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히데요시[秀吉]의 그녀에 대한 태도는 이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당신은 특별에서도 특별하니까

 라고 히데요시는 말버릇처럼 말했다. 수 많은 측실을 거느리고 있지만 네네 당신과 그녀들은 다르다. 각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당신이 사랑스럽다는 애정의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한 지위를 지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네는 토요토미 가문의 유일한 정실(正室)이며 토요토미 가문 그 자체였다. 많은 측실들은 법제상 고용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히데요시가 주군(主君)인 것과 마찬가지로 네네 역시 주군이었다. 때문에 '특별에서도 특별하다'는 것이다.

 사실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인 네네의 지위는 어떤 시대의 어느 귀부인(貴婦人)보다 더욱 화려했다.
 
히데요시가 나이다이진[大臣]이 되었을 때[각주:1] 동시에 그녀는 종삼위(從三位)가 되었고, 더욱 지위가 높아져 1587년에는 종이위(從二位)가 되었다. 계속해서 이 해의 9 12, 그녀는 시어머니인 오오만도코로[大政所]와 함께 오오사카[大坂]에서 쿄우()의 쥬라쿠테이[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히데요시의 취향대로 꾸며진 행렬, 행장(行裝)은 과거에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수행하는 여관(女官) 만으로도 500명 이상에 달했을 것이다. 네 명 이상이 메는 화려하게 치장한 가마가 2백정, 두 명이 메는 평범한 가마가 100, 짐을 멘 상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에 따르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경호 무사들은 전부 타는 듯이 붉은 색의 복장을 하고 있어, 그야말로 이 나라 최고 귀부인(貴婦人)의 상경 행렬을 장식하는데 어울렸다.

 더구나 길가에서 남성은 구경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라고 하더라도 구경꾼 속에 섞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유는 그들이 젊은 여관(女官)들의 미모를 보고 저속한 마음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배려 때문이었다. 속으로 품는 마음조차 키타노만도코로에 대해서 불경(不敬)이라고 하였다. 이 행렬은 굉장한 평판을 불러 천하에 선전되었다. 키타노만도코로야 말로 일본국 넘버 원 귀부인이라는 인상을 60여주()에 전해진 것은 히데요시가 연출한 이 행렬의 성공에 의한 것이 컸다.

 다음해인 1588 4 19.
 
즉 키요마사가 히고[肥後] 책봉되기 1개월 전, '토오토미노 요시코[豊臣 吉子]'는 종일위(從一位)로 승진하였다. 이미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위계였다.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의 다세대 주택에서 조악한 결혼식을 올린 옛날을 생각해보면 그녀 자신조차 믿기 힘든 영달(榮達)이었다.

 그러나 제가 저 자신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요

 라고 네네는 항상 시녀들에게 말했다. 그녀의 굉장한 점은 그 영달보다도 오히려 그 영달로 인해 조금도 그 인격이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그녀는 종일위(從一位)가 되었어도 절대 쿄우[京] 말투나 궁중 말씨를 사용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건 듣기 힘들 정도로 빠른 오와리[尾張] 사투리를 썼다. 평소 히데요시에게도 그러했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의 마누라라고 불렸던 아주 옛날 화장도 못하던 맨얼굴일 때랑 조금도 변함이 없어,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도 떠들썩하게 말싸움을 펼쳤으며, 또한 시녀들을 상대로 항상 큰소리로 웃었고, 밤에 이야기라도 할 때에는 옛날 가난한 시대의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말하여 모두를 웃겼다. 또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부인인 오마츠[松]와는 기후 성[岐阜城] 밑의 오다 가문[織田家]의 무사들이 사는 곳에서 이웃사촌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그 당시 담을 사이에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네네의 태도는 오마츠에 대해서도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다시는 없을 분이시다

 고 오마츠는 자주 말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님은 타이코우(太閤)님 이상 일지도 모른다

 오마츠는 예전부터 그 적자(嫡子)인 토시나가[利長], 둘째인 토시마사[利政]에게 말했다.
 
이 오마츠라는 마에다 토시이에의 조강지처 자체가 토시이에의 창업(創業)을 도우며 왔던 만큼 보통의 여성은 아니었다. 토시이에가 죽은 후에는,
 
'
호우슌인[芳春院]'
 
이라는 요염한 법명(法名)으로 불리며[각주:2], 마에다 가문에서는 '비구니 쇼우군[尼将軍]'[각주:3]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의 권세가 있었다.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만 토시이에가 죽은 뒤 그녀는 마에다 가문의 앞날에 대해서 하나하나 네네와 상담하였고, 하나하나 네네의 의향에 따랐다. 그 적자(嫡子) 토시나가에게도,

 모든 것을 키타노만도코로님이 하시는 말씀대로 따르렴

 이라 훈계하였다. 이럴 정도로 네네가 가진 소탈함과 총명함은 그녀의 인기를 만들었고, 그것이 토요토미 다이묘우[大名]들 속에서 은연 중에 정치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네네가 가진 위엄과 덕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네네에 대한 과대할 정도의 애정과 존경이 세상에 투영되어 있었다. 세상의 누구나 히데요시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 중 넘버 원은 키타만도코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보게, 이보게

 하고 히데요시는 쿠게(公家) 말투로 네네를 불렀다. 편지에도 그렇게 썼다.

 이보게 밥을 많이 취하시게

 라는 단지 그렇게만 써서는 성을 지키고 있는 네네에게 보냈다. 밥을 많이 먹고 있는가? 라는 정도의 것만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농담도 잘 하셔
 
라고 그럴 때마다 네네는 생각했다. 그녀는 남다른 정도로 건강하였으며 평소 식욕이 왕성하였고, 그렇지 않아도 살집도 넉넉한데 이 이상 먹는 것에 격려 받는다고 하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만 앙상한 히데요시는 풍만한 여성을 좋아하는 부분도 있었으며, 시대도 그러한 여성을 미인이라고 하였기에 미용 상의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식욕이 어떻든 이러한 히데요시의 극진함이 토요토미 가문에서 그녀의 위치에 한층 더 무게를 실려 준 것은 확실했다. 예를 들면 1587년의 큐우슈우[九州] 공략전에서 히데요시는 오오사카[大坂]에서 수백 리 떨어진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의 진영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오오사카[大坂]의 네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전투 상황이나 큐우슈우(九州)의 정세 등을 알린 후 그 말미에

아니~ 나도 이번 싸움에서는 나이를 먹은 게 느껴지더군. 나도 모르는 새에 흰머리가 많아진 것이 아닌가? 이래서는 하나하나 뽑는 것도 힘들 정도야. 이제는 그쪽과 만나는 것도 창피할 정도네
마치 연인에게 보내는 듯한 내용이었다. 더구나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네네를 기쁘게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리 흰머리가 늘었다고 해도 다른 여자라면 모를까 그쪽이라면 거리낄 것도 없지. 그쪽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이렇게 흰머리가 늘어난 것이니까

 여전히 아부는 천하제일이시군
 
라고 네네는 반은 어처구니 없이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본심은 기쁘지 않을 턱이 없다. 그 증거로 이 편지를,

 모두 보세요. 칸파쿠(関白) 전하의 웃긴 편지를

 라고 말하면서 시녀들에게도 읽게 해 주었다.
 
히데요시의 육체는 이 즈음부터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큐우슈우[九州]에서 개선한 즈음부터 밤에 네네의 침실을 찾아 오는 것이 드물어 졌다. 오더라도,

 여어~ 건강하신가? 오늘도 밥은 취했나? 그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지

 라고 여전히 시끄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더욱더 네네에 대해서 친밀한 태도를 보이기만 할 뿐으로, 그런 주제에 남편으로써의 의무인 침실의 일까지는 기력이 미치질 못했다. 과연…… 히데요시는 늙었다. 먼 큐우슈우의 진중에서 보내왔던 늙음을 한탄한 편지의 내용대로 몸이 쇠약해졌을 것이다. 다른 측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칸파쿠님이 너무 오시질 않사옵니다

 라고 그녀들은 규원(閨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쓸쓸함을 네네에게 호소했다. 네네는 허물없이 그것을 들어 주었다. 그 때문인지 네네는 그런 그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어, 특히 카가노츠보네[加賀ノ局], 산죠우도노[三条殿], 마츠노마루도노[松ノ丸殿]등은 네네를 마치 언니와 같이 따랐다. 이 때문에 그녀들의 친정에서도 네네를 우러르는 곳이 많았다. 카가노츠보네는 마에다 토시이에와 그 부인인 위에서 언급한 오마츠를 양친으로 하는 딸이었으며, 산죠우도노는 카모우 가문[蒲生家] 출신이었고, 마츠노마루도노는 쿄우고쿠 가문[京極家] 출신이었다. 그녀들의 친정은 토요토미 가문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다이묘우(大名)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으며, 그런 가문들이 히데요시의 측실들을 통해서 네네와 엮여, 그것을 연줄로 삼고 있었다. 네네의 강한 정치력은 그녀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는 하여도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토요토미 가문 내의 세력에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가 이 남을 배려하는데 세심했던 남자이기에 여태까지 그랬던 적이 없었지만, 단 한 여성의 침실에만 완전히 빠져 살게 되었다. 아자이 가문[浅井家] 출신으로 어렸을 때의 이름을 챠챠[々], 토요토미 가문에 들어와서 처음엔 니노마루도노[丸殿]라 불리며, 결국에는 요도도노[淀殿]라 불리게 된 여성이었다. 그 미모는 물론이거니와 요도도노의 혈통만큼은 히데요시가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네네는 깨닫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비천한 몸에서 출세를 했기 때문인지 귀한 가문에서 자란 여성에 이상할 정도로 동경을 품고 있었으며, 그것은 지금의 신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아직 낮은 신분이었을 때, 당시의 위치로써는 오다 가문의 하급 무사를 양갓집으로 하고 있는 네네가 그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자의 동경이라는 것은 나이를 먹어도 성장하지 않는 듯하군
 
하고 네네는 오히려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귀족을 좋아한다고 하여도 무가(武家) 귀족 만으로 상급귀족[公卿]이나 친왕(親王)의 딸 등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상급귀족이나 친왕의 딸들을 후궁에 데려오려고 하지도 않는 것은 그런 귀족들을 히데요시가 아직 젊었을 적에는 본 적도 없었기에, 현실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의 성적인 동경은 젊은 시절 눈으로 스친 범위 안을 한계로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히데요시의 가까운 무가 귀족은 오다 가문[織田家]이었다. 그 즈음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지금의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노부나가[信長]의 일족만이 최고의 귀족이었으며, 그 피를 잇는 여성이야 말로 히데요시에게는 공주님이라 불리기에 어울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 즈음 오다 가문에는 오이치[市]라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이 있었다. 미모를 따지면 가까운 지역에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의 용색을 가지고 있어기에, 히데요시도 맘 속으로는 높은 곳의 꽃이라도 쳐다보는 듯이 사모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오이치는 오다 가문에서 북() 오우미[近江]의 다이묘우[大名]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 정세가 변하여 아자이 씨는 오다 가문에 멸망 당하여고, 오이치는 딸들을 데리고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 재혼하였다. 그 카츠이에를 히데요시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에 몰아넣고 멸망시켰을 때 오이치도 자살했다. 남겨진 딸들은 '우다이진[右大臣=오다 노부나가']님의 조카분들 이다'고 하며 소중히 다루고 교육시켰다. 그 세 명의 딸 중 장녀가 요도도노였다. 그녀를 오오사카 성[大坂城] 두 번째 성곽에서 살게 하였기 때문에 '니노마루도노[丸殿]'라 통칭되었는데, 그 즈음에 요도도노가 히데요시를 받아들였는지 어땠는지는 네네에게도 알 수 없었다. 네네가 추측하기에 요도도노가 히데요시를 그 침실에 받아들인 것은 큐우슈우[九州]에서 개선 후인 1588년 가을 즈음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 증거로 이 해 즉 1589 1월 히데요시는 갑자기,

 요도()에 성을 만들겠다

 라고 말을 꺼내 그 건축을 동생인 야마토 다이나곤 히데나가[大和 大納言 秀長]에게 명하였다. 요도는 야마시로[山城]에 있으며, 오오사카[大坂]에서 쿄우[京]에 올라갈 때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거기에 요도도노를 살게 하겠다고 하였다. 측실을 위해서 성 하나를 세운 예는 지금까지 히데요시에게 없었던 것으로, 그만큼 이 여성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굉장한 일이군요

 라고 네네는 그것을 들었을 때,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로 히데요시에게 말했다. 히데요시는 목을 움츠리며 급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들었는가?”

 마치 남일을 딴사람이 들을까 두렵다는 듯한 그런 말투였지만, 얼굴만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이 애교로 가득 찬, 악의를 완전히 없애버린 웃는 얼굴에 네네는 몇 번이나 속아 넘어왔던 것일까? 어쩌면 반평생을 웃는 얼굴에 낚여서 보내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건 주인댁이시다

 라고 히데요시는 힘을 실어 말했다. 보통의 측실이나 여관(女官)들이 아니라 노부나가의 조카인 이상 주인댁이다. 주인댁이기 때문에 각별한 대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의리라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주인댁인 것입니까?”

 노부나가에게서 보면 여동생의 딸이었다. 여동생의 딸까지 주인댁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지~ 아니지~ 주인댁이다

 히데요시는 근거를 들었다. 1583 4 23.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에서의 옛 동료 시바타 카츠이에를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로 몰아넣었을 때, 카츠이에는 결국 싸움을 포기하고 자살하겠다는 뜻을 히데요시에게 통고하였다. 그때 토미나가 신로쿠로우[富永 新六郎]라는 가신을 히데요시의 진영에 파견하여,

 여기 세 명의 딸이 있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들이다. 귀하도 알고 있겠지만 3명은 돌아가신 주군과 같은 피를 잇고 있으니, 귀하에게 있어서도 주군의 혈통에 해당한다. 필시 귀하라면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귀하의 진영으로 보낸다.”

 고 입으로 전해왔다. 히데요시는 당연히 카츠이에의 희망을 받아들였다. 이 때 [주군의 혈통]이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요도도노와 두 명의 여동생이 히데요시 주군의 혈통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서 이미 공시되었고 공인되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네네에게 그 전말을 이야기하며, 그에 따라 요도도노에게 행하는 각별한 대우에 이유를 붙이고자 하였다.

 그건 당연히...

 죽은 노부나가인 것이었다.

 알겠습니다만

 하고 네네는 말하며 턱을 끌어서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이상 이 호색한을 몰아넣어보았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힘이 빠져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의 핑계로는 그녀의 이성도 감정도 납득은 할 수 없었다.
 
주군의 혈통이기에, 즉 그렇기에 밤마다 그 여성의 침실에서만 보내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라는 점을 언제나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산죠우도노나 카가노츠보네도 그 점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들은 네네의 방에 놀러 올 때마다 자란 환경에 비하면 이외라 할 정도로 노골적이게 험담을 하였다. 물론 히데요시에 대한 험담이 아니었다. 요도도노에 대해서였다.
 
요도도노는 자신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다거나, 콧대가 높아서 히데요시님에게 대해서도 거만하다거나, 요도도노 소속 시녀(侍女)의 수는 밥짓는 여자까지 포함하면 500명은 될 거라는 거나, 또 요도도노는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卿局]나 쇼우에이니() , 예전 아자이 가문을 섬겼던 여자 낭인(浪人)들을 너무 모으고 계십니다 등, 그러 종류의 험담이었다.

 저런~저런~”

 네네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안색도 바꾸지 않고 끈기 있게 잘 들어주고 있었다.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녀들에게 동조했다가는 토요토미 가문의 정실이라는 자신의 입장과 체면을 손상시킬 것이다.

 우선은 화를 푸시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지켜 보아 주세요.”

 라고 네네는 때때로 그녀들을, 그녀들의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달랠 수 밖에 없었다.
  1. 1583년. 정이위(正二位). [본문으로]
  2. 방춘(호우슌=芳春)에는 ‘아름다운 여성의 젊은 시절’이란 뜻이 있다.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막부[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죽자 비구니가 된 그의 부인 호우죠우 마사코[北条 政子]가 아직 어린 쇼우군[将軍]의 정무를 대행했던 예가 있어, 이후 성주 혹은 다이묘우[大名]였던 남편이 죽고 후계자가 어려 미망인이 권세를 가졌을 때 ‘비구니 쇼우군’이라 일컬어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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