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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다와라 평정(小田原の役[각주:1]) 때 히데요시(秀吉)는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무공(武功)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시하루는 내가 토우키치로우(藤吉
)라고 불리던 아주 옛날부터의 부하로 나와 함께 수 많은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 무용은 일기당천으로 미나모토노 요리미츠(源 光)[각주:2]의 사천왕(四天王)에 필적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아자이(井) 공략에서는 적의 척후를 잡아 죽였으며, 나가시노 전투(長篠のい)에서는 2개의 수급을 취했다. 츄우고쿠(中) 모우리(毛利) 공략에서는 몸에 13군데의 상처를 입을 정도로 분전하였다. 아케치 토벌전(明智討伐戰)인 야마자키 전투(山崎合),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친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合) 등 요시하루의 무명(武名)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높아져 갔다.

 평소의 요시하루는 온화하였고 용모도 얼핏 보기에는 아녀자와 같이 부드러워 [부처님 모스케(茂助)]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랬던 사람이 막상 전쟁터에 나가면 180도 바뀌어 악마와 같이 활약을 하는 것이다.
 1576년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 光秀)의 영지(領地) 탄바(丹波)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등 총 3만여가 지원군으로 참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요시하루의 부대는 실로 수급 36급을 거두었으며 더구나 그 중 3급은 요시하루가 직접 벤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건 정말 '부처님 모스케'에 어울리지 않는 활약이구나. 앞으로는 '악마 모스케(鬼茂助)'라고 불러야겠다"
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평소의 요시하루는 정말 얌전하였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싸울 때는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다와라 평정 때의 일이다.
 야마나카 성(山中城[각주:3]) 공성에 참가한 요시하루는 성을 공격하기에 최적의 위치를 발견하고는 진을 쳤다. 그러자 동료인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가 그것을 보고 칸파쿠(
白) 히데츠구(秀次)에게 부탁하여 요시하루의 장소를 이동시키고 카즈우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아니나다를까 나카무라 카즈우지가 야마나카 성에 제일 먼저 진입(一番り)하는 공적을 세운 것이다[각주:4].
 화를 억누를 수 없는 요시하루는 히데츠구 앞에 나아가 장소 교체에 따른 분노를 말을 가리지 않고 표출하였다. 주위에 있던 사람 모두가 어르고 달래도 듣지 않고 눈을 치켜 뜨며 나중에는 칼자루에 손을 댈 정도였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접근하였다. 1599년 사대로(四大老), 다섯 행정관(五奉行)의 대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와 이에야스의 사이가 험악해지자 그 중간에 서서 양측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여 일단 큰일로 번지게 하지 않게 하였다. 그 공적에 보답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은거료(隱居料)로 하라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청하여 에치젠(越前) 후츄우(府中) 5만석을 주도록 만들었다. 이때 본거지인 하마마츠(浜松) 12만석을 아들인 타다우지(忠氏)에게 물려주었다.

 1600년 7월. 세키가하라 전투(ヶ原合)가 막 일어나려고 할 즈음 요시하루는 하마마츠를 출발하여 새로 얻은 영지인 에치젠으로 향하였는데 그 도중 자객의 습격을 받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미카와(三河) 치리우(池鯉鮒=현재는 치류우(
知立))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부터 알고 지내던 카가노이 시게모치(加々野井 重望[각주:5]그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친했다) 만나 함께 요시하루의 친구인 미카와(三河) 카리야(刈屋) 성주인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에게 들렸고 타다시게는 그들을 위해 주연을 열었다. 주연이 깊어져 요시하루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카가노이가 칼을 뽑아 타다시게를 베어 죽이며 여세를 몰아 요시하루를 습격한 것이다. 카가노이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자객이었다. 벌떡 일어선 요시하루는 곧바로 응전하여 반대로 카가노이를 베어 쓰러뜨렸다. 하지만 소란스런 소리에 급히 달려온 미즈노의 가신들이 피 묻은 칼을 들고 홀로 서 있는 요시하루를 보고, 그가 자신들의 주인과 카가노이 두 사람을 죽였다고 오해하였다[각주:6].
 요시하루는 열심히 설명하였지만 이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요시하루에게 불리했다. 천천히 조여오는 미즈노 가신들의 포위에 요시하루는 촛대를 발로 차 어둡게 하여 그 틈에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각주:7]. 사건은 후에 요시하루의 무죄가 판명되어 이에야스에게서 병문안 편지를 받았다.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1543년생. 통칭 모스케(
茂助)로 이름(諱)은 요시사다(吉定), 요시나오(吉直)라고도 하였다. 와카사(若) 타카하마(高浜)[각주:8],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각주:9] 등의 성주를 거쳐 하마마츠(浜松) 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후에는 아들 타다우지(忠氏)와 함께 이즈모(出雲)의 땅[각주:10]이 주어져 1611년 마츠에(松江)에 성을 축조. 이 해의 6월에 죽었다.

  1. 1590년에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를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 헤이안 시대에 왠지 헤라클레스 급..까지는 아니고 하여튼 전설적인 활약을 펼치는 무사. 그의 이야기는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내 시체를 넘고 가라(俺の屍を超えてゆけ)"에 잘 나타나 있다(...믿으시면 곤란합니다) [본문으로]
  3.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 축성의 진수가 담긴 성이었지만 단 하루 만에 낙성되었다. [본문으로]
  4. 덤으로 요시하루의 경우 옮겨진 구역에서 성을 공격하다 적자 킨스케(金助)가 전사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보통 '加賀井 重望'로 알려져 있다(발음은 동일). 에도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인 [토쿠가와 짓키(徳川実紀)]에 따르면 그는 미츠나리가 아니라 서군(西軍) 호쿠리쿠(北陸) 당담인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 한다...뭐 미츠나리가 서군의 총수격이었으니 그게 그거지만.. [본문으로]
  6. 사족으로 당시의 나이 요시하루 57세. 시게모치의 나이 39. [본문으로]
  7. 칼에 베인 상처가 17군데에 이르러 이후 거동이 불편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코구다카(石高)는 1만 7천석. [본문으로]
  9. 코쿠다카는 4만석. [본문으로]
  10. 23만 5천석으로 보통 24만석으로 칭해진다. 이 호리오 마츠에 번(堀尾松江藩)은 야스하루의 손자 타다하루(忠晴) 때 자식이 없어 끊긴다. [본문으로]
미즈노 가쓰나리[水野 勝成]

1651 3 15일 병사 88.

 

1565 ~ 1651.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기지만 이에야스의 휘하를 떠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쿠로다 나가마사[田 長政] 등을 섬긴다. 1598년에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복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오오가키 성[大垣城] 공략에 참가.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는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 등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카츠나리[勝成]라는 인물

 

 미즈노 카츠나리의 부친인 소우베에 타다시게[兵衛 忠重]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모친인 오다이[於大]의 동생이다. 따라서 카츠나리는 이에야스와는 외사촌지간이다.

 카츠나리는 토우쥬로우[藤十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청년시대에 부친 타다시게와 싸우고 집을 나가 15년 간에 걸친 방랑 끝에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를 목전에 앞두고 그제서야 이에야스의 주선으로 부친 타다시게와 화해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7 23 부친 이즈미노카미 타다시게[和泉守 忠重]미카와[三河]의 치리후[池鯉鮒]에서 카가노에 야하치로우[加賀江 弥八郎]에게 죽음을 당했기에 가문을 이어 미카와 카리야[刈谷] 3만석의 영주가 되었다.

 

 그 뒤 오오가키 성 공략,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 冬の陣],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 무공[각주:1]을 세워 1615 7 19일에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6만석의 성주가 되었고, 이어서 4년 후인 1619 7 15 빈고[備後]-아키[安芸] 49 8천석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카이에키[改易][각주:2]로 인해 공석이 된 빈고 후쿠야마[福山] 의 영주가 되었다. 영지(領地)는 빙고 국[] 남부(南部) 7개() 빗츄우[備中] 오다 군[小田郡], 시츠키 군[後月郡]을 합쳐 10만석이었다.

 

 이후 미즈노 카츠나리는 후쿠야마에 새로운 성을 쌓고 성 밑 마을[城下町]의 형성 및 영지 경영에 힘 썼다.

 가독(家督)을 장남 카츠토시[俊]에게 물려준 것은 1639년 윤 11 16일로 이때 휴우가노카미 카츠나리[日向守 勝成] 76, 미마사카노카미 카츠토시[美作守 勝俊] 42세였다.

 

시마바라[島原] 출진

 

 카츠나리가 마지막으로 전쟁터로 나간 것은 그가 독전관[軍監][각주:3]이 되어 시마바라 농민 반란을 토벌하러 출진했을 때이다.

 

 막부(幕府)의 명령을 받아 아들 미마사카노카미 카츠토시, 손자 이오리[伊織][각주:4] 이하 총 6344명의 장병을 이끌고 빈고 토모노츠[津]를 출항한 것은 1638 2 8일이었다.

 

 2 23히젠[肥前] 아리마[有馬]에 도착. 다음 날 24일에는 군사회의에 출석하여,

 이제와서 뭘 맘 편히 회의 같은 것을 하는가? 곧바로 군을 움직여 무조건 공격해서 성을 함락시켜야만 한다!”

 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여러 장수들은 26일을 총공격의 날로 정하였지만 하필이면 그 날 밤부터 비가 내려 26일 정오까지 계속 내렸기에 실제로 공격을 개시한 것은 다음 날인 27일이 되었다.

 

 이 때 오니휴우가[鬼日向][각주:5] 카츠나리가 이끄는 빈고의 군세는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 勝茂][각주:6]의 사가[佐賀]의 군세와 치열한 선봉 다툼을 하여 미즈노 가의 전사자는 106, 부상자는 382명이었다고 한다.

 

 농민군이 농성하는 하라 성[城]27일과 28 양일간에 걸친 총공격으로 인해 함락되었는데 막부(幕府)의 전사자 1127, 부상자 7800명인데 비해, 3 2일 참수된 농민군의 목은 남녀 합쳐 3만7000명이었다.

 임무를 끝낸 카츠나리가 히젠 시마바라의 코우지로 항[神代港]항에서 뱃길로 빈고 토모노츠로 귀환한 것은 3 18일이었다.

 

영지 개발에 힘 쓴 여생(餘生)

 

 1639 9 9일.

 카츠나리는 에도 성[江戶城]에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알현하면서, 노령으로 인해 은거한다는 뜻을 밝혀 허락을 받은 후 다음해인 1640 1 3일에 마지막으로 이에미츠를 알현한 뒤 빈고 후쿠야마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은거한 몸이기에 남들처럼 글이나 그림, 골동품 수집에 몰두했겠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시마바라 농민 반란군들의 참수당한 불쌍한 모습만이 남아있었다.

 기독교 반란이라고 하지만 실은 영주의 가렴주구로 인해 생긴 실정(失政)의 희생양이었다.

 실제로 걷어 들일 수 있는 것이 4만석에 지나지 않는 영토임에도 시마바라의 영주 마츠쿠라씨[松倉氏][각주:7] 막부에 10만석이라고 보고하였고 또한 바쿠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러 공사를 자청하여[각주:8] 생긴 재정적인 구멍을 농민들에게서 긁어 모았기 때문에 이러한 큰 난리가 난 것이다.

후쿠야마 시[福山市]에 있는 카츠나리의 묘(墓).

 

 그리하여 카츠나리는 정치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지 개발과 산업 발달에 의한 백성 생활의 향상'임을 깨닫고 남은 여생을 하천의 치수공사와 신전(新田) 조성에 받쳤다.

 그는 이런 영지 개발에 가노(家老)[각주:9]인 코바 효우자에몬[木場 兵左衛門]과 나카야마 게키[中山 外記], 칸야 지부[神谷 冶部] 등의 유능한 부하를 행정관으로 발탁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진두지휘하였고 공사를 할 때는 각 마을에서 매일 2000~3000명이나 농민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하루 쌀 2.7Kg씩 인건비를 지급했다.

 

 이 사업은 카츠나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어 그가 빈고에 들어왔을 때인 1619년에 10만석이었던 것그 후 79년이 지난 1698년 미즈노 가이 카이에키[각주:10] 당했을 때는 1323백석으로 증가하였다.

 은거 후 소우큐우[宗休]라는 호()를 칭한 카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은 1651 3 15.

 향년 88세였다.

  1. 여담으로 이 당시 카츠나리의 아들 카츠토시의 진영에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 武蔵]가 속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마사노리의 경우는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 5천석으로 줄었다. [본문으로]
  3. 군사(軍事)를 감독하는 직책 또는 사람. [본문으로]
  4. 후에 3대 번주(藩主)가 되는 카츠사다[勝貞] [본문으로]
  5. 용맹과감한 무장 혹은 남들이 세우지 못한 공적을 올린 맹장의 이름 또는 관도명[官途名 - 미카와노카미[三河守]나 휴우가노키미 같은 것[日向守]] 앞에 오니[鬼]라는 글자가 붙었다. [본문으로]
  6.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 直茂]의 적자. [본문으로]
  7. 선대(先代)는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우콘사콘[右近左近] 중 우콘인 마츠쿠라 시게노부[松倉 重信]....사족으로 사콘은 시마 사콘[島 左近]. [본문으로]
  8. 영지의 수입에 맞게 부역이 내려졌는데 시마바라번은 배 이상 부역을 자청했다. [본문으로]
  9. 번의 수상(首相) 격인 인물. [본문으로]
  10. 5대 번주 카츠미네[勝岑]가 2살의 나이로 죽어 후계자 단절로 인한 것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