요시[勝吉] 1611 5월 에도[江戶]에 돌아가서는 다음해 마에다 가문[前田家]를 섬겨버리고, 친자식 카게아키[景明] 1615 18살에 병으로 죽는다. 4년 후인 1619년 12 19 에도에 있던 카네츠구도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역자 가필: 카네츠구가 죽었을 때, 주군인 카게카츠

주군보다 먼저 죽는 놈이 있을까”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1. 참근교대로 성주가 에도에 갔을 때 영지에 남아 영지를 다스리던 가로. 한 마디로 No.1 가로.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노토 요리토모[源 頼朝]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몰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본문으로]
  3. 대대로 신하인 집안 [본문으로]
  4. 오센노카타(お船の方). 그녀가 나오에 씨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7.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 [본문으로]
  8. 이것은 두번에 걸친 결혼으로, 첫번째는 카네츠구의 친딸인 오마츠[於松]와 결혼시켰고, 그녀가 죽자 동생의 딸인 아토라[阿虎]를 양녀로 들여 그의 후실로 보냈다. [본문으로]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1614년 1월 19일 병사(病死) 69세.

1546년 ~ 1614년.
데와[出羽] 야마가타[山形]성주. 쇼우나이[庄內] 지방에 진출해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들과 싸웠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호우죠우 씨[北条氏]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공격하자 참진(參陣)한 덕분에 본령(本領)을 안도받았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해서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싸웠다.




효장(驍将)의 전환기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는 가독(家督)을 놓고 싸운 동생 요시토키[義時]를 죽였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일족이라고 해도 용서를 하지 않았다. 후환을 남기는 것 보다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항복한 무장에게는 잘 대해주었기 때문인지 근린의 무장들은 요시아키를 효장이라며 두려워 했다.

 이런 요시아키에게 전환기가 찾아 온 것은 1590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때 였다. 참진을 명령 받은 여러 무장들은 앞다투어 참진하여 소령 안도장을 받아 내었으나 요시아키는 부친인 요시모리[義守]의 장례식 때문에 늦어 6월달이 되어서야 겨우 착진할 수 있었다. 그 전에 히데요시가 발령한 사투금지령을 위반하고 쇼우나이[庄內]에서 영토 쟁탈전을 계속해서 벌여 온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눈밖에 나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요시아키는 예전부터 연락을 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부탁해 그의 중재 덕분에 겨우 소령(所領)을 안도 받을 수 있었지만, 요시아키처럼 늦은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소령에서 아이즈[会津]를 빼앗겼고 참진하지 않았던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들과 무장들은 소령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 일은 요시아키를 놀라게 했다. 때는 요시아키 45세. 1571년 가독을 이은지 20년만에 처음으로 모가미 가문(最上家] 위급존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환심(歡心)가로 변신

 천하인의 강대한 무력과 중앙 집권 정치의 진정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요시아키는 오우우[奥羽]의 여러 호족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남의 영토를 빼앗는 것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니라는 것을 통감하였으며 주변의 영주들과 싸우는 데 정신이 팔린 결과 중앙 정권과 끈을 이어 놓는 것에 게을리 한 것을 후회했다[각주:1]. 요시아키는 센고쿠[戦囯]의 시대가 끝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요시아키의 진면목이 발휘된다.

 요시아키는 천하인에게 열심히 봉사할 것을 마음먹고 무슨 짓을 해서든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실시한 것이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2])이다.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실정에 맞지 않는 오우우[奥羽]를 주요 목표로 한 것이었다. 사회의 발달이 늦어져 다른 지역보다 향촌제(鄕村制)가 미발달한 오우우에서 이것을 강행할 경우 각지에서 호족의 내란과 농민들의 발발이 예상되었기에 히데요시도 상당한 각오로 임한 것이었다. 검지가 성공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복속해 있던 무장과 호족들의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었기에 커다란 위험이 예상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솔선해서 처자를 동반하여 히데요시가 머물고 있던 아이즈의 코우토쿠지[興德寺]에 가서 알현했다. 이 때의 일이 [다테 가문 문서(伊達家文書)]에 남겨져 있다. 참고로 요시아키는 다테 가문[伊達家]와 싸우기도 했지만 당주인 마사무네[政宗]는 요시아키의 여동생 요시히메[義姬]와 선대 테루무네[輝宗] 사이의 적자이니 요시아키는 마사무네의 외삼촌이 된다.

 [다테 가문 문서]에는 요시아키의 충성스런 모습에 어처구니 없어하며 혀를 차는 다테 가문과 굉장히 기뻐하는 히데요시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아사노 가문 문서(浅野家文書)]에도 다테와 모가미 가문은 자신들 영내의 호족들의 처자들을 스스로 쿄우토(京都)로 보내 살게 했다고 한다. 남들보다 먼저 처자를 인질로 바친 요시아키와 마사무네는 오우우의 여러 무장들의 모범으로 평가 받았고 다른 무장들도 이것에 따르라는 요청받게 된다. 한 때 히데요시에게 냉우받았던 요시아키는 면목을 세우게 된 것이다.

후회로 점철된 말년

 환심을 사는 방법으로 영국(領国)의 안태를 지켜 토쿠가와 정권에서는 52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요시아키이지만 비극은 이 수법으로 인해 생긴다.

 요시아키는 사랑스런 딸인 코마히메[駒姬]를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에게 측실로 받쳤고, 차남 이에치카[家親]를 이에야스의 부하로 사용해 주길 바란다고 보내어 이에야스를 기쁘게 했으며, 셋째 아들 요시치카[義親]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秀頼]를 섬기게 했다. 그야말로 물 샐 틈 없는 포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코마히메는 [살생관백(殺生関白)]이라는 악평을 남기고 자결한 히데츠구에 휘말려 다른 처첩들과 함께 니죠우 강변[二条 河原]에서 사형 당했다.

 요시아키는 자신도 부친에게 미움 받았으면서도 자신 역시 같은 일을 벌이게 된다. 30세가 되어도 가독을 잇지 못한 장남 요시야스[義康]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다고 이에야스가 언질을 주자 분노한 나머지 모살해버린다. 요시야스가 죽은 후 유품에서 부자간의 사이가 화목하도록 절실히 기도한 기원문이 발견되었다. 후회막심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는 이에야스 쪽에 붙어 우에스기 씨[上杉氏]와 싸운 후 부터 요시아키는 병에 자주 걸리게 되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순푸[駿府]의 이에야스를 방문해 모가미가의 안태를 부탁한 후 야마가타로 돌아와 죽었다. 1614년 1월 19일 향년은 69세. 노환에 따른 병이라고 한다.

  1. 1580년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살아 있을 시에 노부나가에게 매와 말을 한 마리 씩 보내 줄을 놓고 있었다. [본문으로]
  2.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636 5 24 병사(病死) 70.

1567~1636

센다이(仙台) 번조(藩祖). 하타케야마 씨[畠山氏]를 물리치고 '스리아게하라(摺上原) 들판의 전투'에서 사타케[佐竹], 유우키[結城] 연합군을 격퇴. 아시나[芦名]를 멸망시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오다와라[小田原] 공격에 참가하지만 늦게 참진하는 바람에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게 된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쟁에서는 동군에 가세하여 우에스기(上杉)와 싸웠다.









화려한 다테 씨(伊達氏)의 전통


 현대에서도 [다테수가타=だて姿-멋진 모습]라던가 [다테메가네=だて眼鏡-멋내기 위해 쓰는 테만 있는 안경]라는 단어는 멋을 낸다거나 화려함을 뜻하는 의미로 통용되는데 이 단어의 기원은 이외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 義滿]의 시대. 다테 모치무네[伊達 持宗]라는 오우슈우[奧州]의 호족이 일부러 쿄우토[京都]까지 상경해서는 화려하고 진기한 토산품들로 인사하고 다녔다. 이후 다테씨는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상경해서 화려하게 물품을 뿌리고 갔다.

 모치무네의 아들 나리무네[成宗]의 행동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일부를 소개해 보자면, 쇼우군[将軍] 요시히사[義向]와 전대 쇼우군[前将軍] 요시마사[義政]에게는 명마 20두 씩과 사금 백 냥 씩을 각각 받친 것 외에 쇼우군의 생모 히노 토미코[日野 富子]를 시작으로 주요한 사람들에게 총 말 95,도[刀] 28자루, 사금 380냥과 그 외의 명산품 등을 합쳐 막대한 양의 물품을 헌상했다. 그 이후로도 쇼우군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 되었기에 쿄우토에서 다테라고 하면 화려함의 대명사가 되어있었다.


 다테씨는 그 후에도 쇼우군의 이름 중에 한자를 받아 적자에게 히사무네[尚宗], 타네무네[稙宗], 하루무네[晴宗], 테루무네[輝宗]등으로 이름을 지어왔다. 단지 테루무네의 즈음에는 쇼우군의 권위가 떨어져서인지 마사무네에게는 다테씨 중흥의 선조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사무네의 젊었을 때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방불케하는 면이 있다. 모친에게 사랑받는 동생을 살해해서 영내를 통일하고 주변을 침략하여 세력을 넓혔다. 마침내 숙적 아이즈[会津]의 아시나[盧名]를 물리쳤으나 이미 중앙에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공격을 계획하며 천하인(天下人)가 되려 하고 있었다. 마사무네가 천하를 잡기에는 30년이나 늦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마사무네는 전신 백색으로 된 죽어서 입는 옷을 입고서 히데요시를 만나러 갔다. 이런 의표를 찌르는 마사무네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의를 읽고 늦게 참가한 것을 용서해 주었다. 그 뒤에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각주:1] 마사무네는 또 한번 백색으로 된 옷을 입고 히데요시를 만나러 가게 되었는데 이 때는 화려한 사형대를 세워 들고서는 쿄우토로 갔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천하를 쥔 것은 늙어서였다. 토요토미씨에게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다테 마사무네는 토우호쿠[東北] 지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실은 이것이 이에야스와 마사무네의 연계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서일본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마사무네가 동일본 전체에서 동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가결했다. 이러한 전국적인 평정이 우선 이루어지자 이에야스는 안정을 위해서 무장들의 영토를 바꾸는 일에 착수한다. 당초 만석을 약속받았던 다테씨였지만 이에야스의 눈을 피해 뒤에서 행한 조그만 음모[각주:2]가 폭로되어 오우슈우[奧州] 60만여석을 받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백만석의 꿈을 포기한 마사무네가 아니었다. [千代=센다이]라고 하는 숲과 습지대에 둘어쌓인 토지를 [仙台=센다이]로 이름을 바꿔서 성과 성 밑 마을의 건설을 착수했다. 동시에 1605 황무지의 토지조사[検地]를 명했다. 이 후 때때로 검지를 행해 병농지를 늘려 갔다. 거기에 키타가미[北上], 하자마[], 에아이[江合] 3대 하천에 개수를 행하고 이시노마키[石卷]에 항구를 열어 산물이 모여들게 했다. 이런 토목사업에 의해 새로운 농지 개발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센다이 번[仙台藩]에서는 매미제도[買米制度]라고 하는 세금[年貢] 이외에 남은 쌀을 번[]이 사주는 독특한 시스템을 만들어 농민들의 의욕을 높였다. 이렇게 증산된 쌀은 배편으로 이시노마키 항에 모여져 에도[江戶]로 가져가 팔아 치움으로써 번의 재정을 윤택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오모테다카(表高[각주:3])는 낮았지만 실질 백만석을 달성했던 것이다.


최후의 봉공[奉公[각주:4]]과 죽음


 마사무네는 이에야스가 죽을 때 센다이에서 순푸[駿府]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바쿠후의 관료 중 일부는 '다테씨의 모반인가?'라며 긴장하는 일막도 있었다고 한다. 2대 쇼우군 히데타다[秀忠]가 죽을 때도 에도로 달려갔다. 이에야스도 히데타다도 막부의 후사를 마사무네에게 맡겼다.


 1636 2월. 70세를 맞이한 마사무네는 자신이 주최한 마지막 사냥에 모인 사람들에게 후사를 잘 부탁한다며 눈물을 섞어 가며 접대를 했다고 한다. 4월에 에도로 출사하여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를 알현하였는데 안색이 너무도 나쁘다고 하여 이에미츠는 의사를 파견시키는 한 편, 5 21일에는 이에미츠 자신이 병문안을 했다. 그러나 3일 후인 24일. 에도 사쿠라다 번저[桜田藩邸]에서 숨을 거두었다.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세상의 어둠을 밝혀 간다.

りなきだてて
らしてぞ[각주:5]
 마사무네가 죽을 때 남긴 시이다.

  1.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 때 뒤에서 반란군을 책동했다는 의혹. [본문으로]
  2. 와가 타다치카[和賀 忠親]를 지원하여 이에야스 측에 선 난부[南部]씨의 영토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 [본문으로]
  3. 막부에 신고 된 공식 석고(石高) [본문으로]
  4. 막부가 다이묘우에게 부과한 일. [본문으로]
  5. 정확하지 않다. 단어의 뜻에 불구하니 유념하시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