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어쨌든 이야기를 되돌리자.

 삿사 나리마사가 히데요시에게 죽음을 언도 받은 것은 1588년 윤5월로, 이 때문에 히고[肥後]는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 이 나리마사의 후임으로 누가 임명 받을까 하는 것이 성중(城中)의 화제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織田家]의 일개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신분에서 갑자기 천하를 손에 넣었다. 때문에 에도 막부를 세우게 되는 토쿠가와 가문[家]과는 달리 그를 따랐던 부하들 중에 쿠니모치 다이묘우[ 大名][각주:1]가 될 정도의 기량이나 경력, 가문의 격()을 가진 자가 적었다. 그렇기에 이런 경우 싹수가 보이는 젊은 직속 가신 중에서 발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가 좋을까?

 

 히데요시는 침묵을 사랑하지 않았다. 이런 중대한 사안일수록 마치 노래라도 부르는 듯이 나불대면서 하였다. 그것을 듣고 네네 아니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라고 해야만 할까 – 가 곧바로,

 

 “토라노스케[虎之助]야 말로 적임자겠죠”

 

라고 말하였다. 토라노스케라는 것은 키요마사[正]의 통칭이었다.

 키요마사라는 젊은이는 히데요시의 모친 나카(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친척으로, 키요마사가 5~6살 때 히데요시는 키요마사의 모친에게 양육을 부탁 받았다. 히데요시는 흔쾌히 수락하여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부엌 밥을 먹이며 키웠다. 네네가 타진 옷을 기워준 적도 있었으며, 여름이나 겨울에 입을 것도 네네가 걱정하였고, 심한 장난을 야단도 치며 때린 것도 네네였다. 키우느라 들였던 노력이 그대로 네네의 애정으로 바뀌어 있어, 그녀에게 키요마사 만큼이나 귀여운 무장은 없었다. 곧이어 꼬꼬마 코쇼우[小姓]가 되었고 이어서 불과 15살의 나이에 170석을 받는 몸이 되었으며, 시즈가타케[賤ヶ岳]에서 세운 공으로 인해 3000석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키가 6척을 넘어[각주:2] 전쟁터에서는 위풍당당하였으며 또한 장재(將材), 무략(武略)도 있는 듯 했다. 거기에 네네의 눈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도 귀염성 있는 성격이었다. 지금 이 젊은이에게 토요토미 가문이 은혜를 베풀면 언젠가 그 은혜를 반드시 갚으리라.

 

 아직 어려~”

 

 히데요시는 거부하지는 않고 중얼거렸다. 3000석의 직무밖에 경험하지 못한 26살의 젊은이를 갑자기 거대 다이묘우로 삼는 다는 것이 좀 그렇다는 의미였지만, 그러나 갑자기 정권을 얻은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뭐든지 속성(速成)으로 해야 했다.

 

 괜찮겠지

 

 라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키요마사로 하겠다

 

 고 마음 정한 후, 히데요시는 이 인사(人事)에 자신의 장대한 다른 구상을 결부시켜 화려함을 더하게 하였다. 다른 구상이란 언젠가 대명(大明)을 공격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대명 정복이라는 것은 히데요시가 아직 오다 가문의 방면군 사령관이었을 즈음부터의 꿈으로 살아있는 동안 이 꿈만은 실현하고 싶어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 히데요시가 히메지 성[城]에서 아즈치[安土]로 가서 노부나가에게 인사를 올렸을 때 반은 농담삼아,

 

 큐우슈우[九州]를 하사해 주시면 그 곳의 병사들을 이끌고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라고 말한 것은 대명(大明)으로 바다를 건너가기에 편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히고[肥後]는 큐우슈우에서도 온 지역에 미전(美田)으로 가득 차, 일본의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병사를 기를 수 있었다. 더욱이 히고 사람들은 그 지역에 있던 키쿠치 씨[菊池氏][각주:3] 이래 용감하기로 유명했다. 이 지역을 키요마사에게 하사하면 어떻게 될까? 히데요시 휘하에서 토라노스케 키요마사 만큼이나 외정(外征) 선봉대장에 어울리는 남자도 없었다. 히고[肥後]의 경제력은 그 과중한 군역(軍役)에 견디기에 충분했으며, 키요마사 정도의 남자가 히고 병사를 이끌고 가면 대명(大明)의 병사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반국()을 주자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고의 반이라고 하여도 25만석이여서, 3000석인 키요마사의 신분에서 말하면 기절할 정도의 출세였다.

 

 키요마사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히데요시의 큰 은혜를 느끼는 한편 그보다도 더 깊은 감정으로 자신의 양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의 따스함을 느꼈다. 어린 아기가 막 목욕을 끝낸 모친의 향기를 맡고 싶어하는 듯한 기분과 같은 것이 언제나 키타노만도코로에 대한 키요마사의 마음 속에 있었다. 키요마사에게 표면적인 주인(主人)은 히데요시였으며, 감정상의 주인은 키타노만도코로였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머지 반국 24만석은 야쿠로우[弥九朗]에게 주기로 하였다. 사이 좋게 지내라

 

 라는 말을 히데요시에게 들었을 때, 키요마사는 얼굴을 숙여 절을 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저 약방(藥房) 출신의 야쿠로우 놈과……’

 라는 생각이 들자 히데요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키요마사는 무공(武功)이 있어야만 값어치가 있다는 소박한 가치관을 신봉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보호자인 키타노만도코로의 가치관과 일치하였으며, 가치관이 일치하였기에 그녀는 키요마사를 사랑하였으며 키요마사도 그녀를 따를 수 있었다. 그런 키요마사에게 히데요시의 인사(人事)는 이해할 수 없었다.

 

 코니시 야쿠로우 유키나가[小西 弥九朗 行長]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방면군 사령관으로 츄우고쿠[国] 공략을 하고 있을 때 주워온 남자였다.

 임기응변에 뛰어났고 외교 감각이 있었기에 히데요시는 그를 부하로 삼아 하급 참모장교로써 여러 곳에서 부렸다. 또한 유키나가의 부친인 사카이()약종상(藥種商) 코니시 쥬토쿠[小西 寿徳]나 형인 죠세이[清]도 가신으로 삼아 행정을 맡기거나  경리(經理)를 담당시키는 등 총애하고 중용하였다.

 히데요시가 천하를 손에 넣자 키요마사와 같은 야전(野戰), 공성(攻城)의 군인보다도 유키나가처럼 경제를 보는 눈이 있는 정략가(政略家) 쪽을 중용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참고로 상인(商人)인 코니시 일족은 사카이[]에서 오오사카[大坂]에 걸쳐 번영하였지만, 유니나가의 코니시 가문은 그 일족 중에서도 중급 정도의 위치에 있는 가문이었기에 그쪽 방면에서도 명문가(名門家)라고 할 수 있을 정도도 아니었다.

 

 약종상이라는 가업 상 대대로 조선 무역에 숙지(熟知)하여 유키나가도 몇 번인가 바다를 건너 간 적이 있어 조선의 지리나 정세에 밝았고 거기에 조선말도 할 줄 알았다. 그 점이 히데요시에게는 매력이었다. 언젠가는 대 조선 외교를 담당시키고 싶었고, 막상 조선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키요마사와 함께 선봉대장을 맡기고 싶었다. 키요마사의 무용(武勇)에 유키나가의 기략(機略)과 해외 지식이라면 원정군에게는 범에 날개를 단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키요마사는 이해 할 수 없어,

 결국 이런 것이겠지

 라는 편견만으로 사태를 보았다. ()로 공적을 세우지 못하여도 성 안의 방바닥에 앉아서 손바닥이나 비벼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는 무사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자보다 중용되어 가는 세상이라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그 성 안의 무리들이 토요토미 정권의 중추(中樞)에 들러붙어 강고한 단결심을 보이고 있었다. 재자(才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당수격(黨首格)이 되어 오우미[近江]계의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코니시 유키나가도 그 계열에 속해 있었다.

 

 먼 곳에 가면 어찌 될지……’

 라는 걱정이 당연히 키요마사에게는 있었다. 키요마사는 성 안의 무리들을 미워했고 또한 소원(疎遠)했기에, 중앙에서 말도 안 되는 참언(讒言)을 당하기라도 하면 삿사 나리마사와 같이 부임 후 영지(領地) 몰수 이어서 할복이라는 운명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리마사가 만약 성 안의 무리들과 친했다면 중앙의 무마가 먹혀 들어 그런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키나가는 미츠나리와 사이가 좋다. 이런 점에서 잘 해나갈 것임에 틀림 없다

 라는 그 하나만이 키요마사를 신경 쓰이게 하였다. 이 때문에 봉지(封地)로 떠나기에 앞서 키타노만도코로를 배알(拜謁)하여,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라고 마치 하소연이라도 하는 듯이 아뢰었다.

 

 저는 그 약방놈하고 사이가 나쁘옵니다. 한 나라() 50만석을 둘로 나누어 각각 통치하는 이상, 당연 분쟁도 일어나 서로간의 기분도 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약방놈은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 = 미츠나리]를 통해서 주군에게 졸자(拙者)를 참언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때는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해주시옵소서... 라는 것이 키요마사의 바램이었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키요마사가 앞날을 우려하는 것 - 이것을 그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상으로 같은 걱정을 하는 사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녀 자신도 키요마사와 같이 요즈음의 문치 중시로 치우친 토요토미 정권에 은근히 분노를 느끼고 있어 미츠나리나 유키나가와 같은 무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안심하시고 떠나십시오.

 

 라고 그녀는 키요마사에게 말했다. 언제나 말이 명쾌한 것이 그녀의 특징이었다. 이 변함없는 시원시원함을 접하여 키요마사는 얼굴 표정까지 밝아져 들뜬 마음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명쾌하게 말했던 만큼 기분이 밝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키노시타 성[木下姓]이었을 즈음부터 그녀의 내조(內助) 없이는 히데요시의 공()을 말할 수 없었다. 인사(人事)의 상담도 하였고, 밖으로 원정을 나간 히데요시를 위해서 오다 가문과의 사교(社交)에도 힘썼으며, 가문 내의 정세도 조사하여 정리해서는 히데요시에게 알려주었고, 또한 일가의 가계를 꾸려나가는 한편, 부하들의 뒤도 잘 돌봐주었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히데요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성주였던 하시바 성[羽柴姓]시대에도 그러했다. 이 시기의 히데요시는 츄우고쿠[国] 방면에 나가 있어 거의 부재였기 때문에 사실상의 성주는 그녀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에 그녀가 했던 그런 역할을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행정관[奉行]들이 하고 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시스템이 정비됨과 동시에 그녀는 그 역할에서 실직(失職)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힘도 소멸되었다.
 
예를 들어 키요마사가 참언 당했다고 하여도 그것을 처리하는 미츠나리 등의 행정기관에 그녀는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호해 줄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1. 한 나라(国)를 소유할 정도의 거대 다이묘우. [본문으로]
  2. 1척 = 약 30.3cm 따라서 180 이상. [본문으로]
  3. 예전부터 많은 무용을 남겼다. 도(刀)가 주류였던 일본의 전쟁에 창[やり(槍)]를 발명하여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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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8 1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라도 있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그렇게까지는 마음쓰진 않았을 듯 싶은데.. 도요토미 가문에 적자가 없다는건 치명적인 약점이었군요.. 재능 있는 사람들의 구심점이 없다는 것음 참.. (세키가하라를 보면..-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9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교적인 권선징악에 따른 올바른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시선에서 보면요 ^^)

一.

검은 백합 한 송이
라는 편지가 네네()에게 전해진 것은 1587년의 한창 더울 때였다.
근시일 내에 보내겠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낸이는 말하고 있었다.
 
정말일까?’
 
네네는 처음엔 그 목록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합(百合)이 검다니 -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너무 괴이했다.

 뭔가의 착오겠죠

 라고 네네는 시녀(侍女)들에게도 말했다. 그녀는 남편인 히데요시[秀吉]가 그러했듯이 세상의 괴이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네네[々], [々]라고도 쓴다. 네이코[寧子]라고도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귀족이 되면서부터였다. 귀족의 여성은, 예를들면 '켄레이몬인 토쿠[門院 ][각주:1] '식으로 子자가 붙는다. 남편 히데요시가 칸파쿠()가 되었을 때, 칸파쿠의 정실(正室)은 키타노만도코로[政所]라고 불리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세간(世間)에서 그리 불렸다. 그 즈음 궁정의 공식 문서에서는,
 
[
토요토미노 요시코[豊臣 吉子]]
 
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대해서 그녀 자신에게 어떤 주체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吉이라는 글자가 복스럽고 좋다는 뜻에서 그 글자가 선택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네네가 어떤 글자의 이름으로 쓰여지건 그녀가 종일위(從一位)라는 여성으로써 최고의 위계(位階) 소유자이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가정과 후궁, 여관(女官)들의 총지배자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목록을 헌상한 사람은 삿사 나리마사[ 成政]였다.
 
나리마사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범죄자였다. 오다 가문[織田家]의 토박이 가신(家臣)이며, 노부나가[信長]에게 그 무용(武勇)과 강직(剛直)함을 사랑 받아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군의 장수가 되었다. 노부나가 말년에는 호쿠리쿠 탄다이[北陸探題[각주:2]]였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막하(幕下)에 배속되어 엣츄우[越中] 일국()을 소유하는 신분이 되었다.
 
노부나가가 죽어 호쿠리쿠의 시바타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가 그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웠을 때, 나리마사는 당연하게도 카츠이에 측에 서서 히데요시에게 대항하였다. 단순히 정치상의 소속으로 그렇게 되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 인물만큼이나 극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한 옛 오다 가문의 장수도 드물었다.

 히데요시는 호쿠리쿠를 제압하고 엣츄우[越中]로 진격해 들어가 나리마사를 항복시켰지만, 이 정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하는 인물의 목숨을 이외로 살려주었다. 세상은 히데요시의 도량에 놀랐는데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나리마사 자신이었다.
 
어째서 내 목숨을 살려준 것인가?’
 
라는 의문은 나리마사와 같이 단순하고 목이 뻣뻣한 인물에게 있어서는 생애 풀 수 없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보다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였다. 자신을 혐오하는 나리마사까지 죽이지 않았다는 평판은 천하로 널리 퍼져 나가, 그것을 전해들은 여러 지역의 대항자(對抗者)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성을 열고 활을 땅에 던지며 복종해 올 것이다. 그런 효과를 히데요시는 기대했다. 이 효과를 더욱 크게 하기 위해서 나리마사에게 엣츄우의 일개 군()을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놀라 자빠졌다. 거기에 이어 큐우슈우[九州] 정복 후, 일본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라고 일컬어지는 히고[肥後] 50여만석을 나리마사에게 주었다.
 
어째서 이 정도로 후은(厚恩)을 받는 것인가?’
 
라고 나리마사는 생각하여, 이 인물 나름대로 겨우 답을 낸 것이 네네의 존재였던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뒤, 나리마사는 잠시 오토기슈우[御伽衆[각주:3]]로서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섬기고 있었다. 이 즈음 네네에게도 배알(拜謁)하였고 또한 선물도 보냈다.
 
이 부인(婦人)에게 허술히 해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나리마사에게 있었다. 일단 패해서 살아남은 인물인 만큼 그런 종류의 감각은 오히려 남들보다도 더 날카로워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사(人事)에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모신(謀臣)쿠로다 죠스이[田 如水]나 초창기부터 선봉대장(先鋒大將)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 등이 아닌, 이 키타노만도코로라는 것을 나리마사도 알게 되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나가하마[長浜]의 꼬꼬마 코쇼우[小姓] 때부터 손수 길러 어렸을 때의 싹수부터 꿰뚫어 보아 일치감치 히데요시에게 추천한 것이 그녀라는 소문도 있었고 그 외에도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나리마사는 많이 듣고 있었다. 히데요시도 그녀의 인물 감정에는 신용을 하고 있었으며, 항상 그것을 존중하였고 그 의견을 허술히 하지 않았다. 토우키치로우[藤吉[각주:4]]였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토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와 그녀의 합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네는 명랑한 성격에 더구나 거드름 피우지 않았고 조금도 권세를 휘두르는 일 없는 부인이었지만, 그러나 단 한가지 버릇이 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되어서도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가문 내의 인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여 인사(人事)에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평가에 사심이 없고 적확(的確)하다는 점에서 히데요시도 그것을 존중하여 때로는 상담하거나 하였다. 자연히 그녀의 위복(威福)과 다정함을 우러르는 무장(武將)의 무리가 형성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카토우 키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 거기에 그녀의 양갓집의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은 그 살롱(salon)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삿사 나리마사가 자신의 기괴할 정도의 영달이 어쩌면 키타노만도코로덕분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것도 이런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저 부인은 나 같은 놈에게 호의를?’
 
이라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았다. 네네의 남성에 대한 호의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어, 궁중에서 사교(社交)가 뛰어난 인물보다도 전쟁터에서 무용이 뛰어난 자에 대한 평가가 후했다. 남자의 와일드함과 강직함을 사랑하였고, 예를 들어 그들이 저돌적인 것으로 인하여 실패를 하였다고 하여도 그녀는 오히려 그 실패를 미덕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언젠가 두서너명의 무사(武士) '면밀하지 못한 자이다'라는 이유로 추방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듣고 그들의 위해서 여러 번 옹호하여 결국에는 구해 준 적도 있었다.
 
그녀의 아래에 모이는 무장들의 무리는 이윽고 무단파(武斷派)라는 인상을 세상에 끼치기에 이르는 것도 거슬러올라가면 그녀의 그러한 기분에 의한 것일 것이다.

 나리마사는 그런 점에서 자신과 같은 남자가 키타노만도코로의 호감을 얻고 있다는 이유를 알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나리마사는 그녀나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런 점에서도 다소의 경향이 있어, 토요토미 가문에 많이 있는 오우[近江] 사람들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대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자신과 같은 오와리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친근감을 보였다. 오와리 서부 카스가이 군[春日井郡] 히라 촌[比良村] 출신인 삿사 나리마사에 대해서는 - 이것만으로도 네네에게 타인(他人)이라 생각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하였을 것이다.
 
이 호의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
 
고 나리마사는 생각했다.
 
이런 경우 인사(人事)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갖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와의 유대(紐帶)를 강하게 해 두는 것이 앞으로 먼 지방에서 생활하는 몸으로써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을 보내야 좋을지에 대해서 나리마사는 곤혹해 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물욕(物慾)이 없는 것에 더해 지금의 신분이라면 무엇을 보내건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다. 깊게 생각한 끝에 나리마사는 자신이 예전에 지배하고 있던 엣츄우[越中]의 명산(名山) 타테야마 산[立山]의 높은 곳에 검은 백합이 핀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진귀한 꽃은 없었다. 엣츄우에서조차 검은 백합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어, 기껏해야 쿠로베[部] 계곡에 사는 사냥꾼이나 타테야마 산의 권현(權現[각주:5])을 존숭(尊崇)하는 수행자들 몇몇이 그것을 보았다고 하는 정도였다. 나리마사는 이 검은 백합을 보내고자 하여, 한때는 자신의 부하이기도 했던 엣츄우 지역의 무사들에게 급사(急使)를 파견하여 그 채집을 의뢰하였다. 진귀한 것이라고는 하여도 현지의 나무꾼이나 사냥꾼에게 부탁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그루를 얻어서는 그것을 통에 넣어 오오사카[大坂]로 운반시켰다. 꽃은 뜨거운 날씨를 싫어하기 때문에 수송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힘이 들었다. 그것이 오오사카에 있는 나리마사 저택에 도착하자 나리마사는 곧바로 그 중 한 송이를 금(金)으로 그림이 그려진 검은 옻칠을 한 통에 꽃꽂이하여 키타노만도코로의 비서(秘書)인 늙은 비구니 코우조우스()에게 보내었다. 코우조우스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두지 않고 곧바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방으로 가지고 가, 그곳의 도코노마(床の間)에 놓았다.

 이것이 편지에 있던 검은 백합인가……”

키타노만도코로는 말을 입에 머금은 채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목을 쭈욱 내밀을 수 있을 만큼 내밀어 꽃에 몰입되었다. 검다……기 보다 엄밀히 말해 검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했던 칠흑의 꽃잎보다도 그 자연스런 색조가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빛 속에서는 선명하게 검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는 통통한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므츠지쥬우[従]님은 참으로 친절하시구나

 라고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리마사는 이 당시, 하시바 성[羽柴姓]을 하사 받아[각주:6] 므츠노카미[守]가 되어 지쥬우[従]에 임명 받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하시바 므츠지쥬우(羽柴 陸)라 통칭되고 있었다.

 오히려 무사(武士)는 이래야 하는 것이죠

 라고 목소리를 적셔서 말했다. 강직하고 굽힘이 없는 속에 이런 친절함을 가진 인물이야말로 오다 가문[織田家]의 하급 무사 가문에서 자라난 그녀의 미의식(美意識)에 걸맞는 무장상(武將像)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히데요시가 총애하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우미[近江] 계의 봉행 나부랭이들에게 이렇게 빛과 색깔을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속으로 비교해서 더욱더 나리마사라는 인물을 중히 평가하며,

 역시 사람에게 깐깐한 오다 우다이진[織田 右大臣[각주:7]]님의 눈에 든 사람이구나

 라고 말했다. 거기에 얄밉다고 할지…… 엣츄우[越中]에서 수백 리 길의 산과 강을 오르고 건너게 한, 이 꽃을 단 한 송이만 보낸 나리마사의 생각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노력과 비용 속에서 일편의 와비[[각주:8]]를 찾아낸 나리마사는 평소,

 졸자(拙者)는 차()를 모릅니다

 라고 말했으면서도 이것은 다도(茶道)의 극의(極意)가 아닌가?

 세상에 검은 백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겠죠

 이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으면는 생각에, 이 검은 백합을 위한 다회(茶會)를 열고자 그 준비를 명했다. 그녀가 대접해야 하는 주인(=테이슈(亭主))이기는 했지만, 다회를 실제로 운영하는 접대(=시타토리모치(下取持))에는 사카이[]의 모즈야[屋]의 젊은 부인이 맡았다. 모즈야의 부인은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딸 '오킨[おきん]'을 말하며, 키타노만도코로를 시작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부인들에게 다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다회는 성공하여 큰 평판을 얻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후궁에 있는 귀부인(貴婦人)들로 당연히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부인들은 모두 이 높은 곳의 눈에서만 핀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에나 나오는 꽃에 감탄의 목소리를 내며 약속이라도 한 듯,

 눈에 복을 받을 수 있어 일생의 영광이옵니다

 라고 입을 맞추었다.

 후세(後世).
 
이 다회에는 이야기가 더 추가되었다.
 
이 이야기에는 요도도노[淀殿]를 등장시키고 있다. 요도도노도 이 다회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는데 미리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거기에 한 번 더 궁리하여 자신도 수하를 엣츄우[越中]에 파견하여 검은 백합을 채집시켰다. 엣츄우[越中]는 삿사 나리마사 다음의 다이묘우[大名]를 두지 않고 토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으로 삼고 있었다. 직할령의 지배는 오오사카[大坂]의 봉행(奉行)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이 봉행들이야 말로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등 요도도노를 보호자로 우러르고 있는 오우미[近江]계의 문관(文官)들로, 이 점 그녀에게 있어서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렇게 채집시킨 것이 아직 오오사카에 도착하기 전에 요도도노는 키타노만도코로가 주최한 다회의 손님이 되었다. 다른 손님들은 한 송이의 검은 백합에 이 세상의 신비에 놀라움을 보여 주었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만은 예외였다.
 
조용히 그것을 지긋이 본 후 형식적으로만 찬미하였다. 이 담담한 태도가 키타노만도코로를 의아케 하였다. 원래 둔감한 것일지도 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요도도노는 검은 백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기해 하지 않는 것, 그 둘 중에 하나였다.

 그로부터 3일 후.
 
일이 명확해졌다. 요도도노가 사는 니노마루[[각주:9]]의 긴 복도(長廊下)에서 꽃꽂이에 쓸 꽃을 채집하는 행사가 열려 키타노만도코로도 초대되었다. 그녀가 코우조우스를 데려 가자, 3일 전에 그녀가 그토록 자랑하고 그토록 떠들썩하게 다회까지 열게 한 그 검은 백합이 다른 마타리 같은 잡초와 함께 바구니에 마구 담겨 주변을 장식하는 꽃으로 꽂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 송이나 두 송이가 아닌 20, 30이나 아무렇게나 꽂혀가며,
 
-
검은 백합 같은 것은 진귀한 꽃도 아니다.
 
고 키타노만도코로의 무지함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이런 창피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그녀의 굴욕은 공개되어 버렸다. 이 문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여성들을 지배하는 사람으로서의 권위에 관한 것이 되었다. 그녀는 요도도노를 미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검은 백합을 헌상하여 이런 굴욕을 맛보게 한 삿사 나리마사에게까지 증오하게 되었다. 곧바로 히데요시를 움직여 나리마사에게서 새로운 영지(領地)인 히고[肥後]를 빼앗아 결국에는 셋츠[
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할복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다……

 고 한다.
 
이 이야기를 후세 후세 사람들은 믿었지만, 그러나 사실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나리마사가 영지(領地)를 몰수당한 1587년에는 아직 요도도노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나 되지 않았나 하는 시기이며, 저 만큼의 기획을 짜서 키타노만도코로와 대항할 정도의 위세(威勢)는 당연하게도 아직 가지지 못했다.
 
또한 삿사 나리마사의 실각(失脚)은 다른 사건과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으로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빙자하기에는 너무 유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요도도노라는 두 규벌(閨閥)의 다툼이 후에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와 운명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워간다는 사실을 사실 이상으로 상징화했다는 점에서 이 정도로 높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도 또 없을 것이다.

  1.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딸로 부친의 의향에 따라 황실에 들어가 안토쿠 텐노우[安徳天皇]를 낳았다. 헤이케[平家] 전성기의 상징적 인물. [본문으로]
  2. '탄다이’란 그 지역의 군사, 정치, 판결권을 소유한 총책임하는 기관 혹은 인물. [본문으로]
  3. 히데요시의 말 상대 [본문으로]
  4. 히데요시가 미관말직일 때의 이름 [본문으로]
  5. 일본은 산을 신으로 여기는 산악신앙이 있어, 타테야마 산을 이자나키[伊邪那岐]의 화신이라 여겼다. 또한 일본의 신들을 불교의 부처님들의 화신이라는 신불습합(神仏習合) 사상에 따라 이자나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이라고도 여겼다. [본문으로]
  6.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씨[豊臣氏]를 칭하기 이전에 사용했던 성(姓). 유력한 인물들이나 공이 많았던 부하들에게 이 하시바 성을 하사하여 일문(一門)의 효과를 기대하였다. [본문으로]
  7.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지칭. [본문으로]
  8. 심플함 속에서 맑고 한적한 정취 [본문으로]
  9. 두 번째 성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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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4 1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삿사 나리마사 이야기가 이 이야기였군요.. 어쩐지 겨우 이런일로 죽인다니 그 현명한 기타노 만도코로치고는 단순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뭐, 아무래도 자기 지방 사람들을 우대하는건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듯 싶습니다. 글쎄요.. 왜그럴까요?(쿨럭;)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5 0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화나 에피소드에 있는 이야기들은 뛰어난 인물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서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검은 백합이야기도 그런 의미가 아닐지...

    저도 그게 이해가 안가더군요... 자기 지역 출신 우대가...
    임진왜란 때 출진한 어느 부대(...음 갑자기 생각이 안나는군요)는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무장단과 그렇지 않은 하급자들의 알력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렇게 전 생각합니다.
    당시는 세금 & 병사를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사람 머리수를 갖추어야 했기에, 자기 영내의 백성들이 다른 나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다른 쿠니(国)의 사람들과 만나기 힘들었고, 지금도 외국인을 배척하듯이 당시는 더욱 배타적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다른 지역의 흉은 곧바로 받아들이지만, 칭찬은 믿기 힘든 것도 또한 사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없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일본은 있다"는 생각했던 만큼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거기에 당시의 관습법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国質,郷質라는 것이 있어,
    같은 쿠니, 혹은 마을의 A라는 사람에게 타지역의 B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며, B는 A와 같은 쿠니 혹은 마을 사람인 C에게 돈을 받거나 물품 대금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면에서 사기 치는 사람이 분명 생겼을 것이고, 이런 과정에서 서로간에 불신도 싹트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06 2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오오.. 생각할 점이 있는 답변을..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07 1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단 것에 오타가 수정할 수 없을 정도로 많군요.. --;;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

  5. 이노센스 2010.02.13 2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현은 일본어로는 곤겐이라 읽습니다. 이는 인간의 몸을 입고 속세에 내려온 부처를 이르는 호칭으로서 명망이 높은 인물에게 종종 붙여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유명한 경우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죽은 뒤에 도쇼구에 모셔져 도쇼다이곤겐의 칭호를 얻었지요.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신호(神號)같이 고유명사를 제외하곤 '권현'이란 불교 용어를 일본식으로 고쳐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권현은 신이 이 세상에 임시의 모습을 가지는 것으로 산악신앙과도 많은 연관이 있던 것 같더군요. 굳이 인간의 몸을 입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묻습니다만 이에야스 말고 또 権現의 호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명망 높은 인물에게 종종 붙여진다고 하시니 생각 외로 여러 명이 있었나 보군요.

      개인적으로는 이에야스가 곤겐이 된 것은 텐카이[天海]와 그의 말에 넘어간 히데타다[秀忠]에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6. 이노센스 2010.02.13 2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게시물의 하단이 잘리는 것이 아쉽네요. [도요토미 가문 사람들]은 저도 서울 교보문고에서 일본어 문고판으로 읽은 기억이 나는 데 번역을 생각보다 잘 해놓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리마 사람 이야기]는 없어서 아쉬웠지만요. 다만 한글로 옮기기 곤란한 말이라면 이해하겠지만 다소의 장난기 어린 표현이 시바 료타로의 간결하고 침착한 문장 스타일을 망가뜨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어 번역보다 돌출되는 문제인 듯합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02.22 03: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이버에서 이쪽으로 오면서 뒷글이 많이 잘리더군요....근데 이번 편은 한 번 손을 본 곳이라 잘리지 않았는데...

      '하리마 사람 이야기'는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주인공인 '하리마 바다 이야기[播磨灘物語]'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장난기 어린 표현...이라....
      ^^ 그렇군요. 이노센스님은 제가 쓴 장난기가 담긴 표현을 어떻게 표현하실수 있으시려나요? 시바 선생의 간결하고 침착한 문장 스타일을 살리는 방법 좀 알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그 후 히데요시[秀吉]는 히데이에[秀家]를 어떤 경우라도 곁에서 떨어뜨리질 않았다. 전쟁터에는 반드시 데려갔으며, 여러 장수들을 만날 때도 자신의 곁에 있게 하였다. 자연히 무장들은 히데이에에게 공손한 예()를 취했다.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뒤, 히데요시는 이 소년을 유자(猶子)에서 양자로 삼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일족으로 하였다. 그 이전이건 그 이후건 히데요시는 어떠한 경우라도 히데이에에게 언짢은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히데이에가 똑똑한 대답이라도 하면,

 

 허허~ 하치로우[각주:1]가 제법이구나~”

 

 하며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였다. 히데요시는 핏줄이 닿는 다른 양자들 보다 이 핏줄이 닿지 않은 양자 우키타 히데이에를 사랑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친자식 같군

 

 라고 사람들은 뒤에서 쑤군거렸다. 히데요시 자신하치로우 모친의 몸을 알고 있던 만큼 어렴풋이 그렇게 착각할 법한 정념(情念)을 이 소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부친이라는 것은 원래 출산의 고통이라는 동물적인 체험이 없이, 단순히 그 아이의 모친의 몸을 알고 있을 뿐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히데요시는 히데이에 부친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운이 좋은 도련님이지

 

 라고 토요토미 가문에서는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는 고(故)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자식을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친 덕분일 것이다

 

 라는 사람도 있었다.

 

 오후쿠(ふく = 히데이에의 모친)는 오오사카[大坂]에 와 있었다. 오오사카 성 밑 비젠지마[備前島]에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저택이 있었다. 그러나 오후쿠는 이 저택에서 살지 않고 오오사카 성내(城內)에 거처를 얻고 있었다. 그렇다고 측실(側室)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후궁(後宮)에는 많은 명문가 출신의 귀부인들이 이었다.

 죽은 주인 노부나가의 딸 중 다섯째인 산노마루도노[丸殿][각주:2], 역시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信包]의 딸인 히메지도노[姫路殿][각주:3] , 오우미[近江] 아자이 씨[氏] 출신인 니노마루도도[丸殿=요도도노[淀殿]][각주:4],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셋째 딸 카가노츠보네[加賀局][각주:5], 오우미[近江] 쿄고쿠 씨[京極氏] 출신인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6],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여동생으로 재녀(才女)라 소문난 산죠우노츠보네[局] 등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었다. 오쿠후는 이 화려한 꽃밭에 속해있지 않았다. 그녀는,

 '비젠 님[備前殿]'

 이라 불리며 법체(法體)가 되어있었다.

 나오이에가 죽은 다음 해. 장례식이 공표된 후 관례에 따라 머리를 밀고 흰 옷을 입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법체인 몸을 측실로 삼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성 안에 암자를 짓게하여 거기에 살게 하였다. 히데요시는 때때로 이 암자에 들려,

 

 법체가 되어서 더욱더 아름다워지셨구먼. 나는 여전히 그대가 사랑스럽네

 

 라고 큰 목소리로 말하거나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다시 밤자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구니 모습의 과부에게 밤 시중을 들게 할 정도로 히데요시는 변태가 아니었다. 단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할 뿐이었었고, 그것조차도 이 히데요시라는 남을 기쁘게 하는데 천재적인 인물은 멀리 원정을 나가있을 때조차 정실이나 다른 측실들에게도 그러했듯이 이 오후쿠에게도 자신이나 히데이에의 근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거나 했다. 또한 항상 오후쿠에게,

 

 하치로우만큼 귀여운 녀석은 없지

 

 라고 말하거나 하였다. 그렇다고 이 히데요시의 애정은 꼭 오후쿠에 대한 애정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하치로우 히데이에 자신도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을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듯 하였다. 성격이 시원시원했으며, 말하는 것에도 막힘이 없었고, 행동거지에도 봄바람이 이는 듯 상쾌함에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기 친인척의 아이들이 볼품이 없었으며, 표정이 둔하였고, 언동도 또한 어리석었기에 더욱더 히데이에를 사랑하였다.


 그러면서도 히데요시는 히데이에가 조금 가엾다고도 생각하였. 양자라고는 하여도 일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히데이에에게는 토요토미 가의 상속권이 없었다. 이 점 누나의 아들인 히데츠구[秀次],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인 히데아키[秀秋]에 비해 히데이에라는 양자의 존재에게는 약간의 허전함이 있었다. 그 허전함을 당사자는 물론 느끼지 못했고, 단지 양아비인 히데요시만이 느끼고 있어 느낄 때마다,

 하치로우에게 잘 해주어야지……’

 라고 생각하여 다른 양자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미소도 히데이에에게는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위에 서는 자로서의 교육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히데이에가 13살이 되자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코노에츄우죠우[左近衛中将]에 임관시켜 시코쿠 정벌[征伐][각주:7]에 데려가 아와([阿波]의 키즈 성[木津城] 공격에 참가시켰으며, 2년 뒤에는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8]에 종군시켜 개선(凱旋)한 종삼위(從三位) 산기[議]에 임명해 주었다. ‘산기를 중국에서는 재상(宰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비전재상(備前宰相)]

 이라 불렸다. 15살 때였다.

 이어서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는 불과 18살의 나이로 해군 총사령관을 맡으면서도 대과(大過)가 없었다. 다만 히데요시 자신이 직접 지휘하듯 하였고 또한 가로(家老)들의 보좌도 있었기에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 즈음 히데이에게는 벌써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히데요시의 양녀(養女) 고우히메[姫]였다.

 

 고우히메를 히데이에에게 시집 보내겠다

 

 라고 히데요시가 말하였을 때 히데이에의 행운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고우히메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딸이었다. 토시이에의 딸이라고 하면, 처음엔 마아[摩阿]'[각주:10]라는 셋째 딸이 14살에 양녀가 되었고 이어서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마아의 동생 고우히메를 히데요시가 아직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하 장수일 때 양녀로 삼아 손수 길렀다. 히데요시의 고우히메에 대한 애정은 친부모라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가 오다 가문의 부하 장수로 하리마[播磨]의 전쟁터에 있었을 즈음에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 있던 이 꼬마 숙녀에게 전쟁터에서 편지를 보냈다.

 

자가 들어가는 아가씨에게

 

~ 정말로 보고 싶구나. 장난 같은 거 하다가 다치지 마라(날뛰다가 다치면 안돼요~). 또한 건강을 위해서 뜸을 받아라. 이것은 유모에게도 말해 두마. 너는 기특한 아이다. 밥도 많이 먹고 있는지 궁금하구나(언제 함께 먹자꾸나). 어쨌든 니가 정말 보고 싶어 미치겠구나. 꼭 이 히메지 성[城]에 부를 테니 맘 편히 먹고 있으렴. 그 때 꽃가마가 필요하다면 준비해 둘 테니 필요하면 말하거라.

 

                                                                                                                                             진중(陣中)에서 

                                                                                                                                                         아빠가

 

 라는 편지였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고우히메가 자랐어도 언니인 마아처럼 손대지 않았고, 그녀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아빠]로 있으려고 하였던 듯했다.

 

 고우히메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남편을 골라주마

 

 라고 말은 했지만, 맘속으로는 일찌감치 히데이에로 정하고 있었다. 양자에게 양녀를 줌으로 해서 토요토미 가에서 히데이에의 위치를 한층 더 강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히데이에는 두 번의 조선 침공[각주:11]에도 참전하였다.

 그 사이 곤츄우나곤[中納言]에 승진하였고 이에 따라,

 '비전중납언[備前中納言]'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1화에 언급했던 다섯 다이묘우[大名]의 도()를 맞추었다 하는 것도 이 즈음일 것이다.

 

 이 즈음부터 히데요시의 육체건 정신이건 눈에 띄게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적통(嫡統) 히데요리[頼]가 태어나 있는 상태였고, 그로인해 히데요시의 모든 관심은 이 갓난아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히데요리 장래의 지장이 될 것 같았던 칸파쿠[白] 히데츠구는 주살(誅殺)되었으며, 히데츠구의 다음가는 지위에 있던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주었다. 남은 것은 히데이에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상속권이 없었던 만큼 히데요시의 사랑은 여전하였고,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히데요시 쪽이 양자 히데이에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모습조차 보였다.

 

 어느 날.

 히데이에를 불러,

 

 히데요리가 15살이 되기까지 나는 어떻게든 살아 있었으면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래도 가망이 없을 것 같구나. 내 몸에 만일의 경우라도 생긴다면 예전에 내가 고아인 너를 지키며 키워왔던 것처럼 니 동생인 히데요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라고 히데이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히데이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 반응이 빠른 젊은이가 평소와는 달리 기분 나쁜 듯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어째서 아무 말 없는 게냐?”

 

 라고 캐묻자 히데이에가 말하길, 그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새삼스레 당부를 하심은 내 마음을 애매하다고 여기셔서 일 것이다. 사나이로서 불유쾌하다는 의미의 말을 하였다.

 그것을 듣고 히데요시는 안심하여,

 역시 하치로우밖에 없구먼

 이라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교육자의 입장으로 돌아왔다.

 

 너의 진실함은 알지만 지금의 태도는 좋지 않구나. 오해를 살만하다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다이묘우[大名]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나하나 모두가 정치여야만 한다. 정치라는 것은 권모술수의 길이 아닌 자신의 진실함을 남에게 전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하여라. 너에게는 그것이 없다. 지금은 나조차도 너의 진실함에 대해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예전부터 너의 그러한 결함에 대해 걱정이 들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 하나뿐이다.”

 

 라고 말했다.

 

 집은 잘 다스리고 있는가?”

 

 라고 히데요시는 물었다. 우키타 가문[宇喜多家]가로들 간에 서로 반목하여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이 항간에 떠들썩했다. 히데요시조차 다소는 듣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히데이에는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의 곁에서만 있었던 히데이에는, 오랫동안 토요토미 가문에서만 생활하였기 때문에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나 영지(領地)를 다스림에 어두워, 57만여 석의 처리는 필두(筆頭)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에게 전부 맡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기 가문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무 일도 없습니다

 

 라고 정직히 대답했다. 사실 히데이에는 그렇게 믿고 있었으며, 그 이외에 대답할 것이 없었다.

 이 젊은이는 생각했던 만큼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히데이에가 전쟁터에서는 꽤 용감하였으며 사졸의 통제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내정(內政)에 서투른 듯했다.
 
귀족으로써의 교양은 있었다. 시가(詩歌)에도 능했으며
츠즈미[]도 치고 노우[]도 연기하는 등 궁중 사교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능했다. 그러나 이런 교양이 궁중에서는 도움 되겠지만 우키타 가문을 통솔함에 있어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 하치로우를 궁중에서만 머물게 한 내가 잘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교육에 잠깐 후회를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상 우키타 가문 내부 문제에 대해 참견할 정도의 체력도 없었다.


 히데요시는 이 여름(1598)에 들어서면서부터 원인불명의 설사가 계속되어 식욕도 잃고 있었다. 다시 올 여름을 히데요시는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오오사카(大坂)의 그 가혹한 열기를 피하기 위해, 그 즈음은 후시미[伏見]의 높다란 곳에 세운 궁궐로 옮겨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웠다. 이 가냘퍼진 체력으로 여름을 지낼 수 있는가 하는 불안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그 불안을 주치의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에게만 은밀히 전했다. 불안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토요토미 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히데요시의 건강만이 토요토미 정권의 영광이었으며 유일한 정치적 근거였고 동력이었다. 그 건강의 몰락과 함께 이 정권도 망할 것이라는 것은 다소 냉정한 눈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의 머리로건 이해할 수 있었다.



 전 시대인 오다 정권의 멸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16
년 전, 노부나가[信長]의 죽음과 함께 망했다. 히데요시는 오다 정권을 소멸시킴으로써 죽은 주군 노부나가의 권력을 계승해서 토요토미 정권을 성립시켰다. 어떤 사람보다도 당사자인 히데요시가 이 원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이 원리에 의해 히데요시는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고, 그 생명이 꺼져가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반대로 이 원리에 계속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빌었다. 이 원리를 극복하여 아직 갓난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싶었다. 무리라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던 만큼이나 바둥거리듯이 그것을 빌었다. 그런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꽉 차있었다. 히데이에의 가문에 대한 충고를 오랫동안 머리에 둘 정도의 끈기도 관심도 지금의 히데요시에게는 없었다.

 

ps; 많이 늦어졌네요 ^^; 핑계를 대자면 원인불명의 두통으로 금요일부터 오늘 낮까지 고생했습죠..

  1. 히데이에의 아명. [본문으로]
  2.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세 번째 성곽[三の丸]에 거처가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3. 히메지 성에 살고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거처가 두 번째 성곽에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5. 토시이에의 영지(領地)인 카가[加賀]에서 왔기 때문에. [본문으로]
  6. 거처가 후시미 성[伏見城] 마츠노마루[松ノ丸]라는 이름의 성곽에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7. 1585년 시코쿠[四国] 쵸우소카베 가문[長宗我部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8. 큐우슈우[九州]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9. 1590년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10. 상기의 카가노츠보네[加賀ノ局] [본문으로]
  1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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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2.03 2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다리고있었습니다.(ㅎㅎ)

    역시 제일 밑의 문장이라던가, 문장이 꼬여서 길어지면 어렵더군요.. 히데이에 표정에 관한 에피소드도 어설프게 의역해서 읽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많이 달랐었네요(ㅎㅎ;)

    五자가 들어가는 아가씨에게였었군요(에휴... 이 돌머리;;)

    히데요시의 원인불명의 설사는 지속성의 독을 먹어서 그렇게 됐다는 음모론이 끊이질 않았는데.. 실상은 뭐 노환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건 그렇고.. 히데요시는 양자 포함해서 자식교육이란 능력에서는 낙제점이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04 08: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우'가 아니라 '고'로 바꾸어야 겠군요.
    그리고... 그 ~もじ라는 것은 의역입니다. 궁궐 나인들의 말(끝에 접미어로 もじ라고 붙는 것)이 후세에 퍼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히데요시는 획수가 많은 한자는 간단한 동음으로 바꾸는 버릇이 있다고 하니까요.
    ごう(豪) -> ご(五)

    그 히데요시의 독살설은 명의 사자 심유경 계략이었다고 하던거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저도 노환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살이라는 것이 쉬운 것(특히나 단발성이 아닌 지속성이라면 더더욱)이 아닐테니까요.

    천재의 단점이라고들 하죠.
    자기가 해냈으니 남들도 쉽게 해낼 것이라 생각한다는...
    (여담이지만 신선조의 오키타 소우지(沖田 総司)도 남들 가르치는 것은 정말 못했다고 하더군요. 평소 미소를 달고 다니던 사람이 훈련때만 되면 온갖 신경질은 다 냈다고.. 왜 이걸 못해!! 라면서..)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2.08 22: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 히데이에.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를 쌓았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2.09 07: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공님 방문 감사드립니다. 못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2.10 1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뭘요... 언제나 여기서 좋은 글을 많이 읽고 가네요...저야 말로 감사하죠 ^-^;;

  6.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1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장에서 히데이에 지력 정치가 엉망인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

 이미
1581년이었다. 해가 밝자 마자 히데요시는 하치로우와 함께
하리마[播磨] 히메지[路]를 출발하여 산요우도우[山陽道] 서쪽으로 향했다. 하치로우에게 있어서 생애(生涯)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는 여행이었다. 그는 9살이 되어 있었다. 하치로우가 이렇게 어렸을 적에는 히데요시의 입장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지만,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따라 이때의 일이 생각날 때마다 히데요시의 헌신적인 애정을 떠올리며 은혜를 느껴,
 -
이 사람을 의해서라면……
 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굳게 다짐하였다
. 이 점토요토미 가문[豊臣]의 다른 양자들과는 달랐다. 다른 양자들은 히데요시의 친척,
인척(姻戚)이었기에 말하자면 자연적으로 존귀(尊貴)한 위치에 설 수 있었으며,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경우는 아무런 피의 연결이 없었던 만큼 오히려 순수하게 히데요시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자랐다고 말할 수 있다.

 친부(親父) 나오이에[直家]가 누워있는 병상(病床)에서 보여준 히데요시의 태도 역시 하치로우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린 자식이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이 몸의 슬픔을 헤아려 주시길……”

 이라며 나오이에는 삐쩍 마른 손을 뻗쳤다. 히데요시도 손을 내밀어 나오이에의 손을 양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이 히데요시의 눈물을 보자 나오이에는 안심하여,

 하치로우를 아무쪼록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

라고 몇 번이나 호소하였.

 아비가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될 무사(武士)본분(本分)과 사졸(士卒)들을 움직이는 법 등을 아비를 대신해 모두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나오이에의 귀에 입을 가까이 해서,

 안심하시길…. 앞으로 하치로우님을 내 자식이라 생각하고 가령(家領)이신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는 물론 일본국(日本)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장수로 길러내겠습니다

 라고 하자 나오이에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소리 내어 울며,

 ~ 정말 안심하였습니다. 앞으론 제가 혼령이 되어서라도 치쿠젠[筑前=히데요시]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저 뿐만 아니고 우리 우키타 가문의 선조 아메노히호코노미코토[天日槍命]를 시작으로 한 대대의 영령(英靈)들도 전부 치쿠젠님의 무운(武運)을 지킬 것 입니다.”

 라고 하였다. 하치로우는 감정이 주변에 쉽게 영향을 받는 아이였기에 이런 대화를 보자 참지 못하고 소리 죽여 울었다. 그 모습이 사람들을 더욱 감동시켰다.
 나오이에는 또한,

 “지금 소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저에게 숨이 있는 동안 하치로우가 어른이 된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어른이 된 모습 이라는 것은 성인식을 시켜달라는 의미였다. 성인식을 치르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그런 예가 없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승낙하여 자신이 에보시오야[烏帽子親]가 되어 나오이에의 머리맡에서 준비를하였다.

 곧이어 성인식에필요한 역할들이 정해졌다. [烏帽子]를 씌워 주는 가관역[加冠役], 아이일 때의 머리를 자르고 상투를 틀어주는 이발역[理髮役], 에보시를 들고 오는 에보시역[烏帽子役], 성인식을 치른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거울을 들고 있을 경대역[鏡台役] 등이다.

 그 중 이발역에 히데요시가 코니시 야쿠로우 유키나가[小西 弥九朗 行長]임명하였다. 이 우키타 영지(領地)에서 태어난 사카이[堺] 상인은 그 탁월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아 이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 있었으며, 츄우고쿠[国] 지역의 크고 작은 다이묘우[大名]들 사이를 오고 가며 반() 모우리[毛利] 체제를 만들고 있었다.

 야쿠로우가 하치로우의 상투를 틀어 주었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하치로우의 메노토[傅人]로 임명 되었다. 이 상인 출신의 무장()과 히데이에의 결합이 세키가하라[ヶ原]의 전쟁터까지 이어질 줄은 이 장소에 있던 누구도 물론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명명식(命名式)이 남았다. 우키타 가문은 대대로 '이에[家]'라는 한 글자가 이어 내려오고 있었다. 3대 전이 요시이에[能家]였으며, 전대가 오키이에[興家], 당대는 나오이에[直家]였다.

 치쿠젠님. 부탁 하나가 더 있습니다. 하치로우를 위해서 치쿠젠님의 이름 글자중 하나를 내려 주실 수는 없으신가?”

 라고 나오이에가 부탁을 하였기에 히데요시[秀吉] 앞글자 '히데[秀]'를 주기로 하였다. 히데요시는 의식에 맞추어 종이를 준비시켜, 그 종이의 한 가운데에 ''라는 문자를 크게 쓰고 왼편 하단에 싸인[花押]를 한 후 하치로우에게 전했다.

 이때 히데요시는 이틀간 오카야마에 머물렀다. 하지만 하치로우의 생모(生母)는 볼 수 없었다. 그녀도 감기에 걸려 누워있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히메지로 떠나기 전 히데이에(하치로우)를 나오이에의 병간호라는 명목으로 오카야마 성에 남겨두었다. 우키타 가문에 있어서도, 센고쿠[戦国]의 관례에 있어서도 믿기 힘들 정도의 호의였다. 이 히데요시의 호의를 나오이에만큼이나 감사한 것이 하치로우의 생모 오후쿠[ふく]였다.

 치쿠젠님의 호의를잊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오후쿠는 나오이에가 하던 말과 같이 하치로우에게 매일 가르쳤다.

 오후쿠는 젊었다. 아직 30이 되기에는 몇 번의 봄과 가을이 남아 있었다. 물론 나오이에에게 있어서 첫번째 부인은 아니었다. 나오이에가 가졌던 부인의 역사는 그대로 그가 행한 음모의 역사인 것이었다.
 첫번째 부인은 옛주인인 우라가미 가문[浦上家]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나카야마 빗츄우노카미 노부마사[中山 備中守 信正]의 딸이었다. 나오이에는 이 장인에게 꼬리를 흔들어 신용을 얻은 다음 곧바로 상대를 방심케 한 후 모살(謀殺)하여그 영지(領地)를 자기 것으로 하였다. 그 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지만 자살했다는 소문도 오랫동안 끊이질 않았다.

 이어서 역시 우라가미 가문의 유명한 신하로 미마사카[美作] 반국()을 소유하고 있던 고토우 미마사카노카미[後藤 美作守]의 딸을 얻었다. 사위의 지위를 이용하여 미마사키노카미를 방심케 한후 독살하여 그 영지(領地)를 뺐었다. 이 부인도 병으로 죽었다. 오후쿠는 그녀의 동생이었다.
 [
마음이건 미모건 비교할 사람이 없다]
 고들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우키타 가에서 키웠고 몸이 크는 것을 기다려 부인으로 삼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하치로우와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각설하고, 나오이에는 히데요시가 병문안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581 1 14일 병으로 죽었다. 54세였다. 히데요시는 우키타 가문의후견인으로서 오카야마에 와 히데이에에게 가독을 잇게 하였으며 가로(家老) 이하 우키타 가의 가신(家臣)들을 훈계(訓戒)하였고 또한 나오이에의 죽음을 굳게 비밀로 하라 하였다. 이 죽음이 공표된 것은 일년 후인 1582 1 9일이 되어서였다. 이때문에 미망인도 그러는 동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될 수 없어[각주:1] 비구니 이름을 갖지못한체 속체(俗體)로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시기에 이 오후쿠와 처음 만났다.
 오후쿠는 물론 상복(喪服)이 아니었다.

 여어~ 어머님이신가~ 하치로우와 많이 닮으셔서 인지 처음 만난 것 같지가 않소이다

 라고 히데요시는 말을 친근하게 걸었지만, 그러나 오후쿠의 아름다움에는 내심 덜컥했다. 눈동자 주변에 어딘가 근심 어린 분위기가 풍긴 묘한 아름다움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 왔던 히데요시의 눈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이런~ 죽은 이즈미(和泉)님도 좋았겠군

 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하려다가, 아무래도 이것만큼은 말을 삼켰다.
 이 오카야마에 머무는 동안, 히데요시는 히데이에와 유자(猶子)[각주:2] 관계를 맺었다. 유자라는 것은 "또한() 아들()과 같다"라는 것으로, 양자(養子)에 준()하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성내에서 허물없이 지냈기 때문에 우키타 가문 내에서의 평판이 좋았고 특히 시녀(侍女)들에게서는,

 저렇게 친근감있는 대장()을 뵌 적이 없다

 고 평판이었다.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라는 인물은 오다 가문[織田家] 넘버 원 무장()이며, 가혹(苛酷)한 성격으로 유명한 노부나가[信長]에게 가장 신뢰받고 있다고 하기에 얼마나 무서운 남자인가하고 상상했건만, 성내에서의 행동은 너무 가벼울 정도로 오히려 거드름 피우는 법이 없었다. 웃기면 배를 부여잡고 웃었으며 맘에 들면 큰소리로 칭찬하곤 곧바로 상을 내렸다. 오히려 아끼려고 하지 않았다.
 시녀들을 다스리던 시녀장(侍女長) 같은 경우는 히데요시가 한 움큼 안겨준 금은(金銀)에 감격하여 제일 먼저 히데요시빠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후쿠를 꼬시기 위해 이 여자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이 여자도 역시 놀랐다. 나오이에가 살아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고는 하여도 엄밀히 말하면
복상(服喪) 중이 아닌가?

 아니~ 물론 그건 잘 알지. 그걸 이렇게 부탁하는 거다

 라며 이 남자는 손을 비벼가며 말했다.

 이런 쪽의 욕망만큼은 참을 수 없다네. 진작부터 오후쿠~ 오후쿠~ 라는 생각뿐이었지만, 그러나 참고 또 참으며 발을 동동 구르며 참아왔건만 이젠 더 이상 어떻게 참을 수도 없네. 부탁하네 응~ 부탁하네 응~ 이해해 주게~”

 라고 했다. 이 모습에는 시녀장도 웃음이 나서 그만 일의 중대함을 잊고 받아 들이고 말았다. 그것을 시녀장은 오후쿠에게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오후쿠가 어떤 심경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에도[戸]시대와는 달리 유교적 도덕의 지배를 그녀들이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이런 점에서 도덕상 고통은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소유자였던 남편이 살아있을 때야 남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소유자가 죽은 이상 그녀에게 용기만 있다면, 또한 남의 이목을 신경만 쓰지 않는다면 자신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오후쿠에게 용기 같은 것은 없었고 단지 당혹해 하고 있던 차에 그녀의 침실에 히데요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이불에서 자 버렸다. 오후쿠의 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 대담한 수동(受動)이 그녀의 용기의 소산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치로우에게 있어서 당신은 모친, 나는 명색이 아비. 이러는 편이 오히려 낫지

 라며 히데요시는 이상한 논리로 오후쿠를 달랬다. 하치로우를 사이에 둔 부모이면서도 부모끼리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은 반대로 이상하고 부자연스럽다는 것이 히데요시의 명쾌(明快)한 논리였으며, 그런말을 들으니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오후쿠도 들었기 때문이다.

 이 하치로우의 양아비는 매일 밤 하치로우의 모친 곁으로 왔다. 오후쿠는 당혹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데요시가 혐오스럽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죽은 남편에 비하면 추남이었으며 키도 약 150 근처밖에 안 되었지만 죽은 남편에 비하면 이 하치로우의 양아비는 훨씬 쿨~한 인품이었으며, 이불 속에 항상 따사롭고 건강한 향기와 같은 것을 남기고 갔다. 이것이 오후쿠에게 있어 즐거운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때 일종의 애정과 같은 것이 태어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히데요시에게는 물론 오후쿠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단순한 엽색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남자는 연이 닿았던 어떤 여성에게건 과할 정도의 애정을 가졌고 그 여성이 행복해지게 되는 것만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성격이었으며 특성이었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은 히데요시 만의 특징이었다. 오후쿠도 그것을 알았다.

 하치로우를 장래에 어떻게든 세상에서 존중 받는 남자로 만들고 싶네

 히데요시는 그것만을 말하였다. 자연히 히데이에를 두고 오후쿠와 히데요시의 사이에 강한 연대가 만들어졌다. 결국에는 이 강한 연대감이, 히데요시와의 이 기묘한 관계를 오후쿠의 마음 속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히데요시가 머문 짧은 기간 동안의 마지막 즈음에 오후쿠는 오랫동안 같이 산 마누라와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히데요시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키타 츄우나곤 히데이에[宇喜多 中納言 秀家]라는 토요토미 다이묘우[豊臣大名]는 이렇게 침실 속에서 태어났다.

  1. 당시엔 남편이 죽으면 대개 비구니가 되어 그명복을 빌었다. [본문으로]
  2. 양자이긴하지만 성(姓)은 바꾸지 않아도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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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26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하루 빨리 나왔군요^^ 역시나 참을 수 없는 히데요시(ㅎㅎ)

    아무튼 오후쿠도 좋았다니 다행이군요. 뭐 좋은게 좋은거지(...;)

    센코쿠 무장들의 정확한 출생년대는 간간히 다른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오이에도 위키에서는 출생년도가 享禄2年(1529年)인데, 사망년도 81년이라면 아무리 우리나이라고 해도 53세인데... 뭔가 시바선생은 대인배스러운 면이 있어서 1,2년 차이엔 크게 신경을 안 쓰는 듯 싶습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6 14: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엔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던가...
    일본엔 "女心と秋の空"라던가.... 그 알 수 없는 마음이야 인류 역사가 이어져 내려온 이래 최대의 수수께끼였다 보니...

    그 "출몰"에 대한 것은 역사서마다 다들 제각각인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위키는 최신 정보를 기준으로 그렇게 되어 있을지 모르겠지만, 책들마다 출생 년대가 몇 년씩 차이가 나는게 다반사다보니... 또는 그 때까지 기존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후에 새로 연구된 것에 따라 바뀌는 일도 많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26 2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자의 마음이라...

    히데요시는 그것에 참 밝았던 것 같더군요. ㅁㅎㅎ.. 여성의 행복을 위해 공부하는 모습이 떠오르니 참... 인간적이랄까, 일본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도 알것 같더군요.

    여담이지만 나중에 오후쿠가 체발하고 나서도 쿨한 관계로 남아있더군요. 은근히 히데요시의 멋진 모습(;;)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6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あっ~!ネタバレは駄目ですぞ!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26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はい、かしこまりました!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7 1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다메엣찌님의 이모티콘과 '@'는 닮았네요 ^^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1.31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내용과는 상관없는 댓글입니다만. 발해지랑님은 한자를 어떻게 입력하시나요? 보통 입력하는 것 처럼 하면 아씨 희 자는 姬로 입력되지, 姫(삼갈 '진'이니까, 진 치고 한자 누르면 나옵니다. 저는 이렇게 이 자를 입력합니다만)으로 입력되지 않습니다. 혹시 일본어로 입력하신 겁니까?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31 23: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습니다. 일본어로 입력하고 있습니다. 인명, 지명, 센고쿠(戦国) 처럼 일본에서만 쓰이는 단어는 될 수 있으면 일본어로 입력하고 있습니다.(그렇게 한지 작년부터인가 그래서... 뒤죽박죽이죠. ^^)

  9. BlogIcon 귀염판다 2014.08.07 15: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군사칸베에 드라마보고있는데 거기서는 나오이에가 통크게 히데요시에게 마누라를 넘겨주던데 실제론 히데요시가 잡순거군요ㅎㅎ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참 힘든법인데 목숨을 내던지면 얻어냈군요 한번만 잘못되면 인생하직인데 대단해요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82 3 11일 할복(割腹) 37.

1546 ~ 1582.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넷째 아들. 스와 씨[諏訪氏]를 상속하지만, 신겐이 죽자 타케다 가문[武田家] 상속. 나가시노 전투[長篠合戦]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川] 연합군에게 패한 이후 일족, 중신들에게 계속해서 배반당하여 텐모쿠잔 산[天目山] 산기슭인 타노[田野]에서 부인과 아들 노부카츠[信勝]와 함께 자살.








비극의 무장


 명장(名將) 신겐의 뒤를 이었던 타케다 카츠요리의 비극은 1575 5월 나가시노 전투 때 이미 선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 전투는 구식인 활과 화살로 무장한 타케다 군이 신병기 철포로 무장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졌다'는 식으로 간단히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상(眞相)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카츠요리에게 통솔력이 부족했음을 한탄한, 신겐을 오랫동안 섬기며 싸워 왔던 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들이 오히려 나가시노 전투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츠요리의 멸망은 전투의 치졸함보다도, 부친 신겐이 쌓아 올린 군단을 유지할 수 없었던 통솔력 부족이 전면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카츠요리가 막 타케다 가문을 상속 받았을 때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시나노[信濃] 군단이, 멸망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모두 배반하여 반기(反旗)를 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1581년에 들어서 신푸 성[新府城]을 축성했지만, 성에 있었던 것은 불과 3개월하고 보름. 공격태세를 취하기 보다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도 비극이 있었다. 더구나 자기 영지(領地)로 적을 끌어들여 물리친다는 그 자세가 너무도 후수(後手)로 인식된 것이다. 때문에 그 멸망은 카츠요리에게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가진 비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츠요리 부인의 기원(祈願文)


 그 멸망의 모습을 전해주는 사료로써, 카츠요리의 부인 호우죠우 씨[北条氏]-19-타케다 하치만 신사[武田八幡神社]에 올린 기원문과 비구니인 리케이니[理慶尼][각주:1]가 쓴 '타케다 멸망기[武田滅亡記]'[각주:2]가 유명하다. 부인이 하치만 사[八幡社]에 올린 기원문을 의역해 보면,

신이시여,

카츠요리는 운을 하늘에 맡겨 제 목숨 아끼지 않고 적진을 향하였습니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와중에 가신들 중에는 정의(正義)를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안위에만 있사옵니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 義昌]는 조그만 이익에 (눈이 멀어) 신의 뜻을 더럽히고 있으며 불쌍하게도 가족까지 버리고[각주:3], 모반의 병사를 일으켜 버렸습니다. 또한 타케다 가문 누대(累代)에 걸쳐 은혜를 받았던 후다이[譜代] 가신들 까지도 모반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카츠요리에게 반항하려 하고 있습니다.

라고 누대에 걸쳐 은혜를 받은 자들까지 모두 배반해 버렸다고 신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이 부인이 신에게 호소한 것을 보면 카이[甲斐]의 산천과 카이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원망과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텐모쿠잔[天目山]의 이슬


 이리하여 모든 것을 잃고 신푸 성()을 불태운 뒤 그 성을 뒤로 한 카츠요리 일행 7백 여명은 하루 동안 이동하여 카시오야마 산[柏尾山山]다이젠 사[大善寺]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하룻밤 다케다 일족의 리케이니[理慶尼]에게 신세를 졌다. 여기서 츠루 군[都留郡]의 이와도노 성[岩殿城]을 목적지로 하였는데, 여기서 재기(再起)를 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고토우게[笹子峠] 고개의 입구에서 반기를 든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 자신의 영지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당한 카츠요리 일행은 어쩔 수 없이 텐모쿠잔 기슭의 타노[田野]에서 자신들 운명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타노에는 '한 손 베기[片手切り]'[각주:4]라 불리는 사적이 있는데, 이 근방에서 아군에게 배신당하거나 오다 군[織田軍]의 습격을 받은 카츠요리(37)가 부인(19), 노부카츠(16) 들과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 마지막을 맞이한 때 카츠요리 부인은,

검은 머리 나부끼듯 흔들리는 세상에서,

가없는 마음에 떨어져 지워지는 이슬 방울의 흔적.

[黒髪れたる世ぞ,はてしなき思いに消ゆる露の玉の]

라는 사세구(辭世句)를 남겼다고 [코우란키()]는 전하고 있다.


 그 후 리케이니[
理慶尼]는 카츠요리 일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타노[田野]에 가서 죽은 사람들의 넋을 하나하나 기렸다고 한다.

케이토쿠 원[景徳院]에 있는 카츠요리의 묘(墓) [야나나시 현[山梨県] 야마토 촌[大和村]

  1. 타케다 신겐과는 사촌(신겐의 아비인 노부토라의 동생(카츠누마 노부토모[勝沼 信友]의 딸)이며, 카츠요리의 유모(乳母)였다. [본문으로]
  2. 다른 이름으론 '리케니기[理慶尼記]'. [본문으로]
  3. 인질로 바쳤던 70세의 모친, 13살의 장남, 17살의 장녀 모두 사형. [본문으로]
  4. 카츠요리의 측근 츠치야 마사츠네[土屋 昌恒]가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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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8 1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버지 만한 아들 없다지만 이런 기량 부족은..ㅎㄷㄷ...

    그래도 오토모 소린 아들보다야 낫군요. 이쪽은 칼한번 못빼들고 카이에키니..(-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18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오히려 신겐보다 카츠요리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
    (다만 時의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라고...)

    예전에 잠깐 생각했던 것인데..
    노무현 = 카츠요리, 정동영 = 아나야마 바이세츠... 란 구식이 뜬금없이 들더군요.
    도자마(부산)인 당주(대통령)와
    타케다의 피가 더 진하게 흐른다는(호남 맹주) 친족중 우두머리(당의장).
    전략상 중요한 스루가(통일부 장관)을 맡겼지만 결국 배반(당 해산).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1.19 0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선 때 카츠요리를 끌어안았어야 됐단 말이오!'(;;;;;)

    뭐 망할거 같으니 다 버리는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0 1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쵸~ 망할거 같으면 다 그런 거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1.20 16: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케다 신겐이 이미 다 망해가는 타케다가를 카츠요리에게 물려준 거고..
    카츠요리는 물론 오다 노부나가를 뛰어넘을 선지안이라던가 실력이 없으니 졌을 뿐인데..
    카츠요리가 욕먹는거 보면 불쌍함..ㅎ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1.21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패자(敗者) 집단의 생존자들이 쓴 책들이야 아무래도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2차대전 후의 독일군들이 쓴 자서전 & 회고록도 실제와는 다른 부분들이 생각 외로 많다고 하더군요.
    그런 의미에서...정말 카츠요리는 불운했고 비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xtaiji83 BlogIcon 심플리진 2008.07.16 1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담아갑니다 ㄳ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17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8.21 0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츠요리 볼때마다.. 카게무샤에서 카츠요리 역을 맡은 하기와라 켄이치씨가 생각나네요.
    일본 전국시대의 매력에 늦게 빠진 저로썬 최근에서야 전국시대 관련 일드를 보고있는데..
    무인토시이에에서의 미츠히데가 켄이치씨라는걸 최근에서야 알게됐음.. ㄷㄷ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21 0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군가 싶어서 검색해 보았던니(저 그 드라마 안 보아서...) 아~ 그 아저씨군요. 젊었을 때는 상당한 호남이었군요.
    개인적으로... 미츠히데의 초상화가 너무 쫌생이처럼 그려져서 인지... 영상물에서의 미츠히데 역과는 매치가 되지 않더군요.
    기대하는 것으로는.... 나중에 키무라 타쿠야가 대하드라마의 노부나가로 나오고(어렸을 적의 단편드라마는 있지만요), 같은 그룹 SMAP의 나카이가 아케치 미츠히데 역으로 나왔으면~ 하고 있습니다.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3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능력이 모자랐다기 보다는.. 두 가지. 천시, 지리를 전혀 타지 못했다는 것. 영지래봐야 고작 20만석의 가이. 그외 80만석 정도는 직할이라기 보다는 강성한 호족들로 인해서 나눠먹기 수준이었고... 게다가 북에는 개인적으로 군주로서의 자질은 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승이. 남에는 너구리. 동에는 어?든 인물인 호죠. 서에는 자칭 마왕....... 능력도 있었고, 외교도 잘했고, 전쟁의 판단도 나쁘지 않았는데.... 신겐은 정말 인물 보는 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바이세쓰 뉴도 & 기소 요시마사 모두 사위 & 배반크리군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23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변이 적 투성이가 된 것은 신겐의 유산입죠.
    그나마 호우죠우씨라는 북(카게카츠가 아닌 카게토라)와 동의 위협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그 놈의 돈이 뭔지... 정세가 카츠요리의 능력범위(카츠요리는 나름 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를 넘어섰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뭐...바이세츠 같은 경우, 부친 신겐 조차도 그를 평하길...제대로 일은 안 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라 치면 언제나 술잔치 벌이고 얼버무린다고 할 정도이다 보니. 능력이 안 되면서 태어나면서 가진 권세만을 내세워 카츠요리와는 사이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요시마사도 뭐 신겐 시대에 힘으로 누르고 강제로 인척으로 끌어들인 곳인지라...

    뭐 다 이유는 있다고 봅니다.

  13. 본다충승 2009.05.01 16: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쌍한 카츠요리... 카츠요리도 평가절하된 케이스 겠죠? 신겐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으면 하네요.
    카게무샤에서 카츠요리가 하기와라 켄이치 씨가 맞군요. 무인 토시이에 서 아케치 미츠히데 역 하실때 목소리 톤이 상당히 특이했는데, 카게무샤에서 특이한 톤의 목소리가 나오더라니 역시....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5.09 0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아는 한에서는...

      카츠요리는 나아질 면(...이라기 보다는 재평가는 예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습지요)이 있을지 모르지만 신겐은 워낙 과대평가(뭐 지방 군벌에서는 나름 뛰어났지만요)가 되어 있던 인물이라 떨어지는 것은 있어도 나아지지는 않을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