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

1591 1 22일 병사 51.

1540~1591.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이부제(異父第[각주:1]). 히데요시를 보좌하며 하리마(播磨) 공략전 등 여러 지역에서 활약. 혼노우(本能)()의 변 후에는 히메지(姫路)()에서 천하 통일을 도왔다. 키이(紀伊), 이즈미(和泉), 야마토(大和)를 영유(領有)하며 [야마토 다이나곤(大和 大納言)]으로 불리는 실력자였다.










히데요시를 지탱해 온 동생


  오다 가문(織田)에서 출세한 형 히데요시의 꼬임에 넘어가 억지로 사무라이가 된 '키노시타 코이치로우 히데나가(木下 小一郎 秀長)'. 하지만 형과 함께 전장(戰場)에서 활약하면서 형의 좋은 조언자, 보좌역이 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타지마(但馬)를 평정한 1581년.

 히데나가가 이즈시(出石)()에 입성하여 타지마를 통치하였으며 히데요시가 타지마, 하리마를 영유하자 1582년 히데나가가 히메지성으로 거처를 옮겨 그 지역의 경영에 힘썼다. 그리고 1585 히데요시와 함께 키이의 네고로(根来), 사이가(雑賀) 토벌에 참가하여 그 지역을 평정하자 히데요시에게서 키이, 이즈미 양 지역이 하사 받아 영지 경영을 위해서 와카야마(和歌山)에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의 시코쿠(四国)정벌에서는 병에 걸려 누워있던 히데요시를 대리하여 원정군을 지휘. 불과 50여일 만에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를 항복시키는 전공을 올렸다. 히데요시는 동생의 이런 생각하지도 못했던 전공을 기뻐하여 야마토, 이즈미, 키이의 3개국() 100만석의 영주로 임명하였고 거성(居城)으로 야마토 코오리야마(郡山)()이 주어졌다.


 히데나가는 히데요시를 닮아 인정미가 넘쳤고 거기에 온후하고 성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큐우슈우(九州) 원정 후인 1588 8월 종이위(従二位) 곤다이나곤(権大納言)에 서임 받으면서 부터는 야마토 다이나곤(大和 大納言)이라 불리며 [토요토미 가문 내에 관한 것은 소우에키(宗易 = 센노리큐우(千利休)]에게, 천하에 관한 일은 히데나가에게]라는 풍설이 돌 정도로 히데나가는 리큐우와 함께 히데요시의 양 팔이 되어 토요토미 정권을 뒤에서 지탱했다.


히데나가가 죽은 후, 갈팡질팡하는 히데요시


 1590 3월.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를 출발, 오다와라(小田原)를 토벌하기 위해 떠났다. 이 때 히데나가는 쿄우토(京都)에 있었는데 1월에 한 때 중태에 빠질 정도로 위중한 병에 걸려있었다. 히데요시는 걱정한 나머지 병상에 있는 히데나가를 세 번 병문안 한 후에야 출진하였고 이 병문안으로 안정을 찾았는지 히데나가의 병이 일단은 나아져, 4 15일에는 야마토 코오리야마에 귀성했다. 하지만 히데나가의 병은 회복되지 않고 재발하였다.


 10월 오다와라 토벌을 끝내고 쿄우토(京都)에 개선한 히데요시는 곧바로 야마토 코오리야마로 달려가 히데나가를 병문안 하였다. 그리고 나라(奈良)의 카스가(春日) 대사(大社)5천석을 기부하여 병이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의뢰하였고 쿄우토(京都)로 돌아와서도 쿄우토(京都) 안팎의 여러 절과 신사에 병이 낫게 하는 기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바램도 허무하게 히데나가는 새해가 밝은 1591 1 22 야마토 코오리야마성에서 죽었다. 향년 51.

 장례는 히데요시가 주최하였고 1 29일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보제(菩提[각주:2])사였던 다이토쿠(大徳)() 소우켄(総見)()에서 코케이 소우친(古渓 宗陳) 화상(和尙)을 도사(導師)로 초빙하여 성대하게 치렀다. 묘는 당초 성 아래인 미노야마(箕山)에 세워진 후 코케이 소우친 화상에 의해 보제소 타이코우(大光)()이 세워져 옮겨졌다.


 히데나가가 야마토 코오리야마성()에 있던 것은 6년여에 지나지 않지만 히데요시를 보좌하는 한편 코오리야마 성()을 크게 개축하면서 성 밑 마을(城下町)을 정비하였고, 옛날부터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절 등이 가진 무력을 해체하여 지역에 바탕을 둔 세력을 뿌리째 없애버리는 등 히데요시의 천하 통일에 이르는 길을 정비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히데나가의 죽음으로 인해, 히데요시는 가족 중에 좋은 조언자를 잃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토요토미 정권의 장래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센노리큐우에게 할복을 명하는 등 히데요시 말년의 폭주가 시작된 것이다.


코오리야마 토요토미가() 폐절(廢絶[각주:3])


 후계자를 낳지 못했던 히데나가는 히데요시와 히데나가의 누나로 칸파쿠(関白) 히데츠구의 생모인 토모의 셋째 아들 히데야스(秀保)를 양자로 삼았다. 후에 [야마토 츄우나곤(大和 中納言)]이라 불린 히데야스가 히데나가의 영지를 이은 것은 그의 나이 13살 때.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성질이 더럽고 나아지질 않았다]고 할 정도였으며 더구나 악성 치질에 걸려 고생하여 이 치질 요양을 위해서 야마토의 토츠카와(十津川) 온천에 간 1595 4 16 잘못해서 절벽에서 떨어져 추락사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죽음을 불길하게 여겨 코오리야마 토요토미가() 2 11년 만에 폐절해 버렸다.


 히데요시는 이후 야마토 코오리야마에 오봉행(五奉行) 중 한 명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에게 20만석을 주고 배치하였지만, 세키가하라(ヶ原)의 싸움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영지를 몰수당했을 뿐만 아니라 야마토 코오리야마성()을 폐성하기로 결정하여 철저하게 부서졌다.


 또한 히데나가의 묘가 있는 타이코우(大光)()은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大徳)()로 옮겨졌는데, 이것은 이장한 타카토라(高虎)1576년에 20살의 나이로 히데나가를 시작으로 1595년 히데야스가 죽을 때까지 코오리야마 토요토미 가()를 섬겼기 때문이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에서 토요토미 가()가 멸망하면서부터 해가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히데나가의 묘를 보고 안타까웠던 타카토라는 토요토미 일족의 묘가 있는 쿄우토(京都)로 옮겼으며 히데나가는 지금도 다이토쿠사()의 타이코우원() 안에 있는 묘소에서 타카토라의 묘와 사이좋게 나란히 잠들고 있다.

  1. 아버지가 틀리고 어머니가 같은 형제 [본문으로]
  2. 사후(死後)의 명복을 빔 [본문으로]
  3. 가문을 없애고 끊기게 함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