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

 이 즈음, 쥬라쿠테이(聚楽第)를 방문하는 다이묘우(大名)는 한 명도 없게 되었다.
 눈치 빠르기로 소문난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같은 자는 예전 가장 친한 척하며 한때는 10일에 한번 정도 방문했던 인물이었지만 발길을 끊었으며, 히데츠구에게 황금 100매를 빌렸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는 그로 인해 서로 사이가 좋다는 의심을 사는 것이 두려워 그 돈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결국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돈을 빌려 히데츠구에게 갚았다. 이에야스는 그 후 에도(江戸)로 돌아갈 일이 있었는데,쿄우(京)를 떠나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쿄우(京)에 있던 세자(世子) 히데타다(秀忠)에게,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와 칸파쿠(関白=히데츠구)가 싸우게 되면 무조건 타이코우에게 붙어라. 타이코우가 만에 하나라도 죽는 일이 생긴다면, 곧바로 오오사카(大坂)에 가서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각주:1])를 호위해라”

 는 말을 남겼다.
 이미 세상이 그렇게까지 과열되기 시작한 이상 히데츠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쿠마가이(熊谷)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정에 3000매의 백은(白銀)을
진납(進納)하였다. 장래 일의 경과에 따라 히데요시를 쓰러트렸을 경우 신정권을 곧바로 승인 받고자 위함이었다. 1595년 7월 3일이었다. 바로 그날로 이 비밀이 후시미(伏見)로 새었다.

 히데요시는 결국 결심하여 다섯 명의 힐문사(詰問使)를 파견하였다.
 미야베 젠쇼우보우(宮部 善祥坊),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마에다 겡이(前田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토미타 토모노부(富田 知信)였다.
 히데츠구는
인견(引見)하여, [모반이라니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모반할 생각은 없다]라는 뜻의 서약서를 써 건넸다. 백은을 진납한지 이틀째였다.

 다섯 명은 후시미(伏見)로 돌아와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그로부터 3일째 되던 날 다른 사자들이 쥬라쿠테이(聚楽第)로 파견되었다. 예전에 히데츠구의 숙로(宿老)였던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 一豊), 거기에 먼젓번의 미야베, 마에다 겡이를 포함한 다섯명이었다.

 “그런 뜬소문이 떠돌아 서로 의심이 생긴 것은 요컨대 서로 직접 이야기를 나누실 기회가 없어서일 것입니다. 후시미(伏見)까지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를 죽음의 사자라고 생각한 히데츠구는 끝까지 거부하며 승낙하지 않았다. 그들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시미(伏見)에서 다른 이가 와서 별실에서
내알(內謁)을 청했다.
 비구니인 코우조우스(孝蔵主)라는 노녀(老女)였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가장 신임을 받고 있는
여관(女官)으로 히데츠구는 어릴 때부터 이 비구니와는 친했다.

 “이 비구니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세요”

 라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타이코우님은 기분 좋으십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하를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계시지는 않사옵니다. 아무 염려하실 것이 없사옵니다, 고 하였다. 히데츠구는 숙로인 다이묘우(大名)들은 경계하였지만 이 비구니에게는 낚였다. 히데요시의 계략은 성공했다. 뒷문으로 들어온 이 비구니 쪽이 실은 죽음의 사자였다.

 “그런가? 그럼 가보세”

 라고 하며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측근인 쿠마가이들이 막을 틈도 없이 히데츠구는 비구니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히데요시에겐 손자뻘인 세 명의 아기들을 앞세우고 호위는 백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오후 조금 지나 쥬라쿠테이(聚楽第)를 출발하여 타케다(竹田) 가도를 이용하였고 오후 3시 즈음에는 후시미에 도착했다. 후시미의 거리에서는 소란이 일어나 가재도구를 들고서 도망치는 이들도 많았다. 떠도는 소문에 히데츠구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온다고 한다. 히데츠구는 생각치도 못했던 이런 반응에 놀랐다.
 ‘내가…… 내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인가?”

 “우선 오시는 길에서 맞은 먼지를 떨구시길”

 이라며 휴식소로 지정되었다는 키노시타 요시타카(木下 吉隆)의 저택으로 안내 받았다. 그러나 문에 들어서자 마자 은밀하고 재빨리 모든 문이 닫혔다. 이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곧이어 사자가 성(城)에서 와, 만날 필요 없다며 그대로 코우야(高野)산(山)에 가라고 하였다. 히데츠구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밤 승복(僧服)으로 갈아입고 후시미를 출발하여 이틀 후 코우야산(山)에 올라가 세이쥬쿠 사(青宿寺)에 도착하였다. 다섯 날째에 산기슭에서 타이코우 히데요시의 사자들이 각각 부하들을 이끌고 올라왔다. 정사(正使)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라 한다.

 “틀림없이 마사노리인가?”

 히데츠구는 확인을 위해서 물어보았다.

 “틀림없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운명이 다한 것을 깨달았다. 마사노리와는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안 좋은 채로 살아왔다. 그 마사노리가 이런 때 사자로 선정된 것을 보면 말로 듣지 않아도 명료했다. 죽음이다.

 역시 죽음을 언도 받았다.
 이 순간부터 히데츠구는 지금까지의 이 남자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죽음의 명령을 받았을 때 히데츠구는 자신의 문서담당관인 승려 사이도우(西堂)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거의 이겨갈 때 즈음 마사노리의 명령을 받은 히데츠구의 측근 사사키베 아와지노카미(雀部 淡路守)가 와서는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을 히데츠구에게 보고했다. 히데츠구는 바둑판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겼다”

 고 뜬금없는 말을 하였다. 바둑이었다.

 “모두들 나중에 증거로 봐 두라고. 내가 이겼다”

 과연 주위가 그것을 보자 히데츠구가 이긴 바둑이었다. 이것 자체가 기묘했다. 여태까지 히데츠구가 사이도우에게 바둑으로 이겨본 적이 없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날 이때가 되어서야 이긴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기뻤는지 짝사랑을 앞에 둔 소년과 같이 볼을 붉히며,

 “지금부터 나는 배를 가르러 가지만 이 바둑판은 흩뜨려놓지 말게. 조심히 방으로 옮겨라. 모두 나중에 돌을 놓은 것을 잘들 살펴보게”

 라고 말하곤 사사키베 아와지노카미를 향해,

 “유서를 쓰고 싶군. 허락되는지를 알아봐 주게”

 라 말하였다. 그것이 허용되었다.

 히데츠구는 자신의 친아비와 정실, 시첩(侍妾) 일동들에게 간결한 유서 한 통씩 세 통을 썼다. 붓놀림이 경쾌했다. 다 쓰고 난 후 붓을 던졌다. 던지고 난 후 승려 사이도우를 향해서,

 “내 일생은 타이코우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죽음도 또한 그렇다.”

 고 말했다. 자신의 생애가 하나하나 타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기묘함을, 이 남자는 마음속 깊이 되돌아 본 것일 것이다.

 “이제 나는 죽는다. 이것도 타이코우의 뜻이다. 그렇지만 내가 내 배를 가르는 칼은 내 손안에 있다.”

 요컨대 배만은 자신이 가른다, 그것만은 자기자신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사이도우에게,

 “자네는 중일세. 죽을 필요는 없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이도우는,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는 제 맘대로 함께하겠습니다”

 라며 자신도 배를 가를 준비를 하였다. 사이도우는 참고로 코우조우스(孝蔵主)의 조카이다. 숙모의 거짓말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내심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히데츠구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 후, 곧이어 할복의 자리에 앉았다.
 착각을 했는지 이 남자는 동쪽을 향했다. 불법에 이르기를 부처는
서방십만억토(西方十萬億土)에 계시다고 한다. 서쪽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작법(作法)에 어긋납니다. 서쪽을 향하십시오”

 라고 사이도우가 충고를 하자 히데츠구는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다시 한번 충고를 하니,

 “부처님은 시방(十方)에 계시다고도 한다. 방위에 연연하진 않겠네”

 라고 말하였다. 적어도 생애의 마지막 정도는 자기 맘대로 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카이샤쿠(介錯)의 칼이 번쩍이며 시체는 작법이 틀린 채로 동쪽을 향해서 쓰러졌다.
 사이도우는 그것을 보고,

 “전하는…… 방향을…… 잘못 아시고 계시다. 이것이 묘하다. 전하의 생애도 이랬던 것은 아닐까?”

 라고 말하였다.
 사이도우는 서쪽을 향했고 서쪽을 향해서 목이 떨어졌다. 자연히 시체는 히데츠구와는 반대 방향이 되었다. 사이도우가 마지막에 중얼거린 위에 말이 히데츠구의 생애를 상징한 말인 듯이 항간에 전해졌다.
 사실, 히데츠구는 태어난 연(縁)이 잘못된 것이다.

*********************************************************************************************************

 히데츠구가 죽은 뒤 그 처첩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는 성별의 구분 없이 전부 사형당했다.
 
형장(刑場)은 쿄우(京)의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이었다.
 60 평방미터 사방에
(濠)를 파고 거기에 울타리를 둘러쳤고 형을 집행하는 천인(賤人)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활과 화살을 들려주었다.

 집행된 것은 8월 2일.
 쥬라쿠테이(聚楽第)의 남문(南門)부터 백색의
수의(壽衣)를 입은 그녀들을 몰아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천인들이 물건이라도 던지듯이 그들을 수레에 집어넣었고 한 대에 2~3명씩 태워서는 산죠우 강변으로 옮겼다.
 형장의 남쪽 구석에
토단(土壇)이 세워져 머리가 하나 올려져 있었다. 히데츠구의 머리이었다.

 “저걸 봐라~! 저걸 보라구~!”

 라고 천인들은 소리 질렀고 지르면서 그녀들을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었다.
 울타리가 닫히고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녀들을 천인들이 쫓아가서 찌르고 잡아서는 베었다. 천인이 2~3살 먹은 어린 귀족을 잡아서는 모친의 눈 앞에서 강아지라도 죽이듯이 죽였고 그것을 보고 기절한 모친을 다른 천인이 안아 세워서는 목을 쳤다.

 이치노다이(一ノ台)도 그 딸인 미야노카타(宮ノ方)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녀는 사세구(辭世句)를 준비해 놓았다. 딸의 사세구는 이렇다.

 모녀의 헤어짐을 듣고 우울했지만, 같은 길을 가니 기쁘구나
 憂きはただ親子の別れと聞きしかど同じ道にし行くぞうれしき
 형은 공개로 행해졌다.
 수만의 구경꾼들이 형장을 에워쌌고 특히 장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죠우 다리에는 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이 사형이 무엇 때문에 행해졌고,천하에 대해서 어떤 효과를 기대하며 공개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곧이어 처형은 종료되었고 원래부터 강변 한 켠에 파여져 있던 구덩이 속에 그들의 시체와 히데츠구의 머리가 함께 던져졌다. 흙이 덮이고, 그 무덤 위에 석탑이 세워졌다.
 악역을 저지른 히데츠구의 무덤[秀次悪逆塚]
 이라고 그 비석에는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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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의 친아비인 미요시 무사시노카미 카즈미치(三好 武蔵守 一路)는 영지(領地)와 위관(位官)을 몰수당해 원래의 신분인 평민으로 떨어져 사누키(讃岐)로 유배당했다.

 “뭔 일이래……”

 이 야스케는 사누키(讃岐)의 유배지에서 자신이 먹을 땅을 괭이질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뭔 일인지... 이 친아비도 또한 자기 일생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殺生関白,了====================

  1. 히데요시의 정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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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7: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요시 카즈미치야 뭐.. 본래의 운명으로 돌아갔으니 담담했을듯, 히데츠구도 마지막되니 제법 용자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는군요...

    그나저나 히데요시 친 누님은 어떻게 되었을련지.. 측근인 쿠마가이 녀석 운명도 궁금하고..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쪼록 수고하셨습니다. 대조해가며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할듯..(정말 소설은 읽으려니 ㅎㄷㄷ라..)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9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대조는 하지 말아주세요... 시바 선생의 필력을 살릴 수 없어서 여러 번 고생한 끝에 제멋대로 갔다붙인 곳이 많아서리..^^;

    참고로... 히데요시의 친누나이자 히데츠구의 어미인 즈이류우인 닛슈(瑞龍院 日秀)는 히데츠구가 죽은 후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 즈이류우인(瑞龍)원(院)을 세워 비구니 호인 닛슈(日秀)를 칭하며, 히데요시의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가 죽은 다음 해인 1625년 93살의 나이로 죽었다고 합니다... 친누나이니까 살려 주었나 보네요.

    쿠마가이 역시 연좌되어 할복을 명령받아 니손(二尊)원(院)에서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원서는 읽을 엄두도 안나서..(ㅎㅎ..)

    키타노만도코로보다 장수했다니..(히데요시보다 10여세 연하로 알고있는데..) 어지간한 장수군요...

    다시 읽어보니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소심함이 한층 엿보이는군요.. (어이, 아들내미한테는 한때는 이에야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며?ㅋㅋ..)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0 14: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이야기는 조금 의심이 가는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나)
    몇 몇 책에서는 히데츠구가 죽은 이후의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별일 아니었는데 히데요시 측에서 땡깡을 부렸다는 말도 있고, 또한 이에야스한테 돈을 빌렸다는 것도 조금... 왜냐면 그의 장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경우 돈을 잘 빌려주기로 유명했거든요.(뭐 하필이면 그 때 토시이에에게 돈이 없었다면 그 뿐이지만 말입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10 1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 돈 잘빌려주는 건 유명하지요(이아저씨는 꽃의 케이지에서의 주판영감이미지가 자꾸 떠올라서~~;)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P.S. 타다오키 처 가라샤는 아케치 미쓰히데 딸내미로 알고 있는데.. 혈연이 참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 같습니다. (에휴...어려워서 원;)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0 23: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로 힘이 있는 가문끼리 만세에 걸쳐 좋은 게 좋은 것지~ 라면서 겹사돈 맺는 거야 어느 시대 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가라샤...하면 전 타다오키의 의처증이 우선 생각나더군요... ^^ 쪼잔한 녀석~ 하면서..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kelt200 BlogIcon 깃쨩 2007.12.11 0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살생관백 다음 챕터 대머리쥐의 일족 얘기도 있는지 궁금하군요. 고맙습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1 1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위에서 다섯번째 리플... 타다오키의 장인 마에다 토시이에라 했는데, 사돈이군요... ^^; 이 실수는 자주 하는군요...--;

    깃쨩님//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은...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다룬 단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 히데요시의 정실 '오네'를 다룬 단편
    야마토 다이나곤(大和 大納言) ->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를 다룬 단편
    스루가고젠(駿河御前) -> 히데요시의 막내 여동생을 다룬 단편.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둘째 아들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인물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 황족으로 히데요시의 유자(猶子)가 된 인물
    요도도노(淀殿)와 그 아들 ->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와 히데요리(秀頼)의 이야기......

    가 남아 있으며... 매주 일요일 업데이트 할 예정(이라고 쓰고 '어긋나기 위해 계획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석된다....)입니다.

  10.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처형장면이 너무나 비참하군요. 처자들이 뭔 죄가 있다고 죽여도 곱게 죽이지 어찌 저리 잔인하게 죽인건지... 이 때 이미 히데요시 정권은 끝난것 같습니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그들의 명복을 빕니다

六.

 “이리 오시게. 술을 드리겠네”

 상냥한 목소리로 손을 잡았다. 불쌍한 장님이 고개를 들어,

 “어이쿠~ 이렇게 친절할 수가! 어디에 뉘신감?”

 라고 희희거리며 따라왔지만 얼마 안가 히데츠구는 허리를 돌리며 장님의 어깻죽지부터 오른팔을 베어 떨어뜨렸다. 지금까지 히데츠구의 경험상 보통 이런 충격을 받은 사람이라면 기절하였다. 하지만 이 장님의 심리 세계는 어딘가 틀린지 이 순간 삼 척이나 껑충 뛰며 소리 높여,

 “어디 사람 없소~! 나쁜 놈이 사람을 죽이려 하오~ 사람들아 저 놈을 쫓으소~ 나를 구해주소~”

 하고 느릿느릿 그러나 침착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 놈은 특이한 맛을 하고 있군”

 히데츠구가 말하자 이런 종류의 살생에는 항상 따라붙으며 히데츠구의 비위를 맞추는 쿠마가이 다이젠노스케 나오유키(熊谷 大善亮 直之)라는 젊은 다이묘우(大名)가 히데츠구의 흥을 더 돋구기 위해서 장님에게 다가가,

 “네 놈에게는 이제 팔이 없지. 피도 둑이 터진 것 같이 흐르고 있지”

 라고 현실을 가르쳐주어 알면 괴로워하며 기절할 거라 생각하여 그 반응을 기대했다. 그러나 장님은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을 하였다.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목소리도 이외로 낮추어,

 “그래 알겠다. 그랬었군”

 하고 중얼거렸다.

 “이 나쁜 놈은 평소 이 부근에 나타난다는 살생 칸파쿠(殺生 関白)[각주:1]인가? 반드시 그럴 거다.”

 히데츠구를 호종하고 있는 쿠마가이는 - 쿠마가이 지로우 나오자네(熊谷次郎 直実 – 하단 역자주)의 후손이라는 인물이다. 가문은 한 때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에서는 후다이(譜代[각주:2])의 명문가로 대대로 쿄우(京)에 살며, 지금은 와카사(若狭) 이사키(井崎)의 성주(城主)이기도 했다. 잔머리가 잘 돌아갔던 만큼 히데츠구가 어떤 점에 흥미를 갖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병 상태라도 알려주는 듯이,

 “네 놈은 눈이 보이지 않지. 더구나 이제는 팔도 없지. 이렇게 장애가 둘로 늘었지. 그래도 네 놈은 살고 싶은지?”

 어떤 심경이냐? 라는 것이었다. 히데츠구도 쿠마가이의 어깨너머로 목을 쭉 내밀고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장님이 뭐라 하는지를 기다렸다.

 “살고 싶지 않아!”

 라고 소리치는 것이 장님의 회답이었다.

 “이 이상 이런 몸으로 살고 싶지 않아. 그냥 죽여라! 이 목을 베란 말이다! 봐라!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낌새는 동네사람들이 문 틈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여 내 목을 베라! 네 놈의 사악한 이름을 후세에 남겨라! 인과응보를 기다려라!”

 라고 외쳤다. 이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에 히데츠구는 자아(自我)를 잃고 흥분하여 칼을 휘둘렀지만 장님의 팔을 자를 때 칼날에 사람 기름기가 들러붙었는지 베어지질 않아 어깨뼈가 부서지는 소리만 들렸다. 이 때문에 장님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굴렀다. 그러자 더욱 더 히데츠구의 손이 폭주하였다.
 칼로 얼굴을 치고 다리를 베고 배를 찌르자, 이빨이 날라가고 손이 잘리고 손가락이 떨어져 더 이상 사람의 형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잘리고 나서야, 겨우 이 장님의 숨을 끊을 수 있었다.
 길거리로 나와 사람 죽이는 것에 재미가 들린 이래, 이렇게 손이 간 작업은 없었다.

 “..이런...놈일...수록.. 재..재미...가 없군”

 히데츠구는 헉헉대며 말했지만 피로로 다리가 풀려 호종하던 사람이 뒤에서 지탱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그날 밤. 술자리에서,

 “귀족들에게~~”

 술을 들이키며,

 “이 정도로 용기가 있을 턱이 없지”

 라고 옆에서 술을 따르던 부인에게 말했다.
 이 부인은 키쿠테이 다이나곤 하루스에(菊亭 大納言 晴季)의 딸로 '이치노다이(一ノ台)'라 불리고 있었다. 정실(正室)이었던 이케다(池田)씨(氏)가 죽었기 때문에 히데츠구는 하루스에에게 강탈하다시피 이 부인을 뺏어와 근래에 이를 정실로 삼았다.
 이치노다이의 나이는 히데츠구보다 열살 정도 많았지만 그 미모는 쿄우토(京都)에서 으뜸이었다. 한번 다른 곳에 시집을 갔었고 죽은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아직 11살의 꼬꼬마에 지나지 않았지만,히데츠구는 이 딸까지 데리고 와서는 ‘오미야노카타(お宮ノ方)’라 부르며 첩으로 삼아 모녀와 함께 3P를 하였다.
 사람들은,

“모녀병간(母女倂姦)이라니 인륜(人倫)이 아니다. 축생도(畜生道)다.”

 라 소근거렸으며, 아비인 하루스에도 이 모녀병간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의 어긋남에 울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히데츠구가 자신의 무용을 이 이치노다이에게 자랑한 것은 그녀가 귀족(公家)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귀족 놈들은 문(文)을 비틀고 옛 일을 흥얼거리며 예식(禮式)에는 밝을 지 몰라도, 이 정도의 무(武)를 가지고 있을 턱이 없지. 모두 칼이나 피를 보면 벌벌 떨 놈들뿐이다”

 라 말했다. 이치노다이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뭐라고 말을 해봐라!”

 하고 히데츠구는 항상 이 입을 열지 않는 모녀에게 말을 하게하고자 했지만, 그녀들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와서 산지 일년이 지나가는 지금도 여태까지 히데츠구 앞에서는 목소리라는 것을 낸 적이 없었다.

 참고로 히데츠구 처첩의 수는 양아버지 히데요시가 제한했던 수를 훨씬 상회하였고 이 즈음에는 30명이 넘어 히데츠구라고 해도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혀가며 세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나사가 빠졌나 보군’
 하고 히데츠구에게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게 권고했던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도 이 벼락치기 칸파쿠가 불과 1~2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변한 것을 보고 후회보다는 오히려 공포를 느꼈다. 히타치노스케보다 히데요시 쪽이 훨씬 마고시치로우를 알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그렇게 쪼잔히 나사를 쉴 세 없이 조여야만 그제서야 이 인물은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었다. 이 나사가 풀릴 대로 풀려 자기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된 남자는, 예를 들면 이런 일도 하였다.
 마루모 후신사이(丸毛 不心斎)라는 늙은 신하의 부인을 보고서는, 노파는 어떤 몸을 하고 있을까라는 흥미를 가져 억지로 데리고 와서는 첩으로 삼았다. ‘아즈마(東)’라고 부르며, 나이는 61살이었다.
 50대는 없었지만 43세의 여자는 있었다. 또한 오카모토 히코사부로우(岡本 彦三郎)라는 가신(家臣)에게 모친이 있어, 히데츠구는 어느 날 모친이라는 것 즉 그런 종류의 여자가 필요하다며 이도 첩으로 삼았다. ‘카우(かう)’라 불렀으며 38살이다.
 여성들을 나이별로 나누면 10대가 11명, 30대가 4명, 40대가 1명, 60대가 1명으로 나머지는 20대였다.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의 딸 ‘오이마(お伊万)’와 같은 다이묘우(大名)의 딸도 있었으며, 거지 출신의 오타케(お竹)라는 이도 있었다. 이런 여성들이 불과 1~2년 사이에 모아져 쥬라쿠테이(聚楽第)라는 새장 속에서 사육되었다.[각주:3]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에서 펼쳐지는 히데츠구의 망나니짓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가신들은 나중을 생각하여 몸 사리며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몰랐다. 단지 걱정하는 것이라고은 자기 피를 이은 히데요리의 미래뿐이었다. 히데요시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국 생각을 정하여 히데츠구를 후시미(伏見)로 불렀다.

 “그 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일본을 다섯 개로 나누고자 한다”

 라고 히데요시는 제안했다.

 “이렇게 하자. 그 쪽에게 그 중 네 개까지는 주마. 나머지 하나를 히데요리에게 주면 어떻겠나?

 고 말했다. 말하면서 히데츠구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이미 후계 상속을 한 뒤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말하기도 뭐한 것도 있어, 그것을 이래저래 염려하며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제안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츠구의 표정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히데츠구는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그 둔하고 무신경한, 어느 쪽인가 하면 뻔뻔하다고 할 수 있는 상판때기를 보고 있자니
자기 혼자만 기를 쓰고 있는 듯한 모습에 오히려 우스웠고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라기보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의 동정에 기대고자 하는 자신을 보았다. 히데요시의 심정은 이젠 애원에 가까웠다.
 늙어서 아이를 얻은 이 노인이 불쌍하지도 않냐? 나는 이렇게까지 고뇌하고 있다. 그 기분을 읽어다오~ 읽었다면 칸파쿠를
사직(辭職)하고, 양자(養子)와 후계자를 관두겠다는 말을 해다오~ 라고 히데요시는 은근슬쩍 기대했다.
 하지만 히데츠구의 감수성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대답은 했다.

 “아버님이 편하신대로”

 라고 말하였지만 그 상판때기에는 표정이 없었고 입술 끝엔 토라진 기색까지 담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보았다. 아니 오히려 억지로라도 그렇게 보고 싶은 심경에 히데요시는 몰리고 있었다.
 ‘천하는 누구의 천하더냐!’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기분을 억지로 참았다. 그 분노를, 히데요시는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훈계로 바꾸었다. 하지만 훈계를 듣는 표정과 태도조차 히데츠구는 어딘가 이전의 마고시치로우같지는 않았다. 마고시치로우였을 때에는 아직 작은 새와 같이 두려움에 떠는 부분이라도 있어 그런 면에서 간신히 귀여운 맛이 있었던 듯했다.
 ‘이 녀석 변했군’
 히데요시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래도 참고 또 참았다. 자신이 죽은 뒤 히데요리를 보호해 줄 인물은 이 히데츠구밖에 없었고 그런 점에서 말한다면 이제는 히데요시 쪽이야말로 애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후, 히데요시는 이 일에 대해서 또 생각하여 하나의 꾀를 생각해내었다.
 히데츠구에게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여자아이를 장래에 히데요리의 부인으로 하는 것이었다.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기의 배후자를 지금 정한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히데요시는 거기에 매달렸다. 그런 끈이라도 이어 놓으면 히데츠구는 장래 히데요리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급사(急使)를 보내려 하였다.

 “음…… 그게 좀…… 서두르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측근은 말했다. 무엇보다 먼 장래의 일이다. 측근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러나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빨리 그리해두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하필이면 이 즈음 히데츠구는 이즈(伊豆)의 아타미(熱海)에 온천 치료를 하러 동쪽으로 가 있어 쿄우토(京都)에는 없었다. 히데츠구에게는 두통이 있었다. 온천에서 그걸 치료하고자 하는 여행이었다.
 아타미에서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급사를 맞이하였다. 무슨 일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편지를 펼치자 기껏해야 그 정도의 일이었다.

 “알겠다고 말씀 드려라”

 히데츠구는 사자(使者)에게 그렇게 답했다. 사자가 후시미(伏見)로 돌아와 히데요시에게 보고했다.

 “칸파쿠는 그렇게만 말했을 뿐인가?”

 히데요시는 자신의 불안과 의욕에 비해 상대가 너무도 냉정한 것에 불만과 불쾌감까지 느꼈다. 사직한다 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예를 들면 히데요리가 성인이 된 후에는 천하를 물려주겠다 라고 말만이라도 이 노인을 안심시키고 기쁘게 해 줄듯한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저건 인간이 아니다’
 인정도 없고 달래려는 마음 조차도 없다.
 ‘
축생이다’
 고 생각했다. 그 때 키쿠테이 다이나곤이 후시미(伏見)에 와서는 히데츠구의 모녀병간의 사실을 눈물 섞어 호소하였다.
 ‘설마 그 마고시치로우 녀석이?’
 그렇게까지 막되먹은 일을 할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히데츠구의 사생활을 조사시켰다. 조사를 담당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였다.

 역시 마고시치로우는 사람이 변해 있었다.
 칸파쿠 전하의 놀랄만한 행태가 이때 하나도 빠짐없이 한꺼번에 히데요시의 귓속으로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 히데요시나 되는 인물이 얼마 동안 감정의 정리가 되지 않아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겨우 한 말이,

 “저건 사람이 아니다”

 였다.

 “축생이다”

 고 말했다. 이 때부터 저 단어를 사용하여 히데츠구를 그렇게 정의(定義)했다. 그렇게 정의하는 것 말고는 토요토미 정권을 구할 길이 없었다. 이미 히데츠구의 악행으로 인해 쿄우토(京都)의 지도층이나 서민들이 가진 토요토미 정권의 인기는 갈기갈기 찢겨졌다. 사람들은 히데츠구를 미워하기보다 그 배후에 있는 토요토미 가문을 원망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기에 토요토미 가문과는 별개의 존재이다는 것 말고는 그 원망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축생이다. 그 증거는 모녀병간이다고 - 히데요시는 그 이론을 명쾌히 이시다와 나츠카에게 고했다.

 이윽고 온천 치료의 여행에서 돌아온 히데츠구는 그 사태를 알게 되었다. 쿄우토(京都)에 머물러 있던 측근들이 그에게 알려주었다.

 “알 수 없군”

 그가 알고 있던 것은 자신의 딸을 먼 장래에 히데요리와 결혼시킨다는 기껏해야 그 하나뿐이었다. 그것이 어째서 이렇게 발전한 것인가? 측근들은 아무래도 모녀병간 하나만은 말하기 그래서,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부노쇼우(冶部少=미츠나리(三成))들이, 참언(讒言)한 것이겠지요”

 라고 키무라 히타치노스케는 그렇게 말했다. 히타치노스케는 미츠나리 참언설을 믿고 있었다. 만약 타이코우(太閤)가 죽어 히데츠구의 시대가 되면, 타이코우 소속의 미츠나리들은 권세를 잃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그들의 정적(政敵)이었던 자신이 권세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여 빨리 히데츠구를 실각시켜 갓난아기인 히데요리의 후계권을 확립시켜 놓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리 된 것은 미츠나리 등 타이코우 측근들의 음모다라고 히타치노스케는 말했다.

 히데츠구가 후시미(伏見) 방면의 소문을 살피게 하고 보니 사태는 예상외로 심각했다. 죽음을 언도 받을 지도 모른다고 한다.

 “살해당하는 것인가”

 이른 밤,

 “그리 되겠지요”

 라는 예측을 힘주어 말한 것이 쿠마가이 다이젠노스케(나오유키 – 直之)였다. 그는 히데요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사태를 예견하여 넌지시 그리고 자주 경계해야 한다고 히데츠구에게 말했던 것이다.

 “오히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보다 반대로 후시미를 습격하여 타이코우를 죽이고 일거에 정권을 안정시켜야만 하지요. 그에 대한 방법은 이렇습지요”

 라고 말하며 쿠마가이는 그 방법을 설명했다.

 “우선 후시미성(城)은 전쟁 준비가 덜 되어 있습지요. 습격하면 타이코우는 오오사카(大坂)로 도망치겠지요. 그것을 가정하여 요도(淀)와 히라카타(枚方)에 철포대(鉄砲隊) 천 명을 숨겨 놓는 것이지요. 나머지는 오오츠(大津) 등의 주변 도시와 다이부츠(大仏) 가도(街道), 타케다(竹田) 가도 등 후시미(伏見)와 연결된 도로에 병사들을 숨겨 놓으면,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습지요.”

 라는 것이었다. 히데츠구는 놀라 귀를 막으며,

 “...다이젠, 더 이상 말하지마! 모반은 무섭다구...”

 라고 핏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이 날부터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습격을 대비하여 외출할 때는 반드시 따르는 자들에게 갑주를 입게 하였다. 이것이 후시미로 곧바로 알려졌다.
 당연히 칸파쿠는 항상 후시미를 노리고 있다고 해석되었다.
 히데츠구는 자신이 조심한다는 것이 그렇게 해석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쿠마가이 나오자네(熊谷 直実)


  1. 일본어로 살생(殺生)와 섭정(摂政)은 발음이 셋쇼우(せっしょう)로 같다. 예전엔 섭정에 이어 관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섭정관백(摂政関白)라고도 하였다. 저 말은 섭정과 살생의 발음을 같은 것으로 한 언어유희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대대로 섬겨온 가문. [본문으로]
  3. 이해를 돕기 위한 사족을 두자면 히데츠구 죽을 때의 나이 2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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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헤이케 이야기 번역본 읽어보니,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잡병들이 몰려오기에 하는 수 없이 자기 손으로 죽였다고..'

    ...나, 나름대로 애정인가(!)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쿠마가이 나오자네는 징기스칸4에도 나오더군요.. 관동 제일의 무법자..라는 별명이 있었다던데..(헤이케 이야기에도 그런 말이 있었던가..)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9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이런 고귀한 무장을 잡병 따위에게 목숨을 잃게 할 수가 없다는 식의??

    헤에~ 징기스칸4라는 게임은 그런 게임입니까? 예전에 잠깐 해 보았지만, 그 놈의 도시 공략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아서... 무엇보다 맵이 너무 큽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9 19: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징기스칸 4 도시 공략이야.. 화포병만 끌면 뭐..;;

    맵은.. 가도 안 깔면 기병 안 쓰는 이상 답답해서 못하죠..; 두번쯤 엔딩보다 접은 기억이;;

  5.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8 07: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생관백이라더니 어느 정돈지 잘 몰랐는데 미쳐도 단단히 미쳤었군요 죽어도 싸네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

1611 1 21일 병사(病死) 79.

1533 ~ 1611.

시마즈 씨[島津氏] 16대 당주(). 오오토모 씨[大友氏], 류우조우지 씨[造寺氏]를 격파하여 영토를 확대하지만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고, 가독(家督)을 동생인 요시히로[義弘]에게 물려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후에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카이에키[改易][각주:1]의 위기에 빠지자,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와 교섭하여 영지(領地)안도(安堵)받았다.

 

 



히데요시가 내린 은거 명령

 

 1595 6.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영지안도장(領地安堵)을 발급하였다.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점하고 있던 영지에 행해지던 태합 검지[각주:2]가 종료되어 산출된 57 8천 여석의 영유(領有)를 승인한 것인데, 그 영지안도장에 쓰여진 이름은 시마즈 가문당주 요시히사가 아닌 동생 요시히로[義弘]로 되어있었다. 이것은 토요토미 정권에 비협조적인 요시히사에게서 시마즈 가문의 가독을 몰수하고, 친 토요토미 적인 요시히로를 시마즈 가문 당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동시에 요시히사는 시마즈 가문이 대대로 거성(居城)을 삼고 있던 사츠마[薩摩]카고시마[鹿児島]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아, 오오스미[大] 토미쿠마[富隈]에 있는 토미쿠마 성[富隈城]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가 끝난 후인 1604년에는 오오스미[] 코쿠부[国分]에 마이즈루 성[舞鶴城]을 신축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단지 요시히로의 가독 계승은 토요토미 정권이 요시히사나 시마즈 가신단의 의향을 무시하고 멋대로 결정한 것이었기에 실권은 여전히 요시히사가 계속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실권을 누구에게 물려주는가에 대해서 강제로 은거를 당했던 요시히사를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든 것이다.

 

세 딸과 두 명의 후계자 후보.

 

 요시히사에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모두 여자였다.

 

 첫째 딸인 오히라[御平] 1551년생으로, 삿슈우 가문[薩州家][각주:3]의 시마즈 요시토라[島津 義虎]에게 시집갔다.

 요시토라의 부친 사네히사[久]와 요시히사의 부친 타카히사[貴久][각주:4] 예전에 종가(宗家)의 가독을 쟁취하려고 계속 다투어 왔던 사이였기에 요시토라도 겉으로는 요시히사에게 복종하고는 있었지만 그 본심은 알 수 없었다.

 1585년. 요시토라가 병으로 죽어 오히라가 낳은 타다토키[忠辰]가 그 뒤를 이었지만, 그 타다토키도 진심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었기에 틈만 나면 본가를 탈취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1592년. 조선 출병 시[각주:5]에 요시히사의 휘하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멋대로 행동하다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다음 해인 1593년 카이에키 당하여 처지를 한탄하다 병으로 죽었다.

 또한 오히라는 타다토키 외에 타다키요[清], 타다히데[栄] 등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삿슈우 가문 카이에키 후 히고[肥後] 반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코니시 가문[小西家]로 보내져 유폐되어 있었기에 요시히사의 후계자로 삼기 힘들었다.

 

 둘째 딸(이름 불명)[각주:6] 1563년생으로, 타루미즈 가문[垂水家] 시마즈 테루히사(島津 彰久)의 부인이 되었다.

 타루미즈 가문은 타카히사의 동생 타다마사[忠昌]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테루히사는 3대째 가주(家主)였다. 테루히사는 1594 7월 조선에서 병으로 죽었지만, 1585년 그와의 사이에서 둘째 딸이 타다나오[忠仍]를 낳았었다.

 

 또한 셋째 딸 카메쥬[亀寿] 1572년생으로, 처음엔 요시히로의 세자(世子)인 히사야스[久保]에게 시집갔지만, 1593년 조선에서 히사야스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동생인 타다츠네[忠恒]와 재혼했다.

 

 이 때문에 둘째가 낳은 외손자 타다나오와 셋째 카메쥬의 남편이며 사위 겸 조카인 타다츠네. - 이 둘이 요시히사의 후계자 후보가 된 것이다.

 

제비뽑기로 정해진 후계자

 

 요시히사가 은거했던 1595년. - 타다나오는 11, 타다츠네는 20살이었다.

 요시히사는 자신의 피가 흐르는 외손자 타다나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었던 듯하지만 너무 어렸다.

 

 타다나오의 혈통을 이어받은 신죠우 시마즈 가문[新城 島津家]의 족보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요시히사는 사위인 타다츠네로 할지 외손자인 타다나오로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결심하지 못하였고, 쇼우하치만 궁[正八幡宮] 현 카고시마 신궁(鹿 神宮)에서 후계자를 정할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 결과. 타다츠네를 후계자로 하는 제비가 뽑아져 요시하시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고 한다.[각주:7][각주:8][각주:9]

 이 제비뽑기의 이야기는 '신죠우 시마즈 가문 족보[新城島津家家譜]' 이외의 사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필시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시히사는 타다츠네와 카메쥬 사이에서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타다츠네는 이 외손자가 가독을 이어받을 때까지의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요시히사의 기대와는 반대로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생기질 않았다. 카메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아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지자, 요시히사의 머리 속에서는 타다나오를……’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짙어져만 갔다.

 이리해서 가독 계승문제가 다시 문제가 되어 요시히사와 요시히로-타다츠네 부자(父子)간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가신들도 타다츠네 파()와 타다나오 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그러던 중 요시히사는 병이 나 1611 1 21.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

 요시히사의 사망으로 인해 가독 계승문제는 잠잠해져, 타다나오를 지지했던 가신 일부가 숙청되는 것을 끝으로 가문 분열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마즈 가의 가독은 타다츠네에서 타다츠네의 측실(側室)이 낳은 미츠히사[光久]에게로 이어졌다. 이 측실의 부친은 코니시 가문으로 유배를 갔던 삿슈우 가문의 시마즈 타다키요 - 즉 요시히사의 첫째 딸인 오히라의 아들이었다.

 종가(宗家) 적류(嫡流)에 자신의 피를 남기고 싶어했던 요시히사의 꿈은 외손의 혈통이 이어가는 것으로 현실이 되었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2. 타이코우 켄치(太閤 検地)라 읽음. 태합[太閤] 히데요시가 통일된 규격으로 논밭(영지안의 산과 숲은 제외)의 생산량을 계산하여 세금, 부역을 산출 혹은 할당하게 한 것. [본문으로]
  3. 삿슈우는 사츠마[薩摩]의 별칭. 시마즈 가문의 분가(分家), 당주가 대대로 사츠마노카미[薩摩守]를 자칭했었던 것이 이름의 유래. [본문으로]
  4. 사츠마의 이사쿠[伊作] 지역를 영유(領有)하고 있던 시마즈의 분가 이사쿠 가[伊作家] 출신. [본문으로]
  5.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6. 타마히메[玉姫]라는 설이 있음. [본문으로]
  7. 일본은 예전부터 중요한 일을 정하는 제비뽑기를 신의 뜻이라 여겼기에로 정했기에 아주 어처구니 없는 일은 아니었다. [본문으로]
  8.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의 6대 쇼우군[将軍]인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 義教]는 3대 쇼우군 요시미츠[義満]의 셋째 아들로, 별칭이 [제비뽑기 쇼우군]라 한다. 형인 4대 쇼우군 요시모치[義持]의 아들인 5대 쇼우군 요시카즈[義量]가 아버지 보다 먼저인 19살의 나이에 죽고, 3년 뒤에 요시모치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죽었다. 그 때문에 당시의 칸레이[管領 – 무로마치 바쿠후의 수상 격] 하타케야마 미츠이에[畠山 満家]는 3대 요시미츠의 아들들 사이에 누구를 쇼우군[将軍]으로 할지 이와시미즈하치만 궁[石清水八幡宮]에서 제비뽑기를 한 결과, 당시 중이었던 기엔[義円]을 환속시켜 쇼우군[将軍]으로 추대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9.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각종 선거에서 동수의 표를 얻었을 경우에는 제비뽑기로 당선자를 정한다. 2007년 11월 27일만 하더라도 오키나와[沖縄]의 나고 시[名護市]의 시장은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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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30 2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국을 지배할만한 장군이라고 이에야스가 평했던가요.. 혁신에서는 저평가된 감이 좀 있지만 명군은 명군이었떤듯..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7.12.01 0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문단의 “즉 이에히사의 첫째 딸인 오히라…”에서 이에히사는 요시히사의 오기인 듯 하네요. 오히라가 요시히사의 아들이니.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1 07: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이에야스의 말은...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니 뭐..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같은 일이고..(결과를 껴맞추는...죄송합니다... 이에야스를 높게 평가하지 않다보니, 그 이름만으로도 삐뚫하게 생각되어지네요).
    혁신에선 낮은 편인가요? 졸자같은 경운 보통 제일 마지막에 정벌하는 가문이다 보니, 시마즈 쪽 무장들의 능력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혁신은 제가 생각하기엔 시리즈 중 능력치 인풀레이션이 가장 높은 것 같던데...(제일 짜?B건은 열풍전...)

    신사본론님//언제나 고맙습니다. 얼릉 고쳤습니다. ^^;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1 1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자랑/도쿠가와-오다쪽 무장들 뻥튀기가 심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하향화된 느낌이 크더군요.. 요시히사 S급 능력치는 내정 1개.. 요시히로도 철포 1개..

    뭐 시마즈 4형제는 전원 철포 전용 특기 스테가마리가 있긴 하지만..-전용 특기 없는 무장이 넘쳐나는 혁신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메리트라면 메리트려나..-

    의외로 최고치가 120인걸 생각하면 그다지 높게 평가된 무장은 없어보이는듯.. 도쿠가와 이에야스만 해도 100넘는 능력치가 없으니까..(;;그런점에서 무적 겐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01 1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글쿤요. 최고치가 120이라는 것을 생각을 못 했네요. 혁신은 능력치 100넘기는 것을 쉽게 할 수 있다보니...(켄신 어르신이야 뭐...--; 전 오리지날에서 항구에 주둔군 3만 + 10만 가까운 인원과 철포탑 4갠가 있었는데도, 켄신 어르신 혼자서 이끄시는 2만의 병력과 군신+차현에 10만이 날라가고, 주둔군 3만은 나오지도 못하다가 항구 점령 당하니까, 비사문천의 깃발 아래 대동단결 하더군요... 호쿠리쿠의 둑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2.02 15: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뜩이나 통솔도 높은데다가.. 관동관령직 붙어있으니 기본이 27500이더군요..(-_-ㅎㄷㄷ..) 그나마 PK에서 차현 위력이 거의 반이나 줄었는데도 우에스기가로 하니 켄신 하나면 못 먹는 성이 없더랩던..(-_-..)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25 19: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가토 기요마사[加藤 ]
1611년 6월 24일 병사(病死) 50세.

1562년 ~ 1611년.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七本槍)[각주:1]중 한 명. 히데요시[秀吉]가 큐우슈우[九州]를 제압하자 히데요시에게서 히고[肥後]의 반(半)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였고, 히고 일국(一国)를 영유하며 쿠마모토 성[熊本城]을 축성하였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회견을 성사시켰지만 곧바로 병이 나서 죽었다.



갈등으로 고심한 말년

 카토우 키요마사가 일부 지역을 뺀 히고[肥後]와 붕고[豊後]의 3개 군(郡)[각주:2]을 합하여 54만석을 소유하게 된 것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인 1600년 11월.

 키요마사의 "말년"은 용맹을 바탕 삼아 혁혁한 공을 세워 온 센고쿠[戦国] 무장에서 위정자(爲政者)로 변신한 이 해의 38살부터 한창 일할 나이인 50세로 죽었을 때까지인 12년간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쿠마모토에서는 키요마사를 [세이쇼우 코우(清正公 = 키요마사 공)]을 줄여 [세이쇼코 상(セイショコ さん = 키요마사 씨)]이라 부르며 키요마사의 은덕(恩徳)을 우러르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 12년 동안 키요마사가 정력적으로 기반을 닦고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이 후에 쿠마모토 발전의 기초가 되었고 지금도 그 노력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명성(名城)인 쿠마모토 성(城)의 축성, 가도(街道)의 정비, 관개(灌漑)의 확충, 간척(干拓) 등에 의한 경작지(耕作地)의 조성, 제사(製絲) 등의 산업 진흥 등이 그 후의 히고 쿠마모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히고 카토우 가문[加藤家]은 그 다음 대인 타다히로[忠広]의 삭탈관직[改易[각주:3]]과 함께 끊어지지만, 카토우 가문 다음으로 이봉(移封)되어 온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이 카토우 가문의 유적, 풍습을 존중한 것도 키요마사에 대한 히고 사람들의 감사와 존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군(名君) 카토우 키요마사의 말년은 정말 충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内面)에서는 토요토미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쿠가와 정권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 갈등으로 고심했다고 여겨진다.

토요토미 안태(安泰)를 꾀하다

 키요마사에게는 세 명의 측실(側室)이 있었다고 한다.
 2남 1녀를 낳은 ‘혼가쿠인[本覚院 = 통칭 카와지리도노[川尻殿]]’, ‘죠우코우인[浄光院 = 통칭 키쿠치도노[菊池殿]]’, 후에 뒤를 잇는 셋째 아들 타다히로와 둘째 딸 아마[あま]의 1남1녀를 낳은 ‘쇼우오우인[正応院]’이다.

 키요마사가 죽은 뒤, 불과 12살며 셋째 아들 타다히로가 뒤를 이은 것은 이미 장남 토라노스케[虎之助]가 2살, 둘째인 타다마사[忠正]가 8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정실(正室)[각주:4]법호(法號)를 ‘쇼우죠우인[清浄院]’이라 하는데, 이에야스의 외숙부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이다. 이에야스는 모친 오다이[於大 = 덴즈우인[伝通院]]의 동생인 이 타다시게의 딸을 양녀로 삼아서 키요마사에게 시집보냈다[각주:5].

 그리고 키요마사의 장녀인 코야[古屋 – 혼가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를 토쿠가와 사천왕[徳川 四天王][각주:6]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아들 야스카츠[康勝]와 결혼시켰고, 둘째 딸 아마를 후에 어삼가(御三家[각주:7])인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紀州家]를 세운 이에야스의 10째 아들 요리노부[徳川 頼宣]와 결혼시켰다.

 토쿠가와 가문과 키요마사가 이런 인척(姻戚)관계로 이어진 것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한 책략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다. 토요토미 은고 다이묘우(大名)를 회유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키요마사가 비록 서국(西国) 큐우슈우[九州]에 있더라도, 키요마사라는 인물은 적으로 돌리면 또 이 정도로 성가신 무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키요마사는 밖에서 보면 토쿠가와와 친하며, 토요토미와는 거리가 생긴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우직한 인물은 고(故) 히데요시의 두터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은혜를 갚는 길은 겉으론 토쿠가와에게 복종하면서, 히데요리를 당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안태를 꾀하는 것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강요하는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등과 함께 요도도노[淀殿 – 히데요리의 생모]를 설득하여 실현시킨 것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귀국 도중에 병이 나다

쿠마모토 시[熊本城]에 있는 키요마사 동상.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회견은 1611년 3월 27일 무사히 끝났다.
 니죠우 성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온 키요마사가 침실에서 몸 안에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고 잠시 이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慶元記[각주:8]].

 회견장에서 만약의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그 단도로 히데요리를 지킬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되지 않았다는 안심에서 흐른 눈물일 것이다.

 히데요리를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경호하며 돌려보내는 도중에 후시미[伏見]에 들렸다. 그곳에 있는 자기 저택 앞을 흐르는 강에 배를 띄우고 그 배에서 잔치를 연 키요마사는 그제서야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린 듯한 생각이 들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같은 해 5월 하순.
 귀국하던 배에서 갑자기 병이 나 병든 몸을 질질 끌듯이 하며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혀가 꼬이는 증상의 병이었는데 확실한 병명(病名)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병은 나날이 악화되어 6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가(家)가 멸망하기 4년 전이었다.

  1.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이에키[改易]라 읽는다.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키요마사의 정실은 야마자키 카타이에[山崎 片家]의 딸로, 키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건너가 있던 중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쇼우죠우인[清浄院]은 후실(後室). [본문으로]
  5. 그녀의 나이 18세. 키요마사와는 20살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6.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토쿠가와가(家)를 지탱한 네 명의 공신을 지칭. [본문으로]
  7. 오와리[尾張], 키슈우[紀州], 미토[水戸]에 이에야스의 각각 9째, 10째, 11째 아들들이 임명된 가문으로, 후에 쇼우군 본가가 끊길 경우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특징 겸 우대로써 토쿠가와[徳川]라는 성(姓)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에도 바쿠후에서는 다방면에 걸쳐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본문으로]
  8.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증손자 호우죠우 우지나가(北条 氏長)가 쓴 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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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19 2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아저씨도 암살인지 독살인지 하는 설이 있더군요..ㅎㄷㄷ

    소녀닌자 이즈미던가..라는 막장 망가에서는 이 아저씨를 비롯 세키가하라 이후에 죽은 다이묘는 all암살이라는 황당한 설정의 망가도 있었지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9 2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사카 공략전을 앞두고 무용이 뛰어나고, 오오사카 바로 아래인 키이(紀伊)를 영유하고 있던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호쿠리쿠(北陸)의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 히메지(姫路)의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등... 각각의 위치에서 바쿠후의 군을 견제할 수 있고, 또한 토요토미家와 굉장히 친했던 가문의 당주들이 비슷한 병 혹은 급사라는 형식으로 동일한 시기에 죽었던 것이 그런 설로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반대로... 그런 이들이 동일한 시기에 죽어서 이에야스에게는 오오사카 공략을 결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겠지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9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즈미... 만화는 본 적이 없고, 영화 아즈미 2탄만 쪼금 보다가 다 못 보았습니다만... 만화 재미있나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1.20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그 황당한 만화의 리뷰만 본거라서.. 따로 말은 못 드리겠지만 리뷰만 봐도 참 막장..(-_-;;)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7.11.20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만화는 재미 면에서는 아주 충실합니다. 만화라는걸 염두에 두고 보면 아주 재미있죠.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21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옷~ 볼리바르님~ 반갑습니다. 그렇군요. 재미는 있나보군요. 왠만하면 전국물은 다 읽는데(사무라이 디퍼 쿄우~도 읽었는데..) 소년 검객이라는 말에... 연약한 여자애가 썩둑썩둑 사람 자른다는데 왠지 말이 안된다는 생각에 읽지 않았는데, 함 봐야 겠네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korea40003 BlogIcon korea40003 2007.12.14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토기요마사아닌가?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2.14 2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립 국어원의 일본어 표기법
    http://www.korean.go.kr/06_new/rule/rule05_01_04.jsp
    에 따르면 korea40003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만....전 예전에 그 표기법 때문에 아직도 발음에 무리를 겪고 있어서,
    일부러 글자 발음대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점 양해를...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04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니시와 더불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무장이 아닐까 생각..(모 게임사의 게임의 영향으로 인해 -0-)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4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진년 1진과 2진일테니까요. 함경도 담당이라 저 북쪽까지 갔으니 아무래도 그만큼 유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에...어떤 게임이요? 코니시까지 나올 정도면 코에이 신장이나 태합 시리즈 같은데...)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5.04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내 게임사의 임진록 시리즈와 거상시리즈죠.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5.05 1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름만 들어보고 해 본적이 없어서...^^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ttl00013 BlogIcon 라빈스텐 2008.08.31 0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진왜란때 조선 사람들 중에서 제일 무섭운 사람중 넘버원이 가토 기요마사임...
    쾌지나 칭칭나네 이말도 조선사람이 기요마사를 너무 무서워서 해서 아직도 전해지는 노랫말이죠,
    예전 조선 사당이나 무당에 기요마사의 그림을 붙여서 귀신을 쫓을정도로 기요마사는 조선에서 원수인 놈과 동시에 가장 무서운 인물입니다.
    조선의 호랑이를 좋아해서 조선 호랑이를 씨를 말릴정도로 잡아 가서 히데요시에게 호랑이 가죽 선물도 주고~설에는 호랑이를 맨손으로 ??쳐 잡앗다고 하지만 그건 쫌 구라가 섞인듯 합니다.
    기요마사설에는 영웅은 색을 좋아한다는 말처럼 너무 여자를 밝힌 탓인지 셩병인 매독으로 죽엇다는 설이있습니다.
    아즈미 같은 쓰레기 SF 잡 영화에서 독살로 죽은게 아닙니다.~~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쾌지나 칭칭나네...라는 말은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확정을 지어서까지 말씀하실 만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한 인물이 몇 년간 몇 마리 잡았다고 씨가 마를 정도면 이미 그 전에 멸종에 가까운 상태여야 하지 않을까요?

    창으로 잡았다는 설이 있지만, 맨주먹은 처음 듣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만화에서는 아즈미가 칼로 죽이던데 영화에서는 독살로 나오나요?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6 0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쾌지나칭칭나네라는..말은...카토기요사마녀석댐에..생긴말..맞고요..제가..이글..모두..댓글읽어본결과..발해지랑님은..자신이..일본역사인물올리면서..일본역사인물들을..비하하시더군요..아주..니만의생각으로..반박하시던대...증거자료를보여줘도..말을4가지없게..마무리하고..아주..보기안좋내요...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6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ko.wikipedia.org/wiki/%EC%BE%8C%EC%A7%80%EB%82%98_%EC%B9%AD%EC%B9%AD%EB%82%98%EB%84%A4
    위키의 '쾌지나 칭칭나네'의 항목입니다. 키요마사의 이야기는 하나의 설일 뿐입니다.

    증거자료 보여 주셨습니까? 우선 해당 링크라도 걸어 주시던지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기분나쁘셨다면 미안합니다만 우선 제 말에 반론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거나 링크를 걸어 주셔야지, 4가지 없게 한다는 말씀만 하시니.... 그래서는 서로 아무런 발전이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끝내면 서로 기분만 나뻐지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가 뭐가 있나요?

  17. 참~ 2011.01.26 14: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지랑님이 참으세요 아골이 여까지출몰하네요

  18. 아이즈 2012.07.13 17: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같은맥락으로
    그래도 나름 도요토미가 충신이엇기때문에
    도쿠가와한테 부담된것도 잇겟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7.20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굉장히 늦은 점 사과드립니다.

      뭐...토요토미 가문과 이러저러 연이 깊던 가문들의 주인들이 비슷한 시기에 죽어나갔다는 정황증거는 있습니다만... 아직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쓰라 시게노부[松浦 信]

1614 5 26일 병사(病死) 66

 

1549 ~ 1614.

부친 타카노부[隆信]와 함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큐우슈우[九州] 정벌군을 따랐으며, 조선의 역[朝鮮役][각주:1]에서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수군 부대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영지(領地)히라도[戸]이키[岐] 등도 영유(領有)하며 초대 히라도[平戸藩] 번주(藩主)가 되었다.





 

 

 

적남(嫡男)의 갑작스런 죽음

 

 히젠[肥前] 히라도 번주 마츠라 시게노부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의 다음 해인 1601년에 53세에 은거하여, 적남(嫡男) 히사노부[久信]에게 히라도 번()을 잇게 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때 시게노부는 아들 히사노부를 쿄우토[京都] 후시미 성[伏見城]을 수비하도록 출진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현해탄에 배를 띄어놓고서는 거의 마지막까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각주:2], 전쟁이 끝난 뒤 토쿠가와 가문[家]에게서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3]

 

 그러나, 사태는 급변하여 1602년 가을 갑자기 후시미[伏見]의 마츠라 저택에서 번주 히사노부가 급사(急死)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시게노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 히사노부의 급사에 관하여 번의 기록인 『가세전(家世伝)』에는, '후시미(伏見)에서 치질에 걸려 8 29일 죽다. 향년 32'라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다른 가보(家譜)에는 '할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저하면서 어느 쪽에 붙을지 망설이던 부친 시게노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심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는 며느리이며 히사노부의 부인 쇼우토우인[松東院]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은 마츠라 씨[松浦氏]와 오오무라 씨[大村氏]가 서로 다투었던 시기에 양 가문의 화해를 하기 위해서 마츠라 가에 시집 온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의 딸로 이름은 소노였다.

 소노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며(세례명: 도나 메시아), 시집올 때 배교(背敎)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부인이 된 쇼우토우인은 첫째 아들을 비밀리에 세례 받게 하였고, 히사노부의 세례마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열심인 모습은 곧바로 선교사들간에 널리 알려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가라샤 타마코[ガラシャ 玉子][각주:4]와 함께 칭송받았다. 또한 시아버지인 시게노부의 계속된 개종 요구에도 신을 버리는 것 보다 천 번의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저항하며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프로이스의 일본사[フロイスの日本史]』

 

 이러한 사정이 번주 히사노부의 할복에 영향을 끼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히사노부가 죽은 다음 해인 1603년 손자인 타카노부[隆信]를 데리고 순푸[駿府]로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알현하고나서야 3대 번주로 인정을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성[居城] 카메오카 성[城] 불타오르다.

 

 3대 번주 타카노부의 뒤를 봐주면서 주로 남만무역(南蠻貿易)[각주:5]에 전념했다.

 이미 부친 타카노부[隆信][각주:6] 때부터 '하비에르'나 '루이스 프로이스'를 히라도에 초대하는 등 무역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609년에 네덜란드의 배가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

 1613년에는 영국 배도 입항하여 성 밑 마을[城下町]상관(商館)을 설치하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의 거점이 1641년에 나가사키[長崎][각주:7]로 이전되기 전까지 30여 년간 히라도에서 사키카타 쵸우[崎方町]부두(埠頭)를 만들고 상관이나 주택을 계속 세워가며 동양 무역의 일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즈음 히라도에는 남만인(南蠻人)[각주:8]들에 더해 수 많은 상인들이 모였기에 서국(西国)[각주:9]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되어 번영의 극을 달했다.

 

 그러나 1613 10 3일 밤.

 시게노부는 갑자기 자기 손으로 1599년에 새로 축성한 거성 카메오카 성[亀岡城][각주:10]에 불을 질러 무너뜨렸고, 다음 해인 5 26일에 의사 타케노 소우후우[武野 宗楓]의 간병을 받는 중 66세의 생애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가세전[家世伝]』

 

 이 사건은 자살한 아들 히사노부의 망령에 괴로워하다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건의 진상(眞相)은 무역 이익을 독점하던 것과 나아지지 않고 있던 기독교 금지령에 있지 않았을까?

 혹독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히라도 번[平戸藩]에는 이키츠키[生月] 등 영내(領內)의 섬들에 많은 신도들이 숨어있었고, 쇼우토우인과 그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에야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히라도 번 계속해서 압력을 받았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남만무역의 유지와 기독교 개종의 유예(猶豫)를 조건으로 거성을 불에 태워 없애고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하극상의 센고쿠 시대부터 근세 초기의 혼란기까지 살아 남은 마츠라 시게노부.

 기독교 덕분에 철포(), 오오츠츠[大筒][각주:11]나 막대한 무역 이익을 손에 넣어 히젠[肥前] 서부(西部)의 패권을 쥘 수 있었지만, 그 기독교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신, 히라도의 상징이었던 카메오카 성[亀岡城]까지 잃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이쿄우 사[最教寺]에 있는 시게노부의 묘 - 히라도 시[平戸市]


  1.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2. 마지막에 동군에 서게 됨. [본문으로]
  3. 가독 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선 용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가라샤는 세례명, 타마코는 이름. [본문으로]
  5.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말함. [본문으로]
  6. 시게노부의 손자와 부친의 이름이 똑같이 타카노부(隆信)이다. [본문으로]
  7. 에도 시대에는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에서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8. 유럽인들을 말함. [본문으로]
  9. 쿄우토[京都]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을 지칭. [본문으로]
  10. 보통 히라도 성[平戸城]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11. 대포를 말한다고 하지만, 구경이 큰 철포를 지칭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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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4 17: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깝네요;;
    소우린에 비하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드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4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임진난때 건너온 사람이니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6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수군이었으면 신나게 깨졌겠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6 2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군이라고 해도 코니시 휘하의 1군단으로 함께 행동했을 테니, 이순신 장군과 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평양까지 함께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수군이라고 해도, 대마도에서 부산까지 가는 동안, 병력 수송 선단을 호휘하는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설마 일본도 경상도 수군이 그렇게 자멸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0.16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역 안당했으니 쇼린보다는 나은걸려나요(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7 0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명(家名)을 남기는 것이 의무로 생각하던 시대의 사람이기에 소우린 보다는 훠~씬 성공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마츠라 가문의 핏줄은 현재의 일본 황실과 연결되어 있을 정도니까요.(9대 번주 마츠라 키요시(松浦 清)의 손녀가 코우메이 텐노우(孝明 天皇)와 결혼해서 메이지 텐노우(明治 天皇)를 낳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