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나가의 성격은 크게 나누어 두 개의 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합리적인 근대(近代)에 대한 동경과 잔혹한 살육에 대한 의지가 그의 몸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프로이스(Luis Frois)는 직접 노부나가와 회견하였는데, 당시의 일을 로마 교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전략)…키가 크고 말랐으며, 수염이 적고, 목소리는 대단히 크며…(중략)… 전술이 뛰어나고, 대부분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으며, 부하의 진언에 따르는 것이 드물다…(후략)]

 고 쓰면서, 최하급의 병사와도 친근감 있게 이야기를 하는 대장(大將)이라 말하고 있다. 독선적인 성격이지만 뛰어난 군단지휘자의 풍모를 방불케 한다

 

 노부나가는 중세의 무거운 쇠사슬을 끊어, 일본에 근세의 여명기를 가져다 주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동시대의 영웅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차별화 되는 것은 이 근대적인 합리성일 것이다. 신겐이나 켄신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신불(神佛)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노부나가는 그것을 부정하였다. 노부나가는 무신론자였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납득한 것도 노부나가였다. 이보다 백 년 뒤, 에도 바쿠후(幕府)의 어용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은 지구가 둥글다는 설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부나가가 얼마나 시대에 앞선 근대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코우베()코우베 시립박물(市立博物館)에는 노부나가가 애용하던 세계지도 병풍이 있다.

 

 너무 합리적인 나머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만 이용하려는 냉혹한 면이 있었다. 쓸모 있는 자는 히데요시와 같이 그 출신에 구애 받지 않고 계속 출세시켜 주었지만, 한번이라도 무능이라는 낙인을 찍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 가로(家老)로써 힘써온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혼간지(本願寺) 공략에서 아무런 활약이 없었다는 이유로 고우야(高野)산(山)으로 추방 당하였고 말년에는 길가에서 굶어 죽는 비참함 죽음을 맛보게 하였다.

 

 1571 9.

 노부나가는 히에이잔(比叡山)산(山)을 포위하여 건물, 석탑, 승가가람(僧伽藍摩)을 전부 불태움과 동시에 남녀노약을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어서 1574년 키소카와() 강 하구(河口)나가시마(長島)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를 토벌했을 때는, 퇴성(退城)을 허용한 듯이 속여서는 방심한 틈을 타서 일제 사격하고 성에 불을 질러 2만여 명의 남녀를 태워 죽였다. 에치젠(越前)의 잇코우잇키 정벌에서는, 그 시체들로 인하여 후츄우(府中)의 마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부 불교도에 대한 노부나가의 철저한 증오가 표출된 것이다[각주:2].

 반대로 기독교에는 관대하여 오히려 보호하였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발령한 선교사 추방령을 해제하였고, 쿄우토(京都)에 교회당을 세우는데 원조까지 하였다.

 

 노부나가에게도 익살스러운 인간적인 측면이 있었다.

 별명을 붙이는 것이 장기로, 히데요시에게는 [원숭이([각주:3])]라던가, [대머리생쥐(げネズミ[각주:4])]라고 붙였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는 [대머리(キンカ)[각주:5]]라고 붙였다.

 

 따스한 인간성을 나타내는 편지가 남아있다. 히데요시의 마누라 네네(ねね)에게 보낸 것이다.

 […(전략)네네님 정도의 미인을 저 대머리생쥐 히데요시는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테니까, 네네님도 지금부터는 마님다운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질투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게…(후략)]

 히데요시가 여색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네네가 노부나가에게 호소하자 그 답변으로 보낸 편지이다. 그 외에도 냉철한 무장의 이미지와는 상상할 수 없는 인간미 넘치는 일면이 있었다.

 스모우(相撲[각주:6])를 아주 좋아하여, 1578년에 아즈치(安土)성(城)에서 열린 스모우 대회에는 주변에서 300여명이 모였고, 이 중에서 23명의 우수 씨름꾼을 선발하여 승자에게는 부채 등의 상품을 내렸다.

 

 오다(織田) 가문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가문은 말류(末流)이다.

 오다 가문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을 보좌역인 시바(斯波) 가문의 오와리(尾張) 슈고다이(守護代[각주:7])였다. 이 오다 가문에 오와리 위쪽 4개군()이세노카미(伊勢守) 가문과 아래쪽 4개군()을 지배하는 야마토노카미(大和守) 가문이 있어, 노부나가가 태어난 가문은 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을 섬기는 세 행정관(三奉行[각주:8]) 중의 하나였다. 아시카가 쇼우군에서 보면 부하(斯波)의 부하(오다 종가(領家))의 부하(織田 大和守)의 부하(織田 正忠)에 지나지 않는다[각주:9].

 그러나 당시의 하극상 풍조를 타고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 시대에는 오와리(尾張) No.1 실력자로 올라선다.

 

 부친이 죽었을 때, 노부나가는 아직 16살로 세간에서 [최강 찌질이(うつけ)]로 불리며 얼간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라 그 풍모를 설명하자면, 반바지(半袴)에 나시(なしの浴衣)이며 헤어스타일은 챠센마게(茶筅), 머리를 묶는 끈(元結)은 빨간색이나 짙은 녹색 등의 강렬한 색을 좋아하였으며, 큰 칼(太刀)의 칼집은 붉은색. 무구(武具)도 새빨간 색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였고 걸어 다니며 밤, , 오이, 떡 등을 칠칠 맞게 흘려가면서 먹었다. 거기에 남의 어깨에 매달려 다니거나 하여 행동거지에 예절이 없는 것을 말하면 끝이 없었다.

 

 부친 노부히데의 장례식 날도 제대로 차려 입지 않고 나타나, 부처님 상 앞에 나아가서는 갑자기 향을 움켜쥐고는 부친의 위패에 집어 던지고서는 돌아갔다고 한다. 이 폭거에 교육을 담당한(傅役)인 노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 政秀)는 노부나가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배를 가르고 죽었다.

 

 오케하자마()의 일전이 그런 노부나가의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한 첫 번째 도약대였다.

 1560 5 19일 심야. 노부나가는 갑자기 나각(法螺貝)을 울리게 하여 병사를 동원하면서, 손수 코우와카마이(幸若舞[각주:10]) [아츠모리(敦盛)]를 춤추었다.

 [인간 오십년, 하천(下天)과 비교해 보니, 몽환(夢幻)과 같도다(人間五十年、下天のをくらぶれば、夢幻のごとくなり).]

 이 부분을 세번 춤추었다 한다. 춤이 끝나자 뜨뜻한 물에 밥을 말아서 먹은 뒤 질풍과 같이 달려 나갔다고 한다.

 

 적은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대군단을 이끄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다. 오와리 절반만 소유한 오다 씨()같은 것은 가볍게 물리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다. 오다 가문의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였다. 이마가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습 전법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폭풍우가 치고 있었다. 오다 군()덴가쿠하자마(楽狭)에서 쉬고 있는 이마가와 군의 허를 찔러 습격, 결국 대장 요시모토의 수급을 베고 승리의 함성을 울려 퍼지게 한 것이었다(누누이 말씀 드렸듯이 저는 아케치 님의 “[說] 오케하자마(桶狹間) 진상정면공격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 역자 주)

 

 1575 5나가시노(長篠)의 전투는 일본 전투 사상 획기적인 전투였다. 근대 전법을 구사한 오다 군이, 그때까지 센고쿠(戦国) 최강을 자랑하던 타케다(武田) 군단을 괴멸시킨 것이다. 노부나가는 철포 3000정을 끊임없이 타케다의 병마(兵馬)에 집중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각주:11].

 

 아즈치(安土) 7층루의 장대한 성을 쌍은 것은 1579년이다. 아즈치는 쿄우토(京都)와 가깝고 비와코(琵琶湖) 호수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호쿠리쿠(北陸)와 통하며, 남쪽으로는 이세(伊勢)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7층의 텐슈카쿠(天守閣)의 내부는, 카노우(狩野)파의 벽화로 장식되었고, 최상층은 금박(金箔)을 입혔다고 한다. 일본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성안의 어느 것이나 세계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건물이라고 절찬하였다.

 

 희대의 영웅 노부나가는 1582 6 2. 갑자기 일어난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인해 혼노우(本能)()에서 쓰러졌다.

 이날,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보고로 모반의 군세가 아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단 한마디 [是非に及ばず 할 수 없군, 어쩔 수 없군한국어로 정확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역자 주]라고 말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손수 활을 들고 싸웠지만 이제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깨닫자 건물 깊숙이 들어가 문을 닫고 자인(自刃)했다.

 

 그는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이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적에게 자신의 시체를 보여지는 것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34년 노부히데(信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죽은 후 오와리 절반을 통일하였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카와(三河)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동맹을 맺어 오와리를 통일. 1564미노(美濃)를 공략. 1568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쿄우토(京都)에 입경한다. 이후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 등 여러 가문을 물리치고 혼간지(本願寺)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를 항복시켜 천하 제일의 실력자가 되지만, 패업(覇業)을 목전에 두고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하여,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 에서 자인했다. 49.
  1.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농민 폭동군. [본문으로]
  2. 증오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과격한 행동은 에도 시대의 혼간지(本願寺) 측이 왜곡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원숭이(일본 발음으론 사루(さる))라고 붙게 된 것은, 1591년 쿄우토(京都)에 낙서가 되어있길.. “말세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 아래 있는 어느 칸파쿠를 보더라도(末世とは別にはあらじ、木下にさる関白をみるにつけても)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나무 아래’는 키노시타(木下)로 히데요시가 하시바(羽柴) 성을 쓰기 전의 성이다. [본문으로]
  4.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칭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정말로 대머리였다기 보다는, 미츠(光)의 아랫부분과 히데(秀)의 윗부분이 결합되어 ‘대머리 독(禿)’이 되었고, 그와 같은 뜻인 ‘キンカ頭’로 부르지 않았나 싶다. [본문으로]
  6. 일본 씨름 [본문으로]
  7.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 혹은 바쿠후(幕府)의 중요 직책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고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8.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 오다 토우자에몬(藤左衛門), 오다 단죠우노죠우(織田 弾正忠)의 세 가문. [본문으로]
  9. 이세노카미 가문(伊勢守)이 오다 가문의 종가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0. 단한 춤을 추며, 옛 무장들의 영웅담을 읊는 것. [본문으로]
  11. 3000의 철포와 3단 철포는 없었다는 것이 대세이다. 자세한 사항은 검색해 보시길.. [본문으로]

 '살무사 도우산'이라는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사이토우 도우산의 평판은 굉장히 안 좋다.

 타이라노 마사카도[門][각주:1],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등과 함께 악인(惡人)의 전형적인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같은 시대에도 도우산을 비난하는 아래와 같은 낙서가 유행했다고 한다.

주인을 베고, 사위를 죽이는 것은 몸의 파멸. 옛날엔 오사다, 지금은 야마시로

主を斬り、聟を殺すは身のおわり、昔はおさだ、いまはやましろ

 미노오와리(()のおわり)미노[美濃]오와리[尾張]를 말하는 것으로, 주군 토키 요리요시[土岐 芸]가 도우산에게 추방 당하여 미노에서 오와리로 쫓겨난 것을 말하며, ‘오사다 [헤이지의 (平治)]에서 주군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 義朝][각주:2]를 죽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 忠致]를 지칭하는 것이다. ‘야마시로는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도우산[斎藤 山城守 道三]을 말한다. 어느 쪽이건 주군을 배신한 극악인(極惡人)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던 것이다.


 잔혹한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도우산은 작은 죄를 지었더라도 거열형(車裂刑)에 처했으며, 혹은 솥에 죄인을 넣어 그의 부인이나 부모형제에게 불을 피우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삶아 죽이게 하였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기름 상인에서 미노[美濃] 일국(一国)의 태수로 출세했을 만큼 젊었을 때부터 두뇌의 명석함은 발군이었다.

 쿄우토[京都]의 묘우카쿠 사[妙覚寺]에서 수행할 때는 '배움은 부처의 가르침에 통달하였으며, 변설(辯舌)부루나(富樓那 석가의 제자로 변설가)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며, 내외(內外)를 잘 깨닫고 있으니 훗날 굉장한 명승(名僧)이 될 것이다'고 촉망 받았다. 묘우가쿠 사()에서는 호우렌보우[法蓮坊]라는 이름이었다. 이 시절에 알게 된 난요우보우[南陽坊]가 훗날 도우산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난요우보우는 미노의 호족 나가이 토시타카[長井 利隆]의 동생으로, 후에 미노[美濃]명찰(名刹) 죠우자이 사[常在寺]의 주지(住持)가 되어 '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이라 불리게 된다.


 도우산의 전반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쿄우토[京都]의 교외에 있는 니시노오카[西]의 낭인 마츠나미 모토무네[松波 基宗]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마츠나미 가문은 대대로 '북면의 무사(北面武士 상황(上皇)의 거처를 지키는 무사)' 집안이었다고 한다.

 호우렌보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속하여 기름 상인이 되었다. 나라야[奈良屋]데릴사위로 들어가, 야마자키야 쇼우고로우[山崎屋 庄五郎]라는 이름을 칭었다.


 미노[美濃]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서 기름 행상을 하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손님을 모으기 위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다. 기름을 에 담아 손님의 항아리에 옮기는데 깔때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일문전(一文銭[각주:3])의 구멍을 통해서 흘려 넣은 것이었다. 한 방울도 구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멍 주위에 한 방울이라도 묻는다면 공짜로 주겠다고 하였기에 그에게는 손님들이 잔뜩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이 퍼포먼스를 미노[美濃]의 호족 나가이 토우자에몬[長井 藤左衛門]의 가신 중에 한 명이 보게되었다.

 굉장한 기술이군. 저 묘기를 무예로 살린다면 필시 뛰어난 무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이 나가이 가문의 무사가 한 말이 도우산을 무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도우산은 기름 상인을 관두고 창() 수련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3간반(間半=약 6미터40센티[각주:4])이라는 굉장히 긴 창(=나가야리(長槍))을 만들어, 그 창 끝에 바늘을 달아서는 대나무 가지에 매단 일문전의 구멍을 뚫는 연습을 하였다. 필사의 수련 끝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고 이어서 백발백중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가야리[長槍]는 센고쿠[戦国]전투에는 필수인 것이 되었는데 도우산이 그것의 발명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철포()의 실력도 또한 굉장했다고 한다[각주:5].
 이리하여 무예가 숙달된 도우산은 예전 묘우가쿠 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난요우보우=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의 연줄로 나가이 토우자에몬 나가히로[長井 藤左衛門 長弘]를 섬기며, 마츠나미 쇼우고로우[松波 庄五
郎]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우산이 가진 다른 매력적인 면으로 나가이 씨()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다. 기름 상인이라고 하여도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야마자키 하치만 궁[山崎八幡宮]전매권(專賣權)을 가진 기름 조합(油座)에 속해있던 상인으로 대단히 큰 규모의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름 조합의 상인은 관소(關所[각주:6])를 통과할 때도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상인이었던 것이다.


 곧이어 도우산은 미노 슈고[美濃守護] 토키 모리요리[土岐 盛頼][각주:7]의 동생인 요리요시[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그의 야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는 요리요시를 꼬드겨 자신을 멀리하고 있던 당주인 모리요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당주가 된 요리요시는 도우산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애첩 미요시노[深芳野]까지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독선적 행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노신(老臣)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도우산을 천거했던 나가이 토우자에몬이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그러자 도우산은 은혜를 입었던 이 토우자에몬을 모살(謀殺)해 버린다. 이미 나가이 신쿠로우 토시마사[長井 新九朗 利政]로 이름을 바꾸고 있던 도우산은 이렇게 나가이 가문을 완전히 빼앗은 것이다. 일시적으로 나가이 일족의 반발을 사 공격을 받아, 주군 요리요시 밑으로 도망쳤으나 오우미[近江]의 슈고다이묘우[守護大名] 사사키 씨[木氏][각주:8]의 중재로 겨우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후 도우산은 또다시 성()을 바꾸어 사이토우 성[姓][각주:9]을 칭하였다. 쇠약해져 있던 사이토우 씨()의 양자로 들어가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히데타츠[藤 山城守 秀竜]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착실히 그는 출세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야망은 끝없이 커져만 갔다. 다음 목표는 미노[美濃]의 주인 자리였다.


 그의 독선적인 행동이 또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노의 호족들이 반 히데타츠 연맹군을 조직하여 공격해 왔다. 그러나 운 좋게 오우미[近江]의 사사키 씨(),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중재로, 큰일이 터지기 전에 화해하였다. 이때 히데타츠는 그 죄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이때부터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우산의 덫이었다.

 15425. 갑자기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거성 오오가 성[大桑城]을 습격하여 주군을 추방하여 명실공히 미노[美濃]의 태수(太守)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도우산은 곧이어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딸인 노히메[]를 노부히데의 적자 노부나가와 결혼시켜 평화협정을 맺었다.

 당시 얼간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를 받고 있던 노부나가를 한번 보자마자,

 안타깝게도 이 얼간이 집 앞에 내 자식들은 말을 메게 되겠구나[각주:10]

 라고 탄식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이 즈음의 일인데, 도우산은 멍청함을 가장한 노부나가의 얼굴에서 일찍부터 후년 천하의 패자(覇者)가 가진 재능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역시 예언은 적중하여,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興] 때가 되어 사이토우 가문은 노부나가에게 멸문 당해 버린다[각주:11]

 

 도우산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는 주군 요리요시의 복수를 받게 된다. 그의 부인이 된 미요시노는 도우산에게 왔을 때 이미 요리요시의 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도우산의 적자 요시타츠[]였다. 이 설의 진위는 확실치 않지만 도우산의 애정은 이 장자에게는 박했고, 둘째인 마고시로우[孫四郎], 키헤이지[喜平次]에게만 쏠려 있었다.

 

 도우산은 요시타츠에게 가독을 물려주어 킨카잔 성[金華山城][각주:12]에 있게 하고, 자신은 나가라가와[長良川] 강 건너편에 있는 사기야마 성[鷺山城]에 은거하였다.

 요시타츠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고 65(195cm)이라는 큰 키였으며 성격도 굉장히 과격했다고 한다.

 부자간의 사이는 좋지 않아 날이 갈수록 험악해 져 갔다. 도우산은 요시타츠를 없애고 둘째인 마고시로우에게 가문을 물려주려고 은밀히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요시타츠가 선수를 쳤다. 꾀병을 부려 숨이 있는 동안 유언을 하고 싶다고 하여 두 동생을 성에 불러들여 죽인 것이다.

 도우산은 격노하였다. 두 아들을 단번에 잃은 실망도 컸다. 이리하여 아비와 아들이 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556 4.

 결국 둘은 전쟁을 벌인다. 도우산은 63세가 되어 있었다. 젊은 요시타츠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패하여 키다이 사[城田寺]로 도망치던 도중, 요시타츠의 가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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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타츠의 아들 타츠오키가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사이토우 가문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은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567년이었다.

 

[사이토 도산(藤 道三)]
이름은 토시마사[利政], 후에 히데타츠[竜]. 말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을 칭했다. 미노 슈고[守護] 토키 씨[土岐氏]의 가신이 되었고, 1542년 주군 요리요시를 추방하여 미노 슈고가 된다. 1556 4 20일 적자 요시타츠와 싸워 전사(戰死).

  1. 939년에 칸토우(関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텐노우(新皇)]를 자임하였으나 진압당하였다. [일본 3대 원령(怨靈)] 중의 하나.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바쿠후[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부친. [본문으로]
  3. 우리 나라의 엽전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본문으로]
  4. 아시가루(足軽)가 아닌 일반 무사의 창은 1간반(약 2.7~3미터)~2간(약 3.6~4미터)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본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이라고 하니 이 당시는 아직 철포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 말년(도우산 1556년 몰) 즈음의 이야기 일 것이다. [본문으로]
  6. 당시는 각 지방의 실력자(영주, 절, 신사 등)들이 재정 확충을 위해서 자신의 영지(領地)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곳이 많았다. [본문으로]
  7. 요리타케(頼武), 마사요리(政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보통 롯카쿠[六角]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9. 사이토우 씨(氏)는 대대로 미노[美濃]의 슈고다이[守護代]였다. [본문으로]
  10. 얼간이 집 ‘가서’ 인사를 올리거나 지시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의미. [본문으로]
  11. 멸문은 당했지만, 도우산의 막내 아들인 사이토우 토시하루[利治]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고 후에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信忠] 부속 가신 되어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때, 노부타다와 함께 싸우다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죽게 된다. [본문으로]
  12. 이 시대에는 이리 불렸다 한다. 후에 이나바야마[稲葉山]를 거쳐 노부나가 시대에 기후[岐阜]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또한 이 성이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오다 노부나가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8. 2. 10. 08:14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82 6 2자인(自刃) 49.

1534 ~ 1582.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주(城主).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노(美濃)의 사이토우()()를 멸망시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입경(入京).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키지만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해 자해(自害)







최후의 상경(上京)


 1582 5 29.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安土)()을 출발하여 오래간만에 상경하였다. 이보다 앞선 1 28일에 상경할 예정이었지만 중지된 적도 있기에 작년 3월 이래 실로 1 2개월 만의 상경이 되었다.

 2년 전. 이시야마(石山) 혼간지(本願寺)를 굴복시킴으로써 더 이상 키나이()에서 노부나가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게 되었다. 안도감(安堵感)때문인지 왕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을 이 즈음의 노부나가에게서는 볼 수는 없다. 반대로 유흥(遊興)적인 면을 [신장공기(信長公記)]의 기사에 빈번히 볼 수 있다.


 1581 2월에 상경한 노부나가는 선교사에게서 데려온 흑인[각주:1]을 선물 받았고 그 직후에는 궁궐의 동쪽 마장(馬場)에서 텐노우(天皇)나 쿠게(公家)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오다 군단의 열병식(閱兵式)이라고 할 수 있는 우마조로에(馬揃)를 행하였다.


 같은 해 9.

 차남(次男) 노부카츠(信雄)를 사령관으로 하여 이가(伊賀) 정벌을 명하였고, 또한 1582 3월에는 첫째인 노부타다(信忠)를 총대장에 임명하여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정벌을 명하였지만, 노부나가 자신은 직접적으로 작전에 관여하는 일 없이 평정 후에 현지 검분(檢分) 만을 했을 뿐으로, 그 모습은 전적(戰跡地)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카이(甲斐) 원정에서 귀국했던 노부나가에게 조정(朝廷)에서 칙사가 파견되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각주:2])추임(推任)한다는 뜻이 전해졌지만 노부나가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혼노우(本能)()의 변()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5 29.

 오후 12시 즈음부터 내린 비 속에서 아와타(粟田口[각주:3]) 쪽을 통해서 시죠우() 니시노토우인(西洞院)에 있는 혼노우(本能)()에 도착했다. 아와타구치에는 미리 노부나가 일행을 마중하려는 쿠게(公家)의 무리들이 다수 모여있었지만 마중할 필요는 없다는 고지를 모리 란호우시(森 乱法師=란마루(蘭丸)) 나리토시(成利)가 와서 전했기에 쿠게(公家)들도 집들로 돌아간 후 였고 또한 함께 한 수하들도 [코쇼우(小姓) 2~30] 정도였기 때문에 상경 모습은 조용했다. 상경한 시각은 오후 2시 즈음이라고도 오후 4시 즈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건 이것이 마지막 상경이 될 것이라고 노부나가 자신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상경의 주요한 목적은 츄우고쿠(), 시코쿠() 정벌이라는 양 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이즈미(和泉)의 사카이()에서 철갑선(鐵甲船)을 타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6 4일에는 쿄우토(京都)를 출발할 예정으로 있었기에 5일간 쿄우토에 있을 예정이었다. 혼노우(本能)()의 변은 그 재경(在京) 3일째에 일어난 것이다.


상경 축하의 나날


 그렇다면 그 3일간의 모습을 살펴보자.

 5 29일 상경했던 노부나가는 아와타구치에서 첫째 아들 노부타다(信忠)의 마중을 받아 함께 혼노우(本能)()로 왔을 것이다.


 이보다 먼저인 21.

 노부타다는 토오토우미(遠江)의 하마마츠(浜松)에서 아즈치(安土)로 올라 와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함께 쿄우토(京都)에 와 있었다. 하지만 27일이 되어서 노부나가가 갑자기 상경한다는 소식을 듣자, 구경하러 오오사카(大坂), 사카이()로 내려가는 이에야스 일행과 헤어져 쿄우토 니죠우()에 있는 노부타다 전용 숙소인 묘우가쿠()()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재경 이틀째인 6 1.

 혼노우(本能)()에는 텐노우(天皇)와 사네히토 신노우(誠仁 親王)가 파견한 곤다이나곤(大納言) 칸로지 츠네모토(甘露寺 ), 곤츄우나곤(中納言) 카쥬우지 하레토요(修寺 晴豊)가 상경을 축하하는 칙사로서 방문했다. 또한 총 40명에 이르는 쿠게(公家)들을 시작으로 승려나 상인 등 다수의 사람들이 노부나가 상경을 축하하기 위해서 방문하였다.

 쿠게들과의 대면은 수 시간에 이르렀고 노부나가는 환담 중에 칸토()를 평정했을 때의 이야기와 삼일 후인 4일에 서쪽으로 출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공략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다회()가 행해져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수 많은 명물(名物) 다기(茶器)피로(披露)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밤이 되자 노부타다가 방문하여, 쇼시다이(所司代[각주:4])인 무라이 사다카츠(村井 貞勝)나 코쇼우(小姓)들과 환담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있어 밤이 깊어져 노부타다가 묘우가쿠사()로 돌아가자 노부나가도 마지막 침상에 들었다.


 노부나가가 취침한 바로 그 즈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 3000의 군세를 이끌고 탄바(丹波) 카메야마(亀山)성(城)을 출발하여 한밤중에 쿄우토(京都)를 향해서 군세를 진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 2일 밤이 새기 전에 카츠라가(桂川) 천을 건너 쿄우토(京都)에 들어오기 직전, 미츠히데는 그제서야 혼노우(本能)()를 습격한다는 것을 전군에 전하였고 여명(黎明)에 이르러 혼노우사()를 포위하였다.


 6 2일 여명.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세에게 습격 받았을 때, 노부나가는 아랫 것들의 싸움으로 인한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함성과 철포(鉄砲)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모반(謀反)임을 깨달아 스스로 활과 창을 손에 쥐고 싸웠지만 물량에는 당해내지 못하여 팔꿈치를 창에 찔리자 물러나 건물에 불을 지르고 깊숙이 들어가 침실 입구를 닫고 결국 배를 갈라 죽었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할복했다고 하는 사람도, 건물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중략)…… 머리카락 한 올 남기는 일 없이 재로 변했다]

고 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의 시체는 결국 발견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 처음에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노부나가는 계속 씻겨도 광택만 더할 뿐 검은 색이 없어지지 않자 그제서야 믿고서는 맘에 들어하며 '야스케(彌介)'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 때 싸우다 잡혔지만 미츠히데는 '사람도 아닌 미물이 뭐 알겠냐'는 식의 말을 하며 풀어 주었고 이후 소식은 불명. [본문으로]
  2. 바쿠후(幕府)를 열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쿄우토(京都)에 들어오는 일곱 개의 입구 중 하나. 요즘으로 치면 톨게이트와 같다고 할까.. [본문으로]
  4. 이 때는 쿄우토(京都)의 행정, 치안, 여러 집단(조정, 상인, 절 등)과의 교섭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82 6 13일 패사(敗死) 55?

1528? ~ 1582.

미노(美濃)의 명족(名族) 토키(土岐)()의 후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동반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긴다. 후에 노부나가와 사이가틀어져, 혼노우(本能)()의 변()을 일으키지만, 직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 중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어긋난 시나리오


 1582 6 13일 밤.

 아케치 미츠히데는 쇼우류우지(勝龍寺)() 안에 있었다.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전이라며 싸움을 걸어온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맞서 싸워 이김으로 쿄우토(京都) 지배의 토대를 다져놓을 수 있었던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지금 막 도망쳐 온 것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갑옷을 벗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토우 쿠라노스케(内蔵(=토시미츠(利三))의 말을 들어, 오늘의 전투를 피하여 사카모토(坂本)에서 농성(籠城)을 하였다면……]

 [평소 모아두었던 군세를 (나누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면……] (太閤記)

 라는 등의 제 3자의 평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적이 포위망을 굳히기 전에 성을 나가 본거지인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에서 진용을 재구축해야 하겠지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급격히 불리해진 국면(局面)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우(本能)()에서 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궁정에 들어가 전승(戰勝)을 보고했던 것이 불과 10일전의 일은 아니었는가? [아케치의 삼일천하[각주:1]]라고 후대에 걸쳐 비웃음을 받고 있는데 당사자인 본인도 예상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큰 것에 당혹하여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일까?

 직접적인 패인(敗因)은 히데요시가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츄우고쿠 대반전(大返し)]을 감행한 것과 더불어 동원한 병력이 총 4[太閤記]이라는 이 또한 예상외의 대군(大軍)으로 이 대군에는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라이벌 히데요시가 그렇게 대군을 모을 수 있었는가를 생각했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인척[각주:2]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타다오키(忠興) 부자의 협력 거부였다. 모든 것은 여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주군을 죽인다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문제인 것은 누구보다도 미츠히데 자신이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함에 있어서 사리사욕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호소카와 부자에 재고(再考)를 촉구한 9일자 편지의 말미에도 이번 쿠데타의 의도는 타다오키, 오키모토(興元[각주:3]) 등을 위한 것으로, 따라서 쿄우토(京都) 주변을 평정한 후에는 곧바로 타다오키 등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호소카와 부자는 응하지 않았다.


 또한 이어서 당초 미츠히데에게 가세(加勢)했었던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9일에는 태도를 바꾸고 곧이어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대의명분이 없는 [모반(謀反)]


 확실히 미츠히데의 반역의 배후에는 바쿠후(幕府) 즉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그와 기맥상통(氣脈相通)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세 사다오키(伊勢 貞興), 스와 히다노카미(諏訪 飛), 미마키 카게시게(御牧 景重) 등 쇼우군()의 부하들이 아케치 측에서 전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즉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체제의 재건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나름대로 대의명분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미츠히데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오다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츠히데의 권유를 거절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9일자 편지에서 혼노우(本能)()에서의 일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不慮)”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세울 정도의 대의명분은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반격의 준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츠히데는 사카모토 성()으로 귀환을 하려 하였고 미조오 시게토모(溝尾 茂朝) 등 근신(近臣) 수 명과 함께 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 쇼우류우지(勝龍寺)()을 탈출했다. 그러나 후시미(伏見) 방면에서 야마시나(山科)에 이르렀을 때 잇키(一揆)에 습격 당하여 샛길로 피했지만 여기서 살해당하고 백성이 목을 주웠다[아사노 가문 문서(野家文書)].
 
일설에는 야마시나의 오구루수(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풀 숲에 숨어있던
노부시(野武士)의 창에 찔려 약 330m쯤 간 곳에서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곁에 있던 신하가 목을 베어, 그 목이나 몸통을 덤불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豊鑑].


 이 말로에 대해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학려(學侶)인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등은, “노부나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출세를 하였으면서도, 그 큰 은혜를 잊고 괘씸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고 단정지었다.

  1. 노부나가를 죽인 후 쿄우토(京都)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다오키의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 [본문으로]
  3. 후지타카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 忠興]

1645 12 2일 병사(病死) 83.

1563 ~ 1645.

호소카와 유우사이[]의 아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 가라샤가 부인이었지만, 혼노우 사[本能]의 변()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측에 섰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부젠[豊前] 코쿠라[小倉], 그 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로 영지(領地)가 이동되었다. 말년은 산사이[]라는 호()를 칭하며 다도(茶道)와카[和歌]를 즐겼다.







은거 생활 25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부젠[豊前] 코쿠라 39 9천석 태수(太守)의 지위에서 물러난 것은 59살 때인 1621년이었다. 그 전년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사이소우류우[宗立]'라 불리고 있던 그는, 해가 밝은 이 해에 부젠[豊前] 나카츠 성[中津]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다.


 11년 후인 1632년.

 번주(藩主) 타다토시[忠利]가 히고[肥後] 쿠마모토 54만석으로 이봉(移封)되자, 이번엔 야츠시로(八代)()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은거생활 중이었다. 83세라는 당시로써는 드문 장수(長壽)를 끝마치기 까지 25년 간 은거한 것이 되는데, 그의 은거생활은 유유자적(悠悠自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다오키는 다채로운 취미를 가진 무인(武人)이었다.
 무가(武家)의 옛 전통이나 의식, 작법에 밝은 것과 와카[和歌]렌가[連歌] 등에 뛰어났던 것은 조상 대대로의 전통이었으며, 저술(著述), 그림을 그리거나, 케마리[蹴鞠][각주:1], 사루가쿠[
] 외에 도검()이나 무구(武具)의 제작, 디자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호소카와 가문 기록[細川家記]'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다도(茶道)는 센노 리큐우[千利休]'칠철(七哲)'[각주:2]'
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였다. 다인(茶人)의 신분인 산사이소우류우는 에도[]에 있을 때 자신의 저택에서 자주 다회()를 열어 여러 다이묘우[大名]와 교류를 맺었다.


 그런 많은 취미를 갖고 있던 타다오키이기에 은거 생활이라는 넘쳐나는 시간을 즐겼다고 봐도 좋겠지만, 그 마음을 들여다 보면 현역에서 물러난 노인에게 있을 법한 -긴장의 끈이 느슨해진 사람의 고독과 거기에서 오는 불만과 불안의 그림자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주 타다토시와의 불화설


 타다오키가 그러한 불만을 터트릴 수 있는 대상이 아들 타다토시에게 집중되었던 것은 부자의 연으로 봐서 당연하다고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타다토시는 셋째이면서 후계자가 되어 봉토를 이었기에, 은거한 아버지에 대해서 무엇이든 조심하였다. 타다오키로써는 울분을 풀 상대로써 만만한 부분도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은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는 가신들의 태도에 대한 불만을 담은 편지를 타다토시에게 보내어 추궁했다. 이것은 후에 생각 없이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한다고 반성을 했지만, 자주 투덜거리는 은거한 부친에게 아들이 질렸던 같다.


 호소카와 부자의 불화설도 있다.
 예를 들면 쇼우군[
] 이에미츠[家光]가 천연두에 걸리자 쾌유기원의 기도를 해달라는 아들 타다토시의 요청을 받았을 때, “될 수 있음 하지 않고 싶다고 떼를 썼던 것과 타다오키가 야츠시로 성() 새로운 저택에 연못을 파려고 할 때, 막부(幕府)의 눈을 의식한 타다토시가 조심스럽게 경고를 한 것에 대하여 타다오키가 안색을 바꾸어 화를 내며 되물은 것 등과 같은 부자간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예전엔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동격이었다는 자부심을 버리질 못하는 은거한 부친과 교묘한 처세술을 바탕으로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 당주인 아들. 서먹서먹해진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생겼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결국 [노병은 사라질 뿐]이라는 순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타다오키의 [영감탱이의 땡깡]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터가 그립구나


 하지만 그런 부자 관계는 타다오키 79살 때인 1641, 타다토시의 죽음에 의해 뚝 끊긴 것이다. 타다토시는 첫째 타다타카[忠隆]가 어떤 이유로 타다오키에게 폐적(廢嫡)된 후[각주:3], 후계자가 될 터였던 둘째 오키아키[興秋]를 대신하여[각주:4] 후계자가 되었다(후에 오키아키는 가문을 뛰쳐나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 토요토미(豊臣) 측에 섰기 때문에 타다오키에게 자살을 명령받는다).


 번()의 기반을 닦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던 타다토시가 56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신의 투덜거림을 들어 주지 않은채 죽어버린 것이다. 타다오키는 자신이 너무 오래 산다고 한탄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83살 때, 50을 넘어서 낳은 넷째 아들 타츠타카[立孝]도 죽어버렸다(향년 31).


 타츠오키는 그 해의 12 2일에 죽었다. 죽을 때 전쟁터가 그립구나”[綿考輯[각주:5]]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 많은 전쟁터를 질주했던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이, 이 자타가 공인하는 무인(武人)의 뇌리에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1. 과거 일본에서 행해진 축구의 리프팅과 같은 경기, 여러 명이 사슴 가죽으로 된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발등으로 서로 주고 받는 경기. [본문으로]
  2.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를 이름. [본문으로]
  3. 첫째 타다타카의 부인은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전투 전에 서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등에 의한 동군 측 무장의 인질 억류 시도가 있었는데, 타다오키 부인인 가라샤는 이를 거부하고 자살한. 그러나 이 때 타다타카의 부인 치요는 가라샤와 함께 죽지 않고, 옆집에 있는 자신의 친 언니이자 우키타 나오이에[宇喜田 直家]의 부인인 고우히메[豪姫]에게로 도망친다. 이것이 가라샤를 사랑하던 타다오키의 분노를 사서 후에 타다타카에게 이혼을 명령하지만, 타다타카는 거부하여 폐적당한다. 또한 이런 설도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이전, 히데요시 죽은 후의 혼란기에 타다오키는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 – 치요의 오빠],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 암살을 노린다는 소문으로 인하여 입장이 난처해진 적이 있었기에, 마에다 가문[前田家]과의 인척 관계를 없애 이에야스의 의심을 풀려고 했다는 설이 현재는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by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4. 둘째 오키아키[興秋]는 당시 에도에 인질로 있던 셋째 타다토시가 당주가 되자 타다토시를 대신하여 인질로써 에도로 가던 도중 자신이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과 인질로 받쳐지는 데 대한 울분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예에서와 같이 그 때까지의 세자(世子) 대신에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받친 아들을 막부(幕府)의 인물들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후계자로 삼는 일도 있었기에, 비단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후에 그와 행동을 같이 했던 요네다 켄모츠[米田 監物]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 후 번으로 돌아와서는 대대로 가로(家老)를 맡은 점과 진위가 가려지진 않았지만, 아마쿠사[天草]에 있는 촌장[庄屋]의 족보가 오키아키의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생존했었다는 설이 있다. 단지 요네다 켄모츠는 그때까지 전쟁터에서 워낙 뛰어난 무공을 많이 세운 무장이었던 점과 타다오키의 명령으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는 스파이로 들어갔기에 아무 일 없이 돌아와서 가로를 지냈다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5. 호소카와 가문의 기록.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