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시타 가쓰토시(木下 勝俊)

1649 6 15 병사 81

1569 ~ 1649.

호는 쵸우쇼우지[長嘯子=장소자] .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조카. 와카사[若狹]의 오바마성[小浜城]성주였으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임무 방임죄로 영지(領地)를 잃었다. 후에 풍류의 세계에 살며 가인(歌人)으로 이름을 남겼다. 저서로는 가집(歌集) '쿄하쿠슈우[举白集]'











전도유망했던 와카사 소장(若狹少将)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컬어 '천하를 가르는 싸움'이라 하는데 이번에 등장하는 무장 키노시타 카츠토시에게 있어서도 인생이 갈려 버린 싸움이었다.

 카츠토시는 1569토요토미노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막내 동생이 히데토시[秀俊] - 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각주:1]였다. 성인식을 치른 후 카츠토시는 1548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 히데요시를 따라 종군하였는데 아마 이것이 전장에 처음 출진일 것이다.

 

 1587년.

 큐우슈우[九州] 정벌에서도 1천의 병력을 이끌고 종군했다. 이 시기에 시키부다이후[式部大輔]에 임관.

 다음해 1588년 4 14 쥬우라쿠테이[聚樂亭]로 천황이 놀러 갔을 때, 카츠토시는 칸파쿠[関白] 히데요시의 우마차 바로 뒤를 따랐다. 그때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그 뜻을 적은 서약서에 [타츠노 지쥬우 토요토미노 카츠토시[龍野 侍從 豊臣 秀俊]]라 서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당시 하리마[播磨] 타츠노 성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90년.

 칸토우[関東], 오우슈우[奧州] 원정에서는 9백명을 동원. 이어서 1592년 조선 출병으로 인해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주둔하지만 조선에는 건너 가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591 1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뒤를 이어 와카사 오바마 6 2천석으로 이봉되었다. 이 때 동생인 토시후사[利房]도 같은 와카사 내의 타카하마 성[高浜城] 2만석으로 봉해졌기에 카츠토시, 토시후사 형제가 다이묘우[大名]로서 와카사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1598 4월에는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코노에노곤쇼우쇼우[佐近衛権少将]에 임관되었기에, 와카사 쇼우쇼우[若狹少将]라 불렸다. 키타노만도코로의 조카, 거기에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秀吉]의 친족이기에 카츠토시의 앞날은 그야말로 전도유망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2년 뒤에 운명의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맞이한 것이다.


후시미(伏見)성의 수비에서 도망치다.


 1600 7월.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토벌하기 위해 칸토우로 내려가면서, 카츠토시에게 후시미 성의 수비를 명령하였기에 카츠토시는 후시미 성의 마츠노마루[丸]를 수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를 타도하려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의 서군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자 몰래 후시미성에서 빠져나온다. 공격군 중에는 동생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츠토시가 후시미성의 수비를 방기(放棄)한 것은 이에야스의 명령을 배신하고 서군에 가담한 것을 의미했다. 결국 서군의 맹공을 받은 후시미성은 곧바로 낙성되었고 이에야스의 부하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등 농성군은 장열한 전사를 했다.


 9 15일 세키가하라 전투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나자 전후 처리과정에서 임무 방임의 책임에 따라 와카사 오바마 62천석을 몰수당한다. 이때 카츠토시의 정실 모리 씨[森氏]는 카츠토시의 행동에 정이 떨어져 비구니가 됨과 동시에 카츠토시에게 시를 한 편 보내고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다. 참고로 이 정실 모리씨는 예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력 부장이었던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딸로,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때 전사한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여동생이었다.


낙동[洛東[각주:2]]의 은거자


 그 후 다이묘우에서 전락하여 낭인이 된 카츠토시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의 코우다이 사[高台寺]에서 죽은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고 있던 키타노만도코로는 조카인 카츠토시를 불쌍히 여겨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608 8월.

 카츠토시의 부친인 키노시타 이에사다가 쿄우토에서 죽자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에사다의 영지였던 빗츄우[備中] 아시모리[足守] 2 5천석을 카츠토시와 토시후사에게 나누어 물려받게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끼어든 키타노만도코로가 이에야스의 명령과는 다르게 이에사다의 영지를 카츠토시 한 명에게만 몰아주었기에 격노한 이에야스는 영지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시모리 2 5천석은 아사노 나가마사의 둘째 아들인 나가아키라[長晟]들에게 주어 버렸다. 이 직후 다시 다이묘우가 되지 못한 카츠토시는 머리를 깎고 '쵸우쇼우지[長嘯子]'라 호를 칭한 것 같다.


 1610 6월.

 카츠토시는 키타만도코로의 영지인 셋츠[摂津] 히라노 장[平野庄]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 관리직도 원래는 부친 이에사다가 하고 있던 것으로 영주(領主)인 키타노만도코로의 배려로 카츠토시가 이어받게 된 것이다.

 후에 히가시야마에 은거한 카츠토시는 와카[和歌]의 길을 정진하면서 근세 초기의 와카의 무대에 이름을 남겼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 하야시 라잔[林 羅山]등의 문인이나, 상급귀족[堂上=도우죠우], 하급귀족[地下=지게]의 사람들과 넓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1649년 6월 15 쿄우토 서쪽의 오오하라노[大原野]에서 81세로 죽었다. 묘는 숙모인 키타만도코로가 잠든 코우다이 사에 만들어졌다.

  1.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즉 금오중납언. [본문으로]
  2. 쿄우토(京都)의 동쪽을 이름 [본문으로]

유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1607 4 8 병사 34

1574 ~ 1607.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차남으로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형. 아명은 오기마루[於義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어, 큐우슈우[九州] 정벌에서 처음 전장에 출진했다. 후에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의 양자가 되어 시모우사[下総] 유우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에치젠[越前]을 하사 받았다.









쇼우군[将軍]이상의 성망(聲望)


 유우키 히데야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이지만 출생할 때부터 기묘한 소문이 따라다니고 있어서[각주:1] 어릴 적에는 부친에게도 푸대접을 받았다.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내졌고, 그  히데요시도 또한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 양자로 보냈다.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쪽으로 복귀하여 세키가하라에서는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진을 치고서 북방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방비한 것이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쇼우군의 자리는 이모제(異母弟)인 히데타다가 물려받았지만 에치젠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영주(領主)로서 68만석을 받은 것 외에도 와카사[若狹]시나노[信濃]월경지까지 합치면 카몬(家門[각주:2]), 후다이(譜代[각주:3])중에서는 대인 75만석의 신분으로 출세했다. 카가[加賀] 100만 석인 마에다 가문[前田]에 대한 방벽이라는 중대한 역할이 맡겨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부친 이에야스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 쇼우군 히데타다가 확실히 그를 제어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을 가질 수 없었던 듯하다. 히데타다도 형인 히데야스에게는 조심 또 조심을 하여 후시미[伏見]에 있던 히데야스가 처음으로 에도[江戶]에 왔을 때는 매사냥을 핑계로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을 나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에도성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짧은 장년(壯年)시대


 이렇듯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의 히데야스였지만 불행하게도 34세라는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다.

 에치젠의 국주(国主)가 된 1600 12 그는 아직 29세였다. 그 때부터 죽을 때까지는 6년여.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때가 이미 말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실제로 에치젠에 입국했던 것은 1601 5월인데 최초로 한 일은 영지를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중신들에게 기분 좋게 나누어 줌으로 인해 자신의 직할령이 부족하여 부족한 분은 사도[佐渡]에서 에도로 보내지는 금이나 물자에 통행료를 메겨 징수해서 메웠다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전투는 잘해도 경제관념은 부족했던 모양이다.[각주:4]


 양부(養父)인 유우키 하루토모와 그의 식솔들을 시모우사의 유우키에서 키타노쇼우로 불러들였으며, 유우키 가문[結城)]의 사원(寺院) 등을 이전하거나 키타노쇼우 성의 개축, 정비, 새로운 혼마루[本丸[각주:5]]의 건축도 당초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한 공사들에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은 여러 제후들이 협력했다고는 해도 히데야스의 고생도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에 무사들이 모여 사는 곳[각주:6]이나, 상인들의 마을[각주:7]을 조성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126개의 마을, 인구 2 5천여의 성 밑 마을(城下町)이다. 새로운 농업, 산업 정책의 책정이나 친번(親藩[각주:8])으로서 막부를 도우는 것 등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악질적인 병에 목숨을 빼앗기다


 1606년.

 히데야스는 마츠다이라 성[松平]을 하사 받아 토쿠가와 일문으로 복귀(이설이 있다)하였으며, 유우키 가문 5남 나오모토[直基]가 잇게 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궁궐의 증축, 은퇴한 텐노우[天皇]를 위한 센토우어소[仙洞御所] 조영 공사의 총 책임자를 맡아 조정에도 그의 존재를 인식시켰다. 그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궁중에서 쾌유를 빌며 신에게 받치는 춤(神楽=かぐら)이 행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히데야스의 육체는 이미 병마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미 궁궐 조영 중에도 일상생활은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공사 종료 후 막부가 히데야스를 후시미의 죠우다이[城代[각주:9]]에 임명하지만 히데야스는 곧바로 사임. 1607 3월에는 영국(領国)인 에치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윤 4 8일에 병사한 것이다.


 그의 병은 당창이라고 하는데 알기 쉽게 말하면 매독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명했던 [이즈모의 오쿠니(出雲のお)] 등 여자 카부키 배우들과 문란한 교재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을 보면 그 방면에서 감염되었다고 여겨진다.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코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보면 이 병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장남 타다나오[忠直]가 광란 끝에 카이에키[改易[각주:10]]당한 것도 부친에게서의 유전으로 여겨진다.


 오쿠니를 초대한 잔치에서 그녀에게 [너는 천하 제일의 무녀(舞女)가 되었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무장이 되지 못하였구나]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불행한 탄생으로 만들어진 히데야스의 마음에 있던 그림자는 끝까지 지워지지 않고 증식하여 그것이 병마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1. 모친이 헤픈 여성이기에 실제로는 이에야스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 [본문으로]
  2. 어삼가(御三家)와 어삼경(御三卿)를 제외한 쇼우군 가문(将軍家)인 토쿠가와(徳川)의 일문친척인 문벌. [본문으로]
  3. 주로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이에야스를 섬기던 문벌. [본문으로]
  4. 실제로 히데야스가 전투를 행한 적은 기껏해야 한 번이다. [본문으로]
  5. 성의 심장부인 천수(天守)를 둘러싼 성곽. [본문으로]
  6. 武家町 [본문으로]
  7. 町人町 [본문으로]
  8. 토쿠가와 가문의 일족친척들이 번주로 있는 번. 여기에는 어삼가(御三家)나 어삼경(御三卿)도 포함된다. [본문으로]
  9. 죠우다이[城代]는 성주의 대리를 뜻하며, 특히 후시미성의 죠우다이는 당시 토요토미 가문과 쿄우토[京都]의 감시, 서국으로 간 토요토미 가신들의 감시 등 막중한 임무와 권한이 주어졌다. [본문으로]
  10. 지위와 땅을 뺏어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