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의 비극은 부친 신겐[信玄]이 너무나도 거대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겐이 죽은 뒤 그 대단했던 다케다 가문[武田家]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직 신겐이라는 거인과의 끈으로 이어져 있던 노신(老臣)이나 숙장(宿將)들 사이에 어린 카츠요리[勝頼]를 얕보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겐이 죽은 지 11일째에 카츠요리는 숙장들에게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는 기청문(起請文)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츠요리에게는 초조함이 있었다. 빨리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서 노신들의 콧대를 꺾고 싶었다.

 신겐은 “3년간 죽음을 숨겨라. 병사를 일으키지 말고 영토를 지켜라”하고 유언을 남겼지만, 카츠요리는 그것을 기다릴 수 없었다.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도발해왔기 때문이다. 타케다 측의 미카와[三河] 전선기지인 나가시노 성[長篠城]을 점거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츠쿠데 성[作手城]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 信昌][각주:1]가 토쿠가와 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격노한 카츠요리는 노부마사의 부인과 동생을 십자가에 메달아 옆구리를 찔러 죽였다.

 1575년. 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가 나가시노 성주가 되었다. 이제 카츠요리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노신들의 간언(諫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츠요리가 정병 1만5천을 이끌고 나가시노를 향해서 코우후[甲府]를 출발한 것이 이 해의 4월 5일이었다.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타케다 군은 나가시노 성(城)을 포위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그러던 중 오다-토쿠가와의 원군이 도착. 결전의 장소는 나가시노 성 밖의 시타라가하라[設楽原]로 옮겨졌다.

 노신들은 주저하였다.
 “결전을 피하고 우선은 병사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카츠요리는 듣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오다-토쿠가와와의 결전을 정했다.

 1575년 5월 21일.
 이날 나가시노 성 밖의 시다라가하라에서 펼쳐진 전투는 일본역사상 획기적인 전투로써 너무나도 유명하다. 정예를 자랑하는 카이[甲斐]의 기마대가 출격했다. 아침안개 속에서 중앙대, 우익의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부대에서 함성이 일었다.

 선두가 오다-토쿠가와의 마방책(馬防柵)을 향하고 돌입하여 단번에 유린하고자 했던 그 순간 엄청난 굉음의 총성이 일었다.
 오다 군의 일제사격이었다. 일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카이[甲斐]의 인마(人馬)가 연달아 쓰러졌다. 보통이라면 이런 후 적과 아군이 뒤섞여 백병전으로 이어질 터였다. 그런 때야말로 카이의 기마 병단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최초의 사격으로 상처를 입지 않은 기마대가 개의치 않고 돌진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또다시 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아무리 용맹하다 하는 타케다 기마대도 이 새로운 전법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은 노부나가가 고안한 전법이었다. 노부나가는 아시가루[足軽]의 철포집단 3천명을 3대로 나누어, 천 정씩 교대하며 쉴 틈 없이 일제사격을 반복하게 한 것이다. 당시 유효 사정거리는 기껏해야 100미터였는데, 노부나가는 카이[甲斐]의 군세를 마방책 앞으로 충분히 끌어들인 다음에 섬멸한 것이다.[각주:2]

 타케다 군은 도망. 사상자 1만여에 더해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 바바 노부후사 등 유명한 무장들도 다수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 그야말로 멸망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전이었다.

 1582년에 오다 군의 진공이 시작되자 타케다에 속해있었던 장수들의 배반이 이어졌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木曽 義昌]의 모반은 타케다 가문 붕괴에 박차를 가했다. 요시마사는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두고 있는 소위 친족이었다. 그 외에도 타케다의 앞날이 어둡다 보고 적에게 달려가는 가신들이 속출하였다.

 결국 타케다 가문의 본거지 신푸 성[新府城] 최후의 날이 왔다.
 성에서 도망치는 초라한 카츠요리의 모습을 당시의 기록자는, [산길을 맨발로 걸었기에 발은 붉게 물드니, 도망자의 모습 애처롭도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으니….]라고 전하고 있다.

 1582년 3월 11일.
 카츠요리 일행은 불과 100여명. 무사는 그 중 43명이 되어 있었다. 후에후키가와[笛吹川] 천을 거슬러 올라 최후의 거점으로 정해두었던 텐모쿠잔[天目山] 산으로 향했다. 산허리의 협곡에 있는 마을 타노[田野]까지 갔지만, 여기도 안주의 땅은 아니었다. 다음날 수천의 오다 군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좁은 계곡은 눈뜰 수 없을 정도의 참상이 되었다.

 이때 츠치야 소우조우 마사츠네[土屋 惣蔵 昌恒]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겨, 외길을 타고 공격해 오는 적병을 활로 쏘아 수십 명을 쓰러뜨렸으며, 다음에 칼을 쥐고 싸워 '소우조우 한 손 베기[惣蔵片手斬り][각주:3]'라는 용명(勇名)을 후세에 남겼다. 코미야마[小宮山], 아키야마[秋山] 등의 용사들도 달려드는 군세 속에서 칼춤을 추며 수십 명을 베었다.

 전멸은 이제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카츠요리의 아들 노부카츠[信勝]도 십문자[十文字] 창을 들고 눈부신 분전을 펼쳤지만 허벅지에 총탄을 맞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 일족인 승려(僧侶)와 서로를 찌르는 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일족의 최후였다. 카츠요리는 부인[각주:4]에게 살아서 도망칠 것을 권했지만 부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렸다. 19살의 그녀는 법화경(法華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난 후 사세구(辭世句)를 읊은 뒤 자신의 가슴에 몸칼을 찔러 자결했다.

 카츠요리는 자결하는 여성 16명의 자살을 일행의 장로(長老)가 도와주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카츠요리는 배를 가르고 자결했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46년생. 신겐[信玄]의 넷째 아들로 1573년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미노[美濃]에 침공하였고,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 등에도 진출하지만, 나가시노[長篠]의 패전 이후 회복하지 못하였고,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오다 군[織田軍]과 싸우다 죽었다. 37세였다.

  1. 당시는 아직 사다마사[貞昌].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노부나가[信長]에게 이름자 하나를 하사 받은 뒤에 ‘노부마사[信昌]’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상의 이야기는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신쵸우키[信長記]에서 거론된 픽션으로 지금은 의문시되고 있다. [본문으로]
  3.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6번째 딸. [본문으로]

<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영어판 >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부하 장수로 유명한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는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그는 용모가 특이했다고 한다. 거기에 에비스(えびす(모습))다이고쿠텐((모습))이 입고 있는듯한 카미코로모(紙衣 두꺼운 종이에 과일인 감의 즙을 발라 만든 천)로 된 하오리(羽織)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남과 다른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듯 하다[각주:1]. 품행은 특이했지만 붓글씨는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주가(主家)인 타케다(武田) 가문과는 대단히 짙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 타케다 가문의 선조 노부타케(信武[각주:2])의 넷째 아들인 시로우 요시타케( 義武)카이(甲斐)아나야마(穴山)를 영지(領地)로 삼아서는 아나야마 씨()를 칭했다고 한다. 그것뿐이라면 동족(同族)에 지나지 않겠지만 바이세츠의 모친은 신겐의 누나이며, 신겐의 딸 켄쇼우인(見性院)은 그의 부인인 것이다. 신겐은 외삼촌이며 또한 장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나 짙은 혈연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문을 배신하고 적 측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간 것이다.


 신겐이 죽고 젊은 카츠요리()가 타케다 가문의 당주가 되고 난 바로 다음부터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문을 배신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바이세츠는 당시 스루가(駿河) 에지리(江尻) 성주[각주:3],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하마마츠(浜松)성(城)과는 거리적으로도 가까워, 카이(甲斐)의 산골과는 달리 오다(織田)()나 토쿠가와 씨에 관한 새롭고 자세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던 장소에 있었다.


 바이세츠가 일찍부터 배신을 마음에 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1575 5월 나가시노(長篠) 전투 때의 일이다. 바이세츠는 아군의 질 것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먼저 예상하고는 전쟁터에서 가장 먼저 이탈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정강(精剛)을 자랑하던 코우슈우 군단(甲州軍團)은 근대전법의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신겐 때부터 무용을 자랑하던 많은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1581.

 바이세츠는 카츠요리에게 진언하여 니라사키(韮崎)신푸(府)성(城)을 쌓게 만들었다. 코우후(甲府)에서 이곳으로 타케다의 본거지를 옮긴 것인데, [사람은 성벽, 사람은 성]이라 말하며 성()이라는 것을 쌓지 않았던 신겐 시대를 뒤돌아볼 것도 없이, 이 축성이야말로 타케다 가문에 말기적 증상이 도래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이 다음 해(1582), 타케다의 유력한 부하장수인 키소 요시마사( 義昌)가 노부나가에게 달려갔다.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둔 일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직후 바이세츠도 배신하였다. 그는 배신에 앞서 신푸 성()에 인질로 보냈던 처자식을 빼돌리는 빈틈없음도 보여주었다. 불쌍하게도 키소 요시마사의 모친과 여동생은 신푸 성()의 정문으로 끌려 나와 십자가에 꺼꾸로 매달린 채 옆구리를 창으로 꿰뚫려 죽었다. 신푸 성()의 인질 천 여명 중 900명이 배신자들의 가족이었다고 한다.


 바이세츠가 배반한 이유는 타케다에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명문 타케다 가()의 혈통을 끊어지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바이세츠는 카츠요리의 자식 노부카츠(信勝)보다 자신의 자식인 카츠치요(勝千代) 쪽이 타케다의 혈통이라는 점에서 더 짙다고 생각한 듯하다. 언젠가 카츠요리 계통은 전쟁 속에서 끊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계통의 존속을 꾀하고자 고심한 것은 아닐까? 카츠치요의 할머니는 신겐의 누나이며, 모친은 신겐의 딸인 것이다.


 어쨌든 이에야스의 알선으로 오다의 군문(軍門)에 항복한 바이세츠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에 일본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과 조우하게 된다.

 혼노우(本能)사(寺) 이었다. 이때 바이세츠는 영지(領地)를 안도해준 것에 대한 사례인사차 아즈치(安土)의 오다 노부나가를 만난 후 사카이(堺)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함께였다. 거기에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변보가 전해진 것이다.

 급히 본거지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가(伊賀)를 지나려 했지만 이때 어째서인지 이에야스와는 다른 길을 취한 바이세츠는 그 도중에 쿠사치(草地())의 나루터에서 농민반란군(一揆)의 습격을 받아 어이없이 죽음을 당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어렸을 때의 이름(幼名)은 카츠치요(勝千代). 이름은 노부키미(信君). 겐바노카미(玄蕃頭), 므츠노카미(陸奥守)를 칭했으며, 1580년 머리를 밀고 불문(佛門)에 들어가 바이세츠사이(梅雪斎)라는 호를 칭했다. 1582년 타케다 멸망 시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붙어 소유하고 있던 영지(領地)를 인정 받지만 혼노우(本能)() 변 후 귀국 도중 농민반란군(一揆)에게 습격 당하여 살해당했다.

  1. 당시 무가의 사람이나 하이쿠(俳句 - 일본의 시)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행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카이 타케다 10대 당주. 참고로 신겐은 19대 당주. [본문으로]
  3. 정확히는 행정과 사법, 군정을 위임받은 죠우다이(城代)였다. [본문으로]

<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일본판 >

 천하를 제패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조차 타케다 신겐의 군사적 능력에는 위협을 느껴, 양녀(養女)[각주:1] 를 신겐의 아들 카츠요리[頼]에게 시집 보내는 등 신겐의 마음을 잡고자 하였다. 신겐이 이끄는 코우슈우[甲州][각주:2] 군단의 무위(武威)는 당시 천하를 진동시켰다.

 

 1920년대 즈음 군사평론가로써 저명했던 사쿠라이 타다요시[櫻井 忠温][각주:3]는 신겐을 나폴레옹에 필적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겐은 태어났을 때 머리가 크고 눈이 코를 감출 정도로 컸었다고 한다. 그 울음은 귀를 쥐어뜯을 정도라 짜증을 잘 내는 부친 노부토라[信虎]가 귀를 막았다고 한다. 평범한 아기가 아니었다.

 

 내향적인 성격의 소년이었지만 기질은 강했다.

 9살 때. 절의 높은 어른에게 반항하여 연못으로 던져졌지만 울먹이는 일 없이 물 속에 뻣뻣이 서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신겐은 또한 애벌레를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중신인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가 이것을 고치고자 일부러 애벌레를 보여주고서는 겁먹는 신겐을 비웃었다. 그러자 신겐은 눈빛이 변하여 갑자기 그 애벌레를 손으로 쥐어 찌부러트렸다. 그 때문에 손가락 색이 곧바로 변색되어 버렸다고 한다.

 

 첫 출진은 1536 11월 운노구치[海ノ口] 전투였다. 신겐 16살 때였다. 부친 노부토라는 8천의 병사를 이끌고 사쿠[佐久]운노구치 성(城)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성주는 무명(武名)으로 이름 높던 히라가 겐신뉴도우[平賀 玄信入道]였다. 3~4일간 계속 공격하였지만 함락되지 않았다. 12월이 다 지나갈 즈음 되었고 거기에 눈도 내렸다. 이 이상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회의를 거쳐 철퇴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때 16살의 신겐이 부친 노부토라에게 철퇴의 후미(後尾)를 맡고 싶다고 나섰다. 거절하는 부친을 몇 번이고 졸라 결국 이 큰 임무를 맡게 되었다

 신겐은 부친의 군세가 카이[甲斐]를 향해서 철수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수하 300을 이끌고 운노구치 성()에 야습을 감행했다.

 성안에는 병사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 무사들은 카이[甲斐] 군세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모두 자기네 지역으로 돌아갔다. 성에 있었던 것은 성주 히라가 겐신 이하 7~80. 그것도 승리의 축하주로 취해 있었다. 성은 싱겁게 점령되었다.

 

 부친 노부토라와 신겐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노부토라는 자신과 많이 닮아 성미가 괄괄한 신겐보다 온순한 둘째 노부시게[信繁]를 편애했던 듯 하다. 신년 축하연에서도 신겐을 건너뛰고는 노부시게에게만 술잔을 내렸다고 한다. 거기에 노부토라는 용맹하기는 했지만 성격이 잔인하여 부하도 영민도 그에게 심복하고 있지 않았다.

 

 신겐은 어떤 계획을 세워 그 실행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1541 6 16일이었다. 부친 노부토라는 사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방문려고 스루가[駿河]로 향했다.

 신겐은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루가로 통하는 길을 카이 국경에서 차단해 버리고, 부친과 함께 떠난 가신들의 가족도 인질로 잡아놓았다. 이 때문에 함께 갔던 가신들은 노부토라를 혼자 스루가에 남겨놓고 카이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카이에서 추방된 노부토라는 이후 이마가와 씨()의 식객이 되어 25년을 보내게 되는데, 82세의 고령으로 죽을 때까지 고향 카이의 땅을 밟지 못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자간 갈등극은 또 한번 되풀이 된다.

 신겐의 후계자인 장남 요시노부[義信]가 부친 신겐에게 모반을 꾀한 것이다. 요시노부의 부인은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의 여동생이다. 요시노부는 이마가와 가문을 멸하려는 부친에 반발하여 암살을 획책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자살하게 된다.

 

 신겐의 정실[각주:4]은 나중에 사다이진[左大臣]이 되는 산죠우 킨요리[]의 딸로, 셋케[家]의 다음가는 명문(和家역자 주) 출신이었다. 부인의 언니는 당시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의 실력자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에게 시집갔으며, 여동생은 혼간지 켄뇨[本願寺 如]의 부인이 되었다. 켄뇨는 후에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에 웅거하며 잇코우잇키[一向一揆]의 총대장이 되어 오다 노부나가를 괴롭힌 인물이다.

 

 신겐에게는 몇 명의 측실이 있었는데, 비극의 히로인으로 유명한 것이 유우히메[由布姫]이다. 시나노[信濃]의 명문 스와 씨[諏訪氏]의 딸로, 부친 요리시게[重]는 신겐에게 속아 배를 가르고 죽었다. 히메는 24살에 죽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이 타케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카츠요리[頼]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정인 스와 씨()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슬퍼하여 아들의 이름에 스와 씨() 대대로 붙는 요리[]’라는 글자를 붙여 카츠요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각주:5]

 

 신겐은 군사적으로만 뛰어난 무장이 아니었다. 뛰어난 민정가로써도 업적을 남기고 있다.

 저명한 것으로 '코우슈우 법도 55개조[甲州法度五十五箇]'가 있다. 당시로써는 드물게 구체적으로 현대의 법학자도 '신겐이 정한 것이 형법상의 가장 적합하다'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법도의 4조와 5조에 다른 지역() 사람과 결혼, 주종계약 혹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금지하는 항목이 보인다. 또한 3조에는 상기의 금지 항목도 자기 지역 내에 있는 자가 모략의 필요상 행하는 것이라면 용인한다고 쓰여있다. 센고쿠[戦国]이기에 있을 수 있는 세세한 배려다.

 

 일본에서 최초로 금화(金貨)를 발행한 것도 신겐이었다. 영내(領內)에 금광을 개발하여 '코우킨[甲金]'이라 명명해서 유통시켰다. 품질이 굉장히 좋았다. 이에야스가 코우후[甲府]에 입성했을 때 징발한 액수는 30만 냥이었다고 한다. 신겐이 숨겨놓은 금은 상당한 액수라고 하여 여전히 매장금 전설이 남아있다.

 

 현재 야마나시 현[山梨県] 류우오우 정[町][각주:6]에 가면 신겐이 쌓게 만든 '신겐둑[信玄堤]'이라 부르는 카마나시 천[釜無川]의 제방이 남아닜다. 이 지역은 언제나 홍수로 넘쳤기에 심혈을 기울여 치수에 힘써 U자형(雁行) 제방을 쌓은 것이다.

 

 정강(精强)을 자랑하는 코우슈우 군단의 전법은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는 대조적이었다. 켄신은 기발한 전법을 사용했지만 신겐은 어디까지나 정공법이었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가 들판을 가로지르 듯 조직적인이고 위압적인 행동을 취했다.

 예를 들면 코우슈우류[甲州流]의 창술은 그때까지의 11이 아닌 2~30명이 전열을 짜고 돌진하는 것이었다. 1번대, 2번대, 3번대를 큰 북의 소리로 조종하였고, 붉은 갑옷과 검은 갑옷으로 구별하여 통일적인 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우에스기 켄신과의 최대의 격전이라 일컬어지는 1561 9 10일의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い]에서는 적장 우에스기 켄신이 본진으로 질주해 와 신겐에게 칼을 퍼부었다. 신겐은 순간적으로 일어나 지휘 부채[軍配]로 막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그 부채에는 8곳의 칼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신겐 최후의 대작전은 1572년부터 시작되었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를 호령코자 하였던 것이다. 신겐 52세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 밖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 들판에서 토쿠가와 군과의 싸움이 최대의 격전이었다.

 

 이에 앞서 타케다 군은 토쿠가와의 성들을 계속해서 함락시킨 후 미카타가하라에 포진한 후 개전한 것은 12 22일 오후 4시였다. 눈보라 치는 찬 바람 속에서 양군은 격돌하였다. 토쿠가와의 기세도 강하여 오야마다[小山田] 부대, 야마가타[山県] 부대가 무너졌다. 하지만 그 때 나이토우 마사토요[ 昌豊] 부대가 토쿠가와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곧바로 토쿠가와 군세는 혼란에 빠졌고 결국 무너져 내려 패주하였다.

 

 전투는 신겐의 압승이었지만 이때 이미 신겐의 운명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신겐의 천하 제패라는 웅대한 꿈은 결국 폐결핵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병상이 악화되어 귀국하던 도중 53세의 생애를 마쳤다. 유언에 따라 죽음은 비밀로 되어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3년 뒤였다.

 

[다케다 신겐(武田 信玄)]

1521년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의 적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하루노부[晴信]. 법호를 호우쇼우인 신겐[法性院 信玄]이라고 하였다. 타케다 씨[武田氏]는 카이[甲斐]슈고[守護]이며 코우후[甲府]에 저택을 두고 있었다. 1541년 부친 노부토라를 스루가[駿河]로 추방하고 자립해서는 시나노[信濃]로 진격하여 스와[諏訪], 무라카미[村上], 오가사와라[小笠原] 등 여러 호족들을 쓰러뜨리고 시나노[信濃] 일원을 손에 넣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의 카와나카지마의 격전[川中島の戦い]은 유명하다. 1568년에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親]를 물리쳤다. 코우즈케[上野],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일부를 합친 5개국을 지배했다. 1573 4 12일 시나노[信濃] 코만바[駒場]에서 죽었다.

  1. 여동생의 딸. [본문으로]
  2. 카이[甲斐]의 다른 이름. [본문으로]
  3. 청일전쟁의 여순전투에서 전신 8발의 총상과 수 많은 도상(刀傷) 등으로 기절, 시체로 분류되어 화장터에 옮겨지다가 생환. 여순전투에 대한 '육탄(肉彈)'이라는 작품을 남겨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함, 후에 일본 육군성 신문부장을 역임. [본문으로]
  4. 정확하게는 두 번째인 후실(後室). [본문으로]
  5. 당시 무장의 이름은 여러 정치적인 고려와 배려가 섞여 지어지는 것이기에 여성이 지을 수는 없었다. [본문으로]
  6. 현 카이 시[甲斐市]. [본문으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82 3 11일 할복(割腹) 37.

1546 ~ 1582.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넷째 아들. 스와 씨[諏訪氏]를 상속하지만, 신겐이 죽자 타케다 가문[武田家] 상속. 나가시노 전투[長篠合戦]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川] 연합군에게 패한 이후 일족, 중신들에게 계속해서 배반당하여 텐모쿠잔 산[天目山] 산기슭인 타노[田野]에서 부인과 아들 노부카츠[信勝]와 함께 자살.








비극의 무장


 명장(名將) 신겐의 뒤를 이었던 타케다 카츠요리의 비극은 1575 5월 나가시노 전투 때 이미 선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 전투는 구식인 활과 화살로 무장한 타케다 군이 신병기 철포로 무장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졌다'는 식으로 간단히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상(眞相)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카츠요리에게 통솔력이 부족했음을 한탄한, 신겐을 오랫동안 섬기며 싸워 왔던 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들이 오히려 나가시노 전투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츠요리의 멸망은 전투의 치졸함보다도, 부친 신겐이 쌓아 올린 군단을 유지할 수 없었던 통솔력 부족이 전면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카츠요리가 막 타케다 가문을 상속 받았을 때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시나노[信濃] 군단이, 멸망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모두 배반하여 반기(反旗)를 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1581년에 들어서 신푸 성[新府城]을 축성했지만, 성에 있었던 것은 불과 3개월하고 보름. 공격태세를 취하기 보다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도 비극이 있었다. 더구나 자기 영지(領地)로 적을 끌어들여 물리친다는 그 자세가 너무도 후수(後手)로 인식된 것이다. 때문에 그 멸망은 카츠요리에게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가진 비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츠요리 부인의 기원(祈願文)


 그 멸망의 모습을 전해주는 사료로써, 카츠요리의 부인 호우죠우 씨[北条氏]-19-타케다 하치만 신사[武田八幡神社]에 올린 기원문과 비구니인 리케이니[理慶尼][각주:1]가 쓴 '타케다 멸망기[武田滅亡記]'[각주:2]가 유명하다. 부인이 하치만 사[八幡社]에 올린 기원문을 의역해 보면,

신이시여,

카츠요리는 운을 하늘에 맡겨 제 목숨 아끼지 않고 적진을 향하였습니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와중에 가신들 중에는 정의(正義)를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안위에만 있사옵니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 義昌]는 조그만 이익에 (눈이 멀어) 신의 뜻을 더럽히고 있으며 불쌍하게도 가족까지 버리고[각주:3], 모반의 병사를 일으켜 버렸습니다. 또한 타케다 가문 누대(累代)에 걸쳐 은혜를 받았던 후다이[譜代] 가신들 까지도 모반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카츠요리에게 반항하려 하고 있습니다.

라고 누대에 걸쳐 은혜를 받은 자들까지 모두 배반해 버렸다고 신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이 부인이 신에게 호소한 것을 보면 카이[甲斐]의 산천과 카이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원망과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텐모쿠잔[天目山]의 이슬


 이리하여 모든 것을 잃고 신푸 성()을 불태운 뒤 그 성을 뒤로 한 카츠요리 일행 7백 여명은 하루 동안 이동하여 카시오야마 산[柏尾山山]다이젠 사[大善寺]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하룻밤 다케다 일족의 리케이니[理慶尼]에게 신세를 졌다. 여기서 츠루 군[都留郡]의 이와도노 성[岩殿城]을 목적지로 하였는데, 여기서 재기(再起)를 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고토우게[笹子峠] 고개의 입구에서 반기를 든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 자신의 영지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당한 카츠요리 일행은 어쩔 수 없이 텐모쿠잔 기슭의 타노[田野]에서 자신들 운명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타노에는 '한 손 베기[片手切り]'[각주:4]라 불리는 사적이 있는데, 이 근방에서 아군에게 배신당하거나 오다 군[織田軍]의 습격을 받은 카츠요리(37)가 부인(19), 노부카츠(16) 들과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 마지막을 맞이한 때 카츠요리 부인은,

검은 머리 나부끼듯 흔들리는 세상에서,

가없는 마음에 떨어져 지워지는 이슬 방울의 흔적.

[黒髪れたる世ぞ,はてしなき思いに消ゆる露の玉の]

라는 사세구(辭世句)를 남겼다고 [코우란키()]는 전하고 있다.


 그 후 리케이니[
理慶尼]는 카츠요리 일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타노[田野]에 가서 죽은 사람들의 넋을 하나하나 기렸다고 한다.

케이토쿠 원[景徳院]에 있는 카츠요리의 묘(墓) [야나나시 현[山梨県] 야마토 촌[大和村]

  1. 타케다 신겐과는 사촌(신겐의 아비인 노부토라의 동생(카츠누마 노부토모[勝沼 信友]의 딸)이며, 카츠요리의 유모(乳母)였다. [본문으로]
  2. 다른 이름으론 '리케니기[理慶尼記]'. [본문으로]
  3. 인질로 바쳤던 70세의 모친, 13살의 장남, 17살의 장녀 모두 사형. [본문으로]
  4. 카츠요리의 측근 츠치야 마사츠네[土屋 昌恒]가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타케다 신겐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8. 1. 12. 00:50 Posted by 발해지랑

다케다 신겐[武田 信玄]

1573 4 12일 병사(病死) 53.

1521 ~ 1573.

카이[甲斐] 슈고[守護][각주:1]. 이름은 하루노부[晴信]. 아비인 노부토라[信虎]를 쫓아내고 가독(家督)을 차지. 시나노[信濃]를 침공하였고,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다섯 번에 걸쳐 카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싸웠다.[각주:2] 스루가[駿河]를 차지한 후 상락(上洛)[각주:3]을 개시[각주:4],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쳐부수지만 노다 성[野田城] 포위 중에 병으로 죽었다.








신겐의 사인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를 만들어, '천하 전국에 있어서는……[天下戦国……]'을 언급하며, 왕도(王道)국가 실현을 목표로 했던 타케다 신겐은 1573 4 12 53세의 나이로 시나노[信濃] 이나 군[伊那郡] 코만바[駒場]에서 불귀의 이 되어 버렸다.


 그 사인에 대해서는 철포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는 설과 병사설(病死說)이 난무하며 유포되었다.
 
철포설은 '미카타하라 전투기[三方原合
]', '무덕편년집성[編年集成]'[각주:5] 등 그 외에도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탄환에 맞은 자리라는 곳도 미간, 귀 근처, 넓적다리 등이 있어 여러가지 억측, 풍문 등이 섞여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에 대해 병사설도, '갑양군감[甲陽軍鑑]', '칸토우 칸레이 기[東管領記]'를 시작으로 많이 있는데, 사실적으로 보자면 후자 쪽이 물론 옳으며, 그 병 상태는 1570년 즈음부터 서서히 자각 증상을 느낄 정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른 조바심이 서상작전(西上作戰)강행(强行)으로 이어진 것이다.


 병사설의 근본 사료로써는, 미슈쿠 켄모츠[御宿 監物][각주:6]의 보고서나 '현공 불교에 대한 말씀[玄公事法語]' 등이 있다. [코우요우군칸]을 보면 품 제39에,

계유(癸酉) 2월 중순에 전장(戰場)에서 네 곳에 뜸을 뜨시고 몸에 좋은 약을 여러가지 취하셔서 몸이 나아지셨다
라고 쓰여 있지만 곧이어 악화되어 임종의 때를 맞이해 버린 것이다.


 갑양군감에는

4 11일 미시(未の刻)[각주:7]부터 신겐공 상태가 나빠지셔서 맥박이 굉장히 빨라졌으며, 또한 12일 밤 해시(亥の刻)[각주:8] 토하면서 이빨 5~6개가 빠졌다. 그때부터 차츰 약해지며, 이미 죽은 목숨이니 맥이 뛰고 있을 때 말해두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다며, 후다이[譜代]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들과 일문(一門)들을 불러들여, 6년 전 스루가[駿河]로 출진하기 전에 이타자카 호우인[板坂法印][각주:9]이 말하길 [카쿠()]이라는 병의 징후가 있다고 했을 때 조심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굉장히 진상에 가까운 기록일 것이다.


 미슈쿠 겐모츠의 보고서를 보아도,

폐와 간(肺肝)을 아프게 하던 것이 배로 전이되어 편안치 못하시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쿠마가이 가문 전기[熊谷家]'를 보면,
11일 밤. 총대장 신겐 공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공성(攻城)의 포위를 풀고 진을 물리셨다. 날이 밝은 12일 네바[根羽]에서 숨을 멈추시다(중략), 타구치[田口]의 후쿠덴 사[福田寺]에 머무시던 밤에 이빨 6개가 빠졌으며, 이 병은 곽(癨)[각주:10]이라는 풍문을 들었다
고 한다.


 이런 여러 설을 종합하여, 메이지[明治] 시대에 야마나시 현[山梨県][각주:11] 현립병원장을 역임했던 의학사(醫學士) 무라마츠 가쿠스케[村松 佑]가 병명인 '(카쿠()'이라는 것은 위암(胃癌)의 옛날식 호칭으로, 또한 '폐와 간(肺肝)'이라는 것도 오장(五臟)이라는 뜻이기에 신겐의 죽음은 필시 위암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후 이 설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학회에서 인정 받고 있다.


'3년간 상()을 숨기라'는 유언


 이러한 신겐의 죽음이 국내외에 끼친 영향은 거대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신겐을 마음속으로 따르던 중신(重臣)들이었으며, 동시에 신겐도 또한 통한의 미망(迷妄)에 잡혔을 것이라 생각된다.


 몇 개인가의 유언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3년간 상을 숨기라'는 것이 있다. 만약 신겐의 죽음이 적국(敵國)에 알려진다면, 그야말로 총반격을 맞이하여 타케다의 영토는 곧바로 위기와 혼란에 빠질 것이기에 적어도 3년간은 죽음을 숨기라는 것으로, 그렇기에 장례식도 치르질 않았고 형식적으로는 비밀이 지켜진 것이었다.


그러나 후계(後繼)의 비밀은 3개월 만에 깨어져, 후계자인 카츠요리[頼]도 부친의 죽음을 끝까지 숨기지만은 안았다. 오히려 갑양군감 품 제39에 기록되어 있는 유언 부분은 격조(格調) 높고 감동이 담긴 문장이 쓰여 있어, 가슴을 울리는 것이 있다.

……신겐공 고통을 참으시며 말씀하시길,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감히 우리 땅에 침입하는 놈이 없을 테니 3년간 방비를 철저히 하라며 눈을 감으셨지만, 한편으론 야마가타 사부로베에[山県 三兵衛][각주:12]를 불러, 내일은 자네의 깃발을 세타[田][각주:13]에 세우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이 흔들리셨다. 그러나 조금 뒤 눈을 뜨시며 말씀하시길,

대부분은 땅에 맡겼으니 몸을 쉬고 싶다. 꾸밀 것도 없이 내 인생은 풍류였다
(大ていは地に任せて肌骨好し紅粉を塗らず自ら風流)(하단 역자 주)’
고 말씀하셨다. 53세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내일의 이슬로 사라지셨다


 이렇게 신겐의 '3년간 상을 숨겨라'는 것은 굳게 지켜져, 많은 모순을 품으면서도 뒤를 이은 카츠요리는 1575 4 12 부친의 죽음으로부터 3년 뒤에 중신인 야마가타 마사카게를 코우야 산[高野山]에 파견하여 법요(法要)를 치르게 함과 동시에, 다음 해인 1576 4 16일에 신겐의 장례식이 보제사(菩提寺)인 에린 사[恵林寺]에서 카이센[快川] 도사() 맡아 성대히 치러졌다.


Ps; 이 글을 쓰신 분은 우에노 하루오[上野 晴郎]. 타케다 가문 연구에 대해선 꽤나 유명하신 분 같으신데, 대부분 고어로 쓰신 글이라 그야말로 oTL. 누누이 말씀 드렸다시피 전 고어를 잘 모릅니다(--;) 전부 의역이니 실제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돌 날라오기 전에 피해야지~)

Ps2; 이 글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실 분 대환영입니다.


하단역자 주


신겐의 죽을 때 남긴 시(世辞)는 일본에서도 해석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가령 http://www5a.biglobe.ne.jp/~shici/jpn49.htm에서 본 바에 따르면,

원어는 [大底還他肌骨好 不塗紅粉自風流]인 듯하여, 윗글의 [()] 부분이 여기선 [()]로 되어 있습니다. 저 유언은 보통 한문의 문법과는 또 다르고, 중세 일본어의 영향이 강하게 남겨져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요시다 유타카[吉田 豊]()가 현대문으로 편역한 [갑양군감(甲陽軍鑑)-間書店]에 따르면,
'
내 불후의 생명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의 육체에 전하마. 그것은 조금도 꾸밈없는 나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라고 합니다.
참고로 책의 부분의 이미지(그 블로그에 있는 사진입니다.)


  1.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2. 4차를 제외하고는 서로 대치한 끝에 물러났다. [본문으로]
  3.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4. 상경설과 미카와-토우토우미 제압설이 있다. [본문으로]
  5. 18세기에 저술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일대기. [본문으로]
  6. 신겐의 주치의. [본문으로]
  7. 13~15시 사이. [본문으로]
  8. 21~23시 사이 [본문으로]
  9. 당시 신겐의 주치의. [본문으로]
  10. 일본 발음으로 '카쿠’로 ‘격(膈)’과 같은 발음. [본문으로]
  11. 과거 카이(甲斐)가 현재 야마나시 현에 속해있다. [본문으로]
  12.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를 지칭. [본문으로]
  13. 동쪽에서 쿄우토[京都]에 들어갈 시에 예전엔 반드시 거쳤다는 곳으로, 깃발을 세우라는 말은 쿄우토까지 군세를 이끌고 상경(上京)하라는 뜻.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