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후 히데요시[秀吉]는 히데이에[秀家]를 어떤 경우라도 곁에서 떨어뜨리질 않았다. 전쟁터에는 반드시 데려갔으며, 여러 장수들을 만날 때도 자신의 곁에 있게 하였다. 자연히 무장들은 히데이에에게 공손한 예()를 취했다.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뒤, 히데요시는 이 소년을 유자(猶子)에서 양자로 삼아,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일족으로 하였다. 그 이전이건 그 이후건 히데요시는 어떠한 경우라도 히데이에에게 언짢은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히데이에가 똑똑한 대답이라도 하면,

 

 허허~ 하치로우[각주:1]가 제법이구나~”

 

 하며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였다. 히데요시는 핏줄이 닿는 다른 양자들 보다 이 핏줄이 닿지 않은 양자 우키타 히데이에를 사랑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친자식 같군

 

 라고 사람들은 뒤에서 쑤군거렸다. 히데요시 자신하치로우 모친의 몸을 알고 있던 만큼 어렴풋이 그렇게 착각할 법한 정념(情念)을 이 소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부친이라는 것은 원래 출산의 고통이라는 동물적인 체험이 없이, 단순히 그 아이의 모친의 몸을 알고 있을 뿐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 점에서 히데요시는 히데이에 부친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운이 좋은 도련님이지

 

 라고 토요토미 가문에서는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는 고(故)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자식을 부러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친 덕분일 것이다

 

 라는 사람도 있었다.

 

 오후쿠(ふく = 히데이에의 모친)는 오오사카[大坂]에 와 있었다. 오오사카 성 밑 비젠지마[備前島]에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저택이 있었다. 그러나 오후쿠는 이 저택에서 살지 않고 오오사카 성내(城內)에 거처를 얻고 있었다. 그렇다고 측실(側室)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후궁(後宮)에는 많은 명문가 출신의 귀부인들이 이었다.

 죽은 주인 노부나가의 딸 중 다섯째인 산노마루도노[丸殿][각주:2], 역시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信包]의 딸인 히메지도노[姫路殿][각주:3] , 오우미[近江] 아자이 씨[氏] 출신인 니노마루도도[丸殿=요도도노[淀殿]][각주:4],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셋째 딸 카가노츠보네[加賀局][각주:5], 오우미[近江] 쿄고쿠 씨[京極氏] 출신인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6],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여동생으로 재녀(才女)라 소문난 산죠우노츠보네[局] 등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었다. 오쿠후는 이 화려한 꽃밭에 속해있지 않았다. 그녀는,

 '비젠 님[備前殿]'

 이라 불리며 법체(法體)가 되어있었다.

 나오이에가 죽은 다음 해. 장례식이 공표된 후 관례에 따라 머리를 밀고 흰 옷을 입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법체인 몸을 측실로 삼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성 안에 암자를 짓게하여 거기에 살게 하였다. 히데요시는 때때로 이 암자에 들려,

 

 법체가 되어서 더욱더 아름다워지셨구먼. 나는 여전히 그대가 사랑스럽네

 

 라고 큰 목소리로 말하거나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다시 밤자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구니 모습의 과부에게 밤 시중을 들게 할 정도로 히데요시는 변태가 아니었다. 단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할 뿐이었었고, 그것조차도 이 히데요시라는 남을 기쁘게 하는데 천재적인 인물은 멀리 원정을 나가있을 때조차 정실이나 다른 측실들에게도 그러했듯이 이 오후쿠에게도 자신이나 히데이에의 근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거나 했다. 또한 항상 오후쿠에게,

 

 하치로우만큼 귀여운 녀석은 없지

 

 라고 말하거나 하였다. 그렇다고 이 히데요시의 애정은 꼭 오후쿠에 대한 애정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하치로우 히데이에 자신도 히데요시에게 사랑 받을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 듯 하였다. 성격이 시원시원했으며, 말하는 것에도 막힘이 없었고, 행동거지에도 봄바람이 이는 듯 상쾌함에 있었다. 히데요시는 자기 친인척의 아이들이 볼품이 없었으며, 표정이 둔하였고, 언동도 또한 어리석었기에 더욱더 히데이에를 사랑하였다.


 그러면서도 히데요시는 히데이에가 조금 가엾다고도 생각하였. 양자라고는 하여도 일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히데이에에게는 토요토미 가의 상속권이 없었다. 이 점 누나의 아들인 히데츠구[秀次],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인 히데아키[秀秋]에 비해 히데이에라는 양자의 존재에게는 약간의 허전함이 있었다. 그 허전함을 당사자는 물론 느끼지 못했고, 단지 양아비인 히데요시만이 느끼고 있어 느낄 때마다,

 하치로우에게 잘 해주어야지……’

 라고 생각하여 다른 양자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미소도 히데이에에게는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


 위에 서는 자로서의 교육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히데이에가 13살이 되자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코노에츄우죠우[左近衛中将]에 임관시켜 시코쿠 정벌[征伐][각주:7]에 데려가 아와([阿波]의 키즈 성[木津城] 공격에 참가시켰으며, 2년 뒤에는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8]에 종군시켜 개선(凱旋)한 종삼위(從三位) 산기[議]에 임명해 주었다. ‘산기를 중국에서는 재상(宰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비전재상(備前宰相)]

 이라 불렸다. 15살 때였다.

 이어서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는 불과 18살의 나이로 해군 총사령관을 맡으면서도 대과(大過)가 없었다. 다만 히데요시 자신이 직접 지휘하듯 하였고 또한 가로(家老)들의 보좌도 있었기에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 즈음 히데이에게는 벌써 부인이 있었다. 부인은 히데요시의 양녀(養女) 고우히메[姫]였다.

 

 고우히메를 히데이에에게 시집 보내겠다

 

 라고 히데요시가 말하였을 때 히데이에의 행운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고우히메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딸이었다. 토시이에의 딸이라고 하면, 처음엔 마아[摩阿]'[각주:10]라는 셋째 딸이 14살에 양녀가 되었고 이어서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마아의 동생 고우히메를 히데요시가 아직 오다 가문[織田家]의 부하 장수일 때 양녀로 삼아 손수 길렀다. 히데요시의 고우히메에 대한 애정은 친부모라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가 오다 가문의 부하 장수로 하리마[播磨]의 전쟁터에 있었을 즈음에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에 있던 이 꼬마 숙녀에게 전쟁터에서 편지를 보냈다.

 

자가 들어가는 아가씨에게

 

~ 정말로 보고 싶구나. 장난 같은 거 하다가 다치지 마라(날뛰다가 다치면 안돼요~). 또한 건강을 위해서 뜸을 받아라. 이것은 유모에게도 말해 두마. 너는 기특한 아이다. 밥도 많이 먹고 있는지 궁금하구나(언제 함께 먹자꾸나). 어쨌든 니가 정말 보고 싶어 미치겠구나. 꼭 이 히메지 성[城]에 부를 테니 맘 편히 먹고 있으렴. 그 때 꽃가마가 필요하다면 준비해 둘 테니 필요하면 말하거라.

 

                                                                                                                                             진중(陣中)에서 

                                                                                                                                                         아빠가

 

 라는 편지였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고우히메가 자랐어도 언니인 마아처럼 손대지 않았고, 그녀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아빠]로 있으려고 하였던 듯했다.

 

 고우히메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남편을 골라주마

 

 라고 말은 했지만, 맘속으로는 일찌감치 히데이에로 정하고 있었다. 양자에게 양녀를 줌으로 해서 토요토미 가에서 히데이에의 위치를 한층 더 강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히데이에는 두 번의 조선 침공[각주:11]에도 참전하였다.

 그 사이 곤츄우나곤[中納言]에 승진하였고 이에 따라,

 '비전중납언[備前中納言]'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1화에 언급했던 다섯 다이묘우[大名]의 도()를 맞추었다 하는 것도 이 즈음일 것이다.

 

 이 즈음부터 히데요시의 육체건 정신이건 눈에 띄게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토요토미 가문의 적통(嫡統) 히데요리[頼]가 태어나 있는 상태였고, 그로인해 히데요시의 모든 관심은 이 갓난아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히데요리 장래의 지장이 될 것 같았던 칸파쿠[白] 히데츠구는 주살(誅殺)되었으며, 히데츠구의 다음가는 지위에 있던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주었다. 남은 것은 히데이에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상속권이 없었던 만큼 히데요시의 사랑은 여전하였고,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히데요시 쪽이 양자 히데이에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모습조차 보였다.

 

 어느 날.

 히데이에를 불러,

 

 히데요리가 15살이 되기까지 나는 어떻게든 살아 있었으면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래도 가망이 없을 것 같구나. 내 몸에 만일의 경우라도 생긴다면 예전에 내가 고아인 너를 지키며 키워왔던 것처럼 니 동생인 히데요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라고 히데이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히데이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 반응이 빠른 젊은이가 평소와는 달리 기분 나쁜 듯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어째서 아무 말 없는 게냐?”

 

 라고 캐묻자 히데이에가 말하길, 그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새삼스레 당부를 하심은 내 마음을 애매하다고 여기셔서 일 것이다. 사나이로서 불유쾌하다는 의미의 말을 하였다.

 그것을 듣고 히데요시는 안심하여,

 역시 하치로우밖에 없구먼

 이라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교육자의 입장으로 돌아왔다.

 

 너의 진실함은 알지만 지금의 태도는 좋지 않구나. 오해를 살만하다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다이묘우[大名]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나하나 모두가 정치여야만 한다. 정치라는 것은 권모술수의 길이 아닌 자신의 진실함을 남에게 전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하여라. 너에게는 그것이 없다. 지금은 나조차도 너의 진실함에 대해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예전부터 너의 그러한 결함에 대해 걱정이 들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 하나뿐이다.”

 

 라고 말했다.

 

 집은 잘 다스리고 있는가?”

 

 라고 히데요시는 물었다. 우키타 가문[宇喜多家]가로들 간에 서로 반목하여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이 항간에 떠들썩했다. 히데요시조차 다소는 듣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히데이에는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의 곁에서만 있었던 히데이에는, 오랫동안 토요토미 가문에서만 생활하였기 때문에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나 영지(領地)를 다스림에 어두워, 57만여 석의 처리는 필두(筆頭) 가로인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에게 전부 맡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기 가문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무 일도 없습니다

 

 라고 정직히 대답했다. 사실 히데이에는 그렇게 믿고 있었으며, 그 이외에 대답할 것이 없었다.

 이 젊은이는 생각했던 만큼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히데이에가 전쟁터에서는 꽤 용감하였으며 사졸의 통제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내정(內政)에 서투른 듯했다.
 
귀족으로써의 교양은 있었다. 시가(詩歌)에도 능했으며
츠즈미[]도 치고 노우[]도 연기하는 등 궁중 사교에 빠질 수 없는 것은 능했다. 그러나 이런 교양이 궁중에서는 도움 되겠지만 우키타 가문을 통솔함에 있어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 하치로우를 궁중에서만 머물게 한 내가 잘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교육에 잠깐 후회를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이상 우키타 가문 내부 문제에 대해 참견할 정도의 체력도 없었다.


 히데요시는 이 여름(1598)에 들어서면서부터 원인불명의 설사가 계속되어 식욕도 잃고 있었다. 다시 올 여름을 히데요시는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오오사카(大坂)의 그 가혹한 열기를 피하기 위해, 그 즈음은 후시미[伏見]의 높다란 곳에 세운 궁궐로 옮겨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웠다. 이 가냘퍼진 체력으로 여름을 지낼 수 있는가 하는 불안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그 불안을 주치의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에게만 은밀히 전했다. 불안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토요토미 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히데요시의 건강만이 토요토미 정권의 영광이었으며 유일한 정치적 근거였고 동력이었다. 그 건강의 몰락과 함께 이 정권도 망할 것이라는 것은 다소 냉정한 눈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의 머리로건 이해할 수 있었다.



 전 시대인 오다 정권의 멸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16
년 전, 노부나가[信長]의 죽음과 함께 망했다. 히데요시는 오다 정권을 소멸시킴으로써 죽은 주군 노부나가의 권력을 계승해서 토요토미 정권을 성립시켰다. 어떤 사람보다도 당사자인 히데요시가 이 원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이 원리에 의해 히데요시는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고, 그 생명이 꺼져가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반대로 이 원리에 계속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빌었다. 이 원리를 극복하여 아직 갓난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싶었다. 무리라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었던 만큼이나 바둥거리듯이 그것을 빌었다. 그런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꽉 차있었다. 히데이에의 가문에 대한 충고를 오랫동안 머리에 둘 정도의 끈기도 관심도 지금의 히데요시에게는 없었다.

 

ps; 많이 늦어졌네요 ^^; 핑계를 대자면 원인불명의 두통으로 금요일부터 오늘 낮까지 고생했습죠..

  1. 히데이에의 아명. [본문으로]
  2.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세 번째 성곽[三の丸]에 거처가 있었기에 이리 불렸다 [본문으로]
  3. 히메지 성에 살고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거처가 두 번째 성곽에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5. 토시이에의 영지(領地)인 카가[加賀]에서 왔기 때문에. [본문으로]
  6. 거처가 후시미 성[伏見城] 마츠노마루[松ノ丸]라는 이름의 성곽에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7. 1585년 시코쿠[四国] 쵸우소카베 가문[長宗我部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8. 큐우슈우[九州]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9. 1590년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공격한 전쟁. [본문으로]
  10. 상기의 카가노츠보네[加賀ノ局] [본문으로]
  1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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