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나가마사[田 長政]

1623년 윤8 4일 병사(病死) 55.

1568 ~ 1623.

쿠로다 요시타카[田 孝高]의 장남. 부친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략 때 데뷔전[初陣].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성주(城主)가 되어 조선 침공[朝鮮役][각주:1]에 종군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치쿠젠[筑前] 52만석을 하사 받아, 후쿠오카 번[福岡藩]번조(藩祖)가 되었다.








모친과 처를 탈출시켜 준 것에 대한 은상(恩賞)


 1600 12 11일.
 쿠로다 나가마사는 부젠[豊前] 나카츠 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이 성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 다음 해인 1601년에는 후쿠오카 성[福岡城] 축성에 착수함과 동시에 영내(領內) 6개의 지성(支城)을 쌓아, 세키가하라[
ヶ原] 때 전공이 있던 중신들을 죠우다이[城代][각주:2]로 임명, 배치하였다.

 쿠라테 군[鞍手郡]의 타카토리 성[鷹取城]의 죠우다이에는 모리 타헤이[母里 太兵衛]가 임명되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서 명창(名槍) '니혼고우[日本号]'를 술내기로 따낸 일화로 유명한 타헤이는 세키가하라 때도 활약하였다.


 나가마사가 이에야스[家康]의 우에스기 토벌[会津征伐][각주:3]에 출진하자, 나가마사의 예언대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세력은 오오사카[大坂] 텐마[
満]의 쿠로다 저택을 포위했다. 타헤에는 밤을 기다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부인 코우엔[幸圓]과 나가마사의 부인인 네네[]를 가마니 안에 넣고, 두 개의 가마니를 바구니에 담아 긴 막대 끝에 걸쳤다. 그리고 상인으로 변장하여 그 막대를 어깨에 메고 뒷문 쪽에 있는 목욕탕의 벽을 뚫고 탈출, 쿠로다 가[黒田家]에 출입하는 상인 나야 쇼우자에몬[納屋 小左衛門]의 집으로 옮겨 숨겼다.


 부친 죠스이가 나카츠[中津]에서 파견한 배가 오오사카[大坂] 포구에 도착했지만, 이시다 측의 군선이나 작은 배들, 병사들의 경비가 심해서 타헤이, 쿠리야마 토시야스[栗山 利安], 미야자키 스케다유우[宮崎 助太夫]의 세 가노(家老)들은 당혹하였다.


 7 17일 밤.
 타마츠쿠리[玉造]의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이시다 쪽의 인질요청을 거부하고 자살한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각주:4]와 호소카와 저택이 불타오른 것이었다. 경비하던 병사들이 타마츠쿠리로 향한 틈을 타서 코우엔과 네네는 729일 본국인 나카츠에 무사히 도착했다.


 모친과 부인을 탈출시킨 그들의 공적을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던 나가마사는 새로운 영지(領地) 후쿠오카 번()을 지배함에 있어서 지성 주둔 제도를 택하여 타헤이를 타카토리 성(), 쿠리야마 토시야스를 아사쿠라 군[朝倉郡] 마테라 성[左右良城]에 죠우다이로 각각 임명했다. 또한 가중 통제의 일환으로 '화내지 않는 모임[腹立てずの会]'이라는 것을 만들어, 중신부터 하급 무사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토론회를 열어 그들의 의견을 나가마사에게 전할 수 있게 하였다.


()의 미래를 생각하며……


 1623.
 55
세가 된 나가마사는 에도[
戸]에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약을 복용했지만, 열격(噎膈)이 같이 생겼다. 쿄우토[京都]에 들리지 않고 후시미[伏見]에서 오오사카[大坂]로 이동. 치쿠젠에 귀국해서 몸을 돌보려 했지만, 이에미츠[家光] 3대 쇼우군[軍] 취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결국 오오사카에서 2~3일 정도 머문 후 상경하여 호우온 사[報恩寺]를 숙소로 정했다. 상경한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도 나가마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병문안 하였다.


 나가마사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깨달았을 때, 부하에게,

 지금 죽을 때가 되니 안타까운 것이 세 가지 있다
 고 말했다고 한다(쿠로다 가문 족보[黑田家譜]).


 [첫째는 어머니 코우엔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저지른 것이며,
 
둘째는 적자(嫡子) 타다유키[忠之]가 아직 약관(21)임에도 뒤를 돌보아 주지 못하고 죽는 것.
  셋째는 휘하의 장졸들을 데리고 평소 훈련시키며, 전투에 임해서는 엄숙과 절제를 지키고, 내 수족과 같이 움직이고 싶었다. 이것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 이 이외에 미련은 없다.]


 윤 8 4일.

 나가마사는 일어나 앉아서 타다유키에게,

 “위를 공경하고 아래를 자비롭게 대하거라. 절대 게으름 부리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속세를 떠돌아다녔지만 이제는 돌아간다 극락정토의 하늘로

 此のほどはうき世の旅にまよひきて今こそかへれあんらくの空

  1.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2. 성주를 대신해서 성과 그 주변을 행정, 관리, 방어하는 직책. [본문으로]
  3.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자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 사건. [본문으로]
  4.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이 글에선 자살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크리스천이었기에 가신에게 자신을 창으로 찌르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가토 요시아키[加藤 嘉明]
1631년 9월 12일 병사(病死) 69세.

1563년 ~ 1631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에서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각주:1]]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활약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平定], 조선침략[朝鮮の役[각주:2]]에서는 수군을 이끌고 참가.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이요[伊予] 마츠야마[松山], 이어서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를 영유(領有)했다.



영광의 시즈가타케 칠본창

 카토우 요시아키는 어렸을 적부터 기마술(騎馬術)이 뛰어났기에,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자 그 재능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측근인 카토우 카게야스[加藤 景泰]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583년 4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분전하여 칠본창(七本槍)의 한 명이 되어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秀吉子飼いの武将[각주:3]]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천하 평정이나 조선 침략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요 마츠야마 시대

 수많은 전공을 세워 1595년 아와지[淡路]의 시치 성[志知城] 1만5천석에서, 이요[伊予] 마사키[正木=마츠마에[松前]] 6만석에 봉해져 7월에 마사키에 입성했다. 그 후 조선에서의 공적을 평가받아 가증(加增)되어 10만석을 영유(領有)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의 세키가하라[関ヶ原の戦い]에서는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로서 동군에 참전하여 활약하였고, 전투가 끝난 후인 11월에 이요 마츠마에 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1603년 마츠야마 평야의 카츠야마 산[勝山]에 성을 쌓아 이전(移轉)하였다. 카츠야마를 마츠야마로 개명하고 번도(藩都[각주:4])에 어울리는 성 밑 마을[城下町] 경영에 힘썼다.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冬の陣],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의 승리로 인해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세상이 되었다. 1622년 9월에는 토쿠가와 가문의 세자 이에미츠[家光[각주:5]]가 처음 갑옷을 걸치는 의식[具足始め]을 집행하였고, 1626년에는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가 상경하였을 때 함께 따라가 지쥬우[侍従]에 임명받았다. 요시아키는 노련한 무장이었기에 쇼우군 가문[将軍家]도 그를 우대하였다.

말년에 아이즈[津] 영전(榮轉)

 요시아키는 성 밑 마을 마츠야마의 기초를 쌓았지만, 마츠야마로 이전한지 25년 후인 1627년 2월 10일(3월이라고도 한다), 므츠[陸奥] 아이즈[会津] 43만 5천석으로 영전하게 된다. 아이즈는 오우슈우[奥州[각주:6]]의 요충지였기에 지용겸비의 무장을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쇼우군[将軍]이 중의(衆議)를 모으자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
변경의 중요지인 아이즈를 맡길만한 인물은 요시아키 이외에는 없습니다”
 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모우 타다사토[蒲生 忠郷][각주:7]가 죽은 뒤 아이즈의 영주(領主)를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노신(老臣)들이 모인 회의 석상에서 요시아키를 추천한 것인데, 타카토라와 요시아키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유명했기에 그 이유를 묻자 타카토라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사적인 일, 아이즈에 관한 것은 공적인 일이다.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 요시아키 이외의 적임자는 없다”
 고 말했다고 한다. 요시아키도 타카토라의 이 추천에 감격하여 그 후론 수어지교(水魚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이때 요시아키는 아이즈가 오우우[奥羽] 2주[각주:8]의 요충지이며, 자신은 늙었고 또한 가신들도 노련했던 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도저히 그런 중책(重責)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완고히 사퇴(辭退)했지만, 쇼우군은 요시아키와 같이 군법(軍法)과 민정(民政)에 밝은 노련한 용장이야말로 적임이라고 말하자 요시아키도 그 명령에 따랐다고 한다.

 한편 이런 이야기도 있다. 막부의 온미츠[隠密[각주:9]]의 보고에 따른 전봉(転封)이라는 설도 있다.
 온미츠를 이요[伊予]에 파견하여 마츠야마 성을 조사하였고, 또한 마츠야마 번(藩)의 동향 및 농민의
피폐(疲弊)한 모습 등을 보고받은 막부에 다른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마츠야마 번(藩)의 확립에 계획적인 정책을 실시해 왔던 요시아키에게 있어서는 지금껏 노력이 공염불이 되었다.

 1627년 5월 4일.
 아이즈 와카마츠 성에 입성하여 시라카와[白川] 가도를 고치는 등 도로, 교통망을 정비 하였고, 산업을 육성하여
아이즈누리[会津塗]라고 하는 칠기(漆器)나 아이즈혼고우야키[会津本郷焼[각주:10]] 등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시모리[石盛]의 금산(金山)이나 카루이자와[軽井沢]의 은산(銀山) 정비를 시작으로 광산(鑛山) 개발 등을 양성하여 번정(藩政)의 기초를 쌓기 위해 힘썼다.

 요시아키는 몸소 아이즈 외곽으로 나가 농지를 돌아보았고 또한 농민들에게 정보를 모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렇게 번정 확립에 힘 쏟은 요시아키는 1631년 9월 12일에 에도 사쿠라다[桜田]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1.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3. 그 무장이 어렸을 적부터 키운 무장. 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이를 때는 반드시 붙는 대명사와 같은 존재. [본문으로]
  4. 번의 수도. [본문으로]
  5. 에도 막부 3대 쇼우군[将軍] [본문으로]
  6. 므츠(陸奥)의 별칭. [본문으로]
  7.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손자. [본문으로]
  8. 즉 므츠(陸奥)와 데와(出羽). [본문으로]
  9. 첩보활동을 하던 하급 무사. [본문으로]
  10. 아이즈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 [본문으로]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

1636 12 30일 병사(病死) 81.

1559 ~ 1638.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적남(嫡男).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를 섬기며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데뷔전. 시코쿠[] 공략의 전공(戰功)으로 아와[阿波] 일국()을 하사 받았다. 조선 침략 시에는 위기에 빠진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를 구출하는 활약을 하였고 은거 후에도 적자 요시시게[鎮]를 보좌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과 이에마사

 

 1600 9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토요토미 계[豊臣系]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의 유력 무장으로 여겨지던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 아직 14살인 적자 요시시게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동군에 종군시키는 한편 자신은 영지를 히데요리에게 반환하고 아와[阿波]를 나와서 은거. 머리를 깎고 '호우안[蓬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올랐다[각주:1].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아와[阿波] 일국은 요시시게에게 새로이 주어졌다.[각주:2]

 

 이에마사는 아와[阿波]로 돌아와서 카츠우라 군[勝浦郡] 나카다 촌[中田村]의 은거소(코마츠시마 시[小松島市])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센고쿠(戦国).

 1605년 아와 군[阿波郡] 이치바 쵸우[市場町]에 호우안의 서명으로 마을 법률을 반포하는 등, 요시시게의 뒤에서 번()의 정치를 보좌하는 한편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秀忠]나 이이 가문[井伊家] 등 -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중신(重臣)과 연락을 자주 하여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과 토쿠가와 막부(幕府)와의 파이프를 강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614 8월.

 은거소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에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히데요시의 목상(木像)을 받든 호우코쿠 신사[神社]를 세웠다. 이 해 10월에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 冬の陣]이 일어났기에 이 사실은 이에마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었서 굉장히 흥미롭다.

 

편히 쉬려던 여생이……

 

 어쨌든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 씨가 멸망하여 천하가 토쿠가와의 것이 되자, 요시시게는 전공(戰功)에 의해 아와지[淡路] 일국()이 더해져 25 7천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618년.

 요시시게도 착실히 성장하여 농민정책을 중심을 한 '벽서 23개조[壁書二十三条][각주:3]라는 국법을 제정하여 번정(藩政) 확립에 힘썼다.

 이에마사도 안심했을 것이다. 번정은 전부 요시시게에게 맡기고 편히 여생을 즐기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는 이에마사를 쉬게 나두질 않았다.

 1620 2 26일.

 하치스카 요시시게가 35살이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토쿠시마 성[城]에서 병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4월에 그 뒤를 센마츠마루[千松丸 = 타다테루[忠英]]가 이었지만 아직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이에마사는 나카다 촌()의 은거소에서 토쿠시마 성의 서측 성곽[西丸][각주:4]으로 옮겨 와, 어린 번주(藩主)를 후견하여 1629년 병으로 누울 때까지 사실상 이에마사가 통치를 계속 하게 된 것이다.

 

 그때 가노(家老)[각주:5]나 모노가시라[物頭][각주:6] 등 주요 가신들에게 대하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번주가 어린 동안에는 모노가시라가 모든 것을 처리할 것.

 주인이 어린 동안에는 각자가 자기 할 일은 확실히 할 것.

 공공(公共)의 일은 밤낮없이 봉사할 것.

 어떤 일이건 사사로운 감정을 넣지 말 것.

 

 등의 지시를 내렸다.

 또한 에도[戸] 루스이야쿠[留守居役][각주:7]에게도 에도 저택의 운영에 대해서 4개조의 지시를 내렸다.

 

 이에마사는 하세가와 에치젠[長谷川 越前]이나 외손자인 하치스카 야마시로[蜂須賀 山城][각주:8]를 가로(家老)로 삼아 센마츠마루를 보좌시켰다.

 참근교대(交代)[각주:9] 할 때에도 이에마사가 같이 갔다.

 이에마사는 번정의 확립에 큰 역할을 이룸과 동시에 노련함을 무기로 바쿠후가 흠잡을 만한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1623년에는 쿠니부교우[奉行]를 설치하여 지방 행정의 정비를 꾀했고,

 1627 7월에는 요시시게의 '벽서 23개조'를 보완하는 의미에서 '이서 7개조(裏書七)'를 제정하였다.

 센마츠마루는 1623년에 아와노카미 타타시게[阿波守 忠鎮]라 이름을 바꾸고, 다음 해 봄에는 타다테루(忠英)라 고쳤다.

 

 그 후에도 이에마사는 신전(新田)개발이나 염전(鹽田)개발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매년 에도에 가서는 막부와의 파이프를 더욱 강고히 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이에마사가 가신들에게 영지를 배분하는 문서를 쓰는 등 번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에마사의 언행을 기록한 [존어집(尊語集)]에는,

 어린 타다테루의 늦잠을 고치라고 한 말이나, 가신들이 타다테루가 자신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 상담하러 왔을 때, '어렸을 때는 그런 법이다'라며 타다테루를 감싸는 듯 하다가, 에도로 출발하기 전에 인사를 올리러 온 타다테루에게 정원에 있는 개나 참새를 자신의 뜻대로 다루는 것을 보여준 뒤 새나 동물도 이렇게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으니 부하에게 정을 주고 위엄을 가지고 가르치면 충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말한 부분이 보인다.

 

 1638 12 23일.

 토쿠시마 성[城] 서측 성곽에서 죽었다 81.

 번정의 확립을 자신의 눈으로 끝까지 지켜본 일생이었다.

코우겐 사[興源寺]에 있는 이에마사의 묘 - 토쿠시마 시[徳島市]


  1.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겠다는 의미. [본문으로]
  2. 이에마사는 서군 편에 섰다, 혹은 병에 걸렸었기에 오오사카[大坂]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본문으로]
  3. 벽서(壁書)란 법령을 적은 종이나 나무를 벽에 붙인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에도시대 때. 보통 서측 성곽[西の丸]은 다이묘우[大名]가 은거하며 머무는 곳이었다. [본문으로]
  5. 가문의 수상(首相) 격 [본문으로]
  6. 중급 관리자. [본문으로]
  7. 에도[江戸]에 있는 번(藩)의 저택의 책임자. [본문으로]
  8. 하치스카 야마시로의 증조부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죽은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이다. [본문으로]
  9. 참근(参勤)은 쇼우군에게 봉사한다는 의미, 교대(交代)는 봉사를 쉬고 자기 영지로 돌아가 정무를 맡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토를 왔다 갔다 했으며 처자식은 인질로 에도에 항상 남겨 두었다. [본문으로]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625 4 27일 병사(病死) 73.

 

1553 ~ 1625.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의 장남. 할아버지인 모토나리[元就]가 죽은 뒤 가독 상속. 츄우고쿠[国] 지방에 120여 만석을 영유(領有)하며 토요토미[豊臣] 정권의 오대로(五大老)[각주:1] 중 한 명이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이 되지만 패하여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 국[]으로 감봉(滅封). 쵸우슈우 번[長州藩]번조(藩祖)가 되었다.

 

 




 


은거와 오오사카[大坂]의 전투

 

 테루모토는 1553 1 20일에 아키[安芸]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모우리 타카모토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타카모토의 급사(急死)로 인하여 할아버지인 모토나리의 후견(後見)을 받아 11살에 성인식을 치렀다.

 젊어서부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등을 상대하며 성장했다.

 

 히데요시의 말년에는 오대로(五大老)라는 중직에 임명되어 츄우고쿠[国] 지방 9개국() 1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군림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의 총사령관이면서도 중요한 때 움직이지 않았다.

 

 테루모토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지자마자 머리를 깎고 '겐안소우즈이[幻庵宗瑞]'라는 호를 칭하였다.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 되어, 번(藩)의 수도를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북쪽 해변의 땅 하기[萩]로 하는 이봉(移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테루모토의 말년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쉬기에는 일렀다.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는 토쿠가와 씨[徳川氏]에 대한 충성과 히데요시가 죽을 때 말한 '히데요리를 부탁한다'라는 유언 사이에서 고심한 끝에 토요토미 가문[徳川家]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의미로 극비리에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 秀頼]에게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을 파겼하였다.

 사실 사노 도우카라는 것은 위명(僞名)으로 정체는 필두(筆頭) 노신(老臣)인 시시도 모토츠구[宍戸 続]의 동생인 나이토우 모토모리[藤 元盛]였다.

 테루모토는 도우카에게 병량(兵糧) 1만석()[각주:2]을 대신한 황금(黃金) 500매를 주고서는 그의 가족과 자손은 확실히 뒤를 돌보아 줄 테니 걱정 말라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입성시켰다.

 , '만약 토요토미 쪽이 이겼을 때는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10개국()을 줄 것'이란 약속을 히데요리와 맺었다.

 

 그러나 토요토미 측이 패배하여 오오사카 성이 낙성(落城)되고,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에도 도우카가 살아 남았기에 문제였다. 이에야스는 도우카가 모우리의 가신(家臣)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테루모토는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쿄우토[京都]에 숨어있던 도우카를 잡아서는 할복(割腹)시키고, 목을 이에야스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또한 테루모토가 뒤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던 도우카의 장남인 모토요시[元珍]와 둘째인 아와야 모토토요[粟屋 元豊]도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에야스는 두 아들까지 죄를 주고 싶지 않다며 귀국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테루모토는 둘 다 아비 도우카와 마찬가지로 배를 가르게 하여 막부(幕府)에게 자신은 무죄라는 것을 주장했다.

 충신을 죽여서 가문을 지킨다.

 모우리의 그런 전통으로 이후에도 바쿠후에게 카이에키[改易][각주:3]당하는 일 없이 메이지 시대[明治時代]를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자 테루모토도 그다지 위기감 느끼는 일 없이 - 은거생활은 주로 모우리 종가(宗家)안태(安泰)를 위해 힘썼다.

 

 우선은 1616.

 테루모토의 딸과 킷카와 히로마사[吉川 正][각주:4]와의 결혼이었다. 킷카와 가문[吉川家]에 시집 보내기에 앞서 테루모토는 제멋대로이고 성질이 급한 딸에게,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가문과의 강한 유대를 위해서이니 불만이 있더라도 뭐든 참아야 하느니라 

 라고 아비답게 간절히 타이르고 거기에 결혼 지참금[化粧料]으로 5천석을 주어서 시집 보냈다. 

 결혼으로 인해 이와쿠니 령[領] 킷카와 가문과의 결속이 두터워지자, 1617년에는 둘째 아들인 나리타카[就隆]에게 스오우[周防] 토쿠야마[山] 3만석을 나누어 주어 '토쿠야마 번[徳山藩]'을 만들었다.

 

 1600년에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의 '쵸우후 번[長府]' 3 6천석을 창설.

 나중의 일이지만 1653년에 히데모토의 둘째 아들 모토토모[元知]의 '키요스에 번[藩]' 1만석이 세워져, 종가(宗家) 보좌를 맡는 모우리 삼가(三家)가 만드는 등 영국(領國) 경영을 강화해 갔다.

 

 1617년에는 쵸우후의 모우리 히데모토의 딸 쇼우키쿠코[松菊子]를 토쿠야마의 나리타카와 결혼시켜 쵸우후 번[長府藩]과 토쿠야마 번[徳山]의 결속도 강화시켰다.

 

 1619.

 2대 쇼우군[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川 秀忠]의 상락(上洛)[각주:5]이 있었다.

 테루모토는 히데타다와 만나기 위해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락.

 간신히 히데타다의 숙소인 니죠우 성[城]에 입성했다. 테루모토의 몸을 걱정한 히데타다의 배려로 가마를 타고 현관까지 왔고,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 카미오 모리요[神尾 守世], 전의(典醫)[각주:6]인 마나세 마사츠구[曲直瀨 正紹] 등의 도움으로 입장하여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손에 이끌려 겨우 히데타다와 대면할 수 있었다. 

 전 병이 들어 약해졌습니다. 앞으로 모우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뜻을 전한 후 영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테루모토의 큰 아들로 초대 하기 번주(藩主)인 모우리 히데나리[秀就]에게 가문의 번영과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서 타이르고 20개조에 이르는 유훈(遺訓)을 남겨 히데나리에게 반성과 자숙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쇠약한 몸을 쉬는 일 없이 1625 4 27일.

 향년 73세로 하기 성[萩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옛 텐쥬 원[天樹院]에 있는 테루모토 부부의 묘 - 하기 시[萩市]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2. 1석은 어른 한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 약 150Kg. 즉 1만석이면 쌀 1500톤. [본문으로]
  3.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 때 서군이던 모우리 가문을 혼란에 빠뜨려 전후 감봉으로 몰아 넣었던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의 아들. [본문으로]
  5.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6. 궁중 의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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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624년 7월 13일 병사(病死) 64세.

1561년 ~ 1624년.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각주:1]]에서는 칠본창(七本槍[각주:2]) 필두(筆頭)로 이름을 드높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여 승리. 아키[安芸], 빙고[備後]를 하사받지만, 막부(幕府)에 의심 받아 히로시마 성[広島城] 무단 개수(改修)를 이유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滅封)당했다.





마사노리의 인물상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3]]가 쓴 [번한보(藩翰譜)[각주:4]]에 따르면 마사노리는,
'몹시 사납고 거칠어 사람 죽이는 것을 벌레를 죽이는 것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던가, '악행을 일삼아 아키, 빙고의 토민(土民) 등 모두 학정에 괴로워하여 맘 편할 날이 없었다'고 혹평을 하고 있다.
 확실히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성격이기에 영민(領民)이나 가신(家臣) 중 겉으로는 뺀질 대면서 뒤로는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이나 명령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용서 없이 귀나 코를 베는 등 잔혹한 형벌로 다스렸다.

 하지만 그가 영내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세심하고, 공정한 토지조사[検地[각주:5]]와 토산품의 개발, 상업 무역의 진흥 등에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또한 그가 개명(開明)적인 것은 히로시마 성(城) 아래에 기독교 교회를 설립하여 가신이나 영민중에 입신, 세례하는 사람이 매년 천명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시 마사노리는 예수회 선교사들 사이에서 굉장히 평판이 좋았다. 1609~10년의 [일본 예수회연보]에는,

우리 성교(聖敎)를 보호하는 신도(信徒)가 아닌 제후 중 제일은 아키, 빙고 양국(兩国)의 영주(領主)인 후쿠시마 타이후[大夫]님이다. 그는 예전부터 우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올해는 한층 더 명확히 그 뜻을 보이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자기 영토의 항구에 스페인, 포르투갈의 상선을 입항시켜 해외무역을 활발히 하려는 타산(打算)에서 생겨난 결과겠지만, 그가 개명적이며 상업활동에 열심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카이에키[改易[각주:6]]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明渡)

 1619년 6월 2일.
 바쿠후가 갑자기 마사노리를 카이에키한 것은 그가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각주:7]]를 어기고 수해(水害)를 입은 히로시마 성(城)을 무단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구실로 속으로는 그가 옛 토요토미[豊臣]의 유신(遺臣)이었다는 것이 바쿠후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의 카토우 가문[加藤家]처럼 진심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어차피 카이에키를 벗어날 순 없었을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카이에키가 전해졌을 때 취한 마사노리의 태도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 때 가신들의 대응이다.

 1619년 6월 2일.
 마사노리는 카이에키를 전하는 사자(使者)에게 절을 하며,
 “내리신 말씀은 알겠습니다. 오오고쇼[大御所[각주:8]]가 살아계시다면 마사노리도 할 말이 있지만, 당대(當代[각주:9])에게는 이제 와서 할 말도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마사노리의 가신들은 히로시마 성(城) 접수를 하기 위해 온 여러 장수들에게,
 “이 성은 주군 마사노리가 지키라고 명령받은 성이니 아무리 쇼우군[将軍]의 명령이라 하여도 건넬 수는 없소. 억지로라도 건네 받으려면 창으로 뺏어보시길”
 이라 말하며 농성(籠城)하다 죽을 각오를 선명히 하였다.

 그 때문에 접수사(接收使)는 에도[江戸]에 억류되어 있던 마사노리에게 이 뜻을 전하여 마사노리가 직접 쓴 편지[각주:10]를 얻어 겨우 개성(開城)을 승낙시켰다고 한다. 더구나 성을 건넬 때도 흐트러짐 없었고, 넓은 마루에는 혈판(血判)으로 된 농성을 맹세하는 무사 2000여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어 그 각오가 단단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성을 건넨 후 그러한 가신들은 모두 다른 다이묘들에게 초대되어 임관될 수 있었다고 하니, 마사노리가 평소부터 얼마나 가신들에게 존경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봉(移封)후의 선정(善政)

 히로시마 49만 8천석에서 감봉 당한 마사노리는 시나노 카와나카지마 2만석과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각주:11]을 합한 4만 5천석이 주어졌다.

 1619년 7월.
 근신(近臣) 30여명을 이끌고 임지로 향하여 타카이노 촌[高井野村]에서 1624년 7월까지 6년 정도 지냈다. 죽은 것은 1624년 7월 13일. 향년 64세였다.

 마사노리는 이 곳에 오자마자 영내(領內)를 순시하며, 당시까지 햇볕이 잘 들거나 그늘이 어느 정도 드는지 또는 물길이 좋고 나쁜 것만으로 연공을 차등 부과하고 있던 농지에 생산력이 좋고 나쁨까지 고려한 새로운 토지조사[検地]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오부세[小布施]의 하천 개수 공사를 하여 지금도 '타이후[大夫]의 천냥 둑[千両堤]이라는 사적이 남아있다. 즉 현재 오부세 정[小布施町] 우에하라[上原]에 있는 천냥 둑은 여기를 지나던 마츠가와 강[松川]이 몇 갈래로 나뉘어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던 것에 둑을 쌓아 흐름을 바뀌게 하여 피해를 없앤 둑이다.

 마사노리의 4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가 죽자 그의 우오누마 군(郡) 2만 5천석을 바쿠후에 반상하였고, 남은 카와나카지마 2만석도 그가 죽은 후 몰수당했다.

 '토쿠가와짓키[徳川実紀][각주:12]]에 따르면, 마사노리가 죽은 후 가신이 바쿠후의 검시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유골을 화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째서 검시관을 기다리지 못했는지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설도 있어 그의 마지막은 수수께끼이다.

  1. 1583년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의 싸움. [본문으로]
  2.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3.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4.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甲府] 번주(藩主)였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개 가문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5.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6.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7. 에도 막부가 다이묘우[大名]나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 등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 [본문으로]
  8.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말함. [본문으로]
  9. 2대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말함 [본문으로]
  10. "활을 보라. 적이 있을 때는 중요하게 쓰이지만, 평화로운 시대가 되면 보자기에 쌓여 창고에 보관된다. 나는 활이다. 지금은 치세(治世)이니 카와나카지마[川中島]라는 창고에 보관되어 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본문으로]
  11. 이 곳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것 [본문으로]
  12. 토쿠가와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 조선왕조실록 같은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