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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요시타카[ 孝高]

1604 3 20일 병사(病死) 59.

1546 ~ 1604.

()인 죠수이[如水]가 더 알려져 있다. 통칭 칸베에[官兵衛].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와 더불어, [하시바의 두 명의 베에(羽柴兵衛)]라 일컬어 졌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후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성주(城主)가 되었고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큐우슈우[九州]의 서군과 싸웠다.








천하인(天下人)에의 야망과 좌절


 1604 3 20일.

 야마시로[山城]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쿠로다 요시타카는 59세의 생애를 마쳤다.

 세키가하라[ヶ原]로부터 4 늦은 봄의 이별이었다.


 요시타카가 세상을 떠날 때, 아들인 나가마사[長政]에게 유언으로 남긴 내용이 [무공담 모음집(咄聞書)]에 전해지고 있다.

 “나는 도박을 잘하지만 너는 못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세키가하라[ヶ原] 이에야스 공[家康公]과 지부[冶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100일 정도 서로 싸우게 냅두면, 그 동안 난 츠쿠시[筑紫[각주:1]]를 제압한 후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천하를 잡을 수 있었을 터였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가 하루 만에 끝나질 않고 이에야스와 미츠나리가 100일 간 싸웠다면 자신은 얼른 큐우슈우[九州]를 평정하여 승기(乘機)를 타 츄우고쿠[国]의 모우리[毛利], 우키타[宇喜田]의 서군 세력을 물리치고 쿄우[京]에 올라가 어느 쪽이건 승자와 대결하여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 - 죽기 직전에 나가마사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10월 15일.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논공행상을 행하며 공이 있는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영지(領地)를 배분했다.

 카토우 기요마사[加藤 正]에게는 히고[肥後] 54만석, 나가마사에게는 치쿠젠[筑前] 50 2416석이라는 큰 영토가 주어졌지만 요시타카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이에야스는 요시타카의가 천하를 손에 넣으려 했던 숨겨진 야망을 꿰뚫어 보았던 것은 아닐까?

 치쿠젠[筑前]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나가마사는 부젠[豊前] 나카츠 -그때까지의 영지 18 2천석 - 에서 치쿠젠[筑前] 나지마[名島] 입성하였다.


 나지마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요해(要害)였지만 원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의 영지에 있던 조그만 요새에 불과하였고 더구나 마을을 만들 땅이 좁아 성 밑 마을(城下町)을 발달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나카 군[那珂郡] 후쿠사키[福崎]에 새로이 성을 만들어 쿠로다 씨[黒田氏] 발상(發祥)의 땅인 비젠[備前] 오쿠 군[邑久郡] 후쿠오카[福岡]의 이름을 따와, [후쿠오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지마 성[名島城]을 없애고 후쿠오카에 새로 성을 축성하기로 결정이 나자 요시타카는 은거하여 모든 것은 나가마사에게 맡기고, 나지마 성에서 나와 다자이후[太宰府[각주:2]]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거기로 옮겨 살았다.

 다자이후 텐마 궁[宮] 경내(境內)에 세워진 초가집에서 매일매일 풍류를 즐기며, 다도(茶道)와카[和歌], 렌가[連歌] 등의 소양을 쌓았다.


문인으로써의 풍류의 나날


 예전에 멀리 떨어진 조정[遠の朝廷=발음은 とおのみかど’]”라고 불렸던 다자이후.

 그곳의 초가집에서 풍류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요시타카는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에게 땅을 하사하여 살게 해서는 예전에 융성했던 다자이후 렌가의 부흥을 꾀했다.

 또한 다자이후 덴마궁()2천석을 기부하여 아치형 다리(太鼓橋), 석등(石燈)을 만들어 받치고, 큰 칼[太刀] 외에 [텐진엔기 에마키[天神絵巻[각주:3]]] 세 권과 렌가를 봉납함과 동시에 궁 사무 책임자인(宮司務別) 오오토리이 신간[大鳥居 信岩]과 친교를 맺었다.


 1601 1 17일.

 오오사카[大坂] 텐마 궁[宮]에서 개최된 렌가회()에 오오토리이 신간과 함께 참여했다.

 이 모임에서는 중앙 렌가계()의 중심적 존재인 사토무라[里村] 일문(一門)의 총사() 쇼우하[紹巴[각주:4]]나 쇼우시츠[昌叱[각주:5]],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다음 해인 1602 1 16.

 다자이후 덴마궁()에서 아들 나가마사, 신간[信岩],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 등과 렌가회()를 열어, 예부터 큐우슈우[九州] 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자이후 문예의 부흥을 꾀한 것은 특필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인(茶人)으로써도 뛰어났다.

 센노 리큐우[千 利休]와 친교를 맺고 그의 다도관을 몸에 익혔으며, 다이토쿠 사[寺]의 슌노쿠 화상[春屋和尙]을 참선(參禪)의 스승으로 삼아 다도에도 선()의 정신을 가미하여 깊이를 더해 갔다.


 1601 5월.

 이에야스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개최한 잔치에 참가했던 요시타카는 그곳에서 가장 큰 차 가루를 넣어 두는 단지인 [葉茶壺]를 그냥 들고 나와 그 호방함에는 이에야스도 놀랐다고 한다[각주:6].


 2년간의 다자이후 생활 후 일부 완성된 후쿠오카 성 세번 째 성곽[丸] 은거 저택으로 옮긴 요시타카는 부인인 코우엔[幸圓]과 소박한 생활을 보냈다. 평생 부인 한 사람만 사랑한 그는 경건한 크리스천 다이묘우[大名]이기도 했다. ‘돈 시메온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SIMEONJOSUI]라 쓰여진 로마자 도장을 사용했다.

 유해(遺骸)는 쿄우토[京都] 다이토쿠 사[寺]에 매장되었고, 하카타[博多]의 소우후쿠 사[崇福寺]에도 분골(分骨)[각주:7]되었다.



  1. 큐우슈우(九州)의 옛 이름. [본문으로]
  2. 과거 일본 조정이 힘이 있을 때의 큐우슈우[九州]와 부속 도서(島嶼)를 관장하던 관직인 다자이[太宰]의 정무소가 있던 곳. [본문으로]
  3.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받들고 있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 道真]'의 일생과 그가 죽은 뒤에 텐진[天神]으로 신앙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그림과 설명이 쓰여진 두루마기. [본문으로]
  4. 당시 렌가계(界)의 일인자. 여담으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의 반역을 일으키기 직전에 아타고[愛宕]에서 연 렌가회의 사회자로 참가했었다. [본문으로]
  5. 죠우하의 아들. [본문으로]
  6.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훔쳤다는 뜻. [본문으로]
  7. 유해를 두 개소 이상으로 나뉘어 매장하는 것. [본문으로]

다케나카 시게하루(竹中 重治)

1579 6 13 병사 36

1544 ~ 1579.

통칭 한베에(半兵衛).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龍興[각주:1])의 신하였으나, 오다 가문(織田)으로 배를 바꾸어 탄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요리키(与力[각주:2])가 된다. 아자이(浅井)씨 공략이나 나가시노(長條) 합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노부나가(信長)츄우고쿠(中国) 지방 공략의 선봉으로 출진하지만 하리마(播磨) 미키(三木)성을 포위하고 있던 중에 진영에서 죽었다.










이나바야마(稲葉山)성 탈취극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통칭인 '한베에(半兵衛)'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외견은 아름다운 부인(婦人)과 같아 전장에서도 용맹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말 가죽으로 둘러싼 투구와 목면의 하오리(羽織[각주:3]), 이치노타니(一ノ谷)의 갑옷을 입고 조용했다는 것이 [상산기담(常山紀談)]이 전해주는 이미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삼고지례로 맞이한 천재 군사라는 이야기는 [絵本太閤記]의 기술로 시게하루가 섬긴 것은 어디까지나 오다 노부나가이며 노부나가에게서 요리키라는 형식으로 히데요시에게 협력한 것이다.


 시게하루가 군략가로써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그 군략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름을 알린 것은 1564 2로 20살 때의 일이었다.

 시게하루는 인질로 이나바야마성에 있던 동생 시게노리(重矩)의 병문안을 핑계로 불과 16명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사이토우 타츠오키의 측근 사이토우 히타노카미(斎藤 飛騨守)[각주:4] 이하 6명을 죽였다. 거기에 호응하여 한베에를 사위로 둔 안도우 모리나리(安藤 守就)가 카가미시마(鏡島)성에서 병사를 보내어 타츠오키를 쫓아 내고 성을 점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대의명분이 없었기 때문인지 사이토우씨에게 비판적인 카이센 쇼우키(快川 紹喜)조차도 쪽팔림도 모르고 의도 모르는 놈들이 타케나카, 안도우 패거리들이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는 동안 오다 노부나가는 성을 건네라고 자주 사자(使者)를 시게하루에게 보냈으나 시게하루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고 8월 즈음에는 요시타츠에게 성을 되돌려 주었다.


 그 후 시게하루는 잠깐 오우미(近江)의 아자이(浅井)() 아래로 몸을 피했으나 다음해는 미노(美濃)로 돌아왔다고 한다. 1566년 쿠리하라(栗原) 산에 칩거하고 있던 시게하루를 히데요시가 세번 방문하여 꼬셨다라고 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絵本太閤記]의 기술인데 실제로 노부나가를 섬긴 것은 안도우 모리나리가 노부나가에게 내응했던 다음해 8월 이후일 것이다.


미키(三木)성 포위중에 죽음


 아네가와(姉川) 전투 후 히데요시가 요코야마(橫山) 성주가 되자, 시게하루가 히데요시 부재시에 성을 맡는 일이 많아져 아자이 세력(勢力)의 빈번한 습격에서도 성을 지켜냈다. 1577 히데요시의 츄우고쿠 지방 공략이 시게하루 최후의 무대가 되었다.


 1578년.

 아리오카(有岡)성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모반을 일으켰을 때, 히메지(嬉路)성주 쿠로다 요시타카(黑田 孝高)는 무라시게 설득을 명령 받았지만 반대로 무라시게에게 잡혀 유폐되어 버렸다. 요시타카도 배반했다고 생각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의 나가하마(長浜) 성에 맡겨 두었던 인질 처형을 명했다. 처치가 곤란해 하고 있던 히데요시에게 시게하루는 하나의 계책을 알려 인질을 자신의 본거지인 이와테(岩手)[각주:5]에 감추었다.


 1579 10월.

 아리오카 성이 낙성되어 요시타카도 구출되었고 인질도 요시타카에게 돌려주었다. 이 인질이 후의 쿠로다 나가마사(黑田 長政) 나가마사는 죽을 때까지 시게하루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1578 3월.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가 지키는 미키 성을 히데요시가 공격하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곳을 성급히 정면 공격하지 않고 주위에 많은 수의 진지로(陳城[각주:6])를 세워 장기 포위전을 하기로 하였다. 긴 전쟁터 생활로 건강을 헤친 시게하루가 병으로 쓰러진 것은 포위 중이던 다음해 4월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시게하루는 쿄우토(京都)에서 잠시 휴양했지만 병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죽는다면 전장에서 죽는 것이 무가의 바램이다"라며 비장한 결의를 한 시게하루는 부하의 걱정스러운 말을 뒤로하고, 하리마(播磨) 히라야마(平山)로 돌아왔다. 6 13 시게하루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한창 일할 나이의 죽음이 이 글 초반에 언급한 [常山紀談]과 같이 천재지만 여성적이며 선이 가는 이미지를 시게하루에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코우야(高野) 칩거의 꿈


 시게하루의 장남 시게카도(重門)가 기록한 [토요카가미(豊鑑)] 히데요시의 한 없는 슬픔을 [제갈 공명]을 잃은 [유비]에 비교하고 있다. 또한 시게하루 죽은 뒤에도 군사 회의를 할 때마다 히데요시는 반드시 시게하루를 언급했다고 한다.([寬永諸家系図伝])


 한편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는 시게하루가 큰 뜻과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서 결코 마음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시게하루에게 따로 영지를 하사하지 않고 고생만 시키며 그의 위세를 꺾으려 했다고 한다. 그것을 깨달은 시게하루는 미키성을 함락하면 코우야 산에 올라가 은퇴하여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살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한다.([竹中家譜])


 시게하루의 유골은 미키성이 보이는 장소에 묻어졌다. 죽어서도 아군을 고무하며 전군을 지휘하려고 했을 것이다. 미키성이 낙성된 것은 시게하루가 죽은 반년 후인 1580 1월이었다.

  1. 사이토우 도우산(斉藤 道三)의 손자. [본문으로]
  2. 조력자...를 말한다. 주군이 부하에게 도움이 될 부하를 파견하는 것으로 격을 따지자면 동격임. [본문으로]
  3. 갑옷 위에 입는 조끼와 같은 덧옷 [본문으로]
  4. 성 탈취의 원인은 이 히타노카미가 시게하루에게 오줌을 쌌기 때문. [본문으로]
  5. 보다이야마 성(菩提山城)의 별칭. [본문으로]
  6. 합전 혹은 공성용으로 임시적으로 세워두는 주둔용 요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