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1581년이었다. 해가 밝자 마자 히데요시는 하치로우와 함께
하리마[播磨] 히메지[路]를 출발하여 산요우도우[山陽道] 서쪽으로 향했다. 하치로우에게 있어서 생애(生涯)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는 여행이었다. 그는 9살이 되어 있었다. 하치로우가 이렇게 어렸을 적에는 히데요시의 입장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지만,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따라 이때의 일이 생각날 때마다 히데요시의 헌신적인 애정을 떠올리며 은혜를 느껴,
 -
이 사람을 의해서라면……
 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굳게 다짐하였다
. 이 점토요토미 가문[豊臣]의 다른 양자들과는 달랐다. 다른 양자들은 히데요시의 친척,
인척(姻戚)이었기에 말하자면 자연적으로 존귀(尊貴)한 위치에 설 수 있었으며,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경우는 아무런 피의 연결이 없었던 만큼 오히려 순수하게 히데요시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자랐다고 말할 수 있다.

 친부(親父) 나오이에[直家]가 누워있는 병상(病床)에서 보여준 히데요시의 태도 역시 하치로우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린 자식이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이 몸의 슬픔을 헤아려 주시길……”

 이라며 나오이에는 삐쩍 마른 손을 뻗쳤다. 히데요시도 손을 내밀어 나오이에의 손을 양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이 히데요시의 눈물을 보자 나오이에는 안심하여,

 하치로우를 아무쪼록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

라고 몇 번이나 호소하였.

 아비가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될 무사(武士)본분(本分)과 사졸(士卒)들을 움직이는 법 등을 아비를 대신해 모두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나오이에의 귀에 입을 가까이 해서,

 안심하시길…. 앞으로 하치로우님을 내 자식이라 생각하고 가령(家領)이신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는 물론 일본국(日本)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장수로 길러내겠습니다

 라고 하자 나오이에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소리 내어 울며,

 ~ 정말 안심하였습니다. 앞으론 제가 혼령이 되어서라도 치쿠젠[筑前=히데요시]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저 뿐만 아니고 우리 우키타 가문의 선조 아메노히호코노미코토[天日槍命]를 시작으로 한 대대의 영령(英靈)들도 전부 치쿠젠님의 무운(武運)을 지킬 것 입니다.”

 라고 하였다. 하치로우는 감정이 주변에 쉽게 영향을 받는 아이였기에 이런 대화를 보자 참지 못하고 소리 죽여 울었다. 그 모습이 사람들을 더욱 감동시켰다.
 나오이에는 또한,

 “지금 소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저에게 숨이 있는 동안 하치로우가 어른이 된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어른이 된 모습 이라는 것은 성인식을 시켜달라는 의미였다. 성인식을 치르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그런 예가 없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승낙하여 자신이 에보시오야[烏帽子親]가 되어 나오이에의 머리맡에서 준비를하였다.

 곧이어 성인식에필요한 역할들이 정해졌다. [烏帽子]를 씌워 주는 가관역[加冠役], 아이일 때의 머리를 자르고 상투를 틀어주는 이발역[理髮役], 에보시를 들고 오는 에보시역[烏帽子役], 성인식을 치른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거울을 들고 있을 경대역[鏡台役] 등이다.

 그 중 이발역에 히데요시가 코니시 야쿠로우 유키나가[小西 弥九朗 行長]임명하였다. 이 우키타 영지(領地)에서 태어난 사카이[堺] 상인은 그 탁월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아 이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 있었으며, 츄우고쿠[国] 지역의 크고 작은 다이묘우[大名]들 사이를 오고 가며 반() 모우리[毛利] 체제를 만들고 있었다.

 야쿠로우가 하치로우의 상투를 틀어 주었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하치로우의 메노토[傅人]로 임명 되었다. 이 상인 출신의 무장()과 히데이에의 결합이 세키가하라[ヶ原]의 전쟁터까지 이어질 줄은 이 장소에 있던 누구도 물론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명명식(命名式)이 남았다. 우키타 가문은 대대로 '이에[家]'라는 한 글자가 이어 내려오고 있었다. 3대 전이 요시이에[能家]였으며, 전대가 오키이에[興家], 당대는 나오이에[直家]였다.

 치쿠젠님. 부탁 하나가 더 있습니다. 하치로우를 위해서 치쿠젠님의 이름 글자중 하나를 내려 주실 수는 없으신가?”

 라고 나오이에가 부탁을 하였기에 히데요시[秀吉] 앞글자 '히데[秀]'를 주기로 하였다. 히데요시는 의식에 맞추어 종이를 준비시켜, 그 종이의 한 가운데에 ''라는 문자를 크게 쓰고 왼편 하단에 싸인[花押]를 한 후 하치로우에게 전했다.

 이때 히데요시는 이틀간 오카야마에 머물렀다. 하지만 하치로우의 생모(生母)는 볼 수 없었다. 그녀도 감기에 걸려 누워있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히메지로 떠나기 전 히데이에(하치로우)를 나오이에의 병간호라는 명목으로 오카야마 성에 남겨두었다. 우키타 가문에 있어서도, 센고쿠[戦国]의 관례에 있어서도 믿기 힘들 정도의 호의였다. 이 히데요시의 호의를 나오이에만큼이나 감사한 것이 하치로우의 생모 오후쿠[ふく]였다.

 치쿠젠님의 호의를잊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오후쿠는 나오이에가 하던 말과 같이 하치로우에게 매일 가르쳤다.

 오후쿠는 젊었다. 아직 30이 되기에는 몇 번의 봄과 가을이 남아 있었다. 물론 나오이에에게 있어서 첫번째 부인은 아니었다. 나오이에가 가졌던 부인의 역사는 그대로 그가 행한 음모의 역사인 것이었다.
 첫번째 부인은 옛주인인 우라가미 가문[浦上家]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나카야마 빗츄우노카미 노부마사[中山 備中守 信正]의 딸이었다. 나오이에는 이 장인에게 꼬리를 흔들어 신용을 얻은 다음 곧바로 상대를 방심케 한 후 모살(謀殺)하여그 영지(領地)를 자기 것으로 하였다. 그 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지만 자살했다는 소문도 오랫동안 끊이질 않았다.

 이어서 역시 우라가미 가문의 유명한 신하로 미마사카[美作] 반국()을 소유하고 있던 고토우 미마사카노카미[後藤 美作守]의 딸을 얻었다. 사위의 지위를 이용하여 미마사키노카미를 방심케 한후 독살하여 그 영지(領地)를 뺐었다. 이 부인도 병으로 죽었다. 오후쿠는 그녀의 동생이었다.
 [
마음이건 미모건 비교할 사람이 없다]
 고들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우키타 가에서 키웠고 몸이 크는 것을 기다려 부인으로 삼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하치로우와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각설하고, 나오이에는 히데요시가 병문안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581 1 14일 병으로 죽었다. 54세였다. 히데요시는 우키타 가문의후견인으로서 오카야마에 와 히데이에에게 가독을 잇게 하였으며 가로(家老) 이하 우키타 가의 가신(家臣)들을 훈계(訓戒)하였고 또한 나오이에의 죽음을 굳게 비밀로 하라 하였다. 이 죽음이 공표된 것은 일년 후인 1582 1 9일이 되어서였다. 이때문에 미망인도 그러는 동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될 수 없어[각주:1] 비구니 이름을 갖지못한체 속체(俗體)로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시기에 이 오후쿠와 처음 만났다.
 오후쿠는 물론 상복(喪服)이 아니었다.

 여어~ 어머님이신가~ 하치로우와 많이 닮으셔서 인지 처음 만난 것 같지가 않소이다

 라고 히데요시는 말을 친근하게 걸었지만, 그러나 오후쿠의 아름다움에는 내심 덜컥했다. 눈동자 주변에 어딘가 근심 어린 분위기가 풍긴 묘한 아름다움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 왔던 히데요시의 눈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이런~ 죽은 이즈미(和泉)님도 좋았겠군

 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하려다가, 아무래도 이것만큼은 말을 삼켰다.
 이 오카야마에 머무는 동안, 히데요시는 히데이에와 유자(猶子)[각주:2] 관계를 맺었다. 유자라는 것은 "또한() 아들()과 같다"라는 것으로, 양자(養子)에 준()하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성내에서 허물없이 지냈기 때문에 우키타 가문 내에서의 평판이 좋았고 특히 시녀(侍女)들에게서는,

 저렇게 친근감있는 대장()을 뵌 적이 없다

 고 평판이었다.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라는 인물은 오다 가문[織田家] 넘버 원 무장()이며, 가혹(苛酷)한 성격으로 유명한 노부나가[信長]에게 가장 신뢰받고 있다고 하기에 얼마나 무서운 남자인가하고 상상했건만, 성내에서의 행동은 너무 가벼울 정도로 오히려 거드름 피우는 법이 없었다. 웃기면 배를 부여잡고 웃었으며 맘에 들면 큰소리로 칭찬하곤 곧바로 상을 내렸다. 오히려 아끼려고 하지 않았다.
 시녀들을 다스리던 시녀장(侍女長) 같은 경우는 히데요시가 한 움큼 안겨준 금은(金銀)에 감격하여 제일 먼저 히데요시빠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후쿠를 꼬시기 위해 이 여자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이 여자도 역시 놀랐다. 나오이에가 살아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고는 하여도 엄밀히 말하면
복상(服喪) 중이 아닌가?

 아니~ 물론 그건 잘 알지. 그걸 이렇게 부탁하는 거다

 라며 이 남자는 손을 비벼가며 말했다.

 이런 쪽의 욕망만큼은 참을 수 없다네. 진작부터 오후쿠~ 오후쿠~ 라는 생각뿐이었지만, 그러나 참고 또 참으며 발을 동동 구르며 참아왔건만 이젠 더 이상 어떻게 참을 수도 없네. 부탁하네 응~ 부탁하네 응~ 이해해 주게~”

 라고 했다. 이 모습에는 시녀장도 웃음이 나서 그만 일의 중대함을 잊고 받아 들이고 말았다. 그것을 시녀장은 오후쿠에게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오후쿠가 어떤 심경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에도[戸]시대와는 달리 유교적 도덕의 지배를 그녀들이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이런 점에서 도덕상 고통은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소유자였던 남편이 살아있을 때야 남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소유자가 죽은 이상 그녀에게 용기만 있다면, 또한 남의 이목을 신경만 쓰지 않는다면 자신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오후쿠에게 용기 같은 것은 없었고 단지 당혹해 하고 있던 차에 그녀의 침실에 히데요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이불에서 자 버렸다. 오후쿠의 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 대담한 수동(受動)이 그녀의 용기의 소산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치로우에게 있어서 당신은 모친, 나는 명색이 아비. 이러는 편이 오히려 낫지

 라며 히데요시는 이상한 논리로 오후쿠를 달랬다. 하치로우를 사이에 둔 부모이면서도 부모끼리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은 반대로 이상하고 부자연스럽다는 것이 히데요시의 명쾌(明快)한 논리였으며, 그런말을 들으니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오후쿠도 들었기 때문이다.

 이 하치로우의 양아비는 매일 밤 하치로우의 모친 곁으로 왔다. 오후쿠는 당혹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데요시가 혐오스럽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죽은 남편에 비하면 추남이었으며 키도 약 150 근처밖에 안 되었지만 죽은 남편에 비하면 이 하치로우의 양아비는 훨씬 쿨~한 인품이었으며, 이불 속에 항상 따사롭고 건강한 향기와 같은 것을 남기고 갔다. 이것이 오후쿠에게 있어 즐거운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때 일종의 애정과 같은 것이 태어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히데요시에게는 물론 오후쿠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단순한 엽색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남자는 연이 닿았던 어떤 여성에게건 과할 정도의 애정을 가졌고 그 여성이 행복해지게 되는 것만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성격이었으며 특성이었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은 히데요시 만의 특징이었다. 오후쿠도 그것을 알았다.

 하치로우를 장래에 어떻게든 세상에서 존중 받는 남자로 만들고 싶네

 히데요시는 그것만을 말하였다. 자연히 히데이에를 두고 오후쿠와 히데요시의 사이에 강한 연대가 만들어졌다. 결국에는 이 강한 연대감이, 히데요시와의 이 기묘한 관계를 오후쿠의 마음 속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히데요시가 머문 짧은 기간 동안의 마지막 즈음에 오후쿠는 오랫동안 같이 산 마누라와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히데요시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키타 츄우나곤 히데이에[宇喜多 中納言 秀家]라는 토요토미 다이묘우[豊臣大名]는 이렇게 침실 속에서 태어났다.

  1. 당시엔 남편이 죽으면 대개 비구니가 되어 그명복을 빌었다. [본문으로]
  2. 양자이긴하지만 성(姓)은 바꾸지 않아도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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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26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하루 빨리 나왔군요^^ 역시나 참을 수 없는 히데요시(ㅎㅎ)

    아무튼 오후쿠도 좋았다니 다행이군요. 뭐 좋은게 좋은거지(...;)

    센코쿠 무장들의 정확한 출생년대는 간간히 다른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오이에도 위키에서는 출생년도가 享禄2年(1529年)인데, 사망년도 81년이라면 아무리 우리나이라고 해도 53세인데... 뭔가 시바선생은 대인배스러운 면이 있어서 1,2년 차이엔 크게 신경을 안 쓰는 듯 싶습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6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엔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던가...
    일본엔 "女心と秋の空"라던가.... 그 알 수 없는 마음이야 인류 역사가 이어져 내려온 이래 최대의 수수께끼였다 보니...

    그 "출몰"에 대한 것은 역사서마다 다들 제각각인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위키는 최신 정보를 기준으로 그렇게 되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책들마다 출생 년대가 몇 년씩 차이가 나는게 다반사다보니... 또는 그 때까지 기존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후에 새로 연구된 것에 따라 바뀌는 일도 많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26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자의 마음이라...

    히데요시는 그것에 참 밝았던 것 같더군요. ㅁㅎㅎ.. 여성의 행복을 위해 공부하는 모습이 떠오르니 참... 인간적이랄까,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도 알것 같더군요.

    여담이지만 나중에 오후쿠가 체발하고 나서도 쿨한 관계로 남아있더군요. 은근히 히데요시의 멋진 모습(;;)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6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あっ~!ネタバレは駄目ですぞ!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26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はい、かしこまりました!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7 1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다메엣찌님의 이모티콘과 '@'는 닮았네요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1.31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내용과는 상관없는 댓글입니다만. 발해지랑님은 한자를 어떻게 입력하시나요? 보통 입력하는 것 처럼 하면 아씨 희 자는 姬로 입력되지, 姫(삼갈 '진'이니까, 진 치고 한자 누르면 나옵니다. 저는 이렇게 이 자를 입력합니다만)으로 입력되지 않습니다. 혹시 일본어로 입력하신 겁니까?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습니다. 일본어로 입력하고 있습니다. 인명, 지명, 센고쿠(戦国) 처럼 일본에서만 쓰이는 단어는 될 수 있으면 일본어로 입력하고 있습니다.(그렇게 한지 작년부터인가 그래서... 뒤죽박죽이죠. ^^)

  9.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15: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군사칸베에 드라마보고있는데 거기서는 나오이에가 통크게 히데요시에게 마누라를 넘겨주던데 실제론 히데요시가 잡순거군요ㅎㅎ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참 힘든법인데 목숨을 내던지면 얻어냈군요 한번만 잘못되면 인생하직인데 대단해요

.

 

 ()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히데요시[秀吉]가 후시미 성[伏見城]에 있었던 어느 날. 대청(大廳)에 가기 위해서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도중에 방이 하나 있어 거기에 다섯 자루의 칼이 놓여져 있었다. 히데요시는 발을 멈추고,

 

 누구의 것인가 맞추어 볼까?”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물론 놓여져 있는 방을 보아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 가장 고귀(高貴)한 다이묘우[大名]들의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오늘 등성(登城)하고 있던 얼굴에서 추측한다면,

 

 나이다이진[大臣]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다이나곤[大納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츄우나곤[中納言]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츄우나곤[中納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浮田) 秀家]

 츄우나곤[中納言]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일 것이다. 이 다섯 명은 히데요시의 말년에 토요토미 가문의 [오대로(五大老)]가 되었으며,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다섯 명의 합의 하에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체제로 되었다. 이 체제는 세키가하라(ヶ原) 일전(一戰)까지 이어졌다.

 

 ? 어느 칼이 누구의 것인지 맞추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승려 출신으로 행정관[奉行]인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가 짐짓 놀라는 척을 해 보였다.

 

 그럼 맞추어 보지

 

 라며 히데요시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계속해서 그 칼의 주인을 맞추었는데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겡이 역시 놀랐다.

 

 어떻게 맞추셨는지요?”

 

 ~ 별 거 아니지

 

 하며 히데요시는 설명을 하였다.

 

 우선 에도님[殿[각주:1]]의 칼을 보게. 누가 보아도 특색이 없는 것이 특색이지. 에도님은 참된 용기를 가지신 분으로 한 자루 칼에 의지하려는 졸병의 마음을 갖고 계시지 않으시지. 그렇다면 저것이다.”

 

 카가[加賀 마에다 토시이에]는 마타자에몬[又左衛門]이라 불렸던 옛날부터 굉장한 무()를 지닌 자로, 선봉(先鋒), 신가리[殿]의 무공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저 칼자루에 가죽을 감아 놓은 실용적인 칼이야말로 그의 것일 것이다.”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망부(亡父) 켄신[謙信]이 남긴 가풍(家風)에 따라 마상(馬上) 검기(劍技)를 배웠기에 자연히 장검(長劍)을 좋아한다. 저 날이 긴 칼은 그의 것이 아니면 안 되지.”

 

 아키[安芸] 츄우나곤(모우리 테루모토)은 몸을 꾸미는데 이풍(異風)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저 특색있는 장식을 한 칼이 그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비젠[備前] 츄우나곤(우키타 히데이에)……”

 

 하고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 중 가장 나이 어리고 더구나 히데요시 자신이 양아버지 명목으로 되어있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칼을 가리키며,

 

 히데이에는 그 성격 상 무엇이든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저 황금을 박아 넣은 칼이야 말로 그 아이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영묘(靈妙)는 이를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라며 마에다 겡이는 이 이야기를 성안에 퍼트렸지만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내세울 만한 일도 아니었다. 인간과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것에 대해서는 역사상 비할 데 없는 천재였으며, 그렇기에 오다 가문[織田]의 짚신담당에서부터 출세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천하를 손에 넣은 뒤 말년엔 좀 노망끼가 들었지만 그러나 이 정도의 놀이라면 씨름꾼이 세 살배기 어린애랑 팔씨름하는 것보다도 쉬웠다.

 

 히데요시는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이 즈음 그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후시미 저택에 놀러 가 차를 마시고 정원을 거닐며 심어진 동백의 꽃 핀 모양을 칭찬하거나 한 후,

 

 '노인분들~ 노인분들~'

 

 하고 박수를 쳐 정원으로 이어진 시라스[白洲]에 무릎 꿇고 있던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가로(家老)들에게 말을 걸었다. 우키타 가문은 현재의 오카야마 현[岡山県]에서 효우고 현[兵庫県] 일부에 걸쳐 세토 내해[瀬戸内] 연안(沿岸) 57 4천석을 영유(領有)하고 있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였기에 가로의 숫자도 많았다.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 토가와 히고노카미[ 肥後守],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 오카 에치젠[岡 越前] 10명이 넘었다.

 

 히데이에를 부탁한다~ 히데이에는 하치로우[郎]라 불렸던 아이였을 때부터 키운 내 자식이다. 거듭거듭 부탁한다~”

 

 라고 말하고, 곧이어 응접실[書院]로 돌아가던 중 뜬금없이 차석(次席) 가로인 토가와 히고노카히 타카야스[戸川 肥後守 達安]를 불러,

 

 날 업고 가시게

 

 라고 말했다. 토가와는 우키타 가문전대(前代)나오이에[直家] 때부터 산요우도우[山陽道]에 무명(武名)을 떨쳤던 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 등짝이 굉장히 넓었다. 그런 그가 몸을 낮추고 히데요시를 업고 털이 북실북실한 정강이로 계단을 올라 힘 안들이고 응접실 앞 복도까지 갔다. 왜소한 체격의 히데요시는 기뻐하며,

 

 이거 참 편하구먼

 

 하고 신이 나 떠들었는데, 이것도 히데요시 정치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키타 가문의 가로들은 자아(自我)가 강한 사람들이 많아 자기 실력을 내세워 어린 주군인 히데이에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가로 무리도 파벌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토가와 히고노카미 타카야스는 말하자면 야당(野黨)영수(領袖)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이 인물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그런 타카야스를 자신과 친하게 하고, 그 정()으로 히데이에를 섬기게 하여 우키타 가문이 융화할 수 있도록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치로우(히데이에)만큼 귀여운 녀석은 없지

 

 라고 히데이에가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는 남들에게 자주 말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혈통이나 처의 혈통에서 양자(養子), 유자(猶子[각주:2])를 많이 만들었지만 이 피가 이어지지 않은 히데이에를 가장 사랑하고 있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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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가진 가장 곤란한 점은 극단적으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혈통이 좋고 더구나 얼굴이 예쁘게 태어난 여자를 보면, 그녀가 아무리 유부녀라도 한번은 다가가 말이라도 걸어보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의 장수로 츄우고쿠[]의 모우리 씨[毛利氏]를 공략 중일 때의 이야기이다.
 
이 당시, 히데요시의 본영(本營)히메지 성[]이었다. 적인 모우리 씨히로시마 성[]이었다. 그 중간인 오카야마 성[岡山城]에 히데이에의 망부(亡父)인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있었다. 나오이에는 비젠[備前]미마사카[美作]를 가진 다이묘우[大名]로 처음엔 모우리 측에 서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다 측에 붙는 편이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우리 씨산요우, 산인[山陰] 10개 지역[]의 거대 영주(領主)라고는 하여도 석고로 따지면 110만석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오다 씨킨키[近畿]를 중심으로 이미 30개지역() 이상을 제압하여 300만석이 넘는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량으로 말하면 오다 씨의 승리일 것이다.

 나오이에는 계산이 빨랐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계산에 그 만큼 충실한 사람도 없었다.

 

 우키타 가문은 산요우[山陽]의 명족(名族)이라고는 하지만, 나오이에가 어렸을 때는 몰락해 있었기에 나오이에는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가문을 일으켰다. 젊었을 즈음 비젠[備前]의 다이묘우[大名]였던 우라가미 가문[浦上家] 섬기며 남몰래 뜻을 세워, 우라가미 가문의 세력가들을 계속해서 모살(謀殺)하여 결국에는 우라가미 가문의 땅을 빼앗았다. 이 정도로 악랄하고 집요한 음모가(陰謀家)는 이 시대에도 드물었다. 풍운(風雲) 속에서 기어올라온 신흥 다이묘우[大名]라고는 하여도, 그가 일생 동안 해본 전투다운 전투는 한 번밖에 없었으며 모두 치밀하기 짝이 없는 음모를 펼쳐, 필요하면 주군(主君)이건, 주군의 가문이건, 은인(恩人)이건, 처의 부친이건, 친척이건 구별 없이 죽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 나오이에와 함께 행동을 해 온 동생 타다이에[忠家]도 나오이에가 죽은 후,

 

 형만큼 무서운 사람은 없었다. 날 귀여워해 주긴 했지만 원래 속이 검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때문에 나는 항상 형과 만날 때면 반드시 옷 안에 사슬갑옷[鎖帷子]을 입고 갔다

 

 라고 말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결국 나오이에는 오다 가문으로 넘어왔다. 실무(實務)상 오다 가문의 사령관인 히데요시를 통해서였다. 이런 그들을 중간에서 알선을 한 것이 나오이에의 영지(領地) 출신으로 사카이[] 상인인 코니시 쥬토쿠[小西 寿徳], 야쿠로우[弥九朗] 부자(父子), 아들인 야쿠로우는 이 교섭 중에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후에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어 '코니시 셋츠노카미 유키나가[小西 津守 行長]'라 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은 본편과 그다지 관련이 있지 않다.

 

 이 밀약의 인질로, 나오이에는 자신의 아들 히데이에(당시 하치로우[])를 히메지의 히데요시에게로 보냈다. 하치로우의 나이 8살 때였다. 히데요시는 히메지 성내에서 이 어린이와 대면(對面)한 후, 그 용모(容貌)가 너무도 아름다운 것에 놀라 함께 온 우키타 가문의 가로에게,

 

 이 하치로우님은 아버님을 닮으신건가? 아니면 어머님을 닮으신건가?”

 

 라고 물었다. 히데요시는 나오이에와 아직 만난 적은 없지만 나오이에가 어렸을 적에는 주군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 宗景]남색(男色) 관계를 맺어 출세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남이었다. 그러나,

 

 글쎄요……”

 

 라고 가로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무문(武門)의 남자 아이는 모친을 닮았다는 것보다도 부친을 닮은 편이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아쉽게도 하치로우는 나오이에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모친과 닮았다.

 

 황송하오나…… 모친과 닮으셨습니다.”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급빵끗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황송할 게 뭐가 있나? 그렇겠지…… 그럴 거다. 그 어머님도 저 도련님을 보건대 필시 아름다운 분이실 것이다

 

 하치로우는 오우미[近江] 아즈치 성[安土]에 있는 노부나가[信長]에게로 보내졌다. 하치로우는 둘째 아들이었지만 장남인 요타로우 모토이에[ 基家]가 전사(戰死)하여 우키타 가문의 외동아들이었기에 인질로써의 가치는 높았다. 아즈치 성의 노부나가도 저 권모가(權謀家)인 나오이에가 이 하치로우를 인질로 받친 것을 이외로 생각하여 그 성의(誠意)에 만족했다. 더구나 하치로우는 미동(美童)이었기에 부친뿐만 아니라 이 소년에게도 호의를 가졌다.

 

 비젠[備前]에서 온 저 아이. 맘에 드는구나. 각별히 잘 대해줘라

 

 라고 노부나가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하치로우는 소년일 때부터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밝아 1581년이 되었다. 비젠[備前] 오카야마 성에 있던 나오이에가 죽을 병에 걸렸다. 이미 나이는 50을 넘고 있었다. 쇠약한 상태로 보건대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이 의사의 견해였다. 그가 병에 걸렸다는 것은 모우리 씨를 상대하는 전략상 깊숙이 숨겨졌지만, 그러나 히메지 성에 있던 동맹자 히데요시에게만은 비밀리에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놀랐다.

 

 나오이에가 죽는다고? 죽지 않게 어떻게든 해라

 

 고 몇 번이나 말하며 마음 속 깊이 그 불행을 탄식했다. ()이 깊은 것은 히데요시의 특성이었고, 더할 나위 없이 친절했으며 남을 먼저 생각했다. 그런 특성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따랐고 안심하며 자신의 미래를 맡겼다. 간악무쌍(奸惡無雙)하다는 우키타 나오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음을 앞둔 나오이에의 바램은,

 

 숨이 있을 때 한번 하시바[羽柴]님을 만나 하치로우의 앞날을 부탁하고 싶다

 

 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승낙했다. 히데요시의 측근들은 걱정했다. 나오이에는 유명한 모살(謀殺)의 명인(名人)으로 꾀병을 핑계삼아 히데요시를 오카야마 성으로 불러 히데요시가 가면 어디에 칼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지만, 총명한 히데요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 지나친 생각이다. 저건 나오이에의 본심이지.

 라고 히데요시는 보았다. 거기에 오다 가문의 일개 무장에 지나지 않는 자기를 죽인다고 해서 나오이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카야마 성에 갈 준비를 하였다. 이런 시세(時勢)에, 이제 막 동맹자가 된 가문의 성에 스스로 간 예는 전무(全無)에 가까웠지만, 히데요시는 그것을 굳이 그렇게 하였다. 이 대책 없는 친절함이야 말로 자신이 가진 정치적 자산인 것을 히데요시는 잘 알고 있었다. 친절은 적당히 하는 것 보다 한층 더 철저히 하는 편이 좋은 것도 이 인물은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아즈치의 노부나가에게 부탁하여, 나오이에의 외동아들 하치로우를 데려가기로 하였다.

 

 허허~ 이거 이거~”

 

 하고 모신(謀臣) 쿠로다 칸베에[ 官兵衛]조차도 이 대담함에는 눈이 휘둥그래해 졌다. 인질과 함께 오카야마 성을 방문하다니, 나오이에가 그럴 생각이 있다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오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히데요시에게는 이런 모험을 하지 않으면 이 난세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원칙이었기에, 칸베에의 아는 체하는 간언(諫言)은 당연히 물리쳤다. 물론 이 목숨을 건 승부처에서 하치로우의 모친에 대해서는 절세의 미녀라는 모친에 대한 것 등은 히데요시의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호색(好色)은 즐기는 것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죽고 사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1. 토쿠가와 이에야스. 이에야스의 본거지가 에도에 있었기에 이렇게 불렸다. [본문으로]
  2. 양자이긴 하지만 성(姓)은 바꾸지 않아도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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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20 2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혁신의 CG는 참 안습이던데..(능력치도...) 매력치가 있었다면 좋았으려만, 미청년 츄나곤에 맞지 않는 이미지라서 이거야 원....

    뭐, '임진록(..;)'이란 게임에 나온 헐크 이미지야 말할것도 없고;;;

    그래도 하치로우는 모친을 닮아서 그런지, 참 부친의 고생과는 다른 다복한 20대를 보낸 듯 하여 부럽습니다. 청년기가 평온한 모모야마 시대여서 그런 덕도 있었지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1 17: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혁신은 좀 남자답게 나왔던가요?(기억이 가물가물...)

    임진록은 해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뭐 현지도 아니고 외국에서 거기까지 신경을 쓸 순 없겠죠..아마...(특히나 임진년 '총사령관'이면 아무래도 헐크여야 했을지도)

    운이 좋았죠. 한창 놀 나이에 천하는 이미 양아버지의 것이 되어 가고 있었으니...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21 2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혁신은 무슨 간이 안좋은양 얼굴이 시커멓게 나왔더군요. 뭐랄까.. 정말 그렇군요. 한창 놀 나이에 아버님이....

    뒤를 좀 읽어보니, 원복을 10살 이전에 하더군요. 어쩐지 혁신에서도 빨리 나온다 했더니만... 나오이에가 죽기전에 男姿를 보고싶다고 해서리, 에보시오야로 히데요시가.. 이름에 히데가 들어가는 것도 그 인연이더군요. 더군다나 오카야마에 인질을 (아버지 간병해 드리라..)고 놔두고 가는 센스가..;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1.21 2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키타 히데이에의 혁신 CG가 어둡다면 천창 CG는 창백하죠. 창천록 CG는 그냥 완전 클론무장 CG 같고 특징이 있다면 아버지 나오이에를 닮았다는 것뿐입니다.
    우키타 아키이에, 그러니까 사카자키 나오모리라고도 하는 우키타 타다이에의 아들도 이 소설에 나옵니까?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1 2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혁신에선 일찍 나오는 것이 기억나는군요. "어이~ 이 나이에 이 얼굴이 혁신이다 !@#$"..
    라고 했던 기억이....

    신사본론님//예. 멋진 조연으로 나옵죠. 여기선 사쿄우노스케(左京亮)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죠.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22 2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다보니 질문이..^^;; 2장을 읽다보니 所遇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두보의시해석..에서는 '길에서 우연히 만남'으로 해석되 있던데;; 일어 발음이 궁금하네요. 뜻도 그 뜻일까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2 2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처우(処遇-しょぐう)의 오자 같습니다. 앞뒤 문장을 볼 때 그렇게까지 밖에 생각이 안드는군요.
    발음도 所(しょ)遇(ぐう)로 똑 같거든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22 2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1.23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풍신가의 사람들 너무 재밌고, 몰랐던 점을 알아가는데, 참 좋네요. 다음 편이 기대 됩니다.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3 1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 보통 업데이트는 주말에 하고 있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filaments BlogIcon 서브머린 2008.01.28 1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일본무장중에서 우키타 히데이에를 매우좋아해서 오카야마성까지 다녀왔었는데
    이번시리즈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8 1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문 감사드립니다. ^^
    사족이지만 전 오카야마라면 일본 야구 감독 중에서 제일 호감이 가는 호시노 센이치의 출신지라는 것이 먼저 떠오르더군요.

  13.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13: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일단 이쁘고 잘나고봐야되는군요

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 秀家]

1655 11 20일 병사 84.

1572~1655.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적자(嫡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섬기며 천하통일에 공헌. 분로쿠의 역[文禄の役][각주:1] 케이쵸우의 역[慶長の役][각주:2] 공을 세워 오대로(五大老)[각주:3] 사람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의 주력이었다. 그러나 패하여 사츠마[薩摩] 도망 가지만 후에 잡혀서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 유배당했다.









영광에서 좌절로


 우키타 나오이에는 센고쿠[戦国] 효웅(梟雄)으로 공포의 대상이었 우키타 나오이에의 세자(世子), 1572년에 비젠[備前]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태어났다.
 시대는
신흥세력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선봉으로 하리마[播磨]로 진출해 온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세력과 츄우고쿠[中国]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패권을 놓고 싸우던 시기였기에, 그 사이에 낀 우키타 씨()는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 하던 때였다. 결과적으론 히데요시 쪽에 붙게 되어 히데이에는 불과 10살의 나이로 히데요시를 후견인 삼아 가독(家督)을 상속하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이름 중 한 글자를 얻어서 지은 '히데이에[秀家]'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그의 일생은 토요토미 씨()의 번영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연표(年表)처럼 그의 영달 과정을 적어보면,

  1. 1585(13). 시코쿠[国]의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와의 전쟁에서 데뷔 전을 장식했다.

  2. 1587(15).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 씨[島津氏]와의 전쟁에 종군하였고 그 싸움이 끝난 후에는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에 서임(敍任).

  3. 1589년(17세). 카가[加賀] 카나자와 성[金沢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넷째 딸로 어려서부터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어 있던 고우히메[豪姫]와 결혼.

  4. 1594(22). 분로쿠의 침공[각주:4] 때. 6군의 주장(主將)으로 바다를 건너 벽제관의 싸움에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등과 함께 명나라의 장수 이 여송군을 대파하였다. 이 때의 공적으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서임.

 식으로 항상 토요토미 정권을 지탱하는 중신으로 활약하여, 히데요시에게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을 때는 아직 26세의 청년 다이묘우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히데이에의 영광은 지속되지 않았다.


 1600 9월.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히데이에는 당연히 서군(西軍)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1 6천 여라는 최대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방관을 하던 장수들이 많은 서군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서군이 패배함에 따라 히데이에는 명예나 지위를 모두 잃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히데이에는 미노[美濃] 카스카와[粕川] 골짜기에서 이틀간 떠돈 끝에 패잔병을 노리는 노부시[野武士][각주:5] 무리에게 포위 당하지만, 두목인 야노 고로우자에몬[矢野 左衛門]은 히데이에의 인품에 반하여 반대로 히데이에 일행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우키타 가의 가보(家寶)이며 히데이에가 차고 다니던 쿠니츠구[次]의 긴 칼[太刀]을 고로우자에몬이 토쿠가와 쪽에 바쳐서 히데이에가 죽었다고 위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엄중한 탐색을 피하면서 시간을 번 일행은 고난의 도피행 끝에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저택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처()인 고우히메와의 재회를 기뻐할 틈도 없이 히데이에 일행은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의지하여 도망쳤다.


종언의 땅,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


 히데이에 주종(主從) 오오스미[大隈] 키모츠키 군[肝属郡] 타루미[垂水]의 호족인 히라노 씨[平野氏]의 집에 숨겨졌다.


 그 후 1603 9월.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각주:6]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각주:7]의 조명탄원(助命嘆願) 덕분에 사형을 면한 히데이에는 스루가[駿河] 쿠노우 산[久能山]에 유폐(幽閉)되었, 그 후 3년 뒤인 1606 4 적자(嫡子)인 히데타카[秀高], 가신(家臣) 12명과 함께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당시 히데이에 34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큐우후쿠[休福]'란 호()를 칭하고 있었는데 이 때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한때 50만석 넘게 영유[각주:8]하고 있던 비젠[備前] 태수(太守)였기에 섬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섬의 대관[代官][각주:9]인 키쿠치 사콘[菊池 左近]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처() 고우히메의 친정 마에다 가문에서는 1614 이후 1년 터울로 생활물자가 보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여 섬사람들에게 보리 빌리지 못하면 생활할 없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패군의 장수가 되었을 죽음을 선택했다면 이러한 고생도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이에가 유배생활을 50년이나 계속할 있었던 것은, 산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고 담담히 살고자 하는 인생철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655
11 24일. 84세로 사거(死去)했다.

하치죠우지마 섬[八丈島]에 있는 히데이에의 묘.

  1. 임진왜란. [본문으로]
  2. 정유재란.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5. 무장 농민집단. [본문으로]
  6.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로 사츠마번[薩摩藩]의 초대 번주(藩主). [본문으로]
  7. 토시이에[利家]의 첫째 아들로 히데이에의 부인 고우히메[豪姫]의 오빠. 카가 번[加賀藩] 초대 번주. [본문으로]
  8. 약 54만 7천석. [본문으로]
  9. 섬의 지방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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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espylaco BlogIcon 하루노부 2007.12.16 16: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자료 담아갑니다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7 0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가신다고 하여도...링크만 가능케 한지라...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6.29 1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운의 무장이죠;
    오.. 그런데 꽤 미남상이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도 초상화만 본다면 가장 미남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