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회는 소빙하기에 따른 한랭화가 진행된 기근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과연 ‘금융’이라는 것이 발행할 수 있었을까? 우선 농민의 벼농사 경제 실태를 살펴 보자.
 농민들은 벼농사를 하기 위해 봄에 볍씨를 빌려 수확을 거둔 가을에 쌀로 반환하는 행위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을
출거(出擧)라고 한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쌀’이라는 농작물은 마법과 같은 작물이다. 우선 쌀의 생산력은 모든 농작물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쌀알 하나가 수확기에는 100~300알 정도의 낟알을 가진 이삭으로 자란다. 단순계산으로 생산효율은 100배에서 300배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몇 년간은 보관도 할 수 있다. 창고에 넣어두면 비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볍씨의 이자율은 몇 퍼센트였을까?
 1459년 11월 2일에 제정된 '무로마치 막부법 추가법[室町幕府法追加法]' 260조에는 이자율이 정해져 있다.

전당물의 이자율에 대해. 옷…(중략)등은 5부이자로 한다. 쟁반, 향합, 차제구(茶諸具)…(중략) 미곡(米穀) 등은 6부이자로 할 것
 5부이자이기에 월리 5%에 연리 60%, 6부이자는 월리6%에 연리 72%이다. 더구나 중세의 관례로 이자는 원본의 2배까지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어느 농민이 1알의 볍씨를 빌려 100알의 수확을 거두었다고 하자. 쌀은 6부이자이기에 이자율은 72%. 따라서 2알로 갚는다. 5% 정도의 세(
조용조)로 5알. 수확량 중 경작한 농민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93알.
 간단히 변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 농민의 감각이다. 이런 감각으로 말하면 연리 50%나 100%라고 하여도 꼭 폭리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금융업자를 ‘도소우[土倉]’라고 부른 것은 원래 쌀을 빌려주었던 것이 발단이기 때문이다. 그 쌀을 바탕으로 ‘쌀 금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발달한 것이다. 그러다가 보다 보존이 용이한 화폐와 병용되어 갔다.
 물론 ‘도소우’에는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도 있었다. 여기에 작은 도소우에 빌려주는 큰 도소우와 같은 존재가 생기는 것도 필연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쌀을 비축할 수 있는 신사(神社), 사원(寺院)도 금융활동을 행하였다. 여기에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로 이어지는 금융의 원천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세의 농촌사회에 타격을 주는 소빙하기가 찾아온다. 끊이지 않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 ‘내일의 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궁핍한 농민들은 볍씨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쌀알을 먹어버리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무리 생산효율이 높은 농작물이라도 심지 않으면 생기질 않는 것이다. 제로는 아무리 큰 수를 곱해도 제로인 것이다.

 더욱이 기근의 만성화로 화폐보다 식량 쪽이 귀중해졌다. 『잡병 이야기[雑兵物語]』’에 “갑옷을 팔아서도 주먹밥 하나와 교환할 것”이라는 서민의 감각은 당시의 농민이 가진 숨길 수 없는 심경이 아닐까?
 아무리 돈을 가지고 있어도 먹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기근 때는 아무리 돈을 주어도 쌀을 팔지 않았다는 사례는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도소우’에는 쌀이 아니라 ‘화폐’가 쌓여 갔다. 그래서 도소우도 자기방위라고 할 수 있는 ‘폭주’를 시작한다. 앞서 본 무로마치 막부법 추가법에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여러 도소우 이자율에 대해서. 근년 마구 방치된 채인 것에 안타까운 일이다. 고리에 대해서는 도소우 조합끼리 이자율을 정하여 엄밀히 지킬 것
 중세의 임차계약은 개별계약이었다. 즉 도소우들은 막부의 이자제한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근, 가뭄이 들 때마다 이자는 크게 오르고 내렸다. 하지만 이자의 근본이 되는 농작물(실물경제)의 생산효율이 오르지 않았는데도 이자가 오르거나 하면 갚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도소우 들은 ‘차용증 매매’라는 파생상품을 개발하였다. ‘오케하자마 전기’의 작품 속에서도 나오는데 ‘차용증’ 그 자체를 매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용증은 매매될 때마다 가격이 올라갔다. 매매될 때마다 논밭이나 장원(荘園), 조합의 전매권이 더해졌다. 그렇게 토지나 전매권을 손에 넣어 부(富)를 축적해 간 것이다. 물론 그러다보니 궁핍한 농민들이 세상에 넘치게 되었다.

 그래서 행해진 것이 당시의 개인회생제도라 할 수 있는 ‘덕정령(徳政令)’이다.
 ‘채무면제=덕정력’은 선정(善政)인 듯이 쓰이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확실히 채무로 인하여 가난해진 농민이 이 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은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빚이 늘기만 하는 불량채무자, 지급불능자를 많이 짊어지고 있었던 ‘도소우’는 아무런 부(富)도 창출하지 못했다. 빚을 갚다 극도로 가난해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는 것은 경작하는 인간이 없어진 논밭뿐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 일단 채무자에게서 채무를 떼어주고 다시 일할 상태로 만들어 일하게 만드는 편이 경제효율로 따지면 더 좋은 것이다. 덕정령이라는 것을 그러한 의미로 다시 살펴보면, 오히려 채권자 즉 도소우[土倉]나 유력무사, 신사(神社), 사원(寺院)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센고쿠 시대[戦国時代]가 끝나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서도 1622년의 법령에는, “이자는 서로 합의하에 정할 것”이라고 하여 당사자들간에 맘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1692년에 100문(文)당 월리 3부이자, 연리 3할7분5리까지 이자의 상한을 두었다(質屋作法御定書之事). 센고쿠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자는 제한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雄一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