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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죠우우지야스'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8.05.02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 칸토우(関東) 무쌍의 패왕 13
  2. 2006.09.01 이마가와 우지자네
  3. 2004.12.02 사토미 요시타카
  4. 2004.11.27 호우죠우 우지야스 1

 에도() 시대에 스즈키 시게히데(鈴木 重秀)라는 사람이 호우죠우 가문의 역대 당주들을 평가하면서 우지야스에 대해서, '문무겸비의 무장으로 생애에 걸쳐 몇 번이나 전투에 나섰지만 패한 적이 없다. 거기에 인덕도 있었다. 이 시대에 관팔주(八州 = 칸토우())의 병란을 평정하여 크게 가명을 높였다. 고금의 명장이다'고 절찬하였다.

 우지야스는 칸토우의 태반을 자신의 산하에 두어, 조부인 소우운(早雲)의 꿈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우지야스가 다스리던 오다와라(小田原)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1551 4. 하코네(箱根) 유모토(湯本)소우운(早雲)사(寺)에 참배하고 오다와라에 들린 쿄우토(京都) 난젠()사(寺)261대 토우레이치오우(東嶺智旺)가 직접 보고 쓴 것이다.

 [유모토의 소우운 사()에서 1(4km). 수도인 오다와라에 도착했다. 거리는 작은 길만 수만 개. 땅에는 먼지 하나도 없다. 동남쪽은 바다이다. 바닷물이 오다와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의 성()은 거목 울창한 곳에 있으며 크고 아름답다. 삼면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의 물은 가득 차 있어 깊고 낮음을 잴 수 없다. 백조나 물새들이 날개를 쉬고 있다. 군주인 우지야스는 겉으로는 문(), 속으로는 무()의 인물로 형벌(刑罰=정치)이 깨끗하여 원근(遠近)이 모두 복종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 시대 천하 무쌍의 패왕이다.]

 이렇게 전성기의 호우죠우 씨()의 오다와라를 굉장히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불패의 용장이라 일컬어지며 16살의 첫 출진(初陣)을 경험한 이후 병으로 죽을 때까지 36번의 전투에 출격하여 한번도 적에게 아게마키([각주:1])를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군의 선두에 서서 적과 부딪쳐 몸에는 도창(刀槍)의 상처가 7군데 있었고, 얼굴에도 2군데의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 몸 정면에 있는 상처를 [우지야스상처(氏康傷)]라고 부르며 존중 받았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그의 사람됨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12살 때였다. 철포는 아직 드물었던 시기로 어느 날 우지야스는 철포의 사격 연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굉음에 놀란 우지야스는 일순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무사가 그것을 보고 웃었다. 우지야스는 참을 수가 없었다. 창피함에 얼굴이 확 빨개져서는 곧바로 작은 칼을 꺼내어 자해(自害)하려고 하였다. 근시(近侍)의 무사가 당황하여 이것을 막았다. 우지야스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우지야스를 부속 가로(家老)인 시미즈()라는 자가 옛날부터 용기 있는 무사일수록 잘 놀란다고 합니다. 뛰어난 말도 성격이 예민하여 잘 놀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참았다고 한다.[각주:2]


 우지야스의 무명(武名)을 천하에 널리 알리게 한 것은 일본 3대 기습전[각주:3] 중에 하나로 꼽히는 카와고에(河越) 전투이다.

 1545 8.

 호우죠우 가문의 영국(領国)과 국경을 접하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 上杉 憲政)는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토모사다(扇谷 上杉 朝定)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와 손을 잡고 우지야스를 일거에 괴멸시키고자 하였다.

 요시모토는 우지야스 측의 스루가(駿河) 나가쿠보(長久保)성(城)을 포위하였고,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역시 공격해 왔다. 한편 노리마사는 토모사다와 함께 호우죠우 츠나시게( 綱成)가 지키는 카와고에(河越)() 탈환을 꾀했다. 카와고에 성() 1537년에 츠나시게에게 빼앗긴 토모사다의 거성(居城)이었다. 츠나시게는 원래 쿠시마(福島)라는 성()이었지만 호우죠우 씨()의 보호를 받으며 우지야스의 동생 격의 신분이 되어 있던 인물이었다[각주:4].

 더욱이 이 카와고에 공성(攻城)에는 우지야스의 매제(妹弟)인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도 가담하고 있었다. 노리마사의 꼬임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카와고에 성()은 노리마사, 토모사다, 하루우지 8만의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어 버렸다. 그리고 반년에 걸친 공격을 받아 언제 낙성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1546 4.

 우지야스는 카와고에 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8천의 병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병력의 차이는 10 1이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우지야스에게 승산이 없었다.

 우지야스는 거기서 사자(使者)를 아시카가 하루우지에게 보내어 카와고에에서 농성(籠城)하고 있는 병사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그래 주신다면 카와고에의 성과 영지(領地)를 쿠보우(公方)님에게 바치겠습니다하고 몇 번에 걸쳐 애원한 것이다. 하루우지는 듣기는커녕 비웃으면서 네놈들이 바치지 않아도 당장 내일 즈음은 성이 떨어질 것이다. 성 안의 병사들은 전부 죽이고 또한 우지야스도 잡아 죽일 테다고 잘난 척 했다.

 우지야스는 또한 우에스기의 부장(副將) 오다(小田)()의 부하인 스게노야(菅谷)라는 자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어떻게든 성의 츠나시게를 도와줄 방법은 없겠습니까? 도와만 준다면 카와고에 성()은 당신에게 받치겠습니다. 만약 전투라도 일어난다면 우리 쪽은 병사 수가 적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고 전했다. 우에스기 측은 우지야스의 이러한 애원에 [호우죠우 측은 겁쟁이 병이 돌고 있다]고 보았다. 그 소문은 우에스기 연합군 전체로 퍼져, 이제는 다 이기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우지야스의 노림수였다. 우지야스는 시노비([각주:5])를 써서 적측의 정세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4 20일 밤.

 우지야스는 경장(輕裝)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돌격대를 편성해서는 적진 깊이 잠입시켜 놓고서는 불을 밝혀 성안에 있던 병사들과 호응하여 기습을 하였다. 어두운 밤 중의 습격에 우에스기 연합군은 단지 당황하여 허둥댈 뿐으로, 결국 도망을 치다 오우기가야츠 토모사다는 전사하였고 노리마사, 하루우지는 간신히 도망쳤다(카와고에 전투:위키 한글판).


 1554.

 그때까지 적이었던 타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삼국동맹(同盟)을 맺었다. 우지야스의 장남 우지마사(氏政)와 신겐의 딸을 결혼시키고, 우지야스의 딸을 요시모토의 아들 우지자네()에게 시집 보내어 상호간에 인척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스루가(駿河)젠토쿠()사(寺)에서 모여 맺었기에 세상에서는 이를 [젠토쿠 사의 회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동맹도 요시모토가 죽은 다음에는 깨어진다.


 우지야스는 민정가(民政家)로서도 뛰어나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보다 먼저 본격적인 검지( 전답의 석고를 정하는 것)와 세제(稅制) 개혁을 행하였고, 전마(傳馬 수송용의 말)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통화를 명나라의 영락전(楽銭)으로 통일하여 상공업자를 보호하는 등 경제 정책에도 능하였다. 또한 아시카가 학교(足利[각주:6])를 원조하거나, 와카(和歌)를 산죠우니시 사네타카(西 )에게 배우는 등 문화인(文化人)적인 측면도 겸비하고 있었다.


[호조 우지야스( 氏康)]

1515년 우지츠나(氏綱)의 아들로 태어나다. 소우운(早雲)에서부터 3대째이다. 1541년 부친 우지츠나가 죽은 뒤 27살의 나이로 가독을 이었다. 카와고에의 야전(夜戰)에서 승리하여 무사시()의 태반을 영유(領有)하였고, 1551년에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히라이(平井)성(城)을 공략하여, 칸토우()를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과도 싸웠다. 1571년 죽었다.

  1. 갑옷의 등 뒤에 묶은 끈을 지칭. 링크타고 가시면 이미지를 볼 수 있습죠. [본문으로]
  2. 우지야스 12살이면 1527~8년경. 많이 알려진 타네가시마(種子島) 섬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 이지만, 위의 우지야스 일화가 실린 [호우죠우 오대기(北条五代記)]에 따르면 1510년에 외국에서 일본 사카이(堺)로 전래되었고 1528년 즈음에 오다와라에 있던 늙은 중(山伏)이 사카이에 갔다가 신기하여 한 정 사서는 우지츠나(氏綱 – 우지야스의 부친)에게 받쳤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나머지는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 [본문으로]
  4. 둘 다 1515년 태생으로 동갑이긴 하다 [본문으로]
  5. 닌쟈(忍者)를 말한다. [본문으로]
  6. 당시 칸토우 지방 최고의 학교 겸 서고. 후에 히데츠구의 강압으로 많은 책을 빼앗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

1614 12 28 병사 77

1538~1614.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아들.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자 가독을 상속. 스루가(駿河), 미카와(三河), 토오토우미(遠江)를 영유했지만 타케다(武田)()에게 스루가를, 토쿠가와(德川)씨에게는 미카와와 토오토우미를 빼앗겼다. 처가인 호우죠우(北条)()를 의지하였으나 후에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에게도 쫓겨나 토오토우미의 하마마츠(浜松)로 거처를 옮겼다. 후에 쿄우토(京都)에서 출가하여 소우긴(宗誾)이란 호를 칭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





유랑의 귀공자


 1560 5월.

 부친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었을 당시 우지자네는 22세였다.

 다음 달인 6월에 죽은 부친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기는 했지만 영내의 동요를 억제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느라 부친의 원수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싸움을 걸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 소극적인 자세가 일문(一門[각주:1]), 후다이(譜代[각주:2])들의 이탈을 초래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손 잡은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스루가에 침공해 온 것은 1568년으로, 많은 가신들에게 버림받은 우지자네는 순푸(駿府)의 이마가와 관()을 지키지 못하고, 아사히나 야스토모(朝比奈 泰朝)카케카와(掛川)으로 피신하였다. 한 해가 다해가는 굉장히 추운 겨울에 우지자네의 부인은 가마 같은 탈 것도 없이 걸어서 도망쳤다. 우지자네 부인의 부친 즉 장인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이 치욕을 갚지 않고선 견딜 수 없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다음해 정월.
 
이번엔 서쪽에서 토오토우미에 침공해 온 이에야스가 카케카와성을 포위하였다. 몇 번의 총공격에도 불구하고 농성군측은 잘 버텼지만 5월이 되자 결국 성을 이에야스에게 넘기고 우지자네는 호우죠우 가문이 파견한 병사들에게 호위받으며 처가댁인 오다와라(小田原)로 갔다.
 
우지자네는 [駿河国守]의 역직[각주:3]을 호우죠우 우지마사의 아들에게 물려주니, 이것으로 노리쿠니(範国) 이래 25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스루가 슈고쇼쿠(駿河 守護職)에, 아시카가 가문과 친족관계인 명문 이마가와 씨()는 실직적으로 멸망한다. 그 우지자네는 이즈(伊豆) 토쿠라(戸倉)성이나 오다와라 근처의 하야카와(早川)로 거처가 옮겨졌다고 한다.

 
오다와라 호우죠우씨에게 보호 받던 우지자네의 평온도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다다음 해인 1571년. 우지야스가 죽자 우지마사(氏政 - 우지자네 처의 오빠 즉 매형)는 그 때까지의 정책을 바꾸어 타케다 신겐과 손잡는다. 우지자네는 사가미(相模[각주:4])에서 쫓겨나,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떠난다. 이 때 마지막 가신인 미우라 모토마사(三浦 元政)등에게 여태까지 잘 보필해 주었다는 뜻을 쓴 문서를 써주어서는 떠나 보냈다[각주:5].

 1575년에는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오다 노부나가를 알현하고 케마리(蹴鞠[각주:6])를 보여주었던 것은 유명하다. 이 당시 우지자네는 스루가 국주(駿河 国主)의 자리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여도 영지를 얻는 것에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쿄우토와 하마마츠(浜松)사이를 왕래했을 것이다. 이에야스의 휘하로 타케다 공격에 참가하였고 후방 지원이나 미카와 스와바라(諏訪原)성 수비에 종사하였지만, 타케다씨() 멸망 후 스루가는 이에야스에게 주어진다.


말년의 안식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난 후, 히데요시의 시대가 되자 격세지감을 느꼈는지 출가하여 소우긴(宗誾)이란 호를 칭했다. 무가동량(武家棟梁)이라는 명문가의 이름에서 해방되어 50세가 넘어서 이제서야 자신의 체질에 맞은 삶을 손에 넣은 것이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에 따르지 않고 마지막 거처를 쿄우토로 정했다. 이에야스에게서 오우미(近江) 500석의 영지를 받았다고도 한다.


 우지자네는 쿄우토 시죠우(四条)에 거처를 정하였고, 이마가와씨()가 잘 나갈 때 순푸에 내려와 있던 레이제이 타케카즈(冷泉 為和)의 손자 타케미츠(為満), 야마시나 토키츠기(山科 言継)의 아들 토키츠네(言経)등과 교류를 즐기며 귀족(公家)들이 개최하는 가회(歌會)에 빈번히 참석했다.
 
야마시나 토키츠네에게서 [슈우가이쇼우(拾芥抄)]를 빌려 고전 문학을 배워서는 고전 주석서를 옮겨 적는 것에 몰두하였다. 희귀한 책이나 차 도구 등의 매각을 알선하거나 특기인 환약이나 붙이는 약 등을 만드는 데 힘썼다. 몰락한 쿠게의 전형적인 생활이었다.

 1612
74세의 우지자네에게 마지막으로 전환의 시기가 찾아온다.
 
익숙한 쿄우토의 생활을 정리하고 에도(江戶)로 향했다. 우지자네의 첫째 아들인 노리모치(範以)는 이미 죽었지만, 손자인 나오후사(直房)가 전년인 1611년에 2대 쇼우군(将軍)인 히데타다(秀忠)를 섬겼기 때문에 그를 돌보기 위하여 에도로 갔을 것이다. 또는 차남 타카히사(高久)도 이미 1598년에 히데타다를 섬겨 코우즈케(上野)에 천 석을 받으며 시나가와(品川)()를 칭하며 에도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늙은 양친을 에도로 맞이했다고도 할 수 있다. 우지자네는 에도로 가는 도중 순푸에서 고희를 맞이한 이에야스를 방문하여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해, 오랫동안 역경을 함께 보내 왔던 부인을 잃는다. 이 때문에 기운이 쇠했는지 뒤를 쫓는 듯 다음 해인 1614년 에도에서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막을 내렸다.

 
손자인 나오후사는 그 후 코우케(高家[각주:7])의 반열에 오르고, 영지도 더해졌으며 조정 관위도 종사위하(從四位下)로 올라갔다. 우지자네 부인의 5주기에 해당하는 1618년에 우지자네 부부가 대좌하는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짜리 몽탕한 체형, 커다란 코는 요시모토와 닮았다. 한 켠에는 책상이 그려져 겐지(源氏) 동량(梁)의 명문가이면서도 풍류의 세계에 살았다는 글이 덧붙여져 있다.

 
역사가 어떤 평가를 내리건 말년의 우지자네는 자신이 살고 싶은 생을 살았으며 일족과 함께 행복한 생활을 보냈을 것이다.
  1. 친족들을 이름. [본문으로]
  2. 대대로 섬겨온 부하 가문.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4. 오다와라가 있던 지방의 이름. [본문으로]
  5. 이런 문서는 다른 가문에 취직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상급 귀족(公卿)들이 발로 하던 공놀이. 현재 축구의 리프팅과 비슷하다. [본문으로]
  7. 막부의 제례를 감독하던 직책. 또한 쿄우토 조정에서 오는 사자(使者)의 접대나, 쇼우군을 대신하여 쿄우토의 조정으로의 사자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

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

1574 6 1 병사(病死)


1507 ~ 1574.

호우죠우(北条)씨의 원조를 얻어 숙부 요시토요(義豊)를 무너뜨리고 아와(安房)를 장악하였다. 후에 카즈사(上総)에 진출하여 쿠루리(久留里)성을 본거지로 삼았다. 바다를 건너 카마쿠라(鎌倉)미우라(三浦)를 침공하는 등 호우죠우(北条)씨와 대립. 미후네야마(三船山)합전(合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카즈사(上総)를 확보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에서)






호우죠우(北条)씨에 철저항전


 센고쿠(戦国) 초기의 칸토우(関東)의 무장들 사이에는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있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원군을 요청 받아 에치고(越後)에서 곧잘 코우즈케(上野), 무사시(武蔵), 사가미(相模)등 칸토우(関東)로 진공(進攻)해 오면 호우죠우(北条)씨를 따르고 있던 무장들도(領內)를 통과하는 동안만은 켄신(謙信)에게 신종(臣從)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을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 했다.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나 우지마사(氏政)도 켄신(謙信)과 직접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피하여 퇴각하는 일도 많아 결국 켄신은 커다란 수확을 올리는 일 없이 에치고(越後)로 돌아갔다. 그 후 칸토우(関東)는 다시 원래대로 호우죠우(北条)씨의 세력하(勢力下)에 두어졌다. 이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졌다. 그러한 주변 정세 속에서 어디까지나 호우죠우(北条)씨에게 끝까지 항전을 계속 한 것이 보우소우(房総 아와(安房)과 카즈사(上総)의 양지방을 이름)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 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였다.


 그런 요시타카(義堯) 1534년 부친 사네타카(実堯)의 원수인 숙부 사토미 요시토요(里見 義豊)를 물리치고 사토미가()의 당주(当主)가 되어 아와(安房) 일국(一国)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는 호우죠우 우지츠나(北条 氏綱 우지야스의 부친)의 원군에 의지했었다.


 그러나 3년 후.

 호우죠우(北条)씨가 보우소우(房総)에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뒤로는 약 40여년에 걸쳐 일관돼게 호우죠우씨를 적대하며 싸웠다.

 호우죠우씨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진공(進攻)을 경계하면서도 뒤로는 언제나 사토미 요시타카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토미 요시타카가 적자(嫡子) 요시히로(義弘)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준 것은 1561년으로 요시타카 55, 요시히로는 32살 때였다. 이 해의 3 우에스기 켄신은 호우죠우 우지야스의 오다와라(小田原)성을 2개월간에 걸쳐 포위하였는데 사가미(相模)를 제외한 칸토우(関東) 7개국의 무가(武家) 250여 가문이 참가하였고 그 중에는 요시타카를 대신하여 참가한 요시히로도 있었다. 보우소우(房総) 사토미(里見)씨의 통솔자로서 대외적인 요시히로의 데뷔 무대였지만 사토미씨의 실권은 이후로도 카즈사(上総) 쿠루리(久留理)성에 있던 요시타카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평온한 은거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투를 벌이는 사토미(里見), 호우죠우(北条)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와 몇 번이고 싸웠다.

 그중에서도 중대한 전투가 세번있었다. 1538년과 1564년 두번에 걸친 시모우사(下総) 코우노다이(国府台)의 싸움에서는 두번이나 대패하여 아와로 도망쳐 돌아왔다.

 두번째 때에는 우지야스()이 카즈사(上総)까지 공격해 들어와 한때는 요시타카의 거성(居城) 쿠루리성도, 요시히로의 사누키(佐貫)성도 점령당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세력을 되찾는다.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사토미씨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카즈사로 침공하여 1566년 미후네야마(三船山)에 요세를 쌓았다. 요시히로의 사누키성에서 북쪽으로 불과 4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다음해 우지야스는 우지마사(氏政), 우지테루(氏照)에게 3만의 병사를 주어 사누키성, 쿠루리성의 공격을 명했다.

 요시타카는 쿠루리성에서 아들인 요시히로에게 기동전(機動戰)을 명했다. 8천의 병력으로 선수를 쳐서 미후네야마(三船山)의 호우죠우군()을 남과 북에서 협격했다. 호우죠우군 3만은 산 위에 있었기에 잘 움직이질 못하고 밀려 무너지는 형태로 서쪽의 쇼우지(障子)계곡으로 내려갔으나 그곳은 땅이 물렁물렁해 발이 빠져 전투태세를 취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사토미군의 맹공을 받았다. 호우죠우군은 2500여의 사상자를 내고는 패주했다.

 사토미 요시히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선(兵船)을 보내어 미우라(三浦) 반도의 키쿠나우라(菊名浦)까지 계속 항해하여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수군(水軍)을 물리쳤다. 호우죠우씨의 사토미 공략은 대패로 끝나 번 다시 보우소우(房総)로 침공하지 않았다.


무너진 호우죠우 협격책(挾擊策)


 미후네야마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요시타카는 이미 61.

 계속해서 호우조우씨 토멸(討滅)에 의욕을 보이며 시모우사(下総)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569 지금까지 함께 호우죠우씨를 협격하고 있던 우에스기 켄신이 호우죠우와 동맹을 맺어버렸다. 타케다 신겐의 스루가(駿河) 침공과 서진(西進)에 따른 결과였다.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를 칠 절호의 기회를 잃었고 켄신의 배반에 격노하며 반대로 신겐과 동맹을 맺어 호우죠우씨 협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2년 후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켄신과 절교하며 타케다 신겐과 재동맹을 맺었기에 요시타카, 효시히로 부자는 다시 우에스기 켄신과 반()호우죠우의 공투(共闘)동맹을 맺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상경(上京)으로 인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의 행동이 크게 변화할수 밖에 없던 것이 보우소우(房総)의 사토미 요시타카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1574년 6월 1일.

 요시타카는 카즈사(上総), 시모우사(下総)의 산과 들이 내려다 보이는 쿠루리성에서 반()호우죠우의 불길을 계속 지펴온 68년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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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우지야스(北条 氏康)

1571 10 3 병사(病死) 57

1515 ~ 1571.

후 호우죠우(後北条) 3대 당주(当主). 우지츠나(氏綱)에게 가독(家督)을 상속 받은 후 오다와라(小田原)성을 본거지로 삼아 사토미 씨(里見氏)나 이마가와 씨(今川氏)와 다투며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카와고에(河越)전투에서 쓰러뜨렸다. 또한 타케다 씨(武田氏), 이마가와 씨와 삼국동맹을 맺고, 네가와(利根川) 강 이남의 칸토우(関東)를 영국화(領国化)했다.











소우에츠(相越[각주:1])동맹에 숨겨진 계산


 1568 11월 말.

 카이(甲斐)국의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갑자기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영국(領国)스루가(駿河)로 침공을 개시했다. 은밀히 미카와(三河)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동맹을 맺었던 신겐의 움직임이었다. 코우소우순(甲相駿[각주:2]) 삼국동맹을 맺고 있던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우지마사(氏政) 부자는 이런 갑작스런 동맹파기에 놀랐고 신겐의 배신에 분노하여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지원할 것을 표명하곤 곧바로 스루가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신겐의 행동에는 우지마사의 부인 오우바이인(黃梅院) 1566 6월에 죽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오우바이인은 신겐의 딸로 코우소우순(甲相駿) 삼국동맹 체결의 결과로 오다와라(小田原)성으로 시집왔었다.

코우소우순 삼국동맹이 붕괴되자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동맹을 맺고 신겐의 스루가 침공을 저지하는 방침을 세웠다. 소우운(早雲) 이래 칸토우(関東) 평정을 진행시켜 온 호우죠우 씨(北条氏)와 이에 대항하는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씨(上杉氏)의 종가 격인 켄신(謙信)과는 그야말로 앙숙이었다. 이런 앙숙과의 동맹에 대해서 우지야스는 어떠한 정치적 계산을 가지고 임했을까?


 우에스기 켄신은 이미 1561 4월 오다와라성을 공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카마쿠라(鎌倉)의 츠루오카 하치만 궁(鶴岡 八幡宮)의 신사에서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의 직책을 물려 받았으며 무로마치(室町)바쿠후(幕府)도 이를 공인 하고 있었다.

 한 쪽인 호우죠우 우지야스도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각주:3])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와 인척관계로 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우지(足利 義氏)는 완전히 우지야스의 지배 아래 있었다.


 켄신도 장년에 걸친 신겐과의 항쟁에 결착을 지을 기회가 왔다며 이 소우에츠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부(祖父)때 부터의 숙적인 호우죠우씨와의 정치적 관계를 어떻게 유리하게 전개시켜 갈 것인가를 충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호우죠우 씨에게 공격받고 있던 북 칸토우(北関東)의 호족들은 1561년 가을에 칸토우(関東)에서 에치고로 귀국해 버린 켄신에게 실망하여 대부분의 호족들은 켄신의 칸토우 통치가 좌절되었다고 보고 있었다. 우지야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력 호족들을 지배하에 거두어 칸토우 북진 정책을 추진했다. 하극상(下剋上)이 활발한 칸토우 지방이긴 하였지만 아직까지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나 코가쿠보우(古河公方)의 권위는 인정받고 있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지야스는 생각했다. 켄신은 독신이기에 친아들이 없다. 그 켄신에게 양자를 보내면 언젠가 켄신이 죽은 뒤에 그 양자가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를 이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아들인 우지마사(氏政)의 대()가 되었을 때는 코가쿠보우(古河公方)와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의 두개의 커다란 전통적 권위가 호우죠우씨의 수중에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지야스의 최후


 예상대로 소우에츠(相越)동맹을 쌍방의 계산이 얽혀 체결이 늦춰지고 있었다.

 켄신에게 보낼 양자의 인선에서도 우지야스와 아들인 우지마사 사이에서 엇갈리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우지야스의 숙부 호우죠우 소우테츠(宗哲 = 겐안(幻庵))의 셋째아들인 사부로우(三郞) 후에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 景虎)가 되었다.


 소우에츠 동맹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한 후 우지야스가 병중(病中)에 있던 1569년 가을 체결되었다. 우지야스는 이 때 이미 많이 병들어 있어 다음해인 1570년 여름에는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 해의 8월에 켄신의 사자로서 오다와라성에 와 있던 오오이시 요시츠나(大石 芳綱)는 본국의 야마요시 모리요시(山吉 盛吉)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지야스는 자식들의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가 되어 타케다 신겐이 오다와라로 공격해 오는 것도 모를 정도이다](上杉文書)고 전하고 있다.

 확실히 우지야스의 싸인이 들어간 편지는 같은 해인 1570년 6월 29 호우죠우 우지쿠니(北条 氏邦)에게 보낸 것 이후에는 확인할 수 없게 되어 병 상태가 상당히 진행되었다고 생각되어 진다. 중병(重病)으로 자신의 싸인을 쓸 힘도 없었을 것이다.


 1571년 4월 15 켄신에게 보낸 우지야스의 편지(上杉文書)에는 싸인 대신 그 위치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도장이 찍혀 있어 병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고 생각된다.


 1571년 10월 3.

 우지야스는 오다와라성에서 죽었다. 향년은 57세였다.

[大聖寺殿東陽宗岱公大居士]라고 법명을 받고 하코네(箱根) 소우운(早雲)()에 안장되었다다고 하지만 이바라키(茨城)() 코가(古河)시의 절이라는 설도 있어 묘소(墓所)는 확실하지 않다. 바로 그날로 난죠우 시로우사에몬(南条 四郞左衛門)이 코우야(高野)산의 코우시츠인(高室院)에게 우지야스 죽음의 보고가 전해져 극락왕생을 비는 법회를 빌어 달라는 의뢰가 왔다. 유언장은 발견 되지 않았으나 소우에츠(相越)동맹을 관두고 역시 신겐과의 소우코우(相甲)동맹을 부활시키도록 우지마사에게 유언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 사가미(相模)와 에치고(越後)의 머릿 글자를 따서. [본문으로]
  2. 카이(甲斐), 사가미(相模), 스루가(駿河)의 머릿글자를 따서. 각각 타케다 가문, 호우죠우 가문, 이마가와 가문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칸토우 쿠보우(코가 쿠보우)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칸토우를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곳의 책임자를 높이는 말. 코가(古河)는 당시 쿠보우가 있던 지역(처음엔 카마쿠라에 있었으나 혼란을 거듭하는 시기에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칸토우칸레이는 이 쿠보우를 보좌하는수상 격.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