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 노부후사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形], 하라 토라타네[原 虎胤],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와 더불어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의 용장으로 유명하다.

 

 노부후사가 젊은 무사들의 질문에 답한 전쟁터에서의 비결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노부토라[信虎], 신겐, 카츠요리[頼] 삼대에 걸쳐서 타케다 가문[武田家]를 섬기며 수 많은 무공을 세워 온 역전의 용장답게 굉장히 구체적인 내용이다.

-. 적보다 아군이 용감해 보이는 날은 앞을 다툴 것.
-. 아군이 겁을 먹고 있는 날에 혼자 나아가서는 개죽음한다.
-.
창끝이 올라간 적은 약한 적, 내려가 있는 적은 강적이다.
-.
전쟁을 많이 경험한 무사와 친해져서는 그 사람을 본보기로 삼을 것
  어느 것이나 노부후사가 실전 경험을 통해 만들어 낸 훈계라 할 수 있다. 또한 노부후사 자신 스스로도 항상 벽에 [전장상재(戰場常在)]라는 네 글자를 걸어두고서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노부후사는 '쿄우라이시 민부 카게마사[教来石 民部 景政]'라는 이름이었다.

 이 즈음 노부후사는 시나노[信濃]의 스와 신사[諏訪神社]에서 매일 참배하였는데, 실은 여기에 어떤 목적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관(神官)과 친해져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신관이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노부후사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카이[甲斐] 타케다 가문의 미천한 놈입니다만 군역(軍役)에 끌려가는 것이 싫어 스와 명신[諏訪明神]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신의 은혜 덕분에 지금은 군역에 끌려가는 일 없이 이렇게 있습니다.”

 신관은 이 종군 기피의 겁쟁이를 눈 여겨 보았다. 당시 시나노[信濃]의 명문 스와 씨[諏訪氏]는 카이[甲斐]와 적대적인 관계였다. 신관은 이 겁쟁이를 이용하여 타케다 가문의 정보를 캐내려 하였던 것이다.


 노부후사는 조금씩 타케다 가문의 내부 사정을 흘렸다. 둘은 술을 함께 마시는 관계까지 되었다.

 어느 날, 노부후사가 술을 많이 마셔 취해 잠이 들어버리자 신관은 은밀히 그의 작은 칼[脇差] 살펴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칼날은 녹 슬어 있었다. 소지품에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신관은 완전히 노부후사를 믿게 되었다. 나중에는 병역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신사에 속하도록 권하였다.

 

 노부후사의 계략은 성공이었다.

 이리하여 순조롭게 적지에 잠입한 그는 3년 동안 스와 신사령()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스와에 관한 모든 전략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이것이 타케다의 스와 공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바바 미노노카미 노부후사[馬場 美濃守 信房]로 이름을 고침 다음부터는 항상 신겐의 선봉이 되어 싸웠다.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를 멸망시켰을 때 신겐은,

 모두들 서둘러 이마가와의 저택에 가서 거기에 있는 보물들을 싹 긁어와라!”

 고 명령하였다.

 바바 노부후사는 그것을 듣자마자 단 혼자서 말을 달려 이마가와 저택으로 가서는 아군 병사들이 보물 약탈을 하러 오기 전에 저택에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 노부후사는 타케다 가문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약탈자라는 오명을 거부한 것이다.

 

 1572년 신겐이 상경하여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여 오다[織田]의 전선 기지인 미노[美濃]이와무라 성[岩村城]을 공격하였을 때 노부후사의 능란한 전술이 빛을 발했다.

 오다 군 1만여의 대군을, 불과 800명의 어린진(漁鱗陣)을 이용하여 농락한 것이다[각주:1]. 어린진이라는 것은 생선의 비늘과 같은 진형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 인()자 모양의 중앙부로 적 중앙을 돌파하는 전법을 말한다.

 

 이러했던 노부후사도 1575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의 패배에서 전사를 하였다.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카이[甲斐] 쿄우라이시[教来石] 출신. 노부하루[春]라고도 했다.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신겐[信玄], 카츠요리[勝頼] 삼대에 걸쳐 타케다 가문[武田家]을 섬겼다. 카츠요리를 받들고 싸운 나가시노의 전투[長篠の戦い]에서 패하여 전사. 62.

  1. 타케다 가문[武田家] 만세의 군기물 갑양군감(甲陽軍鑑)에만 나오는 이야기라 신빙성은 의심스럽다. [본문으로]

 야마모토 칸스케는 이노우에 야스시[井上 靖]의 명작 '풍림화산(風林火山)[각주:1]'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실존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이 인물을 가공의 무장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가(史家)도 적지 않았다.

 그가 일반에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갑양군감(甲陽軍鑑)'이 처음이었으며, 이 갑양군감 외에 사료성이 높은 고문서류에는 칸스케의 이름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갑양군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카츠요리[頼] 2대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나 코우슈우[甲州]군의 군법이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에도 시대 초기의 병법학자 오바타 카게노리[小幡 景憲]가 썼다고 한다. 굉장히 창작성이 짙은 책이라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근년[각주:2]이 되어 갑자기 칸스케의 실존성이 강해졌다. 그것을 증명한다고 보여지는 고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홋카이도우[北海道] 쿠시로 시[釧路市]의 이치카와 가문[市川家]에서 타케다 신겐의 서장(書狀)이 발견된 것이다. 이치카와 가문의 선조는 나가노 현[長野県] 시모타카이 군[下高井郡]에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부터 토착했던 호족으로, 키소 요시나카[ 義仲][각주:3]부터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이르기까지 고문서 150여 점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타케다 신겐의 서장은 신겐이 시나노[信濃] 노자와[沢]의 이치카와 후지와카[市川 藤若]라는 호족에게 보낸 것으로, 이 문서의 말미에 '야마모토 칸스케(菅助)의 입으로 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칸스케[菅助]가 정확하게 칸스케[勘介]라면[각주:4], 칸스케는 이 때 근습(近習)의 한 사람으로써 신겐의 명령으로 중요한 사자(使者)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덕분에 '갑양군감(甲陽軍鑑)'의 사료적 가치도 최근 역사 사료로써 재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갑양군감'에 따르면 - 칸스케의 출신은 미카와[三河]우시쿠보[牛窪], 축성술과 군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았으며 또한 무예도 뛰어났다고 한다.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섬기려다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칸스케는 추남에 외눈으로 거기다 손가락도 열 개가 안 되며 절름발이였기에,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는 그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대로 타케다 신겐의 흥미를 끌었다. 신겐은 피부도 검고 그렇게 추남이면서도 명성이 높은 것은 정말로 능력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라면서 타케다 가문에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신겐다운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신겐의 부하 장수인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形]가 천거하였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칸스케는 200관의 봉록이 주어졌다. 신겐 23세로 칸스케는 이미 중년을 넘긴 나이였다고 한다.

 

 그 생애의 정점에 달한 전투는 1561년 가을의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い]였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타케다의 본진으로 돌격해 와 신겐에게 칼을 퍼부었다는 것으로 유명한 격전이었다.

 이 전투는 13천의 병사를 이끌고 시나노[信濃]로 쳐들어 온 켄신이 타케다의 전선기지 카이즈 성[海津城]과 지근거리인 사이죠산 산[妻女山]에 진을 치면서 시작되었다.

 곧바로 타케다 군도 카이에서 원군을 이끌고 카이즈 성에 입성하였다.

 쌍방은 대치한 채 시간이 흘러, 9 9일에 이르자 신겐은 회의를 열어 타개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숙련된 장수인 오부 효우부 토라마사[飯富 兵部 虎昌]가 정면승부를 하여 자웅을 겨루자고 주장하자, 바바 민부 노부후사[馬場 民部 信房]도 쌍수를 들어 그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상대는 지금이야 말로 자웅을 겨루자고 침공해 온 군신(軍神) 우에스기 켄신이었다. 그래서 야마모토 칸스케의 계략의 채택되었던 것이다.

 칸스케의 작전은,

 타케다 군 2만의 군세를 둘로 나누어, 12천의 별동대로 내일 새벽 6시를 기하여 사이죠산를 기습한다. 그러면 우에스기 군은 놀라 치쿠마가와 강[千曲川] 건너편 평원인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퇴각할 것이다. 거기에 미리 카와나카지마에 숨겨놓은 8천의 본대가 급습하여 앞뒤에서 협격하면 적은 혼란에 빠져 우리 군은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는 것이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딱따구리 전법[啄木鳥]'이라고 한다. 딱따구리는 나무의 벌레를 잡기 위해서 구멍 반대쪽을 쪼아 벌레를 놀라게 하여 구멍으로 나왔을 때 잡는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칸스케의 지략도 군신 켄신의 혜안에는 미치지 못했다.

 

 9일 저녁.

 눈 아래 보이는 카이즈 성에서 피어 오르는 무수한 밥짓는 연기를 보고 카이[甲斐] 군의 작전을 간파한 것이다.

 켄신은 전군을 이끌고 밤중에 은밀히 사이죠산을 내려와 다음날 10일 새벽, 카와나카지마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카이 군 본대를 급습한 것이었다. 우에스기 군세는 질풍과 같이 타케다 본영을 맹공격하여 한때는 신겐도 위기에 처했지만, 오후가 되어 나타난 산에 올라갔던 타케다의 별동대 출현으로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 때, 이미 칸스케는 작전의 실패를 부끄러워하여 적진으로 돌격하여 전사한 상태였다.

 그 목은 수하의 병사가 난전 속에서 다시 탈취하였지만 몸통은 치쿠마가와 강을 떠내려가 하류의 강변에 쌓여있었다. 그 적과 아군의 구별이 가지 않는 수 많은 시체더미에서 부하들은 결국 찾아내어 묻었다고 한다.

 현재 카와나카지마 테라오[寺尾]라는 곳에 도우아이하시[胴合橋]라는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이곳이 그 장소라 전해지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에 쓰여진 어떤 책에는 - 명군사인 그도 미관말직의 일개 검객으로 등장하며, 타케다 가문의 부장()인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부하였다고 한다.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는 단순한 척후의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며, 어쩌다 마사카게에게 보고하고 있는 모습이 신겐의 눈에 띄어, “저 자는 뭐 하는 녀석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뿐이라고 한다.

 

 어쨌든 아직 평가가 분명하지 않은 수수께끼의 무장이다.

 

[야마모토 칸스케(山本 勘介)]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이름을 하루유키[晴幸]라고 하며, 출가 후 뉴우도우 도우키[入道 道鬼]’. 신겐은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등에게 명하여 칸스케에게 군법을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1561년 카와나카지마에서 전사했을 때는 69세였다고 한다.

  1. 2007년도 NHK 대하드라마의 원작. [본문으로]
  2. 이 '전국무장 100화[戦国武将100話]'는 1978년도에 출판. [본문으로]
  3.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노토 요리토모[源 義朝]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시나노[信濃] 키소[木曽]에 있다가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쫓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이후 요리토모의 토벌군에 패해 전사. [본문으로]
  4.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은 동일. [본문으로]
이 게시판에 올려도 괜찮은지 모르습겠니다만...

디시의 공지와 비슷한 것인가 보더군요.

센고쿠(戦国) 시대 게시판의 기초 지식

이 정도는 알아 두지 않으면 병진 취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센고쿠 시대 전반적인 것에 대해.

  • 치안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쿄우토(京都)도 자치조직 같은 것이 있었다).

  • 하지만 역시 다이묘우(大名)끼리의 국경 근처는 위험했다.

  • 영토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석고(石高). 예를 들면 오와리(尾張)같은 곳은 저렇게 조그맣지만 50만석이 넘는 대국.

  • 1만석X250이 대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사수. 예를 들어 50만석이면 12500, 100만석이면 25000 정도가 기준

  •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였기에 숫자가 굉장히 엉망.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4만이라던가 미미카와(耳川 오오토모(大友)와 시마즈(島津)의 싸움 역자 주)에서 오오토모 6만이라던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

  • 노부나가는 인망이 있었다.

  • 노부나가는 이외로 좋은 사람.

  • 노부야스(信康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아들)는 노부나가가 죽인 것이 아니다.

  • 노부나가에게 좋지 않고 이에야스에게 좋은 이야기는 대체로 에도 시대의 창작(아네가와(姉川) 전투, 노부야스죽이기 등)

  • 노부나가와 미츠히데는 사이가 좋다.

  • 아무 때나 방화를 일삼는 것은 아니다(미노(美濃) 공략때도 산 전체를 불태우면 을 취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 노부나가는 아스퍼거 증후군

  • 삼단철포 같은 것은 없다.

  • 낙시낙좌()는 노부나가의 오리지널이 아닌 롯카쿠(六角)의 것을 베낀 것. 참고로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도 했던 것.

  • 오케하자마는 어쩌다 이겼다는 것이 대세.

  • 하지만 그걸로 노부나가를 과소평가하면 이노우 전투( 노부나가와 동생 노부유키(信行)간의 싸움 700 vs. 1700 – 역자 주), 모리베 전투(森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목 사냥꾼 아다치(頸取足立)’를 쓰러뜨렸다는 전투. 3000 vs. 6000(사이토우()) – 역자 주), 텐노우지 전투(天王寺 텐노우지 요새(7000)을구원하는 노부나가 3000 vs 혼간지 15000의 전투. 노부나가는 선두에 서서 돌격했다고 한다 역자 주) 등 적은 수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몇 번 더 있었기에 오케하자마에서 어쩌다가 이겼다고 하여도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 미카타가하라 전투 최대의 피해자.

  • 신겐 정도는 여유롭게 쓰러뜨린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

  • 백성에게 사랑 받은 타이코우(太閤) 어르신이라는 것은 거짓말.

  • 혼노우(本能)()의 변시점에서 히데요시의 위치는 가신 필두인 시바타(柴田), 2위인 아케치(明智), 여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니와(丹羽) 아래인 4번째 정도.

  • 가난한 농민 출신이 아니라 부잣집 출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 잔혹한 행위를 많이 했다.

  • 노부나가가 죽은 다음부터 노부나가 뒤따마로 없던 것도 만들어서 퍼트린 것을 보면 정말로 성격이 나쁘다.

  • 알려진 만큼 타케나카(竹中)나 쿠로타()의 도움을 받지 않았지만 히데나가(秀長)의 힘 없이 천하인 히데요시는 될 수 없었다.

  • 토요토미 가문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 녀석.

  • 아기씨(精子)가 없다.

  • 히데요리()는 아마 이 녀석의 아이가 아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편.

  • 자기한테 안 좋은 것은 전부 노부나가에게 덮어 씌었다(아들 죽이기, 미카타가하라에서 3000밖에 병사를 보내 주지 않았다 등)

  • 아네카와에서의 분투 같은 것은 없었다 - 라기보다 아네카와 전투 자체가 알려진 만큼 대규모 전투는 아니었다.

  • 미카타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의 미스라기 보다 거기서 물러난다면 코쿠진()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게 되기에 어쩔 수 없이 출진. 별로 신겐이 굉장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는 것이 타당.

  • 실은 알려진 만큼 괴로운 인질 시대 같은 것은 없었다(요시모토에게는 굉장한 기대를 받았고,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에게 교육을 맡길 정도였다)

타케다 신겐 편.

  • 센고쿠 시대에서 가장 과대평가 받고 있는 과대사천왕(타케다, 우에스기, 시마즈, 다테, 쵸우소카베(長宗我部) 5명이 있지만 단어 가지로 따져서는 안 된다)의 필두.

  • 항상 우세한 상태에서 싸움을 걸기에 소수의 군사로 대군을 물리친 전투가 없다.

  • 그런 주제에 몇 번이나 졌던 것을 보면 이 녀석 역시 전쟁 하수일 것이다.

  • 노부토라(信虎) 이상으로 세금 폭탄을 먹였다.

  • 영민들에게 미움 받았다.

  • 기껏해야 코쿠진() 연합의 맹주적인 존재이기에 조직 만들기는 안 된다.

  • 사람을 쓰는 것이 정말로 뛰어난지 어떤지는 미묘.

  • 노부나가가 두려워하거나 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 자기보다 격이 떨어지는 인물밖에 이기질 못한다.

  • 오야붕(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는 개기질 못한다.

  • 미카타가하라는 3배의 병력 차이가 있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 별로 신겐이 굉장한 것은 아니다.

  • 메뚜기전법(상대의 지역에서 물자를 약탈)과 인신매매로 겨우 버텼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정도.

  • 카와나카지마는 안개 속에서 퇴각하다가 우연 부딪혔을 뿐.

  • 타케다 가문 멸망의 원인은 전부 이 녀석.

  • 상대방이 일부러 동맹을 신청해서 맺었는데도 불구하고 손바닥 뒤집듯이 간단히 동맹을 끊는 것을 보면 너무 멍청이 같아서 옹호해 줄래야 옹호해 줄 수가 없다.

  • 처음부터 카이(甲斐) 22만석을 전부 가지고 있는 등 굉장히 좋은 환경.

  • 처음부터 5000의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기에 굉장히 좋은 환경.

  • 시나노(信濃)에는 다이묘우(大名)가 없는(소규모 호족 밖에 없었다) 굉장히 좋은 환경.

  • 기본적으로 역사 게임이라거나 TV 방송 등에서는 최강 취급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다테나 시마즈와 그리 차이가 나질 않는다.

우에스기 켄신 편.

  • 실은 여자가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 그 이상한 행동도 여자라고 하면 왠지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많다.
  • 메뚜기 전법과 인신매매가 특기

  • 우에스기는 **성을 뺏어 100의 금과 200의 식량을 얻었다 - 라는 게임 같은 것을 실제로 한 무서운 다이묘우(大名).

  • 10만의 대군으로 호우죠우()를 공격하지만 니노마루()도 없었던 오다와라(小田原)()을 낙성시키지 못했다.

  • 영토 확장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영토 확장을 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 마지막 즈음은 북새통에 호쿠리쿠(北陸)의 대부분을 손에 넣어 10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

  • 오다 가문과의 국력 차이를 보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다.

  • 테토리가와 전투(手取川)는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멋대로 전선 이탈하여 혼란에 빠진 카츠이에(勝家)를 쓰러뜨린 것뿐.

  • 우에스기측이 주장하는 만큼 큰 전투는 아니다.

  • 라기보다 실제로 있었는지 어떤지 조차도 미묘(있었다고 하여도 그걸로 우에스기 켄신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듯한 큰 전투는 아니다)

호우죠우 가문 편.

  • 호우죠우라는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우지츠나(氏綱) 때부터라고 한다.
  • 알려진 소우운(早雲) 실적의 대부분은 우지츠나가 한 것.

  • 우지야스가 한 카와고에 전투(河越 - 11000으로 60000의 군세를 물리친 전투)는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우에스기와 호우죠우의 밸런스를 보는 한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투로 센고쿠 시대에 기리 남을 멋진 전투.

  • 우지야스, 츠나시게(綱成), 우지시게, 우지마사 등 농성만 하였다.

  • 명군(名君)이 비교적 많은 핏줄.

<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일본판 >

 천하를 제패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조차 타케다 신겐의 군사적 능력에는 위협을 느껴, 양녀(養女)[각주:1] 를 신겐의 아들 카츠요리[頼]에게 시집 보내는 등 신겐의 마음을 잡고자 하였다. 신겐이 이끄는 코우슈우[甲州][각주:2] 군단의 무위(武威)는 당시 천하를 진동시켰다.

 

 1920년대 즈음 군사평론가로써 저명했던 사쿠라이 타다요시[櫻井 忠温][각주:3]는 신겐을 나폴레옹에 필적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신겐은 태어났을 때 머리가 크고 눈이 코를 감출 정도로 컸었다고 한다. 그 울음은 귀를 쥐어뜯을 정도라 짜증을 잘 내는 부친 노부토라[信虎]가 귀를 막았다고 한다. 평범한 아기가 아니었다.

 

 내향적인 성격의 소년이었지만 기질은 강했다.

 9살 때. 절의 높은 어른에게 반항하여 연못으로 던져졌지만 울먹이는 일 없이 물 속에 뻣뻣이 서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신겐은 또한 애벌레를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중신인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가 이것을 고치고자 일부러 애벌레를 보여주고서는 겁먹는 신겐을 비웃었다. 그러자 신겐은 눈빛이 변하여 갑자기 그 애벌레를 손으로 쥐어 찌부러트렸다. 그 때문에 손가락 색이 곧바로 변색되어 버렸다고 한다.

 

 첫 출진은 1536 11월 운노구치[海ノ口] 전투였다. 신겐 16살 때였다. 부친 노부토라는 8천의 병사를 이끌고 사쿠[佐久]운노구치 성(城)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성주는 무명(武名)으로 이름 높던 히라가 겐신뉴도우[平賀 玄信入道]였다. 3~4일간 계속 공격하였지만 함락되지 않았다. 12월이 다 지나갈 즈음 되었고 거기에 눈도 내렸다. 이 이상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회의를 거쳐 철퇴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때 16살의 신겐이 부친 노부토라에게 철퇴의 후미(後尾)를 맡고 싶다고 나섰다. 거절하는 부친을 몇 번이고 졸라 결국 이 큰 임무를 맡게 되었다

 신겐은 부친의 군세가 카이[甲斐]를 향해서 철수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갑자기 수하 300을 이끌고 운노구치 성()에 야습을 감행했다.

 성안에는 병사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 무사들은 카이[甲斐] 군세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모두 자기네 지역으로 돌아갔다. 성에 있었던 것은 성주 히라가 겐신 이하 7~80. 그것도 승리의 축하주로 취해 있었다. 성은 싱겁게 점령되었다.

 

 부친 노부토라와 신겐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노부토라는 자신과 많이 닮아 성미가 괄괄한 신겐보다 온순한 둘째 노부시게[信繁]를 편애했던 듯 하다. 신년 축하연에서도 신겐을 건너뛰고는 노부시게에게만 술잔을 내렸다고 한다. 거기에 노부토라는 용맹하기는 했지만 성격이 잔인하여 부하도 영민도 그에게 심복하고 있지 않았다.

 

 신겐은 어떤 계획을 세워 그 실행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1541 6 16일이었다. 부친 노부토라는 사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방문려고 스루가[駿河]로 향했다.

 신겐은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루가로 통하는 길을 카이 국경에서 차단해 버리고, 부친과 함께 떠난 가신들의 가족도 인질로 잡아놓았다. 이 때문에 함께 갔던 가신들은 노부토라를 혼자 스루가에 남겨놓고 카이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카이에서 추방된 노부토라는 이후 이마가와 씨()의 식객이 되어 25년을 보내게 되는데, 82세의 고령으로 죽을 때까지 고향 카이의 땅을 밟지 못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자간 갈등극은 또 한번 되풀이 된다.

 신겐의 후계자인 장남 요시노부[義信]가 부친 신겐에게 모반을 꾀한 것이다. 요시노부의 부인은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의 여동생이다. 요시노부는 이마가와 가문을 멸하려는 부친에 반발하여 암살을 획책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자살하게 된다.

 

 신겐의 정실[각주:4]은 나중에 사다이진[左大臣]이 되는 산죠우 킨요리[]의 딸로, 셋케[家]의 다음가는 명문(和家역자 주) 출신이었다. 부인의 언니는 당시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의 실력자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 晴元]에게 시집갔으며, 여동생은 혼간지 켄뇨[本願寺 如]의 부인이 되었다. 켄뇨는 후에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에 웅거하며 잇코우잇키[一向一揆]의 총대장이 되어 오다 노부나가를 괴롭힌 인물이다.

 

 신겐에게는 몇 명의 측실이 있었는데, 비극의 히로인으로 유명한 것이 유우히메[由布姫]이다. 시나노[信濃]의 명문 스와 씨[諏訪氏]의 딸로, 부친 요리시게[重]는 신겐에게 속아 배를 가르고 죽었다. 히메는 24살에 죽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이 타케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카츠요리[頼]이다. 그녀는 자신의 친정인 스와 씨()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슬퍼하여 아들의 이름에 스와 씨() 대대로 붙는 요리[]’라는 글자를 붙여 카츠요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각주:5]

 

 신겐은 군사적으로만 뛰어난 무장이 아니었다. 뛰어난 민정가로써도 업적을 남기고 있다.

 저명한 것으로 '코우슈우 법도 55개조[甲州法度五十五箇]'가 있다. 당시로써는 드물게 구체적으로 현대의 법학자도 '신겐이 정한 것이 형법상의 가장 적합하다'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법도의 4조와 5조에 다른 지역() 사람과 결혼, 주종계약 혹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금지하는 항목이 보인다. 또한 3조에는 상기의 금지 항목도 자기 지역 내에 있는 자가 모략의 필요상 행하는 것이라면 용인한다고 쓰여있다. 센고쿠[戦国]이기에 있을 수 있는 세세한 배려다.

 

 일본에서 최초로 금화(金貨)를 발행한 것도 신겐이었다. 영내(領內)에 금광을 개발하여 '코우킨[甲金]'이라 명명해서 유통시켰다. 품질이 굉장히 좋았다. 이에야스가 코우후[甲府]에 입성했을 때 징발한 액수는 30만 냥이었다고 한다. 신겐이 숨겨놓은 금은 상당한 액수라고 하여 여전히 매장금 전설이 남아있다.

 

 현재 야마나시 현[山梨県] 류우오우 정[町][각주:6]에 가면 신겐이 쌓게 만든 '신겐둑[信玄堤]'이라 부르는 카마나시 천[釜無川]의 제방이 남아닜다. 이 지역은 언제나 홍수로 넘쳤기에 심혈을 기울여 치수에 힘써 U자형(雁行) 제방을 쌓은 것이다.

 

 정강(精强)을 자랑하는 코우슈우 군단의 전법은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는 대조적이었다. 켄신은 기발한 전법을 사용했지만 신겐은 어디까지나 정공법이었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가 들판을 가로지르 듯 조직적인이고 위압적인 행동을 취했다.

 예를 들면 코우슈우류[甲州流]의 창술은 그때까지의 11이 아닌 2~30명이 전열을 짜고 돌진하는 것이었다. 1번대, 2번대, 3번대를 큰 북의 소리로 조종하였고, 붉은 갑옷과 검은 갑옷으로 구별하여 통일적인 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우에스기 켄신과의 최대의 격전이라 일컬어지는 1561 9 10일의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い]에서는 적장 우에스기 켄신이 본진으로 질주해 와 신겐에게 칼을 퍼부었다. 신겐은 순간적으로 일어나 지휘 부채[軍配]로 막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그 부채에는 8곳의 칼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신겐 최후의 대작전은 1572년부터 시작되었다.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를 호령코자 하였던 것이다. 신겐 52세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 밖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 들판에서 토쿠가와 군과의 싸움이 최대의 격전이었다.

 

 이에 앞서 타케다 군은 토쿠가와의 성들을 계속해서 함락시킨 후 미카타가하라에 포진한 후 개전한 것은 12 22일 오후 4시였다. 눈보라 치는 찬 바람 속에서 양군은 격돌하였다. 토쿠가와의 기세도 강하여 오야마다[小山田] 부대, 야마가타[山県] 부대가 무너졌다. 하지만 그 때 나이토우 마사토요[ 昌豊] 부대가 토쿠가와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곧바로 토쿠가와 군세는 혼란에 빠졌고 결국 무너져 내려 패주하였다.

 

 전투는 신겐의 압승이었지만 이때 이미 신겐의 운명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신겐의 천하 제패라는 웅대한 꿈은 결국 폐결핵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병상이 악화되어 귀국하던 도중 53세의 생애를 마쳤다. 유언에 따라 죽음은 비밀로 되어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3년 뒤였다.

 

[다케다 신겐(武田 信玄)]

1521년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의 적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하루노부[晴信]. 법호를 호우쇼우인 신겐[法性院 信玄]이라고 하였다. 타케다 씨[武田氏]는 카이[甲斐]슈고[守護]이며 코우후[甲府]에 저택을 두고 있었다. 1541년 부친 노부토라를 스루가[駿河]로 추방하고 자립해서는 시나노[信濃]로 진격하여 스와[諏訪], 무라카미[村上], 오가사와라[小笠原] 등 여러 호족들을 쓰러뜨리고 시나노[信濃] 일원을 손에 넣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의 카와나카지마의 격전[川中島の戦い]은 유명하다. 1568년에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親]를 물리쳤다. 코우즈케[上野],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일부를 합친 5개국을 지배했다. 1573 4 12일 시나노[信濃] 코만바[駒場]에서 죽었다.

  1. 여동생의 딸. [본문으로]
  2. 카이[甲斐]의 다른 이름. [본문으로]
  3. 청일전쟁의 여순전투에서 전신 8발의 총상과 수 많은 도상(刀傷) 등으로 기절, 시체로 분류되어 화장터에 옮겨지다가 생환. 여순전투에 대한 '육탄(肉彈)'이라는 작품을 남겨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함, 후에 일본 육군성 신문부장을 역임. [본문으로]
  4. 정확하게는 두 번째인 후실(後室). [본문으로]
  5. 당시 무장의 이름은 여러 정치적인 고려와 배려가 섞여 지어지는 것이기에 여성이 지을 수는 없었다. [본문으로]
  6. 현 카이 시[甲斐市]. [본문으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82 3 11일 할복(割腹) 37.

1546 ~ 1582.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넷째 아들. 스와 씨[諏訪氏]를 상속하지만, 신겐이 죽자 타케다 가문[武田家] 상속. 나가시노 전투[長篠合戦]에서 오다[織田]-토쿠가와[川] 연합군에게 패한 이후 일족, 중신들에게 계속해서 배반당하여 텐모쿠잔 산[天目山] 산기슭인 타노[田野]에서 부인과 아들 노부카츠[信勝]와 함께 자살.








비극의 무장


 명장(名將) 신겐의 뒤를 이었던 타케다 카츠요리의 비극은 1575 5월 나가시노 전투 때 이미 선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 전투는 구식인 활과 화살로 무장한 타케다 군이 신병기 철포로 무장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졌다'는 식으로 간단히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상(眞相)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카츠요리에게 통솔력이 부족했음을 한탄한, 신겐을 오랫동안 섬기며 싸워 왔던 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들이 오히려 나가시노 전투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츠요리의 멸망은 전투의 치졸함보다도, 부친 신겐이 쌓아 올린 군단을 유지할 수 없었던 통솔력 부족이 전면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카츠요리가 막 타케다 가문을 상속 받았을 때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시나노[信濃] 군단이, 멸망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모두 배반하여 반기(反旗)를 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1581년에 들어서 신푸 성[新府城]을 축성했지만, 성에 있었던 것은 불과 3개월하고 보름. 공격태세를 취하기 보다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도 비극이 있었다. 더구나 자기 영지(領地)로 적을 끌어들여 물리친다는 그 자세가 너무도 후수(後手)로 인식된 것이다. 때문에 그 멸망은 카츠요리에게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가진 비극성을 포함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츠요리 부인의 기원(祈願文)


 그 멸망의 모습을 전해주는 사료로써, 카츠요리의 부인 호우죠우 씨[北条氏]-19-타케다 하치만 신사[武田八幡神社]에 올린 기원문과 비구니인 리케이니[理慶尼][각주:1]가 쓴 '타케다 멸망기[武田滅亡記]'[각주:2]가 유명하다. 부인이 하치만 사[八幡社]에 올린 기원문을 의역해 보면,

신이시여,

카츠요리는 운을 하늘에 맡겨 제 목숨 아끼지 않고 적진을 향하였습니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와중에 가신들 중에는 정의(正義)를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안위에만 있사옵니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 義昌]는 조그만 이익에 (눈이 멀어) 신의 뜻을 더럽히고 있으며 불쌍하게도 가족까지 버리고[각주:3], 모반의 병사를 일으켜 버렸습니다. 또한 타케다 가문 누대(累代)에 걸쳐 은혜를 받았던 후다이[譜代] 가신들 까지도 모반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카츠요리에게 반항하려 하고 있습니다.

라고 누대에 걸쳐 은혜를 받은 자들까지 모두 배반해 버렸다고 신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이 부인이 신에게 호소한 것을 보면 카이[甲斐]의 산천과 카이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원망과 분노가 타오르는 것을 알 수 있다.


텐모쿠잔[天目山]의 이슬


 이리하여 모든 것을 잃고 신푸 성()을 불태운 뒤 그 성을 뒤로 한 카츠요리 일행 7백 여명은 하루 동안 이동하여 카시오야마 산[柏尾山山]다이젠 사[大善寺]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하룻밤 다케다 일족의 리케이니[理慶尼]에게 신세를 졌다. 여기서 츠루 군[都留郡]의 이와도노 성[岩殿城]을 목적지로 하였는데, 여기서 재기(再起)를 꾀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고토우게[笹子峠] 고개의 입구에서 반기를 든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 자신의 영지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당한 카츠요리 일행은 어쩔 수 없이 텐모쿠잔 기슭의 타노[田野]에서 자신들 운명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타노에는 '한 손 베기[片手切り]'[각주:4]라 불리는 사적이 있는데, 이 근방에서 아군에게 배신당하거나 오다 군[織田軍]의 습격을 받은 카츠요리(37)가 부인(19), 노부카츠(16) 들과 함께 자살했다고 한다. 마지막을 맞이한 때 카츠요리 부인은,

검은 머리 나부끼듯 흔들리는 세상에서,

가없는 마음에 떨어져 지워지는 이슬 방울의 흔적.

[黒髪れたる世ぞ,はてしなき思いに消ゆる露の玉の]

라는 사세구(辭世句)를 남겼다고 [코우란키()]는 전하고 있다.


 그 후 리케이니[
理慶尼]는 카츠요리 일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타노[田野]에 가서 죽은 사람들의 넋을 하나하나 기렸다고 한다.

케이토쿠 원[景徳院]에 있는 카츠요리의 묘(墓) [야나나시 현[山梨県] 야마토 촌[大和村]

  1. 타케다 신겐과는 사촌(신겐의 아비인 노부토라의 동생(카츠누마 노부토모[勝沼 信友]의 딸)이며, 카츠요리의 유모(乳母)였다. [본문으로]
  2. 다른 이름으론 '리케니기[理慶尼記]'. [본문으로]
  3. 인질로 바쳤던 70세의 모친, 13살의 장남, 17살의 장녀 모두 사형. [본문으로]
  4. 카츠요리의 측근 츠치야 마사츠네[土屋 昌恒]가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