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음력으로 9월 15일[각주:1]이 되면 카고시마 현[鹿児島県] 히오키 군[日置郡] 이쥬우인 정[伊集院町]이 시간여행의 무대라도 된 듯 센고쿠 시대처럼 갑주를 몸에 걸친 무사들이 오며 “체스토! 세키가하키라”를 외치면서 행진한다.
 ‘체스토[チェスト]’라는 것은 카고시마 방언으로 ‘
치쿠쇼우[畜生]’라는 의미이며 화 났을 때나 분노했을 때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 행사를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라고 하며, 9월 15일에 행해지는 것은 1600년 9월 15일[각주:2]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의 패전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묘우엔 사[妙円寺]는 시마즈 군[島津軍]의 대장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의 위패를 안치한 절이다.[각주:3]

                                                                [묘우엔 사 참배[妙円寺詣り]]

  시마즈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의 패장이다. 그러나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 보여준 모습에 패자의 비참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러기는커녕 당시 요시히로의 후퇴는 ‘시마즈의 전진철수[島津の背進]’라 칭송 받으며 무명(武名)을 높였다. 요시히로의 무명(武名)은 시마즈의 큐우슈우[九州] 제압 때부터 유명했지만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조선에서의 활약과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우선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상대방인 명나라 측에 ‘석만자(石曼子)’로 계속 기억될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8년 가을. 요시히로는 사천(泗川)의 성에 7천의 병사를 이끌고 농성하고 있었다. 사천성(泗川城)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가 지키는 울산성(蔚山城),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가 지키는 순천성(順川城)과 함께 명나라 군이 ‘왜의 세 소굴(倭之三窟)’이라 부르며 최대의 공격목표로 삼은 곳이었다.

 10월 1일, 명나라 군 20만[각주:4]은 사천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요시히로는 명나라 군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를 충분히 끌어들이는 작전이었다. 명나라 군은 의심 없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알맞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요시히로는 총공격을 명했다. 시마즈 군의 철포가 굉음을 내며 일제히 불을 뿜었다. 더구나 미리 숨겨놓았던 화약통을 저격하여 대폭발 시킨 것이다.[각주:5] 명나라 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런 명나라 군에 시마즈 군이 돌격하였다.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던 명나라의 피해는 굉장히 컸다. 기록에는 시마즈 군이 이 일전에서 벤 목은 3만8천7백여[각주:6]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각주:7]
 
요시히로 스스로도 “명예를 중국, 일본에 드높였다”고 할 정도로 이 사천의 대승리를 자랑스러워 하였다. 더구나 이 승리의 영향은 커 울산, 순천의 두 성을 포위하고 있던 명나라 군도 사천에서의 패전소식을 듣고 철퇴한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에서 요시히로는 벤 적의 목들 대신 코를 베어 히데요시에게 보내어 공적의 증거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히데요시에게 몸보신하라며 호랑이의 머리, 고기, 내장 등을 소금에 절여 보내거나 하였다.

 어쨌든 요시히로가 특출한 장수의 그릇이며 또한 개인적으로도 무예, 무용이 뛰어났다는 것은, 이 조선에서의 전쟁에서 “스스로도 칼로 공적을 세웠다” – 즉 스스로도 칼을 휘두르며 싸웠다는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요시히로도 또한 조부 짓신사이 타타요시[日新斎 忠良][각주:8] 이래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전통에 따라 아군, 적군 구별 없이 전사자의 공양에 힘썼다는 것에 있다. 현재 와카야마 현[和歌山県]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조선진공양비(朝鮮陣供養碑)”가 그것이다.

 참고로 요시히로의 조부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시마즈 가문의 중흥의 시조로 유교, 불교, 신도(神道)에 밝은 학자이며 실천자였다. 1583년 사츠마[薩摩] 카세다 성[加世田城]을 공략한 타다요시는 당시 경험한 종교적 체험으로 인해 전사자는 모두 부처라 깨닫고는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극진히 공양하였고, 이 전통은 아들인 타카히사[貴久][각주:9] 그리고 타카히사의 아들인 요시히사[義久], 요시히로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1600년 9월 15일 –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의 일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300기(騎), 총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부대의 오른 편에 진을 쳤다.[각주:10] 그 시마즈의 우측에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본진이 있었다.
 오전 8시[각주:11]. 전투가 시작되었다. 서군 중에서 주력으로 싸운 것은 이시다, 코니시, 우키타의 부대였다. 요시히로는 어째서인지 병사 한 명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시다 측의 사자[각주:12]가 싸워달라고 부탁하여도, 말투가 싸가지 없다
[각주:13] 쫓아내는 식이었다.[각주:14] 결국 미츠나리 자신이 직접 움직여달라고 요청하러 왔다. 그러자 요시히로[각주:15]는,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 라고 하며 더 이상 대화도 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요시히로는 당초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뜻을 같이하고,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会津征伐] 때 후시미 성[伏見城]의 수비를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거병하자 농성군 주장인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가 요시히로의 입성을 거부한 것이다.[각주:16] 요시히로는 미츠나리의 세력범위의 한 가운데 남겨진 꼴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서군에 속하게 된 것이었다.[각주:17]

 정오가 조금 지났을 즈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황 [각주:18] [각주:19]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이 급격히 무너졌다. 요시히로는 그래도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군이 붕괴하자 동군은 요시히로의 진영으로 밀물처럼 다가왔다.

 이때가 되자 요시히로는 처음으로 싸우려 결심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이제 싸우다 죽는 것 외에 없는 듯 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대장이 싸우다 적의 손에 죽는 것은 예부터 사츠마 군[薩摩軍]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요시히로 주종은 사력을 다하여 전쟁터에서 탈출을 꾀하려 하였다. 퇴로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동군의 후방에 있는 ‘이세로[伊勢路]’뿐이었다. 요시히로 이하 300기(騎)는 기치(旗幟)를 버리고, 부대표식[馬標]을 부러뜨린 뒤 전군 일환이 되어 고함을 지르며 동군의 한가운데로 돌진하였다.

 동군은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부대가 시마즈 군을 포위하면서 공격해 왔다. 요시히로의 조카 토요히사[豊久][각주:20]가 요시히로의 진바오리[陣羽織][각주:21]를 입고 요시히로의 영무자가 되어 전사, 이어서 쵸우쥬인 세이쥰[長寿院 盛淳]이 “내가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다”고 외치며 동군의 주의를 끌다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그들 외의 다른 병사들도 길 위에 각각 앉아 총을 쏘는 “좌선진(座禪陣)”이라는 진형을 취해 추격해오는 동군을 저지하였다. (대충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 듯(링크))

 이러한 휘하의 용감한 싸움 덕분에 요시히로는 구사일생하여 이세로[伊勢路]로 빠져나간 것이다. 이때 당초 300기였던 무사는 80기로 줄어있었다.[각주:22]
 
이 요시히로 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탈출 전투는 장렬히 싸운 모습으로 인해 패주라는 인상을 전혀 주지 않고 반대로 크게 무명을 드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그 후, 종전처리는 형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가 중심이 되어 뻐팅김과 끈질긴 외교를 전개하여 2년 뒤, 요시히로의 무죄와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안도를 쟁취하게 된다. 그러나 요시히로는 은거의 몸이 된다.
 이때부터 요시히로는 시마즈 가문을 이은 아들 타다츠네[忠恒=이에히사[家久]][각주:23]에게 치세의 마음가짐 등을 가르쳤다. 화려함과 문약(文弱)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말년에 저술한 한문체의 자서전에 그러한 정치철학을 담았다.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무시하고 단지 일신의 능력만을 믿고 세상을 살아가려는 자는 곧 멸망해 버리지만, 우리 시마즈 가문은 대대로 신불(神佛)을 우러르며, 선조를 공경하였다. 학문을 갈고 닦으며 번영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 가문을 잇는 자는 더욱 이 전통을 지켜나가야만 한다”
 라는 것이었다. 또한 나중에는 “쿄우[京]의 말투를 쓰거나 다른 지역[国]을 따라 한다면 사츠마는 멸망한다”고까지 말했다.

 요시히로는 굉장히 건강했다. 세키가하라에서 장거리 도피행에 이어 귀국했을 때가 66세였다. 그리고 1607년 이때 나이 73세였다. 이해에 전 관백[前関白]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가 보내온 편지에,
 “귀공은 여전히 천하에 그 무명을 떨치고 있으면서도, 여기까지 들려오는 바에 따르면 지금도 여자들에게 하자고 조른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스스로 무명을 깎아 내리는 일이 아니오?”
 라고 놀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요시히로도 차츰 쇠약해져 곧이어 식사하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늙어갔다. 그래도 이 노웅(老雄)에게 식사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밥상을 준비하고는 측근들이 큰 소리로 전쟁터의 함성을 지르며 “적이 다가왔습니다. 어서 식사를 하시고는 적에 대비하십시오”라고 말하면, 그 순간만은 요시히로도 정신이 돌아와 혼자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85년의 생애에서 수많은 격전을 쌓아 온 무인의 면목이 드러나는 일화이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
1535년생. 형 요시히사[義久], 동생 토시히사[歳久], 이에히사[家久]와 함께 ‘시마즈 사형제[島津四兄弟]’[각주:24]로 용명을 떨쳤다. 1587년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25]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시마즈의 본령(本領) 중 오오스미를 히데요시에게 영유를 인정받았다.[각주:26]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해 용명을 떨쳐, 그 공적으로 총 69만9천석이 된다[각주:27] .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에서 패하지만, 패장인 채 그대로 영지를 인정받은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1619년 죽었다. 85세.

  1. 지금은 참가하기 쉽게 10월 넷째 주 일요일 날 행해진다고 함. [본문으로]
  2. 서력으로는 10월 21일. [본문으로]
  3. 그러나 지금은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망하고 들어선 메이지 정부[明治政府] 초기 불교탄압과 신도 일원화를 위한 폐불훼석(廃仏毀釈) 때 사라진 묘우엔 사[妙円寺]가 있던 자리에 대신해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받드는 토쿠시게 신사[徳重神社]가 세워진 후에는 "「토쿠시게 ‘신사’」에서 「묘우엔 ‘사’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조선측 기록에서는 약 3만 9천. [본문으로]
  5. 선조실록[선조 105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0월 8일(경신) 7번째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에 따르면 모국기의 진영에서 취급주의로 인하여 폭발이 있었던 듯. [본문으로]
  6. 「시마즈가문 문서[島津家文書]」의 주장. [본문으로]
  7. 사족으로 일본 측에서 전쟁 중이나 후에 가증을 받은 가문은 없지만 시마즈 가문은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요시히로의 아들 타다츠네[忠恒]가 종사위하(従四位下) 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로 임관됨과 동시에 5만석의 가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8. 짓신사이[日新斎]는 33살에 은거 후 불문에 들어가면서 칭한 호칭. [본문으로]
  9. 요시히로의 아비. [본문으로]
  10. 근래의 주장으로는, 이 자리 즉 미츠나리 진영의 우측에는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가 있었으며, 요시히로는 미츠나리 진영 후방에 있었다는 듯. [본문으로]
  11. 오전 10시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2. 야소지마 스케사에몬[八十島 助左衛門]. 임진왜란 때부터 미츠나리가 시마즈 측에 자주 사자로 보내던 인물이었기에 시마즈 측의 면면들과도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미츠나리의 사자가 되어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린 것도 이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이었다. [본문으로]
  13. 말투라기 보다는 야소지마가 급하다며 말 위에서 출격을 부탁한 것이 당시 예의나 군법에 어긋났기에, 사츠마의 병사들이 욕하며 죽인다고 난리를 쳤다. 오히려 야소지마와 안면이 있었던 상급지휘관들이 말리는 일면이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4. 사족으로 야소지마 스케사에몬은 이에 대한 일건을 미츠나리에게 보고한 뒤 본진을 빠져나와 전쟁터에서 도망쳤다. 세키가하라 후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에게 취직하여 500석, 후에 타카토라에게 인정받아 타카토라의 문서담당관[右筆]이 되어 1000석을 받게 된다. [본문으로]
  15. 요시히로가 아닌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와의 대화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이에야스[家康]는 상경을 거부하며 불온한 움직임을 행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처벌하기 위해 아이즈[会津]로 향하면서 요시히로에게 후시미 성[伏見城]에 입성하여 지켜줄 것을 명령하였으나, 구두로만 전했을 뿐 문서로 남기지 않았기에 모토타다는 요시히로를 믿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당시 후시미 성을 지키던 군세는 전부 이에야스 휘하의 군세였던 만큼 이질적인 사츠마의 군세가 들어왔을 시 명령계통과 통일적인 움직임에 균열이 생길까 하여 모토타다가 거부하였을 수도 있다 [본문으로]
  17. 요시히로의 사츠마 군세가 이런 것을 포함하여 여러 이유로 세키가하라 때 싸우려 하지 않았다는 시각이 현재도 주류이지만, 카고시마[鹿児島] 출신으로 사츠마[薩摩] 관련 전문가인 키리노 사쿠진[桐野 作人]씨는 이때 사츠마의 군세가 방관이나 눈치보기를 했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야소지마의 일건과 이시다 미츠나리의 내방 사이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반이 일어나 서군이 무너지는 시점이었기에, 미츠나리의 요청으로 군을 움직인다고 하여도 사츠마 1500명의 군세로는 전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츠마 측 참전인물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오히려 전투 초반 요시히로는 활발히 미츠나리의 진영에 사자를 보내어 수고한다고 격려하면서 작전계획을 면밀히 짜는 한편 응원이 필요한 곳에 철포 부대를 파견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8. 시간흐름과 전황은 일본군 참모본부의 「일본전사 세키가하라역[日本戦史・関ヶ原役]」에 따른 것인데, 문제는 일본군 참모본부는 센고쿠 관련 연구를 당시의 일차사료가 아닌 에도시대에 나온 군기물(軍記物)에 주로 의존하여 정리하였기에 80년대 중반부터 관련연구가들로부터 자주 까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 [본문으로]
  19. 참고로 사츠마 참전 병사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군세는 2시간도 버티지 못하였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듯이 서군의 분전은 없었다는 인식인 듯. 뭐 전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쓰여진 회고록인지라 아군의 붕괴에 일어났던 일보다 과장된 감정과 지식을 가질 수도 있기에, 그에 대해선 감안해서 보아야 할 듯. [본문으로]
  20. 시마즈 4형제 중 막내 이에히사[家久]의 아들. [본문으로]
  21. 갑옷 위에 덧입는 조끼처럼 생긴 전포(戰袍) [본문으로]
  22. 요시히로와 함께 탈출한 이는 50명 정도인 듯, 밤 10시 즈음 오와리 코마노 고개[駒野峠] 앞마을 주민들에게 밥 좀 달라고 할 때 50명 정도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3. 1606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이름자 하나를 물려 받고, 시마즈 가문 당주의 통자 ‘히사[久]’를 결합하여 타다츠네에서 이에히사로 바꿈. [본문으로]
  24. 사족으로, 본문에도 나오는 시마즈사형제의 할애비인 시마즈 타다요시[島津 忠良]는 사형제의 인물됨을 평하며, "요시히사[義久]는 삼주(=사츠마[薩摩], 오오스미[大隅], 휴우가[日向])의 총대장이 될 덕목을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었으며, 요시히로[義弘]는 영웅의 무략을 갖추어 이에 따를 자 없으며, 토시히사[歳久]는 사건처리의 일부시종의 이로움과 해를 깨닫는 지략에는 견줄 이 없으며, 이에히사[家久]는 군법전술의 묘를 터득했다"고 평하였다. - 덕분에 듣보잡인 토시히사는 신장의 야망이 버전업 할 때마다 지략이 상향조정되어 등장한다. [본문으로]
  25. 1586년~1587년 사이에 히데요시가 시마즈 가문[島津家]에 공격당하던 큐우슈우[九州]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26. 그러나 사츠마에 태합검지(太閤検地)가 끝난 1596년에는 히데요시 측의 의중으로, 요시히로가 사츠마[薩摩]를, 요시히사는 요시히로의 영지였던 오오스미[大隅]로 영지가 바뀌게 된다. 당시는 본거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였던 때인지라 시마즈 가문의 본령이 있는 사츠마를 영유하게 된 요시히로가 시마즈 가문을 대표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사족으로 요시히로는 형 요시히사를 의식하여 사츠마에는 자신의 자식이며 요시히사의 딸을 부인으로 삼아 후계자 취급을 받던 타다츠네[忠恒]를 입성시키고, 자신은 오오스미와 사츠마의 국경에 있는 쵸우사[帖佐]라는 곳에 머문다. [본문으로]
  27. 실제로는 61만 9430석. [본문으로]

전편에 이어서

☞ 링크 중 한문에 링크가 걸린 것은 위키피디아 일본판으로 점프합니다.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에 관한 이야기는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편찬사료들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부의 공식기록이라는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를 위시한 여러 사료들뿐만 아니라 ‘유영부녀전계[柳営婦女伝系]’, ‘옥녀기[玉輿記]’와 같이 토쿠가와 가문에 시집온 여인들에 대한 기록서에서 볼 수 있는 키요야스의 부인 케요우인[華陽院] 항목에서도 키요야스가 죽게 되는 모리야마의 변을 텐분[天文] 4년 즉 1535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와 개정 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따르면 키요야스의 미카와 군세는 당시 오와리[尾張]의 키요스[각주:1]에 있는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키요스가 노부히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 1535년 당시 키요스는 노부히데의 영향력 밖에 있었기 때문입죠.

키요스

키요스는 당시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오다 야마토노카미 타츠카츠[織田 大和守 達勝]의 거성이었습니다.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텐분 원년(1532년)까지 키요스의 서쪽 쇼우바타[勝幡]에 있던 부하격인 단죠우츄우 노부히데[弾正忠 信秀]와 전쟁을 벌일 정도였습죠.

이후에는 소강상태가 이어집니다만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틈만나면 노부히데를 노렸으며 결국 오와리 제일의 실력자라는 노부히데가 1551년에 죽자 대놓고 노부나가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사이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좋을 리가 없었겠죠. 당시는 하극상의 시대. 야마토노카미 가문에서 보기에 치고 올라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예전 가신을 좋게 볼 리는 없을 터이며, 단죠우츄우 가문 쪽 역시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으니까요. 노부히데의 입장에서는 미카와의 키요야스가 키요스를 공략해 준다면 그 틈에 떨어진 떡고물을 취하려 할 지언정 도우러 갈 이유는 희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쇼바타 성[勝幡城]과 키요스 성[清洲城],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위치

어쨌든 이 키요스가 단죠우츄우 가문[弾正忠家]의 영지가 되는 것은 1555년 노부나가와 노부나가의 숙부이자 노부히데의 동생인 노부미츠가 손을 잡고 모략으로 키요스를 손에 넣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각주:2]

그렇다면 모리야마는?

자 그럼 모리야마는 누구의 영지였을까요?
위에 언급한 에도 막부의 기록들에는 노부히데의 동생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의 성이라고 합니다만, 실은 이 모리야마도 노부미츠의 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영지냐 하면, 바로 키요야스와 사이가 나뻤던 숙부 마츠다이라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의 영지였던 듯 합니다.

적어도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기 9년 전인 1526년에 렌가사[連歌師] 소우쵸우[宗長]의 일기에 모리야마에 있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저택에서 렌가회가 열려 거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또한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는 1535년까지도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각주:3]

이 모리야마가 언제부터 노부미츠의 영지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노부히데가 모리야마의 근방 나고야[那古野]를 손에 넣고 그곳에 있는 텐노우보우[天王坊][각주:4]라는 절의 토지 영유를 인정한 1538년 이후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즉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난 1535년 당시에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였지 노부미츠의 거성이 아니었단 말입죠.

썰렁한 결말

즉 이 모리야마의 변에서 오다 가문이 낄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마츠다이라 종가[松平宗家]의 키요야스[清康]와 그 종가에 개기는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 간의 싸움이었습죠. 미카와∙마츠다이라 일족[三河∙松平一族]라는 책을 쓴 히라노 아키오[平野 明夫]라는 분은 마츠다이라 가문 종가와 분가의 다툼에 더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와 아시카가 요시츠나[足利義維] 다툼과도 관련이 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마츠다이라 가문 내부의 싸움이었을 뿐입니다.

또 하나 수상한 점.

◀왼편에 있는 그림은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 기록된 모리야마 변에 관해 기록된 곳입니다. 모리야마에 진을 친 키요야스에게 나이젠 노부사다가 노부히데와 내통하여 키요야스의 거성을 노리고 종가를 빼앗으려한다는 소문을 듣고 키요야스가 군사를 되돌리려 할 때 사카이[酒井], 오오쿠보[大久保]의 말에 따라 우선 군사를 되돌리지 않기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라고만 나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에 관해선 토쿠가와실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오른편의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그들이 누구인지 나와 있습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 가문의 면면들이 보이는군요.

사카이 사에몬노죠우 타다츠구[酒井 左衛門尉 忠次]와 오오쿠보 가문의 유명인인 오오쿠보 시치로우에몬 타다요[大久保 七郎右衛門 忠世], 오오쿠보 지에몬 타다스케[大久保 治右衛門 忠佐] 등이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이상한가 하면...

사카이 타다츠구 1527년생. 오오쿠보 타다요 1532년생 오오쿠보 타다스케 1537년생입죠. 그리고 모리야마 변이 일어난 해는 1535년.

그러니까 모리야마 변이 일어날 당시, 사카이 타다츠구는 9살. 오오쿠보 타다요는 4살, 타다스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입죠. 여담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개정미카와후풍토기의 저본인 미카와후풍토기에는 이시카와 카즈마사까지 등장한다고 합니다. 역시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모리야마의 변 당시 3살이옵죠.

이런 이유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영무자설[徳川家康の影武者説]을 발표하며 모리야마의 변이 1535년 키요야스 때의 일이 아니고 1561년의 일이라고 합니다.

키요스에 있던 것은 노부나가이며, 뒤에서 획책했던 것은 나이젠 노부사다가 아니라 당시엔 이에야스와 적대적이었던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水野 信元]라고 합니다.

1561년 이에야스가 죽어 영무자가 교체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기를 바꾸려다 보니 노부나가가 아닌 노부나가의 아비 노부히데가 된 것이며, 역시 미즈노 노부모토가 아닌 나이젠 노부사다가 된 것이라고요. 그리고 죽은 이는 키요야스가 아닌 이에야스였으며 이때 세라타 지로우사부로우[世良田 二郎三郎]라는 이가 역사상의 이에야스로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무라오카의 주장대로 1561년이라면 위에 사카이나 오오쿠보의 나이도 해결이 됩지요. 사카이 타다츠구 35세. 오오쿠보 타다요는 30세. 타다스케는 25세. 확실히 이정도 나이라면 옆에서 진언할 나이는 되겠지요.

뭐 저도 무라오카 씨의 주장에는 납득을 못합니다만 그가 이에야스 영무자설을 주장하기 위해 언급한 몇몇 것에는 흥미로운 점이 몇 군데가 있긴 합죠...뭐 이건 언젠가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기로 합죠.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의 이후

의심도 받았고 또한 자기 아들이 주군까지 살해하였다.
보통 이랬다면 바로 사형이고 실제로 현지 분위기도 그러했으며 아베 오오쿠라 자신도 대역무도의 죄를 지었다며 죽으려 했으나, 야시치로우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전편에서 언급했던 결백서가 발견되었고, 거기에 키요야스의 아들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용서를 얻어 이후 그에게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이후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가 종가의 히로타다를 죽이려고 할 때도 히로타다를 탈출시켰고 히로타다의 복귀를 의해서 힘을 써 실현. 히로타다가 죽은 이후 히로타다의 아들인 이에야스[家康]가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보호를 받을 때는 마츠다이라 가문을 대신해서 오카자키 행정관[岡崎奉行人] 중 한명으로 오카자키 주변을 다스리다 죽습니다(생몰년 불명[각주:5]).

아베 오오쿠라는 주군을 죽인 대역무도의 핏줄이라며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그의 측실이 아베 오오쿠라의 씨를 임신한 채로 시나노[信濃]에서 미카와에 와 있던 이노우에 키요무네[井上 清宗]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후에 이노우에 키요히데[井上 清秀]라는 사람이 되며, 키요히데의 자식들은 대대로 에도 막부의 요직에 취하여 후다이[普代] 명문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1.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는 清洲,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는 清須 [본문으로]
  2.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 織田喜六郎殿御生害の事. [본문으로]
  3.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오와리∙오다 일족[尾張∙織田一族]”(新人物往来社),p82 [본문으로]
  4. 사족으로 이곳은 노부나가가 어렸을 적에 공부한 절이라고 함. [본문으로]
  5. 위키에는 1549년 죽었다고 하나 1553년에도 오카자키 행정관 중 하나인 사카이 키요히데[酒井 清秀]와 함께 미카와 절들에 대한 문서가 남아있기에 1549년 사망설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1960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두 명이었다는 놀랄만한 이설(異說)을 발표한 사람이 있다. 사의(史疑)라는 책을 저술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이다. 토우카이 지방[東海地方]의 지방관리로 근무하던 중 미카와[三河]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후년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세라타 모토노부[世良田 元信]라는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고 한다. 그는 진짜 이에야스(당시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의 부하가 되어 불시에 진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이런 이설이 나올 정도이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선조 역시 확실치 않다. 닛타 겐지[新田源治][각주:1]의 자손을 자칭하고 있지만 이는 나중에 날조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토쿠가와 가문의 시작은 코우즈케[上野] 닛타 군[新田郡]에 살던 토쿠아미[徳阿弥]라는 행각승()으로, 이 스님은 떠돌던 중 미카와에 와서 서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의 호족 타로우사에몬[太郎左衛門]의 사위가 되어 환속, 이름을 마츠다이라 타로우사에몬 치카우지[松平 太郎左衛門 親氏]라고 했다 한다.[각주:2]
 후년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었을 때 아시카가 겐지[足利源氏][각주:3]의 명문 키라 씨[吉良氏][각주:4] [각주:5]의 족보를 물려 받은 것[각주:6]도 이런 애매한 선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명백한 족보사칭이다.

 

화제를 돌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는 두견이[ほととぎす]에 비유하여,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가 노부나가[信長], ‘울게 만들겠다’가 히데요시[秀吉],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식으로 정권의 자리를 획득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江戸時代] 후기 턴포우[天保] 연간[각주:7]에 그려진 풍속도에는 갑주를 입은 남자들이 떡을 만들고 있는 장면이 있어, 절구공이를 들고 막 찧으려고 하는 것이 노부나가, 그 옆에서 떡을 만들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 그리고 최상석에 가만히 앉아서 떡을 먹는 것이 이에야스이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를 비꼰 그림으로 그 때문에 만든이인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 芳虎]는 막부(幕府)에 체포되어 60일간 수갑이라는 형(刑)과 절판이라는 벌에 처해졌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이라 알려진[각주:8] 이 말은 그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참을 인(忍)이라는 글자가 그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보다 8살, 히데요시보다는 5살 어리다. 조부 키요야스[清康]의 시대부터 미카와 오카자키[岡崎] 성주가 되었지만, 동쪽의 이마가와[今川], 서쪽의 오다[織田]라는 강력한 세력에 끼어 약소세력의 비애를 맛보고 있었다.
 조부 키요야스가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부터 마츠다이라 가문은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보호를 받기 위해 어린 이에야스는 인질로 바쳤고, 그로 인해 이에야스와 마츠다이라 가문은 인종의 시절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12년간 마츠다이라 주종(主從)은 고난 속에서 허덕이지만, 이 시기에 이에야스의 참을성 강한 성격이 만들어진다.

 1560년 5월 19일.
 오다 노부나가의 전격작전으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어, 덕분에 이에야스도 인질생활에서 해방된다. 이에야스는 19살이 되어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관계를 끊고 오다와 동맹을 맺어 미카와 통일을 이룬다. 1563년, 그때까지 모토야스[元康]에서 이에야스[家康]로 개명한다.

 막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찰나 본거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적이 봉기한다. 영내에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9]가 봉기한 것이다. 미카와에 있던 이마가와 잔당에 더해 대대로 마츠다이라 가문을 섬기던 미카와의 무사들까지도 반기를 들었다.
 이를 반년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는데, 강화 조건의 실시에서 이에야스는 일찌감치 후년의 뻔뻔한 정치성을 발휘한다. 잇코우 종[一向宗][각주:10] 사원의 안전을 보장했으면서도 막상 반란이 진정되자 잇코우의 절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약자와 맺은 약속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지만, 강자에게는 어디까지나 의리를 지키는 정책이 일찍이도 이때부터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즈음 강자 노부나가에게는 자신의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에게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시켜 충성의 뜻을 나타내었고, 나중에는 그 노부나가가 명령에 따라 자기 아들 노부야스를 죽이기까지 한다.(이 부분은 졸역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처자식을 죽였다?"를 참조 삼아 보시길.)

 이에야스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서면 그의 호방함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1572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2만 군세와 싸운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그런 모습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투는 센고쿠 최강인 코우슈우[甲州]의 군세가 상대. 더구나 상경(京)하려는 대군이었다. 이에야스의 패전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서 싸워 실제로 참패하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해 온 이에야스는 일부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안팎으로 화톳불을 대낮같이 밝히게 하였다. 적에게 공격해 볼 테면 하라는 대담한 전술이었다. 뒤를 쫓아 온 코우슈우의 병사들은 어떤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공격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 본인은 뜨슨 물에 밥을 말아 세 그릇을 비우고는 코를 크게 골며 잤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후 타케다의 맹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는, “토쿠가와 군의 전사자는 모두 우리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죽었다”고 신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야스는 패하기는 했지만, 토우카이 No.1 무장[각주:11]이라고 일컬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전쟁터에서 이에야스가 지휘하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처음엔 지휘봉을 휘두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먹을 쥐고 말 안장 앞부분을 두드리며 공격하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너무도 세게 두드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이에야스의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였다고 한다.

 천하에 대한 야망이 이에야스의 마음 속에서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은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각주:12] 때부터 일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태두로 그 꿈은 잠시 접어 둔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대놓고 정권획득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바친 서약서를 어기고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그들의 자식에게 자신의 양녀를 시집 보냈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여러 다이묘우의 영지를 가증시켜 많은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이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에게 보낸 편지는 실로 179통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을 격파하였고,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확인 사살하여 토쿠가와 정권을 반석에 올려 놓은 것이다.

 말년의 이에야스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50세 전후부터 비만 체형이 되었고 아랫배가 나와 혼자서 훈도시를 조이지 못하여 시녀(侍女)에게 조이게 할 정도였다. 신장은 5척 1~2촌(약 155~158)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굉장히 건강을 생각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매사냥이 이에야스 건강의 원천인 듯 죽을 때까지 매사냥을 행한 횟수는 천 번을 넘는다.

 이에야스의 측실은 10명 이상 있는데 다이묘우 등 고귀한 집안의 딸들을 동경했던 히데요시와는 반대로 이에야스의 측실에는 하층계급의 딸이나 미망인이 많았다. 말년까지 정력은 절륜했던 듯 소위 토쿠가와 어삼가(御三家)[각주:13]의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9남 요시나오[義直]는 59살 때, 키이 가문[紀伊家]의 10남 요리노부[頼宣]는 61살 때, 미토 가문[水戸家]의 11남 요리후사[頼房]는 62살 때의 아들이다. 

 건강을 소중히 한 이에야스는 의사 이상으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화제국방(和剤局方)[각주:14]’이라는 의학서를 항상 옆에 끼고서 스스로 진단하고 약을 조제할 정도였다. ‘만병원(万病圓)’이라 이름 지은 약을 특히 잘 만들었다고 한다.[각주:15]

 1616년 4월. 죽음을 앞둔 이에야스는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와 측근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할 일을 세세히 지시하였다. 유체나 위패의 위치는 물론 닛코우[日光]에 작은 묘소를 세우는 것까지 지시하였다. 죽기 이틀 전에는 죄인(罪人)을 시험 삼아 베게 한 명도(名刀) 미이케덴타[三池典太]를 베갯머리에 가지고 오게 한 뒤, 이불에서 일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허공을 내리쳤다. 그리고 당장 죽을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확실한 말투로, “나는 이 칼을 가지고 자자손손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그 다음 날, 신류우인 본슌[神流院 梵舜]을 불러 “쿠노우[久能山]의 내 묘소에, 내 몸을 서쪽으로 향하게 해서 안치하라”고 했다고 한다. 즉 서방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6] 쪽으로 향하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대로(大老)를 불러, “히데요리[秀頼]를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고 유언한 안쓰러운 모습에 비하면, 실로 냉정한 최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2년생.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적자. 아명 타케치요[竹千代], 이름이 처음엔 모토노부[元信], 다음엔 모토야스[元康]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전사를 기회로 독립하자, 1568년 즈음 미카와[三河]를 평정.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후 미카와,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남반부를 영유. 히데요시[秀吉]와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결전을 피해 화해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7] 후인 1590년 칸토우[関東] 6개 지역에 242만석을 하사 받아 에도 성[江戸城]를 거성(居城)으로 하였다. 1603년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1616년 4월 7일 죽었다. 75세.

  1. 오우슈우[奥州]를 무대로 펼쳐진 전구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삼년의 역[後三年の役]에서 대활약한 미나모토노 하치만타로우 요시이에[源 八幡太郎 義家]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義国]의 첫째가 코우즈케[上野]의 닛타[新田]라는 곳을 영유하면서 닛타라는 성을 썼다. [본문으로]
  2. ...는 에도막부가 편찬한 책(朝野旧聞褒藁)에 따른 말이고, 후세 아직까지 권위를 인정 받는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라는 사람의 논문에 따르면 - 토쿠아미에게 조상을 묻자, 토쿠아미는 "뭐 우리네라고 하는 것들은 동서남북을 떠돌며 여행하는 사람들로, 어디건 상관없이 유랑하는 자이기에 그런 것을 물으면 창피합니다"라고 했다 한다. 당시 무사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떠돌이라는 것이 창피하다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닛타 겐지와 마찬가지로 요시쿠니[義国]가 아시카가 장[足利庄]을 영유하며 그의 둘째 아들 요시야스[義康]가 영유하며 이후 아시카가 씨가 된다. 사족으로 닛타와 아시카가 양 쪽의 선조인 요시쿠니는 아시카가 시키부다이후[足利式部大夫]라고 칭한 것을 보면, 닛타와 아시카가 중 적류는 아시카가 인 듯. [본문으로]
  4. 아시카가 씨 3대 당주 요시우지[義氏]가 카마쿠라 중기 미카와의 키라 장[吉良荘]을 하사 받아, 아시카가의 땅을 물려 준 적남 야스우지[足利 泰氏]를 제외한 서장자 나가우지[吉良 長氏 - 사족으로 이 나가우지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선조이다], 셋째 요시츠구[吉良 義継]에게 부터 시작하는 가계. 키라 장은 야하기가와 강[矢作川]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형인 나가우지는 서쪽을 영유하여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를 칭했다. (동생 요시츠구는 처음엔 동쪽인 토우죠우 키라시[東条吉良氏]가 되나 후에 오우슈우[奥州]의 남조 측을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로 가 오우슈우 키라 씨[奥州吉良氏]의 선조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 초기 잠깐 활약하나 몰락). [본문으로]
  5. 후에 나가우지의 손자 미츠요시[吉良 満義] 때 미츠요시와 그의 적남 미츠사다[吉良 満貞]가 무로마치 막부 초반 혼란기에 각지를 전전하여 비운 사이 본거지인 키라의 동쪽을 미츠사다의 동생 타카요시[吉良 尊義]가 횡령하여 토우죠우 키라 씨[東条吉良氏]가 성립. 후에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이 토우죠우 키라 씨의 5대 당주 키라 요시후지[吉良 義藤]가 동족이며 예전 종가집인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와 싸우다 전사. 그 뒤를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5대 당주 나가치카[松平 長親 - 이에야스의 고조부가 된다]의 셋째 아들 마츠다이라 요시하루[松平 義春]가 잇고 이때부터 토우죠우 마츠다이라 씨[東条松平氏]가 된다. [본문으로]
  6. 센고쿠 시대 키라 씨는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동서 양 가문은 키라 요시야스[吉良 義安] 때 합병. 요시야스의 부인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 또한 요시야스는 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포로가 되어 있던 시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만나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7. 1830~1844년 사이. [본문으로]
  8. 이 말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 光圀]가 한 말을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어떤 놈(이케다 마츠노스케[池田 松之介])가 이에야스의 글을 흉내 낸 것을 또 딴 놈(타카하시 테이슈우[高橋 泥舟])가 각지의 이에야스 사당[東照宮]에 바친 것이라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9.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10. 혼간지[本願寺]의 종파인 쟁토진종(浄土真宗)의 별칭. [본문으로]
  11. 海道一の弓取り. [본문으로]
  12.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살해한 사건. [본문으로]
  13.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본문으로]
  14. 중국 북송(北宋) 휘종 대에 만들어진 중국의 의약서.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죽기 전 이에야스는 이 만병원에 굉장히 의지하였다. 이에야스의 전의(典醫)인 카타야마 소우테츠[片山 宗哲]가 말리자 신경질내며 그를 시나노[信濃]의 타카시마[高島]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까지는 토쿠가와의 부하가 아니었던 가문. [본문으로]
  17.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한 1590년의 전쟁. [본문으로]

야마우치 가즈토요[ 一豊]

1605 9 20일 병사(病死) 61.

 

1546 ~ 1605.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아네가와 강 전투[姉川の戦い] 등을 경험하였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휘하에서 토오토우미[遠江] 카케가와[掛川] 성주(城主)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토사[土佐] 일국을 하사 받아, 토사 번[土佐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카즈토요에게 말을 살 수 있는 돈을 건 낸 부인과의 일화가 유명.

 

 

 




세키가하라[ヶ原]와 카즈토요

 

 [쌈짓돈]으로 남편에게 명마(名馬)를 살 수 있도록 돈을 주었고 그 명마 덕분에 전공을 세워 출세한 일화가 유명해져 내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부인 치요[千代 와카미야 토모오키[若宮 友興]의 딸, 후의 켄쇼우인[見性院]].

 그런 현모양처가 이목을 끌기에 그다지 눈에 띄는 무장이 아니라 여겨지는 야마우치 카즈토요이지만, 수많은 전공을 세워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가로(家老)에 임명되었으며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평정된 다음에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지(要地)인 카케가와 성[掛川] 5만석이 주어졌다.

 

 그렇게 히데요시에게 중용(重用)받은 카즈토요였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이에야스[家康]에게 접근하여,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 비축한 식량뿐만 아니라 아예 카케가와 성을 동군에게 통채로 바쳤다.[각주:1] 이것을 계기로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도 앞다투어 성을 받쳤다고 한다. 더구나 조카인 마사토요[政豊]를 오다와라에 인질로 입성시키고는 출진하였다.

 이런 카즈토요의 행동에는 처 치요의 조언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치요는 오오사카[大坂]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동향과 여러 다이묘우[大名]부인이나 자녀의 정세 등을 기록한 밀서를 남편에게 보내면서, 밀서를 전하는 전령의 입을 통해서 봉투를 열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전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토사[土佐]의 태수(太守)

 

 세키가하라[ヶ原]에서의 전공으로 토사[土佐] 20만석으로 가증(加增)된 카즈토요는 1601년 우라토[浦戸]에 입성했다.

 카즈토요는 영국(領國) 통치의 상징으로써 같은 해 10월에 오오타카사카 성[大高坂 - 후에 코우치 성[高知城]]으로 개명 - 의 축성과 성 밑 마을[城下町]의 경영에 착수했다. 이 배경에는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 체제를 불식(拂拭)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배경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쵸우소카베 유신(遺臣)의 습격을 경계해가면서 축성을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각주:2]. 한편 이 축성과 성 밑 마을 경영은 야마우치 가문을 결속시켜 가신단 편성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코우치 성이 굉장히 실전적인 성곽인 것을 보면 카즈토요는 쵸우소카베 유신의 반란을 염두에 두고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카즈토요는 우라토 반란[浦戸 一揆][각주:3]나 타키야마 반란[一揆]의 평정에 고심했다.

 

 1603 3 25일.

 종사위하(四位下) 토사노카미[土佐守]가 되었지만 영내(領內)에는 여전히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 11월에는 타카이시 사마노스케[高石 左馬助] 등이 타키야마 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타키야마 잇키이다. 야마우치 나이키[ 記], 야마우치 카몬[ 掃部]을 파견하여 이를 간신히 처리했다.

 

 카즈토요는 성 밑 마을의 건설과 함께 도로의 정비, 중신(重臣)을 각지에 배치한 지배 체제의 강화, 검지([각주:4]), 인구 조사 등 농촌 지배, 법제의 시행 등 영국 지배의 확립에 정력을 쏟았다.

 1601년에는 가신의 적극적인 등용, 지배의 조직화를 꾀함과 동시에 영내(領內)순시하며 지형(地形), 풍토, 사람, 산업 등의 실정을 파악하는데 힘썼다.

 

카즈토요의 후계자

 

 카즈토요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자로 동생 야스토요[康豊]의 아들 즉 카즈토요에게는 조카가 되는 쿠니마츠[松]를 양자로 삼았다. 쿠니마츠는 1605 5월에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를 알현했을 때 '타다[]'라는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타다요시[忠義]라 개명했다.[각주:5]

 

 그 이전인 4 17일.

 쿠니마츠(후의 타다요시)가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이에야스의 양녀 쿠마히메[이에야스의 이부제(異父弟) 마츠다이라 사다카츠[松平 定勝]의 둘째 딸)와의 혼약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결혼식은 안타깝게도 카즈토요가 죽은 뒤인 1606 4 17일에 행해졌지만 타다요시는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서임되어 쓰시마노카미[対馬守]에 임관된다.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인척 관계를 맺는 것에 성공한 카즈토요는 야마우치 가문[山内家]의 장래를 걱정했던 만큼 안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안심하여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5개월 뒤인 1605 4 20(21일이라는 설도 있다) 죽었다. 향년 61(60세라는 설도 있음). 너무도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지주막하출혈의 가능성이 있다.

 

 여담이지만 카즈토요의 처가 쌈짓돈을 주어서 명마를 사게 했다는 내조의 공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야마우치 가문 사료 카즈토요공 기록(山内家史料一豊公記)]에는 실려 있지 않다. 당시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실인지 어떤지 판단할 순 없지만,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6]]가 쓴 [번한보(藩翰譜)[각주:7]], 무로 큐우소우[室 鳩巣[각주:8]]가 쓴 [큐우소우 소설(鳩巣小說)], 유아사 죠우잔[ 常山] [죠우산 기담(常山紀談)] 등에는 기록되어 있기에 에도 시대 중기 즈음에는 이 이야기가 유명했을 것이다.

  1.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항상 똑같은 복장을 한 다섯 명의 카게무샤[影武者]와 함께 움직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즈토요가 토사[土佐]로 입국하기 전에 토사[土佐]의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들이 우라토 성의 개성을 거부. 개성 조건으로 그때까지의 주군인 모리치카[盛親]에게 토사[土佐] 반국(半国)의 할양을 요구하다 몰살된 사건. [본문으로]
  4.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5. 상기에 세키가하라 때 인질로 받쳐진 마사토요(政豊)의 형이다. [본문으로]
  6.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7. 에도 막부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 번주[甲府藩主]로 있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 가(家)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8. 에도 시대 중기의 유학자, 8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 吉宗]의 브레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