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토하루[元春]가 양자로 들어간 킷카와 가문[吉川家]은 아키[安芸]에서 보면 산인[山陰]측으로 붙어 있는 츄우고쿠[中国] 지방의 명문가로, 원래 아마고[尼子] 측의 무투파로 모우리 가문[毛利家]을 위협하던 존재였다. 모토나리[元就]는 이 킷카와 가문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 쪽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킷카와 가문은 모토나리의 부인 묘우큐우[妙玖]의 친정이었다. 그리고 모토나리 여동생이 킷카와 모토츠네[吉川 基経]의 부인이 되어 있는 이중으로 엮인 인척이었다. 모토나리는 부인 묘우큐우가 병으로 죽자 킷카와 탈취 공작을 개시. 킷카와 가문의 노신들을 꼬셔 가중을 분열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30살을 넘었을 뿐인 당주 킷카와 오키츠네[吉川 興経]를 억지로 당주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는, 그의 아들 센호우시[千法師]를 제쳐 두고서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모토하루를 후계자에 앉혔다. 거기에 이 가문 강탈을 완벽한 것으로 하기 위해 오키츠네 부자를 살해한 것이다.

 모토하루는 색다른 에피소드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엄청난 추녀를 부인으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모토하루가 결혼할 나이가 되었기에 부친 모토나리는 모토하루에게 중신을 보내어, 결혼에 적당한 여성이 있는가 하고 협의하게 하였다. 그러자 모토하루는, '제 휘하에 있는 쿠마가이 노부나오[熊谷 信直]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답한 것이다.
 사자인 중신은 물론 그 보고를 받은 모토나리도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쿠마가이의 딸은 추녀로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모토나리는 설마 미녀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확인해 보자 추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
 “예부터 여색에 빠져 애써 얻은 명장의 칭호를 더럽힌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모두 미녀의 색향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모토하루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거기에 또 하나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도 데려 가려 하지 않는 딸을 제 부인으로 하면 노부나오는 필시 기뻐할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사력을 다해 활약해 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모토하루의 말대로 노부나오의 딸과 결혼하자 노부나오는 전쟁터에서 굉장한 활약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맹장(猛將)의 이미지를 가진 모토하루 다운 이야기이다.

 처음 전쟁터에 나선 것은 11살 때였다고 한다.
 당시 모우리 가문은 아마고의 대군에 포위당하여 불과 3000여의 병사로 필사의 방어를 하고 있었다. 이때 불과 11살인 모토하루가 출진하고 싶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노신인 이노우에 모토카네[井上 元兼]가 넬슨 홀드까지 해가며 막았지만 모토하루는 결국 칼까지 뽑아들며 자기 뜻을 관철하여 끝내는 모토나리의 허락을 얻었던 것이다.

 모토하루는 주로 산인 지방 공략을 담당하였다.
 특히 아마고 씨와의 사투는 유명하여 아마고의 용장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 鹿之助]가,
 “불구대천의 원수 킷카와 모토하루에게 한번만이라도 칼질 한번 먹이고 싶다”
 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성의 병사들을 굶어 죽이는 장기 포위 공격으로 톳토리 성[鳥取城]을 공략한 히데요시가 5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우키[伯耆] 국경으로 다가왔을 때, 그에 맞서는 모토하루의 병력은 6천에 불과하였다. 부하 장수 셋이 철병하지 않으면 참패를 당한다며 비장한 얼굴을 하고 모토하루에게 진언하러 왔다. 그때 모토하루는 곰 가죽 위에서 하품을 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 명을 보자 ‘우선 마시게’라는 말을 하였다. 곧이어 누워 팔베개를 하고서는 그 상태로 코를 골며 잠에 푹 빠졌다. 세 부하 장수는 이런 호담함에 넋을 잃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물러났다. 모토하루는 이때 배후에 있던 다리를 무너뜨려 퇴로를 끊고서는 히데요시 군을 상대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에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손을 떼고 물러났다고 한다.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는 달리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와 맞지 않았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세상이 되어 억지로 끌려 나가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출진했지만, 종군 중 등에 악성 종양이 생겨 부젠[豊前] 코쿠라 성[小倉城]에서 죽었다.

[깃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1530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차남. 산인[山陰] 공략에 공을 세웠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세상이 되자 그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1584년에 은거하였다. 1586년 죽었다. 57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의 비극은 부친 신겐[信玄]이 너무나도 거대했던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겐이 죽은 뒤 그 대단했던 다케다 가문[武田家]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직 신겐이라는 거인과의 끈으로 이어져 있던 노신(老臣)이나 숙장(宿將)들 사이에 어린 카츠요리[勝頼]를 얕보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겐이 죽은 지 11일째에 카츠요리는 숙장들에게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는 기청문(起請文)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츠요리에게는 초조함이 있었다. 빨리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어서 노신들의 콧대를 꺾고 싶었다.

 신겐은 “3년간 죽음을 숨겨라. 병사를 일으키지 말고 영토를 지켜라”하고 유언을 남겼지만, 카츠요리는 그것을 기다릴 수 없었다.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도발해왔기 때문이다. 타케다 측의 미카와[三河] 전선기지인 나가시노 성[長篠城]을 점거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츠쿠데 성[作手城]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奥平 信昌][각주:1]가 토쿠가와 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격노한 카츠요리는 노부마사의 부인과 동생을 십자가에 메달아 옆구리를 찔러 죽였다.

 1575년. 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가 나가시노 성주가 되었다. 이제 카츠요리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노신들의 간언(諫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츠요리가 정병 1만5천을 이끌고 나가시노를 향해서 코우후[甲府]를 출발한 것이 이 해의 4월 5일이었다.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타케다 군은 나가시노 성(城)을 포위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그러던 중 오다-토쿠가와의 원군이 도착. 결전의 장소는 나가시노 성 밖의 시타라가하라[設楽原]로 옮겨졌다.

 노신들은 주저하였다.
 “결전을 피하고 우선은 병사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카츠요리는 듣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오다-토쿠가와와의 결전을 정했다.

 1575년 5월 21일.
 이날 나가시노 성 밖의 시다라가하라에서 펼쳐진 전투는 일본역사상 획기적인 전투로써 너무나도 유명하다. 정예를 자랑하는 카이[甲斐]의 기마대가 출격했다. 아침안개 속에서 중앙대, 우익의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부대에서 함성이 일었다.

 선두가 오다-토쿠가와의 마방책(馬防柵)을 향하고 돌입하여 단번에 유린하고자 했던 그 순간 엄청난 굉음의 총성이 일었다.
 오다 군의 일제사격이었다. 일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카이[甲斐]의 인마(人馬)가 연달아 쓰러졌다. 보통이라면 이런 후 적과 아군이 뒤섞여 백병전으로 이어질 터였다. 그런 때야말로 카이의 기마 병단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최초의 사격으로 상처를 입지 않은 기마대가 개의치 않고 돌진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또다시 천 정의 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아무리 용맹하다 하는 타케다 기마대도 이 새로운 전법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은 노부나가가 고안한 전법이었다. 노부나가는 아시가루[足軽]의 철포집단 3천명을 3대로 나누어, 천 정씩 교대하며 쉴 틈 없이 일제사격을 반복하게 한 것이다. 당시 유효 사정거리는 기껏해야 100미터였는데, 노부나가는 카이[甲斐]의 군세를 마방책 앞으로 충분히 끌어들인 다음에 섬멸한 것이다.[각주:2]

 타케다 군은 도망. 사상자 1만여에 더해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 바바 노부후사 등 유명한 무장들도 다수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물러났다. 그야말로 멸망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전이었다.

 1582년에 오다 군의 진공이 시작되자 타케다에 속해있었던 장수들의 배반이 이어졌다. 특히 키소 요시마사[木曽 義昌]의 모반은 타케다 가문 붕괴에 박차를 가했다. 요시마사는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두고 있는 소위 친족이었다. 그 외에도 타케다의 앞날이 어둡다 보고 적에게 달려가는 가신들이 속출하였다.

 결국 타케다 가문의 본거지 신푸 성[新府城] 최후의 날이 왔다.
 성에서 도망치는 초라한 카츠요리의 모습을 당시의 기록자는, [산길을 맨발로 걸었기에 발은 붉게 물드니, 도망자의 모습 애처롭도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으니….]라고 전하고 있다.

 1582년 3월 11일.
 카츠요리 일행은 불과 100여명. 무사는 그 중 43명이 되어 있었다. 후에후키가와[笛吹川] 천을 거슬러 올라 최후의 거점으로 정해두었던 텐모쿠잔[天目山] 산으로 향했다. 산허리의 협곡에 있는 마을 타노[田野]까지 갔지만, 여기도 안주의 땅은 아니었다. 다음날 수천의 오다 군이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좁은 계곡은 눈뜰 수 없을 정도의 참상이 되었다.

 이때 츠치야 소우조우 마사츠네[土屋 惣蔵 昌恒]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겨, 외길을 타고 공격해 오는 적병을 활로 쏘아 수십 명을 쓰러뜨렸으며, 다음에 칼을 쥐고 싸워 '소우조우 한 손 베기[惣蔵片手斬り][각주:3]'라는 용명(勇名)을 후세에 남겼다. 코미야마[小宮山], 아키야마[秋山] 등의 용사들도 달려드는 군세 속에서 칼춤을 추며 수십 명을 베었다.

 전멸은 이제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카츠요리의 아들 노부카츠[信勝]도 십문자[十文字] 창을 들고 눈부신 분전을 펼쳤지만 허벅지에 총탄을 맞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 일족인 승려(僧侶)와 서로를 찌르는 식으로 자결했다고 한다.

 일족의 최후였다. 카츠요리는 부인[각주:4]에게 살아서 도망칠 것을 권했지만 부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렸다. 19살의 그녀는 법화경(法華經)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난 후 사세구(辭世句)를 읊은 뒤 자신의 가슴에 몸칼을 찔러 자결했다.

 카츠요리는 자결하는 여성 16명의 자살을 일행의 장로(長老)가 도와주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카츠요리는 배를 가르고 자결했다.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
1546년생. 신겐[信玄]의 넷째 아들로 1573년에 가독(家督)을 이었다. 미노[美濃]에 침공하였고,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 등에도 진출하지만, 나가시노[長篠]의 패전 이후 회복하지 못하였고,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오다 군[織田軍]과 싸우다 죽었다. 37세였다.

  1. 당시는 아직 사다마사[貞昌].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노부나가[信長]에게 이름자 하나를 하사 받은 뒤에 ‘노부마사[信昌]’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상의 이야기는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신쵸우키[信長記]에서 거론된 픽션으로 지금은 의문시되고 있다. [본문으로]
  3. 좁은 외길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덩굴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만 싸웠다고 해서 붙은 이름, ‘한 손 천명 베기[片手千人切り]’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4.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의 6번째 딸. [본문으로]

<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영어판 >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부하 장수로 유명한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는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그는 용모가 특이했다고 한다. 거기에 에비스(えびす(모습))다이고쿠텐((모습))이 입고 있는듯한 카미코로모(紙衣 두꺼운 종이에 과일인 감의 즙을 발라 만든 천)로 된 하오리(羽織)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남과 다른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듯 하다[각주:1]. 품행은 특이했지만 붓글씨는 상당히 뛰어났다고 한다.


 주가(主家)인 타케다(武田) 가문과는 대단히 짙은 혈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 타케다 가문의 선조 노부타케(信武[각주:2])의 넷째 아들인 시로우 요시타케( 義武)카이(甲斐)아나야마(穴山)를 영지(領地)로 삼아서는 아나야마 씨()를 칭했다고 한다. 그것뿐이라면 동족(同族)에 지나지 않겠지만 바이세츠의 모친은 신겐의 누나이며, 신겐의 딸 켄쇼우인(見性院)은 그의 부인인 것이다. 신겐은 외삼촌이며 또한 장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나 짙은 혈연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문을 배신하고 적 측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간 것이다.


 신겐이 죽고 젊은 카츠요리()가 타케다 가문의 당주가 되고 난 바로 다음부터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문을 배신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바이세츠는 당시 스루가(駿河) 에지리(江尻) 성주[각주:3],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하마마츠(浜松)성(城)과는 거리적으로도 가까워, 카이(甲斐)의 산골과는 달리 오다(織田)()나 토쿠가와 씨에 관한 새롭고 자세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던 장소에 있었다.


 바이세츠가 일찍부터 배신을 마음에 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1575 5월 나가시노(長篠) 전투 때의 일이다. 바이세츠는 아군의 질 것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먼저 예상하고는 전쟁터에서 가장 먼저 이탈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정강(精剛)을 자랑하던 코우슈우 군단(甲州軍團)은 근대전법의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신겐 때부터 무용을 자랑하던 많은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1581.

 바이세츠는 카츠요리에게 진언하여 니라사키(韮崎)신푸(府)성(城)을 쌓게 만들었다. 코우후(甲府)에서 이곳으로 타케다의 본거지를 옮긴 것인데, [사람은 성벽, 사람은 성]이라 말하며 성()이라는 것을 쌓지 않았던 신겐 시대를 뒤돌아볼 것도 없이, 이 축성이야말로 타케다 가문에 말기적 증상이 도래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이 다음 해(1582), 타케다의 유력한 부하장수인 키소 요시마사( 義昌)가 노부나가에게 달려갔다. 카츠요리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둔 일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직후 바이세츠도 배신하였다. 그는 배신에 앞서 신푸 성()에 인질로 보냈던 처자식을 빼돌리는 빈틈없음도 보여주었다. 불쌍하게도 키소 요시마사의 모친과 여동생은 신푸 성()의 정문으로 끌려 나와 십자가에 꺼꾸로 매달린 채 옆구리를 창으로 꿰뚫려 죽었다. 신푸 성()의 인질 천 여명 중 900명이 배신자들의 가족이었다고 한다.


 바이세츠가 배반한 이유는 타케다에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명문 타케다 가()의 혈통을 끊어지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바이세츠는 카츠요리의 자식 노부카츠(信勝)보다 자신의 자식인 카츠치요(勝千代) 쪽이 타케다의 혈통이라는 점에서 더 짙다고 생각한 듯하다. 언젠가 카츠요리 계통은 전쟁 속에서 끊기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계통의 존속을 꾀하고자 고심한 것은 아닐까? 카츠치요의 할머니는 신겐의 누나이며, 모친은 신겐의 딸인 것이다.


 어쨌든 이에야스의 알선으로 오다의 군문(軍門)에 항복한 바이세츠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에 일본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과 조우하게 된다.

 혼노우(本能)사(寺) 이었다. 이때 바이세츠는 영지(領地)를 안도해준 것에 대한 사례인사차 아즈치(安土)의 오다 노부나가를 만난 후 사카이(堺)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도 함께였다. 거기에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변보가 전해진 것이다.

 급히 본거지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가(伊賀)를 지나려 했지만 이때 어째서인지 이에야스와는 다른 길을 취한 바이세츠는 그 도중에 쿠사치(草地())의 나루터에서 농민반란군(一揆)의 습격을 받아 어이없이 죽음을 당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어렸을 때의 이름(幼名)은 카츠치요(勝千代). 이름은 노부키미(信君). 겐바노카미(玄蕃頭), 므츠노카미(陸奥守)를 칭했으며, 1580년 머리를 밀고 불문(佛門)에 들어가 바이세츠사이(梅雪斎)라는 호를 칭했다. 1582년 타케다 멸망 시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붙어 소유하고 있던 영지(領地)를 인정 받지만 혼노우(本能)() 변 후 귀국 도중 농민반란군(一揆)에게 습격 당하여 살해당했다.

  1. 당시 무가의 사람이나 하이쿠(俳句 - 일본의 시)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행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카이 타케다 10대 당주. 참고로 신겐은 19대 당주. [본문으로]
  3. 정확히는 행정과 사법, 군정을 위임받은 죠우다이(城代)였다. [본문으로]

 사카이 가문[酒井家]은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혈연관계인 명문가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로부터 거슬러 올라가길 7~8대 전의 일이다. ‘토쿠아미[徳阿弥]’라는 이름의
행각승(行脚僧)이 미카와[三河] 서쪽 사카이 향[坂井鄕]에 흘러 들어와 마을 촌장[庄屋]의 신세를 지다 어느덧 그 집의 사위가 되어 아이를 만들었다. 이 아이가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각주:1].

 이 토쿠아미가 사카이 향을 떠나, 이번엔 역시 미카와[三河]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 촌장[庄屋]의 사위가 되어 역시 아이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이에야스의 조상이라 전해지고 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사카이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후에 토쿠가와 가문)은 밀접한 관계였다. 타다츠구의 부인도 이에야스의 숙모[각주:2]이다.

 토쿠가와 가문 후다이[譜代] 중에서도 최상급의 문벌이었다. 타다츠구 역시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부터 가로(家老)의 지위로 내정을 총괄하고, 전투에 나서면 선봉을 담당하는 등 중책을 맡았다.

 1564년. 이에야스는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3]를 평정하며 동부 미카와로 진출,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중요거점 요시다 성[吉田城]을 함락시켰다. 타다츠구의 노력으로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타다츠구는 이 공으로 인해 미카와 동부의 지배를 일임 받으며 요시다 성주가 되었다.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 중에서는 처음으로 성주에 임명된 것이다[각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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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7년에 행해진 가신단 편성을 보아도, 타다츠구는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와 더불어 '선봉군 대장[惣先手侍大将]'이라는 지위[각주:5]로, '이에야스 직속군 선봉대장[旗本先手侍大将]'인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기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보다 상위에 있었다.[각주:6]

 그랬던 것이 –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関東]의 주인이 되었을 때 지위가 역전되었다. 타다츠구는 이 시기 이미 은거하여 가독(家督)을 아들인 이에츠구[家次]에게 물려준 상태였지만, 사카이 가문은 시모우사[下総] 우스이[臼井]에 3만석밖에 하사 받지 못했던 것이다. 타다츠구보다도 아래에 있던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는 12만석.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각각 10만석에 봉해졌다. 타다츠구는 참을 수 없었다. 명문가인 사카이 가문이 신참인 이이 가문[井伊家]보다 아래에 놓인 것이다. 타다츠구는 마음을 정하고 이에야스를 만나 자기 자식 이에츠구에게 가증(加增)을 부탁하였다.
 “너도 니 자식이 소중한가?”
 뜬금없는 이에야스의 말이었다. 처음에 타다츠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머리를 들자, 이에야스는 꾸짖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타다츠구는 그제서야 그 뜻을 알았다.
 ‘그때를 말하는 것이다’

 1579년.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에 따라 살해 당한 사건을 말이다. 그때 노부나가에게 그 둘의 살해를 직접 명령 받은 것이 다름아닌 이 타다츠구였던 것이다. 어째서 노부나가에게 노부야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조명(助命)을 탄원하지 않았던 것인가? – 이에야스는 그 통한을… 여태껏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타다츠구는 다음에 이을 말을 찾지 못하였다.

 이 사카이 타다츠구에게는 의외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새우잡기[海老すくい]'라는 춤을 추게 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1575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싸운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전날 밤. 토쿠가와 진영의 사기는 가라앉아있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죽어 현재 없다고는 하여도, 상대는 이름 높은 코우슈우 군단[甲州軍團]이었다. 너무도 강적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무언가 떠올려 타다츠구를 불렀다.
 “’새우잡기 춤’을 추어 주지 않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타다츠구의 춤이 시작되자 그 절묘한 손동작, 몸동작에 모두 순식간에 빠져들어, 그 자리는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걸로 코우슈우의 병사들에 대한 공포심은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칸토우[関東]의 패자(覇者)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의 주연(酒宴)에서도 이것을 추어, 너무나도 뛰어남에 우지마사는 사다무네[貞宗]의 명도(名刀)를 타다츠구에게 주었다 한다.

[사카이 다다쓰구(酒井 忠次)]
1527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사에몬노죠우 타다치카[左衛門尉 忠親]’.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각주:7]] 중 한 명. 1586년 히데요시[秀吉]에게 재경료(在京料[각주:8]) 천석을 얻고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 취임. 1588년에 은거, 1596년에 죽었다.

  1. 이때 아들을 둘 낳아, 첫째의 가문이 대대로 사에몬노죠우[左衛門尉]를 관도명(官途名)으로 하였기에 ‘사에몬노죠 가문[左衛門尉家]’이라고 하였으며, 둘째의 가문은 우타노카미[雅楽頭]를 관도명으로 하였기에 ‘우타노카미 가문[雅楽頭家]라고 한다. 타다츠구는 '사에몬노죠 가문' 출신. [본문으로]
  2. 이에야스의 조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로, 이에야스의 부친 히로타다[広忠]의 배다른 여동생. [본문으로]
  3.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4. 정확히는 사카이 가문 중 우타노카미 가문[雅楽頭家] 출신인 사카이 마사치카[酒井 正親]가 1561년 니시오 성[西尾城]의 성주에 임명 받은 것이 첫 번째. 타다츠구가 요시다 성주에 임명 받은 것은 1564년. [본문으로]
  5. 미카와[三河]를 동서로 나누어 서부의 이시카와 카즈마사, 동부의 사카이 타다츠구가 각각 휘하에 속하는 마츠다이라 일족, 호족 등을 통솔하였다. [본문으로]
  6. 한국 국군의 편제로 비교하자면, 타다츠구는 군단장, 타다카츠나 야스마사는 대대장급. [본문으로]
  7.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등 네 명을 일컬음. [본문으로]
  8. 쿄우토[京都]에 머물면서 생활하라고 주는 땅. [본문으로]
  적자 노부야스[信康]의 죽음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가 말년이 되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론할 정도로 슬픈 사건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입으로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령했던 것이다.

 미카와(三河) 지방의 사람들도,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지"

 라 하며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노부야스를 자해(自害)로 몰아넣은 것은 역사상 유명한 '츠키야마도노 사건[築山殿事件]'에 의해서였다. 진상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1579 7 16. 이 날 이에야스는 가신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를 오우미[近江] 아즈치(安土)성(城)으로 파견하였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좋은 말을 헌상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노부나가는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노부야스의 자해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노부야스가 생모 츠키야마도노와 함께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측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노부야스의 부인이며 노부나가의 딸인 토쿠히메[徳姫]가 은밀히 그에 대한 것을 부친 노부나가에게 일러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시대에 결혼한 부인으로, 그녀는 출신이 이마가와의 일족 세키구치 교우부노쇼우 치카나가[口 刑部少輔 親永]의 딸이었기에 콧대가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어떤 사서에서는 츠키야마도노를 히스테리성의 여성이었다고 하며, 이에야스는 그 엄청난 질투심에 넌더리가 나 토오토우미[遠江] 하마마츠[浜松]로 거성(居城)을 옮겼을 때, 데려가지 않고 노부야스의 오카자키 성[岡崎城]에 남겨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이[甲斐]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내통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쩌다가 츠키야마도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카이[甲斐]에서 온 중국인 의사에게 진찰받던 중 그와 관계를 맺었고, 나중에는 이 의사를 매개로 해서는 타케다 카츠요리와 내통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노부나가-이에야스를 물리칠 방도를 카츠요리와 함께 꾀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신빙성은 거의 없다.

 

 진상은 노부나가가 노부야스를 두려워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노부나가는 노부야스라는 존재가 장래 오다 가문에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느낀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와 자신의 적자 노부타다[信忠]를 비교해 보면,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노부야사가 월등했다. 오다 가문은 이 노부야스에게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의 싹은 일찌감치 뽑아 두는 것이 좋다 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는 17살 때 이미 그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1575년 토쿠가와 군이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타케다 카츠요리의 군과 싸웠을 때의 일이다.

 카츠요리의 대군을 피하여 퇴각을 하려고 하였을 때, 노부야스는 나서서 신가리[殿]를 맡았다. 아군 퇴각의 무사안전을 위해 최후미에 위치하며 적의 추격을 막는 임무로, 역전의 무장이라도 극히 어렵다는 큰 임무이다.

 더구나 이때 타케다 군은 10만의 대군이었다[각주:1]. 하지만 노부야스의 말은 기특했다.

 장래에 있을 큰일을 위해서 지금은 연습을 해 두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어린 나이로 타케다의 대군과 대치하며, 적이 오오이가와 강[大井川]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후에 세키가하라[ヶ原] 결전 시, 이에야스는 정말 나이 먹어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니. 아들이 있었다면 이렇게 피곤할 것도 없었을 텐데하고 용감한 노부야스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부야스는 또한 육친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바로 다음 동생인 오기마루[於義丸-후에 히데야스[秀康]]가 정식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노부야스의 힘이 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오기마루에 대한 애정이 없어 좀처럼 자신의 아들로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노부야스는 직접 오카자키 성[岡崎城]으로 3살 먹은 오기마루를 데려가 여러 노력을 기울여 이에야스와 만나게 하였다. 이에야스도 노부야스의 열의에 져, 오기마루를 자신의 아이라고 승인했던 것이다.

 

 그러한 반면 노부야스에게는 포학한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

 춤을 좋아하여 자주 그런 무리들을 초대하였는데, 어느 날 옷이 맘에 들지 않고 더구나 춤 실력도 떨어지는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노부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아이를 활로 쏴서 죽여버렸다고 한다.

 매사냥의 결과가 신통찮은 것을 만난 승려 탓으로 하여, 그 승려의 목에 끈을 묶어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다가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각주:2]


 1579 8 29.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우선 츠키야마도노를 토오토우미[遠江] 토미츠카[塚]에서 살해했다.

 이에야스로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명령에 거역하는 것은 곧바로 토쿠가와 가문의 멸망을 의미했다. 자신의 힘은 아직 노부나가에 비해 미약했기에 자기 가문 보전을 위해서는 부인과 적자의 목숨도 뺏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해의 9 15.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명하는 이에야스의 사자가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 성[二俣城]에 도착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天方 山城)와 핫토리 한조우(服部 半) 두 사람이었다.

 노부야스는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확실히 말했다.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키려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부친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시 가부장 권력의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노부야스는 조용히 핫토리 한조우에게 자신의 카이샤쿠[介錯][각주:3]를 명했다.

 한조우는 흘러 넘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어 그 임무를 맡을 수 없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로 대신하였다.

 카이샤쿠의 칼이 번뜩이며, 여기에 21살의 생명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 信康)]

1559이에야스[家康]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 모친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지만,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 독립함에 따라,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인질이 된다. 1567년 오카자키[岡崎]로 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결혼하고 오카자키 성주가 되지만, 노부나가에게 자해를 명령 받는다.

이 글은 거의 전체가 사실과 다른 글입니다. 필히 밑에 트랙백과 함께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타케다 가문의 동원력은 무리를 해도 3만정도로 10만 가까이 동원하기에는 무리다. [본문으로]
  2. 승려는 불살이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에, 승려 주변에 있는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사냥 결과가 신통치 않다며 툴툴대는 노부야스를 부하가 달래려고 말했다가 지나가던 승려가 그 짜증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배를 가르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어야 했기에, 믿을 만한 사람에 더해 단번에 목을 자를 수 있는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 맡았다. [본문으로]