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1581년이었다. 해가 밝자 마자 히데요시는 하치로우와 함께 하리마[播磨] 히메지[姫路]를 출발하여 산요우도우[山陽道] 서쪽으로 향했다. 하치로우에게 있어서 생애(生涯)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는 여행이었다. 그는 9살이 되어 있었다. 하치로우가 이렇게 어렸을 적에는 히데요시의 입장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지만,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따라 이때의 일이 생각날 때마다 히데요시의 헌신적인 애정을 떠올리며 은혜를 느껴,
- 이 사람을 의해서라면……
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굳게 다짐하였다. 이 점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다른 양자들과는 달랐다. 다른 양자들은 히데요시의 친척, 인척(姻戚)이었기에 말하자면 자연적으로 존귀(尊貴)한 위치에 설 수 있었으며,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경우는 아무런 피의 연결이 없었던 만큼 오히려 순수하게 히데요시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자랐다고 말할 수 있다.
친부(親父) 나오이에[直家]가 누워있는 병상(病床)에서 보여준 히데요시의 태도 역시 하치로우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린 자식이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이 몸의 슬픔을 헤아려 주시길……”
이라며 나오이에는 삐쩍 마른 손을 뻗쳤다. 히데요시도 손을 내밀어 나오이에의 손을 양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이 히데요시의 눈물을 보자 나오이에는 안심하여,
“하치로우를 아무쪼록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
“아비가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될 무사(武士)의 본분(本分)과 사졸(士卒)들을 움직이는 법 등을 아비를 대신해 모두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나오이에의 귀에 입을 가까이 해서,
“안심하시길…. 앞으로 하치로우님을 내 자식이라 생각하고 가령(家領)이신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는 물론 일본국(日本国)을 움직일 수 있는 큰 장수로 길러내겠습니다”
라고 하자 나오이에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소리 내어 울며,
“아~ 정말 안심하였습니다. 앞으론 제가 혼령이 되어서라도 치쿠젠[筑前=히데요시]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저 뿐만 아니고 우리 우키타 가문의 선조 아메노히호코노미코토[天日槍命]를 시작으로 한 대대의 영령(英靈)들도 전부 치쿠젠님의 무운(武運)을 지킬 것 입니다.”
라고 하였다. 하치로우는 감정이 주변에 쉽게 영향을 받는 아이였기에 이런 대화를 보자 참지 못하고 소리 죽여 울었다. 그 모습이 사람들을 더욱 감동시켰다.
나오이에는 또한,
“지금 소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저에게 숨이 있는 동안 하치로우가 어른이 된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어른이 된 모습 이라는 것은 성인식을 시켜달라는 의미였다. 성인식을 치르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그런 예가 없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승낙하여 자신이 에보시오야[烏帽子親]가 되어 나오이에의 머리맡에서 준비를하였다.
곧이어 성인식에필요한 역할들이 정해졌다. 갓[烏帽子]를 씌워 주는 가관역[加冠ノ役], 아이일 때의 앞 머리를 자르고 상투를 틀어주는 이발역[理髮ノ役], 에보시를 들고 오는 에보시역[烏帽子ノ役], 성인식을 치른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거울을 들고 있을 경대역[鏡台ノ役] 등이다.
그 중 이발역에 히데요시가 코니시 야쿠로우 유키나가[小西 弥九朗 行長]를 임명하였다. 이 우키타 영지(領地)에서 태어난 사카이[堺] 상인은 그 탁월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아 이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되어 있었으며, 츄우고쿠[中国] 지역의 크고 작은 다이묘우[大名]들 사이를 오고 가며 반(反) 모우리[毛利] 체제를 만들고 있었다.
야쿠로우가 하치로우의 상투를 틀어 주었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하치로우의 메노토[傅人]로 임명 되었다. 이 상인 출신의 무장(武将)과 히데이에의 결합이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쟁터까지 이어질 줄은 이 장소에 있던 누구도 물론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명명식(命名式)이 남았다. 우키타 가문은 대대로 '이에[家]'라는 한 글자가 이어 내려오고 있었다. 3대 전이 요시이에[能家]였으며, 전대가 오키이에[興家], 당대는 나오이에[直家]였다.
“치쿠젠님. 부탁 하나가 더 있습니다. 하치로우를 위해서 치쿠젠님의 이름 글자중 하나를 내려 주실 수는 없으신가?”
라고 나오이에가 부탁을 하였기에 히데요시[秀吉]는 앞글자 '히데[秀]'를 주기로 하였다. 히데요시는 의식에 맞추어 종이를 준비시켜, 그 종이의 한 가운데에 '秀'라는 문자를 크게 쓰고 왼편 하단에 싸인[花押]를 한 후 하치로우에게 전했다.
이때 히데요시는 이틀간 오카야마에 머물렀다. 하지만 하치로우의 생모(生母)는 볼 수 없었다. 그녀도 감기에 걸려 누워있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히메지로 떠나기 전 히데이에(하치로우)를 나오이에의 병간호라는 명목으로 오카야마 성에 남겨두었다. 우키타 가문에 있어서도, 센고쿠[戦国]의 관례에 있어서도 믿기 힘들 정도의 호의였다. 이 히데요시의 호의를 나오이에만큼이나 감사한 것이 하치로우의 생모 오후쿠[於ふく]였다.
“치쿠젠님의 호의를잊어서는 안 됩니다”
라고 오후쿠는 나오이에가 하던 말과 같이 하치로우에게 매일 가르쳤다.
오후쿠는 젊었다. 아직 30이 되기에는 몇 번의 봄과 가을이 남아 있었다. 물론 나오이에에게 있어서 첫번째 부인은 아니었다. 나오이에가 가졌던 부인의 역사는 그대로 그가 행한 음모의 역사인 것이었다.
첫번째 부인은 옛주인인 우라가미 가문[浦上家]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나카야마 빗츄우노카미 노부마사[中山 備中守 信正]의 딸이었다. 나오이에는 이 장인에게 꼬리를 흔들어 신용을 얻은 다음 곧바로 상대를 방심케 한 후 모살(謀殺)하여그 영지(領地)를 자기 것으로 하였다. 그 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지만 자살했다는 소문도 오랫동안 끊이질 않았다.
이어서 역시 우라가미 가문의 유명한 신하로 미마사카[美作] 반국(半国)을 소유하고 있던 고토우 미마사카노카미[後藤 美作守]의 딸을 얻었다. 사위의 지위를 이용하여 미마사키노카미를 방심케 한후 독살하여 그 영지(領地)를 뺐었다. 이 부인도 병으로 죽었다. 오후쿠는 그녀의 동생이었다.
[마음이건 미모건 비교할 사람이 없다]
고들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우키타 가문에서 키웠고 몸이 크는 것을 기다려 부인으로 삼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하치로우와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각설하고, 나오이에는 히데요시가 병문안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581년 1월 14일 병으로 죽었다. 54세였다. 히데요시는 우키타 가문의후견인으로서 오카야마에 와 히데이에에게 가독을 잇게 하였으며 가로(家老) 이하 우키타 가문의 가신(家臣)들을 훈계(訓戒)하였고 또한 나오이에의 죽음을 굳게 비밀로 하라 하였다. 이 죽음이 공표된 것은 일년 후인 1582년 1월 9일이 되어서였다. 이때문에 미망인도 그러는 동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될 수 없어 1 비구니 이름을 갖지못한체 속체(俗體)로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시기에 이 오후쿠와 처음 만났다.
오후쿠는 물론 상복(喪服)이 아니었다.
“여어~ 어머님이신가~ 하치로우와 많이 닮으셔서 인지 처음 만난 것 같지가 않소이다”
라고 히데요시는 말을 친근하게 걸었지만, 그러나 오후쿠의 아름다움에는 내심 덜컥했다. 눈동자 주변에 어딘가 근심 어린 분위기가 풍긴 묘한 아름다움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 왔던 히데요시의 눈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이런~ 죽은 이즈미(和泉)님도 좋았겠군”
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하려다가, 아무래도 이것만큼은 말을 삼켰다.
이 오카야마에 머무는 동안, 히데요시는 히데이에와 유자(猶子) 2 관계를 맺었다. 유자라는 것은 "또한(猶) 아들(子)과 같다"라는 것으로, 양자(養子)에 준(準)하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성내에서 허물없이 지냈기 때문에 우키타 가문 내에서의 평판이 좋았고 특히 시녀(侍女)들에게서는,
“저렇게 친근감있는 대장(大将)을 뵌 적이 없다”
고 평판이었다.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라는 인물은 오다 가문[織田家] 넘버 원 무장(武将)이며, 가혹(苛酷)한 성격으로 유명한 노부나가[信長]에게 가장 신뢰받고 있다고 하기에 얼마나 무서운 남자인가하고 상상했건만, 성내에서의 행동은 너무 가벼울 정도로 오히려 거드름 피우는 법이 없었다. 웃기면 배를 부여잡고 웃었으며 맘에 들면 큰소리로 칭찬하곤 곧바로 상을 내렸다. 오히려 아끼려고 하지 않았다.
시녀들을 다스리던 시녀장(侍女長) 같은 경우는 히데요시가 한 움큼 안겨준 금은(金銀)에 감격하여 제일 먼저 히데요시빠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오후쿠를 꼬시기 위해 이 여자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이 여자도 역시 놀랐다. 나오이에가 살아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고는 하여도 엄밀히 말하면 복상(服喪) 중이 아닌가?
“아니~ 물론 그건 잘 알지. 그걸 이렇게 부탁하는 거다”
라며 이 남자는 손을 비벼가며 말했다.
“이런 쪽의 욕망만큼은 참을 수 없다네. 진작부터 오후쿠~ 오후쿠~ 라는 생각뿐이었지만, 그러나 참고 또 참으며 발을 동동 구르며 참아왔건만 이젠 더 이상 어떻게 참을 수도 없네. 부탁하네 응~ 부탁하네 응~ 이해해 주게~”
라고 했다. 이 모습에는 시녀장도 웃음이 나서 그만 일의 중대함을 잊고 받아 들이고 말았다. 그것을 시녀장은 오후쿠에게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오후쿠가 어떤 심경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에도[江戸]시대와는 달리 유교적 도덕의 지배를 그녀들이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이런 점에서 도덕상 고통은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소유자였던 남편이 살아있을 때야 남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소유자가 죽은 이상 그녀에게 용기만 있다면, 또한 남의 이목을 신경만 쓰지 않는다면 자신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오후쿠에게 용기 같은 것은 없었고 단지 당혹해 하고 있던 차에 그녀의 침실에 히데요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이불에서 자 버렸다. 오후쿠의 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이 대담한 수동(受動)이 그녀의 용기의 소산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치로우에게 있어서 당신은 모친, 나는 명색이 아비. 이러는 편이 오히려 낫지”
라며 히데요시는 이상한 논리로 오후쿠를 달랬다. 하치로우를 사이에 둔 부모이면서도 부모끼리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은 반대로 이상하고 부자연스럽다는 것이 히데요시의 명쾌(明快)한 논리였으며, 그런말을 들으니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오후쿠도 들었기 때문이다.
이 하치로우의 양아비는 매일 밤 하치로우의 모친 곁으로 왔다. 오후쿠는 당혹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데요시가 혐오스럽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죽은 남편에 비하면 추남이었으며 키도 약 150 근처밖에 안 되었지만 죽은 남편에 비하면 이 하치로우의 양아비는 훨씬 쿨~한 인품이었으며, 이불 속에 항상 따사롭고 건강한 향기와 같은 것을 남기고 갔다. 이것이 오후쿠에게 있어 즐거운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때 일종의 애정과 같은 것이 태어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히데요시에게는 물론 오후쿠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단순한 엽색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남자는 연이 닿았던 어떤 여성에게건 과할 정도의 애정을 가졌고 그 여성이 행복해지게 되는 것만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성격이었으며 특성이었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은 히데요시 만의 특징이었다. 오후쿠도 그것을 알았다.
“하치로우를 장래에 어떻게든 세상에서 존중 받는 남자로 만들고 싶네”
히데요시는 그것만을 말하였다. 자연히 히데이에를 두고 오후쿠와 히데요시의 사이에 강한 연대가 만들어졌다. 결국에는 이 강한 연대감이, 히데요시와의 이 기묘한 관계를 오후쿠의 마음 속에서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히데요시가 머문 짧은 기간 동안의 마지막 즈음에 오후쿠는 오랫동안 같이 산 마누라와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히데요시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키타 츄우나곤 히데이에[宇喜多 中納言 秀家]라는 토요토미 다이묘우[豊臣大名]는 이렇게 침실 속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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