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624년 7월 13일 병사(病死) 64세.

1561년 ~ 1624년.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각주:1]]에서는 칠본창(七本槍[각주:2]) 필두(筆頭)로 이름을 드높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여 승리. 아키[安芸], 빙고[備後]를 하사받지만, 막부(幕府)에 의심 받아 히로시마 성[広島城] 무단 개수(改修)를 이유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滅封)당했다.





마사노리의 인물상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3]]가 쓴 [번한보(藩翰譜)[각주:4]]에 따르면 마사노리는,
'몹시 사납고 거칠어 사람 죽이는 것을 벌레를 죽이는 것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던가, '악행을 일삼아 아키, 빙고의 토민(土民) 등 모두 학정에 괴로워하여 맘 편할 날이 없었다'고 혹평을 하고 있다.
 확실히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성격이기에 영민(領民)이나 가신(家臣) 중 겉으로는 뺀질 대면서 뒤로는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이나 명령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용서 없이 귀나 코를 베는 등 잔혹한 형벌로 다스렸다.

 하지만 그가 영내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세심하고, 공정한 토지조사[検地[각주:5]]와 토산품의 개발, 상업 무역의 진흥 등에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또한 그가 개명(開明)적인 것은 히로시마 성(城) 아래에 기독교 교회를 설립하여 가신이나 영민중에 입신, 세례하는 사람이 매년 천명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시 마사노리는 예수회 선교사들 사이에서 굉장히 평판이 좋았다. 1609~10년의 [일본 예수회연보]에는,

우리 성교(聖敎)를 보호하는 신도(信徒)가 아닌 제후 중 제일은 아키, 빙고 양국(兩国)의 영주(領主)인 후쿠시마 타이후[大夫]님이다. 그는 예전부터 우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올해는 한층 더 명확히 그 뜻을 보이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자기 영토의 항구에 스페인, 포르투갈의 상선을 입항시켜 해외무역을 활발히 하려는 타산(打算)에서 생겨난 결과겠지만, 그가 개명적이며 상업활동에 열심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카이에키[改易[각주:6]]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明渡)

 1619년 6월 2일.
 바쿠후가 갑자기 마사노리를 카이에키한 것은 그가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각주:7]]를 어기고 수해(水害)를 입은 히로시마 성(城)을 무단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구실로 속으로는 그가 옛 토요토미[豊臣]의 유신(遺臣)이었다는 것이 바쿠후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의 카토우 가문[加藤家]처럼 진심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어차피 카이에키를 벗어날 순 없었을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카이에키가 전해졌을 때 취한 마사노리의 태도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 때 가신들의 대응이다.

 1619년 6월 2일.
 마사노리는 카이에키를 전하는 사자(使者)에게 절을 하며,
 “내리신 말씀은 알겠습니다. 오오고쇼[大御所[각주:8]]가 살아계시다면 마사노리도 할 말이 있지만, 당대(當代[각주:9])에게는 이제 와서 할 말도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마사노리의 가신들은 히로시마 성(城) 접수를 하기 위해 온 여러 장수들에게,
 “이 성은 주군 마사노리가 지키라고 명령받은 성이니 아무리 쇼우군[将軍]의 명령이라 하여도 건넬 수는 없소. 억지로라도 건네 받으려면 창으로 뺏어보시길”
 이라 말하며 농성(籠城)하다 죽을 각오를 선명히 하였다.

 그 때문에 접수사(接收使)는 에도[江戸]에 억류되어 있던 마사노리에게 이 뜻을 전하여 마사노리가 직접 쓴 편지[각주:10]를 얻어 겨우 개성(開城)을 승낙시켰다고 한다. 더구나 성을 건넬 때도 흐트러짐 없었고, 넓은 마루에는 혈판(血判)으로 된 농성을 맹세하는 무사 2000여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어 그 각오가 단단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성을 건넨 후 그러한 가신들은 모두 다른 다이묘들에게 초대되어 임관될 수 있었다고 하니, 마사노리가 평소부터 얼마나 가신들에게 존경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봉(移封)후의 선정(善政)

 히로시마 49만 8천석에서 감봉 당한 마사노리는 시나노 카와나카지마 2만석과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각주:11]을 합한 4만 5천석이 주어졌다.

 1619년 7월.
 근신(近臣) 30여명을 이끌고 임지로 향하여 타카이노 촌[高井野村]에서 1624년 7월까지 6년 정도 지냈다. 죽은 것은 1624년 7월 13일. 향년 64세였다.

 마사노리는 이 곳에 오자마자 영내(領內)를 순시하며, 당시까지 햇볕이 잘 들거나 그늘이 어느 정도 드는지 또는 물길이 좋고 나쁜 것만으로 연공을 차등 부과하고 있던 농지에 생산력이 좋고 나쁨까지 고려한 새로운 토지조사[検地]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오부세[小布施]의 하천 개수 공사를 하여 지금도 '타이후[大夫]의 천냥 둑[千両堤]이라는 사적이 남아있다. 즉 현재 오부세 정[小布施町] 우에하라[上原]에 있는 천냥 둑은 여기를 지나던 마츠가와 강[松川]이 몇 갈래로 나뉘어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던 것에 둑을 쌓아 흐름을 바뀌게 하여 피해를 없앤 둑이다.

 마사노리의 4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가 죽자 그의 우오누마 군(郡) 2만 5천석을 바쿠후에 반상하였고, 남은 카와나카지마 2만석도 그가 죽은 후 몰수당했다.

 '토쿠가와짓키[徳川実紀][각주:12]]에 따르면, 마사노리가 죽은 후 가신이 바쿠후의 검시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유골을 화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째서 검시관을 기다리지 못했는지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설도 있어 그의 마지막은 수수께끼이다.

  1. 1583년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의 싸움. [본문으로]
  2.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3.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4.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甲府] 번주(藩主)였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개 가문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5.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6.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7. 에도 막부가 다이묘우[大名]나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 등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 [본문으로]
  8.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말함. [본문으로]
  9. 2대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말함 [본문으로]
  10. "활을 보라. 적이 있을 때는 중요하게 쓰이지만, 평화로운 시대가 되면 보자기에 쌓여 창고에 보관된다. 나는 활이다. 지금은 치세(治世)이니 카와나카지마[川中島]라는 창고에 보관되어 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본문으로]
  11. 이 곳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것 [본문으로]
  12. 토쿠가와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 조선왕조실록 같은 것이다. [본문으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

1615 5 28일 병사 60

1556~1615.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칠본창[七本槍]'[각주:1] 중 한 사람이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역(後見役)이 되어 토쿠가와[德川] 측에 대한 연락창구가 되었지만, 오히려 내통자로 오해 받아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떠났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후에 죽었다.







우직한 카츠모토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16살 때부터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했는데, 이런 카츠모토를 히데요시는 곁에 두고 길러 키워 가신(家臣)으로 삼았다.

 1583 4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칠본창'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공을 세워 3000석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과 비교하면 출세 가도에서 밀려나 히데요시 말년인 1595년이 되어서야 겨우 셋츠[摂津] 이바라키[茨木]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그 전 해인 1594년에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신하로 선택되었다. 히데요리의 여러 신하들, 특히 측근을 감찰(監察)하는 지위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다다음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오오사카 성에 입성해서는 히데요리 곁을 지키며 참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그런 우직함을 신뢰하여 1601년 카츠모토에게 야마토[大和] 헤구리 군[平郡郡] 18천석을 가증하여 히데요리의 가로(家老)로 임명하였다. 이때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면 이것이 카츠모토에게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열었고, 이 일로 인하여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과는 뭐든지 미묘한 문제가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카츠모토에 대하여 요도도노[淀殿][각주:2]를 필두로 한 오오사카 성내의 반토쿠가와파는 무엇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카츠모토를 보게 되었다. 토요토미-토쿠가와 양 가문의 중개자로써 쌍방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부심하는 카츠모토는, 언제부턴가 오오사카 성내의 혼란과 이간을 꾀하는 이에야스의 교묘한 술책에 희롱당하게 되었다.


호우코우 사[方広寺] 종명(鐘銘) 사건


 1602 4월.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통해 히데요리 모자(母子)에게 쿄우토[京都] 호우코우 사[方広寺] 대불전(大佛殿)의 재건을 권유하였다. 히데요리도 요도도노도 죽은 히데요시의 공양과 토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를 따랐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에야스가 오오사카 성()에 저장되어 있는 막대한 금은을 쓰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카츠모토가 조영(造營) 책임자라는 큰 임무에 임명받았다. 그는 이에야스와 빈번한 연락을 통해 꼬투리 잡힐 일 없이 사업을 진행해갔다.


 호우코우 사() 대불전은 1614 4월에 준공.

 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개안공양을 눈 앞에 두고 이에야스가 불만을 표했다. 종에 새겨진 '家安康' '칸토우[関東]를 저주하는 말'[각주:3]이고, [君臣豊樂子孫殷昌]이 토요토미의 번영만을 기원하는 말이라며 개안공양의 연기를 명령했다.

 카츠모토는 급히 순푸[駿府][각주:4]로 해명하기 위해서 향했다. 당초는 이 문제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면회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를 통해 오오사카 성()이 어째서 많은 수의 낭인을 모집하고 있는지 힐문하였다. 그리고,

1. 히데요리가 에도로 온다.[각주:5]

2. 요도도노가 인질이 되어 에도에서 산다.

3. 히데요리가 오오사카 성()을 나와 다른 곳과 영지를 바꾼다.[각주:6]

 라는 어느 것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요구해 왔다. 대불전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정치적 난제를 껴안게 된 카츠모토는 크게 놀랐다.


 한편 요도도노도 따로 이에야스에게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각주:7]와 쇼우에이니[正栄尼][각주:8]를 파견하였다. 이에야스는 이 둘에게 종명 문제 등 난제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환대하며 히데요리 모자의 안부에 신경 썼기에 당연하게도 오오사카로 돌아온 쌍방의 보고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교묘한 분열 책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오오사카 성내에는 '카츠모토는 칸토우[関東]에 알랑거리는 놈'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곧이어 그 목소리는 '배신자 카츠모토를 죽여야 한다'로 변했다.


충신인가 역(逆)인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신뢰를 잃은 지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기에 카츠모토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오오사카 성()을 탈출하여 이바라키 성()으로 갔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칸토우[関東]에 대한 오오사카 측의 선전포고라 여기고 오오사카 정벌을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1614 10 11일. 이에야스는 순푸를 출발하여 이로인해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된 이에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에 틀림이 없다.


 11 4일.

 쿄우토[京都]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곧바로 카츠모토를 불러 오오사카 성() 공략에 대한 이야기 나누었다. 카츠모토에게는 원하지 않았던 바이며 어쩔 수 없던 선택이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다. 오오사카 성내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카츠모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협력을 바라는데 거부할 수도 없었다.


 12 16일.

 시작된 공성 측의 대포 공격 중 한 발이 요도도노가 거주하던 곳에 떨어졌다. 거기에 다음해 여름의 싸움 때 야마사토[山里]의 성곽에 있는 히데요리 일행의 소재를 확인하여 히데타다[秀忠]에게 고한 것도 카츠모토라고 한다.


 토요토미 가 멸망으로부터 20일 후.

 카츠모토는 쿄우토[京都]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상은 깊은 죄와 자기 혐오에 빠져 자해(自害)를 했던 것이 아닐까?

  1.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히데요리의 생모. [본문으로]
  3.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안(安)자로 갈라놓았기 때문.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가 히데타다[秀忠]에게 쇼우군[将軍]직을 물려주고 은거하고 있던 곳. 말이 은거지 중요정책사항들은 대개 맡아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즉 막부의 지배하에 들어오라는 의미. [본문으로]
  6. 대략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가 유력 후보지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모친으로 요도도노[淀殿]의 유모(乳母). [본문으로]
  8.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유모(乳母)이며, 히데요리의 창술 스승 와타나베 타다스[渡辺糺]의 모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