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텔리[각주:1] 무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온 무장이면서도 끈적끈적한 정치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의 행동거지에서 미적인 품위를 느낄 정도이다.

 중세 굴지의 문화인(文化人) 센노 리큐우(千 利休)는 우지사토를 평하길,
 “일본의 무장 중에서도 하나나 둘 있을까 말까 한 문무 겸비의 명장”
 라 말하며 칭송했다고 한다.

 우지사토 스스로도 자신이 명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서에 따르면 측근에게,
 “
토요토미 타이코우(豊臣 太閤)가 죽은 뒤 천하인(天下人)가 되는 사람은 카가(加賀)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아니면 나다”
 고 단정지었다고 하다.
 또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에는,
 “이에야스는 가신에게 땅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인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미의식을 통한 인물감정이기에 현실과 밀착한 통찰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뜻하는 바가 웅대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히데요시에게서
아이즈(会津) 42만석[각주:2]의 거대한 영지(領地)에 봉해졌을 때 우지사토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반대로 변경으로 옮겨지는 원통함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를 메이지(明治) 시대의 문호(文豪)
코우다 로한(幸田 露伴)은,
 “내 비록 미관말직이더라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있다면 여차할 때 무슨 일이라도 하여 깃발을 천하에 휘날릴 수 있을 터인데, 이제 큰 영지(領地)를 받았다곤 하여도 산과 강이 사이에 놓여진
시라카와(白河) 관문[각주:3] 저 너머 오우슈우(奥州) 데와(出羽)의 깡촌에 있어서는 평소 가지던 큰 뜻도 펼치기 힘드니…”[코우다 로한의 蒲生氏郷]
 라 표현하였다. 우지사토의 눈이 항상 천하로 향해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 장재(將材)는 노부나가도 눈여겨볼 정도였다. 부친 카타히데(賢秀)가 오우미(近江)의 롯카쿠(六角)씨를 버리고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을 때 13살의 우지사토는 인질로 오다 가문에 오게 되었다. 우지사토를 본 노부나가는,
 “눈빛이 보통이 아니다”
 며 장래의 대기(大器)를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의 사위로 삼는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그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다음 해 14살의 데뷔전(初陣)[각주:4]에서는 이름있는 무사의 수급을 취하였다. 이 해 약속대로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姫)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히데요시도 우지사토의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때의 일이다. 당시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성주였던 우지사토도 출진하였다.
어쨌든 히데요시 앞에서 그의 측근들이 심심풀이로 인물비평에 열중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 때,
 “우지사토는 나와 닮았지.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해내더군. 정말 두려운 녀석이야”
 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즈(会津)의 대봉(大封)을 받을 때 있어서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이즈(会津)는 오우슈우(奥州)를 제압하는 주요지점이었다. 히데요시는 누가 적임일지 여러 장수들에게 토의하게 하였다. 10명중 9명이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추천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네놈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어라”며 우지사토를 지명했다고 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 부임할 때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였다. 히데요시의 특기 인심장악술이었다. 자신의 전권대리인으로서 오우슈우(奥州)의 지배자가 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전해진다. 우지사토가 너무도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이쪽에 두기에는 너무 무서운 녀석이다”
 고 생각한 히데요시가 오우슈우(奥州)의 깡촌으로 쫓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각주:5]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오우슈우(奥州)로 출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같은 자리에 아이즈(会津)와 인접한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에 영지(領地)를 가지고 있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와 그의 아들 키요히사(清久)가 있었다.
 “이세노카미. 너희들은 앞으로 우지사토를 주군 혹은 부모라 생각하고 섬기거라. 앞으로 쿄우토(京都)에 올 필요 없다. 그 대신 아이즈(会津)로 출사하거라”
 그리고 우지사토에게는,
 “이세노카미를 자식 또는 동생이라고 여기며 돌봐주길 바란다”
 고 말하였다.
 우지사토는 오우슈우(奥州) 총독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오우슈우(奥州)에서 으뜸가는 실력자로 자타가 공인하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자연스레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우지사토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 그런 분위기를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마사무네가 세이쥬우로우(清十郎)라는 16살의 자객을 가모우 일족의 타무라 나카츠카사노쇼우(田村 中務少輔)의 시동으로 잠입시켰다. 목적은 우지사토의 암살이었다. 어쩌다 편지가 국경초소에서 발각되어 정체가 탄로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우지사토는 그 충성심을 높게 평가하며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각주:6]

 우지사토는 세례명을 ‘레온[각주:7]’이라고 하여 기독교에 신앙했었다. 센고쿠 당시의 지식계층은 이 서양의 종교를 신지식으로 받아들였는데 우지사토의 인텔리전트적인 면모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풍류의 길에도 밝아 사세구로써,

 끝이 있으니 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질 것을
 성급도 하구나 꽃샘바람
 限りあれば吹かねど花は散るものを
 心みじかき春の山嵐
  라는 것을 남겼다.

 다도(茶道)도 리큐우의 뛰어난 일곱 제자 중 하나[각주:8]로 꼽혔다.

 말년의 영지(領地)는 92만석에 달했지만 안타깝게도 40세에 죽었다.
 가모우 가문 자체의 명맥도 짧아 아들인 히데유키(秀行)의 대[각주:9]에 단절되었다.

[가모 우지사토(蒲生 氏)]
1556년
오우미(近江) 가모우 군(蒲生郡) 히노 성(日野城)에서 태어났다. 첫 이름은 마스히데(賦秀)[각주:10], 통칭을 츄우사부로우(忠三郎)라 하였다. 1584년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12만석의 성주가 되었고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서의 공으로 쇼우쇼우(少将)로 승진하여 '마츠자카 쇼우쇼우(松坂少将)'라 불렸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공을 세워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 42만석에 봉해졌다. 1591년 오우슈우(奥州)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각주:11]를 진압하여 타무라(田村), 시노부(信夫) 등 5개 군(郡)이 더해졌고, 같은 해 또다시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2]에 참가하여 다테 군(伊達郡)을 가증 받아 영지(領地)는 91만9320석에 달하였다. 1595년 2월 7일 죽었다.

  1. '지식인'..이라고 번역해야하지만, 왠지 네이버 지식즐~ 때문인지 뉘앙스가 좀... [본문으로]
  2. 46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링크 된 구글맵을 보면 어째서 이런 어중간 한 곳을 거론하였는지 하고 이상히 여기겠지만, 7세기 일본 율령제가 실시된 당시 일본령 최북단인 오우슈우(후대의 오우슈우의 남반부만 있었고 작았다)의 세 관문(奥州三関) 중 하나이다. 그 의미가 이어져 그냥 일본 최북단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4. 대다수의 서적들은 1569년 8월의 이세(伊勢) 키타바타케(北畠) 공략이라고 하지만, 우지사토가 이토우 한고로우(伊藤 半五郎)에게 보낸 편지에는 1568년 9월의 노부나가 상경전 때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이와는 반대로 우지사토에게 세례를 한 오르간티노는 우지사토가 죽자 히데요시는 히데요리를 보호해 줄 사람이 죽었다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본문으로]
  6. '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다. [본문으로]
  7. 레오(Leo)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리큐우 칠철(利休七哲)을 말한다. 우지사토를 제외한 나머지는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오리베'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 우지사토는 이 칠철 중 No.1으로 꼽힌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업치락뒤치락 후 우지사토의 손자 타타도모(忠知) 때 완전히 끊김. [본문으로]
  10. '야스히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11. 상기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가 영내 정치를 잘못해서 '카사이-오오사키의 난'이 일어난다. [본문으로]
  12. 정확히는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 [본문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는 대조적으로 강직하고 우직한 장수였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죽은 뒤 노부나가의 후계자리를 둘러싸고 히데요시와 격렬한 주도권다툼을 벌이다 패했다.

 전해지는 카츠이에의 목상을 보면 눈꼬리가 치켜 올려진 염라대왕과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카츠이에는 오다 가문 내에서도 그의 부대 표식(馬印)인 금색 고헤이(御幣)가 [귀신 시바타의 고헤이]라 칭송 받을 정도로 맹장이었던 것이다.(이곳(링크)에 가보면 중간 즈음에 좌상과 금색 고헤이(御幣)를 볼 수 있다)

 맹장이라는 이미지와 반대로 카츠이에게는 뛰어난 민정가로서의 일면도 있었다.
 농민 반란군(一向一揆)을 멸하고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성주가 된 카츠이에는 칼 단속령(刀狩)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무기를 전부 몰수한 후 그것을 다시 농기구로 만들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은 것은 쇠사슬로 만들어 쿠주류우가와 강(九頭龍川)에 가교(架橋)를 세웠다. 영지(領地)에서 48척의 배를 모아 떠내려가지 않게 쇠사슬로 엮고 그 위에 널빤지를 이어 다리로 만든 것이다. '후나바시(舟橋)'라는 이름이 붙여져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키타노쇼우를 종단하는 아스와가와 강(足羽川)에 반은 돌, 반은 나무로 평판이 자자한 '오오하시(大橋)'도 만들었다.

 시바타 씨(柴田氏)는 대대로 오다 가문의 가로(家老)를 역임하는 가격(家格)을 가지고 있으며 카츠이에는 중신 필두로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때는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츠(信勝)[각주:1]의 모반에 가담하여 노부나가에게 반항하였다. 당시 캐찌질이(大うつけ)라고 불리고 있던 노부나가를 오다 가문 번영을 위해 없애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것에 실패하자 곧바로 머리를 밀고 용서를 구하였다. 보통 노부나가는 한번 자신에게 모반을 일으킨 자는 절대로 용서하는 일 없이 곧바로 죽였지만[각주:2] 카츠이에의 경우 그의 우직과 성실함이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카츠이에의 무공을 말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독 깨기 시바타(かめ割り柴田)]라는 에피소드이다. 1570년 오다 노부나가가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를 공격하였을 때 갑작스런 아자이 나가마사(井 長政)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했던 시기였다. 오우미(近江) 방어를 위해 카츠이에는 쵸우코우지(長光寺)성()을 소수의 병사와 지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남 오우미의 옛 주인인 롯카쿠 죠우테이(六角 承禎)가 8000의 병사를 이끌고 공격해 온 것이다. 농성전이 시작되었다. 성의 용수지(用水池)를 빼앗겼기에 이내 성 안에 마실 물이 바닥을 드러냈다. 적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항복을 권고해 왔다. 갈증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카츠이에는 성 안의 모든 병사를 모아 결의를 다졌다.
 "이대로 간다면 자멸할 뿐.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오늘 밤 출격하여 최후의 꽃을 피워보지 않겠는가?"
 그리고 성 안에 남은 물을 큰 독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잔씩 마시게 한 후 손수 나기나타(薙刀)로 독을 깬 것이다. 그리하여 시바타의 군세는 전원 결사의 돌격을 감행하여 몇 배나 되는 적을 물리친 것이다.

 1582년 6월 2일.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은 시점이 카츠이에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인이 되는 것은 필두 중신은 자신이다. – 그렇게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 光秀) 토벌을 히데요시가 먼저 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간에 주도권 다툼이 펼쳐지게 된다.

 오다 가문의 후계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議)가 그 결정적인 장면이 되었다. 카츠이에는 노부나가의 셋째 노부타카(信孝)를 내세웠으며 히데요시는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적자 노부타다(信忠)의 아들 산포우시(三法師=후에 히데노부(秀信))를 내세웠고,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를 자기 측에 끌어들인 히데요시가 결국 적통이라는 명분을 이유로 산포우시 추대에 성공한 것이다.

 주도권 다툼에서는 패했지만 카츠이에는 그 대신 당시 절세의 미녀라 칭송 받던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당시 카츠이에 61세.
 오이치노카타는 박복한 운명에 휘둘린 여성이었다. 처음엔 오우미의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시집가 2남3녀를 낳았지만 오빠 노부나가에게 남편 나가마사는 멸망 당하고 장남까지 살해당하였다.

 히데요시도 오이치노카타를 남몰래 동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히데요시와 카츠이에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
)는 오이치노카타를 빼앗긴 히데요시가 카츠이에에게 실연당한 복수를 한 것이라는 설이다. 히데요시는 싸움에 패하여 키타노쇼우에서 농성하는 카츠이에에게 목숨은 살려줄 테니 코우야산 산(高野山)으로 물러나라며 3만석의 땅까지 약속했다고 한다. 그 본심은 오이치노카타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믿기 힘든 이야기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는데 있어 최대의 강적은 카츠이에였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도 보고서에 '히데요시는 카츠이에만을 두려워한다'고 적었다. 에도 시대 초기 바쿠후(幕府)의 유학자인 하야시 가호우( 鵞峰[각주:3])도 '히데요시는 카츠이에의 목숨을 살려주자고 하는 부하에게, 카츠이에가 살아서는 내 야망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기록하였다.

 1583년 3월 시즈가타케 전투가 카츠이에의 운명을 정하였다.
 1개월간에 걸친 지구전이 펼쳐지던 중에 기후 성(岐阜城)의 오다 노부타카 공격에 나선 히데요시의 빈자리를 노려 카츠이에의 부하장수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가 기습을 감행했다. 이 사쿠마의 기습은 성공하여 히데요시 측의 무장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를 전사시키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을 패주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거만해진 사쿠마는 예정대로 철수하지 않았고 카츠이에의 세 번에 걸친 명령도 승리에 취하여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 패전의 소식을 듣자마자 예전 츄우고쿠 대반전(中大返し)를 방불케 하는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52km를 불과 5시간 만에 주파한 초인적인 속도였다.
 시즈가타케에 나타난 히데요시군을 보고 그 경이적인 신속함에 시바타군은 동요했다. 4월 20일 미명부터 시작된 시즈가타케의 결전은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키요마사(
正)), 후쿠시마 이치마츠(福島 市松=마사노리(正則)) 등 소위 칠본창의 무공 등에 힘입어 히데요시의 승리가 결정되었지만, 이미 개전하기 전부터 카츠이에의 패배는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즉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와 카츠미츠(不破 勝光), 카나모리 나가치카(金森 長近) 등 시바타 휘하의 여러 무장이 히데요시에게 내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바타군은 붕괴되어 에치젠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카츠이에도 불과 100여기의 수하들에게 보호받으며 토치노키토우게 고개(木峠)를 넘어 에치젠(越前)에 들어섰고, 그 후 마에다 토시이에의 거성 후츄우(府中)에 도착했을 때는 불과 8기로 줄어있었다. 이때 카츠이에는 후츄우 성의 마에다 토시이에를 방문하였다. 배신한 토시이에를 원망하는 마음이 카츠이에에게 없었다. 토시이에가 내온 식사를 다 먹은 후 지금까지 토시이에가 자신에게 해 준 것에 감사를 한 후, "자네와 치쿠젠(筑前=히데요시)은 굉장히 친한 사이. 나와의 약속은 버리고 히데요시와 같은 편이 되어 영지(領地)를 지키시게"라고 권했다 한다. 더군다나 카츠이에는 키타노쇼우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토시이에에게 인질인 딸[각주:4]을 돌려보내었다.

 키타노쇼우의 최후가 왔다.
 이제 성의 병사는 3000도 안 되었다. 이미 밖에는 노도와 같이 에치젠으로 진격해 온 히데요시의 대군이 성(
)을 포위하고 있었다. 카츠이에는 고굉지신이라 부를 수 있는 80여명의 부하를 텐슈(天守)로 불러들여 석별의 주연을 벌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술을 따라주며 돌아다녔고 부하들의 부인과 시녀들, 그녀들의 말상대인 비구니에게까지 시중을 들었고, 가무음곡을 즐기며 취했다고 한다.

 주연이 끝나자 카츠이에와 오이치노카타는 거실로 옮겨 옛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츠이에는 이때 몇 번이나 오이치노카타에게 성에서 나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오이치노카타는 마지막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남편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였다. 오이치노카타는,

그렇지 않아도 졸린 여름 밤에
꿈길로 유혹하는 두견새려나
さらぬだに
ぬる
夢路をさそうほととぎすかな

 카츠이에는,

여름 밤 꿈길이라는 허무한 흔적의 이름을
저 하늘까지 가져가다오 두견새여
夢路はかなき
雲井にあげよほととぎす

 라고 각각 사세구를 읊었다.

 다음 날 1583년 4월 24일 미명부터 히데요시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정오에 이르러 이제는 각오를 정해야 할 때라고 본 카츠이에는 텐슈(天守)에 올라 화약에 불을 붙여 일족들과 함께 자인하고 성과 운명을 함께하였다.

[시바타 가쓰이에(柴田 勝家)]
1522년 태생. 통칭 곤로쿠(
). 슈리노스케(修理亮). 오다 가문(織田家)의 필두중신으로 1575년 9월 노부나가(信長)의 에치젠(越前) 농민반란군(一向一揆) 토벌 후 에치젠 국주()가 되었다. 혼노우(本能)사()의 변 때는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와 싸우고 있었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패하여 거성 키타노쇼우()에서 자해하였을 때는 62세로 부인인 오이치노카타(お)는 37세였다.

  1. 보통 노부유키(信行)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내가 알기로는 이런 적 없다. 곧바로 죽인 사례를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 [본문으로]
  3.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초기에 활약한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의 아들. [본문으로]
  4. 후에 히데요시의 측실 카가도노(加賀殿)가 되는 마아히메(麻阿姫). [본문으로]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만큼이나 무사다운 화려한 의식 속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는 츄우고쿠(中国) 모우리(毛利) 공략에 임하여 우선 모우리 세력권의 최전선에 있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의 시미즈 무네하루를 오다(織田) 측으로 배신하도록 꾀했다. 노부나가(信長)의 서약서에 자신도 편지를 써서는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와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를 무네하루에게 사자로 보냈다. 노부나가의 서약서에는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2개국(国)을 항복의 조건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무네하루는 곧바로 이 서약서와 편지를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輝元)에게 받쳤고 히데요시에 대한 답신에는 “테루모토가 나를 신뢰하여 국경의 땅을 맡겼기에 그 믿음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는 없소이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2개국이라는 맛있는 떡밥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무네하루에게는 모우리에게 빚이 있었다. 예전에 아들 사이타로우(才太郎)가 적에게 유괴당하였을 때 테루모토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 덕분에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센고쿠 난세에 있어서는 진귀한 의리의 무장이었다.

 역사상 유명한 타카마츠 성 공격은 1582년에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4월 4일에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우키타 씨(宇喜多氏)의 본거지 오카야마 성(岡山城)에 입성하였다. 타카마츠 성은 이 오카야마 성에서 12km정도 떨어진 지점인 키비 평야(吉備平野)의 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외교로 타카마츠 성을 항복시키는 것에 실패하였는데 그렇다고 이것을 힘으로 뺏기에도 어려웠다. 성안의 사기가 왕성하였으며 성은 요해였다. 작고 높은 성 주변에는 말의 발도 빠질 듯한 진창 깊은 밭으로 연못이나 늪이 많았다. 그 속에는 불과 말 한 마리 지날 수 있을 정도의 외길밖에 없었다. 함락시키는데 필시 2년은 걸릴 것이다.

 히데요시는 본영 류우오우산 산(竜王山)에서 타카마츠 성을 멀리 바라보며 이 성의 공략법에 대해 생각하였는데 그 결과 이 천하의 지혜꾸러미 속에서 나온 것은 [수공(水攻)]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이었다. 즉 타카마츠 성의 서쪽에 흐르는 아시모리가와 강(足守川)를 막아, 그 지점에서 성의 동쪽 이시이야마 산(石井山)의 남쪽기슭 카와즈가하나(蛙ヶ鼻)까지 약 4km에 걸쳐 제방을 쌓아 성을 이 인조호수 안에 수몰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공성이라기 보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거대한 토목공사 계획이었다(부대 배치 및 알기 쉽게 나온 그림이 있는 곳)

 제방의 규모는 높이 7m, 밑바닥 폭이 20m나 되어 그 위는 도로가 있어 이 도로의 폭은 약 10m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단기간에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히데요시는 10여일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으로 ‘천재적인 토목건축가’라는 말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신속함이었다. 흙은 가마니로 옮기는 방법을 취하여, 그 가마니 한 개당 무려 돈 100문과 쌀 한 되를 준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당연하게도 비젠(備前), 빗츄우(備中) 일대의 사람들은 이 짭잘한 돈벌이에 달려들었다. 이야기는 엄청난 전파력으로 각지에 전해져 흙 가마니를 쌓은 백성들의 수레가 타카마츠로 쇄도하였다. 히데요시에게 행운이며 타카마츠 성에게 있어 불행인 것은 때마침 장마의 계절이었기에 완성된 이 인조호수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 볼 때마다 수량이 늘어갔다. 호수 한 가운데 덩그러니 뜨이게 된 타카마츠 성은 3일째에 성의 일층까지 물에 잠겼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형제를 중심으로 한 모우리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도착해 있었지만 이 인조호수를 둘러싼 하시바 히데요시의 대포위망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화해 협상밖에 방법이 없었다. 모우리 씨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으로 파견되었다. 모우리가 제시한 조건은 빗츄우 등 5개국을 할양할 테니 타카마츠 성의 모든 장병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우리 씨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했다. 히데요시의 조건은 5개국 할양 외에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이라는 것이었다.

 일시 화평교섭은 좌초되었지만 안코쿠지 에케이가 성주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양해를 구했다. 조건 수락의 서장이 히데요시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6월 2일이었다. [4일에 할복]이라고 정해졌다.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며 타카마츠 성으로 술과 안주를 보냈다. 이 2일 새벽에 실은 쿄우토(京都)에서 대사건이 일어나있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었다. 히데요시 쪽으로 그 급보를 가진 밀사가 도착한 것이 3일 심야. 히데요시는 앙천했다. 어쨌든 이 사실은 철저하게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우리 측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화평교섭의 와해는커녕 고립된 히데요시는 곧바로 적의 맹공을 받게 된다.

 4일.
 무네하루의 자인이 행해지는 날이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입장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평온히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배가 타카마츠 성에서 배를 저으며 나왔다. 배 위에는 죽은 사람이 입는 흰 옷의 무네하루가 있었다. 죽음을 확인하는 사람이 탄 배의 앞에 오자 무네하루는 그 역을 맡은 호리오 모스케(堀尾 茂助[각주:1])와 조용히 마지막 잔을 기울이고는 흰 부채를 펼쳐 쿠세마이(曲舞) ‘세이간지(誓願寺[각주:2])’를 추었다. 적과 아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 화려한 죽음의 의식이었다. 무네하루가 배를 가르자 등뒤에서 칼날이 번쩍거리며 목이 떨어졌다. 동승하고 있던 형 겟세이(月清) 이하 따르던 자들도 계속해서 무네하루의 뒤를 따랐다.

무네하루 사세구(辭世句),

이제야 이승을 떠나는 무사의
이름을 타카마츠의 이끼에 새겨두고
浮世をば今こそわたれ武士の
名を高松の苔に残して

 히데요시는 이 이후 곧바로 행동을 일으켜 후에 히데요시의 대반전(大返し)이라 일컬어지는 초인적인 속도로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야마자키 전투(山崎合戦)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것이었다.

[시미즈 무네하루(水 宗治)]
1537년생. 처음엔 빗츄우(備中) 시미즈 성(清水城)의 성주.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 속해 타카마츠 성(高松城) 성주 이시카와 히사타카(石川 久孝)의 딸과 결혼하여 타카마츠 성주가 되었다. 1582년 타카마츠 성에서 자인(自刃).

속영웅백인일수(続英雄百人一首)에 그려진 시미즈 무네하루

  1.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를 말한다. [본문으로]
  2. 헤이안 시대 중기의 시인으로 남녀 관계없이 1~2위를 다투던 여류 시인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의 영혼이 가무(歌舞)의 보살이 되어 성불한 기쁨을 나타내는 춤. [본문으로]

 그야말로 이색의 쇼우군[軍]이었다.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츠카하라 보쿠덴[塚原卜伝]에게 비기 [히토츠노타치(太刀)]를 전수받았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전란 다발하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써의 자기단련이었다. 1546년에 쇼우군[軍]이 되면서부터 요시테루에게는 하루라도 평온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요시테루 치세인 1546년부터 1565년에 이르는 20년간은 중세의 암흑기에서 근세의 여명기로 이어지는 과도기였다. 일본에 온 하비에르[각주:1]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노부나가[信長]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쓰러뜨린 것도 이 시기였다. 그 격동기의 고뇌를 요시테루는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친 요시하루[義晴]와 함께 전란의 쿄우[京]에서 피신하여 오우미[近江]에 있었던 요시테루는, 쇼우군[軍]이 되어 쿄우[]로 돌아와서도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의 다툼에 휘말려, 부평초[浮萍草]처럼 양 세력 사이를 떠도는 존재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오우미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 그러나 결국 미요시 쵸우케이의 실력에 굴복하여 미요시 체제에 옹립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때가 1558 11.

 쿄우()로 돌아온 요시테루는 이것이 정말로 기뻤던 듯, 어소[御所][각주:2]의 마당에 서서는 밤하늘을 향해서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이 즈음, 그제서야 칸파쿠[白]였던 코노에 타네이에[近衛 稙家]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모친인 케이쥬인[寿院]이 오랫동안 권해왔던 이야기였다. 요시테루의 마음에 안정이 생겼다는 것을 말해 준다.[각주:3]


 미요시 쵸우케이가 죽자, 요시테루는 지금이야말로 막부(幕府)의 실권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붕고[豊後]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이나,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등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쇼우군의 의도는 죽은 쵸우케이의 모신(謀臣)이며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 義栄][각주:4]를 새로이 쇼우군으로 세우려고 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간파하기에 이른다. 히사히데는 같은 쵸우케이의 가신이었던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과 상담한 후 선수를 쳐 요시테루의 어소(御所)를 습격하기로 한다.

 

 1565 5 19.

 때는 장마의 계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을 마츠나가, 미요시 군세는 갓과 우비를 입고서, 키요미즈 사[寺]를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쿄우[京]로 올라가고 있었다.

 히사히데는 밤이 되기 직전에 일부러 어느 소송(訴訟)에 대한 서장을 어소에 제출했다. 응답에 시간이 걸렸다. 그것이 노림수였다. 그 사이에 히사히데의 무리들은 어둠에 섞여 어소 안으로 잠입하여 마루나 복도 밑에 몸을 숨겼다.

 

 갑자기 함성이 울려 퍼졌다. 궐기의 신호였다. 어소에는 사무를 보는 몇몇 외에 사람이 없었다.

 사태가 명확해지자, 검호 쇼우군답게 각오를 정하여 금생의 이별 주연(酒宴)을 열었다. 호소카와 타카요시[細川 隆是]가 여관(女官)코소데[小袖]를 뒤집어 쓰고 춤을 추었다.

 이때 요시테루는, 그 코소데 위에 사세구(辭世)의 시를 적었다고 한다.

지금 내리는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내 이름을 알려라 구름 위에까지

五月雨は露かかほととぎす

わが名をあげて雲の上まで

 그때부터 요시테루의 활약은 눈부셔 몇 자루나 되는 칼을 마루에 꼽고서는 날이 무뎌지면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달려드는 적을 마구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결국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었다. 한 적병이 문틈에서 창으로 발을 걸어 넘어뜨리자 요시테루는 넘어졌다. 거기에 적병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장지문으로 몸을 누르고는 그 위에서 창으로 내리 찔렀다. 그때 불길이 한꺼번에 번져 요시테루의 목을 베지 못한 채, 건물은 화재로 무너져버렸다고 한다.(에이로쿠의 변[永禄の変])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

1536년생. 첫 이름은 요시후지[義藤]. 12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의 아들. 1546년 아시카가 제 13대 쇼우군이 되었다.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를 칸레이[管領=쇼우군의 보좌역]로 임명 하였지만, 호소카와 우지츠나[細川 氏綱],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 등이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고, 미요시 측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바쿠후의 실권은 쵸우케이가 쥐게 된다. 쵸우케이가 죽자 실권을 쥐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서 정권탈환을 기도하지만 히사히데 등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1565년 당시 아직 30살이었다.
  1. 일본에서는 ‘자비에르[ザビエル]’ 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높은 귀인의 거처 겸 정무소. [본문으로]
  3. 여담으로 요시테루의 모친 ‘케이쥬인’은 장인인 ‘코노에 타네이에’의 여동생이다. 즉 요시테루는 외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본문으로]
  4. 아시카가 바쿠후 14대 쇼우군, 요시테루와는 할아버지가 같은 사촌지간. [본문으로]

 

 우에스기 켄신의 그림이 야마가타(山県)() 요네자와()()우에스기 신사(上杉神社)에 있는데, 거기에 그려진 켄신은 오히려 온화한 인상이다[각주:1]. 그 귀신과 같이 가열찬 무장의 모습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당시의 증언이 전해 내려온다. 켄신과 실제로 만났던 승려가,

 [날카로운 눈빛과 억센 표정을 하여 보는 이를 두렵게 하였다], 카와다 부젠(河田 豊前)이라는 사무라이와 닮았다 - 고 그 용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한 에치고(越後)에서 켄신과 대면한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의 사자 사사키 사다츠네(木 定)는 독경(讀經)을 끝내고 나온 켄신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타치(太刀)를 꽉 쥐고 서 있는 그 모습은 오오미네(大峰)의 고키(五鬼)[각주:2], 카츠라기타카마(葛城高天)의 대천구(大天狗)[각주:3]의 화신인가 싶어, 온 몸의 털이 전부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켄신은 풍모뿐만 아니라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진언밀교(眞言密敎)의 엄격한 계율을 지키고 여성은 절대 가까이 하는 일 없이 일생 불범(不犯)”이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켄신은 열렬한 불교신자였다. 관음대사(觀音大士[각주:4])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생모 토라고젠(虎御前)의 영향이기도 하였으며, 어렸을 때 부친의 거성(居城)카스가야마(春日山)성(城) 밑에 있는 린센(林泉)()에 맡겨져 명승(名僧) 텐시츠코우이쿠(天室光育)를 스승으로 삼아 엄격한 계율의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중이 되어 소우신(宗心)이라는 호()를 칭하며[각주:5], 카스가야마 성() 내에 비사문(毘沙門), 스와(諏訪), 고마(護摩) 등 세 채의 당()을 지었다.

 

 가혹하고 격렬한 전쟁터에서도 대일여래(大日如來)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목상 등을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전쟁터에 악업, 번뇌퇴산(煩惱退散)의 상징인 [()]의 군기를 휘날렸다. 어디까지나 우에스기의 군세는 [항마(降魔)의 군]이라고 켄신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정신주의(精神主義)의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정의와 질서가 그의 행동을 관철시키고 있었다. 배신, 배반 등이 일상다반사인 센고쿠의 시대에서는 희소가치가 있는 무장이었다. 그런 면에서 인간다운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는 대조적이다.

 1564. 켄신이 에치고(越後) 이치노미야[각주:6](宮) 히코 (弥彦神社)에 봉납한 [타케다 하루노부의 악행에 대해서(武田晴信)]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기원문이 확실히 그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거기서는 자신의 싸움은 정의를 기반으로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후, [친아비인 타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를 추방해서는 길에서 걸식(乞食)하게 만들어 효()를 버렸다. 이것은 신불(神佛)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써서 신겐의 악행을 비판하였다.

 

 황실에 대한 존경과 숭배도 두터웠다.

 당시 텐노우(天皇) 가문은 빈곤의 극에 달하여 즉위식 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1553년 당시의 고나라(後奈良) 텐노우(天皇)를 알현했을 때,

 가문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행복. 성은이 하해와 같다

 고까지 말하며 감격하였다.

 

 여성을 싫어하는 도덕가라고 하면 히틀러와 같은 비인간성을 상상해버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지금도 태어난 지방인 에치고는 물론 이웃 지방인 시나노(信濃), 적측인 카이(甲斐)에서까지 인기가 높다. 그 중에서도 숙적 타케다 신겐에게 소금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568년 신겐이 스루가(駿河)에 침입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이때 스루가의 이마가와 지자네(今川氏)와 사가미(相模)호우죠우 우지야스( 氏康)가 동맹하여 카이(甲斐)로 들어가는 소금을 국경에서 막아버린 것이다. 켄신에게도 에치고의 소금을 들여보내지 말라는 요청이 왔다.

 하지만 켄신은 신겐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겐)과 싸울 때는 활과 화살이지, 쌀과 소금으로 싸우겠는가?]

 라고 말하며 시나노로 소금을 보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보증할 수 없지만, 토우쿄우(東京) 국립박물관에는 신겐이 소금을 보내준 답례로써 보냈다고 하는 타치(太刀)가 전시[각주:7]되어 있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사서는 전해주고 있다.

 1573. 켄신 생애의 라이벌인 타케다 신겐이 죽었을 때의 일이다. 켄신은 본거지인 카스가야마 성()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뜨스운 물에 밥 말아먹고 있던 중이었지만, 갑자기 젓가락을 놓더니 입 안에 있던 것을 뱉어내고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명장이 죽었구나. 영웅인걸이라는 것은 신겐이야말로 어울리는 것. 칸토우() 무사의 기둥이 쓰러졌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가중(家中)에 명하여 3일간 상()을 치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혹은 이때 켄신은 - 이것은 신겐을 존경하는 의미가 아닌, 어디까지나 [무사의 신에 대한 예의로써 하는 것이다]라 말했다는 기록한 책도 있다.

 

 신겐의 죽음은 우에스기에게 있어서 타케다 공략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일거에 시나노로 쳐들어 가 타케다의 군세를 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노신(老臣)들은 그렇게 켄신에게 진언했다. 그러나 켄신은,

 젊은 카츠요리()가 이제 막 대를 이었는데 그걸 노리다니,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고 말하며 공격하지 않았다고 한다.

 

 켄신은 여인을 가까이하지는 않았지만 술은 사랑한 무장이었다. 지금도 우에스기 신사에 애용했던 큰 술잔이 있다. 술안주로는 매실장아찌(우메보시=梅干)를 좋아했다고 한다.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화근이 되어 뇌일혈(腦溢血)로 죽었다.

 

 켄신의 생애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숙적 신겐과의 일기토였다.

 1561 9 9일 한밤 중. 우에스기 군은 은밀히 대군을 움직여 치쿠마가와(千曲川) 강을 건너고 있었다. 사이죠산(妻女山)에 진을 치고 있던 켄신을 기습하고자 한 신겐의 작전을 간파한 켄신은, 타케다 군의 허를 찔러 산을 내려온 것이었다. 산정에는 여전히 지금도 야영하고 있다는 듯이 화톳불을 활활 태워두었다.

 

 우에스기 군이 도하작전을 끝내고 카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전투 태세에 들어간 것은 다음 10일 새벽이었다. 짙은 안개가 깔려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서서히 안개가 겉혔다.

 카와나카지마의 중앙 하치만바라(八幡原) 들판에 진을 치고 있던 타케다의 본진에서는, 사이죠산 기습의 소식이 언제 도착하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안개 건너편에서 갑자기 우에스기의 대군이 나타난 것이다.

 켄신은 특기인 [쿠루마가카리(車懸) 전법]으로 노도와 같이 타케다 진영을 덮쳤다. 타케다의 군세는 필사적으로 방어하였지만 차츰 밀리게 되어 신겐의 본진도 위험해 졌다.

 마침내 우에스기 군은 신겐이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켄신은 돌격하였다. 십 수기와 함께 신겐의 본진을 목표로 질주한 것이다. 감색의 갑옷에, 금색의 투구를 색의 명주로 감싼 모습이었다. 신겐은 칼을 뽑을 틈도 없었다. 걸상에 앉아 있는 신겐에게 마상에 있던 켄신이 칼을 내리쳤다. 그것을 신겐은 지휘 부채(軍配)로 막았다. 켄신의 칼은 계속 신겐을 노렸다. 그때 마침 신겐의 근시(近侍)인 하라 오오스미노카미(原 大隅守)가 달려들어 켄신을 향해서 창을 찔렀지만 빗나가 말의 엉덩이를 맞추었다. 놀란 말을 켄신을 태운 채로 질주하여 신겐은 위험에서 목숨을 건졌다.

 이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타케다 측의 사상자 17000, 우에스기 측은 9000이라는 격전이었다고 한다.

 

 신겐 사후에 켄신의 전투로 유명한 것은 나나오(七尾)성(城) 공략일 것이다. 나나오 성()은 해발 300미터 높이의 험준한 곳에 있는 성이었다. 이를 켄신은 실로 40여 일을 소비하여 겨우 함락시킨 것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켄신은 카가(加賀) 테토리가와(手取川) 천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5만 대군을 물리쳤다.

 [우에스기와 만나서는 오다도 명성에 먹칠하는 강, 달려드는 켄신에 날라 튀는 노부나가]

 (上杉に逢うては織田も名取川( 手取川 역자 ), はねる謙信逃るとぶ長( 信長 역자 ))

 라고 후세에 쿄우카(狂歌)가 만들어질 정도로, 오다의 군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에스기 켄신에게 참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켄신의 죽음은 불시에 찾아왔다.

 1578 3 9.

 칸토우 출진 준비가 모두 끝나있었다. 노토(能登), 엣츄우(越中), 카가(加賀)를 평정한 지금, 남은 화근은 칸토우 뿐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켄신은 갑자기 기절하여, 인사불성인 채로 4일간을 보낸 후 생애를 마쳤다. 49세였다.

 

 사세구()로는,

한 때의 영화는 한 잔의 술, 49년은 한 번 취한 것.

삶 모르고 죽음 또한 모른다. 달을 희롱하는 이 또한 꿈과 같도다

一期ノハ一盃ノ酒、四十九年ハ一ノ間、

生知ラズ死又知ラズ、月是又夢中ノ如シ

 라는 한시(漢詩)가 남아 있다.[각주:8]

 

[우에스기 겐신(上杉 謙信)]

1530 1 12. 에치고(越後)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의 아들로 태어났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후에 마사토라(政虎)[각주:9], 테루토라(輝虎)[각주:10]로 바꾸었다. 형 하루카게(晴景)나 일족 나가오 마사카게(長尾 政景[각주:11])와 싸웠지만, 슈고(守護)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 定)의 중재로 슈고다이를 이어받고 에치고 카스가야마 성주가 되었다. 1552년 망명해 온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서 우에스기(上杉)’라는 성()과 칸토우칸레이(管領)의 역직(役職)을 물려받았다. 타케다 신겐과의 카와나카지마 결전은 다섯 번에 이르렀다. 엣츄우(越中)를 평정하고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진공해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대결하여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578년 병으로 쓰러졌다.

  1. 글 머리에 있는 그림. [본문으로]
  2. 오오미네(大峰)산(山)은 도를 닦는 슈겐도우(修験道)의 도를 닦는 곳으로 유명한 곳으로, 그런 사람들을 수호하는 신으로 고키(五鬼)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다른 이름으로는 ‘카츠라기타카마보우(葛城高天坊)’라고도 한다. 일본 귀신인 천구(텐구=天狗) 중에서도 더욱 강력한 천구 한다. [본문으로]
  4. 대사(大士)는 보살(菩薩)의 존칭. 즉 관음보살(觀音普薩)을 말한다. [본문으로]
  5. 소우신이란 호를 칭하기 시작한 것은 1553년 켄신 나이 23살 때 처음으로 상경하였을 때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텟슈우소우쿠(徹岫宗九)에게 사사받은 후에 쓴 법호이다. [본문으로]
  6. 그 지역(国)에서 가장 격이 높은 신사를 말함. [본문으로]
  7. ‘塩どめの太刀(소금막기의 칼)’이라는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죽기 한달 전에 만든 시라고 한다. [본문으로]
  9. 1560년에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의 직책과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의 가독을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 물려받을 때 노리마사에게 '마사(政)'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10. 1561년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테루(輝)'를 하사받았다. [본문으로]
  11. 켄신의 후계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아비이며 켄신에게는 누나(仙桃院)의 남편 즉 매형이 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