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교우부(刑部)는 두려움에 참지 못하고 성으로 가, 대로(大老) 집무실에서
히데이에를 배알(拜謁)하였다. 집무실 앞에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 있는
연못가에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싸리가 피어있었다.
“저것은 말이지
교우부. 알고 있나? 저건 미야기노[宮城野]의 싸리다”
라고 히데이에는 마당으로 시선을 향한 채 말하였다. 히데이에는 싸리를 좋아하여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저택 안에도, 후시미[伏見]에 있는 저택 안에 여러가지 싸리를 키우게 하고 있었다. ‘미야기노[宮城野]’는 센다이[仙台]의 동쪽 교외에서 해안까지의 들판으로 가을에는 싸리, 도라지, 마타리가 흐드러지게 피며, 방울벌레나 귀뚜라미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곳이기에 옛날부터 와카[和歌]의 명소(名所)로 알려져 있다. 이 싸리는 오우슈우[奥州]의 다테 마사무네[伊達 正宗]가 히데요시에게 받친 것이라고 한다. 히데이에는 아쉽게도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에 참가하질 못하였기에 이 들판을 본 적이 없었지만, 이 들판을 상상하며 시를 만든 적도 있으며 코카[古歌]도 암송하곤 하였다. 여전히 마당으로 시선을 향한 채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さまざまに心ぞとどむ宮城野の花のいろいろ虫の声々
“황송하옵니다만……”
하고 고개를
들어 가문 내 소동(騷動)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교우부는 히데이에에게 자극을 줄 필요를 느껴,
“요전에 병으로
돌아가신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님은 병때문이 아닙니다. 독살(毒殺) 당한 것입니다. 독을 탄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시 히데이에는
놀랐다. 누가 독을 탔냐고 묻자, 본거지의 필두 가로(筆頭 家老)인 우키타 사쿄우노스케[宇喜多
左京亮 – 히데이에의 숙부 타다이에[忠家]의 아들. 후에 사카자키 데와노카미 나오모리[坂崎 出羽守 直盛]]의 소행이라고 교우부는 말했다. 과연…… 사쿄우노스케의 성격을 보면 뭐든 화를 잘 내며, 생각이 없고
더구나 냉혹할 때도 있기에 독을 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본거지에 있으면서 그런 것이 가능할까? 거기에 무엇보다 증거가 없었다.
“교우부. 경솔한 말을 하지 말거라”
“아닙니다. 경솔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사쿄우노스케 무리들이 전투 준비를
마치고 산요우 가도[山陽街道]를
이용하여 소리 높이며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사쿄우노스케 무리라는 것은, 사쿄우노스케를 필두로 토가와 히고노카미[戸川 肥後守], 오카 에치젠노카미[岡 越前守 – 전편에 부산에서 죽었다는 부젠노카미의 아들),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와 하나부사 스케노효우에[花房 助兵衛]를 지칭하며, 스케노효우에를 제외하곤 다들 식록(食祿)이 5만석 이상인 거물들이었다. 만약 소동으로 발전한다면, 카미가타[上方]에 주재(駐在)하는 가신단과 본거지에 머물던 가신단 들간의 전투라는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사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히데이에는
낙관하였다.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과 잘 이야기 해보게”
라고 말하였다. 아카시 카몬은 이름을 타케노리[全登]라 하며 전투의 명인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로, 오사후네가 죽은 다음부터 카미가타 파(派)의
필두 가로를 맡고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사변(事變)이 되었다.
아카시 카몬이
중재에 나섰지만 쌍방을 설득시키지 못하였고, 우선 구(舊) 오사후네파는 후시미[伏見] 저택에서 농성. 본거지파는 오오사카[大坂]로 진출해서 소규모 시가전을 펼쳐 비젠지마[備前島]의 우키타 가문의 오오사카 저택을 점령. 요도가와[淀川]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오사후네파와 본거지파간에 무장대치 상태가 되었다.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히데요시 생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보다가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히데이에와는 친밀한 사이인 오오타니 교우부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였다. 요시츠구는,
“실례가 안 된다면
중재에 나서고 싶은데”
라고 히데이에에게
말하였다. 히데이에는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여, 창피했지만 자기
가문 내분 처리를 다른 다이묘우[大名]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말 잘했네. 꼭 좀 부탁하네”
라며 요시츠구에게
부탁하였다. 실은 마음속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신뢰할 수 있는 남자였다.
츠루가[敦賀] 5만석의
작은 다이묘우[大名]이기는 했지만,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당시부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행정을 담당하며 그 수완을 높게 평가 받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가 곁에
두고 키웠다. 히데요시의 바램대로 승진을 거듭하였고 시원스런 성격과 뛰어난 무략(武略)도 있었기에, 히데요시가 어렸을 때부터 키운 다이묘우[大名]들 중에서도 출중한 편에 속한다고 평가 받았다.
한센병을 앓아 이미
얼굴이 무너져 항상 얼굴을 하얀 천으로 감싸고 양 눈만을 내 놓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토요토미 가문의 파벌에 있어서는 출신이나 직무상의 교유관계로 인하여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연이 깊었다. 하지만 미츠나리처럼 파벌 활동은 하지 않고, 초연(超然)하였다.
‘중재하기 위해서는
에도 나이후[江戸内府] 1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
고 생각하였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필두 대로(大老)이고 히데요리를
대리하여 정무를 맡고 있으며, 후시미[伏見]에서 정사(政事)를 살피고
있었다. 그 이에야스의 말이라고 하면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가로들도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 정도되는 인물이
일개 다이묘우의 가신단 다툼에 개입하기에는 신분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요시츠구는 이에야스 휘하의 다이묘우를 꼬시고자 하였다. 토쿠가와 휘하의 다이묘우라고 하면 첫손에 꼽히는 것이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였다. 야스마사는 이에야스가 아직 미카와[三河]에
있던 시대 때부터의 후다이[譜代]로, 칸토우[関東]에 있는 이에야스의 영지 250만석 중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에 10만석을 하사 받고 있었다. 관위(官位)는 종오위하(從五位下) 시키부다유우[式部大輔]였다.
곧바로 야스마사를
방문하였다.
“졸자(拙者)가 도움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라며 찬성하였다. 그 후 함께 분주히 뛰어다녔다. 쌍방의 대표를 후시미[伏見]에 있는 사카키바라 저택으로 부르거나 해서 교섭에 임하였지만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시츠구는 포기하지 않았다. 요시츠구
에게 있어서는 '히데요리 공[秀頼公]의 천하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디려는 이 때에' 이러한 소동이 나중에 대란(大亂)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이 둘이 함께 힘쓰고 있다는 소문이 이에야스의 귀에 들어갔다.
“이외로군. 우리 집의 코헤이타[小平太 = 야스마사의
통칭]까지 도와주고 있다는 것인가?”
이에야스는 떨떠름했다.
이 남자는 난(亂)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동이 천하 대란으로 이어졌을 때야말로,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가만둘 수 없다'는 명목으로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동원하여 그 한 쪽을 토벌하고, 그 토벌군의 기세로 막부(幕府)를 열어버린다 – 거나, 아니면 우키타 가문의 자멸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보건대 장래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일 것이다. 미츠나리는
기껏해야 20만석 정도의 다이묘우이기 때문에 자신의 편에 서줄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꼬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필시 주된 전력(戰力)으로 우키타 히데이에를
꼬실 것이다. 히데이에는 히데요리를 위해서라면 용감히 참여할 것임에 틀림없다. 어떤 일이 있건 이에야스에게는 적이 될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의
가문이 자멸하려 하고 있는 것은 이에야스에게는 만족할 만한 일이였다. 그렇기에 그것을 일부러 중재하려 하는 바보도 아니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우직할 정도의 기질을 가진 소박한 사나이로 전투를 경험한 횟수는 많았지만, 그러나 천하의 정치에 관여하거나 미묘한 정세의 움직임을 살피는 듯한 능력은 전혀 없었다.
이에야스로서는 지금같은 경우 야스마사를 훈계(訓戒)해야만 했다. 그러나 훈계하는 이상 이에야스는 자신의 은밀한 의도나 정략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지만, 지금은 그것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이
때 주위의 부하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이외로군. 우리 집의~'라고 말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코헤이타 말이다. 생각해 봐라. 이미 시치노스케[七之助]가 올라와 있지 않은가?”
시치노스케라는
것은 히라이와 카즈에노카미 치카요시[平岩 主計頭 親吉]를
말하며, 이에야스 휘하 다이묘우 중 한 사람으로서 코우즈케 우마야바시 성[厩橋城]에 3만 3천석을 영유(領有)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렇게 칸토우[関東]의 휘하 다이묘우를 교대로 후시미[伏見]로 올라오게 하고 있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이미 후시미 주재(駐在) 기간이 지나 있어, 히라이와와
교대하고 어서 귀국해야만 하는데 우키타 가문 내분 중재로
바빠 그럴 기색조차 없었다.
“정말 좆병진에도
정도가 있다. 저건 필시 사례금(謝禮金) 때문일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중재가 성립되면 우키타 가문에서
사례로 돈이 나온다. 이에야스는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이에야스도 야스마사를 그런 남자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이럴 경우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이에야스의 말은 곧바로 야스마사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야스마사는 크게 화를 내며 곧바로 칸토우[関東]의 본거지로 돌아갈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에야스는 그걸로
족했다. 이에야스는 태어날 때부터 정략가(政略家)인지, 자신의 부하를 움직일 때도 항상 이렇게 속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았고, 거의 버릇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역시 야스마사는
화를 내었다.
“날 그런 놈으로
생각하고 계신 건가!!”
라고 친한 동료를
붙잡고는 이에야스에 대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고, 그 뒤 이에야스가 기대하던 대로 곧바로 부하들을
이끌고 칸토우로 돌아가 버렸다.
야스마사가 일을
내팽개쳤기 교섭이 부서졌다. 더 이상 요시츠구 혼자서는 완고한 비젠[備前] 사람들을
달래며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결국 그도 손을 떼었다.
히데이에는 사태의
정면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오오사카 비젠시마 저택에 농성 중인 우키타 사쿄우노스케의 무리들은 후시미로
올라와서는 히데이에에게 강하게 요구했다.
“우리에게 나카무라
교우부를 건네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사쿄우노스케의 말투만은 공손하였지만, 태도는 거만하였고 이렇게 된
이상 주군이라고 하여도 칼을 들고 응수할 수도 있다는 기세였다. 후에 이 인물은 '사카자키 데와노카미'라 이름을 바꾸고 이에야스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되는데 전설의 '센히메(千姫) 소동' 2뿐만
아니라, 여러 번 자기의 뜻대로만 하기 위해 소동을 일으켜 결국에는 자멸한다. 말하자면 성격적으로 '전문 소동꾼'이기에, 지금 같은 경우에 히데이에에게 조금 정치력이 있다고 하여도 부드럽게 처리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히데이에는 화를 내었다.
“교우부도 내
부하이다. 그를 버리고 너에게 건넨다면 가문 내에서 내 면목이
서질 않는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며 히데이에도
역시 눈에 핏발을 세우며 이 미친 사람 같은 가로를 달래려고 하였지만, 사쿄우노스케는 흥분만 할 뿐
손댈 수가 없을 정도였다. 후시미[伏見]로 왔을 때부터 이 미친 듯이 시끄러운 인간은 외모부터 특이하게 하고 나타났다.
머리를 빡빡 밀고서는,
“우리의 바램이
통할 때까지 머리를 기르지 않겠다!”
며 그것을 자기들
무리에게도 강요하였다.
다음 날도 사쿄우노스케는
왔다. 하지만 이 날 히데이에는 기분이 좋았다. 소동의 원인인 나카무라 교우부를 타일러 돈을 주어서는 지난 밤에 은밀히 카가[加賀]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교우부는 어딘가로
쫓아보냈다”
고 히데이에는
말하였다. 사쿄우노스케는 의심했다.
“거짓말이죠?”
라며 빤히 쳐다보았다. 히데이에는 그 건방진 태도에 화가 날뻔했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사쿄우노스케는 우키타 가문 10명의 가로 중 7명을 자신의 무리에 끌어들여 이끌고 있는 이상, 잘못하면 가문이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이렇게 참고 있는 것만이 히데이에가 가진 쪼그만 정치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이 집을 자네 발로 직접 찾아 다니시게. 그런데 만약 찾아도 교우부가 없다면 자네의 그 태도는 가만
두지 않겠네”
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 날은 어쩔 수 없이 사쿄우노스케 들은 물러나, 오오사카의 비젠시마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쿄우노스케와 내통하고 있던
자가 있어, 교우부에게 돈까지 쥐어주며 보냈다는 것을 알렸다. 사쿄우노스케는
크게 화를 내며,
“메야! 주군이 그렇게까지 교우부를 두둔하신다면야 주군은 적이다!”
라고 말하며, 비젠시마 저택의 요소요소에 전루(戰樓)를 세우고 길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하였으며 밤에는 화톳불을 피워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당연히 이 상태로 놔두면
토요토미 정권의 수도(首都)라고 할 수 있는 오오사카에서 시가전이 벌이질 것이다.
히데요리를 대신하여 정무를 맡고 있던 이에야스도 이대로 놔둘 수는 없게 되어, 결국 몸을
움직여 대로(大老)로서 판결을 내렸다. 원래대로라면 주인에게 대항하려 한 가로들은 당연히 배를 갈라야 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다른 가문으로
보내 근신을 명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 그쪽
심정은 잘 알고 있다. 틈을 보아서 풀어주겠다는 식의 말을, 부하의
입으로 전하게 하였다. 더구나 다른 가문에서 근신 중인 기간 중에 은밀히 여러가지를 보내와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이에야스에게 감사하였고 충성을 맹세했다. 벌을 받은 것은
우키타 사쿄우노스케, 토가와 히고노카미, 하나부사 시마노카미, 하나부사 스케노효우에. 이들은 후에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전부 이에야스 쪽에 붙었고, 사쿄우노스케와
히고노카미는 다이묘우[大名]가 되었으며, 시마노카미는 6000석의 상급 하타모토[旗本], 스케노효우에도 이에야스를 직접 모시는 자리에 앉게 된다.
그 이상으로, 이 처리는 우키타 가문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떠났기 때문에 그들의 부하들도 떠나, 이
때문에 우키타 가문의 동원 병력은 30% 정도 저하되었다.
“지부쇼우유우[冶部少輔=이시다 미츠나리]가
왜 가만히 있었는지……”
라고 이에야스는
나중에 이 사건을 떠올리며 술회하였다. 자기가 미츠나리였다면 히데이에에게 조언을 하여 우키타 가문의 내분을 어떻게든 조용히 시키고, 어쨌든 저렇게 죄인이 나오지 않게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우키타 가문의 머릿수가 적어진 결과 전쟁터에서의 움직임이
그만큼 둔해진 것이었는데, 미츠나리는 그때 거기까지 내다보질 못했다.
다른 가문의 작은 소란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다. 그런 것을 보아도 미츠나리는 원래부터 내 적이 될만한 인물은 아니다. 무략(武略)이 없다……고.
-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에도[江戸]는 이에야스의 본거지가 있던 곳. 나이후[内府]는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식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센히메는 이에야스의 손녀이며,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부인이다. 오오사카 성이 함락될 때, 이에야스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 '누가 그녀를 구해올 자는 없는가? 바라는 것은 모두 들어 주겠다' 고 하여 사카자키(우키타 사쿄우노스케)가 이에 나섰다. 그는 무너지는 대들보로 인하여 얼굴에 화상을 입으면서 구했고, 구한 뒤 자신의 마누라로 삼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이미 얼굴이 화상으로 인하여 보기 흉하였기에, 센히메는 거절하고, 혼다 타다가츠의 손자이며 미남으로 유명한 혼다 타다토키[本多 忠刻]에게 시집가게 된다. 이에 분노한 사카자키는 시집을 가는 행렬의 가마를 탈취하려 하였지만, 미리 적발되어 1만명의 병사들이 저택을 포위하자 자살했다고 한다......그러나 실은 센히메는 토요토미 측에서 이에야스로 보내졌으며, 중간에 호위를 맡은 것이 사카자키였다고 한다. 시집 행렬 가마 탈취는, 이에야스가 센히메를 쿄우토[京都]의 쿠게[公家] 가문으로 시집 보내는 중매를 사카자키에게 의뢰하여 실행 단계에 이르렀을 때, 센히메가 혼다 타다토키에게 시집가는 것을 알고, 막부가 자기을 무시했다는 것과 상대편 쿠게[公家]에 대한 면목을 잃어 탈취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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