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
히데요시[秀吉]의 사후(死後), 쟁란(爭亂)이 일어났다. 1600년 5월 여름. 미츠나리[三成]가 거병하였다. 간적(奸賊) 이에야스[家康]를 토벌한다고 하였다. 미츠나리에게 있어 모든 것은 히데요리[秀頼)]와 요도도노[淀殿]를 위해서였으며 이 남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자신 말고는 토요토미 정권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천하의
제후는 동서(東西)로 나뉘었다.
이러는
사이, 키타노만도코로는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쿄우[京]에 있었으며,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이후 코우다이인[高台院]이라 불렸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이에야스를 후원하며, 이에야스의 힘으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보존하고자 그녀의 영향 아래 있던 여러 무장들에게 권하여 이에야스
측에 가담시키려 하였고 거의 성공하였다. 단지 그녀는 히데아키[秀秋]의 우둔함이 두려웠다. 서군(西軍)의 달콤한 말에 넘어갈 위험이 있어 히데아키의 깃발이 어느 쪽으로 향할 지,
이 젊은이에 한해서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코우다이인은 그를 쿄우로 불러,
“에도(江戸)님 1은 당신의 은인입니다. 결코 방향을 틀리지 마시길”
하며 정성
들여 타일렀다. 히데아키는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이미 그 몸이 오오사카[大坂]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엔 온통 서군 뿐이라 서군 측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싸움에 이기고 난 후
100만석 영지를 준다는 뜻을 전해왔다. 히데아키는 다소 동요했다.
‘서군에
붙을까?’
그러나, 칸토우[関東]에도 사자(使者)를 보냈다. 그러는
한편 서군에 붙어 동군(東軍)의 소부대(小部隊)가 수비하는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에 참가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도대체 히데아키는 어느 쪽에 붙어있는 것인가? 더구나 그 후 서군의 지시에 대해서 굉장히 애매한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오우미[近江]의 타카미야[高宮]라는
곳에 틀어박혀서는 군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히데아키의 거동을 의심하여,
‘아군에게
큰 해가 된다.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 히데아키를 불러들여 몇 번이나 그 기회를 만들고자 했으나 히데아키는 응하지 않았다.
미츠나리뿐만
아니라 칸토우[関東]에 있던
이에야스도 히데아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을 두려워해,
‘뭐라 해도
좆병진이다.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가 없다’
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의 밀사(密使)가 왔어도 만족스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에도를 출발하여 전장(戰場)으로 향하던 도중, 토우카이도우[東海道] 오다와라[小田原]에서
또 다시 히데아키의 밀사가 이에야스가 머무르는 곳으로 왔다. 그것을 이에야스의 부하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가 응대하여 이에야스에게 만날 의향이 어떤지 물었다. 용건은 '서군을 배반하고 싶다'는
것이라고 한다.
“만날 필요
없다”
고 이에야스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서군에 가담한 여러 무장들을 와해(瓦解)시키고자 온 힘을 다하여 뒷공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료(幕僚)들은 이런 이외의 태도에 놀랐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서군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대부대(大部隊)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 머릿수는 얕볼 수 없었다. 더구나 이쪽에서 꼬시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내응(內應)하겠다고 자청하고 있는데, 그걸 만나지도 않겠다는 것은 어쩌자는
것일까?
“애송이
놈의 말, 신(信)을
주기에 부족하다”
라고 이에야스는
그 이유를 말했다. 만약 함부로 응했다가 막상 그 때가 되어서 내응하지 않았을 경우 애송이의 잔머리에 넘어간 꼴이 되는 것이다. 이에야스로써는 승패 이상으로
명예가 걸린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5일 후, 이에야스가
시라스카[白須賀]에 도착했을 때 히데아키의 세번째 밀사가 진중(陣中)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부하에게 시켜 적당히 응대하게 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는 1600년 9월 15일
아침부터 벌어졌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서군에 속하여있었으며 더구나 계속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이 분지(盆地)의 서남부에 있는 표고(標高) 293미터인 마츠오 산[松尾山]의
산꼭대기에 진(陣)을 치고
아래쪽의 전황(戰況)을 관망(觀望)하고 있었다.
“킨고[金吾]는 도대체 어쩔 생각인가?”
그 산을 올려보는 동서 양군의 어느 누구던 그런 의혹을 가졌다. 진(陣)은 마치 저 먼 하늘에 있는 듯했다. 당연히 아래서는 그들의 움직임을 알 수 없었고 싸울 의지가 있는지 어떤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죽은 히데요시가 킨고를 위해서 붙여준 히라오카 이와미[平岡 石見], 이나바 탄고[稲葉 丹後] 두 명은 이미 이 전날 밤 동군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를 통해서 내응을 약속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나가마사가 그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히데아키의 신청을 승낙했다. 더구나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약속이 되지 않게 토쿠가와 가문에서 오쿠다이라 사다하루[奥平 貞治], 쿠로다 가문[黒田家]에서는 오오쿠보 이노스케[大久保 猪之助]가 각각 연락과 감시를 위해서 히데아키의 진중에 가 있었다.
한편, 서군 측도 될 수 있는 만큼의 회유책(懷柔策)은 쓰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에,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입니다”
라 히데아키를
설득하여 전의(戰意)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단순한 충절론(忠節論)만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히데아키에게 거대한 이익을 약속하였다. 이익이라는 것은,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시기 전까지 킨고님에게 천하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관백[関白]로 추대(推戴)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 조건에는 히데아키도 적잖이 마음이 흔들렸다.
이 좁은
세키가하라 분지에 동군 약 7만, 서군 약 8만의 군세가 대치하였다.
아침. 전날
밤에 내린 비가 갬과 동시에 교전 상태가 되어 정오(正午)가 가까워짐에 따라 전황이 격렬해졌다. 더구나 서군의 주력 부대인
이시다[石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
등이 사력을 다해서 싸웠기 때문에, 밀린 동군은 기세가 눈에 띌 정도로 저하되었다. 이어서 오전 11시가 넘자 동군의 일부에서는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히데아키는 여전히 8천의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채 산꼭대기에서 내려올 기색조차 없이 동서 어느 쪽에도 붙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아키는 산 아래의 전황이 뜻밖이었다. 아군인 서군이 진다고
예상했기 때문에 적인 동군에 내응을 약속하였는데 산 아래의 전황은 서군이 유리했다. 산꼭대기에서 히데아키는 이 남자 나름대로 계산을 하였다. 이대로
상황을 봐서 이기는 것이 결정된 쪽에 붙으면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터이다.
한편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시다 쪽의 분전은 더욱 뜻밖이었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후 몇
번이나 마츠오 산을 올려다보며,
“킨고는
아직인가? 아직 내응하지 않는 건가?”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단 말인가? 하지만 산꼭대기에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코바야카와 가문의 깃발은 움직이질 않았고 그
거취도 알 수 없었다. 히데아키의 거동은 이에야스가 예측했던 대로가 되었다. 결국 정오
전의 이에야스는 그가 낭패(狼狽)했을 때의 버릇인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해,
“애송이에게
속다니…… 분하구나 분해!”
라고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고 말했다. 이에야스는 비상수단을 택했다. 위협이었다. 곧 철포대의 일부를 전진시켜 히데아키가 있는 마츠오야마의 기슭으로
보내 산꼭대기를 향해서 이에야스의 분노를 표출하는 듯이 연달아 발포하게 하였던 것이다.
히데아키라는 남자에게는 이 발포가 무엇보다도 큰 효과가 있었다. 산꼭대기의 히데아키는 놀라 두려움에 허둥거리듯이 서군을 향해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정오였다. 8천의 코바야카와 군세는 산을 내려와 아군의 진지로 내달렸다. 전세(戰勢)는 이 순간
역전되었다.
싸움에
이긴 후 분지 서쪽의 이에야스 진지에 여러 무장들이 모여들어 축하가 이어졌지만 이 싸움에 승리를 가져다 준 최대의 공로자인 히데아키만은 아직 자신의 진지에서 비를 계속 맞고 있었다.
‘이에야스에게
혼난다’
는 공포가
있었고 또한 자신이 연기했던 역할이 얼만큼이나 거대한 것이었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킨고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듯하군”
하고 이에야스가
말하여 전령(傳令)인 무라코시 모스케[村越 茂助]에게
맞이해 오도록 명했다.
‘저 좆병진에게는
여러 번 손이 가는구먼’
이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곧이어
히데아키가 왔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부축하는 형태로 이에야스의 진지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에야스는, 히데아키에게만은 예(禮)를
취하여 우선 자리에서 내려와, 투구의 턱끈만 풀고 말하길,
“츄우나곤님. 오늘의 전공(戰功)이
아주 크시니 앞으로 원한을 가지지 않겠소”
라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히데아키는
놀라 앞으로 자빠지듯이 절을 하였다. 원래의 태생으로 돌아간 듯 마치 백성과 같았다. 이런 인물이 토요토미 가문의
일문(一門)이었다. 그 보기 흉한 모습에 그곳에 있던 토요토미 계(系)의 여러 무장들 역시 창피해져 모두 눈을 돌렸다. 쿠로다 나가마사가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 소곤거렸다. 마사노리는,
“당연한
것. 참새가 매에게 까불었던 것이네. 그렇다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
라고 말했다. 하지만 마사노리 자신도 아직 사태를 충분히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참새가 몇 시간 동안 역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가 결국 공포에 떤 나머지 뛰쳐나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쥐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만이 그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지하(地下)의 히데요시도 이 양자(養子)가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만드는 일을 할거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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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는
히데아키의 전공을 칭찬하며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0만석을 하사하여 그 공적에 보답하였다. 하지만 그 후 히데아키는
매일 밤 광란(狂亂)하며 음란(淫亂)에 빠졌고 적은 양의 술을 마시곤 취하여 곧이어,
“세키가하라의
전공 일등은 내다!”
고 시녀(侍女)들을 모아서는 칼을 뽑아 들고 전쟁 흉내를 내었다. 보좌하던 노신(老臣)들도
그 광포함을 두려워하여 주요한 자는 대부분 그가 살아있을 때 뿔뿔이 흩어졌다. 곧이어 머리에 병을 얻어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2년 후인 1602년 9월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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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고?”
쿄우[京]의 코우다이인[高台院]은 이 조카의 부고(訃告)를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었다. 계명(戒名)도 물어보지 않고 그렇게 지나갔다.
그녀가 만든 이 양자는 토요토미 가문을 망하게
하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이 세상에서 완수하였다.
- 이에야스. 이에야스의 거성이 에도에 있었기 때문이 이렇게 불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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