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고 츠네히사[각주:1] 이즈모[出雲] 슈고다이[守護代][각주:2]의 직책을 빼앗긴 뒤 2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와신상담 끝에 옛 지위 회복의 비책을 짜내어 결국 그것을 이루어 냈을 뿐만 아니라 산인[山陰]의 패자(覇者)까지 된 굉장한 인물이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 고생을 많이 하였기에 백성이나 어민(漁民)들에게까지 잘 보살폈고, 언제나 따스한 미소를 잃는 일이 없었기에 여자 아이들조차 친근감을 가졌다고 한다.

 가신(家臣)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더욱 헌신적이었다. 부상 당한 자는 손수 간호를 하였으며, 싸우다 죽은 이의 육친에게는 식록(食祿)을 늘려주었고, 명복을 빌며 직접 불경(佛經)을 읽었다. 이 때문에 휘하 병사들은 츠네히사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고 씨[尼子氏]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조부(祖父) 모치히사[持久] 때 부터이다.

 모치히사는 이즈모[出雲]의 슈고[守護] 쿄우고쿠 씨[京極氏]에게 중용 받아 슈고다이까지 출세해서는 토다갓산 성[富田月山城]을 본거지로 삼았다.


 츠네히사의 부친 키요사다[]가 뒤를 이어서는 활발히 영토를 넓혀 미호노세키[美保関]를 손에 넣음으로써 아마고 씨의 재정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즉 이 세키[関][각주:3]의 세키센[関銭][각주:4]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것이지만 횡령하였다.


 강성해졌던 아마고 씨는 츠네히사의 시대가 되자 일시 몰락한다.

 아마고 씨가 너무도 강대해 졌기에 슈고[守護] 쿄우고쿠 씨가 미사와[沢], 엔야[塩谷], 미토야[三刀屋] 등의 호족을 꼬드겨 츠네히사를 공격시켜다. 츠네히사는 슈고다이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토다갓산 성에서 쫓겨난 츠네히사는 이곳 저곳을 방랑하게 된다.

 눈보라가 치던 어느 날 밤. 츠네히사는 옛 신하 야마나카 카츠시게[山中 勝重][각주:5]의 집에 방문한다. 얼굴을 가리는 삿갓[深編笠]을 쓰고, 살을 에이는 추위에도 얇은 마()로 된 옷 한 벌이라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이미 굶주림과 추위로 삐쩍 말라있었다. 야마나카는 젊은 주인의 몰락한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불을 쪼이게 하고 술을 내와 위로하였다.

 그러나 츠네히사의 의기는 드높았다. 몸을 녹이면서 토다갓산 성 탈환 계획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이 야마나카 일당의 협력덕택에 아마고 재기의 발판이 되는 토다갓산 성 탈환이 가능하게 된다.

 

 1485년의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목적지는 예전의 본거지 토다갓산 성이었다. 성주는 츠네히사에게서 슈고다이의 직책과 성을 뺏어간 엔야 카몬노스케[塩谷 掃部助]였다.
아마고 일당은 밤의 어두움을 이용해서 성 안으로 숨어들었다. 천연의 요해(要害)였지만 예전엔 자신의 성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잠입에 성공하였다.

 

 다음 날은 설날이었다.

 아마고 츠네히사의 노림 수는 신년 축하 행사였다. 츠네히사는 이미 신년 축하에 흥을 돋구는 사당패 가마[賀麻] 일당을 포섭해 두고 있었다. 성 안에서 큰 북(太鼓)이나 작은 북()의 박자에 맞추어 춤이 시작되자 그와 동시에 갑자기 성 안의 곳곳에 숨어 있던 아마고의 군사들이 일제히 불을 지르며 공격하였다. 춤을 추고 있던 가마 일당도 아마고 측 군사들의 함성을 듣자 준비해 두었던 갑옷으로 갈아입고는 성병(城兵)들에게 칼질을 퍼부었다. 아마고의 기습은 보기 좋게 성공하여 불과 100여명으로 성병 700명 이상을 물리쳤다.

 이렇게 토다 성을 탈환한 후 츠네히사는 최대의 강적인 미사와 씨[三沢氏]를 물리치는 것에도 모략을 이용하게 된다.

 

 중신(重臣)이 된 야마나카 카츠시게에게 일부러 누명을 씌어 미사와 씨에게 도망치게 만든 것이다. 야마나카는 일년간 미사와 씨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이제 미사와는 야마나카 카츠시게를 완전히 신용하였. 야마나카 카츠시게는 “츠네히사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건만 사소한 죄를 하나 지었다고 저를 쫓아내어 여기로 왔는데, 츠네히사는 제 부인과 자식, 늙은 모친마저 감옥에 가두고 학대하고 있습니다. 억울해 견딜 수 없으니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미사와는 정예 500명을 야마나카에게 맡겼고, 그는 이 500명을 이끌고 토다 성으로 데리고 갔다. 토다갓산에 도착한 야마나카 카츠시게는 성 안에 있는 자기의 옛 부하들에게 연락을 하여 내응하게 만든다며 사라졌고, 사라진 사이 츠네히사와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와 미사와의 병사들을 격파하였다.

 

 아마고 씨는 이후 각지에 진출하여 산인산요우[山陽]11개 지역[]에 위세를 떨치는 거대 세력으로 발전해 간다. 그러나 증손자인 요시히사[義久]의 대가 되어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에게 멸망 당한다.

 

[아마고 쓰네히사(尼子 )]

키요사다[清定]의 아들. 이즈모[出雲], 오키[岐], 이와미[石見], 이나바[因幡], 호우키[伯耆]를 영유(領有). 모우리 모토나리도 한때 휘하에 두었다. 1541년 죽었다. 84세라고 한다.

  1. ‘아마코’라고 읽을 수도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인 슈고[守護]의 대리.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이전만 해도 해당 지역에 가지 않고 주로 쿄우[京]에서 정무를 보았기에, 그런 슈고를 대신해서 해당 지역에 가서 실무를 보았다. [본문으로]
  3. 지금의 세관이라 할 수 있는 곳. 통과하려면 돈을 내어야 했다. [본문으로]
  4. 세키 통행을 위해 내는 돈. [본문으로]
  5. 이 사람의 손자가 후에 아마고 재흥군을 이끌게 되는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 幸盛=시카노스케[鹿之助]]이다. [본문으로]

아키[安芸]의 산골에 있던 미력(微力)한 소영주(小領主)에서 출발하여, 실로 10개 쿠니[]에 걸친 거대 다이묘우[大名]로 성장한 모우리 모토나리. 그는 자신의 생애를 시종일관 철저한 모략가(謀略家)로 살았다. 그의 고독한 성장 과정이 원인이었다.

 1558 8월에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5살에 어머니와 이별하고 10살에 아버지와 사별(死別)하였다. 오로지 형 오키모토[興元]만을 의지하였지만 이 형도 내가 19살 때 죽어버렸다. 이후로는 부모형제도 없고 백부, 조카 등 친척 중에서도 도와주는 친척이 없어, 단지 혼자서 오늘날까지 어떻게든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왔던 것이다……
고 술회하였다.


 모토나리는 모우리 씨[毛利氏]의 본거지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당주 히로모토[弘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살 때까지 코오리야마의 서쪽에 있는 타지히[多治比] 루가케 성[猿掛城]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모우리 가문의 부하 격인 이노우에[井上] 일족의 힘이 강하여 그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그대신 모토나리의 땅을 횡령 당하거나 하였다. 모토나리는 이때부터 20여 년간, 이노우에 씨()의 세력 아래서 인종의 나날을 보내었다. 이런 인종의 나날 속에서 옆 군()의 호족 킷카와 쿠니츠네[吉川 国経]의 딸 묘우큐우[妙玖]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1523년에는 장남 타카모토를 얻었다. 모토나리는 27살이 되어 있었다. 이해의 여름이 끝날 즈음 모토나리의 환경이 급변하였다.


 모우리 종가(宗家)인 형 오키모토가 24살에 죽고(1516), 그 뒤를 이은 오키모토의 아들 코우쇼우마루[幸松丸]도 불과 9살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후임 자리를 두고 내란이 일어났다.

 모토나리와 배다른 동생인 모토츠나[元綱[각주:1]]를 축으로 가문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 내란 때 이노우에 일족의 도움으로 모토나리가 상속자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이때 라이벌 모토츠나를 죽였다[각주:2].

 조연에서 단번에 주연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된 모토나리는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옹립해 준 이노우에 일족에게는 또다시 갚아야 할 빚를 만들고 말았다. 때문에 모토나리는 여전히 긴 인종의 세월을 이어가야 했다.


 그의 고독하고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이때 배양된 것이다. 후에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 가문이 잘 되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 있을지언정, 이 나라에는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모토나리의 소위 네거티브한 면인데, 포지티브한 면을 나타내는 에피소드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13살 때였다. 가신과 함께 이츠쿠시마 신사[(神社]에 참배한 후 모토나리는 가신에게 무엇을 빌었는지를 물었다. 가신은 우리 주군이 츄우고쿠[国]의 큰 영주가 되게 해달라 빌었다고 했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몽둥이만큼 빌어도 바늘 정도밖에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빌 거라면 어째서 천하를 잡게 해달라고 빌지 않은 것이냐?”

 기개와 도량이 큰 인물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이다[각주:3].


 또한 17살 때 중국 명()나라 사람들이 모우리 가문에 들렸는데, 그 일행 중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모토나리의 얼굴을 살펴보고서는,

 너는 고조, 태종의 관상을 겸비하고 있다. 장래 반드시 위세를 사방에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고 예언했다고도 한다.


 모토나리가 당시 직면하고 있던 츄우고쿠[国]의 정세를 말하자면, 산인[山陰] 지방에는 아마고 씨[尼子氏]가 패권을 쥐고 있었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북부 큐우슈우[九州]에 걸쳐서는 오오우치 씨[氏]가 세력을 뻗고 있었다. 두 거대 세력에 끼인 소영주(小領主) 모우리 가문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고도의 외교적 수완이 필요했다.


 1531.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4]와 의형제를 맺고 있었지만, 1537년에 결별하고서 그때까지 적이었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에게 적자인 타카모토를 인질로 받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


 1541년 가을.

 아마고 씨()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모우리의 본거지 코오리야마[郡山]로 진격해 왔을 때 오오우치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에게 1만의 군세를 주어 구원하도록 하였다. 아마고 군세는 이때 큰 눈을 만나 보급선이 끊겨 참패를 당하였다. 오오우치 군세도 아마고 군세를 이즈모[出雲]까지 깊숙이 추격하였다가 대패를 당했다.


 이 양 세력의 약체화는 모우리 가문이 바라던 바였다. 모토나리는 곧바로 아키 슈고[安芸守護] 타케다 씨[武田氏]를 멸하여 아키[安芸]에 군림한 것이다. 또한 이 지배 체제를 강고히 하기 위해서 모토나리는 세토 내해[瀬戸內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과 산인[山陰]국경에 있는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모략을 이용해 탈취하여,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셋째인 타카카게[隆景], 킷카와 가문에는 둘째인 모토하루[元春]를 각 가문의 당주 자리에 앉혔다. 이름만 다를 뿐 실상은 어디까지나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 세상에서는 이를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5]'이라고 불렀다.


 양 가문을 손에 넣자, 모토나리는 지금이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중신 이노우에 일족의 숙청이었다. 20년간 모토나리는 그들의 전횡(專橫)을 참아왔던 것이다. 그 숙청은 철저의 극에 달하여 일족의 장로 모토카네[元兼] 이하 30명 이상을 죽였다. 이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가문 내의 공포는 굉장했다고 한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강력한 권력을 일거에 장악하여 가신들에게 복종을 맹세시켰던 것이다.


 이 결집된 힘을 이용하여 모우리 가문은 유명한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에 돌입하게 된다.

 츄우고쿠[国]의 명문 오오우치 가문[内家]을 격퇴하여 더욱 크게 웅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오오우치 가문은 스에 하루카타가 주군 요시타카를 자살로 몰아 넣고, 그 자리에 요시나가[義長]를 앉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략전에서 모토나리는 진가를 발휘하였다.

 오오우치 씨()의 거점인 야마구치[山口]에 모우리의 밀정들을 잠입시켰다. 모토나리는 그들에게 스에[]의 부하인 용장() 에라 후사히데[江良 房栄]가 모우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유포시키게 하였다. 작은 의혹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결국 하루카타도 그런 소문을 믿고 후사히데를 죽여버린 것이다.


 1555년 봄.

 모토나리는 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츠쿠시마 섬[島]에 미야오 성[宮尾城]을 쌓았다. 적의 대군을 작은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성을 쌓으려고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완성할 때까지 스에[陶] 군이 쳐들어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적측에 새어 나갈 수 있도록 모토나리를 손을 써 두었다. 하루카타가 조금 찔러보자 이외로 세찬 반응이 일어났다. 모우리의 숙장(宿) 중의 한 사람이 내응을 약속해 온 것이다.

 모든 것은 모토나리가 놓은 덫이었다.

 결국 하루카타는 모토나리의 유인에 넘어왔다. 하루카타는 2만의 대군을 500척의 군선에 태워서는 이츠쿠시마에 상륙시킨 후 토우노오카[岡]에 본진을 두고서는, 모우리의 미야오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555 9 21일이었다.

 30일 아침, 모우리 군은 은밀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비바람 세찬 날,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100척의 배로 이츠쿠시마[]로 건너 가서는 기습한 것이다.

 스에 군 2만은 4천의 모우리 군에 참패. 총대장 하루카타는 겨우 도망쳤지만 결국 섬의 서안 오오에[大江]의 바위 그늘에서 배를 갈랐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 전투>

 이후 모토나리는 여세를 몰아 빙고[備後], 아키[安芸],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를 손안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죽을 때까지 현역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는데, 자신이 죽은 후의 것까지 절치부심하였다.

 3명의 아들에 대한 교훈장[三子],

 '너희 셋 중에 조금이라도 사이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셋 다 멸망 당한다고 생각할 것'

 이라 써서 일치단결의 중요성을 말했으며, 세 아들에게서 서약서까지 받아 두었다.

 2차 대전 전의 일본 국정교과서에 실렸던 [세 대의 화살 교훈]은 유명한 이야기다. 한 대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가 있지만, 세 대를 합치면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깨닫게 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맹세케 하였다 한다. 이것은 위의 교훈장을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각주:6]

 

 1570, 손자인 테루모토[輝元]를 총대장으로 하여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를 공략하러 보낸 모토나리는 그 보고를 듣지 못하고 다음 해 파란만장했던 생애의 막을 내렸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497년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지토우[地頭] 가문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에 속하였고, 후에 오오우치[内] 휘하가 된다. 킷카와-코바야카와 가문을 손에 넣은 다음부터 차츰 세력을 넓혀, 스에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패권을 확립. 후에 츄우고쿠[国] 10개 쿠니[国]와 부젠[豊前]이요[伊予]의 일부를 영유하는 거대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71 6 14일 죽었다. 75.

  1. 가지고 있던 영지(領地)가 아이오우[相合]에 있었기에 풀네임은 ‘아이오우 모토츠나[相合 元綱]’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때 모토츠나는 아마고[尼子]의 푸쉬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과 멀어지게 된다. [본문으로]
  3. 여담으로 나이를 먹고 죽기 전에는 '천하를 지배하는 자가 아무리 영화를 자랑하더라도, 몇 대가 지나고 나면 쇠하게 되어 자손까지 그 영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보다는 일본을 다섯으로 나눠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잘 보전하여 자자손손까지 이 위세를 남겨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5. 코바야카와[小早'川']든 킷카와[吉'川']든 성에 내 천川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 [본문으로]
  6. 이 이야기가 이어져 예전 노정윤이 뛰었던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サンフレッチェ広島]의 ‘산프레체’는, 일본 말로 3을 의미하는 ‘산(サン)’과 화살들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프레체(frecce)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모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571 6 14일 병사(病死) 75


1497 ~ 1571.

아키[安芸]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원래는 지방 호족(国人)으로, 오오우치 씨[氏]신종(臣從)하였지만,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 스오우[周防],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이와미[石見]를 평정(平定).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씨[尼子氏]를 멸망시켜 츄우고쿠[国] 지방 10개 국을 지배. 큐우슈우[九州]에서 오오토모 씨[大友氏]와도 싸웠다.






진두(陣頭)에 선 노장(老將)


 모우리 모토나리가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가독을 큰 아들인 타카모토[隆元]에게 물려주고 은거한 것은 오오우치 씨()를 멸망시킨 1557년으로 그의 나이 60세일 때였다. 그 이후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문서에는 타카모토의 후견인이라는 입장으로 서명(署名)을 함께 쓰게 되었다.


 그러나 들불처럼 영지를 넓혀가 아키[安芸], 빈고[備後],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의 맹주(盟主[각주:1])가 된 모우리 일족이다. 그로 인해 타카모토에게는 자신이 그것을 지키기엔 부담이 크다며 아비 모토나리의 편안한 은퇴 생활을 허용할 턱이 없었다. 정신차려 보니 은거는 커녕 타카모토의 책략에 말려들어 그 후에도 여전히 진두에 서서 전장(戰場)을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의 은거 선언


 이 상태로는 모우리 가문융성(隆盛)은 전적으로 자기 혼자만의 위업이라고 인식되어, 세간에는 가독을 이은 타카모토의 위엄이 서질 않게 된다. 상대 성을 탈취하는 데는 쿠니[国]와 구니[国]간에 정신적인 우열이 크게 좌우한다.

 타카모토도 이제는 35. 지금 모우리 가문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보는 타카모토의 두령(頭領)으로서의 위엄이다. 모토나리는 굴지의 지장(智將)으로 물러날 때를 판단할 수 있는 위대한 현자(賢者)이다. 물러날 때는 지금밖에 없다. 더군다나 조금씩 피로도 느끼기 시작했다. 아키[安芸] 사토우[佐東]에라도 은거시켜 달라는 말을 꺼내 보자[毛利家文書]


 이제는 완전히 쉬고 싶다는 이야기는 카츠라 모토타다[桂 元忠]에서 타카모토에게 전해졌다.

 타카모토는 깜짝 놀라, 그거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고 침을 튀기며 되받아 쳤다. 우선 문서로 동생들이며 모우리 양천[毛利 [각주:2]]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에게 모토나리 은거 반대 의사를 전하고 이어서 모토나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타카모토)에게 모우리 가문을 짊어질 만한 역량 따위 있을 턱이 없으며 아버지가 은거하신다면 저 또한 함께 은거하겠습니다. 아키[安芸]와 빈고[備後]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운데 거기에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라면 더 이상 무리입니다. 부친이란 살아 있을 때는 자식의 뒤를 돌봐주어야만 하며,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도 두령(頭領)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만약 될 수 있다면 저도 은거해서는 코우츠루마루[幸鶴丸=테루모토(輝元), 5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습니다[毛利家文書]"


 그러나 모토나리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타카모토의 애절한 바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타카모토는 최후의 결의문을 보냈다.


 아버님이 그렇게까지 은거를 하시고자 한다면 저 타카모토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겠습니다. 즉 제가 죽으면 아버님도 은거하여 편안히 살고 싶다는 말씀을 못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은거하시지 않고 가문을 다시리실 테니 모우리 가도 무너질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모토나리라도 은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타카모토가 단순히 제멋대로인 아들이었는지, 부친을 뛰어 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모토나리는 '마음은 은거, 몸은 현역'이라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거 소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채 스에 씨[氏] 잔당(殘黨)을 진압. 그 후에도 쉴 틈 없이 이즈모[出雲], 이와미[石見], 빗츄우[備中], 분고[豊後],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등에서 모우리 일족(一族)분전(奮戰)이 계속 되었다.


 1563 8 3.

 타카모토는 모토나리에게 원군을 요청받아 이즈모[出雲]로 향했다. 도중에 빈고[備後]의 와치 사네하루[和智 誠春]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타카모토는 그 날 밤부터 격심한 복통(腹痛)이 찾아와 다음 날 아침 죽었다(향년 41).


 모토나리는 와치 씨가 타카모토를 암살한 것이라 의심하여 6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와치 씨와 관계가 있던 아카가와 모토야스[赤川 元保] 일족의 뿌리를 뽑고 결국에는 와치 사네하루를 죽였버렸다. 그러나 후에 아카가와의 무죄가 판명되어 모토나리는 크게 후회했다.


 이제는 어린 손자인 테루모토[輝元]의 뒤를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어 은거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모우리의 안태(安泰)를 기원하며


 이 즈음 사방에서 영토 침입의 위협이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북으로는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요시히사[尼子 義久[각주:3]].

 동으로는 비젠[備前]의 우라카미 무네카게[浦上 宗景].

 서로는 분고[豊後]오오토모 요시시게[大友 義[각주:4]].

 남으로는 이요[伊予] 노시마 수군[能島水軍]무라카미 타케요시[村上 武吉] 등이었다.


 모토나리는 건강에 대해서는 남보다 배는 더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1566년 결국 간헐적으로 발병하는 학질에 걸려, 재발이 계속 이어지던 1571 6 14일.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죽었다.

 향년 75.

 

묘소(墓所)는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의 토우슌 사[洞春寺]터에 있는데, 진기하게도 야마구치 현[山口県] 슈우난 시[周南市] 미츠오[三丘] '모토나리 이빨 사당[元就歯廟]'이 있다.

 이것은 미츠오 성주(城主)였던 모토나리의 7번째 아들인 아마노 모토마사[天野 元政] 부적으로 가지고 있던 모토나리의 이빨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1. 모우리 씨(氏)는 지방 호족 연맹의 맹주 격이었다. 즉 지방 호족들은 신하라기 보다는 대등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모토나리가 구축한 모우리 가문의 군사-정치 조직. 모토나리의 둘째와 셋째 아들을 양자로 보낸 킷카와나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카와(川)라는 글자가 들어갔기에 이러한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증손자. 아마고 씨(氏)는 요시히사 대(代)에 망했다. [본문으로]
  4.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을 말한다 [본문으로]

아마고 쓰네히사[尼子 ]

154111 13일 병사(病死) 84

1458~1541

처음엔 이즈모[出雲] 슈고다이[守護代][각주:1]. 갓산토다 성[月山富田城]을 탈취한 후 이나바[因幡] 이서(以西)산인[山陰] 각지를 공략하여 아마고 씨() 전성기를 수립했다. 후에 손자 하루히사[晴久]가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와 대립하여 모토나리의 아키[安芸] 요시다 성[吉田]을 공격하지만 실패. 직후에 죽었다.








세 아들의 말로


 아마고 츠네히사에게는 마사히사[政久], 쿠니히사[国久], 오키히사[興久]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마사히사는 1516 8월. 히가시아요우[東阿用]의 사쿠라이 소우테키[桜井 宗的]를 공략하던 중 죽었다.
 전투 중에 죽은 것이 아니고 한 밤중에 망루에 올라가 피리를 불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총사령관이 피리를 불다가 목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니다. 장남은 그렇게 죽었다.[각주:2]


 둘째인 쿠니히사는 아마고 군()의 최정예부대인 신구우 당[新宮党][각주:3]을 이끌던 전투의 스페셜리스트였다.
 그러나 독불장군으로 주변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기에 츠네히사가 죽은 후 조카인 하루히사[
晴久][각주:4]알력이 생겨 하루히사에게 죽음을 당했다. 츠네히사는 장남 마사히사가 죽은 뒤 둘째인 쿠니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비의 눈으로 보아도 일족의 두령으로 삼기에는 불안했다.


 셋째인 오키히사는 엔야[塩谷]라는 지역에 3천관(貫)의 땅을 하사받아 이 땅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지(領地)가 너무 적다고 투정부리기 시작하여 하라테 군[
原手郡] 700백관을 더 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아비인 츠네히사에게 반란을 일으키지만 패배하여 장인인 야마노우치 나오미치[山内 直通]가 지키는 빙고[備後] 카부토야마 성[甲山城]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2년 뒤에 자신의 미래를 자책하였는지 자살했다. 38세였다.


11(州)[각주:5]의 영주(領主)


 츠네히사는 84세에 죽었기에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선 장수한 편에 속한다.
 이즈모 슈고다이는 대대로 갓산토다 성()을 거성(居城)으로 삼고 있었으며, 일시 여기에서 쫓겨났던 츠네히사는 실력으로 슈고다이의 직책을 되찾아 이즈모 전역에 세력을 뻗쳤다. 그의 실력과 전투 방식은 굉장히 뛰어나 이즈모의 호족들을 계속해서 제압하여 자기 세력으로 편입시켰다.


 이즈모를 제패하자 이어오키[隠岐], 호우키[伯耆], 이나바[因幡]로 진출하였고 이와미[石見], 빙고[備後], 빗츄우[備中],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아키[安芸], 하리마[播磨]영유(領有)하기에 이르렀다. 후에 모우리 모토나리에게 전부 빼앗기지만 츠네히사의 이런 파죽지세는 놀라울 따름이다.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사이토우 도우산[斎藤 道三]이라도 지배한 나라[国]의 수에 있어서 츠네히사에겐 미치지 못했다.


 1537년. 츠네히사는 80세였다.
 장남 마사히사의 아들 하루히사는 24세가 되어 있었다. 츠네히사가 손에 넣은 11개국 중에서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하리마[播磨]는 하루히사가 원정하여 전과를 올린 부분도 있었기에 하루히사의 실력은 그럭저럭 인정받고 있었다. 1537년 츠네히사는 은퇴하여 손자인 하루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아마고 씨()의 흥망사(興亡史)에 있어서 이 시점이 가장 전성기였으며 빛나고 있었다.


 츠네히사는 동생인 요시카츠[義勝 – ‘시모츠케노카미 히사유키[下野守 久幸]라고도 한다]를 하루히사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츠네히사는 누구보다도 이 동생인 요시카츠를 신뢰하였으며, 장남 마사히사가 죽었을 때 동생 요시카츠에게 가독을 물려주려고 했을 정도였기에 둘째 쿠니히사, 셋째 오키히사가 이런 아비의 마음을 읽고 불만이 생겨 이후의 행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말도 있다.


원정 대패 후의 죽음


 1539. 하루히사는 친척이나 중신(重臣)을 모아서,
 모우리 모토나리의 본거지인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의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을 공격하려 하는데 모두 어떻게들 생각하나?”

 하고 물었다. 츠네히사는 82세로 이때는 이미 병상(病床)에 누워있었기에 군의(軍議)의 자리엔 없었다. 단순한 노쇠(老衰)인지, 중풍(中風)과 같은 중병이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코오리야마로 공격'에 관해서 참가한 사람 중 가장 격()이 높다고 할 수 있는 츠네히사의 동생 요시카츠가,

 “좀 더 지켜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모토나리는 뛰어난 영걸이기에 그리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
 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하루히사는 듣지 않았고 아키[安芸] 요시다로 원정을 결정했다. 병상의 츠네히사는 요시카츠에게 이 회의의 결과를 듣고,

 “성급해서는 안 된다. 하루히사가 생각을 돌릴 수 있게 잘 말해주길 바란다
 고 말했지만, 하루히사는 역시 듣지 않았다.


 1540 9월 말.
 하루히사는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아키(安芸) 요시다로 원정을 떠났다. 코오리야마 성을 포위한 아마고의 군세는 연전연패하였고, 다음 해인 1541 1월에도 대패(大敗)하여 도망치기에 이르렀다. 요시카츠를 시작으로 많은 전사자(戰死者)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아마고 휘하 13명의 유력무장이 오오우치 요시타카[
大内 義隆](모우리와 동맹)에게로 도망쳤다. 이 배반은 아마고에게 있어선 뼈아팠다.


 츠네히사가 이 결과를 듣고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해의 11 13일에 갓산토다 성에서 죽었다.

  1.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장관(地方長官)인 슈고[守護]의 대리인(代理人). 보통 슈고는 쿄우[京]에 머물면서 막부의 정치에 관여하였고,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일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는데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 글의 필자는 문약한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인상이 있지만 역사상 마사히데는 아버지를 도와 아마고 씨의 전성기를 이끈 문무겸비의 무장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갓산토다성의 북쪽 기슭에 있는 ‘신구우[新宮]’라는 골짜기에 본거지가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본문으로]
  4. 마사히사의 아들. [본문으로]
  5. 일본 지방단위인 국[国]의 다른 표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