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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에 들어와서,

 "타이코우(太閤), 타계(他界)하시다"

 라는 경천동지할 소식이 성에서 새어 나와 그걸 들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퍼트려 제후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소문에 성 밑에 있던 저택마다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뛰어다니며 소식을 전하는 사자(使者)들로 온 거리가 소란스러웠지만, 정작 히데요시는 아직 혼마루[本丸]의 깊숙한 곳에 살아있었다. 진상을 말하자면 극도의 쇠약에 때마침 발작이 더해져 침상에서 두 시간 정도 기절하여 인사불성이 된 것이 죽음의 오보(誤報)가 되었다. 그 뒤 다소 기력은 회복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제 자신의 생명에 끝이 왔음을 각오할 수 밖에 없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토요토미[豊臣] 정권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운영 체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기까지 히데요시 정권에는 운영 상의 조직 같은 것 없이, 히데요시 자신이 독재(獨裁)하며 그 수족으로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등의 비서관(秘書官)이 그때그때마다 명령을 행정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바꾸어 그 비서관 다섯 명을 토요토미 가[豊臣家]의 행정관(行政官)으로 삼아 '오봉행(五奉行)'[각주:1]이라 칭했다.

 그 상부조직(上部組織)으로 다섯 명의 의정(議定官)을 두었다. '오대로(五大老=고다이로우(고타이로우))라 일컬어졌다. 대로 필두(筆頭)나이다이진[大臣]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이며, 히데요리[頼] 보좌의 수상(首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수상(副首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차석(次席) 대로인 다이나곤[大納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이다. 이어서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이다. 이 다섯 명에게 히데요리를 보좌함에 있어서 최고의 발언권을 가지게 하였다. 물론 석고(石高), 관위(官位)를 보아도 그들은 여러 다이묘우[大名] 중에서도 특출났다. 그러나 그 능력, 성격, 신망(信望)이라는 점에서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세간 일반의 평가로 말하자면, 카게카츠는 우직(愚直)했으며, 테루모토는 너무 범용(凡庸)했고 또한 우키타 히데이에는 단순한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그 새로운 조직을 병상에서 구술(口述)하였다.

 히데요시의 말을 받고 있던 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이시다 미츠나리 이하 다섯 명의 행정관들이었다. 그 중에는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도 포함되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구술을 끝마치자 감상을 말하였다. 오대로에 대한 인물평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한숨이 섞인 감상을 아사노 나가마사는 붓으로 적어 자식에게 전했고 또한 후세에 남겼다.

 

 에도님[殿=이에야스]은 의로운 분이시다. 그 의로움을 나는 오랫동안 보아왔다. 그의 손녀를 히데요리와 맺어주고 싶다. 의로우신 에도님께선 히데요리를 잘 보필해 줄 것이다.”

 

 이것은 관찰이라기 보다는 히데요시의 희망이 너무 깃들어 있었다. 또한 이 말이 이에야스에게 전해졌을 경우의 효과도 기대하였을 것이다.

 

 카가[加賀] 다이나곤(마에다 토시이에)[각주:2]…… 나와는 죽마지우(竹馬之友).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 임명한다. 필시 히데요리를 위해서 잘 해줄 것이다.”

 

 카게카츠, 테루모토는 이 또한 의로운 사람들이다

 

 히데이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그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내가 손수 키워 온 아이다. 히데요리를 지키며 키우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일이건 만에 한 가지 경우가 있더라도 도망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대로(大老)이기는 하나 봉행(奉行)들 틈에 껴 착실히 직무에 힘써 너희들과 대로들간의 사이에서 공평히 주선(周旋)해 줄 것이다.”

 

 히데요시는 또한 오대로, 오봉행을 시작으로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도 토요토미 가문의 법도와 체제를 지켜 히데요리에 대한 봉공(奉公)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뜻의 서약서를 쓰게 하여 거기에 혈판(血判)을 찍게 하였다. 한 번뿐만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쓰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에야스의 서약서는 히데요시가 공손히 받으며,

 

 이것만은 관에 가지고 들어가 명토(冥土)로 가져 가겠다

 

 라고 까지 말하였다. 하지만 허무했다. 그의 사후(死後), 아미다가미네[阿弥陀峰] 산봉우리에 있던 히데요시의 묘소는 이에야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물론 직후가 아니라 오오사카 전쟁[大坂の役]가 끝난 다음의 일이긴 하지만.

 

 히데요시는 죽기 한 달 전 즈음 제후들에게 자신이 쓰던 옷이나 무구(武具) 등을 나누어 주었고, 자신이 죽은 후 법률이 될 수 있게 치밀한 유언을 써 남겼으나 아직 숨은 있었다. 죽은 15988 18일 전전날, 오대로를 병실로 불러 들였다. 한번 더 히데요리에 대한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명 중 우에스기 카게카츠만은 자신의 영지(領地)로 돌아가 있어 부재중이었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이하 네 명이 얼굴을 나란히 하였다. 베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가 주어졌다.

 

 어느 얼굴이건 심각하고 비통한 표정을 만들고 있었지만 히데이에만은 아랫입술을 악물고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히데이에 만은 병상에 있는 히데요시를 보고 그러한 정치적 얼굴 표정을 만들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이제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해져 눈을 감을 때마다 배 곪아 죽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살아있었다.

 이 모습이…… 타이코우이신가?’

 라 생각하자 히데이에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때로는 너무 격하여 중요한 히데요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눈동자만 히데이에를 향해 움직인 후 희미하게 말했다.

 

 하치로우~”

 

 라고. 모두 귀를 세웠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단다. 좀 조용히 해주지 않을래?”

 

 쇠약으로 인하여 의식이 희미해진 탓인지, 마치 어린 아이에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히데요시는 말하였다. 그 말투와 목소리가 히데이에를 한층 더 슬프게 하였다. 어렸을 때 히데요시 곁에서 다른 꼬마 시동들과 장난 등을 쳤을 때의 꾸짖었던 그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어서 말했다.

 내용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히데요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오, 부탁 드립니다, 의로우신, 의로우신 등으로 애처롭게 호소할 뿐으로, 살아 남은 측의 잘난척하는 입장에서 보면 우스운 망탄(妄誕)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과 같은 정경(情景)을 이미 8살 때, 죽은 아비의 머리맡에서 체험했던 히데이에에게 있어서는 다른 세 명과는 전혀 다른 정념(情念) 속에 있었다. 당시 자신이 지금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이며, 죽은 나오이에[直家]가 히데요시였다. 당시 하시바 치쿠젠노카미[羽柴 筑前守]였던 히데요시는 온 몸에서 광망(光芒)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모습으로,

 

 안심하시길…… 하치로우님에 대한 것. 반드시 뜻하시는 바대로 받들겠습니다.”

 

 라고 나오이에의 귓가에서 말하였다. 그 말대로 히데이에는 히데요시의 손아래서 성인이 되었고 이제 20대 중반을 넘었으며 영지(領地)도 나오이에 때보다 커졌다. 임종(臨終)의 약속이 지켜진 증거가 지금 여기에 있는 히데이에의 존재 그 자체인 것이었다. 히데이에는 만약 히데요시가 자기 혼자 여기에 있게 해주었다면 목소리 높여 이불 자락에 매달려서는 히데요시에게 안심하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작법(作法)에 따라 이 자리에서는 상석자(上席者)가 응답해야만 하였다. 상석자인 이에야스가 곧바로 무릎걸음하며 응답을 하였다.

 

 부디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목소리는 차분함 함께 목 끝에서 울리며 나와, 누가 들어도 신뢰감이 있을 듯한, 거의 장중(莊重)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들은 히데요시는 혼신의 힘을 담아서 미소 짓고 턱을 당겨 희미하게 끄덕였다.

 

 다다음 날 심야. 히데요시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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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의 죽음은 그 다음날부터 후시미[伏見]의 정계(政界)를 바꾸었다.

 이에야스는 딴 사람이 되었다. 이미 세키가하라[ヶ原]를 상정(想定)하여, 그 목표에 따라 행동하였다.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만든 법의 금지사항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며 제후들의 마음을 취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으로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법을 무시하여 자기 멋대로 제후들과 인척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이것이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를 자극했다. 이에야스는 미츠나리 혹은 마에다 토시이에를 화나게 만들게 만들어 그들이 거병(擧兵)하게 한 후 그것을 토벌함으로써 정권 교체의 매듭을 짓고자 하였다. 이 목표를 향해서 이에야스는 치밀하고 더구나 대담하게 움직였다. 그런 이에야스의 동향을 보고 나름대로 추측한 토요토미 가의 제후들 대부분은 자기들이 나서서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였다.


 이 즈음. 우키타 가[宇喜多家]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이 소동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지적했듯이 히데이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정치 능력이었을 것이다. 특히 히데이에는 가문을 다스리는데 어두웠고, 자신의 본거지에서 영지를 다스리던 중신(重臣)들과 친분이 얕았다. 이 때문에 중신들과의 정치에 관한 연락에는 나카무라 교우부[中村 刑部]라는 측근을 중용하였고 이를 총애하고 있었다.

 

 교우부는 원래 우키타 가문의 가신이 아니었다. 카가[加賀] 사람이었다.

 고우히메[姫]에 딸린 부하로써, 카가 마에다 가[前田家]에서 우키타 가문에 편입되었다. 원래 마에다 가에서 오오사카 성[大坂城]과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던 인물로 사교(社交)에 뛰어났다.

 

 지로우베에[兵衛 교우부의 통칭]는 꽤 쓸만하군

 

 하고 히데이에는 무심코 이를 어떤 일이건 시켰고 그러던 중에 정치 관련의 연락도 담당하게 하였다. 연락이라는 것은 오오사카[大坂] 비젠지마[備前島]주재(駐在)하는 필두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에 대한 심부름이었다. 그러던 중 교우부는 오사후네에게 아첨을 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차츰 이 카가 사람은 히데이에와 오사후네 쌍방을 농락하게 되어 얼마 안가 히데이에, 오사후네 둘 다 이 남자가 끼지 않으면 서로의 뜻이 통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기에 나카무라의 눈치를 살피는 강대한 세력이 만들어졌다. 토요토미 가문의 이시다 미츠나리와 닮은 존재일 것이다. 히데이에는 이 교우부에게 2천석을 하사하여 가로의 말석에 앉게 하였다.

 

 벼락 출세한 놈이 우리들에게 지시를 내린다고?”

 

 라는 불만이 가문에 팽배해졌다.

 특히 이 악감정은 히데이에의 본거지에서 더 심했다. 오오사카 저택에서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라는 명령이 본거지로 온다. 본거지에 사는 가신들은 궁핍했지만 명령 받은 만큼 금과 쌀을 오오사카로 보내야만 하는 수동적인 입장이었기에 평소부터 감정이 편치 않았다.

 거기에 필두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원래부터 인망이 없어 모든 것에 강압적이었고, 정치에 있어서도 한 쪽만 편드는 일이 많았다. 오사후네에 대한 원한은 장년(長年)에 걸쳐 쌓였던 만큼 교우부가 가로에 임명되기 이전부터 본거지에서는 오사후네를 죽인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점 히데이에도 모르지는 않았다.

 

 예전 조선에 있을 때 망부(亡父) 때부터의 노신(老臣)인 오카 부젠노카미[岡 豊前守]라는 사람이 진중(陣中)에서 병이 들어 부산에서 죽었다. 그 임종 전에 히데이에는 병 문안을 가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해 준 공로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서 해 줄 말은 없는가?”

 

 하고 물었다. 부젠노카미는,

 

 보람도 없을 것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고선 입을 다물었다.

 말해도 효과가 없다는 의미였다. 히데이에가 거듭 청하자,

 

 아닙니다. 말씀 드렸다고 하여도 들어주실 턱이 없지 말입니다

 

 라고 부젠노카미는 말했다. 또 히데이에는 바랬다. 그러자 부젠노카미는 알았다며,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대악인(大惡人)이지 말입니다. 저 인간을 계속 사용하신다면 가문에 난이 일어나지 말입니다. 불길한 말입니다만 결국에는 멸문하게 될 것이지 말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오카 부젠노카미는 죽었지만 그 예언대로 히데이에는 그 말을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사후네 키이노카미는 망부 때부터 노신이며, 히데요시에게서 하시바[羽柴][각주:3]라는 성()을 하사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를 존중하고 있던 히데이에의 성격으로는 히데요시를 무시하는 듯이 이 노인을 정무(政務)에서 추방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또한 본거지의 반() 오사후네 파()도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때는 하시바 성[羽柴姓]인 오사후네에 대해서 공공연히 적대하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죽음이 그들을 활성화시켰다.

 

 '타이코우가 죽었다. 그렇다면 이제 오사후네의 운명도 끝이다! 각각 수하들을 이끌고 카미가타[上方]로 밀고 올라가 오사후네와 일전(一戰)을 치루고 벼락 출세한 나카무라 교우부라는 놈과 함께 목을 따버리자!'

 

 라며 떠들썩하던 중에 당사자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가 갑자기 병이 나 오오사카 저택에서 죽었다. 한번 해보자며 들고 일어난 기세가 있었던 만큼 본거지의 반대파들은 실망했지만,

 

 '어떻게 하긴~ 아직 나카무라 교우부 놈이 살아있다!'

 

  며 일부는 교우부를 죽이기 위해서 이미 철포()를 준비해서는 본거지를 출발했다고 한다. 그것을 오오사카에서 전해 들은 교우부는 곧바로 야밤에 배를 타고는 후시미[伏見]로 와 히데이에의 저택으로 도망쳐 왔다. 히데이에는 저택에 있지 않았고 후시미 성에 있었다. 교우부는 저택에서 기다리다 참지 못하고 성에 입성하여 히데이에를 배알(拜謁)하고자 하였다.
  1.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마사이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2. 토시이에의 거성이 카가[加賀]에 있었기에, 토시이에의 관직과 합쳐 카가 다이나곤[加賀大納言]이라 불렀다. [본문으로]
  3.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씨[豊臣氏] 이전에 쓰던 성(姓).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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