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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히데요시소소(小小)한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생각난 듯이,

 킨고[金吾]님에게도 좋은 양갓집이 생긴다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만만세겠군요.”

 하고 히데요시를 찔러보았다. 양자(養子)로 보낼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죠스이가 뭔가를 꾸미기 시작한 것을 알아채었다. 거기에 동참해 주고자, 짐짓 시치미를 떼며,

 뭐 그렇췌~!”

 하고 큰 소리로 말하고선 곧바로 말을 딴 데로 돌렸다. 그 한마디만으로 죠스이는 족했다. 나머지는 양갓집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모우리 가문[毛利]이 좋겠군
 이라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천하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인 것이다. 전성기를 구축한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등장한 이후 그 영지(領地)산인[山陰], 산요우[山陽] 10개 지역[]에 이르며, 노부나가[信長]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오다 가문[織田家] 최대의 적이었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되자, 히데요시의 교묘한 외교 정책으로 인해 모우리 가문은 무릎을 꿇고 토요토미 가문의 종속 다이묘우가 되었다. 마침 당주(當主) 츄우나곤[中納言] 테루모토[輝元]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킨고를 거기로 보내자
 서쪽의 거대 제후와 끈을 이어두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의 토요토미 가문도 든든할 것이고 또한 모우리가문 자신들에게도 든든하니 쌍방에게 득인 것이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小早川 隆景]를 꼬시자
 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참고로 모우리 가문가정(家政)은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항설(巷說)에 말하는 [세 대의 화살]이며 죠스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모토나리가 죽기 직전에 세 명의 아들을 불러, 세 대의 화살을 건네주고는 꺾어 보라고 하였다. 한 대씩 꺾을 때는 간단히 부러졌지만 세 대를 한꺼번에 꺾고자 하니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모든 일이건 협력하라는 교훈이며 그것이 가법이 되어 있다. 이때의 삼형제가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며, 이후 모우리 씨[毛利氏]를 중심으로 킷카와-코바야카와 양 가문은 하나의 연합국가처럼 되어 있었다.

 지금은 장남 타카모토가 죽어 본가(本家)는 그의 아들 테루모토가 잇고 있다. 킷카와 모토하루도 죽어 지금 삼형제 중에서 생존해 있는 것은 종삼위(從三位) 츄우나곤[中納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뿐으로, 이 타카카게 스스로도 큰 영토를 가진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동시에 본가인 모우리 가문의 최고 고문을 겸하고 있다.
 설득하고자 한다면 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일 것이다.

 죠스이건 타카카게건 둘 다 후시미[伏見]에 집이 있다. 죠스이의 집은 이와야마 산[岩山] 기슭에 있으며, 여기서 산을 넘은 다음 동쪽으로 가면 성 밑에서는 가장 광대한 코바야카와 저택이 있다.
 
죠스이는 집을 나섰다. 만약을 위해 이코마 치카마사[生駒 親正]라는 노인과 동행했다.
 
치카마사는 히데요시가 직접 키워낸 다이묘우[大名] 중 한 사람으로, 260석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사누키[岐] 타카마츠[高松] 17만여 석의 신분이 되어 있다.

 둘이서 산을 넘었다. 왼편에 아키야마[秋山]의 언덕에 자라고 있는 거먕옻나무의 단풍이 눈에 아플 정도로 선명했다.

Rhus succedanea L.
Rhus succedanea L. by kodamatic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거먕옻나무]

 일이 있을 때는 둘이서 가는 것이 일본인의 풍습이다. 나중에 서로가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카게는 이미 환갑을 넘기고 있었다. 온후한 인품이지만 센고쿠[戦国] 한창일 때둘째 형 킷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모우리 가문을 끝까지 지켜낸 그의 능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우선 둘을 별실로 인도한 후 그 사이 다실(茶室)을 준비하고 곧이어 거기로 옮겨서 ()에 둘러 앉아 잡담을 하였다.

 건께~ 딴게 아니고 말이지

 라고 죠스이는 고향인 하리마[播磨] 사투리가 혀에 남은 말투로 히데아키 양자 건에 대해서 말했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과 각별한 관계가 된다는 것은 모우리 가문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이 이상 좋을 것이 없지요

 라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과연~ 이는 정말 좋은 이야기군요

 라고 타카카게는 차를 끓이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지만 속마음은 반대였다.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모우리 가문 최대의 위기다'
 하고 생각하였다.

 모우리 가문이라고 하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선조(先祖)도 모르는 벼락치기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다. 타카카게의 망부(亡父) 모토나리가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1000관에 불과한 땅에서 몸을 일으켰다고는 하여도, 모우리 가문 그 자체는 옛부터 명족(名族)으로 카마쿠라 막부[(鎌倉 幕府]의 만도코로[政所][각주:1]의 최고책임자인 오오에노 히로모토[大江 ] 이래의 역력(歷歷)한 가계(家系)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가문에 어디서 주워왔는지도 모르는 히데요시의 친척을 들인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성스러운 신전(神殿)에 똥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타카카게는 생각했다. 역대의 선조들은 둘째치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남보다 더 신경 쓴 죽은 모토나리가 저 세상에서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이는 내가 어떻게 되건 막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타카카게는 결심했지만, 그러나 얼굴엔 미소를 계속 지으며,

 말씀하신 대로 모우리 본가에게 있어서 이 정도로 축하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주 테루모토가 들으면 굉장히 기뻐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고, 둘은 돌아갔다.

 이 후 타카카게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슬며시 집을 나와 후시미 [伏見城]해자(垓子) 근처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세야쿠인 젠소우[ 全宗]를 방문했다.

 세야쿠인 젠소우는 무로마치[室町] 말기의 명의(名醫)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의 제자로 그 능력이 뛰어나 처음엔 궁정의(宮廷醫)였지만 지금은 히데요시의 시의(侍醫)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늙고 병든 몸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히데요시의 그림자처럼 곁을 떠나질 않고 있었기 때문에 전제군주(專制君主)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 세야쿠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자연히 여러 다이묘우들도 세야쿠인을 정중히 대했다. 타카카게도 이 시의장(侍醫長)에게 예물(禮物)을 보내어 히데요시 근처에서 일어나는 정치 쪽 정보를 얻거나 하였다.

 세야쿠인에게 물어보면 죠스이가 말한 것이 히데요시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어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허허~ 저는 처음 듣는 소리군요.”

 세야쿠인 젠소우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히데아키를 양자로 보낸다는 듯한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보낼지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심……’
 타카카게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히데요시의 생각이 아니라면 아직 손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어 좌담(座談)에서라도 "모우리"라고 한마디라도 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다음 날, 타카카게는 후시미 성의 대문을 지나 성 안에 있는 -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저택이 있어서 이름 붙여진 이시다 성곽[石田廓]에 있는 미츠나리의 집을 방문하였다.

 미츠나리를 선택한 것은 그가 죠스이와는 다르게 공식적인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執政官)이며 또한 히데요시의 비서 역할도 겸하고 있기에, 때로는 히데요시의 의사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권세가(權勢家)였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미츠나리를 통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이미 출근하여 집에 없었다. 타카카게는 실망했다.
 
아니지.. 그렇다면……'
 하고 타카카게는 다시 생각했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미츠나리에게 부탁하는 것 보다 오히려 히데요시 곁에서 하루 종일 떨어지지 않는 세야쿠인 젠소우의 입에서 타이코우[太閤]의 귀에 사적인 말로 흘려 보내는 것이 빠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여 곧바로 세야쿠인 저택으로 길을 서둘렀다. 타카카게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로서는 이 이야기에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
모우리 본가'라는 계획이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혼자 생각하고 있다고는 하여도, 이미 이코마 치카마사가 옆에 있던 자리에서 입술을 통해 나온 말이었다. 생각이 아닌 현실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곧바로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가 그대로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타카카게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었다. 이쪽에서 선수를 친다.
 
-
부디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님을 저희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양자로 얻고자 합니다. 이를 허락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하고 타이코우에게 전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가로 향해진 총구를 분가(分家)인 자기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소리를 치는 것과 같았다.
 
죠스이가 생각해주는 척 하는 계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것밖에 없다
 타카카게는 전쟁터에서 머리를 쓰는 듯한 심경이었다. 죠스이와는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의 모우리 공격군 사령관일 즈음, 빗츄우[備中]의 전쟁터에서 서로의 지략으로 무기로 불꽃튀기며 싸웠다. 그때의 인연(因緣)이 쌓이고 쌓여 좋은 마음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 억울한 것은,
 
저 킨고 좇병신 때문에
 라는 것 때문이었다.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인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도 분가이긴 하지만 타카카게에게 있어선 명문가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대대로 아키[安芸] 타케하라[竹原]지토우[地頭]였던 가문으로, 카마쿠라 막부의 가문 목록[御家人帳]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전통 있는 가문이었다. 그런 명문가를 모토나리가 책략을 써 3남 타카카게가 그 가문을 이었다. 타카카게에게는 양갓집이라고는 하여도 이 명문가의 피에 히데아키의 피가 섞여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타카카게의 감정은 그에게만 있는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토요토미 정권의 다이묘우에는 카마쿠라 때부터 이어지는 명문가가 몇몇 있다.
 북쪽에서부터 말하면 사타케 씨[佐竹氏], 모가미 씨[最上氏], 모우리 씨, 코바야카와 씨, 시마즈 씨[島津氏] 등이 그런 명문가이다.
 그들이 비록 지금은 토요토미 가문의 위세에 굴복하였다고 하여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 비천한 피를 경멸하고 있었다. 만약 토요토미 가문이 그들에게 사위를 보내준다고 하면 전부가 타카카게처럼 전율(戰慄)할 것이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서자(庶子)가 있었다. 그런 자기 자식을 제쳐두고 자신의 가문에 히데아키를 맞이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그 감정을 죽였다.

 다행히 세야쿠인 젠소우는 아직 집에 있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자신이 히데아키를 굉장히 원하고 있는 것처럼 히데요시에게 그 말을 전해달라고 이 늙은 의사에게 부탁했다.

 졸자는 타이코우 전하의 깊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라고 우선 말했다.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쓰러진 직후 전선(前線)에 있던 히데요시는 정면의 적인 모우리 씨와 급히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 화친 교섭에 히데요시의 군사 쿠로다 죠스이가 활약하였다. 타카카게의 둘째 형 킷카와 모토하루는 적극 반대하였지만 타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인물을 꿰뚫어보고 히데요시와 싸우는 것 보다 오히려 그에게 천하를 잡게 하고 그 세력하에서 모우리 가의 안태(安泰)를 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하여 결국 그렇게 되었다.

 만약 그 때 화친하지 않고 모우리 쪽이 결전에 임했다면 히데요시는 쿄우[]의 미츠히데를 물리치지 못하고 어쩌면 천하를 놓쳤을 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후에 이 사실을 알고 타카카게를 두텁게 대했다.
 모우리 가문의 분가임에도 독립된 거대 다이묘우로 만들어 치쿠젠[筑前] 1[]이라는 광대한 땅과 치쿠고[筑後], 히젠[肥前]의 각각 두 군() 4개 군()을 잘라 주었고, 관위(官位)도 종삼위(從三位) 츄우나곤[中納言]으로 하여 본가의 모우리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하였다. '깊은 은혜'라는 것은 그걸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늙고 앞으로도 얼마나 살지 몰라 이제는 타이코우 전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하사 받은 이 땅들을 전하의 양자이신 킨고님에게 물려드리고 싶습니다

 세야쿠인도 이 미련 없는 태도에는 놀랐다. 다이묘우라는 자가 그 봉토(封土)를 버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츄우나곤 미치신건가? 그렇지 않음 어지간히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으신건가?’
 하고 세야쿠인은 오랫동안 침묵하며 그 진짜 뜻을 살피기 위해서 타카카게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타카카게에서는 무엇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구 세야쿠인도 고개를 숙여,

 잘 알겠사옵니다

 하고 말한 후 고개를 들어,

 그 후 츄우나곤님은 어쩔 생각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많이는 바라지 않습니다. 산요우도[山陽道] 어딘가에 조그맣게 은거할 자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은거할 곳이라면 보통 기껏해야 3000석 정도이다. 세야쿠인은 말을 잃었다.

 세야쿠인은 서둘러 성으로 등성하여 히데요시에게 전했다. 히데요시는 아이같이 기뻐했다. 이 인물의 천재성은 그런 것 즉 지금보다 나이를 덜 먹었을 때는 뭐든 다 꿰뚫어 본 상태에서 누가 보아도 아이같이 행동하여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굉장함 에 있었지만 말년의 이 시기가 되자 노쇠가 뚜렷하여, 그런 천진난만함은 단순히 소박함으로 끝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코바야카와 가문이 명문가라고 기뻐하는 것에, 보는 세야쿠인이 창피할 정도로 기뻐하며,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는다는 것은 히데아키 녀석에게도 명예다.

 타카카게 안도감에 빠졌다. 그러나 이후 바빠졌다.
 문제가 된 본가의 후계자 자리를 서둘러 메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타카카게는 무리를 하였다. 모우리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타네다 모토키요[種田 元[각주:2]]라는 사람이 있다. 모토나리 말년[각주:3]에 얻은 서자로, 타카카게에게 있어선 배다른 동생이 되지만 생모의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가신의 자리에 있었다. 그의 아들로 미야마츠마루[宮松丸[각주:4]]라는 소년이 있어, 그를 모우리 가문에 양자로 들였다.

 종삼위(三位) 츄우나곤[中納言] 킨고 히데아키로 보면 - 피의 존비(尊卑)라는 점에서 모우리 가문 가신의 자식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무사히 낙착(落着)되었다.
  1. 카마쿠라 막부의 정무와 재정을 담당. [본문으로]
  2. 모토나리의 넷째 아들 '호이다 모토키요[穂井田 元清]'를 말한다. [본문으로]
  3. 모토나리 54세 때. 당시 평균 수명은 50세 근처라고 한다. [본문으로]
  4. 후에 정유재란 때 일본군 우군(右軍) 총사령관이 되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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