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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카츠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5. 9. 18:35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노부카쓰(織田 信雄)

1630 4 30 병사 73

1558 ~ 1630.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둘째 아들.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 具敎)의 양자가 되어 이세(伊勢) 코쿠시()가 되었다. 혼노우(本能)()의 변 후에는 오다가()의 차기 당주인 산포우시(三法師)의 후견인이 되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대항하여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전투을 일으키지만 화해하여 복속. 토요토미씨 멸망 후에는 토쿠가와(德川)씨를 섬겼다.









아즈치(安土)성 방화범의 소문


 1582 6 2일.

 혼노우(本能)()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었을 때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와 다섯 째인 카츠나가(勝長)가 함께 전사하였으며 이어서 다음 해에는 셋째인 노부타카(信孝)가 오다 가문의 집안싸움 끝에 자살하게 되었다. 따라서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때 성인식을 치루고 전장에 나가 한 사람의 무장으로 성장한 노부나가의 아들들 중에서 노부나가 사후 그 혈통을 지킨 것은 차남인 노부카츠뿐이었다. 또한 노부나가의 자식들 대부분이 노부나가가 죽은 후에 성인식을 치렀기에 노부나가를 따라 종군하여 아버지의 싸우는 모습을 가까이서 직접 본 것은 노부카츠뿐이었던 것이다.


 노부카츠는 혼노우 사()의 소식을 거성인 이세(伊勢) 마츠가시마()에서 들었다. 곧바로 구원군을 이끌고 오우미(近江)츠치야마(土山)까지 진출시켰지만 거의 하는 일 없이 되돌아왔다고 한다. 노부카츠가 오우미에 진출해 있을 즈음인 6 13 비와(琵琶) 호숫가에 장엄히 서 있던 천하의 명성 아즈치 성이 갑자기 불길에 휩싸였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카츠가 아무도 없는 성에 불을 질렀다고 하며, 일본측 사료에서는 점령하고 있던 아케치 히데미츠(明智 秀)가 성을 떠나면서 불을 질렀다고 기록한다. 그 밖에도 지역민 방화설도 있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의문에 싸여 있다.

 진상이 확실치 않으면서도 선교사의 보고서에 쓰여있듯이 노부카츠가 방화범으로 몰리는 것은 소문에 지나지 않지만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아들로써 불명예스러운 소문임에는 틀림이 없고 후에 노부카츠의 무장으로써의 평가에도 영향을 끼쳤다고도 생각된다.


몰락 다이묘우(大名)로 가는 길


 키요스(淸須) 회의[각주:1]로 인하여 노부카츠는 형 노부타다의 영지였던 오와리(尾張)을 계승하여 원래 있던 영지인 이세, 이가(伊賀)를 합친 3국을 지배하는 다이묘우가 되었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인식 받으며 급성장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권력 항쟁(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국지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지만 대국적으로는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군세와 뛰어난 외교술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어 어쩔 수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와 화해한다.


 이후 칸파쿠()에 취임하여 일본 통일을 목표로 하는 히데요시와 협조 체제에 들어간다. 조정의 관직 체계에서는 항상 히데요시보다 한단계 아래인 다이나곤(大納言), 나이다이진(內大臣)으로 승진하지만 실상은 오와리, 이세를 영유하는 토요토미 정권의 일개 다이묘우라는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입장에서는 주군 노부나가의 아들로서 노부카츠를 우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씨 정벌 후의 영지 재배치에서 칸토우()로 이동한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옛 영지로의 전봉()을 거부한 노부카츠를 카이에키(改易[각주:2])한 후 히타치(常陸)의 사타케(佐竹)씨에게 유배를 보냈다.

 히데요시의 노림수는 토요토미 정권을 강고히 하기 위해서도 오다, 토요토미 양 가문의 발상지인 오와리의 영국화(領國化)와 노부나가, 노부타다의 직신(直臣)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노부카츠 가신단 해체를 단번에 해치우려 했던 것이다.

 노부카츠로써도 옛 주군의 아들인 자신을 카이에키에 처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다씨()와 연이 깊은 오와리를 몰수 당하는 것은 노부카츠에게도 자기 존재를 부정 당하는 것이라 인식했음이 틀림이 없으며 히데요시의 영지 변경 명령 거절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도 칸파쿠의 명령 거부는 토요토미 정권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이묘우에서 평민으로 몰락한 노부카츠는 관위도 박탈당해, 머리를 밀고 출가하여 [죠우신()]이라 호를 칭하였다. 이 때 33.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용서받아 히데요시의 오토키슈우(伽衆[각주:3])에 들어갔으며, 1595년에는 장남인 히데카츠(秀雄)에게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 4 5천석이 주어져 사실상 노부카츠의 가계(家系)는 다시 일으켜졌다.
 
그러나 5년 뒤의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싸움에서 노부카츠-히데카츠 부자는 서군에 속했기에 싸움이 끝난 후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빼앗겼다. 일설에 의하면 싸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노부카츠는 옛 영지 회복을 노리며 오와리에서 동군에 속한 옛 신하들의 분열을 노렸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오다 가 부활


 시간이 흘러 때는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진()을 목전에 둔 1614 9월.

 노부카츠는 오오사카 성에서 퇴거하여 쿄우토(京都)의 류우안(龍安)()로 들어갔다. 개전을 앞두고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밀히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에게는 그 대가로 땅을 약속 받았던 듯 실제로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이후, 1615 7월에 야마토(大和)코우즈케(上野)의 양국() 내에서 5만석이 주어졌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1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드디어 다이묘우가 다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630년 4월 30일.

 쿄우토에서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노부카츠의 생예는 노부나가의 혈맥을 유지하는 것에 집념을 불태운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노부나가 사후 노부나가의 중신들에 의한 오다 가문 후계자 선정 및 영토 나누기. [본문으로]
  2.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
  3. 히데요시는 이런 오토키슈우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기 지식을 넓혀갔다. [본문으로]

모리 나가요시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4. 29. 19:10 Posted by 발해지랑

모리 나가요시( 長可)

1584 4 9 전사 27

1558 ~ 1584.

미노(美濃) 카네야마(金山) 성주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차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타케다(武田)() 공략 등에서 전공을 세워 [오니무사시(鬼武蔵)[각주:1]]라 불리었으나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에서 전사. 혼노우(本能)()의 변에서 전사한 노부나가의 코쇼우(小姓[각주:2])모리 란마루(蘭丸), 보우마루(坊丸), 리키마루(力丸)는 동생.









오니무사시(鬼武蔵)의 패사(敗死)


 모리 나가요시는 1570년에 오우미(近江) 우사야마(宇佐山)성에서 전사한 모리 요시나리(森 可成)의 차남이다. 형 요시타카(可隆)도 같은 해에 전사하는 바람에  불과 13세의 나이로 미노(美濃) 카네야마(金)성주가 되었다.

 1582년의 타케다(武田) 공략에서는 선봉대로 출진하여 활약. 북부 시나노(信濃)4군과 카이즈(海津)성을 하사 받았지만 혼노우(本能)()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우에스기(上杉) 공략을 위한 에치고(越後)의 진중에서 퇴각하여 카네야마성으로 돌아왔다.


 1584년 3월 6일.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각주:3])이세(伊勢) 나가시마(長島)성에서 히데요시(秀吉)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 츠타 요시후유(津田 義冬) 3인을 자해시켜 히데요시와 대립할 뜻을 명확히 하였다. 또한 부하인 여러 장수들을 성에 모이게 한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 = 미노 오오가키(大垣)성주)), 모리 나가요시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야스는 재빨리 구원에 응해 13일에는 키요스(淸須)성에 도착. 노부카츠와 회견하였다.


 한편 이케다 츠네오키, 모리 나가요시에 대해서는 히데요시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설득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츠네오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젖형제[각주:4]이기도 하기에 오다 가문을 선택해야 하나, 한창 커가는 히데요시 측에 서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가로놓였다.


 전쟁의 시작은 북부 이세에서 시작되었는데 히데요시는 미노 지방에 대해여 설득 공작을 계속함과 동시에 3 11일에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각주:5])를 대장으로 한 1 7천의 군세를 오우미(近江) 나가하라(永原)에 배치하여 미노 방면에 압박을 가했다.


 13일.

 결단에 몰린 츠네오키는 예전 자신의 성이기도 했던 노부카츠 쪽의 이누야마(犬山)성을 탈취하는 형태로 히데요시의 편임을 알렸다. 츠네오키의 사위이기도 한 모리 나가요시도 이것에 응하는 형태로 최전선인 하구로(羽黑) 하치만(八幡)산으로 진출했다. 한편 이에야스는 코마키(小牧)산에 올라, 17일에는 나가요시를 기습하여 이누야마로 패주시켰다.


 히데요시가 이누야마에 도착한 것은 27일이었다.

 히데요시는 더욱 전진하여 라쿠덴(樂田)에 본진을 두었으며 코마키산의 이에야스-노부카츠군과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츠네오키가 제안한 것이 별동대를 이끌고 이에야스의 본거지 미카와(三河)의 빈집을 터는 작전이었다. 이누야마성 탈취로 이미 전공을 세운 츠네오키가 새로이 도박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 하치만 산에서 일패도지한 나가요시의 강한 희망에 위한 것이라도 한다.


 작전은 4 6일 밤중에 행해졌다.

 선봉은 이케다 츠네오키, 2번대는 모리 나가요시, 3번대는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 4번대가 총대장인 미요시 히데츠구였다. 덧붙여 히데츠구도 츠네오키의 사위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재빨리 탐지한 이에야스는 8 은밀히 주력을 이끌고 추격하여 9일 오전부터 각 부대를하나씩 각개 격파했다. 후속부대가 모두 무너져 이케다의 부대와 모리의 부대는 이에야스의 본대까지 달려든 총공격을 당하여 괴멸되었다. 나가요시는 철포에 미간을 뚫려 즉사.

 [오니무사시]의 허무한 최후였다. 향년은 27.


출진 전에 남긴 유언장.


 그러한 일이 있기 전인 3 26일. 나가요시는 유언장을 남겼다.


 1조와 2조는 차도구인 사와히메(沢姫)의 단지, 다이텐모쿠(台天目)를 히데요시에게 진상한다는 내용이다.

3조는 어머니가 히데요시에게 영지(領地)를 얻어 쿄우토(京都)에 살 것, (나가요시의 동생 센마루(千丸))는 계속해서 히데요시에게 머물 것을 권하고 있다.

  4조와 6조도 센과 관련한 것으로 자신의 뒤를 잇지 말 것을 명하며 카네야마(金山)성에는 능력과 충성심이 확실한 무사를 성주로 삼아 달라는 것을 히데요시에게 부탁하며 앞서 말한 것 이외의 목욕 도구나 도(), 와키자시(脇差[각주:6])는 센에게 준다고 하고 있다.

  5조에서는 여성들에게 정실의 친정이기도 한 오오가키(大垣 = 츠네오키의 성)로 피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유언장 말미에는 쿄우토의 혼아미(本阿弥)에게 맡겨놓은 와키자시를 센이 받을 것, 오코우(여동생인지 딸인지는 불명)는 쿄우토의 의사와 같은 쵸우닌(町人)에게 시집갈 것을 희망. 거듭 센이 모리 가문을 상속 받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만에 하나라도 히데요시까지 죽는 패배를 했을 경우 모두 불을 붙여 자살을 강요하는 점에서 전국 시대의 비장감이 흐른다.


 초반의 1조와 2조는 이 편지가 히데요시에게 보여졌을 것을 강하게 의식한 것이겠지만 가족과 관계된 부분은 거짓 없는 마음일 것이다. 나가요시가 자신의 부친이나 형제들처럼 피 냄새 끊기지 않는 센고쿠의 생활에서 가족이 벗어나길 바라는 부분에는 현대인들에도 공감할 것이다.


 나가요시가 죽은 뒤.

 사와히메의 단지는 히데요시의 것이 되어 같은 해(1584) 10 10일 다회(茶會)에서 피로되었다. 한편 아버지와 형 5(혼노우(本能)()의 변에서 전사한 란,보우,리키의 3형재는 센의 형)을 전쟁에서 잃은 센고쿠 시대의 [라이언 일병]인 센은 타다마사(忠政)라 이름 지어져 형의 바램과는 반대로 카네야마 성주가 되었지만, 그 후는 전란을 잘 헤쳐나가 미마사카(美作) 츠야마(津山) 번주(藩主 = 18 6천석)가 되어 1613년에 죽기까지 천수를 누렸다.

  1. 나가요시의 관도명이 무사시노카미(武蔵守)였으며, 가열찬 전장에서의 모습이 귀신과 같다 하여 이러한 별명이 붙었음. [본문으로]
  2. 비서관 역할을 하는 20살 이전의 무사를 말함. [본문으로]
  3.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4. 노부나가는 핏덩이일 때 다른 여인들의 젖꼭지를 물을 뜯는 버릇이 있었으나 츠네오키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빨았다 한다. [본문으로]
  5.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기 전의 이름 [본문으로]
  6. 일본 무사가 차는 두 자루의 칼 중 작은 쪽을 말함. [본문으로]

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