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
하지만 이 이에야스의 말에는 다분히 회상이기에 생기는 허술함이 있었다. 현실의 세키가하라[関ヶ原] 전장(戰場)에서 이에야스는 거의 절망적이었던 순간을 몇 번이나 맛보았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 전투의 승패를 사전에 결정짓고자 하였다. 적인 서군에 참가한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 대해서 여러 방법으로 공작하고 회유(懷柔)하여 내응(內應)을 약속시켰다. 서군의 총수(總帥)인 모우리 씨[毛利氏]에게까지 공작하여 그 부하 장수인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 가로(家老)인 후쿠바라 히로토시[福原 広俊] 등과 내응 약속을 하여 전장에서 절대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며, 총도 쏘지 않겠다는 밀약까지 맺었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으로 향하고자 할 때는 이미 마음 속으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도중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밀사(密使)가 내응을 신청해 왔을 때도,
“애송이 따위의 상대할 필요도 없다”
고 말하며 두 번이나 묵살하였을 정도였다.
동과 서의 싸움은 이에야스의 부대가 틀어박혀있던 후시미 성[伏見城]을 서군이 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방면 서군 4만의 총대장으로 히데이에[秀家]가 선택되었다.
관위(官位)가 높은 것도 있으며 병력이 많다는 점에서 당연할 것이다. 예전 아직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쓰던 히데요시[秀吉]가 히데이에의 망부(亡父) 나오이에[直家]의 임종 자리에서 약속했던 것과 같이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는 물론 일본국(日本国)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장수로 길러내 보이겠습니다'라는 말이 – 히데요시가 죽은 후 우연이겠지만 실현되었다.
“그렇군. 내가 지휘를 하는 것인가?”
하고 히데이에는 순진하게 기뻐했다. 이 복잡한 정세 속에서 이 남자만은 아무런 정치적 고려도 하지 않고, 고(故) 타이코우[太閤]의 남겨진 아이를 위해서라는 소년과 같은 정의감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거병의 주모자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도 - 동료인 오봉행들 조차 뒤로는 어떻게 움직일지 수상쩍은 시기에 – 이 비젠 츄우나곤[備前 中納言]만은 신뢰하여,
“비젠 츄우나곤만은 안심할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즉 정치, 정세(政勢)가 아군에 유리하다는 듯이 착색(着色)하거나, 전쟁이 끝난 후 이익을 약속할 필요도 없이 솔직히 부탁하면 솔직히 받아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구나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은 병사수도 압도적으로 많았고 또한 그 휘하의 비젠 병사들은 용감하였으며, 히데이에는 겁(怯)을 미워하고 용(勇)을 사랑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 1만 7천의 병사 수야 말로 서군의 주력이 될 것이다.
히데이에는 70명의 장수와 4만의 군세를 배치하여 공성전(攻城戰)을 개시해서는 곧바로 후시미 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히데이에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병사들에게 휴식을 준 후 곧이어 이세[伊勢]를 거쳐 미노[美濃] 오오가키[大垣]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밤의 어둠을 타고 빗속에서 행군을 하여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예정 전장에 도착하여, 그 분지의 서쪽에 융기하는 통칭 텐마야마[天満山] 산의 허리에 진지를 둘 곳을 고른 후 병사를 5단으로 배치하였다. 히데이에의 본진에는 부대 표식[大馬印]으로 '붉은색의 후키누키[赤池吹貫]'가 세워졌고, 산꼭대기에서 산허리에 걸쳐 '흰 바탕에 큰북의 원[太鼓の丸の紋]'을 그린 우키타 가문의 깃발이 내걸렸다. 밤이 걷힘과 동시에 포진이 완료되었다.
세키가하라 포진도. 하늘색이 서군(西軍), 붉은 색이 동군(東軍). 노란색은 처음엔 서군이었다가 나중에 동군으로 배신하는 부대이다.(누르면 커집니다.)
이에야스는 미노[美濃] 아카사카[赤坂]를 출발하여 서군의 뒤를 따라서 야간행군을 계속하여 밤이 물러감과 동시에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여 8만의 병사를 전개시켰다.
하지만 날씨가 개전(開戰)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개가 짙어 적과 아군의 식별이 불가능하여 쌍방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걷히기 시작한 것은 오전 8시를 지나서부터였다. 같은 시각에 최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싸움은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대 6천이 서군을 향해 돌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을 정면으로 받은 것이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대였다. 곧바로 격전으로 이어졌고 후쿠시마 부대는 선봉이 무너져 궤주(潰走). 결국에는 몇 백 미터 정도 퇴각하게 되었다. 마사노리는 크게 화를 내며 은(銀)으로 된 부대 표식을 세차게 흔들며 몸소 진두로 달려나가 패잔병들을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우키타 군의 세찬 공격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동군은 이 패색에 낭패했다. 곧바로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부대, 츠츠이 사다츠구[筒井 定次]의 부대가 달려들어 우키타 부대의 측면을 노리려 했지만 곧바로 반격당하여 후쿠시마 부대와 함께 퇴각했다.
히데이에는 산허리의 높은 곳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서 이 전황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군사들을 움직이는 것은 아카시 카몬 타케노리[明石 掃部 全登]가 맡았으며, 5단으로 나뉘어져 배치된 부대는 노부하라 토사[延原 土佐], 우키타 타로우자에몬[浮田 太郎左衛門], 오사후네 키치베이[長船 吉兵衛],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 1등이 각각 지휘하였다. 이 용감하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대장의 휘하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용감함으로 싸웠다.
고독한 싸움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왜냐하면 이에야스의 사전 공작에 의해 서군의 7할은 깃발을 움직이지 않았고, 총을 쏘지 않았으며, 진영을 땅바닥에 붙인 채였다. 나머지 3할만이 싸우고 있었다.
3할의 주력은 우키타 부대이며, 거기에 더해 이시다 미츠나리 부대,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라는 2부대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7할은 잠이라도 자는 듯이 방관하고 있었다. 이 서군 7할의 방관을 보고 이에야스는 당초 이겼다고 생각했다.
“싸우고 있는 적은 어느 깃발과 어느 깃발인가?”
라며 안개 속으로 척후를 보내어 확인해 보자 위와 같았다. 이에야스가 보기에 미츠나리에게는 무략(武略)이 없으며, 히데이에는 애송이가 지나지 않았다.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다소 뛰어나다고는 하여도 영지(領地)가 작았기 때문에 그 지휘하의 병사는 소수였으며, 거기에 요시츠구 자신은 갑옷도 입지 못할 정도로 병이 진행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개가 걷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황은 이에야스의 낙관론을 차츰 배신하기 시작했다. 서군의 3할이 사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군은 전선(全線)에 걸쳐서 붕괴가 시작되어 이에야스의 지휘조차 거의 전해지지 않았고, 각 부대도 연계가 끊어져 각각 싸우고 있는 형세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그 생애에서 자기 지휘하의 아군이 이렇게까지 지리멸렬한 상태로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과 창의 한가운데서 병사들을 질타하고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몇 번인가 무너져 후퇴하면서도 그 풍부한 실전 경험으로,
‘이길 수 있다’
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대를 마구 무너뜨리고 있는 정면의 우키타 부대가 – 그 위세에 비해서는 돌격이 계속해서 이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후쿠시마 부대가 4~5백 미터나 퇴각하면 그들은 더 이상 병사들을 돌격시키지 않고 멈추게 하여, 분지의 중앙까지 쫓아가는 것을 두려워해 몇 번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기묘한 적군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마사노리는 알게 되었다. 우키타 부대에는 아군이 없었다. 서군의 여러 장수들은 주변의 산꼭대기, 산허리, 길 옆에 포진하고 있었지만 우키타 부대의 공격에 가세하려고 하지 않았다.
“적은 한 겹이다! 후속 부대가 없다! 두려워 마라!”
마사노리가 포효하며 어벙대고 있던 사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이 적군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부터였다. 마사노리가 보건대 우키타 부대에 아무리 위세가 있다고 하여도 결국엔 피로해 질 것이며, 결국에는 약해질 때가 올 것이다.
마사노리는 무너져 있던 군사를 재정비해서는 역습에 나섰다. 이 때문에 사방의 진지에서 보고 있으면, 후쿠시마 가문의 산길 모양의 깃발과 우키타 가문의 큰북 깃발이 서로 검은 연기를 피우는 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고 때로는 서로 뒤엉켜, 때로는 한쪽이 쫓고, 때로는 한쪽이 쫓기거나 하여 어느 쪽이 이길지 알 수가 없었다. 오전 11시 즈음에는 이시다 진지 정면의 동군도 격퇴당하였고, 오오타니 진영도 분지 중앙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에 비해, 밀린 동군은 분지의 중앙부에 뭉쳐서 헛되이 인마(人馬)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오가 되어서 역전되었다.
마츠오야마[松尾山] 산꼭대기에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반하여, 1만5천의 병사를 휘몰아 산허리에 진지를 갖추고 있던 서군 오오타니 부대를 치고 길게 늘어진 대형(隊型)의 옆구리를 찔러 그들을 거의 전멸시켰기 때문이었다. 요시츠구는 배를 갈랐다. 이 때문에 우키타 부대는 동군의 대부분에게 포위당하여 고립되었다.
히데이에에게는 이 순간에 일어난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건 킨고[金吾=히데아키]인가!? 킨고 일리가 없다!”
처음 외친 것은 이 말이었다. 히데이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킨고 히데아키 거동의 수상쩍음에 대해서는 싸움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츠나리 등 서군 지휘부가 계속 의혹을 가지고 있었지만, 히데이에는 어디까지나 낙관(樂觀)하여,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고 미츠나리에게도 말하였고, 요시츠구에게도 말했었다. 이 남자답게 그 이유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의 양자이다”
그 뿐이었다.
“그는 타이코우에게 큰 은혜를 입고 있다. 나도 양자라는 입장에서 킨고의 마음을 추측하건대, 설사 모두가 히데요리[秀頼]님을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랑 내기해도 좋다니까. 킨고는 절대 배반하지 않을 걸”
이라고. 그렇게만 히데이에는 말하였고, 더구나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정말 극단적인 낙관론자이시군”
라고 미츠나리는 뒤에서 히데이에를 그렇게 평했으며, 실제로 히데이에와는 거병 이래 그런 쪽의 복잡한 정세에 관한 내용을 거의 상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데이에는 세상의 기괴함을, 지금 이 전쟁터를 급변시키고 있는 이변에서 알게 되었다. 이 히데이에라는 시를 좋아하는 – 세상이 태평 성대한 때였다면 2류 정도의 시인이 되어 있었을 것 같은 이 인물은 자신의 우둔한 정치 감각을 깨닫는 것보다도 오히려 상대의 부도덕(不道德)에 분노했다.
“킨고를 용서할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용서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미 아래의 우키타 군세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 이제는 진형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건만, 히데이에의 관심사는 히데아키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으며 오히려 그리하다 죽으려고 결심하였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서는,
“말을 끌고 와라”
라고 명령했다. 지금부터 말을 달려 코바야카와 진영으로 돌격하여 킨고를 찾아서는 그와 서로 찔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용서치 않으리”
라고 히데이에는 말하며, 등자에 발을 걸어서는 말 위에 올랐다. 아카시 카몬이 말 끈을 잡았다.
“옳지 않습니다”
카몬은 패전의 관례로써 주장(主將)인 히데이에를 이 전쟁터에서 도망가게 하고자 하고 있었다. 북동쪽을 보자 이미 미츠나리의 사사오야마[笹尾山] 진지[陣地]도 무너져, 방금 전까지 산꼭대기에서 휘날리고 있던 [大一大万大吉] 2의 깃발이 없어진 것을 보면 미츠나리도 도망쳤을 것이다. 그것을 카몬이 말하자,
“지부쇼우[冶部少]는 지부쇼우, 나는 나”
라고 이 젊은 시인은 말했다. 히데이에가 말하기를,
“지부쇼우는 어쩌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이 일전을 일으켰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의지로 이 장소에 와, 움직이고 있다. 다른 것은 모른다. 단지 고(故) 타이코우 전하의 유언을 받들어 히데요리님의 세상을 지키고자 있는 힘껏 싸웠다. 그것을 저 부도덕한 킨고 때문에 졌다. 킨고를 이 칼로 죽이는 것 이외에 내 의지를 관철할 길은 없다.”
고 히데이에는 계속 말했지만 카몬은 듣지도 않고 재빨리 깃발을 말게 하고 부대 표식을 꺾고선 히데이에의 친위대들에게 그를 둘러싸고 도망치라고 명령하였다. 히데이에는 인마(人馬)의 흐름에 휩싸이듯이 서쪽으로 도망쳤다.
히데이에는 지고 우키타 가문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가문의 번병(藩屛)으로 세웠던 양자들 중에 이 남자만이 양아비의 희망에 응했다.
*********************************************************************************************************
그 후의 히데이에의 생애는 다른 이야기꺼리가 된다.
그는 이후 사츠마[薩摩]로 달아나 은밀히 시마즈 씨[島津氏]의 비호(庇護)를 받았다. 후에 시마즈 씨가 막부(幕府)에 항복한 뒤 그 존재가 들어났지만, 시마즈 가문과 거기에 그의 부인의 친정인 마에다 가문[前田家]이 함께 막부에 탄원하여 조명(助命)을 빌었기 때문에 사형은 면하여 일단 스루가[駿河]로 보내져 쿠노우잔[久能山] 산에 유폐되었다. 이에야스에게는,
‘죽일 것 까지는 없다’
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후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등의 주모자들은 처형당하여, 그 목은 쿄우토[京都]의 강변에 효수(梟首)되었지만, 히데이에는 원래부터 그들에게 정객(政客)으로 대우받지 않았었고, 단지 의협심과 전투력을 인정받아 참가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세키가하라의 전쟁터에서 저 정도로 활약하여 동군을 몇 번이나 위기로 몰아 넣었건만, 그러나 일이 지나고 보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어서, 그 존재 자체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이에야스는 판단했다.
후에 쿠노우잔에서도 옮겨져, 에도[江戸] 남쪽 120리(里) 3 떨어진 해상에 있는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되었다. 히데이에는 이 섬에서 40년을 살았다. 섬에서는 언제나 궁핍하여, 평소 ‘뜸’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아 그것을 먹을 것과 바꿔가며 간신히 덧없는 목숨을 이어갔다. 평소,
“한번이라도 쌀밥을 먹고 죽고 싶다”
가 입버릇처럼 되었다. 그것이 에도[江戸]에까지 이야기가 퍼져, 어느 해인가 배편으로 몇 가마니의 쌀이 보내져 왔다. 보낸 사람은 그의 옛 신하로 세키가하라에서는 이에야스 측에 섰기 때문에 지금은 에도에서 잘나가고 있는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였다. 옛 주인에 대해서 켕기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히데이에는 1655년 겨울. 84세의 고령으로 죽었다. 그 사이 히데요리도 죽고, 이에야스도 죽어 토쿠가와 쇼우군[将軍]도 이미 4대째인 이에츠나[家綱]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의 패배자이기는 했지만 승리자의 어느 누구보다도, 이 귀양살이를 한 사람은 오래 살았다.
-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수어지교를 맺었다는 이에야스의 모신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둘째 아들.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유모의 아들을 죽이고 토쿠가와 가문에서 나와 우키나 가문[宇喜多家]에서 2만석을 하사받고 가로를 하고 있었다. 후에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양자가 되기도 하였으나 나중엔 카가 마에다 가문[加賀 前田家]으로 이적하여 가로(家老)가 되었다. [본문으로]
- 이시다 미츠나리의 부대표식에 쓰여 있던 말.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해서,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 같다고 함. [본문으로]
- 약 480km. [본문으로]
'일본서적 번역 > 豊臣家의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2- (2) | 2008.03.08 |
---|---|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1- (8) | 2008.03.03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5- (4) | 2008.02.16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4- (6) | 2008.02.09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3- (6) | 2008.02.03 |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