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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야마바이세츠'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10.02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 카이(甲斐)의 배신자 9
  2. 2005.11.01 무라카미 요시키요 8
  3. 2004.12.24 아나야마 바이세츠

<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영어판 >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부하 장수로 유명한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는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그는 용모가 특이했다고 한다. 거기에 에비스(えびす(모습))다이고쿠텐((모습))이 입고 있는듯한 카미코로모(紙衣 두꺼운 종이에 과일인 감의 즙을 발라 만든 천)로 된 하오리(羽織)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남과 다른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듯 하다[각주:1]. 품행은 특이했지만 붓글씨는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주가(主家)인 타케다(武田) 가문과는 대단히 짙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 타케다 가문의 선조 노부타케(信武[각주:2])의 넷째 아들인 시로우 요시타케( 義武)카이(甲斐)아나야마(穴山)를 영지(領地)로 삼아서는 아나야마 씨()를 칭했다고 한다. 그것뿐이라면 동족(同族)에 지나지 않겠지만 바이세츠의 모친은 신겐의 누나이며, 신겐의 딸 켄쇼우인(見性院)은 그의 부인인 것이다. 신겐은 외삼촌이며 또한 장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나 짙은 혈연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문을 배신하고 적 측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간 것이다.


 신겐이 죽고 젊은 카츠요리()가 타케다 가문의 당주가 되고 난 바로 다음부터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문을 배신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바이세츠는 당시 스루가(駿河) 에지리(江尻) 성주[각주:3],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하마마츠(浜松)성(城)과는 거리적으로도 가까워, 카이(甲斐)의 산골과는 달리 오다(織田)()나 토쿠가와 씨에 관한 새롭고 자세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던 장소에 있었다.


 바이세츠가 일찍부터 배신을 마음에 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1575 5월 나가시노(長篠) 전투 때의 일이다. 바이세츠는 아군의 질 것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먼저 예상하고는 전쟁터에서 가장 먼저 이탈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정강(精剛)을 자랑하던 코우슈우 군단(甲州軍團)은 근대전법의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신겐 때부터 무용을 자랑하던 많은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1581.

 바이세츠는 카츠요리에게 진언하여 니라사키(韮崎)신푸(府)성(城)을 쌓게 만들었다. 코우후(甲府)에서 이곳으로 타케다의 본거지를 옮긴 것인데, [사람은 성벽, 사람은 성]이라 말하며 성()이라는 것을 쌓지 않았던 신겐 시대를 뒤돌아볼 것도 없이, 이 축성이야말로 타케다 가문에 말기적 증상이 도래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이 다음 해(1582), 타케다의 유력한 부하장수인 키소 요시마사( 義昌)가 노부나가에게 달려갔다.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둔 일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직후 바이세츠도 배신하였다. 그는 배신에 앞서 신푸 성()에 인질로 보냈던 처자식을 빼돌리는 빈틈없음도 보여주었다. 불쌍하게도 키소 요시마사의 모친과 여동생은 신푸 성()의 정문으로 끌려 나와 십자가에 꺼꾸로 매달린 채 옆구리를 창으로 꿰뚫려 죽었다. 신푸 성()의 인질 천 여명 중 900명이 배신자들의 가족이었다고 한다.


 바이세츠가 배반한 이유는 타케다에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명문 타케다 가()의 혈통을 끊어지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바이세츠는 카츠요리의 자식 노부카츠(信勝)보다 자신의 자식인 카츠치요(勝千代) 쪽이 타케다의 혈통이라는 점에서 더 짙다고 생각한 듯하다. 언젠가 카츠요리 계통은 전쟁 속에서 끊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계통의 존속을 꾀하고자 고심한 것은 아닐까? 카츠치요의 할머니는 신겐의 누나이며, 모친은 신겐의 딸인 것이다.


 어쨌든 이에야스의 알선으로 오다의 군문(軍門)에 항복한 바이세츠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에 일본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과 조우하게 된다.

 혼노우(本能)사(寺) 이었다. 이때 바이세츠는 영지(領地)를 안도해준 것에 대한 사례인사차 아즈치(安土)의 오다 노부나가를 만난 후 사카이(堺)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함께였다. 거기에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변보가 전해진 것이다.

 급히 본거지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가(伊賀)를 지나려 했지만 이때 어째서인지 이에야스와는 다른 길을 취한 바이세츠는 그 도중에 쿠사치(草地())의 나루터에서 농민반란군(一揆)의 습격을 받아 어이없이 죽음을 당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어렸을 때의 이름(幼名)은 카츠치요(勝千代). 이름은 노부키미(信君). 겐바노카미(玄蕃頭), 므츠노카미(陸奥守)를 칭했으며, 1580년 머리를 밀고 불문(佛門)에 들어가 바이세츠사이(梅雪斎)라는 호를 칭했다. 1582년 타케다 멸망 시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붙어 소유하고 있던 영지(領地)를 인정 받지만 혼노우(本能)() 변 후 귀국 도중 농민반란군(一揆)에게 습격 당하여 살해당했다.

  1. 당시 무가의 사람이나 하이쿠(俳句 - 일본의 시)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행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카이 타케다 10대 당주. 참고로 신겐은 19대 당주. [본문으로]
  3. 정확히는 행정과 사법, 군정을 위임받은 죠우다이(城代)였다. [본문으로]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

1573 1 1 병사(病死) 73

1501 ~ 1573.

시나노(信濃) 카츠라오(葛尾)성주(城主). 맹장으로 이름 높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싸워 토이시(戶石)성 합전(合戰)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북부 시나노(信農), 에치고(越後)로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후에 신겐에게 패해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도망. 이후 객장(客將)이 되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합전 등에 참가하였다.

(그림은 태합입지전V에서)






신겐(信玄)에게 두 번 패배를 안기다.


 전성기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는 대단히 강했다.

 부와 북부 시나노(信濃)일대의 장병을 이끌고 사카키(坂城)의 카츠라오(葛尾) 성을 본거지로 삼아 타케다 하루노부(武田 晴信 = 信玄)와 승부를 벌였다.

 1548 2월 우에다하라(上田原)의 전투에서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方) 등을 패사(敗死)시켰을 뿐 만 아니라 신겐에게도 심한 부상을 입힐 정도로 대승하였으며, 1550년의 토이시(戶石)성 합전에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신겐에게 [토이시 붕괴(戶石崩れ)]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따라 붙게 할 정도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 온 요시키요의 무운(武運)도 여기까지였다. 신겐의 사키카타슈우(先方衆) 사나다 유키타카(真田 幸隆)에게 토이시성을 빼앗기자 유력한 휘하의 무장들이 계속해서 신겐쪽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본거지인 카츠라오 성의 방어 체제가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되자 시나노(信濃)의 용장 요시키요도 어쩔 수 없이 1553년 4월 9 카츠라오성을 버리고 8살의 외아들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에치고(越後)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 =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도망가게 된다.


에치고(越後)의 객장


 요시키요가 에치고로 망명한 목적은 켄신(謙信)의 원조를 받아 옛 영토를 회복하는데 있었다. 이것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의 원인이 되었는데, 카츠라오 성을 뒤로한지 14일 후인 4 23일에는 켄신의 원군을 얻어 카츠라오성을 탈취하였고 치이사가타(小県)()의 시오다(塩田)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주변은 이미 확고한 신겐의 영지가 되어 있었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에치고(越後)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후 요시키요는 옛 영토회복의 꿈을 계속 가슴에 품으며 도합 5회에 이르는 카와나카지마 전투에 4번 참가하였다. 1561 9월의 네 번째가 되는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사투[각주:1]에서는 시나노(信濃)의 병사 2000여기()를 이끌고 처음 전쟁터에 나서는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선봉으로써 용감히 싸웠는데 이때 요시키요의 나이는 이미 61세의 나이였다.


 고향 사카키(坂城)로의 복귀도 반쯤 포기하고 있던 1562년.

 신겐의 친족중(親族衆)인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사자라고 하는 승() 쿠우안(空庵)이 길보(吉報)를 카스가야마(春日山)성에 가지고 왔다.

 신겐이 적자(嫡子) 요시노부(義信)를 폐하고 서자 카츠요리(勝頼)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니 만약 켄신이 요시노부를 양자로 삼는다면 바이세츠도 켄신을 따르겠으며 곧바로 시나노(信濃)는 켄신(謙信)의 것이 되고 요시키요도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요시키요는 맘 속으로 크게 기대하였으나 쿠우안(空庵)의 이야기를 들은 켄신은 크게 화를 내며 쫓아버렸다고 한다.[名将言行錄]


 1564 5회째가 되는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합전에 63세라는 고령으로 참전하지 못하였고 대신해서 아들인 쿠니키요(国淸)가 출진하였다. 이 즈음의 일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上杉将士書上]에는 요시키요를 지칭해 [우에스기(上杉)()에서 그렇게 뛰어난 활약도 하지 못한다]며 호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래도 요시키요는 켄신에게 객장(客將)으로써 계속 대우받았다.


 소령(所領)은 칸바라(蒲原)군(郡)의 야마우라(山浦)와 우오누마(魚沼)() 내에 가지고 있었으며 켄신이 만들어 준 나오에츠(直江津)의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켄신은 다음해인 1565 3월 그다지 활약도 하지 않는 요시키요를 네치(根知)성주로 앉히고, 쿠니키요(国淸)를 토쿠아이(德合) 성주로 발탁하였다. 네치(根知)성은 엣츄우(越中)와 시나노(信濃)의 국경 사이에 있는 성으로, 그 성의 관할로 마츠모토(松本)가도(街道)라던가, 치쿠니(千国)가도가 있어 옛날부터 소금의 운송로이면서 또한 군사상의 요지이기도 했다. 켄신이 65세라는 말년의 요시키요에게 네치성을 맡긴 것도 카와나카지마 전투 후 신겐에 대한 대비와 함께 세이와겐지(淸和 源氏) 무라카미(村上)씨의 후예이며 시나노 명문족(名門族)인 무라카미의 명예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켄신은 요시키요에게 네치(根知)의 경비를 엄중히 할 것을 명령하며 어류나 소금을 네치를 통해 시나노로 운송시켰다. 요시키요는 이런 중요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1568 68세가 되자 스스로 노령을 이유로 켄신에게 가증(加增)받은 야마우라(山浦)와 오야마(飯山)의 소령(所領)을 쿠니키요(淸国)에게 물려준 후 다음 해인 1569년에 중이 되었고 70세에는 은거. 1572년에는 병으로 쓰러져 다음해인 1573년 정월 두 번 다시 고향의 땅을 밟아 보는 일 없이 네치 성에서 죽었다. 73세였다. 원수인 신겐(信玄)이 죽은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


아들 쿠니키요의 그 후


 요시키요가 남긴 야마우라 4만관() 등은 1573 12 쿠니키요에게 안도(安堵)되었다.

 쿠니키요도 켄신과 그 후계자인 카게카츠(景勝)에게 중용되어 카게카츠가 시나노의 북부를 진압한 1583 8 카이즈(海津)성의 성주 대리(城代)가 되었다. 여덟 살에 부친 요시키요의 손에 이끌려 에치고로 도망 친 후 3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 일반적으로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이 제 4차를 말하다. [본문으로]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1581 6 2 객사(客死) 42

1541 ~ 1582.

이름은 노부키미(信君). 친류중(親類衆[각주:1])필두로써, 타케다 가문(武田家)내에서도 발언권이 강했다. 타케다씨가 멸망할 때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항복하여 타케다씨 친족중에선 유일하게 살아 남지만,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나 귀국하던 도중 야마시로(山城)에서 토민에게 살해당했다.










배신의 배경


 어느새 이 인물의 마음에는 암암리에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결별할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이 주가(主家)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는 것 이외에 카이 겐지(甲斐 源氏)의 명문 타케다 가()의 이름을 남길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배신], [배반]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망상을 품은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라는 인물이 원래부터 주가(主家) 타케다 씨에 대한 충성심이 적었냐 하면 반대였다.


 바이세츠는 타케다 일문(一門)의 필두격으로 카이(甲斐) 남부의 후지가와(富士川) 천 유역에 펼쳐진 카와치(河內)령을 지배했던 아나야마 노부토모(穴山 信友)의 장남이었다.

 부친 노부토모의 부인이자, 바이세츠의 어머니인 난쇼우인(松院)은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 신겐의 부친)의 둘째 딸로, 노부토모는 자신을 [타케다 이즈노카미 노부토모(武田 伊豆守 信友)]라고 자칭할 정도로 타케다 일문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 노부토모의 적남(嫡男)인 바이세츠는 아명을 카츠치요(勝千代), 성인식(元服)을 치른 후에는 노부키미(信君)라 했으며 후에 신겐(信玄)의 딸인 켄쇼우인(見性院)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기에 신겐은 외숙부이면서 장인이므로 혈통상으로도 아주 가까웠다. 당연히 부친 노부토모처럼 타케다 일문 필두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1562년.

 약관 21세로 망부(亡父)의 뒤를 이은 바이세츠는 이후 신겐의 측근으로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를 시작으로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투[각주:2]에 출진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신겐이 병으로 죽고서 카이슈고쇼쿠(甲斐守護職)를 시로우 카츠요리(四郞勝頼)가 상속한 후에도 젊은 카츠요리의 후견인격이 되어 타케다가()에 대한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1575 5미카와(三河)의 나가시노(長篠)합전에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대패했을 때 역전(歷戰)의 중신과 여러 무장들이 계속해서 죽는 것에 흥분한 카츠요리가 여기서 죽겠다며 뛰쳐나가려는 것을 칼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강제로 말의 엉덩이를 때려 철퇴시킨 것도 후견인이라는 것을 자부했기 때문이다.


배반의 대가


 패전 후.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스루가(駿河)의 에지리(江尻)성을 지키며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침공에 대비했다. 최전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에지리(江尻)의 성장(城將)이 된 것이 바이세츠의 운명을 크게 변화시킬 줄은 카츠요리도 그리고 바이세츠 본인도 예상못했다.


 1579 9월.

 토쿠가와군()이 스루가 침공을 개시. 이미 타카텐진(高天神)성을 타케다군()에게서 탈취한 상태였으므로 그 다음이 카이(甲斐)가 될 것임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노부키미가 중이 되어 [바이세츠사이후하쿠(梅雪斎不白)]라 칭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탄생으로 40세가 된 그가 타케다가()의 장래를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증거이기도 했다.


 1581년.

 오다(織田)()의 침공에 대비하여 카츠요리(勝頼)가 신푸(新府)성을 축성했을 때에도 바이세츠는 일문(一門) 필두로써 거액의 건설자금을 기부하였기에 아직 이 시점까지는 여전히 후견인으로서 강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다음해 1582년 다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이 카이 공략을 개시하자,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의 운명에 내일이 없다고 판단하여 카츠요리와 결별을 결의. 곧바로 행동을 개시한다. 그는 카츠요리보다도 타케다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다 자부하는 자신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 - 카츠요리를 대신할 명문 타케다가()의 총수로 삼아 명문 타케다의 이름을 존속시키려 한 것이다.

 바이세츠는 우선 코우후(甲府)에 인질로 가 있던 처와 자식을 시노비노모노(忍の者 = 닌쟈)를 이용하여 탈출시킨 후 이에야스에게 에지리 성을 넘겼다. 이 부분을 [신장공기(信長公記)]에는 [아나야마 겐바(穴山 玄蕃) 카이(甲斐)()부츄우(府中)에 인질로 두고 있던 처자식을 2 25일 비오는 밤을 틈타 빼내어]로 기록하고 있다.

 카츠요리는 [바이세츠 배반]을 알게 되자 오다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나노(信濃)에서 신푸(新府)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지만 믿고 있던 중신(重臣)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도 배반당하여 텐모쿠(天目)산에서 자살한다.


 한편 토쿠가와군()을 길안내하며 후지가와 천을 거슬러 올라 코우후(甲府)로 침공한 바이세츠는 노부나가(信長)에게 자신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를 타케다 가의 후계자로 허락 받는 등,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에야스와 함께 아즈치(安土)성을 방문하여 노부나가에게 환대 받고 돌아가던 중에 구경하러 들린 사카이()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혼노우지(本能寺)의 변(]이 일어난다. 귀국하던 도중 야마시로(山城)국 우치다하라(宇治田原)부근에서 야도(野盜)에게 습격 받아 죽임을 당했다. 향년 42.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배반자의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1. 일족 친척들을 지칭함.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공포로 몰아넣어 똥을 지리게 했다는 전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